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15정태인/새사연 원장

 

아마도 ‘세월’을 외면하고 싶은 뻔뻔함도 있었을 것이다. 촘촘히 알파벳이 틀어박힌 685쪽이나 되는 두툼한 책을 정신없이 읽어내린 데는….  지금 막 마지막 장을 덮은 책 표지에는 <21세기 자본>이라고 쓰여 있다. 요즘 전 세계, 특히 미국을 강타하고 있는 토마 피케티의 책 얘기다. 서문에 스스로 밝혔듯이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200년 되던 해,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에 피케티는 열여덟 살이었다. 이때부터 학문을 시작했다 쳐도 이제 겨우 25년, 자신의 첫 번째 저서에 감히 마르크스의 ‘자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무기는 장기 시계열 통계다. 각국의 공식 국민계정, 세금환급 자료, 17세기 이후의 각종 문헌,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재산 조사 등을 꼼꼼하게 모아서 길게는 300년에 이르는 일관된 통계를 만든 것이야말로 그의 빛나는 업적이다. 그의 천재성은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을 해명하기 위해 선택한 지표에서 번득였다. 경제학과 역사학은 물론 정치학과 사회학 그리고 곳곳에 등장하는 발자크와 오스틴의 소설까지 두루 천착했기에 찾아낸 핵심 지표, 그것은 ‘자본/소득 비율’(β=W/Y, 현재의 총자산이 국민소득 몇 배에 해당하는가)이다. 이 비율에 수익률(r)을 곱하면 국민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α=rβ)이 나오고 장기 정상상태(steady state)의 균형조건, 즉 저축률/경제성장률과 비교하면(β=s/g), 불평등의 추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자. 오랜 성장을 통해 자본이 충분히 축적된 사회에서 어떤 이유로든 성장률이 0이 되었다고 하자. 이런 상황이라면 임금은 전혀 오르지 않을 테지만 재산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어디선가 수익을 얻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채를 고려한 순자산이 0에 가까운 사람(국민의 50%를 넘는다)과 이미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보통 상위 10%가 70% 이상을 가지고 있다)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핵심은 수익률과 경제성장률의 격차(r-g)인데 벨에포크(유럽)나 도금시대(미국)에 이 격차와 자본/소득 비율(β)은 동시에 정점을 찍었다. 300년 자본주의 역사에서 1914년에서 1970년까지는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두 번의 전쟁과 대공황이라는 충격이 자본/소득 비율을 한껏 낮췄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전후의 ‘영광의 30년’이나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가능했던 것이다. 

피케티의 장기 통계에 따르면 자본의 수익률은 역사적으로 4~5% 주위에서 움직였는데 현재의 인구성장률 추이를 감안하면 21세기의 경제성장률은 기껏해야 1.5% 남짓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21세기 자본주의는 19세기 말처럼 점점 더 극심한 불평등에 빠져들 것이다. 피케티가 책 곳곳에서 한탄한 대로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운다”.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다. 해방과 농지개혁, 그리고 6·25 전쟁은 지주계급을 사실상 소멸시켰다. 이때 달성한 평등은 고유의 교육열과 함께 한국의 고도성장을 끌어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평등이야말로 성장의 원천인 것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부는 놀라운 속도로 집중됐고 이제 추격 성장도 한계에 다다랐다. 분배 상태를 그대로 놓고 과거의 고도성장기로 되돌아갈 방법은 없다. 

 


피케티의 해법은 자본세를 통한 자산 재분배와 누진세를 통한 소득 재분배

세월호의 비극은 눈앞에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걸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는 데 있다. 현재 한국의 경제 상황은 세월호처럼 침몰하고 있다. 활로는 없을까? 피케티는 ‘자본세’(우리로 치면 종부세와 종합금융세를 합친 세금)를 처방했다. 즉 r를 g에 수렴하도록 해서 얼마간이라도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나라만 자본세를 도입하면 국내의 자본이 유출될 것이므로 세계가 동시에 ‘글로벌 자본세’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피케티도 현재의 세계 정치에 비춰볼 때 이 제안이 너무 ‘이상적’이라는 것을 안다. 해서 그는 유럽연합이나 미국과 같은 거대 경제권이 먼저 이 정책을 채택해야 할 것이라는 희망을 내비친다. 

