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04정태인/새사연 원장

역시 ‘다이내믹 한국’인가, 했다.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이 의료민영화나 4대강 등 공공성 의제의 들불로 번져나갔던 것, 2010년 무상급식이 순식간에 보편복지 의제로 자리잡은 것처럼 이번엔 ‘경제민주화’가 그럴지도 모른다, 내 가슴은 노래 가사처럼 두근두근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민주통합당은 패배했고 통합진보당은 여전히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진보신당과 녹색당은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김종인 박사 말마따나 새누리당 당선자 중에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사람은 찾아볼 수 없고 야권연대 쪽을 통틀어 당장 정책과 법안을 만들 정도의 실력을 가진 당선자는 대여섯 명에 불과하다. 더구나 민주통합당에서는 예의 ‘중도론’이 또 스멀스멀 기어나오고 있으니 이대로 간다면 대선에서도 별로 기대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경제민주화란 도대체 무엇일까? 한국에서는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헌법 119조 2항(김종인 조항)이 그 근거다. 즉 헌법은 소득재분배(복지), 그리고 독점규제(재벌개혁)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제헌헌법에는 ‘이익균점권’이 있었으니 우리 헌법은 유구한 ‘경제민주화’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경제민주화란 ‘경제민주주의’를 향하여 간다는 뜻일텐데 경제민주주의라는 목표는 어떤 모습일까? 불행하게도 이 질문에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명확한 답이 없고 그야말로 백화제방의 상태이다.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곧 민주주의라는 프리드만(Freedman, M)의 강변 이래 별 관심이 없었고 정치학자들만 띄엄띄엄 의견을 개진했을 뿐이다.
 
경제민주주의 하면 떠오르는 학자는 정치학자 달(Dahl, R)이다. 그는 적어도 선진 사회의 정치에서는 ‘1인 1표’라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규범인데, 경제에서는 왜 ‘기업 괴물(corporate leviathan)’의 전제주의가 규범인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따라서 정치와 경제가 대칭적이기 위해서는 ‘작업장 민주주의(workplace democracy)’가 필수적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1980년대 진보적 경제학자들에게도 나타나는데 보울스(Bowls, S) 등의 ‘민주적 기업’이 그것이고 지난번에 소개한 프리먼(Feeman, R)은 30년 넘게 이 문제에 천착해서 ‘공유자본주의론’을 완성했다.
 
기업 내 민주주의를 넘어 롤스(Rawls, J)는 경제에도 자신의 정의론을 적용한 결과 ‘재산소유 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를 이상적 사회로 내세우기에 이르렀다(또 하나의 대안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놀랍게도 롤스는 스웨덴의 복지국가를 강하게 비판했는데 복지국가가 자산 소유(‘생산 자산’, production assets)의 양극화를 용인해서 정의의 원칙인 ‘기회 평등의 원칙’, ‘차등의 원칙’을 위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자유의 원칙도 위반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결국 롤스는 자산 및 자본재분배까지 주장한 것이다. 

우리 헌법은 사실상 독점의 시정(즉 산업구조 상의 문제)을 중심으로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국가가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달과 프리먼은 기업의 민주화를, 그리고 롤스는 재산소유의 민주화까지 주장한 것이다. 이 모두를 일반화한다면 자신의 삶과 자유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차원의 의사결정에 시민들이 참여해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경제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착한 경제학’은 경제민주주의를 어떻게 볼까? 독자들은 지금까지의 정책 처방이 경제민주주의론자들의 주장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이 얘기는 다음 번에 계속하기로 하자. 
 

이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2.05.03정태인/새사연 원장

누가 뭐래도 진보개혁진영은 패배했다. 4월 11일을 벼르고 별렀던 많은 시민들을 ‘멘붕’ 상태로 몰아넣었다는 것만으로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2010년 지자체 선거 승리, 박원순 서울 시장의 승리와 참신한 시정으로 가파르게 치솟던 희망의 불길에 찬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 날 이후 20일이 지난 지금, 정치권이 정신을 차렸다는 증거는 없다. 아니 내 보기엔 각 당이 아전인수의 해석을 거쳐 더 큰 패배로 치닫고 있다. 민주당에선 참여정부의 이해찬 총리와 국민의 정부의 박지원 비서실장이 손을 잡았다. 선거 과정 중에 일어난 사사건건의 불협화가 패배의 원인이라고 진단한 것이다. 과연 문제는 해결될까?

