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이슈 /정치2012. 2. 15. 11:28



▶용어해설

최근 투표율?

각국의 정치, 민주주의, 투표율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제공하는 ‘민주주의와 선거를 위한 국제기구(International Institute for Democracy and Electoral Assistant, IDEA)'의 정보를 바탕으로 OECD가 사회보고서(OECD Society at Glance 2011)를 통해 발표한 최근 투표율 자료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8년 국회의원선거 투표율이다.

▶문제현상

한국 투표율 46%로 OECD 최하수준

OECD 사회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투표율은 46%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는 OECD 평균 70%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며, 브라질, 러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등 개발도상국들보다도 낮다. 호주가 95.2%로 가장 높았다.

투표율 하락 수준도 높음

1980년에서 최근 투표율까지의 투표율 하락 정도를 비교해보면 한국은 체코와 함께 32%를 기록하여, 슬라바키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았다. 멕시코, 스페인, 룩셈부르크, 호주 4개국을 제외한 OECD 회원국 모두 투표율 하락 경향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높은 수준의 하락률을 보인다.

▶문제 진단과 해법

고학력일수록, 젊을수록 투표 안해

선거체제비교조사(Comparative Study of Electoral Systems, CSES)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다른 국가들에 비해 고학력자의 투표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저연령층의 투표율이 낮은 것도 문제이다. 한국은 독일, 일본과 함께 55세 이상 고령자의 투표율이 높았다. 고연령층에 비해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는 35세 미만 저연령층에서의 투표율이 전체 투표율을 하락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 극복해야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이 투표율 저하의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정치권에 만연한 부정과 부패, 선거 때마다 남발하는 공약들과 반복되는 이념공세에 투표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치권의 근본적인 반성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촛불집회를 비롯해 수십, 수백만의 정치집회를 경험하고 ‘나꼼수’ 같은 아주 정치적인 팟캐스트 시청률이 세계 1위를 차지할만큼 정치에 대한 관심과 소통의 요구가 높은 나라가 한국이다. 젊은 층은 더욱 이에 민감하다. 대중의 의사를 반영하는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여기에 호응하여 유권자들도 보다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한다면 투표율은 급상승으로 반전될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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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젊은 층은 더욱 이에 민감하다. 대중의 의사를 반영하는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여기에 호응하여 유권자들도 보다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한다면 투표율은 급상승으로 반전될 것이다.

    2012.02.22 12:21 [ ADDR : EDIT/ DEL : REPLY ]
  2. 한국 사회가 유달리 투표율이 낮은 것은 참정권행사의 규제가 지나치게 많아서 아닐까요? 물론 통계는 미국도 절반 이하이지만 유독 지저분한 정치를 지닌 일본 조차도 2/3 이상인 것을 보면 더 그렇고 평균은 7/10 이상은 가지요. 이런 걸 보면 크게는 정당의 설립과 해산 모면 조항부터 시작해서 개인의 피선거권 행사, 이외 선거 시기의 의견표명까지 너무 많은 제약이 따르니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절반에 미달한 이유는 정당 설립제한이나 투표율에 따른 해산 규정이나 이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초 또는 극 양당제적인 정치와 더불어 정치의 기능이 사실상 업자들에게 종속 상황이라는 점이 주요한 원인입니다. 또한 그 때 그 때 지지자를 모집하는 정당구조도 이런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국, 일본과 공통점이라면 국회의원 1명에 대한 선출인구범위가 지나치게 넓은 사실(이건 한국의 감소가 있는 상황인데 1960년대 10만 여명에 1명 선출에서 현재 17만 여명에 1명 선출하는 것과 같은), 순위권 밖에 있을 경우 매체 토론회에 참여하기 불가능 한 점 일 겁니다.
    이런 것들이 대중의 의사를 반영하는 정치세력의 등장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2.02.23 13:24 [ ADDR : EDIT/ DEL : REPLY ]
  3. lecun

    저는 21살의 대학생입니다. 이번에 제가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글의 자료로 제시된

    `국제사회의 투표율 비교` 그래프을 사용해도 될까요? 부디 꼭 허락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13.03.09 17:10 [ ADDR : EDIT/ DEL : REPLY ]
  4. 안녕하세요 새사연입니다. 출처를 밝히신다면 새사연의 자료는 언제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공모전에서 좋은 결과 얻으시길 바랍니다. 완성되면 저희에게도 보내주세요^^

    2013.03.11 12:5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012.01.07김병권/새사연 부원장

