2011.04.26손석춘/새사연 이사장

삼성, 참 소중한 기업이다. 진정이다. 삼성은 대한민국 경제가 자랑하는 ‘브랜드’ 아닌가. 굳이 삼성을 ‘소중한 기업’이라고 들머리에 못박아두는 이유는 순전히 윤똑똑이들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삼성이나 이건희 회장을 조금이라도 비판할라치면 대뜸 ‘콤플렉스’ 아니냐고 뱁새눈을 건넨다. 더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철없는 짓이라고 도끼눈 부라린다. 어김없이 ‘친북좌파’ 또는 ‘수구좌파’라며 살천스레 딱지를 붙이는 마녀사냥꾼도 활개 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전혀 아니다. 삼성을 비판하는 이유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삼성의 ‘황제’ 이건희를 비판하는 까닭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삼성이어서다. 실제로 한국 경제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국민기업’이라 할 만큼 높다. 삼성 때문에 대한민국이 먹고 산다는 말이 무람없이 나올 정도다. 지나친 과장이지만 삼성의 비중을 과소평가할 이유는 전혀 없다.

대한민국 대표기업 삼성의 천박성

문제의 핵심은 대한민국 대표기업 삼성이 ‘주머니 속 송곳’처럼 드러내는 천박성이다. 물론, 젊은 세대가 삼성그룹에 들어가려고 줄 서 있는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삼성 임직원의 평균 임금이 높다는 사실도, 세밑이 오면 보란 듯이 파격적으로 성과급을 지급한다는 사실도, 등기이사들이 받는 천문학적 연봉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결코 아니다. 삼성의 피라미드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최근 열흘 사이에 곰비임비 불거졌다. 저마다 한국 언론을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신문들이 모르쇠 했지만 하나하나가 일과성으로 넘겨선 안 될 사건이다.  

먼저 삼성전자 엔지니어가 투신자살 97일 만인 4월17일에 장례를 치른 사건이다. 설렘으로 입사한 스물 네 살의 ‘신입사원’은 1년도 안되어 화학물질로 인한 피부병에 걸리고 긴 시간 노동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우울증으로 병가 끝에 다시 현장에 복귀한 날, 기숙사에서 몸을 던졌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는데도 방치된 사실이 드러났다. 항의하는 유족에게 경비들은 폭력까지 휘둘렀다. 유족과 민주시민들이 끈기 있게 맞서자 삼성은 95일 만에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을 약속했다. 그 과정에서 신문과 방송은 어떤 구실을 했는가. 자문해볼 일이다.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는 ‘반올림’은 4월 7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반올림에 따르면 제보 받은 120명 가운데 백혈병을 비롯해 림프 조혈계 암 환자가 56명에 이른다. 25명은 이미 숨졌다. 뇌종양, 유방암, 피부암도 있다. 삼성전자가 가장 많다. 반올림은 반도체 칩을 만드는 과정에서 유해 가스와 물질에 직접 노출된 탓이라고 분석했다. 기자회견에서 충격적 진실을 밝혔지만 대다수 기자들은 외면했다. 

삼성에스디아이 직원들이 해고노동자를 미행하다 덜미 잡힌 사건까지 일어났다. 4월 13일 깊은 밤중에 일어난 일이다. 미행하다 되레 꼬리가 잡힌 ‘직원’은 항의하는 해고 노동자를 차에 매달고 도주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다행히 이를 목격한 택시노동자가 신고해 끔찍한 일은 막았다. 경찰에 연행된 직원은 ‘신조직문화사업국’ 소속이란다. 해고노동자 사이에서 노조설립을 감시하는 부서로 알려져 있다. 대체 저들은 대한민국을 어떤 나라로 생각하는 걸까, 궁금할 정도다. 더 생게망게한 일이 있다. 그 명백한 불법 행위마저 자칭 ‘정론지’들은 눈감았다. 

그래서다. 묻고 싶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과연 그래도 좋은가. 언론인이라면 객관적으로 짚어보라. 대체 어떤 기업이 삼성처럼 사회적 문제를 곰비임비 일으키는가? 열흘 사이에 일어난 세 사건이 모두 시들방귀로 여길 사안인가? 신문과 방송이 보도하지 않거나 축소했기에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지 못할 뿐이다.

