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18김병권/새사연 부원장

 

보수주의자들은 경제가 시장의 원리에 의해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품 공급자 또는 수요자로서 각자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시장에 참여해 거래를 하면 가장 효율적인 결과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인위적인 개입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전 세계는 앞다퉈 재정지출을 했다. 4년 이상 공격적인 금리 통화정책으로 시장 개입을 하고 있는 지금도 시장의 효율성과 자기조정 능력에 대한 과신은 크게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역사적 현실은 시장의 자율이 아니라 오히려 시장에 대한 일정한 규제가 자본주의 시장을 존립시켜 왔을지도 모른다. 1920년대의 금융자유의 시대, 1980년 이후 금융자유주의 시대는 대공황을 초래하면서 잔인하고도 거대한 시장의 붕괴, 시장의 실패를 만들어 내지 않았던가. 그러니 규제 자본주의가 시장경제에 가장 적합한 것일지 모른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한 것이다.

그런데 조폭 세계도 아닌 시장경제에서 국가의 합법적인 개입은 고사하고 때때로 공포와 협박을 동원해 시장 참여자들로 하여금 어떤 선택을 강제하는 경우가 21세기 첨단의 시대에도 발견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것도 특히 시장의 자율을 주장하는 보수적 세력들에 의해 조장된다는 것이 더 역설적이다.

첫 번째 사례는 가장 혁신적인 금융시장에서 발견된다. 최근 몇 년 동안 저출산 고령화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보편복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실제로 정치권에서 은퇴 후 생활과 노후생활을 위한 복지정책을 활발하게 개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출산 고령화 대비책으로 나온 것은 복지정책만이 아니다. 보험과 연금을 비롯한 금융상품이 이에 못지않다.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개인들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며 이를 상품판매로 연결시키려는 보험사들의 공포마케팅이다.

지난 4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100세 보장’을 앞세워 마케팅을 하고 있는 상품은 생명보험사와 손해보험사를 합쳐 140여종에 달한다고 한다. 비슷한 마케팅전략을 내세우는 증권사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200여개까지 늘어난단다. 국민들은 정부의 복지정책을 신뢰하고 공공복지에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사적 금융시장의 공포조장에 밀려 금융상품에 노후를 걸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시장에 참여하는 각자가 합리적인 자기 이익을 가지고 거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두 번째가 부동산 시장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서울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부동산 시장의 정체, 또는 실질적 하락세가 4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기를 이어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상당 기간 추세가 반전될 기미도 없다. 지난 4년 동안 끊임없이 나왔던 것이 부동산 폭락사태와 시장 붕괴 우려의 목소리다. 그런데 그중에 국민경제의 급격한 충격을 걱정하는 차원에서 폭락을 걱정하고 연착륙 대책을 고민하는 부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쪽도 적지 않았다.

부동산 시장 폭락에 대한 두려움을 시장에 유포해 정부와 국민으로 하여금 부동산 경기부양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하려는 심산이다. 건설업자들이나 주택대출을 해준 은행들, 그리고 주택 투기세력들이 그들이다. 실제로 그 결과 이명박 정부는 4년 동안 지속적으로 부동산 관련 규제를 완화해주고 세제 경감조치를 발표하고 경기부양 대책을 내놓았다. 그로 인해 누가 이익을 봤을까.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부동산 시장에서도 시장의 자율과 참여자들의 합리적 이익추구라는 경제학 교과서의 그림은 잘 구현되지 않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대기업·재벌이다. 올해부터 재벌개혁 요구가 거세지고 있고 재벌에 대한 규제와 증세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는 중이다. 당장 재벌들은 “투자를 줄일 수 있다”는 전형적인 협박과 공포 분위기를 흘리기 시작한다. 몇 년 전부터 재벌들은 심지어 “자꾸 규제나 과세를 해서 기업하는 환경을 어렵게 하면 본사를 옮길 수도 있다”는 그야말로 어이없는 협박과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

이미 재벌들은 싼 임금을 찾아 공장을 끊임없이 해외로 옮겨왔다. 만약 본사를 옮기는 것이 이익을 내는 데 유리하다면 미국이든, 중국이든, 유럽이든 벌써 떠났을 것이다. 그들에게 무슨 애국심이 있어 본사를 한국에 일부러 두고 있겠는가. 한국처럼 알짜배기 고급인력을 충분히 수혈받을 수 있는 곳, 제품 만들면 즉각적이고 충분한 규모로 구매해서 테스트해 주는 국민이 있는 곳, 그처럼 많은 이익이 나는데도 여전히 엄청난 특혜를 제공해 주는 정부가 있는 나라. 관료와 학계, 법조와 회계 분야에 몽땅 내 사람들로 포진해 있는 인적환경이 되는 한국보다 나은 국가가 있다면 삼성과 재벌들은 지금 이 시각 짐을 싸서 떠났을 것이다.