베네수엘라와 엘 시스테마

2010년 9월 한 언론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상일동 주민센터는 3일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바이올린 교실’ 을 개강했다. 이 프로그램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저소득층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예술적 재능을 길러주고 음악으로 희망을 주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개설되었다. 그간 접수 기간을 거쳐 어린이 예술학교에 10명의 초등학생들이 교육을 받게 되었으며 꿈과 기대에 부풀어 있다. 바이올린 교실은 무료로 운영되며 강사료 20만원은 구의 지원과 상일동 주민자치위원회의 후원으로 운영될 예정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주민센터 관계자가 “엘 시스테마처럼 가정형편이 어려운 어린 학생들이 좌절하지 않고 음악으로 꿈을 갖고 아름다운 감성을 기를 수 있도록 예술학교를 개설하게 됐다.”고 취지를 설명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한 엘 시스테마(El Sistema)란 무얼 말하는 것일까. 베네수엘라 경제학자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Jose Antonio)라는 사람이 마약과 폭력, 포르노, 총기 사고 등 각종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베네수엘라 빈민가의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침으로써 범죄를 예방할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과 꿈을 제시하고, 협동·이해·질서·소속감·책임감 등의 가치를 심어 주기 위해 만든 무상 음악교육 프로그램이다.

물론 최근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의 빈민가 차고에서 빈민층 청소년 11명의 단원으로 출발한 엘 시스테마는 1975년에 창설되었고 35년이 지난 2010년 현재 190여 개 센터, 26만여 명이 가입된 조직으로 성장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지난 2011년 10월에 내한공연을 하였다. 앞서 상일동에서 이를 본딴 시도를 했다고 기사를 인용했지만, 최근 부천, 성남, 대전 등 전국의 수많은 자치단체에서 유사한 시도가 줄을 잇고 있는 중이다.

베네수엘라에서도 이 사례를 확대하려는 정부 차원의 계획이 있었다. 2007년 차베스 대통령이 미션 뮤지카(Mission Musica)라는 이름으로 베네수엘라 어린이들에게 악기와 음악 교육을 제공하는 사업을 추진했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남미의 석유 부국, 또는 미국과 각을 세우고 있는 차베스 독재자(?)라는 정도의 이미지만 있는 베네수엘라에서도 이처럼 훌륭한 주민 자치의 시도가 오래전에 있었고, 2000년대 접어들면서는 훨씬 더 다양한 실험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 우리에게 낯설다. 그 이유는 차베스 정권이 미국과 적대적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요인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알려진 것과 달리 오히려 차베스 정부 들어서면서 대단히 풍부한 주민자치와 참여 민주주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엘 시스테마보다 훨씬 더 내용을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뛰어넘는 참여 민주주의

주민자치운동은 흔히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단지 지역의 작은 단위에서만 가능하고 영향을 미치는 제한된 방식으로만 이해할 뿐, 한 국가 전체의 제도, 규범과는 다소 동떨어진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국지적으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지언정 광역과 국가 단위로는 의연히 ‘대의제 민주주의’를 당연시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2011년 전 세계를 흔들면서 타임지가 2011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시위자(Protesters)들의 세계적 저항운동은 현재의 대의제 민주주의가 얼마나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2011년 벽두부터 세계의 뉴스가 되었던 튀니지와 이집트의 민주화운동은 아랍의 독재자들에 의해 대의제 민주주의조차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접어두자. 그러나 비교적 대의제가 잘 발달한 스페인에서도 2011년 5월 이른바 ‘분노하는 자들’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광장시위가 한 달 내내 계속된다. 45%라는 엄청난 청년 실업률을 외면한 정부와 정당들에 분노해 청년들이 광장에 텐트를 치면서 저항운동을 하였던 것이다. 광장에서는 서로 토론하고 의견을 모으는 수평적 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가 구현되어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시위의 정점은 2011년 9월 17일 불과 30여 명의 청년들로부터 시작된 ‘월가 점령운동’이었다. 현대 민주주의의 상징인 미국의 중심부에서 비롯된 작은 규모의 월가 시위는, 불과 수주 뒤에 수 만 명으로 불어났고 전 미국을 넘어 세계로 확산되면서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아랍과 스페인, 월가, 그리고 영국과 인도, 이스라엘 등에서 벌어진 이들 시위는 무엇을 의미할까. 현재의 정부와 정당, 의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청년들을 중심으로 소셜 네트워크라는 소통수단을 통해 서로 의견을 공유하면서 거리로 나가 직접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한 것이었다. 거리에서도 과거처럼 조직된 노동자나 사회단체가 단체가 아니라, ‘익명’의 다수들이 나와서 특정한 지도부도 없이 수평적으로 서로 토론하고 의견을 모아가면서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대의제 민주주의 한계를 정면에서 비판하면서 13년 전에 집권한 베네수엘라 정부가 바로 차베스 정부다. 1999년 차베스 집권 이전의 베네수엘라는 수 십 년 동안 양당체제가 지속되면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지만 사회는 개혁되지 못했고 빈민층은 계속 늘어가기만 했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들도 관료주의에 젖어 민생을 제대로 돌보는데 실패했다. 1998년 집권한 차베스 정부는 이러한 베네수엘라의 엘리트적 정치구조를 타파하고 불평등한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관료나 대의제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방식으로 사회 경제적인 과제들을 해결해가기 시작한다.