더 늦기 전에 언론은  제구실해야

삼성에서 불거지는 문제 앞에서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며 짐짓 초연할 일이 아니다. 생산 현장에 발암 물질이 나오거나 노동조합 결성을 가로막는 일은 한국 민주주의 수준과 곧장 직결된다. 그 말은 보수언론이나 진보언론의 시각에 따라 달리 볼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윤똑똑이들 선동처럼 수구좌파의 ‘삼성 죽이기’는 더욱 아니다. 정반대다. 더 늦기 전에 삼성을 살리자는 절박한 제안이다. 

무릇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게 마련이다. 긴 인류의 역사가 ‘재스민 혁명’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입증해주지 않았던가. 대한민국에서 무장 커져가는 삼성의 권력, 삼성 내부에서 황제 이건희가 만끽하고 있는 권력은 절대적이다.

그래서다.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대로 간다면, 언론이 저 섬뜩한 천박성을 내내 모르쇠 한다면, 삼성과 황제 이건희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하다. 언제나 삼성을 두남두는 언론에 진정으로 호소한다. 더 늦기 전에 삼성을 살려야 한다. 삼성, 참 소중한 기업 아닌가.

이 글은 '미디어 오늘'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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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6손석춘/새사연 이사장

이 글을 이건희 회장에게 건넬 용기 있는 인재가 과연 삼성에 있을까? 칼럼을 쓰며 슬그머니 묻고 싶다. 삼성과 이건희를 시나브로 망치는 사람들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가령 삼성과 직접적 연관성을 맺고 있는 <중앙일보>를 보라. 초과이익공유제 소동 때와 똑같이 다시 이건희 회장의 발언을 사설 제목으로 삼았다. “못이 튀어나오면 때리려는 원리”라는 사설 제목(2011년 4월23일자)이 그렇다. 이건희 회장이 보기엔 <중앙일보> 논설 책임자가 일을 참 잘한다며 흐뭇했을 성 싶다.

하지만 과연 저널리즘으로 보아도 그럴까. 아니다. 비단 <중앙일보>만이 아니다. 어떤 언론인은 애플의 소송제기에 대해 이건희 회장이 던진 “못이 나오면 때리려는 원리”라는 발언을 두고 “짧으면서 핵심을 찌르는 이건희 식 화법은 마치 화두를 던지듯 빠르고 날카롭다”고 썼다. 민망하다.

“못이 튀어나오면 때리려는 원리” 이건희 발언 찬양

어떤가. “못이 나오면 때리려는 원리”라는 발언이 정말 탁월한 화법일까? 심지어 <중앙일보>가 사설 제목으로 올릴 정도일까?
상식으로 짚어보자. 그 말은 날카로운 화법이긴커녕 대단히 잘못된 비유다. 스스로 삐죽 나온 못을 자임하고 있지 않은가. 굳이 냉철까지 요구하지 않는다. 못이 나오면 때려야 한다. 그래야 모두 안전하다. 나온 못은 잘못 아닌가.
물론, 나는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의 화법을 두고 시비를 걸 생각은 전혀 없다. 이건희는 화법 강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참모들과 들꾀는 언론인들이다. <중앙일보> 사설은 이건희의 잘못된 비유를 사설 제목으로 삼아 짐짓 위엄을 떤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활약이 돋보이자 사방에서 때리기가 시작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에 대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못이 튀어나오면 때리려는 원리’라며 ‘전 세계에서 우리에 대한 견제가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앞으로 한국 기업이 잘하면 잘할수록 시샘과 견제는 더욱 심해질 게 분명하다.”

