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이슈 /정치2012.02.15 11:28



▶용어해설

최근 투표율?

각국의 정치, 민주주의, 투표율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제공하는 ‘민주주의와 선거를 위한 국제기구(International Institute for Democracy and Electoral Assistant, IDEA)'의 정보를 바탕으로 OECD가 사회보고서(OECD Society at Glance 2011)를 통해 발표한 최근 투표율 자료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8년 국회의원선거 투표율이다.

▶문제현상

한국 투표율 46%로 OECD 최하수준

OECD 사회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투표율은 46%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는 OECD 평균 70%에 비해 상당히 낮은 수준이며, 브라질, 러시아, 인도, 인도네시아 등 개발도상국들보다도 낮다. 호주가 95.2%로 가장 높았다.

투표율 하락 수준도 높음

1980년에서 최근 투표율까지의 투표율 하락 정도를 비교해보면 한국은 체코와 함께 32%를 기록하여, 슬라바키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았다. 멕시코, 스페인, 룩셈부르크, 호주 4개국을 제외한 OECD 회원국 모두 투표율 하락 경향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높은 수준의 하락률을 보인다.

▶문제 진단과 해법

고학력일수록, 젊을수록 투표 안해

선거체제비교조사(Comparative Study of Electoral Systems, CSES)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다른 국가들에 비해 고학력자의 투표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저연령층의 투표율이 낮은 것도 문제이다. 한국은 독일, 일본과 함께 55세 이상 고령자의 투표율이 높았다. 고연령층에 비해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는 35세 미만 저연령층에서의 투표율이 전체 투표율을 하락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 극복해야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지만, 무엇보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무관심이 투표율 저하의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정치권에 만연한 부정과 부패, 선거 때마다 남발하는 공약들과 반복되는 이념공세에 투표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치권의 근본적인 반성이 요구되는 지점이다.

촛불집회를 비롯해 수십, 수백만의 정치집회를 경험하고 ‘나꼼수’ 같은 아주 정치적인 팟캐스트 시청률이 세계 1위를 차지할만큼 정치에 대한 관심과 소통의 요구가 높은 나라가 한국이다. 젊은 층은 더욱 이에 민감하다. 대중의 의사를 반영하는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여기에 호응하여 유권자들도 보다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한다면 투표율은 급상승으로 반전될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지금까지와 다른 모습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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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젊은 층은 더욱 이에 민감하다. 대중의 의사를 반영하는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여기에 호응하여 유권자들도 보다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한다면 투표율은 급상승으로 반전될 것이다.

    2012.02.22 12:21 [ ADDR : EDIT/ DEL : REPLY ]
  2. 한국 사회가 유달리 투표율이 낮은 것은 참정권행사의 규제가 지나치게 많아서 아닐까요? 물론 통계는 미국도 절반 이하이지만 유독 지저분한 정치를 지닌 일본 조차도 2/3 이상인 것을 보면 더 그렇고 평균은 7/10 이상은 가지요. 이런 걸 보면 크게는 정당의 설립과 해산 모면 조항부터 시작해서 개인의 피선거권 행사, 이외 선거 시기의 의견표명까지 너무 많은 제약이 따르니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절반에 미달한 이유는 정당 설립제한이나 투표율에 따른 해산 규정이나 이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초 또는 극 양당제적인 정치와 더불어 정치의 기능이 사실상 업자들에게 종속 상황이라는 점이 주요한 원인입니다. 또한 그 때 그 때 지지자를 모집하는 정당구조도 이런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국, 일본과 공통점이라면 국회의원 1명에 대한 선출인구범위가 지나치게 넓은 사실(이건 한국의 감소가 있는 상황인데 1960년대 10만 여명에 1명 선출에서 현재 17만 여명에 1명 선출하는 것과 같은), 순위권 밖에 있을 경우 매체 토론회에 참여하기 불가능 한 점 일 겁니다.
    이런 것들이 대중의 의사를 반영하는 정치세력의 등장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2.02.23 13:24 [ ADDR : EDIT/ DEL : REPLY ]
  3. lecun

    저는 21살의 대학생입니다. 이번에 제가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글의 자료로 제시된

    `국제사회의 투표율 비교` 그래프을 사용해도 될까요? 부디 꼭 허락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13.03.09 17:10 [ ADDR : EDIT/ DEL : REPLY ]
  4. 안녕하세요 새사연입니다. 출처를 밝히신다면 새사연의 자료는 언제든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공모전에서 좋은 결과 얻으시길 바랍니다. 완성되면 저희에게도 보내주세요^^

    2013.03.11 12:5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주제별 이슈 /정치2012.02.08 11:39

제언: 재벌개혁 시민연대를 제안한다
보고서 원문을 보시려면 위 제목을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목차]
1. 위험수위에 도달한 재벌의 경제력 집중
2. 경제력 집중이 과도하면 사회 권력이 된다
3. 재벌의 과도한 권력을 견제할 세력이 없다
4. 재벌개혁을 위한 시민들의 연대를 만들자

[본문]
1. 위험수위에 도달한 재벌의 경제력 집중

재벌개혁과 경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다수 국민들은 소득이 오르지 않고 고용이 불안정성은 높아졌으며, 그 결과 사회의 불평등과 양극화는 심해졌다. 반면 친 기업적 이명박 정부가 집권하면서 규제완화, 감세, 고환율 유지의 뒷받침을 받은 재벌 대기업 집단은 경제위기 와중에서 ‘나 홀로 성장’을 누렸다. 대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과 자영업, 노동자에게 전달된다던 적하효과는 작동하지 않았고, 99% 국민과 1%의 재벌 대기업 집단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다. 급기야 이명박 정부마저 ‘동반성장’과 ‘공정사회’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실제로 변화된 것은 없다.

어려운 대외경제 여건에서도 재벌 대기업이 경쟁력을 갖고 수출을 늘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재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커져가는 것은 단지 이들의 사회적 기여도가 적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이 해외시장 진출에 그치지 않고 국내시장에 대한 독과점과 심지어는 골목상권까지 잠식해나가면서 중소기업, 자영업과 상인, 소비자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최근 불거진 재벌자녀들의 빵집, 외식업 진출이 단적인 사례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나서서 “재벌 2~3세 본인들은 취미로 할지 모르지만 빵집을 하는 서민 입장에서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문제를 삼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 만큼 재벌 대기업 집단의 경제력 집중과 독과점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명박 정부 집권 4년 동안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급격히 높아진 결과, 현재 15년 전 외환위기 직전 수준까지 재집중되었거나 그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5대 재벌의 국내총생산 대비 매출액은 2010년 55.7%이고 이는 1997년 수준에 육박한다. 53개 대기업 집단이 전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출하액 비중은 2009년 50.1%로 절반을 넘어갔다. 상위 100대 제조업이 전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출하액 비중도 2008년 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50%를 넘어가고 있다. 동네 골목까지 대기업 계열사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세간의 느낌을 통계가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2. 경제력 집중이 과도하면 사회 권력이 된다.