이 글은 매일노동뉴스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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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04 / 10 정태인/새사연 원장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9)
보고서 원문을 보시려면 위 제목을 눌러 주시면 됩니다.

 

이 글은 새사연의 정태인 원장이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진행한 ‘정태인의 경제학 과외 2부 : 사회경제, 공공경제, 생태경제’ 강연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구조에 의한 해결 - 게임의 규칙을 바꿔라

구조에 의한 해결은 게임의 규칙 자체를 바꿔버리는 것이다. 앞서 두 가지 해법은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사람들의 동기와 전략을 변화시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었다. 우선 악셀로드는 구조적 해결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반복과 정체성 확립을 제시했다. 첫째, 상호작용은 빈번하고 영구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둘째, 자신에 대한 그리고 상대에 대한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한다. 셋째, 상대방의 과거 행동에 대한 정보가 많아야 한다. 다시 말해 서로에 대해서 잘 알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많은 실험에서 익명성은 협동을 감소시켰다.

 

1) 보수 구조

보수 구조를 바꿔서 협력을 유도하는 것이다. 협력의 보수를 높이고 배반의 보수를 낮추면 당연히 협력의 빈도는 높아진다. 이 경우 실제 현실에서는 물질적 보수와 함께 정신적 보수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투표의 경우, 내가 지지하는 투표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으면 사람들의 투표 의지는 높아진다. 내가 투표하는 행위를 통해 얻게 되는 보수가 원하는 후보의 당선으로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또한 실험에 의하면 협력을 통해 다른 사람의 보수가 높아지는 경우에도 협력의 빈도는 상승했다.


흥미로운 점은 공공재의 경우이다. 분할할 수 없는 공공재의 경우 협력이 높아졌다. 예를 들어 어떤 공공재를 개개인에게 나눠주고 저마다 개별적 수익을 얻게 하는 것보다 공공재를 집단이 공동소유하고 그에 대한 고정된 공동 수익을 얻게 할 경우 협력이 높아진다. 이는 집단정체성과도 연결된 부분이다.

 

2) 개인의 행동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구조

개인의 행동이 상황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적을 경우 사람들은 협력하지 않는다. 가뭄에 나 혼자 물을 절약한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으며, TV 수신료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TV 프로그램이 종영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개인의 행동이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일정 수준 이상 커지는 구조를 만든다면 협력은 늘어날 수 있다. 나의 행동을 인해 다음 단계로 진입한다거나 발전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믿으면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환경 문제 있어서 이런 구조 형성이 필요하다. 앞서 물 절약의 경우 내가 물을 절약하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럴 것이고 그것이 변화를 가져온다는 믿음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문제도 그렇다. 지금 내가 종이컵 하나를 안 쓴다고 과연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한 대책으로 현실에서 사용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개인이 기여하는 만큼 공공기관 등이 기여해줌으로써 전체 보수를 더욱 커지게 하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행동이 상황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더 크게 만들어 준다. 또 하나의 방식은 개인의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자선단체에서 자선가와 아이들을 일대일로 맺어주는 것이 이런 효과를 노린 방식이다. 내가 기부한 돈이 실제로 어떻게 도움이 되고 있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3) 집단의 크기

많은 연구는 집단의 크기가 커질수록 협력은 줄어든다고 밝힌다. 이에 대한 이유는 많다. 집단이 커지면 배반에 의한 피해가 확대되는 폭도 커지며, 다른 이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어렵고, 익명성이 강화된다. 또한 조직 운영 비용도 집단의 크기가 커질수록 늘어난다. 집단 내에서 서로의 행동에 대해 대화하고 조정하기가 힘들어진다. 한 사람의 행동이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을 보여주기도 어려워진다. 이런 이유로 일부 논자는 무정부주의적 소집단 네트워크로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경제도 시장경제에 비해 일정 부분 이런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규모에 따른 협력 감소는 금방 사라지며 거꾸로 규모가 커지면서 협력이 증대하는 경우도 있다. 공공재 형성에 있어서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한계비용은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는 공공재가 비경합적이라는 가정, 즉 다른 사람이 사용한다고 해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몫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또한 집단규모에 따라 인구의 이질성이 증가하므로 이것이 다양한 사회적 가치나 자원의 확보로 이어질 수 있어서 협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4) 경계를 명확히 하는 구조

공유지의 비극은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공유자원이 가지고 있는 비배재성,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는 성질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처음 제시했던 미국의 생물학자 하딘(Garrett James Hardin)은 자신의 논문에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 번째 방법은 지도자나 권위의 수립을 통한 해결이다. 지도자가 규제를 설정하고 집행하는 것이다. 정부가 특정 구역, 특정 시기에 어획량을 규제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홉스(Thomas Hobbes)가 이야기했던 강력한 힘을 가진 국가로서의 리바이어던(Leviathan)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딘은 "공유지에서의 자유는 모든 것을 망칠 뿐이다", "모두가 망하는 것보다는 불공정한 것이 낫다"고 덧붙였다.