사설 논리 전개로 보아도 ‘튀어나온 못’의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튀어나온 못을 때리는 것은 시샘이나 견제가 아니다. 응당 해야 할 옳은 일이다. 회장 이건희에게 아첨을 늘어놓다 보니 그 잘못된 비유가, 그 품격없는 화법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특별히 할 일 없어서 집무실에 처음 나온 그룹 총수

더 큰 문제는 단순한 화법에 그치지 않는다. 삼성전자 집무실에서 처음 나온 그에게 기자들이 출근한 이유를 묻자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왔다”고 답했단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할 일이 없어 집무실에 나왔다? 묻고 싶다. 그 말살에 쇠살을 비판하는 언론은 왜 없는가? 삼성전자의 가장 기본이 되는 부품을 생산하는 현장에서 애먼 젊은이들이 곰비임비 숨져 원혼이 되어가는 데도 그 ‘총수’는 “할 일이 없어” 집무실에 처음 나왔단다.

그럼에도 한국 언론은 그의 화법을 찬양한다. 사설 제목으로 삼는다. 그들은 누구인가? 명토박아둔다. 삼성을, 이건희를 망치는 사람들이다.
새삼 궁금하지 않은가. 이 글을 이건희 회장에게 건넬 용기 있는 인재가 과연 삼성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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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보고서2011.03.28 15:41
2011.03.28     손석춘/새사연 이사장

정치권력과 신문권력이 서로 부추기며 젊은 세대를 호명하고 있습니다. 처음 그 말을 만든 <중앙일보>는 신문 1면에 다음과 같이 P세대를 정의했습니다.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실체를 인식하고, 애국심(Patriotism)을 발휘하고 있는 20대 젊은 층을 지칭하는 것으로 중앙일보가 만든 말이다. 애국적인 태도 외에 진보·보수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실용(Pragmatism)적인 자세를 보인다. ‘힘이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Power n Peace)는 신념을 지녔고 국방의 의무를 유쾌하게(Pleasant) 받아들이며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개성(Personality)세대다.”


물론, 어떤 신문이든 말을 만들 ‘자유’가 있겠지요. 실제로 너무 많은 말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요. 문제는 그 말이 얼마나 보편타당성을 지니는가에 있습니다. 보편성도 타당성도 없으면서 어느 신문사가 자신이 만든 말을 여론으로 만들어간다면 ‘직권 남용’ 아닐까요.

 

2003년과 2011년의 P세대와 삼성

 

P세대 이야기는 처음이 아닙니다. <중앙일보> 못지않게 삼성과 깊은 관련이 있는 제일기획이 이미 2003년에 젊은 세대에게 쓴 말입니다. 당시 P는 참여(participation), 열정(passion), 힘(potential power), 패러다임 변화(paradigm-shifter)를 뜻했습니다. 알다시피 그 시기는 월드컵의 ‘붉은 악마’ 열기가 뜨거웠지요. 노무현 바람이 불어 ‘참여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성이 정치기류에 따라 젊은 세대를 호명하는 게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굳이 기회주의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겠지요.


기실 우리는 젊은 세대를 겨냥한 숱한 호명을 들어왔습니다. 한결 같이 이윤을 목적으로 한 자본의 논리나 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의도가 짙었지요. 2003년의 P세대와 2011년의 P세대가 대표적 보기입니다.


아마도 정치적 판단이었겠지요. 이명박 대통령까지 적극 가세했더군요. 대통령은 천안함 사건 1주기를 맞아 “P세대라고 하고 G20세대라고도 하는 젊은이들이 매우 합리적으로 또 진정으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며 “이들을 보면 대한민국의 희망을 본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떤가요. 아직 진실이 온새미로 규명되지 못한 사건을 두고 저들이 몰아가는 여론은 너무 얄팍하지 않은가요? 과연 무엇이 진정한 ‘애국’이고, ‘평화’를 지키는 길이고, ‘실용주의’인지 ‘유쾌한 개성’을 지닌 젊은 세대에게 새삼 말 건네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이 블로그를 통해 강조해온 말이니까요.


다만 2030세대에게 R세대라는 말을 다시 상기해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세대 규정과 달리 R세대라는 말은 자본이나 권력의 호명이 아니지요. 2000년이 열릴 때 젊은 세대 스스로 그렇게 호명했습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판에 뛰어들어(rush) 저항하고(resistance) 마침내 혁명(revolution)을 이루겠다”는 그 다짐이 11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저는 그해 오월 을 인터넷에 연재하기 시작했지요. 지금 은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뉴스레터로 매주 발행되고 있습니다(http://www.saesayon.org).