하지만 아시아가 더 낫지 않을까? 중국에서는 아직 대대적인 부의 집중이 이뤄지지 않았고 성장률은 그 어느 곳보다도 높다. 더구나 공산당의 자본 통제력은 여일하다. 즉 자본세율이 다른 곳보다 낮아도 되고 실행가능성도 높다는 얘기다. 우리도 함께 자본세를 통한 자산재분배, 누진세를 통한 소득재분배를 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의 세월호를 그저 보고만 있을 것인가? 행여 우리 아이만 살릴 길을 찾으려 하지 말기를! 그 길은 어디에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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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2정태인/새사연 원장

 

화창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계절인데 우리 마음은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맨다. 뉴스를 볼 수도, 안 볼 수도 없다.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면서 이 사회에 절망한다. 분노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누구의 책임인지 물어야 한다. 정치학자 보니 호닉이 명명한 “비상사태의 정치”가 발동되어야 한다. 

지금이야 차마 입 밖에 못 내겠지만 주류경제학자들은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청해진해운은 망한다. 그것이 시장의 처벌이다.” 그럴 것이다. 시장은 모든 것을 “사후에 조정”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목숨은 돌아오지 않는다. 생명은 사후에 조정되거나 정산될 수 없다. 또한 시장은 시행착오의 메커니즘이다. 인간과 자연의 생명은 시행착오를 겪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시장의 근본적 한계”이다.

그래서 규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금지와 의무, 그리고 공공 소유를 통해 규제는 위험을 사전에 줄이는 역할을 한다. 여객선의 수명은 20년으로 묶여 있었다. 낡은 선박은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9년 이 규제는 30년으로 완화됐다. 해운업체의 ‘전봇대’를 뽑아 준 것이다. 일본에서 18년이나 운항한 여객선을 사들인 청해진해운은 이 배를 증축했다. 더구나 한 시민단체에 따르면 목포해양경찰서는 2시간40분 동안 12척의 여객선을 ‘안전점검’했다. 한 척당 13분이다. 1년에 평균 4건의 사고가 발생한 위험지역을 지나면서 선장은 조타실에 있지 않았고 배가 기우는데도 탈출 명령을 내리지 않은 채 첫 번째로 배를 떠났다.

아주 직접적인 제도적 결함과 규칙 위반만 꼽아도 수없이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연루된 사람들은 법적 책임(accountability)을 져야 한다. 사고 현장에서 예의 짧은 말투로 “명령”을 내린 대통령은 자신이 더 포괄적인 시스템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2010년에 개정된 대한민국의 행정규제기본법 1조(목적)는 “행정규제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규정하여 불필요한 행정규제를 폐지하고 비효율적인 행정규제의 신설을 억제함으로써…”로 시작한다. 대통령은 “규제는 암덩어리”라고 규정함으로써 이 법에 ‘산도 뽑아낼 만한’ 힘을 불어넣었다. 바로 그만큼 우리 아이들은 위험해졌다.

“이게 나라인가?” 이 질문에 우리 모두 도덕적 책임(responsibility)을 져야 한다. 우리는 성장과 효율성의 신화를 수용했고 거기 어울릴 만한 지도자를 뽑았다. 투자가 늘고 GDP가 올라가면 아이들도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야말로 죽음의 경쟁을 시키면서 “내 아이는 승리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는 않은가? 광우병 우려 쇠고기 수입 때처럼 우리 아이에게 위험이 닥칠 확률은 “벼락이 머리 위에 떨어질 확률보다 적다”는 ‘전문가’들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닌가? 핵발전소와 고압 송전탑의 문제는 저 멀리 있는 생명을 위협할 뿐이라고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모두 경제의 효율성을 위해서 누군가 부담해야 할 비용일 뿐이라는 경제학자들의 말에 끄덕거리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지 않다. 한 톨의 모래가 산사태를 일으킬 확률은 0에 가깝지만 재난은 늘 그런 식으로 발생한다. 광우병은 전염되므로 독립적 확률이 아니다. 핵발전소는 우리가 전기를 아끼는 것만으로도 없앨 수 있다. 바보들처럼 1점 경쟁 속으로 애들을 내몰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북유럽 국가들이 세계에서 제일 안전하다는 연구에 비춰 본다면 이 모두 효율성과 별 관계가 없다. 