 집권 초반기에는 교육미션, 의료 미션, 주거와 토지개혁 미션, 상점과 물품 조달 미션 등 다양한 이름의 미션(Mission)을 만들어낸 후, 거기에 시민들을 참여시키고 중앙정부가 각 지역의 미션 조직들에게 자금을 직접 제공한다. 특히 이런 방법으로 빈민지역과 이른바 비공식 경제부문(노점상 등)에서 문맹을 타파하고, 의료 서비스를 개선하고 도로와 주거 환경을 바꾸며, 생필품을 값싸게 공급받을 수 있는 유통망을 넓히는 등의 중요한 사회개혁을 단행한다. 이와 함께 낙후한 산업구조와 높은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동조합’을 대대적으로 창설한다. 단순히 소비자 협동조합이 아니라 지역에서 생산자 협동조합을 만들어 부족한 생필품 생산을 담당하게 하는 한편, 지역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게 한다. 2000년대 중반에는 그 수가 15만 개에 달하고 여기에서 일하는 조합원이 150만 명에 달할 정도로 폭발적으로 협동조합이 늘어나기도 했다.

베네수엘라 주민자치의 상징 주민평의회(Communal Council)

각종 사회개혁 미션, 엄청나게 팽창한 협동조합과 함께 베네수엘라 주민자치 실험의 상징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주민평의회(Communal Council)다. 2000년대 초 중반까지 베네수엘라에서 진행된 것은 교육, 의료, 주거, 치안 등 각 사회개혁과제 별로 주민들을 참여시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적, 물적으로 중복과 혼란이 발생하고 지역 단위에서 효율적이고 통일적으로 사회개혁이 진행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주민 평의회는 이런 중복과 혼란을 방지하고 지역에서 주민들의 통일적인 참여조직을 만들자는 취지로 2005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브라질의 지역 참여예산제 등에서 영감을 얻어 비교적 넓은 지역단위에서 자치조직을 만들려고 했지만 곧 실패한다. 범위가 넓으면 주민들 전원이 참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기존의 정당 지역조직이나 지역 유지 등에 의해 민의가 왜곡되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지자체에서 나타나는 모습과 유사하다. 실패를 교훈으로 베네수엘라는 주민 전원의 참여가 가능한 아주 작은 단위, 도시에서는 대략 200~400가구를 묶어서 주민평의회를 만들게 된다. 우리나라로 보면 중간 규모의 아파트 단지 정도가 되는 셈인데, 만 15세 이상 성인 전부를 대상으로 최소 20%이상이 참여하는 주민총회를 열고 도로건설, 주거, 수도, 전기, 치안 등 주민생활문제 관련 위원회를 만들고 대표를 뽑는다. 일종의 서민은행 겪인 주민은행도 만든다.

정부는 주민평의회가 제대로 만들어지도록 컨설턴트를 파견하고, 요건을 갖춘 주민 평의회를 등록해주고, 지역 현안에 대해 스스로 의사결정권을 갖게 해주고 이를 법적으로 보장해준다. 공동체 주민들이 수평적이고 직접적으로 참여하여 동네의 각종 현안들에 대해 의사결정을 하고 실행을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2006년 4월 주민평의회 법을 제정해 법률적 조직으로 지위를 격상시킨다. 특히 등록된 주민평의회에게 지자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자금을 제공하는데, 주민 평의회가 조직된 1년 후 중앙정부가 지방자치 단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 주민평의회에 약 5조 원을 제공한다. 이는 중앙정부의 지방 자치단체 전체 교부금의 30% 정도에 해당할 정도로 큰 것이다.

