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만성적 허약과 방종에 의해 질병에 걸린 인간들은 의학적 치료의 대상이 아니며도덕적 타락은 추방이나 처형의 이유가 되고우수한 자손의 번식을 통한 도시 국가의 이상 실현을 위해 우수한 계급의 현명한 결혼을 주장했었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는 말이 있다이 말이 뜻하는 바는 사회의 특권층을 형성하는 유전적 형질이 대물림된다는 의미다유전학적으로 이 말을 분석해보자면왕후장상이 되는 유전적 형질은 우성(dominant)이라는 뜻이다부모 중 한 쪽에서만 왕후장상이 되는 유전자를 물려받으면 그 자식은 왕후장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만약 그렇지 않다면즉 이 유전자가 열성(recessive)이라면 왕후장상 유전자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도태될 것이다.

 

우생학(eugenics)이라는 개념이 인류 역사에 등장한 것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플라톤은 만성적으로 허약하고 질병에 걸리는 이들은 의학적 치료의 대상이 아니며오히려 이들은 우수한 자손의 번식을 위해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직접적으로 우생학이라는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83년 다윈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에 의해서다골턴은 우생학이라는 단어를 고안하기 훨씬 전인 1865년 훗날<유전성과 천재>라는 책으로 출판될 한 글에서, “사회저명인사들의 가계를 추적/조사한 결과 이들 대부분이 혈연관계로 엮여 있으며신체적 특성 뿐 아니라 개인의 재능과 성격도 유전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사회 특권층의 유전적 가계에 대한 결론을 바탕으로 골턴은, “우수한 남녀 간의 선택적 결혼을 몇 세대만 성공적으로 수행해도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인종을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우생학은 그 기원부터 사회 특권층이 우수한 유전적 형질을 지니고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적어도 골턴이 활동하던 영국사회의 특권층은 유전적으로 우수해 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유전적 우열을 나누는 기준이 자의적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적어도 진화적 관점에서 유전적 우열은 주관적 가치판단의 영역은 아니다주어진 자연환경에서 더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는 형질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유전적으로 우수한 형질이라는 판단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예를 들어, (현대판 우생학이라는 비판에 자주 노출되는진화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남성의 능력과 재산용기,사회적 지위야망너그러움부지런함정서적 안정 등은 여성이 짝을 고를 때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형질들이다여성이 이러한 유전적 형질을 보유하고 있는 남성을 짝으로 선택하는 이유는남성에 비해 자식을 낳고 기르는데 여성이 훨씬 더 큰 투자를 하기 때문이다이는 짝으로서의 남성이 장기적으로 자신과 자손을 보호해줄 수 있는 유전적 형질을 지녔는지가 여성의 생식적 적합도에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만약 사회적 특권층이 유전적으로 우수하다면우리는 특권층의 남성들에게서 위와 같은 유전적 형질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정리해 보자일반적으로 사회적 특권층이란 일반인들에 비해 재산과 지위가 현저하게 높은 이들을 뜻한다골턴을 비롯한 많은 우생학자들은 이러한 특권층이 사회적 요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전적 요인에 의해서 그들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특권층을 만드는 유전적 형질이 존재하며 이러한 형질들은 자연선택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이다우생학은 이러한 특권층의 유전형질을 우수한 것이라고 판단한다현대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여성이 우수한 유전적 형질을 지닌 남성으로 판단하는 일군의 기준들이 존재한다능력과 재산용기사회적 지위 등이 그것이다이러한 기준들 중 능력과 재산사회적 지위 등과는 달리 힘과 용기는 직접적으로 신체적 판별기준을 제공한다골턴과 우생학자들의 주장이 맞다면 특권층의 남성들은 비특권층의 남성들보다 힘과 용기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할 만큼 탁월해야 한다는 뜻이다적어도 19세기말 골턴의 눈에 비친 영국사회의 특권층 남성들은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특권층에서는 19세기의 영국과는 정확히 반대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확고한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 씨가 아들의 병역비리로 패배하고이를 계기로2004년 <공직자등의 병역사항 신고 및 공개에 관한 법률> 이 제정된 이후, 4급 이상 공무원과 직계비속의 병역의무 이행이 공개되고 있다이를 분석한 결과들은 참혹한데,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 내각의 군 면제 비율은 24.1%로 일반 국민의 10배 수준으로 알려졌다. 국회의원들의 경우는 이보다 심각해서 국회의원 본인이나 자제들의 병역기록이 조사될 때마다 항상 병역 면제율 1위를 달리고 있다. 16대 국회의원과 그 자제들의 병역이행 실태를 조사했던 한 신문기사의 한 구절처럼 이들의 높은 병역 면제율이 병무청 기준에 따른 합법적인 수치라면우리나라 국회의원 자제들은 일반 국민들에 비해 건강상태가 현저히 나쁘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들 중 대다수가 신체결함에 따른 병역 면제’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국회의원들의 병역면제 비율은 정당을 가리지 않았지만 한나라당이 항상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으며고위공직자와 직계비속의 경우에는 정권을 가리지 않았다고위공직자와 국회의원 외에도 7대 재벌가 자제들의 30%가 병역이 면제되었는데특히 삼성관련 그룹들의 경우 대상자 11명 가운데 8명이 면제를 받아 73%의 병역 면제율이라는 왕후장상의 면모를 기탄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판단해 본다면 한국사회의 특권층인 고위공직자국회의원재벌 상류층 대부분이 심각한 신체적 결함에 노출되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골턴은 특권층 일수록 신체적 우수함을 결정하는 우수한 유전적 형질이 광범위하게 퍼져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는데적어도 한국사회에서 골턴의 우생학은 기초적인 가정부터 틀려버린 셈이다한국사회라는 분석대상을 통해 골턴의 우생학은 정말 멍청한 과학이 되어 버리는데한국사회에서 부자가 되려면 군대를 가지 않을 정도로 신체적 결함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동아일보는 2000년 3월 29일 기사를 통해 '군대를 가지 않으면 부자가 된다.'라는 법칙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16대 총선 출마자들 중 현역으로 복무했던 이들의 평균재산은 12억 3천만 원이지만병역 면제 출마자들의 경우는 평균 25억 6천만 원이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신체적 결함으로 인한 병역 면제비율이 대물림되고 있으니 이들은 유전적으로도 열등한지 모른다우생학이 아니라 열생학(Dysgenics)이 필요한 사회라는 뜻이다.