2030 스스로 규정한 세대 이름―R세대

 

저는 R세대가 단순히 2000년 시점에 머물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2002년 월드컵 열기 때 붉은 물결을 두고 자본 쪽에서 R세대라는 호명이 나온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현실에 뛰어들어 비판하고 변화를 일궈내는 R세대의 정신은 젊음의 영원한 특권이자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P세대와 R세대의 호명 가운데 실제 젊은 세대는 무엇을 선택할까요? P세대 뒤에는 막강한 삼성자본이 있습니다. 젊은 세대 스스로 밝힌 R세대는 그렇지 않지요. P세대와 R세대 사이에 PR할 수 있는 힘의 차이가 큽니다.


저는 PR의 차이를 젊은 세대가 벅벅이 넘어서리라 믿습니다. 2000년 그때처럼 정치판은 부패하고 무능하기 때문이지요. 썩고 구린 정치로 젊은 세대가 살아갈 객관적 조건은 무장 열악해져가고 있습니다.


2000년 R세대는 2002년의 촛불, 2008년의 촛불로 곰비임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미래는 열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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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 03 / 23      정태인/새사연 원장

참척(慘慽)이라는 게 있다.


소설가 박완서는 그 고통을 이렇게 토로했다. “자식을 앞세우고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처넣는 에미를 생각하니 징그러워서 토할 것만 같았다.” 전쟁 영웅 이순신 장군도 다를 바 없었다. “하늘이 이다지도 어질지 못한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것은 이치가 잘못된 것이다.…내가 죄를 지어서 그 화가 네 몸에까지 미친 것이냐?” 전 세계를 뒤흔든 서양의 천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은 휑하고 황폐해졌다. 아이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이 집의 생명이고 영혼이었다.” “내 아이의 죽음은 나를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나는 마치 어제 일이었던 것처럼 예리하게 아픔을 느낀다. 내 불쌍한 아내는 완전히 무너졌다.”(카를 마르크스)


여기 또 하나의 참척이 있다. 지난 월요일 김명복씨는 아이를 냉동고에 둔 채 49재를 맞았다. 잊어야만 할 고통을 외려 부여안고 있다. 무엇이 그를 이리도 모질게 만들었는가.

 

삼성전자 근로자 2조 2교대에 14~16시간씩 근무

 

키가 186㎝나 되는 스물여섯의 고 김주현씨는 1월11일 6시44분 흑빛 새벽에 자살했다. 그가 근무하던 삼성전자 탕정기숙사 13층에서 떨어졌다. 그의 죽음은 예고된 것이었다. 우울증으로 2개월의 병가 뒤 복귀한 바로 그날이었다. 주치의는 5개월의 안정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회사는 병가 휴직이 최대 2개월이라고 대답했다. 새벽 6시14분, 창문턱에 걸터앉아 있던 그를 발견한 안전요원은 그저 방에 데려다주었을 뿐, 1분 만에 바로 철수했다.

 

바로 일주일여 전인 1월3일에도 투신자살자가 있었다. 그 이전에도 삼성전자 기흥공장과 탕정공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젊은이가 줄을 이었다. 이들은 ‘12시간 근무=기본’이라고 노트에 썼다. ‘1년은 나 죽었다’라는 메모도 있다. 사실상 2조 2교대 아래서 14시간에서 16시간을 일하기도 했다. 설비 엔지니어가 없어서 퇴근할 수도 없었고 밥도 제때 못 먹었다. 자다가도 부르면 나가야 했다.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나 북한의 어느 공장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 매출 153조7600억원, 영업이익 17조2800억원에 빛나는 세계적 기업 삼성 이야기다. 아마도 죽어간 이들이 합격 통지를 받고 뛸 듯이 기뻐했을, 바로 그 기업 이야기다.

