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이슈 2008.10.22 10:02



미국발 서브프라임 사태의 충격이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이미 아이슬란드와 헝가리, 우크라이나가 IMF에 손을 벌렸고, 파키스탄 또한 구제금융 승인을 위해 교섭하고 있다. 에스토니아를 비롯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발트 3국과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도 IMF 프로그램을 받아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과거 외환위기 경험이 있는 터키, 아르헨티나 등도 이미 요주의 관찰 대상에 올랐다.

더군다나 일본과 유럽의 3분기 마이너스 성장률이 기정사실화되고, 미국 또한 1퍼센트 미만의 성장률이 예상되고 있다. 더욱이 중국의 3분기 성장률이 9퍼센트로 추락하여 4사분기 이후 세계경제는 심각한 ‘불황’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 우리나라 또한 최근 치솟는 환율과 주가 폭락으로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있다. 이렇듯 세계경제 침체는 내수가 취약한 ‘수출주도 성장경제’에 IMF시대에 버금가는 타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신 브레턴우즈 체제 구축 논의 ‘활활’

세계는 지금 심각한 불황을 예고하며 ‘달러’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사태의 주범인 ‘미국’은 달러를 주조할 수 있다는 특권으로 그나마 한가한 상황이다. 이러한 국제통화체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브레턴우즈 체제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이 유럽연합을 중심으로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비록 지금은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부실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부분 국유화’ 조치를 취하는 등 위기 대응과 공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점차 새로운 국제 금융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와 기구 마련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국제 금융질서를 어지럽힌 핵심 문제는 급격한 자본이동(capital mobility)과 환율 변동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71년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된 이후 이미 100여 건의 외환위기가 발생했음에도 미국의 강력한 정치, 경제, 군사적 헤게모니로 불안정한 ‘달러 체제’는 유지되고 있다. 2조 달러에 육박하는 외환보유고를 갖추고, GDP의 11퍼센트를 초과하는 경상수지 흑자를 내는 중국, GDP의 4%, 6%에 이르는 미국의 재정, 경상수지 적자는 이를 단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수출주도 성장정책을 통한 막대한 외환보유고 비축은 미래의 ‘외환위기’ 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한 조치와 관련이 있다. 이는 각국이 개별적으로 학습한 위기 예방조치이자, 불안하고 불공평한 국제 금융질서를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국제 금융질서가 새롭게 개편되지 않는다면 달러를 비축하기 위한 주변부 국가들의 수출주도 성장정책과 중심부 미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라는 세계경제 불균형은 언제든지 제2의 서브프라임 사태를 유발할 수 있는 주요인임을 주목해야 한다.

‘수출주도 성장경제’와 ‘차입-소비형 성장경제’의 빗나간 불균형

세계경제의 불균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수출주도 성장경제는 세계경제의 ‘최종 구매자’로 묘사되는 미국의 소비시장에 재화를 판매하면서 유지될 수 있다. 또한 GDP의 70퍼센트를 초과하는 미국의 소비지출은 실질소득이 정체되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가정에서, ‘차입’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구조다. 90년대 미국의 신경제가 IT 혁명과 주식 버블을 통해 유지되었다면, 2000년대는 부동산 버블을 통해서 간신히 버텨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두 번의 자산가치 상승을 통한 차입-소비성장형 버블 속에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1991년 이후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2006년에는 GDP의 6퍼센트에 이르렀다. 또한 중국 기업과 미국 소비자의 연계는 미국의 글로벌 금융기관이 주도하였고,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달러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국채를 매입(8월 기준 5,400억 달러)함으로써 최종 완결되는 구조였다.

사실상 미국의 차입-소비성장형 버블이 세계경제의 불균형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이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사태로 소비지출의 위축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불균형의 불안한 균형’의 토대가 무너진 상황에서 금융위기가 점차 해소되더라도 실물경제의 침체는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01년 미국의 경기침체가 재정균형의 U-턴(흑자에서 적자로)과 대규모 금리인하(6.5%→1%)에 따른 소비지출의 확대로 극복되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재정, 통화정책 어느 것 하나 녹록치 않은 상황이라 경기침체의 극복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2008년 회계연도(2007 10월~2008년 9월)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적자는 지난해(1,615억 달러)의 세 배에 육박하는 4,548억 달러로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구제금융 7,000억 달러와 추가 경기부양으로 거론되는 1,500억 달러를 포함하면 내년 재정적자는 거의 1조 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지난 8월 5.25퍼센트였던 금리를 1.5퍼센트까지 내렸지만 신뢰가 무너지고 천문학적인 금융부실이 노출되고 있는 지금,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

은행의 대출기준 강화 및 자본금 확충을 위한 부의 레버리지 효과, 불확실성 증가에 따른 기업의 투자 위축, 실업률 상승과 실질소득 정체에 따른 가계의 소비 위축 등은 경기침체의 페달을 가속화시킬 것이다. 특히 글로벌 불균형이 새로운 균형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에서 ‘외환위기’를 방어하기 위해 각국의 출혈 수출정책이 가속화된다면, 세계적 디플레이션과 구조조정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시장은 신뢰 잃어... 새 금융질서는 ‘규제와 감독’ 아래에서

