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03정태인/새사연 원장

 

 

 

 위클리펀치 405호 : 세월호의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아이들 모두를 살게 할 상생의 길

 

 

 

 

 

 

6 3, 아이들이 그렇게 간 지 49일째 되는 날입니다. 불가에서 영가의 극락왕생이나 환생을 빌며 49재를 치르는 날이지요.식상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이라 해도, 하루종일 내리는 비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이라는 가정 아래 온갖 다짐을 했습니다. 우리 곁으로 오기만 한다면 그까짓 등수가 무슨 상관이랴, 그다지도 하고 싶은 일을 왜 우린 그렇게 못 하게 했을까, 다시는 죽음에 이르는 경쟁에 들지 않게 하리라.

 

저는 그 40여일 동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공부했습니(이미 그 일부는 여러분께 보여 드렸습니다만 조금 더 정확한 수치와 논리,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쟁까지 정리한 충실한 보고서를 곧 보내드리겠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불평등으로 향하는 내재적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300년에 이르는 장기 통계로 보여준 책이지요. 한 때 시장경제의 힘으로 물질적 풍요를 충분히 이룬다면,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민주주의를 활짝 꽃 피운다면 사람들 간의 불평등이 해소되어 훨씬 나은 세상이 오리라는 건 꿈이라는 얘깁니다. 해서 피케티의 책을 지옥의 묵시록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피케티에 따르면 경제학자들이 낙관적 생각을 하게 된 건 1910년부터 1950년까지의 외부쇼크 때문입니다. 즉 두 번에 걸친 세계전쟁과 대공황이 자산/소득비율(현재의 자산을 1년동안의 국민소득으로 표현하면 얼마나 될까)을 형편없이 떨어뜨렸고, 그 이후 95%가 넘는 소득세나 노동조합의 강화 등 강력한 분배/재분배 정책을 사회가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다시 자산과 소득의 불평등이 벌어지기 시작해서 과거 가장 불평등이 심했던 유럽의 벨 에이포크나 미국의 도금시대(19세기말에서 1910년까지)를 방불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산의 수익률이 경제성장율을 상회하고(r-g>0, r은 수익률, g는 경제성장율) 앞으로 그 격차는 더 커질 테니(우리를 비롯한 선진국의 경우 인구증가율이 떨어질 게 틀림없으니까요)앞 날은 더욱 암담하다고 할 수 있겠죠.

 

우리나라의 불평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통계가 부실해서 장담할 순 없습니다만 한국은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에 속했을 겁니다.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이 지주계급을 소멸시켰고 고도성장으로 인해 자산보다 소득이 더 빨리 늘어났으니까요.

 

하지만 최근에 발표된 한은과 통계청의 자료(“국민대차대조표”)로 피케티 비율을 계산한 결과 한국은 어떤 선진국보다도 자산/소득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우리가 최근 체험하는 것처럼 최상위 1%의 소득이 치솟고 자산불평등 역시 대단히 빠른 속도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상류층과 보통 사람들 간의 격차가 확 벌어지고 있는 거죠.

 

1970년대나 80년대에 비해서 우리는 물질적으로 훨씬 더 나아졌습니다. 아이들이 요즘 누리는 풍요는 우리 땐 상상도 못할 수준이죠. 그런데 왜 아이들은 훨씬 더 불행해졌을까요? 그게 단순히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나약해서일까요? 아이들은 우리가 학생일 때보다 서너배는 더 공부합니다만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는 몇십배가 될 겁니다.

 

혹시 피케티가 분류하는 상류층(10%)와 중산층(그 아래 40%), 그리고 하층(하위 50%)간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떻게든 상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아니 적어도 루저가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아이들을 죽음의 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게 아닐까요? 과거에는 상중하의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지금은 가히 조선시대처럼 신분의 차이가 난다고 해야 할 만큼 벌어졌으니까요.

 

해서 우리는 아이들을 경쟁으로 몰아 넣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모두 노력해도 1등부터 50만등까지의 등수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지위 경쟁은 끝이 없고 하위 50%는 말 그대로 하류층이 되고 맙니다. 우리 아이들 모두 사회라는세월호에 갇혀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가만 있으라”(“딴 생각하지 말고 공부만 해라”)고 얘기하고 있는 거지요.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와 소득의 불평등을 줄이면 됩니다. 피케티는 각 사회가 어떤 제도와 정책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훨씬 더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피케티가 제안한 정책은 글로벌 자산세와 최고세율 80%의 소득세입니다만 평등을 이루기 위한 정책은 얼마든지 더 있습니다. 바로 새사연이 금년에 집중할 주제이기도 합니다.