 

열생학은 우생학의 반대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특정 집단이나 종 내에 결함이 있거나 손상된 유전형질들을 누적시키는 요인들에 관한 연구로 정의된다이 용어는 그다지 널리 사용되지 않다가 1915년 데이빗 조단(David Jordan)이라는 과학자가 1차 세계대전의 열생학적 영향을 기술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조단은 1차 세계대전이 신체적으로 우수한 남성들의 씨를 말려버렸기 때문에 열등한 형질들이 인구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진단했다조금 더 진보한 열생학 이론은 1996년 리차드 린(Richard Lynn)이라는 영국의 심리학자에 의해 전개되었는데린은 <열생학현대 인구집단의 유전적 타락> 이라는 저서를 통해 산업사회 이후 인류는 자연선택을 벗어나게 되었고이로 인해 유전적으로 열등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그는 이에 대한 근거로 1995년 영국 범죄자들의 출산율이 3.91명인데 비해 일반인은 2.1명에 불과하다는 점을 들었다시대착오적인 우생학자라는 낙인이 찍힌 것과 동시에통계적 방법론을 자의적으로 왜곡한다는 평가를 받는 리차드 린 박사는 ‘IQ세계지도를 통해 한국인의 지능이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리처드 린과 같은 학자그리고 흑인의 지능에 관한 인터뷰로 소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던 제임스 왓슨과 같은 과학자들은 인종본질주의자들로 분류된다이들은 유전법칙의 확실성이 사회적 요인들의 효과보다 본질적이라고 믿으며이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들의 이론에 우호적인 결과들만을 선택적으로 취합한다. IQ와 재산, IQ와 국민행복, IQ와 국가경쟁력 등의 연구가 대부분 이러한 방법론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 대부분은 개입이라는 실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따라서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표현될 수 없다설사 IQ와 국가경쟁력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그것이 “IQ가 높기 때문에 국가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었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우생학과 열생학은 모두 이러한 과학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우생학은 유전학이 생물학의 중심으로 성장할 무렵에 유전학적 성과들을 인류의 복지에 사용하고자 하는 응용학문으로 탄생했다불과 십여 년 전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이 인간유전체계획에 의해 인간의 모든 질병이 해결될 것이라는 장미빛 환상을 확산시켰던 사건도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 연구가 모든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사기를 친 사건도, 100여 년 전 우생학자들이 사회를 대상으로 선전했던 과장광고와 닮아 있다.우생학은 끝난 역사가 아니라 과학의 한계과학과 사회의 상호작용과학과 자본주의의 결합 등과 얽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문제의 한 단면일 뿐이다.

 

우생학의 기원과 역사적 전개과정은 복잡하지만, 19세기말 우생학이 등장하고 난 후,대부분의 유전학자들이 우생학에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거대자본이 투입된 인간유전체계획이 인류의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생물학의 발전을 위해 그런 정부와 언론유명과학자들의 언사들을 비판할 수 없었던 최근의 상황처럼 당시의 생물학자들은 자의 혹은 타의에 의해 우생학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함부로 꺼낼 수조차 없었다미국의 이민법과 나치의 인종청소가 가속화되던 시기에 이르러서야 뜻있는 과학자들에 의해 우생학에 대한 비판이 시작되었다과학은 언제나 신중함을 미덕으로 삼지만그 신중함이 발현되는 맥락은 그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들에 의해 결정된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맥락과 과학적 한계들 때문에 20세기 초엽의 진보적 유전학자들이 우생학의 사회적 적용을 반대했다우생학의 진원지인 영국에서 활동했던 이들 진보적인 유전학자들은 사회적 계급이 유전적 형질에 의해 결정된다는 결론을 위해서는 사회적인 평등이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며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조건들 자체가 불평등하기 때문에 우생학적 결론은 보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이들도 스스로를 우생학자라고 주장했지만이들의 주장은 우생학을 이용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평등을 구현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향했다특정 계급의 유전적 우월성의 여부는 그러한 사회적 평등이 보장된 사회가 구현된 후에야 과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특권층이 신체적/유전적으로 열등하다는 결론을 섣불리 내리기는 쉽지 않다왜냐하면 이들이 사회적으로 누리고 있는 지위가 유전적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한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층의 신체적/유전적 결함이 통계적으로 명확히 드러난 이상이를 묵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유전적 열등함이 과연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것인지이러한 현상이 한국사회에 특수한 것인지만약 그렇다면 유전적 열등함을 장려해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한 결론을 위해 국가적인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이를 위해 20세기의 진보적 유전학자들의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최선인 듯하다사회적 평등을 이루어내는 것그것이 특권층과 유전적 열등함의 인과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다.

 

*주----------------

1)  박희주(2001). 새로운 유전학과 우생학. BioWave, 3(6): 3.

2) 위 논문.

3) 이 법률이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신청이 이루어졌으나 헌법재판소는 이를 기각했다.

4) [단독]고위공직자 軍면제율 일반인 4~5배, ‘면제대물림’도 심각, 헤럴드경제, 2011년 3월 4일.

5) 국회의원 자제 병역면제율, 일반인의 9배, 오마이뉴스, 2004년 4월 1일.

6) 위 신문기사 (헤럴드경제, 2011)

7) Richard Lynn: Dysgenics: genetic deterioration in modern populations Westport, Connecticut. : Praeger, 1996., ISBN 978-0-275-94917-4

8) 한국인이 세계 최고 수준? IQ 세계 지도 ‘논란’, 팝뉴스, 2007년 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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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3김우재/미국 UCSF 박사후연구원

 

창조과학 산하의 단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교진추(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위원회)의 중고등학교 과학교과서 개정 청원으로 한국이 잠시 소란스럽다. 한국의 언론과 대중이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경우는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네이쳐나 사이언스 등의 유력저널에 한국과학자의 논문이 실리는 경우, 둘째, 수 조원대의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기술이 개발되었을 경우,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자의 논문 조작, 표절 및 연구비 횡령 등의 악재가 터질 경우다.  첫 경우의 사례는 거의 매달 언론에 잠깐씩 등장하는 기사들이다. 이러한 기사들은 주로 해당 연구가 해당 분야에서 지니는 학문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해당 연구가 경제적으로 어떤 이익을 창출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며, 이런 언론의 프레임 속에서 당뇨병 발병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기능연구 발표는 당뇨병 치료제 개발에 획기적인 연구로 포장된다. 이러한 언론의 프레임이 두번째 기사들을 양산하게 된다. 하지만 두번째 사례들은 조금 더 악랄한데, 대부분 해당 기술을 개발한 사업체의 주가를 올리거나, 실질적인 기술의 장점 때문이 아니라, 언론 기사의 덕으로 이익을 보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의 줄기세포 응용기술 기사들이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여러 정치인들의 논문표절과 함께 과학연구의 논문조작 사례들이 세 번째 경우에 속한다. 황우석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로, 황우석은 첫 번째 사례로 이름을 알리고, 두 번째 사례로 주가를 올렸으며, 세 번째 사례로 망한 경우다.