1954년 미국의 심리학자 셰리프 부부는 저 유명한 ‘로버 동굴의 실험(Robber cape experiment)’을 했다. 평범한 중산층 대학생들을 아무렇게나 두 집단으로 나눈 뒤, 한정된 자원(물)을 놓고 경쟁하게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이들은 자기 집단에 이름을 붙이고 지도자를 뽑은 뒤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급기야 살인을 우려할 정도에 이르러 실험을 중단시켜야 했다.

7년 뒤 셰리프 부부는 ‘집단간 갈등과 협동’이라는 책에서 이런 갈등을 해소할 방법을 제시했다. 이들 집단이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이제 과거의 적대적 집단에 대한 호의적 정보가 제시되어 혐오스러웠던 행동도 재해석될 것이고 지도자들은 협동을 향한 단호한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될 것이다.

과연 대통령선거의 승리는 ‘친노’나 ‘비노’ 어느 한 집단의 힘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그러므로 공동의 목표를 향해 힘을 모은다면 민주당 내의 협동이 이뤄질 것이다. 문제는 그런 협동을 유권자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에 달려 있다.

국민의 정부든, 참여정부든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이명박 정부가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 것이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들의 고달팠던 기억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불행하게도 국민의 눈에는 박근혜 씨가 팍팍한 현실을 타개할 개혁의 지도자로 보였다.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무상급식에서 비롯된 보편복지의 청사진조차 보여주지 못한 채, 돌아가신 두 대통령만 전면에 내세우는 게 고작인 집단을 누가 믿겠는가? 즉 ‘협동 민주당’의 목표와 능력이 국민의 눈에 그저 그런 과거로의 회귀로 비친다면 그런 협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니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과거의 ‘중도’로 돌아가자는 시대착오가 바로 그렇다.

불행하게도 진보진영은 더 문제다. 진보진영 내부의 집단간 경쟁은 도를 넘어선지 오래다. 더 강한 조직력을 가진 집단이 투표를 통해 언제나 승리했다. 일반인의 상식을 넘어선 부정이 관행이 됐다. 나는 책과 강의에서 “집단 선택에 의한 협동”의 위험성을 누누이 강조한다. 집단의 개방성, 집단 가치의 보편성, 집단 구성원의 다양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협동이라는 묘약은 죽음에 이르는 극약이 된다.

감베타라는 사회학자는 마피아와 같은 갱 집단을 예로 들어 ‘사회적 자본’의 그늘을 지적한 바 있다. 통합진보당 후보경선에서 벌어진 부정선거 의혹은 이런 그늘이 이미 짙게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집단 내 규범은 어느 덧 보편으로부터 훌쩍 멀어졌고 초등학생도 알만한 부정행위에 대한 죄의식과 수치감마저 사라졌다. 진보진영 내부에서 쉬쉬 하던 문제가 국회의원 선거라는, 숨을 곳 없는 더 큰 공간에서 확대재생산된 것이 관악을 사태이다.

“더 큰 적 앞에서 단결하자, 내부의 흠을 밖으로 드러내지 말자.” 이런 ‘조직 보위’의 억지 주장이야말로 진보의 장송곡이다. 진실을 국민 앞에 낱낱이 밝히고 그에 상응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부정에 연루됐다면 당선자라 해도 읍참마속의 칼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진보의 진정성을 인정할 것이 아닌가.