 

새삼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이 글이 여러분께 전달될 오늘, 6 4일이 지방선거 날이기 때문입니다. 경쟁을 강화하겠다는 교육감 후보는 우리 아이들을 기어코 죽음으로 몰아넣겠다고 얘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누가 이런 경쟁구도를 없애겠다고 얘기하는지 꼭 살펴서 투표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세월호의 아이들을 잊지 않고 우리 아이들을 살리는 길입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을 강요하는 현재의 경쟁 구도 하에서 우리 아이들 을 모두 살려낼 길은 불행히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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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9정태인/새사연 원장

 

 

우리가 ‘세월호’의 절망에 빠져 있는 동안 바다 건너에선 세계의 아이들 수십억명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라는 ‘묵시록’이 화제다. 이제 마흔을 갓 넘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이 그것이다. 문체는 발랄하고 스스로 자신의 얘기는 묵시록이 아니라 낙관의 메시지라고 말하고 있지만….

 

피케티에 따르면 자본(이 책에서는 모든 자산, 즉 토지자산, 금융자산, 산업자산)의 수익률(r)은 자본주의 역사 내내 4~5%였다. 심지어 로마시대에도 그랬단다. 이런 상황에서 성장률(g)이 떨어지고, 자본/소득 비율(현재의 자산이 국민소득의 몇배인가)마저 올라가면 r-g가 커져서 부(자산)의 집중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 얘기는 경제학의 정설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리카도, 마르크스 등 고전적 정치경제학자들은 물론 쿠즈네츠의 역U자 가설, 모딜리아니의 평생저축 가설, 베커의 인적자본론, 그리고 경제학의 기초 중 기초라고 할 만한 한계생산력설, 심지어 시장실패론까지 피케티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아마도 지금 생물학계에서 ‘집단선택이론’을 놓고 대혼란이 벌어지고 있듯이 경제학계도 한동안 시끄러울 것이다. 어떤 이론을 들이대든 부의 집중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피케티는 ‘글로벌 자본세’(전세계가 모든 자산에 대해 세금을 매긴다)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앞에 글로벌이 붙은 것은 자본을 향한 각국의 경쟁적 구애 때문에 어떤 한 나라가 나홀로 세금을 매기지 못하는 상황 때문이다. 피케티 스스로 “유토피아적”이라고 수식어를 붙일 만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참여정부 초기에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해 이정우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이 상위 1%에만 해당하는 종합부동산세를 제시했을 때 당시 한나라당과 언론, 심지어 당시 수도권 민주당 의원들까지 “세금 폭탄”이라며 반대했다는 걸 기억하는가? 글로벌 자본세는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밖에 없는데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세계의 상위 1%가 가만히 있을까?

 

우리는 사회적 경제가 부의 집중을 막고 사람들의 창의성을 북돋는 또 하나의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경제는 기본적으로 자산의 공유에 기초한다. 특히 개인의 자산이 되어서는 안 될 자연자원을 공동체가 소유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모두가 똑같이 누린다면 부의 집중을 막는 것은 물론 다음 세대를 위해 자연을 보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역사상 딱 한번 자산의 재분배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는데 그건 두 번의 세계전쟁과 대공황을 겪은 뒤였다. 이런 비극을 거치지 않고 사회적 합의에 따라 자산 재분배를 할 수 있있다면 그 나라야말로 선진국이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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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0정태인/새사연 원장

프랑스의 젊은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이제 월드컵의 스타 축구선수만큼 유명인이 됐다. 그의 책 <21세기 자본>은 분배에 관한 이야기다. 1960년대 이래 분배 문제는 주류경제학에서 찬밥 신세였으니 상전벽해인 셈이다. 