각종 사회개혁 미션을 만들어 본 경험과 중앙정부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주민평의회는 2006년 1년 동안 1만여 개를 넘을 정도로 빠르게 만들어졌고 이후 대략 3만 여개가 만들어진다. 베네수엘라 인구 기준으로 대략 3~400가구 당 1개가 만들어진 셈이다. 2009년에는 주민평의회법이 개정되면서 그 규모를 확장시키는데, 특징적인 것은 여러 개의 주민평의회가 모여서 코뮤나스(Comunas)라고 하는 것을 만들고 좀 더 큰 규모의 지역 공동과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00~400가구 단위로 할 수 있는 과제는 매우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도 카라카스의 한 외곽지역에서는 5개의 주민평의회가 공동으로 사회적 기업 형식의 생필품 유통시장(일종의 중형 수퍼마켓)을 만들고 주민평의회 공동소유로 운영하는 실험을 했다. 상품은 농촌 지역과 직거래 하는 방식으로 조달하면서 유통마진을 줄이고 수익금이 발생하면 지역의 또 다른 공동사업에 투자하기로 한다. 그런 방식으로 지역 라디오 방송국, 독거노인을 위한 요양시설, 그리고 지역 공동체를 위한 교육시설을 단계적으로 만들어 나갈 구상을 하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이런 분야에 거대 유통기업이 기업형 수퍼와 같은 방식으로 동네 상권에 진출하거나, 아니면 영리적인 자영업 형태로 보육, 요양시설 등이 난립할 것인데, 베네수엘라는 주민 자치조직이 스스로 공동체의 이름으로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주민평의회 운동이 6년째 이어오면서 늘 성공적이었던 것도 아니고 목표한 대로 주민의 열성적인 참여를 보장해온 것만은 아니다. 최근의 조사 자료를 보면 짧은 시간 동안 수만 개의 주민평의회가 급조되면서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고 운영 방법이 미숙해 실패한 것도 대단히 많다고 알려졌다. 특히 2007년 이후 베네수엘라 전역에 생필품 부족이 계속되고 세계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중앙정부는 지역 주민자치 조직보다는 중앙의 대기업들이 생산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탓에 주민평의회에 대한 자금 지원이 절반가량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부 지역에서 주민들의 참여 열의가 떨어지고 주민평의회도 상당부분 동력을 상실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의 주민평의회운동은 유럽이나 다른 지역의 풀뿌리 운동과는 상당히 다른 특징을 갖는다. 무엇보다 특정 지역의 자발적 소규모 자치운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민평의회 운동은 주민의 자발적 참여를 위한 운동이기는 하지만, 중앙정부의 적극적인 정치적 기획이자 전국적으로 동시에 추진된 운동이었고, 지역의 자생력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의 법률적 지위 인정과 직접적 자금지원을 받아 조직된 운동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전국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절대적 장점과 함께, 주민들의 착실한 참여 경험과 시행착오를 축적하지 못해 내실이 부족하다는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역사적으로 특이한 베네수엘라의 주민자치운동은 아직 성공과 실패를 예단하기는 이르다.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 참여와 주민자치에 대한 실험에 있어서 매우 독특하고 중요한 경험이 될 것은 분명하다. 엔리케 두셀 멕시코 국립자치대학 교수(77) 베네수엘라 주민 평의회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민중의 참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민주주의의 시도이며, 세계 정치의 새로운 경험”이다. “제도적으로 보장된 3만여 개의 주민평의회가 각각의 의제를 심의하고 제안하는 베네수엘라의 모습에서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발견”했으며, “중요한 것은 이 모델이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는 것이 아니라 시도 자체가 가치 있고 깊이 있게 분석할 필요가 있으며 21세기 정치철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도 베네수엘라 주민자치운동을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 글은 월간 주민자치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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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이슈 /정치2009. 5. 10. 18:28

우리는 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선출과정’의 민주성만을 매우 제한적으로 인정할 뿐, ‘통치과정’의 민주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난 글에서 확인했다. 2008년 촛불 시위에서 분명하게 확인했듯이 국민에게는 대통령을 탄핵할 권한이 없으며, 국가 중대사를 국민투표에 부의할 권한도 없다. 민주주의가 ‘통치주체’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귀족정일 뿐이다. 현대의 귀족은 ‘정치 엘리트’, ‘의원’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선거를 통해 등장한 선출직 공무원들이 전 국민의 의사를 대신하는 ‘엘리트주의’는 보수세력만의 독점물은 아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대다수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당과 국가, 민의 결합을 제대로 이루어내기 보다 정치적 엘리트를 자임한 당의 정치 독점으로 귀결됐다.

진보정당 - 민주주의 - 리더십

역사책을 뒤적일 것도 없다. 오늘, ‘민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자던 포부를 내세운 진보정당들은 얼마나 대중과 내부 성원들의 민주적 의사에 근거해 운영되고 있는가? 또한 진보정당이 그리는 대안적 미래상이 얼마나 인민주권적 미래상을 그리는 데 적절한가? 새로운 대안체제를 꿈꾸는 진보정당 역시 자유민주주의와 경직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유산 속에서 허우적대며, 민중이 주체인 민주주의의 참의미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철히 평가해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정당의 역할을 대중의 의사에 따라 휘둘리는 수동적 역할에 국한시켜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중성을 강조하며 대중 추수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도, 그 과정이 될 수도 없다. 당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이해, 요구를 파악하여 대중 속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집단적 정치 활동체다. 리더십 없는 정치는 민주주의의 질을 떨어뜨리며,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게 만든다.