앞으로 새로운 금융질서는 1997년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필두로 한 개별 국가의 외환위기, 세계경제의 불균형, 그리고 금융부실의 세계화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특히 동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중심부 채권국가들의 상환을 보장하기 위해 주변부 국가들의 거시경제정책을 무력화하거나 헐값에 공기업을 매각하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지금 중심부의 문제가 낱낱이 드러난 이상 ‘달러 체제’를 완전히 새롭게 개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특히 급격한 자본이동의 문제가 개별국가가 직면한 외환위기의 본질이라면, 단기 외환시장의 변동성을 줄일 수 있도록 단기 외환거래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동일한 비율의 세금(토빈세)을 부과해야 한다. 또한 헤지펀드와 사모펀드 등 투기자본의 부정적 행위가 모든 금융기관으로 학습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헤지펀드와 사모펀드에 대해서도 다른 금융기관과 동일한 건전성, 안정성 감독 및 규제를 적용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조세 피난처를 통한 역외 조세 및 규제 회피를 방지하기 위해 국제적인 감독도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별국가들은 환율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외환준비금을 매각해야 하는 사태를 방지해야 한다. 개별국가의 달러 비축량에는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시장은 그 규모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현 체제는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막대한 레버리지 차입이 용이한 국제적 투기꾼들은 하락하는 통화를 공매도하여 이득을 챙기려는 유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미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은 자국의 발권력과 태환성으로 통화를 무한대로 매각할 수 있기 때문에, 외환위기에 자유로운 비대칭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달러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의 방향은 개별국가 통화의 ‘태환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국내적으로 최종적인 지불청산이 국내 통화를 통해 중앙은행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을 세계적 범위로 확대하는 것이다. 현대 금융경제에서 채무자는 제3자, 특히 자신보다 ‘지불 피라미드’ 구조에서 상층에 있는 금융기관이 발행하는 ‘지불증서’를 통해서만 부채를 청산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중앙은행이 있는 구조를 세계적으로 확장시켜 국제청산통화(International Money Clearing Unit)를 도입하여, 각국의 중앙은행만이 보유하는 국제청산통화의 태환성을 세계은행이 보장하는 방식이다.

물론, 초기 국제청산통화와 자국 환율은 고정되어야 하며 국내 물가상승률에 따라 환율은 일정 범위 내에서 협의로 조정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타국에 비해 국내 생산성 증가는 국제청산통화에 대비한 자국 화폐의 실질경쟁력을 높여 생산성 이득이 무역상대국과 공유되지만, 상대적인 시장점유율도 높이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움직임과 더불어 국내적으로는 외환거래의 변동성을 줄이기 위해 역외시장에서 발생하는 외환거래의 비중을 축소하고, 외화 자산을 차입하거나 외국인의 포트폴리오 투자의 경우 중앙은행에 일정 기간(통상 1년) 동안 자산의 일부를 지준금의 형태로 예치하도록 하는 가변예치의무제도(Variable deposit requirement)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급격한 자본 유출을 방지하는 예방체계가 미연에 갖추어져 있었다면, 은행의 외화차입에 대해 외환준비금을 동원하여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사태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기 차익거래를 노리는 은행의 무분별한 외화 차입과 만기 불일치 문제가 최근 금융권 유동성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서브프라임 사태로 말미암아 ‘시장이 자원과 정보를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한다’는 시장 근본주의는 신화이거나 망령에 불과했다는 사실. 금융위기로 전 세계 경제가 침체되었지만 배워야 할 ’피의 교훈’이다. 지구촌이 지혜롭다면 새로운 국제금융질서를 구축하여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더 강력한 돌연변이가 지구에 창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새로운 흐름으로 변화하고 있는 지금, 미국 부시보다 강력한 이명박정부는 금융 규제를 과감히 완화하여 미국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려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품은 뜻이 큰 건지, 무식해서 용감한 건지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여경훈/새사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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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10일 저녁에 있은 <새사연 월례강좌> 1강 영상입니다.

1시간 분량의 강의로, 금융의 세계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플레이어로 등장한 헤지펀드와 투자은행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낸 파생상품으로 인해 미국 부동산 부실이 전 세계로 확산돼가는 경로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책 한권 읽는 것보다 백번 낫다고 자부합니다.
강사는 김병권 새사연 연구센터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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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 해법, 달러 무제한 공급이라는 초강수까지 등장


미국을 필두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가는 금융위기를 수습하고자, 선진 각국들이 각자 자국에 필요한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미국에서 7,000억 달러 구제금융법안을 통과시키고 정부가 직접 기업어음(CP)을 매입하겠다고 발표하는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는 부실은행 국유화 방침을 내놓는가 하면 독일을 중심으로 국가가 예금자 예금보호를 전액 보장한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부도위기에 몰린 아이슬란드는 러시아에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조용하기만 했던 국제통화기금(IMF)마저 나서고 있다.

그러나 내용이나 시점이 서로 어긋나면서 이들 대책의 효과는 반감되었고, 이미 금융위기는 개별 국가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금융위기는 기축통화인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미국 연방정부의 통제를 넘어서, 개방된 금융 연쇄고리를 타고 전 세계로 급격히 전이되었고, 이제는 문자 그대로 지구적 범위의 해법을 요구하는 단계까지 왔다.

10월 8일, 오랜만에 주요 선진 7개국(G7) 중앙은행이 일제히 금리를 인하하는 ‘공조’를 취했지만 그 효과 역시 하루를 가지 못했다. 그러자 10월 10일 G7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회담, 11일 우리나라와 BRICs 등을 포함한 G20 재무장관 회담, 12일 유로존 15개국 정상회의를 잇달아 개최하고 금융위기에 대한 공동 대응책을 논의했다.