 

교진추의 시조새 논란이 언론에 등장한 것은 위의 세 가지 경우를 반추해보았을 때 한국의 과학문화에 긍정적인 청신호라고 볼 수도 있다. 평소 과학교과서나 진화론 자체에 진지하고 학문적인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조차 이 사건을 계기로 진화론을 새롭게 각인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황우석 사건 당시 전국민은 줄기세포 전문가가 되었고, 광우병 사태 때는 광우병 전문가가, 천안함 사태 때는 군사전문가가 되는 부가효과들을 누려온 한국사회에서, 이번 사건으로 진화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면 그닥 나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언론이 이번 사건을 소비하는 저질스런 방식에서 탈피해 건설적인 대안을 만들어야 함을 인식하는 일이다.  특히 이번 사건이 잠시 소비되고 마는 해프닝으로 그치게 될 경우, 우리는 다시금 과학에 대한 문화적 각성의 계기를 위해 어이없는 사건을 기다려야만 하는 구조적 딜레마에 빠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조새 논란은 교진추 측의 패배로 마무리 될 듯 하다. 고생물학회를 비롯한 학회의 구성원들과, 들불처럼 퍼진 여론의 뭇매는 기독교에 대한 한국인의 반감과 더불어 교과부에도 압력으로 작용한 듯싶다. 하지만 우리가 이번 사건에서 진정으로 배웠어야 하는 몇 가지 교훈과 이를 통해 나아가야할 바를 정책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면 이런 사건은 다시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야 만다. 이번 사건의 첫 번째 교훈은 그동안 한국사회가 진화론과 같은 기초학문, 즉 당장의 경제적 이익이 되지 않는 학문들에 얼마나 무심했는가 하는 점이다. 시조새 논란이 터지자 전문가로 등장한 이들은 최재천, 전중환, 장대익과 같은 학자들이었지만, 한국사회를 통털어 진화론의 과학으로서의 건강성을 교진추에 맞서 변호할 수 있는 진화학자는 다섯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특히 이번 시조새 청원을 처음으로 인지하고 이를 네이쳐에 알린 사람들은 진화학자들이 아니라 무신론자 모임, 반기독교 운동모임 등을 주축으로 활동하던 네티즌들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학을 사랑하는 네티즌들이 네이쳐에 이 사실을 알릴 때까지 과학대중화의 선봉에 서 있다는 학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 인가.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네이쳐지라는 권위에 기대어 이 사건을 인지해야만 하는 것 인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교진추는 반드시 다시금 일을 벌일 수 밖에 없다.

 

한국 과학의 요람이라는 카이스트에조차 뿌리를 내리고 있는 창조과학회의 위용은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며, 특히 이들이 한국사회의 종교단체 중 가장 위압적인 기독교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이번 사건이 단지 빙산의 일각일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특히 개인의 신앙을 넘어 창조과학을 수업에까지 끌어들이는 학자들에 대한 처벌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할 필요가 있다. 이는 교수의 강의권, 학문의 자유 등에 걸친 범사회적인 사안이다. 창조과학회 구성원인 교수가 자신의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창조과학을 교육하는 문제는 결코 단순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우리는 지난 20여년 동안 뻔히 알고 있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채, 이들이 한국의 과학교육을 뒤흔들 정도로 방치한 셈이다. 이번 사건이 곪아터진 한국의 과학교육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특히 낡은 과학교과서의 개정에 학자들이 헌신할 수 있는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 언제적 시조새가 여전히 교과서에 남아 있는가. 과학교과서란 5년만 지나도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특수성을 지니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이 낡은 과학교과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말인가. 과학교과서의 문제만 해도 당장 한국사회의 입시과열과 사교육, 학벌과 대학서열화 문제 등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사안이 된다. 과학교과서가 주목받지 못하는 근본적인 연원에는 한국사회의 비뚤어진 교육풍토가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기초학문이 무시되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번 시조새 논란은 단순히 기독교 광신자들이 과학의 근간을 흔든 것이 아니다. 이번 사건의 기저에는 한국 사회의 과학에 대한 이상한 인식이 놓여 있다. 우리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드시 가르쳐야 할 진화론을 대학의 정규과목에서 사라지게 만들었으며, 진화학자들에게 연구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도킨스를 비롯한 수많은 진화론 교양도서들이 번역되고 있지만, 실제로 한국의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진화학을 연구할 수조차 없다. 즉, 시조새 사건은 한국사회가 학문을 대하는 태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아인슈타인과 다윈을 과학자의 모델로 설정하고 아이들에게 과학의 꿈을 심어주겠다면서도, 막상 그들처럼 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회, 그것이 한국 과학계의 현실이다. 스티브 잡스같은 사람이 나와야 한다면서도 프로그래머들의 처우가 어떠한지는 살펴볼 생각이 없고, 잡스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기 위해 필요한 정책들, 예를 들어 도전하는 이들의 실패에 너그럽고, 한번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는 우리의 현실은 한국 과학계의 현실과 빼닮았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 사회의 과학의 수준은 그 사회의 수준을 반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초가 부실하고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한국 과학계의 수준을 규정한다. 시조새 사건은 이러한 한국사회의 총체적인 문제들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 해결도 미봉책에 그쳐서는 안된다. 우리가 시조새 사건을 단순히 다뤄서는 안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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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4     김우재/미국 UCSF 박사후연구원

정치는 한 국가의 미래가 걸린 일이며, 따라서 정치인들은 자신의 학연, 지연, 혈연과 같은 사리사욕을 초월해 장기적인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은 상식이다. 이러한 상식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야 국민 누구라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이고,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혹은 여당/야당의 아집과 독선 때문에, 혹은 반대를 위한 반대 때문에 저 당연한 상식의 이상(理想)이 추구될 수 없다고 한탄하는 이들도 많다. 그 한탄은 주로 정치인들에게서 나온다.