그렇다면 당의 리더십은 어떻게 발휘되어야 하는가? 폭력적 방식을 동원하기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허용한 ‘선거 경쟁’의 룰을 받아들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정체성과 대중의 요구 사이에 존재하는 딜레마에 부딪혔다. 급진적이지 않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개량’이 요구되었고, 그들의 정책은 보다 건전한 체제를 요구하는 ‘개혁’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정당 내부의 토론과 회의에는 급진적인 언술이 넘쳐나다가도 선거 때만 되면 기성 정당과 별 다르지 않은 ‘건전한’ 구호, 기성 정당의 부패나 무능에 대한 일방적 비판만이 넘쳐났다. 이제까지 선거운동의 경험은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진보정당운동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동시에 정치적 리더십의 공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정치적 리더십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만을 분명히 한 채 흔들림이 없는 구호를 남발하는 것도 아니고, 정당 내부의 열혈 활동가들의 주장을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들의 유토피아적 구호로 치부하며 대중의 의식이 존재하는 그곳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진보적인 정치적 리더십은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고, 대중 스스로 진보성을 갖도록 만들기 위한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동시에 매우 헌신적인 활동을 필요로 한다. 비록 ‘선거’가 아닌 항쟁적 방식의 혁명이라 할지라도, 다수 대중의 공감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억누르고 왜곡하는 억압적 정치권력이 공존할 때에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새로운 민주체제를 만들기 위한 진보정당의 정치적 리더십은 당의 전망을 대중에게 끊임없이 설득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대중의 공감을 얻는다는 것이 대중의 현재 기호에 맞추는 것도 아니고, 대중의 의사와 상관없이 깃발을 앞세우며 강요할 것도 아니다.

정치적 리더십을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지 않고서는 선거를 통해서건, 혁명을 통해서건 구현될 새로움이란 아무 것도 없다. 진보적인 대안체제의 창출은 그 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민주주의’를 동반해야 하고, 그 내용과 방향, 폭이 어느 정도로 구현될지는 정치세력의 리더십 역량에 크게 의존한다.

대중을 신뢰할 때 ‘인민주권적 민주주의’ 가능

물론 당의 정치적 리더십이 발휘된다 하더라도 대중의 지지가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대중들도 잘못된 선택을 하기고 하고, 올바른 길을 외면하기도 한다. 가깝게는 지난 대선에서, 멀게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이 권력연장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선거와 국민투표에서 대중은 분명 잘못된 선택을 했다.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스위스에서조차 강력한 이익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주민투표를 추진하는 사례도 있었고, 20세기 초 스위스 모델을 수입했던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거액의 홍보비를 뿌릴 수 있는 쪽이 주민투표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다.

‘대중에 대한 신뢰’와 ‘민주주의’는 대중의 옳은 판단에 기대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상호간의 의사소통과 정보·지식의 습득을 통해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중들의 의사를 왜곡하는 다양한 외부요인을 차단하도록 노력하며, 우리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들을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통치주체’의 문제이며 그 주체가 바로 대중이라면, 대중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 자체가 작동할 수 없다. 민중에 대한 신뢰, 이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는 당의 리더십과 대중 간의 지속적인 교감을 통해서만이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이상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다.

2010년 지방선거가 2008년 촛불로부터 시작된 정권과 진보·개혁적 국민 간 격돌이 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예상하고 있지만, 진보정당이 먼저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대한 관점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승리를 자신할 수는 없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대중의 저항은 민주주의의 인민주권적 재구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정서가 2008년 촛불 수준에서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리석다. 보수세력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과거 어느 수준으로의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정치세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동안 ‘민주대연합’으로 상징되는 반독재 연대가 실제로는 동등한 관계로서의 연대가 아니라 제도권 내 거대 야당의 지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도적 공간에서 진보적 대안을 실현할 방법을 마련해 놓지 못했던 우리, 그리고 진보정당의 한계가 만들어 놓은 결과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제까지의 관성 속에서 선거 공보물에 얼굴 하나 더 들이미는 것에 만족할 텐가, 아니면 민중이 주체되는 대안적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새 판을 짤 것인가? 2010년 지방선거를 다시금 우리 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검토하고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전환점으로 삼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지방, 그리고 자치에 대한 인식부터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진보정당에는 집권전략이 아니라 ‘집권 후 전략’이 필요

그동안 진보정당의 전망 속에는 지방자치가 크게 자리 잡혀 있지 않았다. 지방자치는 중앙권력의 하부기관으로만 인식되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중앙권력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중앙권력을 얻을 때만이 현실의 여러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고, 구체적인 대안은 집권 이후 자연스레 나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동안 진보정당들의 지방자치 대안은 ‘집권’ 그 자체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진보정당에서 제출된 지방자치론은 모든 것이 ‘집권’ 그 자체만을 위한 전략과 전술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류의 관점은 당 내부에서만 겨우 합의 가능한 것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모을 수 없었다. 당의 잠재적 지지자들이 당의 집권을 강력하게 소망할 어떤 유인도 제공해 줄 수 없는 것이다.