이론적으로는 보울리가 “자본과 노동이 가져가는 몫은 일정하다”는 주장을 해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새뮤얼슨의 지지를 받았고(‘보울리 법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같은 상을 받은 쿠즈네츠는 “자본주의 발전 초기에는 분배가 악화되지만 일정 단계를 넘어서면 분배가 개선된다”는, 저 유명한 ‘역U자 가설’을 내놓았다. “시장에서 자본이나 노동은 생산에 기여한 만큼 보수를 받게 된다”는 ‘한계생산력설’은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온다. 따라서 “분배는 신경쓰지 말고 성장만 하면 된다”, “정부가 함부로 분배 문제에 개입하면 성장을 방해해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이 올 것”이라는 주장이 50년간 우리를 지배했다. 피케티는 이런 ‘정설’들을 단숨에 뒤집었다.

그의 무기는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장기 통계, 즉 역사적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통계는 우리나라의 전 자본스톡(국부)을 한 해의 국민소득으로 나누면 얼마나 될까를 보여주는 β(=W/Y)이다. 이 수치에 자본의 수익률(r)을 곱하면 국민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α=rβ)이 된다(제1법칙). 그리고 역사에서 찾아낸 이 수치를 신고전파의 ‘균형성장 조건’(β=s/g, s는 저축률, g는 경제성장률)과 비교했다.

실제 서구의 역사에서 β, 즉 자본스톡의 상대적 크기는 19세기 말(프랑스의 벨 에이포크, 미국의 도금시대)에 6~7배에 달했고 1910년부터 1950년대까지 2~3배까지 뚝 떨어졌다가 1980년대부터 급격히 상승해서 현재는 5배를 넘어섰다. 또 그는 자본수익률(r)은 전 역사를 통해서 4~5%로 일정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하여 현재 선진국의 불평등 지표는 2차대전 후 최저치를 기록한 후, 1980년대부터 19세기 말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에 분배가 개선됐던 것은 두 번의 전쟁에 의한 자본의 물리적 파괴, 그리고 뉴딜 등 사회개혁에 의한 자본 및 소득의 중과세(최고 부자에 대한 소득세가 90%를 넘었다) 때문이었다. 

또한 앞으로 경제성장률은 점점 더 낮아질 전망이므로 세계는 ‘잠재적으로 가공할’ 상황에 빠질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피케티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지난 14일 한국은행과 통계청은 ‘국민대차대조표 공동개발 결과’(잠정)에서 “2012년 말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순자산(국부)은 1경630.6조원으로 국내총생산(1377.5조원)의 7.7배로 추계(잠정)된다”고 발표했다. 이 수치를 피케티의 정의대로 다시 계산하면 우리나라의 β는 약 5.6이 된다. 한편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노동소득분배율(1-α)은 60% 정도니까 우리나라의 α는 약 40%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r(=α/β)는 약 7.1%나 되는데, 이 수치는 세계 평균보다 훨씬 높다.


현재 우리의 β는 일본과 이탈리아 다음이고 α는 세계 1위일 것이다. 한은과 통계청 보고서의 부록을 보면 2000년 이후 이 수치가 대단히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즉 우리나라의 불평등은 선진국 어느 나라보다 더 빨리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아마도 1960년대에 우리나라의 β는 세계 최저 수준이었을 것이다. 농지개혁과 한국전쟁 때문이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불평등의 늪이 걷잡을 수 없이 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체감하고 있다.

세월호가 우리를 절망케 했던 것은 뻔히 눈뜨고도 단 한 명의 생명도 구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한국의 피케티 비율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 전부, 곧 세월호에 갇힌 아이들 신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피케티의 주장대로 과감한 자산재분배와 소득재분배가 답일 테다. 그 스스로 ‘유토피아적’ 해법이라고 말하지만 우리 아이들에 대한 현재의 심정이라면 결코 못할 일이 아니다. 아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다시 한번 문제는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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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5정태인/새사연 원장

 