이러한 문제야 정치개혁으로부터 풀어야 하는 것일 테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한 목소리를 모아 별다른 충돌과 갈등도 없이 척척 동의를 하는 분야가 있으니, 그것이 과학기술정책이다. 충돌과 갈등이 없다는 사실이 첫째, 국가의 장래에 있어 과학기술이 정말 중요하다는 인식의 반영인 것인지, 둘째, 과학기술정책은 별반 새로울 것도 없고, 단기간에 민심을 얻어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인식의 반영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황우석 교수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갈 무렵, 여야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부를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원천기술이 확보되는 초유의 사건이라며 언론도 야단법석을 떨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단 한번 과학기술이 전 국민의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던 그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노벨상 수상이 다가올 때마다 정치인들과 국민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수상자들의 면면을 주의 깊게 살핀다. 지난해에는 일본에서 노벨상이 또 터져 나와 전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언론과 정치인들은 또다시 같은 레파토리의 기사와 선동을 반복했다. 노벨상 수상이 축구 국가대표 한일전도 아닐 텐데, 온 나라는 마치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일본에게 지기라도 한 듯 침울해졌었다. 또다시 노벨상 수상자들이 국내를 방문하고, 그들의 인터뷰에서는 항상 기초과학을 튼튼히 해야만 노벨상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 들린다. 외국의 과학자들이 한 말은 언제나 권위가 있어서, 다시금 국내의 언론은 기초과학 육성만이 노벨상을 위한 길이라며 야단이다. 문제는 기초과학 육성을 위한 정책과 비전과 철학일 텐데도, 기초과학을 육성하면 당장이라도 노벨상을 탈 것만 같은 분위기로 여론을 선동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라는 총론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낼 것인지에 대한 각론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조급해하지 않고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조급함에 몸서리치며 근시안적인 정책들만을 남발하다간 한국의 노벨과학상은 다시금 물 건너갈 가능성이 크다.


기초과학에 대한 강조의 여론이 대통령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인지,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기술인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과학기술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을 있는 한껏 보여주었다. 특히 기초과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모두 의대나 법대로 편입하는 사태에 대해 걱정하면서, 대통령은 "기초과학을 해도 존경을 받으면서 또 살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①라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대통령은 기초과학에 대한 홀대가 자신을 포함한 기성세대의 잘못인 것 같다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셨다고 한다. 산타야나의 말처럼, 모든 진보적인 움직임은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대통령의 이러한 반성과 성찰은 고무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총론이 아니라 각론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재래시장에서 자신의 경험을 빗대 과학적 합리성의 중요성을 설파했다고 한다. 재래시장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이야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서민경제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는 판단이 들 때마다 대통령은 재래시장을 찾아 상인들을 위로해왔다. 때로는 그 곳에 서서 '오뎅'을 먹는 서민적인 모습을 연출하며 서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치열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모습에 감격한 서민들 중 일부는 대통령의 친서민적인 모습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당장의 어려움을 잊어버렸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서민의 경제를 위협하는 구조적인 문제들, 영세상인들을 위협하는 대기업의 횡포와, 뿌리까지 썩어 있는 부동산 문제, 저출산과 관련된 양육비 문제와 학벌사회를 고착화하는 사교육 시장의 문제가 오뎅을 먹는 퍼포먼스로 풀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기초과학 정책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인들의 신년하례식에 참석해서 그들에게 "하나된 마음으로 과학기술계가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국운 융성을 위해 과학기술인들이 다른 분야 보다 앞장서 달라"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장은 과학기술인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정책과 비전, 그리고 철학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오뎅 퍼포먼스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예를 들어, 여전히 대통령의 기초과학에 대한 사고가 "과학기술계도 세계 1등이 나올 수 있고 이제 그렇게 도전해야 한다"라는 자유경쟁시장 논리의 판박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신년하례식 퍼포먼스 이후에 쏟아져 나온 교과부의 정책이라는 것이, '글로벌 박사 펠로십'이라는 명목으로 노벨상 수상을 위해  우수 대학원생 300명에게 2년 동안 6,000만원을 지급하는 수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② 어떻게 한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 그것도 이제 겨우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이 늘어가는 시점에 터져 나온 정책이 노벨상 따위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는가? 노벨상 수상이 국가를 위한 일인가? 이런 방식으로 단지 '노벨상'을 위해 한 국가의 장래를 결정하는 과학기술정책을 입안하는 국가가 대한민국 이외에 어디에 있는가? 다시 한번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총론이 아니라 각론이다. 돈을 무차별적으로 쏟아 붇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쏟아 붇느냐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전문가들과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정책을 짜는, 그런 각론이 중요한 것이다.


이공계 위기가 사회에 등장했을 때에 정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이공계 국가장학생 제도였고, 그 학생들은 지금 대부분 의대나 법대에 진학해 있다. 한 국가의 정책은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선심성 정책이나 퍼포먼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트위터의 한 지인은 저런 정책이라도 제대로 하려면 각각의 숫자에 '0'을 하나씩 더 붙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3000명에게 20년 동안 6억을 지원하는 제도. 노벨상을 목표로 하는 저열한 발상의 정책이라 해도, 이 정도의 장기적인 안목을 반영한 철학을 보여준다면 참 좋겠다.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은 오뎅 퍼포먼스 같은 것으로 쉽게 무마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특히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노벨상에 대한 전국민적인 바람이 들끓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방식으로는 그 노벨상조차 영원히 갖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노벨과학상이 등장한다 해도 그것은 국내의 지원을 받아 국내의 인력으로 해낸 일이 아니라, 한 과학자가 외국에서 외국의 지원으로 연구했던 일쯤이 될 것이고, 그러한 노벨상은 결코 대한민국의 것이 아니다. 그 과학자가 해당 연구를 수행했던 국가의 것으로 인식되어야 마땅하다.


과학기술인들의 신년하례식에 참가한 대통령에게 비난을 쏟아 부을 생각은 없다. 문제는 그것이 오뎅 퍼포먼스를 넘어서는 장기적인 정책으로 이어지느냐에 있을 테다. 제발, 이제 한국에서 선동과 퍼포먼스만으로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가 사라지길 바란다. 그 선동에 국민들은 농락당해 왔다.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숙고해볼 필요도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노벨상을 위한 '총력전'이 아니라 '뿌리깊은 반성'이 필요한 이유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오뎅'이 아니라 '과학'이 필요한 이유다.


①이명박 "국운 융성 위해 '과학기술계 총력전' 펼쳐야", 대덕넷, 2011.01.09.
②국고로 ‘노벨상 후보자’ 키운다, 경향신문, 201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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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이나 인문학에서의 발전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제 보고서에서 제시된 자연과학을 위한 프로그램은 시급한 문제입니다. (중략)

과학이 그 자체로 개인, 사회, 경제적 병폐를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전시던 평시던 간에 이 모든 분야들이 팀으로 기능할 때에만 과학은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적 진보가 없다면 다른 방향에서 이룩된 진보는 우리의 건강과 부의 창출, 국가 안보를 보장해줄 수 없습니다[1]. 바네바 부시 <과학- 끝없는 미개척지> 중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투자는 반드시 보상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기초과학자들은 더 이상 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연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순수과학에 대한 19세기의 이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기초연구는 단기적 혹은 중장기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투자되어야 한다. 생명과학을 연구하는 기초과학자들은 연구계획서의 대부분을 연구결과가 사회와 신약개발에 미칠 가능성에 대한 언급으로 채운다. 화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은 국가안보 혹은 산업발전에 자신들의 연구가 기여할 수 있는 바를 광고해야만 연구비를 충당할 수 있다.