부실 자산 인수를 넘어 금융회사에 직접 자금투입을 하는 방안, 은행 간 자금거래에 정부가 지급보증을 하는 방안 등의 강력한 국가 개입 대책이 쏟아져 나와,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가 사실상 국가자본주의로 바뀌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더니 13일 미국, 일본, 유럽, 영국, 스위스 등 5개 중앙은행이 “상업은행들이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달러 무제한 공급 선언을 하기까지 이른다. 심장이 멎어버린 상태를 한시도 지연시킬 수 없어 일시적인 전기충격 요법을 사용해야 할 국면에 이른 것이다.

단지 교통경찰의 태만과 운전과실 때문에 금융대란이 발생했다?

그러나 전기충격 요법으로 이미 실물경제까지 전이된 세계 경제위기가 얼마나 회복될지는 여전히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런 와중에 한국은 자본시장 통합법과 함께 금융규제완화 논쟁의 초점이었던 ‘금산분리 완화’ 방안을 미루고 미룬 끝에 13일 전격 발표하였다.

우리 금융정책의 수장인 금융위원회 전광우 위원장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시작되어 전 세계 금융공황국면까지 치달은 최근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 바 있다.

“교통사고(금융위기)의 원인이 자동차의 구조적 결함(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운전과실(경영자의 모럴헤저드)이나 잘못된 교통신호체계(감독시스템), 또는 과속을 막지 못한 교통경찰(감독기관)의 책임일 수도 있다” (<아시아투데이> 10월 10일)

금융정책 수장다운 대단히 적절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광우 위원장 발언의 취지는 ‘금융자본주의 그 자체나 규제 시스템이 문제라기보다는 감독소홀이나 금융회사의 과욕이 문제’일 가능성이 높으니, 우리나라는 향후에 ‘금융산업 혁신을 그대로 강행하고 규제완화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금융감독을 효율화하는 방향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접촉사고도 아니고, 전 세계가 무제한 달러 공급을 해야 하는 ‘전 국가적 교통마비 사고’라고 표현해야 할 지금의 금융위기가 과연 교통경찰의 근무태만과 운전자의 과실 때문에 발생했다고 간주할 수 있을까. 미국 금융시스템이 어떻게 30년 동안 부실 위험성을 누적시켜 왔는지를 추적해 보면서 전광우 위원장 발언의 타당성을 가려보자.

전통 제조업 투자를 선호했던 월가의 유명한 투자자 워렌 버핏은 이번 세계 금융위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품(Nobody knows who is doing what)’에 지나치게 ‘과도한 레버리지를 활용해서 투자’한 월가의 위험 통제기능 상실에 지금의 금융위기가 있다고.

미국 금융 고속도로에는 신호등도, 보안관도 없었다

1980년 이후 미국 경제 성장의 핵심 동력이었던 금융시스템 엔진에는 워런 버핏의 말처럼 ‘대량 살상무기’ 수준의 위험성이 있는 파생상품, ‘시한폭탄 결함’이 자라고 있었다. 또한 투자자와 기업의 자금 중개 수수료를 넘어서 자기자본의 몇 십 배의 차입(leverage)까지 동원해서라도 고수익을 좇으려는 ‘급가속 결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정책 결정자들은 금융시스템에 내재한 근본 결함을 고치려 하거나 문제발생을 방지하려는 최소한의 어떤 사전적인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반대로 “파생상품은 위험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이 그 위험을 기꺼이 부담하려는 사람들에게 넘길 수 있는 놀라운 수단”,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2003년)이라며 시장이 위험성을 자율적으로 정화시킬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또한 미국 정부는 금융회사들이 ‘위험을 기꺼이 부담’하면서까지 고수익을 추구하도록 금융에 가해졌던 각종 규제를 오히려 풀어버렸고, 금융회사들은 그나마 남아있던 규제도 피해나갔다. 1929년 대공황의 교훈을 근간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엄격한 분리를 규정했던 은행법(Glass-Steagall Act)은 1999년 은행현대화법(Gramm-Leach-Bliley Act)으로 대체되면서, 금융지주회사라는 이름아래 사실상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장벽이 사라졌다.

이들 금융지주회사와 투자은행들은 연방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는 투자전문 자회사와 모기지 전문회사를 세워, 이제는 악명 높아진 서브프라임 대출을 남발했다. 특히 투자은행들은 상업은행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로부터 과다 차입 등에 대해 전혀 규제를 받지 않았고, 미국 증권선물거래소(SEC)로부터도 그 어떤 강제적이고 명시적인 규정도 받지 않아, ‘자발적 합의’에 기초한 느슨하기 그지없는 규제 틀에서 마음껏 대규모 차입과 자기자본 투자를 강행했다.

더욱이 90년대에 접어들면서 파생상품을 주업으로 하는 헤지펀드와 인수합병을 전문으로 하는 사모펀드라고 하는 초고속 경주용차를 허용하여 이들이 금융고속도로를 폭주하도록 했다. 이들에게는 기본적인 규제마저 없었고 최소한의 정보공개의무조차 없었다. 얼마나 위험한 상품에 투자를 하든, 얼마나 과도한 차입을 동원하든 규제는 없었다.

말하자면 헤지펀드와 사모펀드라고 하는 초고속 경주용차가 과속주행을 하고 신호위반을 일삼고 중앙선을 침범하는 극히 ‘위험한 주행’을 해도 그들만 다치고 만다면 보안관은 전혀 단속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가드레일만 들이박고 끝난 것이 아니라 대규모 인명 살상을 했으며 전체 교통을 마비시키고야 말았다.