진실을 밝혔을 때 올 극심한 내부 혼란과 분열을 두려워하지 말라. 집단 간의 갈등과 화해와 관한 수십 년 간의 연구는 집단 내부의 분열을 치유할 방법도 제시하고 있다. 건강한 진보만이 실천할 수 있는, 아주 어렵지만 유일한 묘방, ‘숙의 민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글은 PD저널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보스코프스키

    원인 설명이 너무 어렵네요... 오히려 저는 너무 간단합니다. 이번 부정선거의 원인은 바로 외부적인 (협소한) 비례대표제도 문제와 내부적인 출세지상주의의 문제 이것이 더 쉽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의 참정권 구속에 대해서 즉각 폭파를 실천할 수 있는 운동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한 학습, 주장, 실천은 절대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데 이 중 숙의 민주주의가 있겠지만 이 운동과 쉽게 밝힐 수 있는 원인 모두를 말하지 않으면서 너무 어려운 원인만 이야기한 셈이 되어 버렸네요.

    2012.05.06 11:40 [ ADDR : EDIT/ DEL : REPLY ]

2012.02.10  정태인/새사연 원장 

"결국 문제는 남을 믿는 것이고, 동시에 남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일이다. 북유럽은 그런 신뢰가 쌓여서 사회규범이 되었고 사람들은 이 규범을 내면화 했다."

지난번에는 납세자 쪽의 무임승차를 얘기했지만 경제학자들이 툭하면 들먹이는 것은 ‘수혜자’ 쪽의 무임승차다. 만일 실업급여로 이전 월급의 80%를 받는다면 툭하면 회사 그만두고 일하지 않는 베짱이가 될 것이란 얘기다. 인간이 이기적이라면 이런 현상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독일과 스웨덴의 축구경기가 있는 날, 또는 그 다음날에 병가(스웨덴에서는 병가는 유급이며 진단서를 낼 필요가 없다)가 대폭 늘어나는 현상은 분명 무임승차의 증거가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영미형에서는 잔여복지 또는 선별복지(‘맞춤형 복지’라는 말도 다분히 잔여복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를 시행한다. 국가는 생존권을 보장하는 수준의 복지만 제공해야 한다는 ‘경험적 자유주의’(프리드만, 하이예크)가 이런 정책을 뒷받침하는 철학이다. 이들 나라에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얻는 수입, 그리고 가족에 의해 삶을 누려야 한다. 따라서 국가로부터 복지를 받으려면 이런 기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따라서 철저한 자산조사(means test)가 필수적이며, 무상급식 논쟁을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낙인효과(stigma effect)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각각 고유한 문제를 안고 있는 셈인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은 이 두 번째 무임승차 문제를 훌륭하게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별히 실업률이 높은 것도 아니고 고용률(15세에서 64세까지의 인구 중 취업자 비율)은 뚜렷이 높다. 어떻게 이런 신통한 일이 가능한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 북유럽 국가들이 오래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불운을 당했다면 기꺼이 그를 도우려고 한다. 반면 노력할 여지가 충분한데도 도움을 청하면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기 일쑤라는 것이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스웨덴의 노동조합(LO)이 연대임금제도를 시행하면서 그 부작용으로 경쟁력 없는 중소기업이 파산하자 내놓은 대책이었다. 실업자가 된 이들이 재교육·훈련을 거쳐 다른 기업에 취업함으로써 완전고용도 달성하고 산업구조도 고도화될 테니 일석이조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노동자 주도의 구조조정인 셈인데, 고용률이 높아져 세금을 더 많이 거둘 수 있어서 이 정책은 보편적 복지국가의 원동력이 되었다.
 
치열한 시장경쟁은 언제나 패배자를 낳으며 누구나 판단 실수로, 또는 단순한 불운으로 패배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성실한 노력으로 누구나 재기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으랴. 결국 문제는 남을 믿는 것이고, 동시에 남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일이다. 북유럽은 그런 신뢰가 쌓여서 사회규범이 되었고 사람들은 이 규범을 내면화했다. 이런 사회에서 남들이 낸 돈으로 그저 놀고 먹는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정부의(또는 국민 스스로 선택한) 적절한 정책과 사회적 신뢰, 이것이 보편적 복지국가에서 두 번째 무임승차를 막는 첩경인 것이다.
 