한쪽에선 과학문화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 아인슈타인과 다윈의 업적과 삶을 소개하고 있다. 과학영재교육은 뉴턴과 아인슈타인, 그리고 다윈, 왓슨, 크릭과 같은 기초과학자들을 본으로 삼아 아이들에게 과학에 대한 꿈을 키워주려 하고 있다. 그 아이들이 결국은 취업양성소로 전락한 대학에 입학해서 아인슈타인의 꿈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환경에서 낙담하고, 법학전문대학원이나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진로를 바꿀 것이라는 현실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인슈타인과 다윈이라는 과학자는 더 이상 현실적이지도 가능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숨긴다.

이 땅엔 과학정책이라는 것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근대과학의 초석이 대한민국에 다져지는 1960년대 말에도 과학기술정책만이 존재했을 뿐, 아인슈타인과 다윈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과학정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책의 초점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에 맞추어져 있었다. 개발독재 시대에 가난을 이겨내기 위한 생존의 방법은 기술개발이지 과학이 아니었다. 역설적인 것은 그런 정책적 기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도 아이들에게는 '과학자'의 꿈을 불어넣고 있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대한민국에서도 과학자가 어린아이들의 장래희망 1위였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 자란 세대들은 '사이언스 키즈'라고 불렸다. 아인슈타인과 다윈을 길러낼 수 없는 정책적 기조 속에서 아이들은 속았다. 과학자의 이상과 꿈을 포기하고 정부의 기조에 순응한 이들이 살아남아 대학과 연구소를 장악했다.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한 자는 결국 실패한다. 1970년대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도 없이 과학정책은 정체되어 있다. 여전히 아이들에겐 아인슈타인의 위대함을 가르치면서, 정책 입안자들은 응용과학과 산업화가 가능한 기술에 대한 투자에 집중하고 있다. 노벨상을 타야 한다는 국가적 강박관념은 정책의 모순을 볼 생각은 없이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고, 노벨상이 무슨 김연아의 우승처럼 달성되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첫 단추가 잘못 꿰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단추를 모두 풀고 다시 맞추기 시작해야 할 텐데도, 첫 단추는 그냥 둔 채 옷이 제대로 입혀지길 바라는 형국이다. 총체적 난국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바네바 부시의 꿈

뱁새는 황새를 따라갈 수 없다.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정책 기조는 순수과학에 대한 19세기 과학자들의 열망이 기초과학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 1940~50년대 미국의 정책을 무시하고, 점차 응용과학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 1960~70년대 미국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당시 과학정책을 입안했던 이들 대부분은 공학자였고, 미국의 정책이야말로 박정희가 추구하는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최적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미국의 과학기술정책 기조가 변하기 이전, 기초과학에 대한 처절한 강조를 외쳤던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라는 인물의 역할을 무시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 한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선 유소년 축구를 양성하고, 국내리그를 활성화시키는 기초적인 체력을 다져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일단 월드컵을 유치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제대로 된 정책을 마련하지 않고 언제나 우리는 차범근이나 김연아, 박세리를 기대하는 못된 습관에 젖어 있다. 과학도 그럴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미안하지만 필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과학계엔 박세리나 김연아 같은 선수가 나오지 못할 것이다. 과학은 스포츠처럼 개개인의 역량으로만 결정되는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적인 철학의 변혁 없이 우리는 아인슈타인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바네바 부시는 19세기 말에 태어난 미국의 기술자였다. 원자폭탄을 개발한 맨하튼 계획을 관리했고, 메멕스(MEMEX)라는 개념을 주장하여 현재의 하이퍼텍스트의 발전에 선구자격인 인물로 기억되곤 한다. 하지만 그보다 부시를 더욱 널리 알린 것은 그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 <과학, 끝 없는 미개척지>였다.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정책 입안자들은 이 보고서를 안 읽었거나, 읽었다 하더라도 그 보고서의 핵심을 공시적/통시적 맥락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루즈벨트는 부시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낸다. 평화시기에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는 어떤 방향이어야 하며, 왜 투자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편지였다. 이 편지에 대한 답으로 부시는 1945년, <과학, 끝 없는 미개척지>라는 보고서를 작성한다. 보고서는 루즈벨트가 사망한 시점에서야 완성되었지만 부시의 보고서는 향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의 과학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부시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과학지식은 국가의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기초연구에 대한 연방정부의 지원은 쓸모 없는 것이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국가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다. 둘째, 기초연구를 통해 축적된 지식은 산업에 반드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부시는 여기에서 기초연구에서 응용연구와 산업화라는 '선형모델'을 제시한다. 셋째, 이처럼 국가에 도움이 되는 기초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학자 사회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연구자는 정부의 정책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도구가 아닌, 연구의 독립성을 보장받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과학정책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부시의 보고서는 향후 미국의 과학정책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에 대한 비판도 곧 등장했다. 주로 기술사가들에 의해 제기된 반박은 과학과 기술의 관계가 부시의 선형모델처럼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과학이 기술에 선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기술과 과학의 관계가 복합적이고 비선형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상식이 되었다[2].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기술과 과학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인정하고 말고의 문제를 떠나, 부시의 보고서가 미국의 기초과학에 미친 영향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고, 우리의 현실 속에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부시의 유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우리에겐 부시의 철학을 공유한 과학정책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즉, 전시에 국가의 안보에 도움을 주었던 과학에 대한 투자가 평화시에도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대통령에 맞서, 기초연구에 대한 이상을 수호하면서도 행정가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철학을 입안한 그런 과학기술자가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부시의 보고서는 과학과 기술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상당히 단순화했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반드시 국가에 도움이 되는 기술적 결과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역사적 분석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반드시 생산적인 결과들을 창출하지는 않았다고 결론 내린다. 많은 기초연구들이 산업화되지 못한 채 사장되었고, 산업화된 연구들이 반드시 기초연구의 투자에 힘입은 것도 아니었다[3].

하지만 부시의 보고서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부시가 무리한 단순화를 통해서라도 달성하고자 했던 이상이다. 보고서에는 계속해서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정당화하는 문구들이 등장한다. "정부가 산업적 연구를 증진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기초연구에 대한 투자를 통해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증가시키는 것이다[4]". 페니실린과 레이더의 예가 등장한다. 두 기술 모두가 기초연구가 산업화된, 선형모델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19세기 과학자들의 이상이었던 '순수과학'의 열정은 부시에게선 '기초연구'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한다. 이는 19세기 과학자들의 이상을 수호하면서, 정부의 지원과 사회의 요구라는 두 가지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부시가 기초연구를 처절히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연구의 독립성을 가장 중요한 아젠다로 채택한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국가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기초연구에 대한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연구자들은 국가의 채찍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국가는 투자만을 담당할 뿐, 연구의 방향은 연구자들에게 주어져야만 한다. 그래야 창의적이고, 결국은 국가적 부를 창출할 수 있는 결과가 양산된다는 것이다.