위험성을 알면서도 시장이 자율적으로 통제하리라 믿었던 파생상품, 그리고 점점 더 풀려나가는 규제 속에서 위험도 높은 파생상품과 모기지 대출을 자유롭게 일삼았던 금융기관들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미국 금융 감독의 최종 보안관이라고 할 재무부 관계자들은 대부분 월가 출신들이었고 시장주의 추종자들이다. 자신이 교통법규를 위반한 전력을 가진데다가, 위반을 저지른 운전자와 친분이 두터운 이들 보안관에게 감독을 더 잘하라고 한들 감독이 제대로 되겠는가.

신자유주의 금융 엔진의 과열과 폭발

그뿐이 아니다. 미국 금융상품의 불량 여부를 판단해왔던 기관이 바로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Fitch)인 3대 신용기관이다. 그런데 이들은 공적기관이 아니라 철저히 수익을 추구하는 사기업이었다. 이들의 수익원은 바로 불량여부를 판단해야할 그 금융상품을 제조, 유통하는 투자은행들이다. 애당초 객관적 평가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금융회사의 책임자들도 문제를 비켜가지 않는다. 이제 94년 역사의 메릴린치를 파산시켰다는 오명을 안게 된 전 CEO 스탠리 오네일의 경우, 부채담보부증권(CDO) 자산의 위험성을 경고한 임원들을 해고하면서까지 오로지 고수익을 추구했다.

도대체 서브프라임 대출을 받은 미국 서민 가구들이 대출금을 갚지 못해 발생한 문제가, 어떻게 태평양 건너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세계 경제를 흔들면서 첨단 금융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규제 풀린 월가의 전통적 금융회사들과 규제 없는 신종 금융조직들이 주택 담보대출 채권을 모기지담보부증권(MBS)나 부채담보부증권(CDO)와 같은 파생상품과 접목시켜, 고위험을 안은 채 고수익을 무제한 추구하면서 위험을 내부에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적되는 위험성은 ‘시장이 스스로 치유’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월가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가의 신념은 현실에서 여지없이 무너졌고 자유시장 금융시스템이라는 자동차 엔진은 과열로 폭발되었다. 이번 금융위기가 시장주의의 파산임을 고백한 파이낸셜타임즈 마틴 울프는 결국 지난 3월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8년 3월 14일 금요일을 기억하라. 자유시장 자본주의(global free-market capitalism)의 꿈이 사망한 날이다. 30년 동안 우리는 시장 주도의 금융 시스템(market-driven financial system)을 추구해왔다. 베어스턴스를 구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미국 통화정책 책임 기관이자 시장자율의 선전가인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는 이 시대의 종결을 선언했다.”

이제 월가의 금융시스템 자체에 구조적인 결함이 있었고, 그 결함을 미연에 방지하는 규제체계에도 결함이 있었으며 감독조차도 제대로 안 된 상황에서 월가의 금융가들과 펀드매니저들은 수익에 대한 극단적인 과욕을 멈추지 않았음이 증명된 것이다.

‘규제’가 없다면 ‘구제’도 없어야 하지 않나

지금 섣불리 신자유주의 종언을 주장함으로써 신자유주의적 금융시스템이라는 엔진 자체의 폐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규제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규제할 필요가 있는 곳에 규제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 “규제라는 것이 비용이 들지만 미리미리 규제했다면 이처럼 더 큰 국민의 혈세를 퍼붓는 상황까진 오지 않았을 것”(장하준 교수, <이코노믹리뷰> 10월 9일)이라는 주장은 그런 점에서 매우 당연한 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장 자율규제의 신화를 철석같이 신봉했던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조차도 “지금 세계의 금융시스템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정비해야 한다. 금융시장이, 금융산업이 자율규제를 한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지금의 위기는 정부가 손을 놓고 아무 규제도 없이 방임한 결과이기도 하다. 지금은 자본주의가 빚은 위기가 아니라 ‘금융 자본주의’가 빚은 위기이다. ‘규제 자본주의(regulated capitalism)’만이 해법”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규제를 받지 않거나 규제를 피해 그동안 승승장구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대신에, 저소득층에게 그만큼의 부채를 안겨주고 이들을 거리로 내몬 월가의 금융회사들은 규제를 받지 않았던 만큼 구제도 스스로 하는 것이 사실 논리적으로 맞다.

브레이크 없는 미국 금융자본주의 앞길에 미국 정부가 알아서 고속도로를 깔아주고 신호등마저 없애주고 보안관도 철수시킨 상황에서 교통대란과 대규모 인명 살상이 났는데, 오히려 인명 피해를 당해 병원에 실려 간 미국 시민들에게 돈을 걷어서 금융회사라는 자동차 수리비에 쓰겠다니 누가 찬성을 할 것인가.

어쩔 수 없이 거액의 세금을 쏟아 부어 상황을 수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면, 최소한 수습 후 교통사고 책임 추궁과 재발방지를 위한 규제책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하다. 11월 4일 미국 대선이 치러지고 새 정부가 들어서도 당분간 금융혼란을 쉽게 잠재우지는 못할 것이지만, 당분간 계속될 금융회사 파산이 한계점에 이르고 실물경기 침체가 장기 국면으로 돌입하면 각종 의회 청문회를 통해 제도적인 수습방안들이 모색될 것이다. 사실 우리 정부가 굳이 미국 모델을 따라 하려거든 이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뚫어준 고속도로, 무슨 차로 달리지 고민하는 행복한 삼성

그러나 우리 정부는 그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지난 10월 13일 미국발 금융위기로 몇 차례 미루어 왔던 금산분리 완화(은행법, 금융지주회사법) 방안을, 전 세계가 금융파국을 막고자 비상한 대책을 세우고 있는 와중에 용감하게(?) 발표했다.

