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이슈 2007.11.20 20:23
 

지난주 여러 일간지에 멕시코 통신 재벌 카를로스 슬림(Carlos Slim) 회장이 세계 최고의 부자로 등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6월말 기준으로 슬림의 보유재산은 678억 달러에 육박하여 13년간 선두 자리를 지켜온 빌 게이츠(592억 달러)를 가볍게 제쳤다. 1인당 국민소득 7,171달러(2005년)에 불과하고 인구의 절반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나라에서 세계 최고 갑부가 등장했다는 부조화는 무엇으로 설명이 될까?


신자유주의적 축적의 전형


슬림의 재산 증식 과정은 주주자본주의가 관철되는 사회에서 부가 어떤 방식으로 조성되고 소수 자본에 집중되는지 보여주는 전형이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건설사와 부동산 회사 등을 운영하던 슬림이 고만고만한 재산가 수준이 아닌 세계적 부호로 성장한 비결은 기업 인수합병에 있다. 1982년 멕시코 페소화 위기가 발생하여 대규모 기업 부도 사태가 벌어질 때 슬림은 보험사를 비롯해 유통업체와 광산회사 등을 사들여 큰 이익을 본다. 자본 자유화와 금융 세계화를 받아들인 대부분의 개별 국가는 경제의 큰 변동성에 노출된다. 이로 인한 잦은 금융 및 환 위기는 서민과 중소기업가들에게는 고통이지만 유동자본이 풍부한 자본가 입장에서는 헐값에 자산을 사들일 절호의 기회다.


금융 세계화를 통해 개별 국민국가에 침투한 초국적 금융자본이 가장 먼저 노리는 타깃은 해당 국가의 금융과 공기업이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으며 주요 시중은행과 한국통신(KT), 한국담배인삼공사(KT&G) 등 독점적 사업을 영위하는 공기업 지분을 대거 외국인 손에 넘긴 사례처럼 멕시코도 공기업 사영화가 거세게 추진되었다. 슬림은 1990년 멕시코 국영 통신회사 ‘텔멕스’ 주식 51%를 인수하여 국가 기간 통신망 사업을 사실상 독점한다. 이 초유의 인수 작업이 당시 대통령 살리나스와 집권여당의 비호 아래 이루어졌다는 뒷말이 무성하다. 텔멕스 지분 인수 비용으로 그가 지불한 돈은 18억 달러. 텔멕스는 이후 유선통신 분야의 ‘카르소 글로벌 텔레콤’, 무선통신 부문의 ‘아메리카 모바일’로 분사되는데 현재 슬림이 보유한 주식의 평가액은 아메리카 모바일 250억 달러, 카르소 글로벌 110억 달러 등으로 사실상 그의 재산 대부분이 이 국영기업 사유화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공 기간망과 수많은 사업 영역을 슬림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멕시코 국민들은 단 하루도 슬림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이 우스개만은 아니다. 슬림은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브라질, 도미니카 공화국 등 중남미 16개국의 주요 통신, 방송사를 사들이면서 자본의 해외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들 국가 역시 IMF, IBRD를 앞세운 미국의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에 의해 공공영역을 마구잡이로 시장에 내놓은 상황이다.


FTA가 낳을 제2, 제3의 슬림


세계 최고의 갑부 슬림이 걸어온 길에는 금융세계화로 인한 국민국가의 경제위기, 국민을 위해 복무해야 할 공공 영역을 상품으로 쪼개 팔고 사면서 소수 자본에 이익을 몰아주는 사영화, 신자유주의 정치 엘리트들과 재벌의 단단한 이해관계, 생산 활동보다는 매매 차익 추구가 중심인 기업 M&A, 거대 금융자본이 휘젓고 다니는 전 세계적 금융 유동성을 바탕으로 한 인위적 주가 상승 등 세계화와 주주자본주의의 핵심이 종합 세트처럼 고스란히 담겼다.


카를로스 슬림이 천문학적으로 부를 불린 시기는 멕시코 경제의 완전한 미국화, 주주자본주의화를 가져온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궤를 같이한다. 한미 FTA로 대한민국에서도 제2, 제3의 슬림이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경제 체제를 미국식 스탠다드로 전일화하려는 기도가 한미 FTA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재앙일 뿐임을 세계 최고의 부호가 걸어온 길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