대안적 전망이 집권 이후에 마련될 수 있다는 안일한 발상은 오히려 집권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현실정치세력에 대한 불만이 그 정치세력과 정반대의 정치노선을 추구하는 이들에 대한 지지로 귀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막연한 환상이다. 거대 양당이 존재했을 때, 두 정당의 놀랄만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선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머무른다. 특히 한국 정치구도는 새로운 대안에 대한 선택을 요구하기보다, ‘가장 나쁜 세력’에 대한 ‘심판’을 강요하는 ‘적대성의 정치’ 상황이기 때문에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전략은 적대성의 정치로 수렴된 대중의 불만을 어떻게 ‘대안 선택의 정치’로 전환시킬 것인가가 주된 과제가 되어야 한다. 현실정치세력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한계를 벗어나 또 다른 분명한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어떤 대안을 선택할 것인가’로 정치구도가 전환되지 않는다면 제도정치공간의 양극화 현상은 계속 심화될 수밖에 없다. 곧 진보적 지방자치 전략은 집권 과정에 이르는 전략을 고민하는 것을 넘어, 집권 후 전략을 마련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합의하는 것 자체가 집권 전략이다.

문제는 지방자치에 대한 진보정당의 ‘집권 후’ 대안이 여전히 모호하다는 점이다. 여전히 진보정당의 전략은 주민자치를 진보적 정치엘리트의 활동의 보조적 수단 정도로만 인식하는 경향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으며, 풀뿌리 운동조직을 지지의 대상으로만 사고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여전히 제도 밖에 머무르며 가장 좋은 정치세력에게 표를 던지는 대상일 뿐, 지역 자치를 구현할 핵심 주체로 사고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글에서 논의한 민주주의에 내재된 ‘민중 스스로의 통치’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지방자치를 사고하는 기본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 국가 수준의 민주주의는 불가피한 위임을 받아들인 가운데, 대중의 ‘필요에 의한 통제’, 즉 국민투표와 소환, 발안제라는 통제기제를 사용해 주권자인 대중의 지위를 보장하는 것이라면, 보다 작은 규모의 지방자치는 인민주권이 실질적으로 구현되는 체제를 모색할 수 있다.

지역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근본 토대

소규모 지방, 소규모 공동체 수준에서는 일반적으로 크기가 큰 집단에 비해 집단 효능감(collective efficacy), 협동을 통한 긍정적 결과에 대한 기대, 집단 목표에 대한 몰입 수준이 높다. 통치의 범위가 작을수록 집합행동에 참여하는 개인들에게 돌아가는 집합재(collective goods)의 몫이 커지고, 자발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에 의해 집합재가 공급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소규모 집단이 대규모 집단에 비해 성원들이 공동이익을 위해 단합된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방자치는 규모의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데도 불구하고 국가 수준의 정치와 다름없이 엘리트주의화 되어 있다. 또한, 지역 주민이 지역통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제한적 수준에서 보장할 뿐, 실질적으로는 지역사회의 지배계급에 의해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 단위의 민감한 이슈에 비해 지역주민의 관심을 더 받지 못한다.

사상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한 지난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제외하면 지방자치선거 투표율은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 투표율보다 항상 낮았다. 오히려 지역에서의 주민 참여는 비제도적 주민운동의 형태로 이루어져 왔으며, 지방정치에 적극 개입하고자 하는 주민자치운동 또한 스스로 집권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보다 단체 자치의 감사자,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머무르고 있다.

                                 [그림] 대선, 국회의원, 지방선거 투표율



이런 결과의 이면에는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정치개입을 가로막는 구조적 원인이 존재한다. 지역사회의 관변조직이나 토호, 이권 브로커, 개발업자 등 특수한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의 발언권이 과잉 대표되는 상황과 철저히 거주지와 근무지가 분리된 조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장시간 노동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은 지방자치에 대한 ‘참여의 불평등’을 조건 짓는다.