외환위기 이전 수준, 또는 그 이상으로 재벌에게 경제력이 쏠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독과점이 생기고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질서가 무너져서 경제의 효율이 떨어지는 일반적인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와 노동자, 상인과 중소기업으로부터 독점 대기업으로 이익과 부가 편중됨으로써 공평한 분배를 달성할 수 없어진다. 사회적 양극화와 불평등의 한쪽 끝에 재벌 대기업이 있다는 국민의 인식과 분노는 여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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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이슈 /정치2009.09.08 09:41
1. 급부상하고 있는 개헌논의

최근 청와대와 국회의장실의 주도로 개헌논의와 선거구제 개편논의가 시작되었다. 민주당은 제도의 변경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지만 논의가 제기된 배경을 의심하며, 국면전환용 제도개편 논의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것이 기본입장임을 밝혔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아직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현행 ‘제왕적’ 대통령제와 지역감정을 부추긴다고 비난받고 있는 소선거구제도의 본질적 문제가 제도상의 변화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의 진짜 의도가 설령 국면전환에 있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논의 자체를 막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일보에서 국회의원 전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18대 국회 임기 내 개헌추진에 찬성하는 의원이 157명으로 전체의 89.7퍼센트를 차지했다(2009.9.3).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중에 개헌을 매듭짓고 차기 대통령을 새 헌법에 따라 뽑자”는 입장을 표명했다.

5년 단임 대통령제와 선거구제 개편 논의는 노무현 정권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민주당은 논의에 반대할 명분과 의지 모두 없어 보인다. 단지 한동안 정치적 상황이 다소 청와대와 여당에 불리하게 흘러왔기에 바로 말을 받아주면 호조건을 제대로 활용 못 할 것 같아 잠시 뜸을 들이고 있을 뿐이다.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경우 원칙론에 입각해 권력구조 개편논의에 대해 한 동안 반대 입장을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개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의 수준이 높은 상황은 아니지만, 국회에서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되면 급속하게 개헌정국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미리 차분하게 준비한다는 차원에서 우선 헌법연구 자문위원회가 이야기하는 헌법 개정의 필요성과 개선방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헌법연구 자문위원회는 개헌 논의 시 참고하기 위해 지난 해 9월부터 국회의장 및 원내정당으로부터 추천을 받은 13명의 헌법 및 정치/행정 관련 전문가로 구성된 국회의장 자문기구이다.

개헌논의에 대한 새사연의 기본입장은 “’대통령 권력 분산 개헌’이 아닌 ’국민주권 확대 개헌’하자”(김병권, 2009.7.17)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앞으로는 정계와 학계, 시민단체에서 나오는 다양한 목소리를 종합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해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하면서, 좀 더 세밀한 입장들을 체계적으로 세워나가도록 하겠다.

2. 개헌의 필요성과 개정방향

헌법연구자문위원회는 현행 헌법이 1987년 개정된 이래 20여 년 동안 정치/경제/사회 환경이 급속하게 변했다는 사실과 대통령에 대한 지나친 권력집중의 문제를 헌법 개정의 가장 큰 필요성으로 들고 있다. 이는 첫째로 그 동안 “생명/과학/기술/정보/통신 분야의 급격한 발전과 이에 따른 사회변화”가 있어왔고, 현행 헌법으로는 효과적으로 담아 낼 수 없는 국민들의 삶의 양식이 생겨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5년 단임제 대통령제를 기본내용으로 하고 있는 현행 권력구조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본원칙 중 하나인 권력의 분산과 견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다는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헌법연구자문위원회는 (1) 새로운 기본권을 헌법적으로 수용하고, 기존 기본권의 보장도 강화하며, (2) 현행 대통령 중심제의 지나친 권력독점이 낳은 문제점들을 지양하고 민주주의에 충실한 권력구조 설계를 헌법 개정의 기본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위원회에서는 이러한 기본방향에 따라 개헌 내용을 기본권 분야, 권력구조 분야, 헌법의 완결성 제고 분야로 나누어 구체적 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치권과 언론의 주된 관심사는 권력구조 분야에 집중되어 있지만, 기본권 분야에 권고되고 있는 개정조항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인 방향은 국민의 기본권에 관한 규정을 좀 더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다. 자문위원회가 제시한 구체적 조항 중 몇 개를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 -평등권의 강화를 위해 출생/인종/연령/정치적 신조, 신체적 조건이나 정신적 장애 등 차별금지사유를 추가하고, 남녀평등에 관한 국가의무조항 신설
­ -언론/출판의 자유를 집회/결사의 자유와 분리하여 그 명칭을 ‘표현의 자유’로 하고, 언론/출판의 자유에 대한 제한규정을 삭제하여 보장을 강화
­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상의 자유가 가지는 중요성을 감안하여 현행 헌법의 해석상 인정되고 있는 사상의 자유를 명문화
­ -경제과정에서의 사회정의의 요청을 반영하여 소비자기본권의 내용을 구체화한 명문조항을 국가목표조항의 형식으로 신설
­ -기본권이 입법/행정/사법 등 국가작용을 직접 구속한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국가의 기본권 보장의무를 별도 조항으로 규정

권력구조 분야는 국회관련 제도 정비와 정부형태 변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관심의 초점인 정부형태 변경은 다음 절에서 따로 정리하겠다.

국회관련 제도정비의 기본내용은 상/하원 양원제로의 변경이다. 위원회는 미국식 양원제와 흡사한 형태로, 하원은 4년 임기 직선제로 의원을 선출하고, 상원은 6년 임기 직선제로 하되 2년마다 1/3씩 교체하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또한 법률안은 양원 모두에서 의결되어야 법률로 확정되고, 양원의 의사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는 양원협의회에서 단일안을 만들어 양원에서 다시 의결하는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 밖의 주요 내용으로는 다음의 다섯 가지를 꼽을 수 있다. (1) 정기회와 임시회의 구분 조항을 삭제해 국회의 상시화, (2) 감사원의 회계검사 기능을 국회로 이관하고 국회소속 하에 회계검사기관을 설치하되, 그 직무상 독립성을 헌법에 명시, (3) 감사원은 직무감찰에 한하여 기능을 수행하게 되므로 헌법상 기관에서 법률상 기관으로 조정, (4) 지출승인법 제정 또는 세출위원회 설치 등 부대적인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면서 예산법률주의를 채택, (5) 국민소환제도의 도입은 시기상조이며, 지방자치 차원에서 주민소환제의 경험이 일정 정도 축적된 후에 도입검토.

위원회가 설정한 국회관련 제도정비의 주된 목표는 현재 행정부에 속해 있는 예산편성권 및 회계검사권을 국회로 이관하고,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을 삭제해 법률도입에 대한 의회의 고유권한을 강화하는 것이다. 또한 양원제를 도입해 정당 간, 입법부와 행정부 간 극단적 대립 상황을 조정하고 타협 문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도모하는 것이다.

헌법의 완결성 제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대법원장과 대법관,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을 국회에서 선출하자는 것이다. 현재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대통령/국회/대법원장이 3명씩 선임하게 되어있고, 대법원장, 대법관, 헌법재판소장은 추천자문위원회가 추천한 인사들에 대해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다. 개정 권고안에서도 헌법재판소 재판관 3명에 대한 대법원장 추천권은 유지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자문위원회의 이러한 권고는 현행 헌법 체계에서 사법기관이 활동의 독립성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구성에서 있어서는 행정부와 입법부에 종속되어 있어 3권 분립 원칙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개선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분명히 개선되어야 하지만 위원회의 권고안이 취지를 충분히 살리기에는 미흡하다고 판단된다. 그 한계점은 결론에서 종합적으로 설명하겠다.

국회관련 제도정비와 사법부의 완결성 제고는 정부형태 변경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3. 권력구조 개편

자문위원회가 국민 기본권 보장을 확대하여야 한다는 취지를 헌법 개정안 권고에 포함시키긴 했지만 개정안의 주된 줄기는 3권 분립의 강화이다. 따라서 정부형태의 변화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위원회는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이원정부제를 면밀히 검토한 후 이원정부제와 대통령제를 복수 제안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각각의 주된 내용을 요약해 보겠다.