아마도 ‘세월’을 외면하고 싶은 뻔뻔함도 있었을 것이다. 촘촘히 알파벳이 틀어박힌 685쪽이나 되는 두툼한 책을 정신없이 읽어내린 데는….  지금 막 마지막 장을 덮은 책 표지에는 <21세기 자본>이라고 쓰여 있다. 요즘 전 세계, 특히 미국을 강타하고 있는 토마 피케티의 책 얘기다. 서문에 스스로 밝혔듯이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200년 되던 해,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에 피케티는 열여덟 살이었다. 이때부터 학문을 시작했다 쳐도 이제 겨우 25년, 자신의 첫 번째 저서에 감히 마르크스의 ‘자본’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의 무기는 장기 시계열 통계다. 각국의 공식 국민계정, 세금환급 자료, 17세기 이후의 각종 문헌,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재산 조사 등을 꼼꼼하게 모아서 길게는 300년에 이르는 일관된 통계를 만든 것이야말로 그의 빛나는 업적이다. 그의 천재성은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을 해명하기 위해 선택한 지표에서 번득였다. 경제학과 역사학은 물론 정치학과 사회학 그리고 곳곳에 등장하는 발자크와 오스틴의 소설까지 두루 천착했기에 찾아낸 핵심 지표, 그것은 ‘자본/소득 비율’(β=W/Y, 현재의 총자산이 국민소득 몇 배에 해당하는가)이다. 이 비율에 수익률(r)을 곱하면 국민소득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α=rβ)이 나오고 장기 정상상태(steady state)의 균형조건, 즉 저축률/경제성장률과 비교하면(β=s/g), 불평등의 추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자. 오랜 성장을 통해 자본이 충분히 축적된 사회에서 어떤 이유로든 성장률이 0이 되었다고 하자. 이런 상황이라면 임금은 전혀 오르지 않을 테지만 재산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어디선가 수익을 얻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채를 고려한 순자산이 0에 가까운 사람(국민의 50%를 넘는다)과 이미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보통 상위 10%가 70% 이상을 가지고 있다)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핵심은 수익률과 경제성장률의 격차(r-g)인데 벨에포크(유럽)나 도금시대(미국)에 이 격차와 자본/소득 비율(β)은 동시에 정점을 찍었다. 300년 자본주의 역사에서 1914년에서 1970년까지는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두 번의 전쟁과 대공황이라는 충격이 자본/소득 비율을 한껏 낮췄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전후의 ‘영광의 30년’이나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가능했던 것이다. 

피케티의 장기 통계에 따르면 자본의 수익률은 역사적으로 4~5% 주위에서 움직였는데 현재의 인구성장률 추이를 감안하면 21세기의 경제성장률은 기껏해야 1.5% 남짓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21세기 자본주의는 19세기 말처럼 점점 더 극심한 불평등에 빠져들 것이다. 피케티가 책 곳곳에서 한탄한 대로 “과거가 미래를 먹어치운다”.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다. 해방과 농지개혁, 그리고 6·25 전쟁은 지주계급을 사실상 소멸시켰다. 이때 달성한 평등은 고유의 교육열과 함께 한국의 고도성장을 끌어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평등이야말로 성장의 원천인 것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부는 놀라운 속도로 집중됐고 이제 추격 성장도 한계에 다다랐다. 분배 상태를 그대로 놓고 과거의 고도성장기로 되돌아갈 방법은 없다. 

 


피케티의 해법은 자본세를 통한 자산 재분배와 누진세를 통한 소득 재분배

세월호의 비극은 눈앞에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걸 보면서도 속수무책이었다는 데 있다. 현재 한국의 경제 상황은 세월호처럼 침몰하고 있다. 활로는 없을까? 피케티는 ‘자본세’(우리로 치면 종부세와 종합금융세를 합친 세금)를 처방했다. 즉 r를 g에 수렴하도록 해서 얼마간이라도 불평등을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나라만 자본세를 도입하면 국내의 자본이 유출될 것이므로 세계가 동시에 ‘글로벌 자본세’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피케티도 현재의 세계 정치에 비춰볼 때 이 제안이 너무 ‘이상적’이라는 것을 안다. 해서 그는 유럽연합이나 미국과 같은 거대 경제권이 먼저 이 정책을 채택해야 할 것이라는 희망을 내비친다. 

하지만 아시아가 더 낫지 않을까? 중국에서는 아직 대대적인 부의 집중이 이뤄지지 않았고 성장률은 그 어느 곳보다도 높다. 더구나 공산당의 자본 통제력은 여일하다. 즉 자본세율이 다른 곳보다 낮아도 되고 실행가능성도 높다는 얘기다. 우리도 함께 자본세를 통한 자산재분배, 누진세를 통한 소득재분배를 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의 세월호를 그저 보고만 있을 것인가? 행여 우리 아이만 살릴 길을 찾으려 하지 말기를! 그 길은 어디에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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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2정태인/새사연 원장

 

화창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계절인데 우리 마음은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맨다. 뉴스를 볼 수도, 안 볼 수도 없다.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면서 이 사회에 절망한다. 분노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누구의 책임인지 물어야 한다. 정치학자 보니 호닉이 명명한 “비상사태의 정치”가 발동되어야 한다. 

