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이슈 2007.11.20 20:50
 

‘한국은 기업하기 힘든 나라’라고 재계는 입만 열면 불만이다. 규제 완화, 기업에 대한 적대적 인식 해소, 노동 시장 유연화 등의 단골 요구가 그 뒤를 잇는다. 그러나 다른 영역은 몰라도 적어도 기업의 사회적 발언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의 기업 - 정확히는 재벌 대기업 -은 전세계 최고의 대접을 누리고 있다. 재벌 대기업과 그 총수의 일거수일투족은 항상 언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는다. 재벌기업은 산하 경제연구소를 통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보고서와 정책 제안을 수시로 자유롭게 발표하며 언론은 친절하게도 그 주장들을 거의 여과 없이 보도하기 바쁘다. 우리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는 재벌 연구소가 꺼낸 화두를 무비판적으로 좇는 사회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미FTA에 이어 남북FTA 선수 치는 삼성


오는 2일부터 북한에서 개최될 제2차 남북정상회담 실무준비에서조차도 이러한 대기업 연구소의 영향력은 재확인된다. 남북한간의 FTA 또는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CEPA) 논의가 그것이다. 한덕수 국무총리,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등은 남북FTA 추진을 이번 정상회담 의제로 삼는 방안을 검토 중임을 밝혔다. 지난 8월 초 삼성경제연구소가 ‘남북한 경제협력강화약정(CEPA)의 의의와 가능성’을 발표한 지 불과 한 달여 만의 일이다. 삼성이 의제를 던지고 정부가 이를 정책 추진에 반영하고 언론이 가세해서 대중에게 선전하는 삼각 플레이는 이미 노무현 정부 출범 이래 여러 차례 반복된 현상이다.


나라 전체를 흔들고 국민 의견을 반반으로 갈리게 만든 한미FTA도 동일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추진 의지를 처음 밝힌 것이 지난해 초 연두연설 자리에서였다면, 삼성경제연구소가 한미FTA의 필요성을 강도 높게 주장하고 나선 것은 그보다 훨씬 앞선 2005년 4월의 심포지엄에서부터였다. 이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한미FTA와 통상협력 확대방안> 등 보고서는 ‘통상, 금융, 기업, 산업 등 경제 각 분야에서 한미관계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경제협력을 촉진하는 방안으로 한미FTA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그 전망과 대응 전략을 논하고 있다.


당선자에 국정 전반 보고서 제출


삼성경제연구소가 국정 아젠다를 공급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부터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에도 삼성경제연구소는 연구원 70여 명을 투입해 ‘국정과제와 국가운영에 관한 아젠다’라는 400여 쪽의 보고서를 노 대통령 당선자 측에 전달했다. 초기 노무현 정부가 핵심 국정과제로 선정한 ‘동북아 중심’ 프로젝트에도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가 영향력을 미쳤다.


혹여 ‘삼성이 초일류기업이니 보고서를 국정에 참조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착각이다. 초일류기업 다수를 보유하고 기업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일개 기업 연구소가 국정 아젠다를 정부에 공급하는 일은 없다. 미국 공화당에 영향력이 큰 헤리티지 재단만 해도 그 배경에 여러 기업인이 후원을 하고 있을 뿐, 특정 기업에 소속된 부설 연구소가 아니며 그 성격은 오히려 보수적 NGO에 가깝다. 미국 기업 다수가 부설 연구소나 리서치센터를 가지고 있지만 각 기업 해당 영역 경제 조사와 연구에 국한할 뿐이다. 예를 들면 골드만삭스의 리서치센터가 금리나 증시 등 금융 문제가 아닌 국가 정책 관련 보고서를 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최근 경제 전문지 머니투데이는 ‘삼성 현대 LG 등 재벌 계열 경제연구소들이 그룹 계열사에 유리한 보고서를 잇따라 내놓으면서 계열사 지원에 나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삼성경제연구소는 ’자본시장통합법 제정 이후 국내 투자은행(IB)의 당면과제’라는 보고서를 통해 정부에 금융 인수합병 활성화를 촉구하고 있다. 삼성증권을 비롯해 9개 금융 계열사를 지닌 삼성그룹 입장에 충실한 주문인 것이다. 또 현대건설을 계열사로 둔 현대경제연구원에서 ’건설경기 급랭을 막자’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는 사례를 기사는 적시하고 있다.


이처럼 재벌 대기업 산하 연구소가 주요 국정 아젠다와 사회적 의제를 소속 그룹 입장에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 것도 문제거니와 이를 받는 언론의 보도 태도 또한 심각하다. 자본주의 원조인 영국과 유럽조차도 특정한 경우가 아니면 기업 연구소의 의견을 언론이 받아쓰는 데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기본적으로 기업 연구소 의견이 국민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의구심을 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정반대다. 대부분의 정책 사안에 대해 언론은 거의 관습적으로 기업 연구소의 코멘트를 게재하고 있다.


일개 기업 연구소와 정당 연구소간 50 대 1의 보도 비중


새사연이 지난 8월 한 달 동안 언론 보도를 모니터링 한 결과에 따르면 재벌 연구소 가운데 삼성경제연구소 단 하나만 하더라도 관련 보도가 200회 이상, 즉 매주 50회 이상 지면에 등장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보낸 언론 보도자료, 보고서 소개, 연구원 인터뷰 등이 매일 신문지면을 채우는 셈이다.


이것은 같은 기간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시민운동단체인 참여연대, 경실련과 개혁 진보 성향의 주요 민간연구소 관련 보도를 전부 합한 것보다 높은 빈도다. 또한 이 기간이 민주노동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 정책을 담당하는 부설 연구소인 진보정치연구소 관련 기사가 단 네 건에 불과했다는 것을 비교해보면 우리 언론이 얼마나 재벌 대기업 연구소가 설정하는 의제에 친화적이고 보도 균형이 부족한지 짐작할 수 있다.


재벌 연구소가 FTA 보고서를 내놓고 정부가 그 뒤를 따르고 재벌 회장이 샌드위치론을 꺼내면 언론이 맞장구를 쳐주는 이러한 나라가 기업하기 힘든 나라라면, 대체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어떤 모양이라는 것인가? 우리 사회의 기업 종속화를 자성하고 균형을 모색할 시점이 아닐까?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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