1) 이원정부제
이원정부제는 행정권을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나누어 갖는 정부형태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계엄권, 국회(하원)해산권, 법률안 재의 요구권, 국민투표 부의권 등을 행사하고 국무총리는 행정수반으로서 일상적인 국정활동에 관한 권한과 내각구성권을 행사한다. 하지만, 대통령이 국무총리 임명권은 대통령이 갖는다. 행정부와 국회의 관계에서는 국회가 내각불신임권을 갖고 행정권을 견제하되, 미리 국무총리를 선출해 놓고 이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는 건설적 불신임제 도입을 권고하고 있다.

이원정부제는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절충해 놓은 정부형태이다.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현행 대통령제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일반 행정에 관한 권한을 의회에서 선출된 국무총리와 의원 각료를 포함하고 있는 내각에 이양하는 것이 주요 기조이다. 대통령의 권력축소를 일정 정도 보상하면서 국회와 내각에 대한 견제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기 위해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을 국무총리 신임요구동의안과 연계시킨다. 즉 대통령이 국무총리 신임이나 중요정책 법률안과 신임을 연계해 동의안을 요구하고, 이것이 부결되면 자동으로 국회가 해산되는 것이다. 단, 국회(하원) 구성일부터 2년 이내에는 행사가 불가능하게 제한한다.

2) 대통령제-4년 중임, 정/부통령제
자문위원회가 제시한 대통령제는 현행 대통령제의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배제하고 권력 분립적 내용을 강화한 정부형태이다.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형태와 흡사한 것으로 4년 중임으로 하여, 재선 가능성이 대통령의 국정 책임성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또한 위원회는 부통령제를 도입하여 대통령의 궐위/사고로 인한 승계 또는 권한대행 시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위원회가 제시한 대통령제의 경우 현재 대통령에게 부여된 권한의 내용이 크게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앞에서 이미 요약했던 국회와 사법부에 관련된 제도정비를 통해 3권 분립을 명확히 확립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4. 몇 가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들

언론에서 몇 번 크게 다루어 주목을 끌기 시작했지만 개헌에 관한 논의가 아직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이런 시점에서 개헌 논의의 향방을 미리 점치거나 입장을 서둘러 정리하기보다는 제안된 내용을 차분히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논의가 제기되고 있는 정치적 맥락도 잘 파악해야 한다.

정치/경제/사회 환경의 급속한 변화와 그에 따라 생겨난 국민들의 새로운 생활양식을 헌법상의 기본권 확장으로 수용하고,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쏠려 있는 현행 권력구조를 3권 분립 원칙에 좀 더 조응하는 형태로 바꿔야 한다는 기본 취지는 옳다고 본다.

성공회대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보노짓 후세인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헌법과 법률체계는 외국인 거주자가 100만이 넘는 현실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새로운 헌법이 1987년 이후의 사회적 변화를 적극 수용하고, 양성평등,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등 여러 가지 기본권과 관련해서도 헌법상 규정을 명확히 함으로써 기본권을 확장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또한 현재의 독립적 권한이 하나도 없는 국무총리제, 행정부주도 입법체제, 사법부 구성의 종속성 등이 꼭 개정되어야 할 사항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자문위원회가 소위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 원인을 너무 3권 분립이라는 틀 안에서만 협소하게 분석하고 있어, 권력층과 국민들과의 불균형 문제와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원칙을 헌법 안에 수용할 수 있는 방안들은 전혀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 결과 국회관련 제도 정비에서 “국민소환제도의 도입은 시기상조이며, 지방자치 차원에서 주민소환제의 경험이 일정 정도 축적된 후에 도입을 검토”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하며, 주관적인 판단으로 국민적 기본권의 확대를 원천봉쇄하고 있다. 또한 3권 분립의 강화를 위해 현재 대통령의 영향력이 결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대법원장, 대법관, 헌법재판소장의 추천/임명 과정을 의회에서 선출하는 것으로 개정하자는 제안도 그리 흡족하지 못하다. 진정 3권 분립 원칙을 강화하고자 한다면 이들은 국민들이 선출해야 한다. 여기에 현재 법무부 지휘아래 있는 검찰총장을 국민선출을 통해 뽑아 검찰을 독립시키는 방안도 추가되어야 한다.

권력기관 사이의 균형과 견제를 제도적으로 강화하는 것만으론 불충분하다. 이원정부제의 경우 내각불신임-국회해산권을 대통령에게만 부여하지 말고 국민들이 불신임 할 수 있는 권한도 헌법상 명시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대통령을 국민들이 불신임 할 수 있는 권한도 헌법에 표현되어야 한다. 물론 그 조건은 엄격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현재 시대적 변화가 요구하는 가장 중심적인 개헌 방향은 국민의 주권이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권력구조 개편 논의는 미흡할 수밖에 없다.

또한 현재 가장 신뢰도가 낮은 기관으로 뽑히고 있는 국회가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내세워 헌법 개정을 제기할 자격이 있는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들이 저지른 온갖 악행을 제도 탓으로 돌리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드러난다. 미디어법 날치기에서 보여주었듯이 법질서를 스스로 무너트리며 반민주주의적 행태를 일삼는 자들이 헌법 개정을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겠다는 것이 너무나 위선적이다.

기본권 분야의 개정에서도 국민의 기본권을 확대하겠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헌법을 무시하는 공권력을 제어하는 제도적 장치를 헌법에 포함하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 서울광장과 광화문 광장에서 아예 집회를 못하게 하고, 경찰이 임의로 반헌법적으로 집회를 허가제로 전환시킬 수 있다면 헌법상의 기본권 확대는 무의미하다.

이밖에도 많은 사항들이 검토되고 문제제기 돼야 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헌법연구 자문위원회가 제기한 내용과 직접 관련된 부분에만 국한해서 생각해 봐야할 요소들을 제기해 보았다. 다음에는 선거구제 개편 논의와 관련해 많이 언급되고 있는 제도형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박형준/새사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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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이슈 /정치2009.05.10 18:28

우리는 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선출과정’의 민주성만을 매우 제한적으로 인정할 뿐, ‘통치과정’의 민주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난 글에서 확인했다. 2008년 촛불 시위에서 분명하게 확인했듯이 국민에게는 대통령을 탄핵할 권한이 없으며, 국가 중대사를 국민투표에 부의할 권한도 없다. 민주주의가 ‘통치주체’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귀족정일 뿐이다. 현대의 귀족은 ‘정치 엘리트’, ‘의원’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선거를 통해 등장한 선출직 공무원들이 전 국민의 의사를 대신하는 ‘엘리트주의’는 보수세력만의 독점물은 아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대다수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당과 국가, 민의 결합을 제대로 이루어내기 보다 정치적 엘리트를 자임한 당의 정치 독점으로 귀결됐다.

진보정당 - 민주주의 - 리더십

역사책을 뒤적일 것도 없다. 오늘, ‘민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자던 포부를 내세운 진보정당들은 얼마나 대중과 내부 성원들의 민주적 의사에 근거해 운영되고 있는가? 또한 진보정당이 그리는 대안적 미래상이 얼마나 인민주권적 미래상을 그리는 데 적절한가? 새로운 대안체제를 꿈꾸는 진보정당 역시 자유민주주의와 경직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유산 속에서 허우적대며, 민중이 주체인 민주주의의 참의미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철히 평가해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정당의 역할을 대중의 의사에 따라 휘둘리는 수동적 역할에 국한시켜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중성을 강조하며 대중 추수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도, 그 과정이 될 수도 없다. 당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이해, 요구를 파악하여 대중 속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집단적 정치 활동체다. 리더십 없는 정치는 민주주의의 질을 떨어뜨리며,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게 만든다.