 

삼성 계열사에서 백혈병 등 희귀병 사망자 46명 발생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은 사건이 발생한 지 1시간이 지나도록 가족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휴먼 삼성’은 김명복씨를 근처 모텔로 데려가서 “1년 연봉 2760만원과 퇴직금, 그리고 위로금을 주겠다”라고 했다. 함께 울고 웃었을 김주현의 동료들은 인솔자를 따라 조를 짜서 조문을 왔고 금세 돌아갔다. 경찰은 사망한 지 50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수사 중이라는 말만 내세우고, 고용노동부는 근로기준법과 산업안전법 위반 내용을 조사만 하고 있다. 취업규칙이 영업 기밀이라며 공개하지 않을 정도이니 ‘글로벌 삼성’에 노조가 없는 건 불문가지다.

 

‘초일류 삼성’은 참척을 양산했다. 클린룸에서 방진복을 입고 화학약품을 다루던 김주현씨는 피부병으로 고생했다. 삼성전자·삼성LCD·삼성전기에 근무하던 젊은이 중 46명이 백혈병 등 암이나 다른 희귀병으로 사망했다. 반도체 공정에 들어가는 화학물질이나 유해 요인도 ‘기업의 영업 비밀’이어서 공개할 수 없다니 역학조사도 제대로 할 수 없다. 근로복지공단은 모든 산재 신청을 기각했고, 가족들이 억울해서 제기한 행정소송에 피고 보조 참가인으로 삼성 쪽 변호사들을 불렀다.

 

김명복씨의 요구는 단 하나다. “과실 책임을 인정하고 공개 사과하라”는 것이다.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하여 인류 사회에 공헌한다’는 삼성이 눈곱만큼의 예의도 없다는 말인가.

 

역시 참척의 고통을 당한 에릭 클랩턴은 이렇게 흐느꼈다. “천국에서 너를 만나면 내 이름을 기억할 수 있겠니? 언제나처럼 변함없을 거니?”(‘천국의 눈물’) 우리 아이들이 천국에서라도 행복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 이상 참척이 계속되도록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글은 시사인182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1.02.28     손석춘/새사연 이사장

똥물을 먹였다. 옹근 33년 전 오늘이다. 1978년 2월 21일은 동일방직의 노동조합 선거 날이었다. 스무 살 안팎의 청순한 여성노동자들은 대의원을 뽑으려고 곰비임비 모여 들었다.


그 순간, 어깨 벌어진 사내들이 악취를 풍기며 살천스레 다가왔다. 손에 고무장갑을 낀 그들은 여성노동자들의 맑은 얼굴과 몸에 서슴없이 똥오줌을 퍼부었다. 한 여성노동자가 진저리치며 절규했다. “너희도 인간이냐?” 불량기 가득한 그들은 그 여성에게 몰려가 똥오줌 가득한 양동이를 뒤집어 씌웠다. “건방진 년, 입 닥쳐!” 곧이어 주먹과 발길질이 쏟아졌다.


그 엽기적 야만이 벌어지는 현장엔 당사자만 있지 않았다. 동일방직 사무직 직원들은 물론, 정사복 경찰이 지켜보고 있었다. 심지어 한국노총 섬유노조 본부에서 나온 노조간부도 버젓이 ‘참관’하고 있었다. 참으로 생게망게한 일이었다. 경찰은 물론 상급 노조 간부조차 “말려 달라”고 울부짖는 노동자들에게 합창으로 퍼부었다.


“야! 이 쌍년들아! 가만있어.” 독자에게도 <미디어오늘> 편집자에게도 양해를 구한다. 그 처절한 순간을 에둘러 표현하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싶다. 섬유노조 소속의 ‘조직 행동대’란 이름의 깡패들은 노조 사무실을 아예 점거했다.


똥오줌 양동이 씌우고 “입 닥쳐” 주먹


경찰이 수수방관한 이유는 있다.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가 똥물의 배후였기 때문이다. 충격으로 50여명이 졸도하고 14명은 병원으로 실려 갔다. 1명은 정신분열 증세로 6달 넘도록 정신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똥물로 범벅된 여성노동자들을 줄줄이 연행했다.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언론이다. 어떤 신문도 방송도 그 야만을 보도하지 않았다. 물론, 여성 노동자들은 ‘먹물’들처럼 쉬 굴복하진 않았다. 곳곳에서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며 애면글면 시위를 벌였다. 언론은, 기자들은 죄다 침묵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여성노동자들이 마침내 한 방송사를 찾아가 방송국장 면담을 요청했을 때다.