과학자도 아닌 공학자 출신이었던 부시가 기초과학의 독립성과 순수성을 보장하기 위해 투쟁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를 위해 선형모델이라는 상당히 단순하고 과감한 주장을 했지만, 그가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철학은 분명한 것이다. 돈이 되고 단기적으로 이익이 되는 연구에만 투자하려는 정부를 설득하고, 그들에 맞서 19세기 과학자들의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무리를 해서라도 과학에 대한 투자가 도움이 된다는 논증을 펼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단순성이 결국 비판을 받고 미국의 과학정책에도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1960~70년대는 이미 부시의 정책이 결실을 맺던 시기였다. 그 영향은 여전히 남아 있다. 부시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미국의 기초과학자들은 산업화에 대한 엄청난 부담이 없이도 과학의 순수성을 지키며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얻었다. 그것이 여전히 미국이 주요 과학저널 출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노벨상의 대부분을 석권하는 이유다. 부시의 무리한 보고서에는 분명 문제가 있지만, 그가 지키려 했던 철학은 옳은 것이었다. 기초연구는 당장에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될지도 알 수 없지만 인류지식의 향상이라는 철학 속에서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부시가 있었기 때문에 응용과학에 대한 투자로 정책기조가 변하는 20세기 중반에도 미국의 기초과학은 튼튼한 내실을 다진 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연어가 되어버린 한국의 과학자들

우리는 부시의 철학을 건너 뛰었다. 기초연구가 중요하다고 말로만 외치는 정치인들은 실제로는 부시처럼 처절하게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믿지 않는다. 19세기 과학자들의 이상을 물려받은 부시와 같은 인물이 우리에겐 없었다. 부시를 건너뛴 채 우리는 바로 응용과학에 대한 투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이제 우리는 노벨상이 없다고 투정한다. 그 모든 것이 우리의 과학정책이 부시의 단계를 뛰어넘어 박정희의 방식으로 무리하게 진입했기 때문임을 누구도 지적하지 않는다.

선형모델은 분명히 틀렸다. 하지만 선형모델을 주장하면서 부시가 수호하고자 했던 철학은 옳았다. 그것이 지금 미국의 기초과학을 가능하게 한 주춧돌이었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반드시 돈이 되어 돌아온다는 부시의 주장은 틀렸다. 하지만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미국의 기초과학에 대한 명예로 돌아왔다. 부시는 미국의 과학문화에 19세기 유럽의 과학문화를 심는데 성공했다. 과학자들의 창의성, 호기심, 자연에 대한 끝없는 열망과 같은 개인적 요소들은 부시에 의해 제도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미국에 유럽의 과학문화가 정착한 것은 철저히 부시의 덕이다.

우리는 19세기 유럽에서 꽃피운 과학문화를 가져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부시에 의해 이루어진 철학적 수호를 경험해보지도 못했다. 우리가 미국의 과학정책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면 그것은 부시의 것이다.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국가적 이익과 무리하게 연결시키면서도 지키려 했던 부시의 철학이다. 하지만 그런 철학이 공유될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대한민국의 과학은 뛰어난 인재들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제도적/철학적 경박함에 밀려 그 잠재성을 발휘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

과학비즈니스벨트는 현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되자마자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처음부터 과학비즈니스벨트란 일종의 떡밥이었던 것이다. 이는 박정희 이후 지속된 정부의 과학정책에 대한 철학적 부재를 의미한다. 과학은 반드시 추구해야만 하는 국가적 사업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정권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만 가끔 선택되는 떡밥 같은 것이다. 만약 현정부에 진정 과학에 대한 철학적 비전이 있었다면, 과학비즈니스벨트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는 무식한 발상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땅에서 과학은 달면 먹고 쓰면 뱉는 편리한 음식일 뿐이다.

나로호 발사의 실패는 부시가 그토록 주장했던 연구자들의 독립성을 훼손한 결과일 뿐이다. 현장의 연구자들이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연구는 결국 실패하게 된다. 월드컵에 앞서 국가적 쇼로 기획된 나로호 발사를 무리하게 밀어붙일 때부터 문제는 예견된 셈이다. 나로호 실패의 문제는 반드시 분석되어야 한다. 그 분석을 통해 연구자들의 의견이 반영될 통로가 존재했는지, 정부로부터의 압력은 없었는지가 도출되어야 한다. 그로부터 우리는 배울 수 있다. 부시가 주장한 연구의 독립성과 자율성의 가치가 왜 중요한지, 우리는 배워야 한다[5].

최근 미국 하원에서는 미국 대학의 과학기술 분야에서 석사학위 이상을 취득한 이들에게 무조건 영주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대한민국에선 세계적 대학을 육성한다는 취지 하에 외국과학자들을 국내 대학에 모셔오고 있다. 게다가 그 외국석학들은 1년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내고 국내 대학에서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참 역설적인 상황이다. 고급두뇌가 해외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자는 과학정책 입안자들의 말은 모조리 거짓이다. 한 대학에서 미 하원의 법안에 대해 질문하는 학생에게 교과부의 담당자는 "한국인들은 연어와 같은 회귀습성이 있으므로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한다. 그런데 연어도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 산란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있다면 그곳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마 그 연어들은 새로운 산란지를 찾아 떠날 것 같다. 그 곳에선 영주권을 보장해 준다니 말이다.


[1]
Vannevar Bush, Science-The Endless Frontier,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ton, DC, 1945.
[2] 홍성욱, 20세기 과학연구의 지형도: 미국의 대학과 기업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2002: 이 논문의 말미에서 홍성욱은 정책 입안자들이 기초과학연구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는 어처구니 없는 발언을 한다. 기술사가인 그가 부시의 철학에 담긴 역사적 맥락과, 우리의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했는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어떤 대안도 내놓지 않는다. 도대체 왜 기술사가가 자연과학대학에 자리를 잡고 기초과학정책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3] R Pielke, R Byerly, Beyond basic and applied, Physics Today, 1998.
[4] Vannevar Bush (1945).
[5] 다음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상하, <상황윤리: 현실세계 속의 공학담론>, 철학과현실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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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과 경제발전, 그리고 박정희의 유산
과학기술의 자율성을 위한 정책적 선택
2010-04-26 ㅣ 김우재

이때 경제개발은 과학기술 중심지대의 이동을 정당화해주는 핵심 이데올로기로 쓰였다.
-김근배, <과학기술입국의 해부도>중에서

과학의 이중적 의미

현대에 이르러 과학과 기술은 구분하기 어려운 용어가 되었다. 영어로는 'Science and Technology', 접속사로 분명히 구분되어 있는 말이 대한민국에서는 '과학기술'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진다. 과학과 기술, 혹은 과학과 공학은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하는 공동운명체다.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문화 속에는 '과학'이라는 단어에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가 공존한다.