그렇다면 당의 리더십은 어떻게 발휘되어야 하는가? 폭력적 방식을 동원하기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허용한 ‘선거 경쟁’의 룰을 받아들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정체성과 대중의 요구 사이에 존재하는 딜레마에 부딪혔다. 급진적이지 않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개량’이 요구되었고, 그들의 정책은 보다 건전한 체제를 요구하는 ‘개혁’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정당 내부의 토론과 회의에는 급진적인 언술이 넘쳐나다가도 선거 때만 되면 기성 정당과 별 다르지 않은 ‘건전한’ 구호, 기성 정당의 부패나 무능에 대한 일방적 비판만이 넘쳐났다. 이제까지 선거운동의 경험은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진보정당운동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동시에 정치적 리더십의 공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정치적 리더십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만을 분명히 한 채 흔들림이 없는 구호를 남발하는 것도 아니고, 정당 내부의 열혈 활동가들의 주장을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들의 유토피아적 구호로 치부하며 대중의 의식이 존재하는 그곳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진보적인 정치적 리더십은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고, 대중 스스로 진보성을 갖도록 만들기 위한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동시에 매우 헌신적인 활동을 필요로 한다. 비록 ‘선거’가 아닌 항쟁적 방식의 혁명이라 할지라도, 다수 대중의 공감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억누르고 왜곡하는 억압적 정치권력이 공존할 때에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새로운 민주체제를 만들기 위한 진보정당의 정치적 리더십은 당의 전망을 대중에게 끊임없이 설득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대중의 공감을 얻는다는 것이 대중의 현재 기호에 맞추는 것도 아니고, 대중의 의사와 상관없이 깃발을 앞세우며 강요할 것도 아니다.

정치적 리더십을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지 않고서는 선거를 통해서건, 혁명을 통해서건 구현될 새로움이란 아무 것도 없다. 진보적인 대안체제의 창출은 그 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민주주의’를 동반해야 하고, 그 내용과 방향, 폭이 어느 정도로 구현될지는 정치세력의 리더십 역량에 크게 의존한다.

대중을 신뢰할 때 ‘인민주권적 민주주의’ 가능

물론 당의 정치적 리더십이 발휘된다 하더라도 대중의 지지가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대중들도 잘못된 선택을 하기고 하고, 올바른 길을 외면하기도 한다. 가깝게는 지난 대선에서, 멀게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이 권력연장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선거와 국민투표에서 대중은 분명 잘못된 선택을 했다.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스위스에서조차 강력한 이익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주민투표를 추진하는 사례도 있었고, 20세기 초 스위스 모델을 수입했던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거액의 홍보비를 뿌릴 수 있는 쪽이 주민투표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다.

‘대중에 대한 신뢰’와 ‘민주주의’는 대중의 옳은 판단에 기대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상호간의 의사소통과 정보·지식의 습득을 통해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중들의 의사를 왜곡하는 다양한 외부요인을 차단하도록 노력하며, 우리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들을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통치주체’의 문제이며 그 주체가 바로 대중이라면, 대중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 자체가 작동할 수 없다. 민중에 대한 신뢰, 이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는 당의 리더십과 대중 간의 지속적인 교감을 통해서만이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이상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다.

2010년 지방선거가 2008년 촛불로부터 시작된 정권과 진보·개혁적 국민 간 격돌이 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예상하고 있지만, 진보정당이 먼저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대한 관점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승리를 자신할 수는 없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대중의 저항은 민주주의의 인민주권적 재구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정서가 2008년 촛불 수준에서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리석다. 보수세력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과거 어느 수준으로의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정치세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동안 ‘민주대연합’으로 상징되는 반독재 연대가 실제로는 동등한 관계로서의 연대가 아니라 제도권 내 거대 야당의 지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도적 공간에서 진보적 대안을 실현할 방법을 마련해 놓지 못했던 우리, 그리고 진보정당의 한계가 만들어 놓은 결과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제까지의 관성 속에서 선거 공보물에 얼굴 하나 더 들이미는 것에 만족할 텐가, 아니면 민중이 주체되는 대안적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새 판을 짤 것인가? 2010년 지방선거를 다시금 우리 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검토하고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전환점으로 삼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지방, 그리고 자치에 대한 인식부터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진보정당에는 집권전략이 아니라 ‘집권 후 전략’이 필요

그동안 진보정당의 전망 속에는 지방자치가 크게 자리 잡혀 있지 않았다. 지방자치는 중앙권력의 하부기관으로만 인식되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중앙권력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중앙권력을 얻을 때만이 현실의 여러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고, 구체적인 대안은 집권 이후 자연스레 나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동안 진보정당들의 지방자치 대안은 ‘집권’ 그 자체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진보정당에서 제출된 지방자치론은 모든 것이 ‘집권’ 그 자체만을 위한 전략과 전술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류의 관점은 당 내부에서만 겨우 합의 가능한 것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모을 수 없었다. 당의 잠재적 지지자들이 당의 집권을 강력하게 소망할 어떤 유인도 제공해 줄 수 없는 것이다.

대안적 전망이 집권 이후에 마련될 수 있다는 안일한 발상은 오히려 집권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현실정치세력에 대한 불만이 그 정치세력과 정반대의 정치노선을 추구하는 이들에 대한 지지로 귀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막연한 환상이다. 거대 양당이 존재했을 때, 두 정당의 놀랄만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선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머무른다. 특히 한국 정치구도는 새로운 대안에 대한 선택을 요구하기보다, ‘가장 나쁜 세력’에 대한 ‘심판’을 강요하는 ‘적대성의 정치’ 상황이기 때문에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전략은 적대성의 정치로 수렴된 대중의 불만을 어떻게 ‘대안 선택의 정치’로 전환시킬 것인가가 주된 과제가 되어야 한다. 현실정치세력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한계를 벗어나 또 다른 분명한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어떤 대안을 선택할 것인가’로 정치구도가 전환되지 않는다면 제도정치공간의 양극화 현상은 계속 심화될 수밖에 없다. 곧 진보적 지방자치 전략은 집권 과정에 이르는 전략을 고민하는 것을 넘어, 집권 후 전략을 마련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합의하는 것 자체가 집권 전략이다.

문제는 지방자치에 대한 진보정당의 ‘집권 후’ 대안이 여전히 모호하다는 점이다. 여전히 진보정당의 전략은 주민자치를 진보적 정치엘리트의 활동의 보조적 수단 정도로만 인식하는 경향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으며, 풀뿌리 운동조직을 지지의 대상으로만 사고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여전히 제도 밖에 머무르며 가장 좋은 정치세력에게 표를 던지는 대상일 뿐, 지역 자치를 구현할 핵심 주체로 사고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글에서 논의한 민주주의에 내재된 ‘민중 스스로의 통치’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지방자치를 사고하는 기본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 국가 수준의 민주주의는 불가피한 위임을 받아들인 가운데, 대중의 ‘필요에 의한 통제’, 즉 국민투표와 소환, 발안제라는 통제기제를 사용해 주권자인 대중의 지위를 보장하는 것이라면, 보다 작은 규모의 지방자치는 인민주권이 실질적으로 구현되는 체제를 모색할 수 있다.