예고되었던 대로 금산분리 완화는 1) 의결권 있는 은행지분을 산업자본이 종전 4퍼센트에서 10퍼센트까지 소유하도록 확대하고, 2) 종전 10퍼센트에서 30퍼센트까지 산업자본이 출자한 사모펀드(PEF)도 은행소유를 가능하게 하며, 3) 해외에서 산업자본을 보유한 외국은행에게도 국내은행의 인수를 허용하고, 4) 금융투자(증권)지주회사는 증권자회사가 제조업체를 산하에 둘 수 있게 하며, 5) 보험지주회사도 자회사로 제조업체를 지배할 수 있게 길을 터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여기에 보너스로 재벌들의 금융지주회사 전환을 돕기 위해 각종 제한 규정마저 최장 7년을 유예하기로 했으며, 공정거래위원회는 6) 일반지주회사도 금융자회사를 소유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거들고 있다.

월가의 금융인들보다 더욱 확고한 규제완화, 시장 자율규제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삼성생명이나 삼성증권 등 금융회사를 안고 있는 삼성그룹은 이제 명동 한복판에 정부가 만들어 놓은 아우토반을 달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셈이다. 그것도 어떤 차를 타고 갈지 골라야 할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제공한 제조업 금융 자회사 허용을 선택하여 그룹사를 재편할지, 금융위원회가 제공한 금융투자(증권)지주회사로 갈지, 아니면 삼성생명을 주축으로 하는 보험지주회사를 세울지 고민하면서 삼성이 가장 편한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초보 운전자가, 신호등도 없는 곳에서 엔진 결함이 있는 자동차를 몰면?

결국 우리 정부는 여전히 끝을 모르고 확산되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를 보면서도, 신자유주의 금융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결함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된다. 규제 체계 역시 금융산업의 고속성장을 가로막는 불필요한 신호등 정도로 여겨서 가급적 없애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세계 금융위기를 통해 우리 정부가 얻은 교훈은 경찰관을 잘 세워서 감독 잘하고 운전자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는 것 정도인 듯하다.

심지어 미국 금융위기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라는 표식을 내기 위해서, “금산분리의 모국인 미국의 경우에도 최근 금융위기에 따른 은행자본 확충을 위해 은행주식 보유규제를 종전 10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완화”했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금융위원회 10월 13일 보도자료) 놀라운 해석이다. 지금 미국은 은행 부실로 인해 연방정부가 엄청난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라 어디서라도 자금을 동원하여 은행에 자금을 공급해야 하는 극단적인 처지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 마치 자동차 사고로 망가진 차를 어쩔 수 없이 도색하고 있는 미국을 흉내 낸다면서, 우리는 방금 나온 신차인데도 자랑스럽게 새로 도색하는 것이 최신 유행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할까.

우리 정부는 미국에서 이미 엔진 구조에 결함이 있다고 검증된 자동차를 수입하면서도, 인파로 뒤덮여 있는 명동 대로에 고속도로를 내려고 하고 있다. 신호등도 모두 없애고 오직 교통경찰만 세워놓겠다는 것이다. 신호등도 없이 초고속으로 질주할 미국산 금융시스템이 앞으로 우리 경제의 가장 큰 성장 동력임을 믿어달라고 국민들에게 설득하고 있다. 정부는 미국산 금융시스템이 폭발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극히 조심해서 엔진을 과열시키지 않고 기술적으로 운전을 하면 엔진이 폭발하지 않을 수 있다고 굳세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최고의 금융시스템 전문가들로 구성된 월가도 엔진 과열과 폭발을 막을 수 없었다. 하다못해 이제 막 면허시험에 통과한 한국에게 이런 자동차를 주고 조심해서 운전하면 사고가 안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정당하겠는가, 아니면 아예 문제가 있는 엔진 결함을 근본적으로 고친 후에 운전을 하는 것이 정당하겠는가.

신현송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의 은행들이 그나마 세계 금융위기의 충격을 덜 받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국이) 월가의 선진 금융기법을 도입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던 셈이다. 일본의 경우도 90년대에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한 후 금융기법을 체득하지 않고 후퇴적인 경영을 하면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피할 수 있었다. 규제 때문에 ‘촌놈’ 행세를 한 것이 맞았다” (<이데일리> 10월 9일)

김병권/새사연 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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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본사, ‘닥치고 본방송 사수’를 줄인 인터넷 신조어로 ‘다시보기’ 서비스 등이 활발해진 요즘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만큼은 본방송 시간을 지켜서 보자는 뜻이다. 이 말을 빌려 요즘 경제상황을 표현하자면 닥달사, ‘닥치고 달러 사수’가 되겠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언제 어디서 무엇이 망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믿을 것은 지금 당장 내 손에 쥔 달러밖에 없다는 생각이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러 공급은 멈추고, 달러 수요는 널렸다

이 같은 전세계적 유동성 경색으로 인해 작년 말 930원대였던 환율이 최근 하루에 50원 가량씩 급상승하여 1300원을 넘어섰다. 환율은 달러와 원화의 교환비율이다. 따라서 환율이 상승하면 달러의 가치는 높아지고, 원화의 가치는 낮아졌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시장에서 달러를 사려는 사람은 많은데, 달러를 팔겠다는 사람은 없을 때 환율이 상승한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다.