비상사태는 공감(empathy)을 폭발시킨다. 인간이 100만년 이상 발전시켜온 “측은지심”이다. 

“우리 아이만은”이라는 요행심이 아닌 “모두가 우리 아이”라는 공감을 바탕으로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새로운 사회 제도와 규범이 공감 속에서 형성되고 실천될 때 비로소 비극은 사라질 수 있다. 호닉은 비상사태에서 오히려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아냈다. 지금 우리 사회를 감싸 안은 공감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다. “반드시 기억하자, 절대로 잊지 말자”. 공감의 정치가 언제나 경제에 앞서야 한다. 이번 지방선거는 그 첫 번째 시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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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시냐고 물어보기가 무색한 요즘, 잘 지내시는지요?

국가가 숨기는 불평등에 관한 보고서 "분노의숫자" 책이 오랜 산고 끝에 나왔습니다. 

'세 살 불평등, 여든까지' 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국사회 불평등에 관한 총체적인 보고서 입니다. 

'설마? 정말이야?' 라고 생각하다가도 책 곳곳에 있는 숫자들이 우리의 자화상 같아

다 읽고 나면 슬픔이 밀려오기도 하지만, 

그만큼 2014 대한민국을 정확히 바라보는 '개안'을 선사해주기도 합니다. 

오늘보다 나은 대한민국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구매가능한 곳 : 알라딘 -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7128


'새사연 2014 > [신간] 분노의숫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노의숫자] 트레일러  (0) 2014.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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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6정태인/새사연 원장

지난해 12월12일 미국 무역대표부의 웬디 커틀러 대표보는 “한국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에 앞서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이행과 관련한 우려 사항을 우선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원산지 검증 완화, 금융회사의 고객 데이터베이스(DB) 공유, 자동차 분야의 비관세장벽 완화, 유기농 제품의 인증시스템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한국) 상품이 한·미 FTA로 인한 관세 혜택을 받으려면 그것이 미국(한국)에서 생산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이런 원산지 검증을 하는 곳은 관세청이다. 예컨대 한국에 수입된 오렌지 주스의 양이 미국 생산량보다 많다면 그건 분명히 원산지 규정을 어긴 것이다. 당연한 정부의 업무에 시비를 거는 건 주권 침해일 뿐이다.

커틀러가 마치 불법적 보호무역주의 조치인 양 ‘자동차 분야 비관세장벽’이라고 표현한 것은 환경부의 ‘저탄소 협력금’ 정책을 말한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은 차량 구입자에겐 보조금을, 기준 이상인 경우엔 부담금을 물리는 정책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후온난화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한 조치다. 미국 자동차 회사의 이익이 우리 아이들의 목숨보다도 소중하다는 얘기인가.

한·미 FTA와 한·유럽연합(EU) FTA는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금융정보를 해외에 위탁 처리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국은 금융거래 원장 같은 중요 정보까지 해외에 위탁하고, 재위탁의 범위도 확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제 당신의 개인정보 그 이상이 한반도를 뛰어넘어 미국이나 EU에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유기농 인증제를 2008년에 도입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6년이 지난 지금도 실행되지 않고 있다. 미국 정부의 요구 때문이다. 나아가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도 모를 미국과의 ‘상호동등성 협정’을 체결한 이후에나 이 중요한 정책을 실행하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우린 어떤 식품이 진짜 유기농인지 알 도리가 없다.

우리는 2006년의 한·미 FTA 4대 선결요건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번엔 TPP 4대 선결요건이다. 한·미 FTA 협상, 체결, 재협상, 비준 전 과정에서 그랬듯이 더 많은 요구가 뒤따를 것이다. 