지역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근본 토대

소규모 지방, 소규모 공동체 수준에서는 일반적으로 크기가 큰 집단에 비해 집단 효능감(collective efficacy), 협동을 통한 긍정적 결과에 대한 기대, 집단 목표에 대한 몰입 수준이 높다. 통치의 범위가 작을수록 집합행동에 참여하는 개인들에게 돌아가는 집합재(collective goods)의 몫이 커지고, 자발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에 의해 집합재가 공급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소규모 집단이 대규모 집단에 비해 성원들이 공동이익을 위해 단합된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방자치는 규모의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데도 불구하고 국가 수준의 정치와 다름없이 엘리트주의화 되어 있다. 또한, 지역 주민이 지역통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제한적 수준에서 보장할 뿐, 실질적으로는 지역사회의 지배계급에 의해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 단위의 민감한 이슈에 비해 지역주민의 관심을 더 받지 못한다.

사상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한 지난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제외하면 지방자치선거 투표율은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 투표율보다 항상 낮았다. 오히려 지역에서의 주민 참여는 비제도적 주민운동의 형태로 이루어져 왔으며, 지방정치에 적극 개입하고자 하는 주민자치운동 또한 스스로 집권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보다 단체 자치의 감사자,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머무르고 있다.

                                 [그림] 대선, 국회의원, 지방선거 투표율



이런 결과의 이면에는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정치개입을 가로막는 구조적 원인이 존재한다. 지역사회의 관변조직이나 토호, 이권 브로커, 개발업자 등 특수한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의 발언권이 과잉 대표되는 상황과 철저히 거주지와 근무지가 분리된 조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장시간 노동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은 지방자치에 대한 ‘참여의 불평등’을 조건 짓는다.

이권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단체 활동으로도 충분한 생활이 보장되는 보수적 풀뿌리 단체에 비해, 진보적 풀뿌리 조직들은 매우 짧은 여가의 시간을 모두 투자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국제노동기구(ILO)가 2007년 발표한 ’2004~2005년 세계 노동시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장시간 노동 비율은 49.5퍼센트로 페루(50.9퍼센트)에 이어 세계 2위였다. 참여할 시간이 없다면 자치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정치는 지역에 상주하는 보수적 조직과 자영업자, 부녀회를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으며, 낮은 투표율 속에서 각종 조직 동원이 가능한 금권력을 가진 보수세력은 항상 승률 높은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지역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당은 이런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 과제는 지방자치의 민주주의적 재구성이라는 과제와 국가수준의 새로운 민주화라는 과제를 긴밀하게 연계시킨다. 다시 말해, 국가 수준의 새로운 민주화는 지역주민의 직접적 참여를 지향하는 지방자치를 통해서 가능하며, 지방자치의 재구성은 실질적 자치를 가로막는 국가차원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과 병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진보정당의 지방자치 전략은 지방선거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총선과 대선까지 연계시킬 수 있는 종합적 전략 속에 배치되어야 하고, 이를 현실화할 동력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다양한 대안적 가치와 사회적 힘의 연계, 즉 연대전략의 문제를 제기한다.

* 다음 연재에서는 ‘시민운동과 새로운 민주주의’를 다룰 예정이다.

** 이 글은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와 민주노동당 2010위원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진보적 지방자치론’ 프로젝트의 기초 토론문의 일부로 제출되었다.

손우정/새사연 연구원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재구성①] '정치적 냉소주의', 선거민주주의 한계 뛰어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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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거 보통선거라는 것은 한 편에서는 딜레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한 편에서는 일부 자신들에게 냉소적인 혹은 가장 덜 급진적인 층의 동의도 얻어 집권을 했으니까요... 이 점에서는 베네수엘라 차베스 PSUV 의 경우도 지금 상황에서는 최대점에 도달할경우 스위스(서사) 모델에 도착할 거라는 생각입니다. 스위스 모델은 직접 민주주의로의 초대(리북,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87315874 )과 같은 도서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를 취급한 도서에 나와 있습니다.(개중에는 절판도 있지요.) 스위스 모델도 일부 진보진영(모두 존칭 생략)의 모델이기도 한데 주로 대외적 관계인 중립국가 측면에서는 김용중과 지난 2007년 대선에서 논란 끝에 민주노동당 선대위에서 기각했던 코리아 연방공화국(http://blog.daum.net/corea1219 )에서 언급한 바 있고 앞 서의 중립국과 같은 체제는 다시쓰는 한국현대사1 ~ 3권의 저자 박세길의 혁명의 추억 미래의 혁명(시대의창)에서 지향점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정치모델과 경제모델을 모두 추구하는 모델은 우석훈이 있지요. 우석훈은 헝가리의 칼 폴라니와 유사합니다. 저도 한때 중립국 형 모델은 이상형으로 생각한 바 있습니다만 스위스 모델 또한 자본의 천국임(이 때문에 미국 및 EU권과의 FTA논란도 있었지요...)과 동시에 자산도피처라는 사실도 존재합니다. 이의 비판은 레프트21의 우석훈 비판기사 '시장의 공세에 맞설 대안경제 체제는 어떻게 가능한가?(http://www.left21.com/article/6501 )'에서도 있습니다. 베네수엘라도 현재의 상황은 자본진영에 의한 차베스 탄핵 시도들도 합법적으로 진행한 사실이 존재한 것으로 볼 때 성공치가 스위스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실패치는 칠레의 아옌데와 같은 비극적이거나 브라질의 룰라와 같은 희극적인 모델을 예상한다고 합니다. 참고문서는 노동자 정치신문(노정신)의 '최근 당건설 토론과 강령논의에 대한 비판과 입장1(http://lmagit.jinbo.net/bbs/zboard.php?id=newspaper&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l1=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09 )'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다른 예로 최근 부상하는 불란서/프랑스의 올리비에 브장스노/신 반자본주의 당(NPA)과 같은 경우도 2002년 포기했던 혁명모델과 같은 것을 (선거를 통해서라도) 집권후에는 혁명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죠... 캘리포니아의 사례는 이미 쟁취한 민주제도의 상층도입의 희극적 실패를 의미한다는 생각입니다.
    이외에 한국의 제도는 미국의 간접선거제도를 제외하고선 적대성의 발현이 극대화하는 제도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다른 결선투표제(불란서/프랑스, 희랍/그리스 등)나 선호투표제(호주/오스트레일리아, 애란/아일랜드 등)를 사용하는 국가들에서도 이는 존재합니다만 상대적으로 덜 한 점이 있고 이후에 위에서 언급한 올리비에 브장스노/신 반자본주의 당(NPA)와 같은 존재가 부상한 점이 존재합니다. 한국사회는 지난번 씨리즈에서 언급한 것 처럼 일용직 이나 위에서 언급한 장시간 노동자의 존재 등 노동의 탄력성이 적은 사람들이 많이 존재해서 이런 제도의 도입이 난관에 직면한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이 점에서는 87년 629의 국면에서도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대통령들은 결선투표제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순위 역전을 경험하고나서 결선투표제에 대한 의견을 뒤집기까지 했습니다. 이래서 힘쎈자의 의견에 대해서는 체념하거나 혹은 냉소하거나 지지하는 것인지는 글쎄요...
    강한 양당 존재에 대해서는 뒤베르제의 법칙(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X96468 ,항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몇 가지 반례도 제시했습니다. )이라고 하는 군요... 어디까지나 제도가 그렇다는 것이지만 꼭 제도에서만 찾기는 힘들도 어떤면에서는 전 시대의 정리 이전에 다음시대로 급격하게 이동한 이로인해 숙청대상이 승승장구하는 모순 - 가령 한국의 친일파에 의한 역청산과 같은 - 이 존재한 식민지를 경험한 (준)주변부의 부작용도 존재하긴 합니다. 다른 사회에 비해서도 경제개발 같은 차원에서의 중앙으로부터의 동원까지 존재한 사회여서 특히 더 그렇다는 생각이지만요...- 뒤베르제의 법칙의 예외 항목에서의 한국과 같은 식민지 생활을 했던 인도의 예 그리고 한 때의 한국의 예와 비견해서... 이래서 한국사회는 이의 완화를 위해서라도 결선제와 같은 제도가 절실했다는 생각입니다.