먼저 우리는 과학에서 아인슈타인이나 다윈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해마다 노벨상 시상식이 다가오면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에겐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가 없다. 하지만 국가의 존망을 걸고 노벨상을 타야만 한다. 이미 노벨상은 국가적 강박관념이다.

황우석 사태를 거치면서 분명해진 사실 중 하나는, 과학에 대한 대중과 언론 그리고 정부의 인식이다. 우리는 과학을 일종의 국가경쟁력으로 사고한다.
원천기술이라는 용어가 일상화 되었고, 새튼 교수는 산업스파이로 몰렸다. 황우석 사건이 터지기 전에 언론은 줄기세포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다는 기사를 연일 터뜨렸고, 친히 대통령과 국무총리,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그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논문조작으로 물러나는 황우석 박사의 앞길에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흩뿌렸다. 그는 사기꾼으로 밝혀졌지만, 지지자들의 입장에선 오히려 그가 사기를 당한 셈이었다. 국가경쟁력은 후퇴했다. 21세기 국가발전의 보고, 줄기세포는 황우석 박사의 추락과 함께 태평양 너머로 떠나갔다.

박정희의 유산

박정희의 유산 중 진보세력이 맞닥뜨려야 하는 가장 큰 과제는 '경제개발'에 관한 그의 업적이다.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먹고 사는 것이 당면과제였던 전후의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시대를 거치며 먹고 살만해졌다. 일본과의 비밀협약으로 받은 자금과 미국의 원조라는 변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변수를 고려해서 더 나은 역사가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해도, 상관관계에 불과할 뿐인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일반 대중들에게 여전히 인과관계로 인식될 뿐이다. 무능한 좌파정부라는 말에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가 어려있다. 잃어버린 10년을 말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박정희 시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의 국교는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아닌 자본주의가 되었다. 돈을 버는 것만이 신앙이 되었고, 이는 그 어느 종교도 감히 넘보지 못할 강력한 신념체계로 굳었다. 대한민국에서 자본주의는 종교다.

박정희의 유산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1966년 미국의 원조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립하면서 적극적으로 과학기술을 정치에 동원했다. 그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정책의 기저에는 박정희 시대의 철학이 그대로 배어 있다. 정치적으로 과학기술을 이용했던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과학기술 발전 없이는 경제성장이나 근대화가 이룩될 수 없다"라는 인식을 심는데 성공했다.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이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을 업고 재현된 것이다. 과학기술은 박정희 시대에 자본주의와 한 몸이 된다. 자본이 투입되면 반드시 이윤이 창출되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을 분리해서 생각해보면 완전히 오류인 이런 생각이 여전히 우리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박정희 시대는 한마디로 '정치권력의 전성기'였다. 김근배에 따르면, 박정희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과학기술 제도(과학기술의 내적 측면), 과학기술과 사회의 연결, 대중의 과학기술적 동원(과학기술의 외적 측면) 등의 한가운데 정치권력이 웅크리고 있었"으며, 당시의 정치권력은 "과학기술을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뇌이자 과학기술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독특하게 연결하는 신경망"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과학은 경제적으로 번역되었다.

초창기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대부분의 과학기술정책은 이승만 정권의 것을 계승한 것이었다. 1965년까지 박정희의 연설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당시 박정희 최대의 관심사는 경제발전이었다. 과학기술에 관한 5개년 계획은 '기술진흥5개년계획'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과학'은 경제적 유용성이 없는 순수학문분야로 여겨졌다. 애초에 박정희의 관심사는 '과학기술'이 아니었다. 경제적 유용성과 맞닿아 있는 '기술개발'이 정부의 최대현안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흐름은 박정희가 1965년 중순 미국을 방문하면서 완전히 뒤바뀐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쟁 참전과 한일수교의 대가로 연구소 설립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박정희는 존슨의 제안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로 작정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연구소 설립에 관한 많은 과학기술자들의 성토가 있었지만 박정희는 무시했었다. 그리고 금속공학자인 최형섭을 주축으로 한 '파이클럽'이 정치권력과 손을 잡는다. 이제 박정희의 과학기술 정책은 '기술'에서 '과학기술'로 탈바꿈한다. 그는 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미국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욱 큰 규모의 KIST를 설립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과학기술 대통령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유산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사로잡고 있다.

과학과 기술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계절이 오면, 대한민국은 들썩거린다. 올해는 그 명단에 한국 과학자의 이름이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다. 그냥 때가 되었기 때문에 뭔가 말을 해야 하는 것 뿐이다. 그런 기대를 하기엔 갈 길이 너무나 멀다. '노벨상에 근접한 한국인 과학자'라는 명단도 해마다 빠지지 않는 단골주제다. 하지만 선정기준이 불투명하고 폐쇄적인 노벨상 선정위원회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과연 대한민국이 노벨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우리는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대한민국의 과학자들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 없이 노벨상은 없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리 노벨상이 기초적인 연구가 실용적인 결과로 연결되었을 때 시상된다고 해도, 기초연구와 실용연구의 상호관계는 그 둘을 고루 발전시킨 국가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엔 그 반쪽만이 존재한다. 반도체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기술계의 발전은 눈부시다.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계열사 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삼성전자의 결산보고서다. 아이폰의 등장으로 이마저도 흔들리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미흡했다는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평가하기엔 구조적 상황이 열악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말하기 전에, 과학계는 과거의 유산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에서 하나라도 배운 것이 있다면, 박정희 시대로부터 정치적 민주화를 쟁취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과학기술행정의 모습을 직시해야만 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기대할 수 없다. 경제개발이라는 이념 속에 과학기술이 갇혀 있는 한,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 민족은 망한다고 했다. 거창하게 민족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과학기술계는 과거를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우리의 과학기술은 여전히 박정희 시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과학기술의 자율성

파이어아벤트는 그의 책 <방법에의 도전>에서 서구사회에서 정교분리가 진행되었던 것처럼 과학도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의 근원에는 그의 아나키즘적 정치철학이 녹아 있다. 비록 과학에 단 하나의 방법론은 없다는 주장을 했던 그였지만, 과학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권력에 맞서는 아나키스트의 입장에서 과학을 정치와 동등한 위치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이어아벤트의 주장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현실조건 속에서, 나아가 과학기술이 정부의 지원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현대에 이르러 낭만주의적인 견해는 조금 양보해도 좋다. 우리가 박정희 시대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은 과학을 정치와 동등한 반열에 올려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다른 선진국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기술자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유산은 그런 것이다. 과학기술의 목표와 방향은 정부의 의지대로만 발전한다. 과학기술자들의 의견이 발 디딜 곳은 없다.