당장 의약품 가격제도, 쇠고기 완전 개방이 기다리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9월 약의 사용량이 일정 수준 이상 증가하면 약값을 인하하는 제도(사용량-약가 연동제)를 도입했다. 의료비에서 약값이 차지하는 비중이 선진국의 2배에 달하는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정책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 정책이 파이자 등 다국적회사에 불리하다고 반대하는 것이다.

지난해 12월1일 미국 농무부는 “광우병 관련 쇠고기 수입규제를 현대화하고, 국제수역사무국(OIE)이 정하는 기준을 따르겠다는 입장을 국제사회에 천명한다”고 밝혔다. 미국이 쇠고기 시장을 활짝 열 테니 다른 나라도 이를 따르라는 얘기다. 2008년 5월의 촛불은 “한국 소비자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 30개월 이상 된 미국 소의 고기를 수입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미국의 뜬금없는 이 수입규제 현대화가 제일 먼저 노릴 곳은 상식에 비춰 봐도 바로 한국이다.

‘30개월 이상’ 쇠고기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광우병 위험물질이 무엇인지, 소의 어느 부위에 그런 물질이 있는지 누가 알려줬을까? 결국 2008년 촛불이 타오를 수 있게 한 사람은 누구일까?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 연대’ 박상표 국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온갖 사이비 학자들이 곡학아세할 때마다 정확한 사실로 반박한 것도 그였다. 

그는 우리와 동물의 건강과 관련해 세계 전체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전광석화처럼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그는 실로 따뜻한 가슴을 지닌 부지런한 천재였다.

그가 떠났다. 이 추운 겨울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 새로 통상정책을 맡은 산업통상자원부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담당 부처를 압박하고 있다. 우리는 박상표도 없이 미국의 압력을 막아내야 하고 TPP 협상도 감시해야 하며 국민의 건강은 안중에도 없는 경제관료들을 비판해야 한다. 시민과 동물들의 생명은 그가 비운 바로 그 자리만큼 위험해졌다. 하지만 하지만…. 그대 잘 가라. 터무니없이 모자란 우리지만 당신을 기억하는 시민들과 함께라면 또 한번 일어설 수 있다. 그러니 마음 푹 놓고 그대 잘 가라. 더 이상 생명을 걱정할 필요 없는 그곳으로 그대… 잘 가라.


* 본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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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7정태인/새사연 원장

 

안녕하세요? 경제 뉴스의 맥을 짚어 드리는 프레시안 도우미 정태인입니다. 이번 주엔 KB국민, NH농협, 롯데 세 카드사의 고객 정보 유출 사태가 경제면과 사회면을 뒤덮었습니다. 해서 이 문제를 다루긴 다뤄야 하겠는데, 개인적으론 참 난감한 일입니다. 저는 오직 보통예금 통장 하나와 카드 한 장으로 금융과 연결되어 있고, 이 사건을 어떤 경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개인 정보 유출이 우리 사회에 던진 문제들

 

어쩌면 이 얘긴 정보사회론이라든가 IT 보안기술 전문가가 해설해야 할 사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건을 이해하려다 보니 일지도 평소와 다른 모습이 됐죠? 사건은 코리아크레딧뷰로(KCB)라는 신용정보회사의 박 모 차장이 세 카드사에 파견을 나간 데서 비롯됐습니다. 카드사들은 자신들의 카드 부정 사용 방지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KCB에 용역을 준 거죠. 

 

보안 전문가인 박 씨는 이들 회사의 보안망을 뚫고 들어가 1억400만 건이라는 어마어마한 개인 정보를 빼낸 겁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휴대전화로 시시때때로 들어오는 "돈 빌리라"는 문자는, 어쩌면 이 정보를 산 곳에서 보낸 건지도 모릅니다.

 

단지 이들 세 카드사의 정보뿐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은행들의 계좌번호와 주소, 전화번호까지 모두 넘어갔고 이미 해지해서 고객이 아닌 사람들의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개인 정보가 쓸데없이 저장되어 있었고, 또 효율성을 이유로 여러 기관이 공유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만큼 여기저기서 새 나갈 가능성이 높아진 거죠.