    지방선거제도 또한 지방의 현안 해결과 같은 자치문제보다는 애초부터 국회의원(도입당시인 2대 국회가 반 이승만 세력이 5/8가량 국회를 점하고 있었습니다.)들을 견제할목적으로 도입했고 이것은 한 동안 1961년 516 이후 30년간 동면상황에 처했고 1991년 불완전한 부활(부활시엔 자치단체 의원에만 선거를 한정함)과 1995년 부활의 완성과정(자치단체장도 선거목록에 포함)을 통과합니다. 도입동기부터 이랬으니 왜곡도 어쩌면 당연했을 과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마지막으로 진보정당의 부활 과정이 소련 붕괴후의 상황이어서 그런지 의회주의 적인 모습으로 부활 했습니다.- 1991년 경의 민중당 등. 물론 부활 전의 50년대의 진보정당 진보당도 상층부 중심의 모습이었고 1960년의 419공간에서의 진보정당도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반공체제하에서라는 제약과 동시에 부활시기엔 소련의 붕괴도 있어서 혁명정당 모델은 낡은 모델로 인식한 측면이 존재했을 겁니다. 이래서인지 손 우정 선생님의 말씀처럼 평상시의 토론에서는 과격한 언사들도 나오다가 선거시기나 국회 개회시기 등이 되면 온건화하는 모습들이 공존하는 이유일 겁니다. 한 편에서 이제까지 개제했던 사민주의나 기타 의회주의 급진정당 모습들 처럼 대리주의나 분업체제가 존재하는 모습도 익숙한 모습인데 오히려 선거제도마저 나쁜 한국에서는 불리한 존재양식이죠... 원래 정당의 구성 이외에도 각종 조직화가 더불어 발생해야 했지만 탈냉전과 냉전의 유산 반공체제 국가의 모습으로 인해 상당부분 쇠미한 진보정당의 모습을 들여온 결과가 오래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편에서 조봉암의 경우는 지금의 민주당의 전신인 50년대 민주당의 신 익희의 1956년 대선 정국에서의 급서로 인해 30%의 표를 득표(신 익희 추모표를 추가할 경우 약 45%)하지만 대중적 조직은 극히 적은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노동조합 등도 존재하고 해서 꽤 많은 대중조직들이 존재하지만 아직은 진보정당 내부와 이 측면의 각종 대중조직 내부에서도 직접주의(직접민주주의)는 저수준입니다. 이를 고양하는 문제가 클 것 이라는 생각이네요...

    2009.05.30 12:53 [ ADDR : EDIT/ DEL : REPLY ]

주제별 이슈 /정치2009.04.28 13:30

정치권의 관심‘만’ 4월 29일 보궐선거로 모아지고 있다. 각 당은 접전지역의 선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고, 진보·개혁적 시민사회 역시 이명박 정부의 정책방향을 심판하는 데 힘을 모으고 있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결국 여전히 대중에게 가장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정서는 ‘반MB’도, ‘선진화’도 아닌 ‘정치적 냉소주의’다.

지난해 서울시 교육감 선거와 올해 경기도 교육감 선거가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을 심판하려는 이들과 경제적 비상상황을 이용해 집권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이들 간의 대리전 성격이 강했다면, 이번 보궐선거 양상은 좀 더 복잡하다. 보수세력 내부의 경쟁구도가 성립된 곳도 있고, ‘진보 대 보수’의 대결구도가 명확해진 곳도 있다. 그런가하면 ‘보수-개혁-진보’의 전통적 3자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곳도 있다.

많은 비율의 유권자들이 적극적인 투표참여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번 보궐선거 역시 ‘누가 조직을 많이 동원하는가’에 따라 당락이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번 보궐선거가 내년 지방선거의 전초전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지방선거 또한 이 구도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유권자의 무관심과 냉소를 탓하기에 앞서 뭔가 ‘공허함’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모두들 ‘변화’를 말하고 있지만 그 변화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무관심과 냉소의 자리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분명한 동기를 부여해야 하지만, 모두가 하는 말들은 비슷비슷하다. 강조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정체성’인데, 집권여당의 정체성은 현실에서 보여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분명한 반면, 이에 대한 도전 세력들은 불분명하다.

한미 FTA를 찬성한다는 것인지 반대한다는 것인지(개혁), 새로운 대안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공약(진보), 도대체 기성정치세력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시민. 무소속) ‘관람자’들은 판별하기 어렵다. 결국 남는 것은 이명박 정부편과 반대편을 나누고, 서로 공격하며 자기편이 될 것을 호소하는 ‘적대성의 정치’ 뿐이다. 지난 해 촛불시위에서 표출된 대중의 정서가 ‘변화’였다면, 내년 지방선거가 진정한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변화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이번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재구성’이라는 기획 연재는 바로 이런 모호함을 조금만 더 ‘구체화’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물론 이 기획은 ‘제시’되었다고 해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 제시될 글들은 단지 논의의 출발을 위한 하나의 단초로서 제공되는 것이고, 다양한 생산적 논쟁과 비판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해 나갈 것이다.

연재의 내용 또한 단순한 ‘정치비평’에 머무르지 않는다. 추상적인 수준의 ‘관점 논쟁’일 수도 있고, 구체적인 사례분석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의 기획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주장의 소개나 서평일 수도 있다. 발전적 조언에서부터 비판을 위한 비판까지 다양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면, 이번 기획은 기대한 성과를 내는 것이다. ‘소통’이 부족한 것은 사실 푸른 지붕 아래에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소통’의 성과는 잘 정리된 논리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우여곡절과 ‘오류가능성’에서 살아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글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대안의 가능성’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두 가지 위기

대안적 민주주의, 대안적 지방자치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방자치가 단순히 지역수준의 독립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틀거리라면, 지방자치의 재구성도 전체 민주주의의 문제의식 속에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가 처한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살펴보자. 이명박 정부 하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한국 민주주의는 1987년 6월 항쟁 이래로 점진적인 발전을 경험해 왔지만,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후 그 근본 토대가 하나 둘씩 허물어지고 있다. 역사 속에 남겨졌다고 믿었던 독재, 반독재 투쟁이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했고,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민주주의’가 투쟁의 거리에서 단결의 힘을 보장하는 슬로건으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진단 속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 첫 번째 위기론은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진단하면서, 과거의 어떤 수준의 민주주의로의 복원을 요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복귀해야할 정점은 아마도 거대한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 탄핵을 저지시키고, 가장 진보적인 의회구성까지 이루어낸 2004년의 형태일 것이다. 그러나 2004년 민주주의로의 복귀는 2005년부터 노골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 지점을 돌파할 수 없으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과거의 문제를 되풀이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민주주의는 여전히 ‘누군가’의 민주주일 뿐 다수 대중은 배제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명백한 한계를 가진 민주주의일 뿐이다.