“배우지 못한 것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기자들이 내뱉은 말이다. ‘기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을 개 쫓듯 내몰았다. 그로부터 33년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바뀌었다. 박정희 정권처럼 여성 노동자들에게 똥물 퍼 먹이는 공작을 이명박 정권조차 감히 벌일 수 없다. 내놓고 똥물 뿌릴 기업인도 더는 없다. 상급 노동조합도 바뀌었다.


하지만 바뀌지 않은 게 있다. 누구일까. 바로 언론이다.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그 야만을 바꿔온 사람들에게 줄곧 ‘마녀 사냥’을 했다. 그나마 목소리를 내던 <동아일보>조차 1990년대 들어 사냥에 가세했다. ‘늦게 배운 도둑’으로 요즘은 한 술 더 뜬다.


보라. 삼성의 전자제품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림프종 따위의 희귀 질환에 걸려 숨진 노동자가 공식 집계로만 15명에 이른다. 희귀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는 89명이다. 자살자도 많다. 2011년 들어서도 두 달 동안 삼성전자에서 두 명의 젊은 노동자가 목숨을 끊었다.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아들이 “3교대 근무라지만 8시간 일하는 게 아니라 14시간, 15시간 일한다며 힘들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집에 왔는데 발부터 다리까지 피부 껍질이 다 벗겨져 있었다. 왜 그러느냐 물어보니 약품 얘기를 했다”고 고발했다.


하지만 어떤가. <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는 모르쇠다. <한국방송><문화방송><서울방송>의 저녁 ‘간판 뉴스’에 자살 관련 보도는 없었다. 다른 나라 기업에서 일어나는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살은 사뭇 진지하게 부각해 보도하는 언론이 정작 이 땅의 자칭 ‘세계 일류기업’에서 일어난 참극을 모르쇠 하는 풍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미 나라밖에서도 삼성전자의 행태를 고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침묵했던 33년전 언론, 오늘도 삼성에…


내 또래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온 힘을 다해 싸우고 있을 때, 대학 강의실에서 철학을 배우던 나는 똥오줌을 사람에게 먹인 야만을 보도조차 하지 않는 언론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기자가 되어 언론을 바꾸겠다고 다짐한 이유다. <동아일보>와 <한겨레>를 거치며 언론개혁 운동에 동참해왔지만 어느새 나는 언론사 밖에 있다. 회한이 드는 까닭은 무슨 미련 따위가 아니다. 젊은 날의 다짐에 견주어 현실이 냉엄해서다. 33년 전 그때 현직 기자로 살아가고 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도 <조선일보><중앙일보><동아일보>의 고문, 주필, 편집인, 대기자로 여전히 대한민국 언론을 좌우하고 있지 않은가. 비정규직 기자로 언론의 한 모퉁이에 서 있으려던 촌지마저 접은 채, 저들이 지배하는 한국 언론을 지켜보는 심경은 고백하거니와 착잡하다.

      
그래서다. 젊은 언론인들의 깨끗한 눈에 충정으로 호소하고 싶다. 33년 전 시민사회는 성명서를 내어 기자들에게 물었다. “폭도들이 여성노동자들에게 똥물을 퍼 먹인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했다한들 아니, 똥물을 퍼 먹인 것이 나쁘다고 한 마디 덧붙였다 한들 그것이 현행 법규에 어긋나는 것인가? 그 사실을 단 1단의 기사로라도 알리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 또는 조치가 있단 말인가?”


다시 그 물음을 2011년 오늘의 현직 기자들에게 묻고 싶다, 독재정권도 긴급조치도 없는 지금 삼성의 야만을 보도했다한들 어긋나는 법규가 있는가를. 아니, 정말이지 정중하게 묻고 싶다. 왜 삼성 자본의 문제점을 보도하지 않는가? 혹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가. 그래도 지금은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먹이지 않는다고?



*이 글은 2월24일 미디어오늘에도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