 

IT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는 가운데, 금융기관들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업무를 전산화했습니다. 하지만 정규직을 채용해서 전산망을 구축하고 보안을 관리하기보다 일체의 업무를 외주로 처리했습니다. 기획재정부나 금융감독기관은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규제를 하기는커녕 금융기관들의 요구에 따라 오히려 개인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지금도 규제 완화만 외치고 있는 걸 보면 당시에 어땠을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금융지주회사법이죠. 이 법에 따라 금융지주회사들은 개별 자회사가 확보한 고객 정보를 다른 자회사에서 마음껏 쓸 수 있게 됐습니다. 또 보험업법 역시 수집된 고객 정보를 활용해서 동일인에게 다른 금융 상품을 팔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경제학에서 금융은 정보의 저수지라고 하는데 이들 법은 각 회사들이 그 저수지를 수익의 원천으로 사용하도록 조장한 셈입니다. 더구나 신용정보보호법 역시 위의 KCB 같은 신용정보회사들이 여러 금융 회사에서 받은 개인 정보를 다른 금융 회사에 판매하거나 가공된 정보를 비(非)금융기관에 제공하는 행위를 허용했습니다. 그러니 법과 정책이 개인 정보의 무분별한 수집과 유출을 조장한 셈입니다. 물론 금융 산업의 효율성이 목표였습니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사실 금융권의 보안 사고는 거의 매년 일어났습니다. 이 기사를 쓰기 위해 검색 기구에서 "개인 정보 유출"을 쳐 보았더니 2002년부터 사건이 나오더군요. 최근의 굵직굵직한 사건만 해도 △2009년 7.7 디도스 사건 △2011년 현대캐피탈 △농협 전산 마비 사태 △2013년 3.20 사건 등이 있었죠. 그때마다 금융 당국은 △2009년 9월 금융 부문 디도스 공격 대응 종합 대책 △2011년 6월 금융 회사 IT 보안 강화 종합 대책 △2013년 7월 금융 전산 보안 강화 종합 대책 등을 내놨습니다. 하지만 법과 규제는 고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신제윤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1월 22일 기자 회견을 열어 "재발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정보 보유·유통·관리 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며 '금융 회사 고객 정보 유출 재발 방지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정부가 내놓은 대책에는 △거래 종료 고객 정보 5년간 보관 △금융그룹 내 자회사 간 정보 공유 시 고객 동의 필수 △시스템 개발 등 외부 위탁 시 최고경영자(CEO) 사전 승인 △불법 정보 활용 금융 회사에 과징금 도입 등이 포함됐습니다. 이밖에 △정보 유출 책임자에 5000만 원 과태료 부과 △정보 유출 금융 회사 경영진 중징계 등도 있죠.

 

하지만 위에서 지적한 법적 문제는, 자회사 간에 정보를 공유할 때 고객 동의를 받는다는 제한을 둔 것 빼곤 전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신 위원장의 목표는 세계적 투자은행의 설립이고 박근혜 대통령은 서비스 산업 규제 완화를 역설하고 있으니까요.

 

특히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같이 소액 다수의 피해가 발생하는 사고 예방에 도움이 되는 근본적 제도는 검토도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사건은 금융 소비자 보호 차원을 넘어서 더 큰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과연 정보기술의 발전에 걸맞게 그에 따른 위험을 방지할 보안 기술을 확보했는지(예컨대 윈도우즈와 액티브 엑스의 문제), 또 개인 정보의 보안이 외주(하청-재하청-재재하청)에 의존해도 될 만큼 가벼운 문제인지, 금융 기관의 최고 경영자들이 보안 문제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금융 감독 기구 등 정부가 기술적 문제는 물론 개인의 정보라는 인권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지 모든 것이 이제라도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야 합니다.

 

거의 2년에 한 번씩 종합 대책이 발표됐지만, 계속 이런 사건이 터지는 건 이런 문제를 모두 드러내고 해결책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스위스에 나가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즉각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까지 했으니 오죽했을까요?