두 번째 위기론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민주주의가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낡은 것’이 되어버렸지만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음에서 오는 진공적 위기, 즉, 민주주의의 ‘정체’가 진정한 위기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과거 어떤 순간으로의 회귀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일 수 없으며, 새로운 민주주의 체계를 창조해 내는 것만이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기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함께 갑작스레 나타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1987년 체제 이후의 민주적 체제를 모색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우리가 두 가지 위기론 중 어떤 입장에 서야하는 지는 분명하다. 현재 우리가 처한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지 ‘옛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창조하는 것이어야 하며, 지방자치의 문제도 그 틀 속에 배치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2010년 지방선거는 단순히 ‘득표전략’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망과 전략을 대중적으로 합의하고 실천하여 전환적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우선 지금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부터 출발해보자.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선거’민주주의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현실 정치세력과 주류 학자들은 “선거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현재 주류 민주주의 패러다임인 자유민주주의론은 민주주의를 ‘인민들이 자신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기회를 누리는 것’으로만 본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고, 정치가의 지배와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선거와 일치시키는 이러한 시각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은폐시키고 있다. 사실 민주주의와 선거는 큰 연관이 없으며, 애초에 선거는 민주정보다는 귀족정을 위한 제도였다. 근대적 의미의 대의제가 만들어진 것은 13세기 영국에서 왕의 권력집중에 반대한 귀족들이 봉건적 권리를 요구한 것에서 기인하며, 대의제의 확대와 제도화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의 정치·경제력의 성장과 맥을 같이 한다.

선거가 ‘민주화’한 것은 노동계급의 투쟁에 직면한 자본가 계급이 이를 수용하고 체제내화 함으로써 탄력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이것은 다시 말해, 지배계급으로서의 자본가가 보통선거권을 수용하더라도 지배계급으로서의 지위를 여전히 향유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사회체제의 전복을 꿈꿨던 레닌은 대의제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공화정이 “자본주의에서 가능한 최상의 정치적 외피”일 뿐이라고 비판했고,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정에서 어떠한 개인, 기관 또는 정당이 변하더라도 지배계급의 권력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전망했다. 그가 보기에는 보통선거권 또한 단순한 노동계급 성숙도의 척도이자, 부르주아 지배의 도구일 뿐이었다.

물론 보통선거권과 대의제에 대한 레닌의 시각은 선거를 매개로 정치적 영향력을 폭발시킬 수 있는 기층 민중투쟁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한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세계 정치사에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좌파세력이 무수히 많지만, 성공적으로 체제이행을 이룬 나라는 없다는 점에서 단지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전망을 실현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함이 있다.

선거를 통해 체제이행이 가능하다고 봤던 현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가장 큰 반론은 현실에서 그들이 보여준 한계 그 자체였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근간으로 하는 포드주의의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확대된 국가기구와 관료집단에 의해 대중의 역동성이 사라져간 현실은 인민의 지위를 여전히 ‘통치받는 자’에 머물도록 만들었다. 결국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 즉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를 허용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평등적 가치와 이를 기반으로 한 인민주권사상이 자유민주주의 패러다임을 극복하지 못한 채 포섭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인민주권과 자치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유래하는 말 뜻 그대로 데모스(Demos. 인민)와 크라티아(Kratia. 지배)의 합성어다. 즉 ‘인민의 지배’를 뜻한다. 고대 그리스의 민회를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떠올리는 것은 비록 여자와 노예, 이방인을 제외했지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평범한 대중의 정치참여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도 모든 시민들이 민회에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 4세기에는 총 3만 명 정도의 시민 중 민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6,000명 정도였고, 동일한 시민이 매번 참석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민회가 모든 대중과 동일시되었던 이유는 대중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고, 그 민회에 참여하는 대중이 지속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자유를 제약할 공적인 규제와 중요한 의제를 스스로 결정함해 해결했다.

이것이 인민 주권 사상이다. ‘인민의 자기통치’, 즉 자신의 운명을 소수의 권력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통해 결정을 내려 억압과 자유 간의 아슬아슬한 긴장을 극복하려는 도전이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자신을 지배하는 통치자를 선출하는 투표행위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며, 자기 스스로 피지배자이자 지배자가 되는 ‘지배와 피지배의 동일성 원칙’, 즉 ‘자치’를 핵심으로 한다.

이처럼 민주주의에는 매우 혁명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민주주의의 개념 속에 내재한 혁명성, 즉 인민의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탈각시킨 채, 경제적 지배권력이 정치적 지배권력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정당화하는 통과의례로 남아버렸을 뿐이다.

물론 고대 도시국가의 직접민주주의는 현대 국민국가처럼 큰 규모에서 작동하기 어렵다. 모두가 직접 참여할 수 없어 불가피한 ‘위임’이 필요하다. 그리고 위임받은 대표자는 다수의 견해를 따르는 ‘선거’를 통하는 것이 민주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거’가 다수 견해를 반영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환상일 수 있다.

1차 투표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한 후보만을 당선시키는 우리나라의 ‘단순다수대표제’는 오히려 소수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을 높인다. 예를 들어 지난 18대 총선의 전국 투표율은 46.1퍼센트였고, 대부분의 당선자는 40퍼센트 초반의 지지를 얻었다. 이 말은 결국 10명 중 4.6명이 투표에 참가해 그 중 1.84명, 즉 기껏해야 2명의 지지를 받은 사람이 당선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8명이 선택하지 않는 후보, 소수의 지지를 얻은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단순다수대표제 하의 대의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보통선거권이 확립된 이후에도, 사회적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경제적 지배계급은 정치적 다수자로 거듭나기 위해 선거를 이용했다. 정치적 다수자가 되기 위한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확산시킨 것이 바로 ‘정치적 냉소주의’다.

정치는 더러운 것, 회피해야 하는 것, 정치라는 영역에 개입하는 사람들은 다 똑같다는 양비론적 냉소주의는 대중의 정치에 대한 개입과 관심을 차단시켜 투표율을 낮추고, 튼튼한 자금력으로 조직을 발동시킬 수 있는 지배계급의 당선율을 높여 왔다. 따라서 이들은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을 불온시하며, 겉으로는 정치 무관심을 지탄하면서도 속으로는 즐긴다.

물론 이런 행태가 지배적인 경향임은 분명하지만, 선거라는 것이 무조건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가로막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헤게모니가 파탄에 이르렀을 때, 선거는 오히려 새로운 사회진보의 중요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최근 남미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체제이행과정이 전통적인 폭력혁명 방식이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선거’를 통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폭력적 방식이건 아니건, 핵심은 바로 민중적 헤게모니, 즉 정치의 주체인 대중의 동의를 확보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수단일 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할 이유가 없다.

국가수준에서 인민주권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시도가, 선출된 대표자에 대한 대중의 통제, 즉 국민투표나 소환, 발안제로 나타날 수 있는 반면에, 지방자치 수준에서는 ‘상대적으로’ 지역주민의 직접 참여가 가능하다.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대한 소환제가 없고 국민 스스로 투표를 요구할 수 있는 국민투표제(referendum)나 발안제가 없다. 하지만 지방자치에서는 주민투표와 주민소환, 조례청구제 등이 있는 것은 지역 수준에서 어느 정도 인민주권적 가치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합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역수준에 존재하는 각종 주민참여 제도들이 인민주권적 의미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위로부터 허용된 부분적 제도는 지역 주민이 활용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장벽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표는 인민주권적 가치에 근거하여 현 지방자치의 비민주성을 파악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 과제는 흔히 ‘진보정당’의 역할로 이해되어 왔다. 그렇다면 과연 진보정당은 민주주의와 지방자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활동해 왔을까? 이 문제는 다음 연재글에서 검토한다.