반면 사람들이 이기적이라고 전제한다면, 따라서 무임승차가 필연이라면 정부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사전에 그런 가능성을 봉쇄해야 한다. 행동경제학은 이렇게 상대가 자신을 나쁜 놈 취급하면 사람들이 딱 그 수준에 맞춰서 행동한다는 것을 거듭 증명했다. 예비군복만 입히면 남자들이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사회에서는 이기적 행동이 당연한 것이 되고 착한 사람은 오히려 바보(sucker) 취급을 받게 된다. 퍼트넘이 ‘나 홀로 볼링하기’(Bowling alone)에서 집어낸 미국 사회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북유럽처럼 신뢰로 가득찬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극도의 경쟁만 가득찬 현재의 한국에서 보편복지를 시행하면 무임승차가 만연하지나 않을까? 다음번에 다룰, 정말 고민스러운 주제이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도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1.07.25정태인/새사연 원장

거짓말 탐지기는 과연 정확할까? 영화를 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내가 진실을 말했더라도 거짓말 탐지기를 들이대면 가슴이 두근두근 뛸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 때문에 거짓말로 판정되면 그 억울함을 어찌 할까? 반대로 아예 후안무치하거나 또는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자각도 없는 사람이라면 거짓말 탐지기를 무사통과하지 않을까? 이명박 정부에서 장관청문회가 열릴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지금 한국 정치는 혁명 중이다. 민주당이 보편복지를 내세워 중도좌파의 드넓은 땅에 들어선 데 이어 한나라당 역시 중도우파, 합리적 보수 정당이라고 부를만 하게 되었다.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산하 비전위원회가 내놓은 정책노선만 놓고 본다면 과연 그렇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복지수준, 고용률 60%, 대학등록금 부담 30% 축소, 공천 30% 여성 배정, 대북 지원 등이 포함됐으니 어찌 수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불과 3년 전, 2008년 총선 때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약속한 듯 똑같이 ‘뉴타운’ ‘특목고’ 유치를 현수막에 내걸었을 때를 되돌아보면 상전벽해라는 말이 이리도 잘 어울리는 경우가 또 있을까,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두 당의 변화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100% 믿고 싶다. 이미 10년 전부터 복지를 외쳤던 진보정당까지 합쳐서 모든 정당들은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아름다운 ‘복지경쟁’을 벌일 것이다. 따가운 여름 볕에 초록이 지치듯 지난 15년간 죽음의 경쟁 속에서 허덕여온, 그래서 ‘루저’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국민들에게 복지만한 생명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국민은 어떤 복지가 더 현실적인지만 판단하면 된다. 한나라당은 여전히 ‘747’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전위원회도 여전히 2020년 국민소득 4만달러를 약속하고 있으며(그러므로 우리 경제는 매년 7% 성장을 해야 한다), ‘한국형 복지’를 내세운 박근혜씨 쪽 역시 예의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를 버린 바 없으니 마찬가지다. 이 여름이 지나기 전에 한미 FTA를 비준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런 정책기조의 재확인이다. 이렇게 성장을 해야 복지 재원을 마련할 수 있으니 자신들의 복지가 더 현실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나라당은 내심 ‘포퓰리즘과 재정적자’의 우리(프레임) 안에 복지라는 펄펄 뛰는 야생마를 가두는 그림까지 꿈꾸고 있을 것이다.

거짓말 탐지기는 뭐라고 말할까? 지난 15년 간의 우리의 양극화 역사가 바로 그 거짓말 탐지기이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한편으로 경제를 시장에 맡기면서(“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는 고 노무현대통령의 한탄) 다른 한편으로 복지를 늘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시장에서 벌어질대로 벌어진 양극화를 복지로 막는 건 불가능했고 소득 불평등 척도인 지니계수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 노동연구원 패널 자료를 이용하여 계산한 자산 지니계수는 무려 0.84(2008년)라는 극도의 불평등 상태를 보이고 있다. 민영화와 규제완화, 그리고 감세라는 시장 만능주의 정책기조를 버리지 않고 양극화를 막을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당연히 더 많은 복지 재원이 필요하고 재정적자는 현실이 된다. 한미 FTA는 이런 정책기조를 되돌릴 수 없도록 하는 초헌법적 장치이다.