이권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단체 활동으로도 충분한 생활이 보장되는 보수적 풀뿌리 단체에 비해, 진보적 풀뿌리 조직들은 매우 짧은 여가의 시간을 모두 투자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국제노동기구(ILO)가 2007년 발표한 ’2004~2005년 세계 노동시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장시간 노동 비율은 49.5퍼센트로 페루(50.9퍼센트)에 이어 세계 2위였다. 참여할 시간이 없다면 자치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정치는 지역에 상주하는 보수적 조직과 자영업자, 부녀회를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으며, 낮은 투표율 속에서 각종 조직 동원이 가능한 금권력을 가진 보수세력은 항상 승률 높은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지역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당은 이런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 과제는 지방자치의 민주주의적 재구성이라는 과제와 국가수준의 새로운 민주화라는 과제를 긴밀하게 연계시킨다. 다시 말해, 국가 수준의 새로운 민주화는 지역주민의 직접적 참여를 지향하는 지방자치를 통해서 가능하며, 지방자치의 재구성은 실질적 자치를 가로막는 국가차원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과 병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진보정당의 지방자치 전략은 지방선거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총선과 대선까지 연계시킬 수 있는 종합적 전략 속에 배치되어야 하고, 이를 현실화할 동력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다양한 대안적 가치와 사회적 힘의 연계, 즉 연대전략의 문제를 제기한다.

* 다음 연재에서는 ‘시민운동과 새로운 민주주의’를 다룰 예정이다.

** 이 글은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와 민주노동당 2010위원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진보적 지방자치론’ 프로젝트의 기초 토론문의 일부로 제출되었다.

손우정/새사연 연구원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재구성①] '정치적 냉소주의', 선거민주주의 한계 뛰어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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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거 보통선거라는 것은 한 편에서는 딜레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한 편에서는 일부 자신들에게 냉소적인 혹은 가장 덜 급진적인 층의 동의도 얻어 집권을 했으니까요... 이 점에서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PSUV 의 경우도 지금 상황에서는 최대점에 도달할경우 스위스(서사) 모델에 도착할 거라는 생각입니다. 스위스 모델은 직접 민주주의로의 초대(리북,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87315874 )과 같은 도서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를 취급한 도서에 나와 있습니다.(개중에는 절판도 있지요.) 스위스 모델도 일부 진보진영(모두 존칭 생략)의 모델이기도 한데 주로 대외적 관계인 중립국가 측면에서는 김용중과 지난 2007년 대선에서 논란 끝에 민주노동당 선대위에서 기각했던 코리아 연방공화국(http://blog.daum.net/corea1219 )에서 언급한 바 있고 앞 서의 중립국과 같은 체제는 다시쓰는 한국현대사1 ~ 3권의 저자 박세길의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시대의창)에서 지향점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정치모델과 경제모델을 모두 추구하는 모델은 우석훈이 있지요. 우석훈은 헝가리의 칼 폴라니와 유사합니다. 저도 한때 중립국 형 모델은 이상형으로 생각한 바 있습니다만 스위스 모델 또한 자본의 천국임(이 때문에 미국 및 EU권과의 FTA논란도 있었지요...)과 동시에 자산도피처라는 사실도 존재합니다. 이의 비판은 레프트21의 우석훈 비판기사 '시장의 공세에 맞설 대안경제 체제는 어떻게 가능한가?(http://www.left21.com/article/6501 )'에서도 있습니다. 베네수엘라도 현재의 상황은 자본진영에 의한 차베스 탄핵 시도들도 합법적으로 진행한 사실이 존재한 것으로 볼 때 성공치가 스위스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실패치는 칠레의 아옌데와 같은 비극적이거나 브라질의 룰라와 같은 희극적인 모델을 예상한다고 합니다. 참고문서는 노동자 정치신문(노정신)의 '최근 당건설 토론과 강령논의에 대한 비판과 입장1(http://lmagit.jinbo.net/bbs/zboard.php?id=newspaper&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l1=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09 )'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다른 예로 최근 부상하는 불란서/프랑스의 올리비에 브장스노/신 반자본주의 당(NPA)과 같은 경우도 2002년 포기했던 혁명모델과 같은 것을 (선거를 통해서라도) 집권후에는 혁명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죠... 캘리포니아의 사례는 이미 쟁취한 민주제도의 상층도입의 희극적 실패를 의미한다는 생각입니다.
    이외에 한국의 제도는 미국의 간접선거제도를 제외하고선 적대성의 발현이 극대화하는 제도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다른 결선투표제(불란서/프랑스, 희랍/그리스 등)나 선호투표제(호주/오스트레일리아, 애란/아일랜드 등)를 사용하는 국가들에서도 이는 존재합니다만 상대적으로 덜 한 점이 있고 이후에 위에서 언급한 올리비에 브장스노/신 반자본주의 당(NPA)와 같은 존재가 부상한 점이 존재합니다. 한국사회는 지난번 씨리즈에서 언급한 것 처럼 일용직 이나 위에서 언급한 장시간 노동자의 존재 등 노동의 탄력성이 적은 사람들이 많이 존재해서 이런 제도의 도입이 난관에 직면한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 점에서는 87년 629의 국면에서도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대통령들은 결선투표제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순위 역전을 경험하고나서 결선투표제에 대한 의견을 뒤집기까지 했습니다. 이래서 힘쎈자의 의견에 대해서는 체념하거나 혹은 냉소하거나 지지하는 것인지는 글쎄요...
    강한 양당 존재에 대해서는 뒤베르제의 법칙(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96468 ,항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몇 가지 반례도 제시했습니다. )이라고 하는 군요... 어디까지나 제도가 그렇다는 것이지만 꼭 제도에서만 찾기는 힘들도 어떤면에서는 전 시대의 정리 이전에 다음시대로 급격하게 이동한 이로인해 숙청대상이 승승장구하는 모순 - 가령 한국의 친일파에 의한 역청산과 같은 - 이 존재한 식민지를 경험한 (준)주변부의 부작용도 존재하긴 합니다. 다른 사회에 비해서도 경제개발 같은 차원에서의 중앙으로부터의 동원까지 존재한 사회여서 특히 더 그렇다는 생각이지만요...- 뒤베르제의 법칙의 예외 항목에서의 한국과 같은 식민지 생활을 했던 인도의 예 그리고 한 때의 한국의 예와 비견해서... 이래서 한국사회는 이의 완화를 위해서라도 결선제와 같은 제도가 절실했다는 생각입니다.