이 이외에도 현재 환율을 상승시키고 있는 요인이 몇 가지 더 있다. 우선 외국인 주식자금의 이탈이다. 월가의 자금이 부족해지자, 외국인들이 그동안 한국 주식시장에 투자한 주식을 팔아 달러로 바꾼 후 본국에 송금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외국인 순매도 주식은 38조 6691억 원으로, 약 30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이 빠져나갔다. 계속되는 경상수지 적자로 인한 외환보유고 감소도 환율 상승의 원인이다. 올해 들어 9월까지 경상수지 적자는 142억 달러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큰 규모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일관성 없는 환율정책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정부는 집권 초기 수출증대를 통한 7% 성장을 외치며 고환율 정책을 추진하여, 시중의 달러를 계속 사들였다. 달러는 귀해졌고, 수입물가는 상승했다. 그러더니 7월부터는 물가를 잡기 위해 저환율 정책을 추진하여, 달러 가치를 저렴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주식을 팔고 빠져나가는 외국인들은 싼값에 달러를 얻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상황에 맞지 않는 정책을 펼친 탓에 앞으로 정부가 어떤 정책을 펴던지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하리라는 점이다.

일관성 없는 환율 정책이 문제 악화

그렇다면 환율 상승은 어떤 문제를 불러올까? 일단 해외에 돈을 보낼 때 부담이 증가한다. 똑같은 1달러를 보내도 예전에는 900원을 환전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1300원을 환전해야 한다. 수입물가도 상승한다. 물건을 수입하려면 달러를 주고 사와야 하는데, 달러의 가격이 상승했으니 물건값도 오르는 것이다. 수입원자재를 사용하는 중소기업의 경우 큰 타격을 입게 된다.

KIKO에 가입된 중소기업의 피해는 더 심각해진다. 9월 말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KIKO 피해 중소기업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면서 “KIKO에 가입한 중소기업의 경우 환율이 1200원선까지 오르게 되면 68.6%가 부도 위험에 놓이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미 환율이 1200원을 돌파한 지금,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흑자를 내고도 부도에 이르는 흑자부도에 몰리고 있다.

국가 차원에서는 환율 상승과 함께 외환보유고 확보가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말 외환보유고는 2396억 7천만 달러이다. 전달보다 35억 3천만 달러 줄었으며, 올해 들어 총 226억 달러가 줄었다. 정부는 걱정할 상황이 아니라고 하지만, 97년 외환위기가 외환보유고의 부족으로 발생한 일임을 생각했을 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지금의 국제적 신용경색이 장기화될 경우 외환보유고 확보는 더 중요해진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경제, 멈춰버린 화폐

‘환율대란’, ‘패닉’, ‘공포’ 라는 비명이 끊이지 않자 정부는 외화자금시장에 100억 달러를 공급하고, 수출입은행을 통해서도 50억 달러를 공급하겠다고 나섰다. 부족한 달러를 정부가 방출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달러 부족이 문제가 아니라 달러가 돌지 않는 것이 문제다. 달러를 아무리 풀어도 서로 제 주머니에만 묶어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하루짜리 대출도 쉽사리 빌려주지 않는 상황이다. 온 몸을 돌며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해야 할 혈액이 딱 멈춰버린 꼴이다. 말 그대로 ‘경색’이다.

지금의 불신이 폭발하여 모든 예금자들이 은행으로 몰려가 예금을 찾거나, 모든 펀드 투자자들이 펀드를 회수하는 뱅크런과 펀드런 같은 심각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말로만 듣던 ‘공황’이 우리 앞에 와있다.

<용어 공부>

▶KIKO(Knock-in Knock-out)

일정한 범위 안에서 환율이 움직일 때 환차손을 보상받을 수 있는 환헤지 파생상품. 환율이 계약 구간 아래로 내려가면 계약이 종료되고, 계약 구간 위로 올라가면 원금 손실까지 입을 수 있다. 많은 중소기업들이 은행과 KIKO 계약을 맺었으나, 최근 고환율로 인해 엄청난 손실을 입고 있다.

▶외환보유고

한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대외 외환채권의 총액. 국가의 지급불능 사태에 대비하고 외환시장 교란 시 환율 안정을 위해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외화의 규모를 나타낸다. 쉽게 말해 국가가 급하게 필요한 자금 수요에 대비하여 여유자금으로 갖고 있는 외국돈, 외환의 규모이다.

▶외국환평형기금

달러 등 외화의 가격이 급등락하는 것을 막고 원화의 가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가 조성하는 기금. 1967년에 만들어졌으며 이를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을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라 부른다.

▶뱅크런(bank run)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 은행에 돈을 맡기 예금자들이 예금을 찾기 위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은행이 파산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은행이 부실해지거나 경제가 불안해져서 예금을 되돌려 받지 못할 것이라는 심리가 확산되면서 발생한다.

▶펀드런(fund run)

대규모 펀드 환매 사태. 펀드에 투자한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투자한 돈을 회수하려고 몰려드는 상황을 말한다. 뱅크런과 마찬가지로 투자금을 되돌려 받지 못할 것이라는 심리가 확산되면서 발생한다.

이수연 / 새사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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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루에도 수십 건씩 들어오는 미국발 외신은 한마디로 상상초월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재정 부족으로 학교, 경찰, 소방서 공무원들에게 두 주째 급여를 지불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영화배우로 알려진 주지사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매국 재무부에 70억 달러 자금지원을 긴급히 요청했다. 캘리포니아주를 한 국가로 보면 그 규모는 상위 8번째에 이른다. 한마디로 세계 8위의 국가가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선언한 셈이다.