한마디로 시장만능을 주장하면서 복지를 내거는 것은 거짓말이다. 이 경제의 거짓말탐지기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영미권, 심지어 북유럽에서도 정확성이 증명됐다. 시장만능주의의 원조인 미국(2005년 기준 4위), 그리고 그 나라와 FTA를 맺은 멕시코(1위)와 캐나다(13위)가 모두 소득불평등의 최악의 국가들이고 빈약한 복지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대의 재정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당이 내건 복지의 진위를 알려면 그들의 경제정책 기조를 보라.

한미 FTA는 가장 훌륭한 거짓말탐지기이다. 민주당은 최근 금융세이프가드 강화, 투자자 국가소송제도 폐기, 서비스 시장개방 포지티브 방식 전환, 역진불가조항(래칫) 폐지를 포함하여 한미 FTA 재재협상을 요구함으로써 거짓말 탐지기의 1차 관문을 통과할 수 있게 됐다. 반대론자들이 핵심 독소조항이라고 지적했던 항목들을 모두 수용한 것이다. 이제 국민들은 국민의 정부 시절에 추진했던 철도 등 네트워크 산업 민영화, 금융규제완화를 통해 메가뱅크를 건설하려 했던 금융허브화, 제주도 영리법인 추진 등 의료민영화 정책을 민주당이 어떻게 처리할 것이지 주목하고 있다
.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새사연 2014 > [칼럼] 정태인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남호 회장께  (0) 2011.08.07
나는 지식인이다  (0) 2011.07.28
시장 만능·복지 함께 된다는 거짓말  (0) 2011.07.28
복지동맹 성공의 조건  (0) 2011.07.06
권영길과 ‘시대 교체’  (0) 2011.06.24
'반값 등록금'의 경제학  (1) 2011.06.10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1.06.13손석춘/새사연 이사장

칼끝의 꿀.

보편적 복지를 요구하는 시민사회를 겨냥해 한나라당 대표가 살천스레 던진 말이다. 여야 대표들이 2011년 새해 기자회견에서 곰비임비 복지를 내세우며 상대의 복지정책은 깎아내릴 때였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 안상수는 한 번 늘린 복지 예산은 줄이기 어렵다며 무책임한 복지 남발은 ‘칼끝에 묻은 꿀’을 핥는 것처럼 위험하다고 날을 세웠다.

물론, 한나라당도 복지를 하지 않겠다고 감히 주장하진 않는다. 이른바 ‘맞춤형 복지’나 ‘70% 복지’를 부르댄다.

문제는 맞춤형 복지와 70% 복지의 현실적 의미다. 대통령까지 ‘복지 포퓰리즘’을 들먹이는 이 땅에서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민중의 현실을 찬찬히 짚어볼 일이다.

한나라당 대표는 ‘칼끝의 꿀’이라는 은유로, 대통령은 포퓰리즘이라는 마녀사냥으로 언죽번죽 보편적 복지를 비난할 때, 서울의 한 지하단칸방에 살고 있던 60대 부부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동반 자살했다. 물론, 하루 평균 40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에서 노부부의 자살은 정책 당국자나 언론사 고위간부들에게 하찮은 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60대 부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수급자였다. 절망 속에 세상과 작별한 부부는 유서에서 수급비로는 생활이 안 돼 죽음을 선택한다고 명시했다. 그 유서를 쓸 때 늙은 부부는 피를 토하는 심경이었을 터다. 부부는 40만원의 수급비를 받았다. 하지만 집 월세가 30만원이었다. 남은 10만원으로 서울 도심에서 부부가 살아가려면 생활고는 물론 우울증이 필연 아니었을까. 더러는 어떻게 해서든 일을 찾아야했다고 한가하게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자살한 부인은 양쪽 무릎관절 수술을 받았다. 병원비가 늘어났고 40만원의 수급비로는 약값을 대기도 벅찼다.