박정희와 철학을 공유하던 최형섭에 의해 과학기술정책이 짜여지던 1960년대 중반 이전에 이미 그런 목소리가 있었다. 적어도 과학이라는 학문 안에서 진지하게 자신의 위치를 고민해본 학자라면, 과학이 정치에 이끌려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해 이미 과학자들 사이에는 과학과 정치에 관한 심각한 고민이 공유되고 있었다. 나아가 과학자들은 천성적으로 반항적이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의 권영대 교수나, 동물학자 강영선을 비롯한 일본유학파 과학자들은 경제개발의 이념으로부터 독립적인 학문적 분위기의 '종합과학연구소'의 설립을 주장했었다. KIST가 설립된 이후에도 많은 이공계 대학 교수들은 대학과의 긴밀한 교류 및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었다. 그런 목소리들은 박정희의 비호 속에 모조리 묻혀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대학과 연구소의 학자들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외치고 있고, 경제논리에서 조금 자유로운 자율적 연구를 지원하라고 호소한다. 중장기적 안목을 가진 프로젝트를 더 늘리고, 쓸데 없는 분기별 연구보고서로 연구자들을 혹사시키지 말라는 말은 이제 연구자들 사이에선 일종의 농담이 되어버렸다. 현장의 연구자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노벨상을 위해서 국가의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모르는 것은 과학기술정책을 여전히 박정희 시대의 정신 속에서 기획하고 있는 정부관계자들 뿐이다.

노벨상인가 경제발전인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단기간에 실용적인 연구로 이어지지 않는다. 기초과학이 발전해야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이 발전한다는 단선적 논리는 신화에 불과하다. 산업혁명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것이라는 착각은 2차 산업혁명, 그것도 일부에 국한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기술의 발전은 자체동력을 지니고 있다. 조지 바살라는 <기술의 진화>에서 이러한 기술과 과학의 상호작용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초대형가속기 프로젝트가 실패한 것은 현재에도 이러한 분석이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로 박정희 시대에도 과학기술은 경제개발에 실질적으로 크게 기여하지 않았다. 그 효과는 몇 십 년 후에나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근배의 말처럼 오히려 "경제개발이 과학기술을 특정 방향으로 관심 기울이고 진흥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따라서 만약 아이폰과 같은 돈벌이를 원하는 것이라면 국가는 기초과학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의 공학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다. 청년실업에도 불구하고 공학계열 졸업생의 진로는 순탄한 편이다. 물론 보수도 의학계열을 제외하곤 상위에 속한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견인차는 공학기술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이쳐와 사이언스에 한국과학자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실제로 그런 논문이 산업과 연계되는 경우는 드물다. 연계가 된다고 해도 아마 수십 년이 지난 후에나 가능할 일이다. 어쩌면 과학자들은 공학자들에게 기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과학기술에 대한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는 결정해야 한다. 노벨상인가 아니면 경제발전인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을 정리하는 철학적 성찰은 기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자들은 그러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되었다. 만약 경제발전을 원한다면 아이폰의 성공을 배우면 될 일이다. 아이폰은 엄청난 과학적 성과물이라기 보다는 나와 있는 기술들에 철학과 아이디어를 접목한 상품이다.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내고 싶은 정부는 아이폰을 과학으로 포장하며 투자를 결정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노벨상을 원하는 정부라면 문제는 조금 복잡해진다. 우선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 기간 내에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구조를 뜯어고치고 장기적인 투자를 집행하는 작업이 성과를 맺는 데에만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집권 기간 내에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정부가 이런 투자를 하겠는가. 노벨상은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과학이 없어도 대한민국은 그럭저럭 잘 먹고 잘살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 김우재 박사는 현재 UCSF 박사후 과정에 있으며, 인터넷과학신문 <사이언스타임즈>에 '미르(miR)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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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학이나 아이폰 같은 경우엔 우리나라도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기초기술과 원천기술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부터 차근차근 다져나가는 끈기있는 정책과 기술의 축적... 이런 마인드가 필요하죠. 이런 분야는 한술부터 배부르지 않기 때문에 신기술을 도입해 해부하고 소프트웨어 기술도 로우레벨 차원의 많은 개발역량이 축적돼야 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아이폰 같으면 UI(User Interface-사용자 화면)나 앱스토어 등과 같이 아이디어가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더 중요한건 기반 기술(OS나 미들웨어)을 디자인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역량이 지속적으로 또 충분히 확보되고 축적되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美 MS사나 애플사는 자체적으로 운영체제를 디자인 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수많은 고급 PC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한 경험이 있는 엔지니어들을 확보하고 있구요. 이런 인프라의 차이가 경쟁력의 차이를 가져오는 거지요.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2010.05.17 13:27 [ ADDR : EDIT/ DEL : REPLY ]
  2. 이주호

    아마도 현 정권 혹은 이후 정권에도 지금 같이 박정희의 개발 망령이 살아 있고 모든 걸 돈으로 판단하는 가치관(자본주의)가 종교가 되어 있는 이상은 저자가 얘기하는 장기간의 투자는 불가능 할꺼 같군요.
    전 왠지 마지막 말은 "그냥 포기해라 ~ 우리나라가 무슨 노벨상이냐" 처럼 들리네요
    (물론 그런 의도로 쓰셨다는 건 아니고요 ㅋ ^^ 제가 볼때 그렇다는 의미)

    댓글 다신 이윤찬 님도 그렇지만 과학기술을 겨우 로우 레벨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지금 우리 현실이죠.
    그저 학문이란 것은 돈 버는 것에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마인드가 ... 없어질까요?
    실상 없어져야 한다고 배격해야할 논리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한국의 경우 정말 지나치다 못해 병적일 정도로 한쪽으로 몰려 있으니 문제인 것이겠죠.

    아마도 우리 처럼 자원도 없고 그런 나라에서 과학(사실은 기술)로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데 무슨 뜬 구름 잡는 소리냐는 얘기를 하거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은 노벨 과학상은 아마 없는 셈 쳐야 할 테니까요.

    2010.05.19 16:16 [ ADDR : EDIT/ DEL : REPLY ]
    • 아닙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본문내용을 다시 읽어보니 과학과 기술에 대한 예리한 통찰이 엿보이는군요. 내용이 좋아 스크랩하였습니다. 과학의 경제에 대한 직간접적인 파급효과는 장기적이고 이루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죠. 경제의 펀더멘털을 위한 필수적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려 했던 것도 핸드폰(or IT) 기술에 대한 펀더멘털(기초)의 강조였습니다.

      2010.07.20 08:06 [ ADDR : EDIT/ DE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