흔히 집단 내부의 유대관계가 강한 경우에는 민주적으로 권력을 잡은 지도자가 등장하고, 유대관계가 약한 경우에는 강한 권력을 가진 이가 지도자가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자의 경우 유대관계가 약해서 협력이 쉽게 일어나지 않으므로 강제적인 권력을 선택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지도자의 권위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정당성과 공정한 과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집단이 공통적으로 무엇이 중요한 가치인지 합의해야 하며, 지도자는 사람들이 복종할 수 있는 충분한 강제력을 가져야 하며, 부패하지 않고 특정 집단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필요하다는 연구들이 제시되었다. 단순해 보이지만 그만큼 많은 비용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구조적 해결책이 존재할 경우 사람들은 지도자를 만들지 않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 방법은 사적소유의 도입이다. 공유지를 쪼개서 개인에게 각각 소유권을 주는 것이다. 공공의 재산보다는 개인의 재산이 더 잘 관리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방법이다. 하지만 바다, 공기, 국방처럼 사적 소유를 설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답이 될 수 없다. 또한 누가 그 재산을 소유하느냐라는 사회정의 차원의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개인 소유의 재산이 더 잘 관리된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고, 사적 재산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제도와 비용이 필요하다.

하딘의 해결책은 여기서 끝이 난다. 이후 오스트롬이 세 번째 방법으로 공동체의 자원을 잘 알고 있는 구성원들에 의한 지역적 규제와 제한을 제시한다. 오랜 기간 동안 공유지를 성공적으로 관리해온 공동체의 몇 가지 특징을 정리해본 결과 배제성의 경계를 명확히 관리했다는 점이 우선적으로 꼽혔다. 오스트롬은 "공유지로부터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개인이나 가계가 명확히 정의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5) 응징과 보상의 제도화

협력자는 보상을 받고 배반자는 응징을 받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선택적 유인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첫 번째는 제도를 도입하고 운영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다. 개인의 행동에 대해 보상을 하거나 응징을 하려면 그들을 감시해야 한다. 대도시에 살아가는 수많은 개인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평가하기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물을 절약해야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집에서 물을 얼마나 아끼는지를 일일이 조사한다면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는 사생활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 협력을 유발하는 제도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협력을 통해 얻는 이익보다 더 커질 수도 있다. 또한 감시와 규제는 사람들 간의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두 번째는 응징과 보상의 제도 자체가 공공재이므로 무임승차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2차 공공재라 하는데,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설계된 공공재를 뜻한다. 예를 들어 만들어진 제도를 잘 지키기 위해서는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지만, 실제로는 경찰이나 사법 당국만이 규제를 지키기 위해 애쓸 뿐 일반 개인들은 방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나는 규제가 가져오는 이익은 받고 있지만, 그 규제를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니 무임승차자가 되는 것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애초의 사회적 딜레마를 1차 딜레마라 부르고, 제도 유지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딜레마를 2차 딜레마라 부를 수 있다.

특히 문제는 1차 딜레마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타인을 믿고 적극 협력했던 이들이 오히려 2차 딜레마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차 딜레마는 서로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것이므로 신뢰와 협력을 추구하는 이들의 성향에 맞지 않는 것이다. 반면 1차 딜레마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믿지 못하고 협력하지 않던 이들은 규제를 만드는데 더 적극적이 되어 2차 딜레마 해결에 협조한다. 그래서 결국 협력하는 사람과 협력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규제의 정도는 비슷하게 된다.

사회적 딜레마 해결은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협력에 영향을 주는 매우 많은 변수가 있으며,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오스트롬 역시 공유자원 문제에 만병통치약은 없다고 단언했다. 우리가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배반자를 줄이거나 제거할 수 있는 구조적 변화이다. 이는 앞서도 보았듯이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사슴사냥 게임으로 바꾸는 것이다. 사슴사냥 게임에서는 다른 이들도 협력할 것이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게임의 형태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커진다.