손우정/새사연 연구원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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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전 - 손우정 연구원 블로그 국가인가 민주주의인가; http://blog.daum.net/roots96/6992005 - 에 알려드렸던 노정협(노동자 정치협회;lmagit.jinbo.net)의 기관지 최신호에서 ‘최근 당건설 토론과 강령논의에 대한 비판과 입장(
    http://lmagit.jinbo.net/bbs/zboard.php?id=newspaper&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l1=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709 )’을 발표하면서 중남미 일부의 급진좌파 진영(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 니카라과)의 혁명조치 이행의 절실 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즉 한편에서는 선거라는 형식으로 불가피한 집권을 하더라도 혁명조치 이행 - 이 점에선 선거 당선 후의 쿠데타(한국의 박정희와 페루의 후지모리와 같은)의 대척점에 있는 혁명조치도 생각가능하지만 - 은 필수라는 주장입니다.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상의 문서에 있는 것 처럼 자본주의 국가의 운영원리 대해 일부 언급한 바 있고 노암 촘스키도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드니 로베르, 시대의 창;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89229490 ,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DGT4808989229490 )' 등 촘스키의 육필저서를 포함한 관련서적들에서에서 역시 유사한 부분을 언급한 바 있기도 합니다. 촘스키 인터뷰 집 '누가 무엇으로 ...'는 안내 페이지를 보시면 아시겠습니다만 '자본주의는 없다'와 같은 페이지와 같은 부분이 있어서 다른 점도 있긴 합니다. 저라면 요 부분을 '자본주의는 **이다' 와 같은 언급을 하겠는데 요 부분은 여러 방향의 해석이 가능하지만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레닌과 촘스키가 저승에서 함께 만난다면?' 과 같은 가정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촘스키를 언급한 도서는 꼬옥 일독을 부탁 드리옵니다...^^
    아 선거로 집권한 경우(혹은 선거혁명)라 하더라도 한계점을 말한 것은 새사연도 마찬가지로 방향차이 정도는 있지만 말한 적 있지요... 바로 선거 집권 시에는 상층부 일부를 형성한 것일 뿐 아직도 나머지에서는 구 세력들이 실권을 누리고 있다고요... 이점은 이제까지 전통왕정이든 입헌정이든 공화정이든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극좌나 급진좌파에 해당하는 세력들은 중도좌파 - 사민주의나 혹은 민주적 사회주의, 민주사회주의, 수정주의, 개량주의, 중도주의 등; 베른슈타인, 카우츠키, 힌드먼 등이 이에 해당 - 식의 상층부 점거 후의 사회주의 확산방식은 불가능하다고 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앞서 알려드린 노정협의 기관지 노정신(노동자 정치 신문)이나 노동해방실천연대(해방연대; http://hbyd.org )의 기관지 사회주의 정치신문 해방(해방; http://hb.jinbo.net/ )에서는 사민주의에 대한 비판과 대안 기획을 여러차례 낸 바 있습니다. 노정신은 불란서(프랑스) 사회당과 브라질 노동자 당 등의 구체적인 집권 혹은 집권준비 사례를 중심으로 기획했고 해방지는 집권과 이를 위한 양태(직접민주주의와 분업,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 등)를 언급하는 차이점은 있지만 사민주의를 비판한 급진진영 좌파들로서 의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해방지는 아직 사민주의 비판과 대안 연속물 중 1호가 남아있긴 합니다.
    그리고보면 사민주의자이 일부 무력한 지점이 있었고 어떤 부분에선 신자유주의를 들여온 부분들도 있습니다. 유럽의 영국과 노르웨이의 노동당과 독일, 오지리의 사민당, 불란서와 서반아, 포도아 등지의 은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을 했고 중남미의 칠레의 사회당과 페루 등 의 경우엔 그 자신들이 미국및 EU와 FTA를 체결한 주체이기도 하지요... 칠레의 라고스와 바첼레트로 이어지는 칠레 사회당 정권은 새사연에서 비판한 바 있습니다. 직접체결 당사자는 아니어도 이전 정부가 설령 체결했을지라도 한 편에서는 이에 대해서 승계하겠다는 점을 주장하는 점도 있지요. 멕시코의 오브라도르 전 대통령 후보와 호주의 노동당 러드 총리는 이러한 예이고요...
    다음 으로 한국의 선거제도 혁파와 국민참여장치 - 국민투표 자유회부권, 국민발안, 국민소환제 등 도입 - 의 도입이 시급하지만 한국은 일용직 등 하루가 너무나 중요한 즉 하루의 탄력성 - '간단히 하루를 제끼더라도?' 라고 가정하시면 아실수 있습니다. - 이 너무 적은 사람들이 많은 탓에 이를 도입하는 것도 힘들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전 이 논리에 '차라리 선거제 대신 임명제로 하지?'라는 대응도 한 바 있지만 어쨋든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불황 혹은 전환기이기에 가능하든 생각을 합니다. 최선은 일단 과반 이상의 선거참여 그리고 과반이상의 득표 및 1차나 앞선 차수에 과반후보 부재시 차 회의 선거를 하거나 아니면 아일랜드 방식의 2차 선호투표제를 실시하는 방법이 존재하고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는 전의석 비례제 혹은 독일/오지리 식 정당명부제 - 지역구 초과득표 정당에 대해서 비율 초과분을 제외 의석배분 실시제; 단 정원을 초과하는 당선인/자 문제가 있지만 이는 중복 입후보로 해결한 예 있음 - 를 실시하는 것일 겁니다.
    또 하나 선거제도와 대통령 전용 회부 제도인 국민투표제에 있어서 관련 법안(선거법, 국민투표법)에 선거(투표)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 금지하는 조항과 사전선거운동 등을 금지하는 조항등도 존재합니다. 더 골때리는 일은 블로그나 카페, 클럽 등에 올리는 문서에 대해서도 문서가 언급한 실권 당사자가 권리침해(??)를 호소하면 차폐처리와 같은 것도 존재하는 상황입니다. 앞서의 선거에서의 제한 법안은 반 세기도 더 전 진보당의 선거 국면에서의 약진(1956년)을 목도하고 집권당 자유당과 민주당의 야합으로 올린 법안이라고 합니다.(1958) 이의 원형은 일본에서 보통선거권을 대중 일반에게 양보한 대정(다이쇼) 민주주의의 연장선상입니다.(1925) 일종의 상시적 통제 상황이랄까요?(인권운동 사랑방 인권오름 "사상의 '독점시장'을 깨자"/강성준) 이미 이전에 손우정 선생님께서는 선거제도의 한계를 언급 하셨지만 이 제도 마저도 이렇듯 동원선거(투표)나 선거(투표)동원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대국가이기에 직접 정치 - 직접 민주주의 - 가 불가능한 측면도 존재는 하고 그래서 소련의 관료제와 같은 퇴보도 이 측면에서 사고할 수 있겠습니다. 파리코뮌의 참여모델과 볼세비키 적 혁명/전위 정당의 자발적 참여 혹은 직접 민주주의 구현도 존재했습니다만 직접제도로의 승천과 간접제도의 대수술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인 것 만은 틀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2009.04.30 21:38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