비단 수급비의 비현실성만 문제가 아니다. ‘부양의무자 기준’은 기초생활법의 대표적 독소 조항이다. 수급신청자의 소득과 재산은 기준에 부합하는데 부양의무자가 있어 수급신청에서 탈락한 비율이 절반을 웃돈다. 부양의무자 때문에 수급탈락을 받은 사람 가운데 그 의무자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부모 부양은커녕 연락조차 끊어진 자식들의 이름을 애써 감추려는 모습은 콧잔등을 시큰하게 한다. 대다수 젊은 세대들은 결혼해서 자신이 이룬 가족의 생활이 불안하기에 부모 부양에 무장 인색해가는 게 현실이다. 그뿐이 아니다. 공사현장을 전전했지만 실직의 세월을 보내던 50대 노동자가 자신이 부양능력 있다는 이유로 장애인 아들이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참극도 일어났다. 안타깝게도 기초생활법의 사각지대는 넓다. 빈곤층인 데도 쥐꼬리만 한 ‘기초생활비’조차 받지 못하는 국민이 410만 명에 이른다. 수급자의 2.5배가 넘는 규모다.

여기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의미를 폄훼할 뜻은 전혀 없다. 그나마 김대중 정부의 업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민이라면 누구나 건강하고 문화적인 삶을 누려야 한다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기초생활법의 입법정신은 이미 현실에서 큰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기실 기초생활법 시행 10년의 성과는 초라하다. 최저생계비의 상대적 수준은 시나브로 낮아져왔다. 장애를 지녔다거나, 나이가 들거나, 몸이 아프거나, 일감을 찾기 어려운 이들에게 최저생계비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마침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정당들이 곰비임비 모여 ‘기초생활 권리행동’을 결성하고 6월 임시국회에서 기초생활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국회의원들도 개정안을 발의해 놓았지만 예산날치기 파동으로 아직까지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못했다. 일각에선 총선을 의식한 국회의원들이 변죽만 울린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물론, 부양의무자 조항을 없앨 때 언론이 우려한 ‘황제 수급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다. 구더기를 침소봉대해 장을 사갈시하기보다는 장의 품질을 높일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책을 촉구하는 게 언론의 본령 아닐까.

앞서 소개한 장애인 아들의 아버지는 빈소주병과 함께 유서를 남겼다.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게 있다. 내가 죽으면 동사무소 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는 당부와 함께 유서의 마지막을 “아들아 사랑한다”라고 쓴 고인이 목을 맨 곳은 서울 여의도다. 왜 그는 집을 떠나 멀리 여의도까지 왔을까? 바로 국회가 있기 때문이다.

2011년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문제의 핵심은 이명박 정권의 부르대기처럼 무책임한 복지 남발이 아니다. 무책임한 복지 외면이다. 6월 임시국회에서 기초생활법 개정에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하는가를 언론이 면밀히 주시해야 옳다. 그 찬반은 여야 대표들이 저마다 부르대는 복지 정책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터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그리고 그들의 논리를 확산해온 일부 언론에 간곡히 제안한다. 과잉복지가 아니라 최소복지, 보편복지가 아니라 희소복지, 그것이 지금 이 땅에서 칼끝의 꿀이다.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폰생폰사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소득세의 80% 이상을 상위 20% 에게 받고, 내는 것보다 정부의 지원을 받는 사람이 더 많은 현실에서
    모 선진국 같이 소득의 50% 를 소득세로 내야 하는 것 옳은지?
    불필요한 눈먼 세금 사용을 줄이는 게 옳은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나합니다.
    마냥 소득세 낮춘다고 좋아할수 없는 현실이고, 나 또한 예시에 나온 사람들이 못 되라는 보장이 없으니
    더욱 안타깝네요.

    2011.06.13 13:38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