 

다보스의 '창조 경제'

 

그럼, 박 대통령은 스위스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요? 청와대 공식 브리핑에 따르면, 창조 경제에 대한 공감대를 기초로 양국의 협력 관계를 만들었다는 겁니다(이하의 내용은 스위스에 있는 ILO의 이상헌 박사가 현지 사정에 비춰 방문 결과를 해설한 내용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오후(현지시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제44차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일명 다보스포럼)에서 '창조경제와 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개막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박근혜 대통령이 22일 오후(현지시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제44차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일명 다보스포럼)에서 '창조경제와 기업가 정신'을 주제로 개막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양국이 사회 보장 협정을 체결했다는 발표가 우선 눈에 띕니다. 즉, 양국의 사업가나 기술자가 다른 나라에서 근무할 때 두 나라에 이중적으로 사회 보장 기여금을 내는 걸 피하자는 취지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혜택이 크다고 하는데, 한국인 중 여기 해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또 스위스는 웬만한 선진국들과는 이미 이런 협정을 맺었고, 최근에는 인도하고도 했다는군요.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항은 직업 훈련 제도입니다. 스위스의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안정성의 원천은 고급 기술전문가를 키워내는 직업 훈련 제도라는 건 맞습니다. 박 대통령이 직접 훈련 기관을 방문했고, 교환 프로그램도 만들었습니다.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스위스가 이런 협력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고 자화자찬했죠. 하지만 스위스의 직업 훈련은 독일식 도제 제도와 유사합니다. 중학교부터 '기술 학교'와 '대학반'으로 나뉘죠. 기술직과 사무직의 월급 차이가 그리 크지 않으니, 꼭 대학을 갈 필요가 없으니까요. 스위스의 직업 훈련 제도가 한국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사회적 임금 격차부터 없애야 할 겁니다. 이 지난한 일을 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대학을 가야 일단 루저(loser)를 면할 자격이라도 생기는 세상이 계속된다면, 이번 '성과'는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귤화위지(橘化爲枳)의 한 사례가 될 게 뻔합니다. 과연 박 대통령의 다른 정책에 사회 불평등을 해소할 만한 게 있을까요?

 

박 대통령이 1월 22일 다보스 포럼에서 한 연설은 위 일지에 인용한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전히 창조 경제’가 무엇을 하자는 건지 모르겠는데, 우리 언론에 따르면 다보스에 모인 기업가들한테선 박수를 많이 받았다는군요. 그들은 과연 어떻게 이해한 걸까요? 이상헌 박사는 우리나라 박수부대가 동원된 게 아니길 바란다고 썼습니다.

 

[관련 기사] (☞ 박 대통령, 다보스포럼서 '창조 경제' 특별 연설)

 

다보스에서 박 대통령의 연설보다 더 화제가 된 건 옥스팜의 짧은 보고서였습니다. 옥스팜은 유명한 국제구호단체죠. 옥스팜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85명이 전 세계 70억 인구의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맞먹는 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분히 다보스포럼에 모인 파워엘리트를 겨냥한 얘기죠. 세계의 1% 안에 드는 부유층의 재산은 110조 달러(약 11경7183조여 원)으로 35억 명의 전 세계 가난한 계층보다 65배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며, 이런 경제적 자원 집중은 정치 안정을 불안하게 하고 사회 긴장을 조성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제가 누누이 강조한 것처럼 현재 세계경제 침체가 지속되고 있는 건, 이런 불평등이 계속 심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적 완화에 의존한 회복은 결국 금융시장과 부동산시장만 부추기고 부와 소득의 편중은 점점 더 심해질 테니까요. 옥스팜의 이런 폭로는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겠죠. 관심 있는 분은 보고서를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관련 글] (☞ WORKING FOR THE FEW)

 

 

 

 

*본 글은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의 칼럼지인 <프레시안 뷰>에 기고되었습니다.

 <프레시안 뷰>는 조합원만 볼 수 있으나 일부 칼럼을 선별해 전체 공개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글을 보고싶으신 분들은 프레시안의 조합원이 되시기를 적극 추천합니다.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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