도대체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다. 채권을 발행하려고 해도 이를 소화해야 하는 자본시장이 빙하기처럼 얼어붙어 있다. 채권을 발행하더라도 엄청난 금리를 보장해야 한다. 기업들의 자금줄이 막혀버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공황’의 문턱을 넘는 것과 다름없다. 금융회사 구제만으로도 정신이 없던 미국 정부가 드디어 일반기업 구제에까지 나섰다. 기업어음(CP)을 직접 매입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금융회사의 파산만 중요하고 국민의 파산은 괜찮은가

그러나 경제주체들 사이의 철저한 불신을 넘어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확산된 탓에 신용경색은 좀처럼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공조해서 전격적으로 금리 인하를 단행했지만, 단순한 유동성 부족을 넘어 거래와 교환이 막혀버린 난국을 돌파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백약이 무효하고 오직 시간만이 약이라는 소리가 나올법하다. 그렇다면 그 ‘시간’ 동안 미국 생활인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실상 금융위기의 최대 피해자라고 할 미국 국민들에 대한 대책은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있다. 금융회사들의 부실 정도와 생존 가능성 정도를 평가하는 자료들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실업과 주택 차압에 내몰린 미국 국민들의 처지와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얘기는 거의 없다.

지난 9월 20일, 최초로 7,000억 달러 구제금융법안이 발의되자 미국 국민들은 금융위기의 주범인 금융회사만 구제해주고 정작 피해를 입고 있는 국민들을 위한 구제책이 없다면서 법안 통과를 격렬히 반대했다. 지역구 의원들에게 이메일과 전화로 반대투표를 요구할 정도였다. 말하자면 피해자의 돈을 뺏어 가해자를 구제해주는 셈이니, “월가에서 금융위기를 자초했으니 월가 돈을 모아 구제금융에 쓰라”라는 불평이 나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1200만 가구는 집 팔아도 대출 못 갚아

그 결과 겨우 예금자 보호 한도를 확대하고 주택소유자들에게 1,490억 달러의 세액 공제를 해주는 조항을 법안에 끼워 넣었다. 한편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금융회사는 경영진 스톡옵션과 연봉을 제한하고 부실채권 매입 대신 해당 금융회사 주식 매입권을 확보한다는 ‘상당히 약한’ 제재 조항도 삽입했다. 차압 위기에 몰린 주택소유자들의 주택을 정부가 사들이는 등의 직접적인 조치는 아직 없다.

2006년까지 전 세계 금융자본이 모기지업체를 통해 미국 국민들에게 방출한 대출 금액은 약 11조 달러에 이른다. 특히 모기지업체들은 이자 상환능력도 없는 사람들에게 주택가격의 거의 100퍼센트에 해당하는 대출을 무차별하게 시행한다. 심지어 금융 최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에서, 후진국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약식 서류(Low doc) 대출이나 무서류(no doc) 대출이 횡행했다. 더 나아가 위장대출(liar doc)에서 이른바 소득도 수입도 자산도 없는 사람에게 대출해주는 닌자대출(Ninja; no income, no job, no asset)까지 벌어졌을 정도다.

이런 식으로 무분별한 대출이 거침없이 풀려나간 결과, 지난해 말 기준 미국의 가계부채 총액은 13조 8,400억 달러였다. 이는 미국 국내총생산의 100퍼센트에 달하며, 미국 국민 가처분소득의 136퍼센트에 달하는 규모다.

그 결과 집을 소유하고 있는 7,500만 가구 중에서 무려 5,000만 가구가 모기지 대출로 집을 샀다. 즉, 5,000만 가구가 모기지 부실과 주택가격 폭락에 긴장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가운데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을 받은 가구가 750만 가구, 그리고 현재 한달 이상 이자가 연체되었거나 차압된 가구가 자그마치 500만 가구를 넘어섰다.

집도 잃고 직장도 잃고

그뿐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주택가격이 폭락하면서 이미 1,200만 주택소유자는 당장 주택을 팔아도 모기지 대출금을 상환할 금액이 나오지 않는다. 실상 구매자가 없어서 집이 팔리지도 않는다. 지난 2년 간 이 비율은 두 배씩 늘어났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주택가격이 최소 10~20퍼센트 이상 더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1,200만을 훨씬 넘는 미국의 가정이 집을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이 이미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난 연말부터 미국경제는 침체상태로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일자리가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다. 실물경기 침체가 발생한 지 1년 만에 실업자가 무려 216만 명이나 늘어나 현재 공식적인 실업자 신세에 빠진 사람만 940만 명이나 되고 한계실업자와 임시취업자를 포함하는 실질실업률은 이미 10퍼센트를 넘어선 상태다.

그러다 보니 2007년 3월까지만 해도 4.4퍼센트였던 실업률이 줄곧 상승해서 9월 기준 6.1퍼센트에 이르렀다. 여기에 소비자 물가까지 상승하기 시작했으니 미국 국민들과 노동자들은 지난 1년 동안 실질소득 정체, 실업률 증가, 물가 상승의 부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금융이 비대해지자 투기-버블-소비의 부실 경제로 변질

차압 당한 집에서 쫓겨날 생각을 하며 한숨짓는 미국 서민들,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모르는 월가의 금융회사 직원들이 매일 흉흉한 소문에 귀 기울이며 일손을 놓고 있는 광경들, 이미 일자리를 잃고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 이것이 우리가 생각했던 '기회의 땅' 미국의 현실이다.