지금이야 차마 입 밖에 못 내겠지만 주류경제학자들은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청해진해운은 망한다. 그것이 시장의 처벌이다.” 그럴 것이다. 시장은 모든 것을 “사후에 조정”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목숨은 돌아오지 않는다. 생명은 사후에 조정되거나 정산될 수 없다. 또한 시장은 시행착오의 메커니즘이다. 인간과 자연의 생명은 시행착오를 겪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시장의 근본적 한계”이다.

그래서 규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금지와 의무, 그리고 공공 소유를 통해 규제는 위험을 사전에 줄이는 역할을 한다. 여객선의 수명은 20년으로 묶여 있었다. 낡은 선박은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9년 이 규제는 30년으로 완화됐다. 해운업체의 ‘전봇대’를 뽑아 준 것이다. 일본에서 18년이나 운항한 여객선을 사들인 청해진해운은 이 배를 증축했다. 더구나 한 시민단체에 따르면 목포해양경찰서는 2시간40분 동안 12척의 여객선을 ‘안전점검’했다. 한 척당 13분이다. 1년에 평균 4건의 사고가 발생한 위험지역을 지나면서 선장은 조타실에 있지 않았고 배가 기우는데도 탈출 명령을 내리지 않은 채 첫 번째로 배를 떠났다.

아주 직접적인 제도적 결함과 규칙 위반만 꼽아도 수없이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연루된 사람들은 법적 책임(accountability)을 져야 한다. 사고 현장에서 예의 짧은 말투로 “명령”을 내린 대통령은 자신이 더 포괄적인 시스템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2010년에 개정된 대한민국의 행정규제기본법 1조(목적)는 “행정규제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규정하여 불필요한 행정규제를 폐지하고 비효율적인 행정규제의 신설을 억제함으로써…”로 시작한다. 대통령은 “규제는 암덩어리”라고 규정함으로써 이 법에 ‘산도 뽑아낼 만한’ 힘을 불어넣었다. 바로 그만큼 우리 아이들은 위험해졌다.

“이게 나라인가?” 이 질문에 우리 모두 도덕적 책임(responsibility)을 져야 한다. 우리는 성장과 효율성의 신화를 수용했고 거기 어울릴 만한 지도자를 뽑았다. 투자가 늘고 GDP가 올라가면 아이들도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야말로 죽음의 경쟁을 시키면서 “내 아이는 승리할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는 않은가? 광우병 우려 쇠고기 수입 때처럼 우리 아이에게 위험이 닥칠 확률은 “벼락이 머리 위에 떨어질 확률보다 적다”는 ‘전문가’들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닌가? 핵발전소와 고압 송전탑의 문제는 저 멀리 있는 생명을 위협할 뿐이라고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모두 경제의 효율성을 위해서 누군가 부담해야 할 비용일 뿐이라는 경제학자들의 말에 끄덕거리고 있는 건 아닌가?

그렇지 않다. 한 톨의 모래가 산사태를 일으킬 확률은 0에 가깝지만 재난은 늘 그런 식으로 발생한다. 광우병은 전염되므로 독립적 확률이 아니다. 핵발전소는 우리가 전기를 아끼는 것만으로도 없앨 수 있다. 바보들처럼 1점 경쟁 속으로 애들을 내몰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북유럽 국가들이 세계에서 제일 안전하다는 연구에 비춰 본다면 이 모두 효율성과 별 관계가 없다. 


비상사태는 공감(empathy)을 폭발시킨다. 인간이 100만년 이상 발전시켜온 “측은지심”이다. 

“우리 아이만은”이라는 요행심이 아닌 “모두가 우리 아이”라는 공감을 바탕으로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새로운 사회 제도와 규범이 공감 속에서 형성되고 실천될 때 비로소 비극은 사라질 수 있다. 호닉은 비상사태에서 오히려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찾아냈다. 지금 우리 사회를 감싸 안은 공감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다. “반드시 기억하자, 절대로 잊지 말자”. 공감의 정치가 언제나 경제에 앞서야 한다. 이번 지방선거는 그 첫 번째 시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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