* 정리 :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10)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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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6손석춘/새사연 이사장

방귀가 잦으면? 어떻게 될까? 속담 맞추기 놀이판을 펼치자는 뜻이 아니다. 나름 품격을 갖추려는 성의다. 글 들머리부터 구린내를 폴폴 풍기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지금이 과연 예의를 차릴 때인지 하릴없이 회의가 든다. 대한민국 보수를 보라. 역한 구린내가 진동하고 있지 않은가. 과연 저들이 보수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낸 보기가 있다. 무릇 보수 또는 우파의 가치는 제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 있다. 세계사에 나타난 보수들은 예외 없이 제 민족의 우수성을 부르대며 권력을 누렸다. ‘위대한 프랑스’를 내건 드골이 대표적 보기다. 바로 그렇기에 보수의 가치는 국가보다 사회를, 민족보다 계급을 성찰하는 진보의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보수와 진보는 도무지 경계선을 찾기 어렵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찬찬히 짚어보라. 만일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 독립을 위해 몸 던질 섟에 되레 그 제국주의 국가의 장교로 독립군 학살에 앞장섰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 민족의 보수세력은 적국의 장교로 독립운동가들에게 총을 쏜 그의 반민족행위를 준엄하게 추궁해야 자연스럽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선 지금 자칭 보수들이 참으로 생게망게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 백선엽을 영웅화하는 작태가 그것이다. <중앙일보>가 그를 한껏 띄우자 마침내 국가기간방송인 한국방송(KBS)이 독재자 이승만에 이어 백선엽을 미화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고 공언했다.

백선엽이 누구인가.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 때 간도특설대의 장교였다. 부일세력이 대한민국 곳곳에서 방귀 깨나 뀌며 살고 있기에 이제는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도 대다수 사람들의 감성이 무디어졌다. 하지만 간도특설대 장교는 단순 부일세력이 아니다. 5년 전 <세계일보>의 젊은 기자들이 현장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그들은 “조선의 건아들”을 “선구자”로 추켜세웠다. 독립운동 선구자가 아니다. 독립운동 벌이던 선구자들을 ‘토벌’하는 “천황의 뜻을 따르는 특설부대”로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 악명 높았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에 따르면 “토벌하다 항일전사 2명을 포로한 놈들(간도특설대원)은 명월구 공동묘지로 그들을 끌고 가서 전체 대원을 집합시킨 다음 군도로 목을 자르고 시체 옆에서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악행의 증언은 곰비임비 이어진다.

1944년 5월에 마을을 습격한 “놈들은 녀자는 만나는 족족 강간하고 좋은 물건은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그래서다. 그 시절 만주에서 애면글면 살아가던 조선인 가운데는 일본이 패망한 뒤에 “남쪽으로 도망간 친일파를 잡기 위해 6·25 때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한 사람이 많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알다시피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활약’했던 백선엽은 그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지금 대한민국의 신문과 방송에 의해 ‘영웅’시 되고 있다.

어떤가. 모든 일에 붉은 색안경을 쓰고 덤비는 보수언론의 고위간부들에게 미리 밝혀두고 싶다. 나는 지금 백선엽이 한국전쟁에서 한 일을 평가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부일세력이 득세한 해방 뒤의 대한민국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뜻이다. 그 연장선에서 지금 우리가 백선엽을 영웅화해도 좋은지 묻고 싶을 뿐이다.

두루 알다시피 백선엽을 중용한 사람은 이승만이다. 백선엽은 박정희를 중용했다.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참여했는지는 증언이 엇갈린다. 어쨌든 박정희 또한 만주군 장교로 일본 국왕에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했던 친일파임엔 틀림없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총통’ 권력을 휘두를 때부터 지금까지 그를 노상 찬양해온 ‘지식인’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자칭 ‘주류 언론인’들이다. 이제 그들은 박정희 찬가에 만족하지 않는다. 민중이 피로 몰아낸 이승만을 다시 불러들인다. 마침내 독립군 학살에 앞장섰던 백선엽까지 온 국민에게 수신료를 받는 <한국방송>이 미화하고 나섰다. 자칭 보수를 자부하는 저들에게 차라리 연민을 느낀다. 대한민국 보수 세력은 존경할 한국인이 그렇게도 없는가?

일찍이 보수적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역사는 반드시 보복한다고 경고했다. 말끝마다 진보세력에게 ‘수구좌파’로 언구럭부리는 자칭 보수언론의 고위간부들에게 거듭 진지하게 묻는다. 정말이지 이대로 가다가 대한민국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정직하게 스스로 답하기 바란다.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학살한 경력이 분명하게 드러난 자까지 영웅화한다면, 대체 당신들의 보수는 무엇인가? 박정희의 딸이 차기 정권의 유력자로 떠오르는 상황이기에 눈이 더 침침해졌는가? 넌지시 다음 물음을 다시 던지는 까닭이다. 어떻게 될까? 방귀가 잦으면?

이 글은 주간 미디어오늘에 연재되는 기명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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