    지방선거제도 또한 지방의 현안 해결과 같은 자치문제보다는 애초부터 국회의원(도입당시인 2대 국회가 반 이승만 세력이 5/8가량 국회를 점하고 있었습니다.)들을 견제할목적으로 도입했고 이것은 한 동안 1961년 516 이후 30년간 동면상황에 처했고 1991년 불완전한 부활(부활시엔 자치단체 의원에만 선거를 한정함)과 1995년 부활의 완성과정(자치단체장도 선거목록에 포함)을 통과합니다. 도입동기부터 이랬으니 왜곡도 어쩌면 당연했을 과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지막으로 진보정당의 부활 과정이 소련 붕괴후의 상황이어서 그런지 의회주의 적인 모습으로 부활 했습니다.- 1991년 경의 민중당 등. 물론 부활 전의 50년대의 진보정당 진보당도 상층부 중심의 모습이었고 1960년의 419공간에서의 진보정당도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반공체제하에서라는 제약과 동시에 부활시기엔 소련의 붕괴도 있어서 혁명정당 모델은 낡은 모델로 인식한 측면이 존재했을 겁니다. 이래서인지 손 우정 선생님의 말씀처럼 평상시의 토론에서는 과격한 언사들도 나오다가 선거시기나 국회 개회시기 등이 되면 온건화하는 모습들이 공존하는 이유일 겁니다. 한 편에서 이제까지 개제했던 사민주의나 기타 의회주의 급진정당 모습들 처럼 대리주의나 분업체제가 존재하는 모습도 익숙한 모습인데 오히려 선거제도마저 나쁜 한국에서는 불리한 존재양식이죠... 원래 정당의 구성 이외에도 각종 조직화가 더불어 발생해야 했지만 탈냉전과 냉전의 유산 반공체제 국가의 모습으로 인해 상당부분 쇠미한 진보정당의 모습을 들여온 결과가 오래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편에서 조봉암의 경우는 지금의 민주당의 전신인 50년대 민주당의 신 익희의 1956년 대선 정국에서의 급서로 인해 30%의 표를 득표(신 익희 추모표를 추가할 경우 약 45%)하지만 대중적 조직은 극히 적은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노동조합 등도 존재하고 해서 꽤 많은 대중조직들이 존재하지만 아직은 진보정당 내부와 이 측면의 각종 대중조직 내부에서도 직접주의(직접민주주의)는 저수준입니다. 이를 고양하는 문제가 클 것 이라는 생각이네요...

    2009.05.30 12:53 [ ADDR : EDIT/ DEL : REPLY ]

촛불의 물결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추가협상 이후 정부의 고시 강행과 갈등의 격화
그리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등장....

아직 촛불의 향방과 우리 사회의 미래를 점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미 촛불의 물결은 우리 사회의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습니다.
가히 촛불 혁명이라는 말이 지나치지 않은 까닭입니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은 '촛불과 한국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선, 여러분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2008년 오늘 촛불에 비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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