사실 내면적으로 보면 미국사회의 양극화와 서민들의 생활은 전성기였던 90년대에도 그리 화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금융의 발달로 인한 신용적 가수요 때문에 마치 소비여력이 있고 자산이 많은 것 같은 착각에 빠져있었을 뿐이다. 1980년대부터 가속화된 경제의 금융화로 인해 금융비중이 점점 커졌고 금융회사들은 전통적인 예대마진을 벗어나 고수익 투자에 집중한다. 이러다보니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고용을 늘려 다수 국민들의 소득을 향상시키는 방식의 성장은 멈추게 된다. 예금-대출-투자의 선순환 구조가 투기-버블-소비의 취약한 버블경제로 전환된 것이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미국 전체 기업의 수익 가운데 10퍼센트에 불과하던 금융부문의 수익은 2000년 기준 40퍼센트로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금융회사의 시가 총액도 6퍼센트에서 19퍼센트로 증가했다. 그러나 고용에서 금융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5퍼센트에 불과하다.” (이코노미스트)

30년 간 하위 20% 소득 1% 증가, 상위 1% 소득 111% 증가

이 결과 미국에서도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하위 20퍼센트 계층의 실질소득은 1퍼센트 성장한 데 반해 상위 1퍼센트의 실질소득은 111퍼센트나 늘어났다.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가 심화된 결과 미국 중산층은 급격히 붕괴한다. 1970년에 58퍼센트에 달하던 중산층이 2000년에 접어들면서 41퍼센트로 하락한 것이다. 잔인한 것은 이렇게 양극화로 인해 소득이 전혀 늘지 않아 고통스러운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약탈적인 대출행위를 자행하면서 월가의 금융가가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대다수 미국 시민들에게 대출 부담이 씌워질 동안 금융회사들은 전체 기업 이윤의 1/3을 차지할 만큼 성장을 구가했고, 월가의 최고 펀드매니저들은 고급 주택에 요트를 사서 즐기면서 고급 호텔에서 여가를 즐겼다. 2006년 기준 헤지펀드 매니저 상위 25명의 평균 보수는 5억 7,000만 달러였다. 이들 소득을 다 합치면 자그마치 140억 달러에 달한다. 대부분의 미국 국민이 5,000만 원 이하의 연봉을 받는 사이 이들은 웬만한 국내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을 훨씬 넘는 6,000억 원의 연봉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서브프라임 대출 부실과 금융위기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이들 초고액 연봉자 펀드 매니저가 아니라 바로 미국의 서민들이었다. 주택 거품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연체, 압류, 가계 파산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은 계층이 바로 자산과 소득이 부족했던 서브프라임 대출자들이 아니었던가? 소득과 고용에 기초하지 않은, 부채를 통한 경제성장은 절대 지속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 거품이 꺼지면 중하위 소득의 서민이 가장 먼저 피해를 본다는 것을 미국의 현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월가 출신의 경제 관료, 월가의 정부

카지노에도 나름대로 룰이 있고 자연의 정글에도 법칙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금융자본주의라는 정글은 자연의 정글을 초월하는 자본 특유의 과욕과 잔혹함을 보여주면서 미국 시민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정부의 ‘구제’는 이들 미국 시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월가의 대형은행들을 구제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는 너무 당연할 수 있다. 지금 미국 정부의 경제관련 요직은 대부분 월가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월가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무너져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 정작 미국 시민의 고통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재무장관 헨리 폴슨도 월가 1위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 출신이고, 앞으로 구제금융을 관리하기 위해 신설된 재무부 산하 금융안정국 책임자인 35살의 닐 캐쉬카리 역시 전 골드만삭스 이사가 아니던가. 이들과 구제금융 투입계획을 세우게 될 자산운영회사들도 온통 월가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미국 정부는 시민의 정부가 아닌 월가의 정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과연 이번 금융 위기의 뇌관이라고 할 파생상품과 헤지펀드, 투자은행에 규제의 족쇄를 채울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오히려 정부 관리와 월가는 부실에 빠진 대형 금융회사들을 먼저 살려야 미국경제를 살릴 수 있다며 ‘대마불사’를 밀어붙일 것이 뻔하다.

국민을 위한 정부는 어디에 있나

이제 월가의 금융 부실은 차고 넘쳐서 실물경제로 흘러들고 있다. 그 속에서 미국 국민들은 생존을 위해 아우성치고 있다. 미국 국민들만 볼모로 잡았으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르지만,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가 미국발 태풍에 휩쓸려가기 시작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국수적 애국주의로 똘똘 뭉쳤던 미국인들, 그래서 결국 2003년 이라크 침공을 단행하는 데 찬동했던 미국인들의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월가와 월가에 유착된 미국 정부에 대해 미국 국민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긴 우리도 월가에 희생되고 있는 미국 시민을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환율 폭등과 주가 폭락, 금리 폭등으로 한국의 개미투자자들도 올해 이미 주식 60조 이상, 펀드 40조 이상을 날렸다. 자영업과 중소기업은 파산의 끝에서 불안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정부 역시 미국 정부와 다름없이 대기업과 강남 부유층 감세에만 관심이 있을 뿐 아닌가. 무너져가는 자영업과 중소기업에 정부가 직접 공적자금을 투입해서라도 살려야 하건만 시중은행들에게 자율적으로 대출을 완화하라는 독촉만 하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업체가 연일 치솟는 환율로 채산성이 맞지 않아 수입을 포기하는 사례가 잇따른다고 한다. 광우병 소고기 수입을 금융 위기와 환율 폭등이 저지해주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까.

김병권/새사연 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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