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선출과정’의 민주성만을 매우 제한적으로 인정할 뿐, ‘통치과정’의 민주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난 글에서 확인했다. 2008년 촛불 시위에서 분명하게 확인했듯이 국민에게는 대통령을 탄핵할 권한이 없으며, 국가 중대사를 국민투표에 부의할 권한도 없다. 민주주의가 ‘통치주체’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귀족정일 뿐이다. 현대의 귀족은 ‘정치 엘리트’, ‘의원’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선거를 통해 등장한 선출직 공무원들이 전 국민의 의사를 대신하는 ‘엘리트주의’는 보수세력만의 독점물은 아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대다수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당과 국가, 민의 결합을 제대로 이루어내기 보다 정치적 엘리트를 자임한 당의 정치 독점으로 귀결됐다.
진보정당 - 민주주의 - 리더십
역사책을 뒤적일 것도 없다. 오늘, ‘민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자던 포부를 내세운 진보정당들은 얼마나 대중과 내부 성원들의 민주적 의사에 근거해 운영되고 있는가? 또한 진보정당이 그리는 대안적 미래상이 얼마나 인민주권적 미래상을 그리는 데 적절한가? 새로운 대안체제를 꿈꾸는 진보정당 역시 자유민주주의와 경직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유산 속에서 허우적대며, 민중이 주체인 민주주의의 참의미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철히 평가해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정당의 역할을 대중의 의사에 따라 휘둘리는 수동적 역할에 국한시켜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중성을 강조하며 대중 추수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도, 그 과정이 될 수도 없다. 당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이해, 요구를 파악하여 대중 속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집단적 정치 활동체다. 리더십 없는 정치는 민주주의의 질을 떨어뜨리며,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게 만든다.
그렇다면 당의 리더십은 어떻게 발휘되어야 하는가? 폭력적 방식을 동원하기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허용한 ‘선거 경쟁’의 룰을 받아들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정체성과 대중의 요구 사이에 존재하는 딜레마에 부딪혔다. 급진적이지 않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개량’이 요구되었고, 그들의 정책은 보다 건전한 체제를 요구하는 ‘개혁’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정당 내부의 토론과 회의에는 급진적인 언술이 넘쳐나다가도 선거 때만 되면 기성 정당과 별 다르지 않은 ‘건전한’ 구호, 기성 정당의 부패나 무능에 대한 일방적 비판만이 넘쳐났다. 이제까지 선거운동의 경험은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진보정당운동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동시에 정치적 리더십의 공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정치적 리더십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만을 분명히 한 채 흔들림이 없는 구호를 남발하는 것도 아니고, 정당 내부의 열혈 활동가들의 주장을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들의 유토피아적 구호로 치부하며 대중의 의식이 존재하는 그곳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진보적인 정치적 리더십은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고, 대중 스스로 진보성을 갖도록 만들기 위한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동시에 매우 헌신적인 활동을 필요로 한다. 비록 ‘선거’가 아닌 항쟁적 방식의 혁명이라 할지라도, 다수 대중의 공감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억누르고 왜곡하는 억압적 정치권력이 공존할 때에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새로운 민주체제를 만들기 위한 진보정당의 정치적 리더십은 당의 전망을 대중에게 끊임없이 설득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대중의 공감을 얻는다는 것이 대중의 현재 기호에 맞추는 것도 아니고, 대중의 의사와 상관없이 깃발을 앞세우며 강요할 것도 아니다.
정치적 리더십을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지 않고서는 선거를 통해서건, 혁명을 통해서건 구현될 새로움이란 아무 것도 없다. 진보적인 대안체제의 창출은 그 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민주주의’를 동반해야 하고, 그 내용과 방향, 폭이 어느 정도로 구현될지는 정치세력의 리더십 역량에 크게 의존한다.
대중을 신뢰할 때 ‘인민주권적 민주주의’ 가능
물론 당의 정치적 리더십이 발휘된다 하더라도 대중의 지지가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대중들도 잘못된 선택을 하기고 하고, 올바른 길을 외면하기도 한다. 가깝게는 지난 대선에서, 멀게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이 권력연장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선거와 국민투표에서 대중은 분명 잘못된 선택을 했다.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스위스에서조차 강력한 이익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주민투표를 추진하는 사례도 있었고, 20세기 초 스위스 모델을 수입했던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거액의 홍보비를 뿌릴 수 있는 쪽이 주민투표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다.
‘대중에 대한 신뢰’와 ‘민주주의’는 대중의 옳은 판단에 기대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상호간의 의사소통과 정보·지식의 습득을 통해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중들의 의사를 왜곡하는 다양한 외부요인을 차단하도록 노력하며, 우리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들을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통치주체’의 문제이며 그 주체가 바로 대중이라면, 대중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 자체가 작동할 수 없다. 민중에 대한 신뢰, 이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는 당의 리더십과 대중 간의 지속적인 교감을 통해서만이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이상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다.
2010년 지방선거가 2008년 촛불로부터 시작된 정권과 진보·개혁적 국민 간 격돌이 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예상하고 있지만, 진보정당이 먼저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대한 관점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승리를 자신할 수는 없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대중의 저항은 민주주의의 인민주권적 재구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정서가 2008년 촛불 수준에서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리석다. 보수세력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과거 어느 수준으로의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정치세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동안 ‘민주대연합’으로 상징되는 반독재 연대가 실제로는 동등한 관계로서의 연대가 아니라 제도권 내 거대 야당의 지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도적 공간에서 진보적 대안을 실현할 방법을 마련해 놓지 못했던 우리, 그리고 진보정당의 한계가 만들어 놓은 결과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제까지의 관성 속에서 선거 공보물에 얼굴 하나 더 들이미는 것에 만족할 텐가, 아니면 민중이 주체되는 대안적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새 판을 짤 것인가? 2010년 지방선거를 다시금 우리 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검토하고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전환점으로 삼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지방, 그리고 자치에 대한 인식부터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진보정당에는 집권전략이 아니라 ‘집권 후 전략’이 필요
그동안 진보정당의 전망 속에는 지방자치가 크게 자리 잡혀 있지 않았다. 지방자치는 중앙권력의 하부기관으로만 인식되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중앙권력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중앙권력을 얻을 때만이 현실의 여러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고, 구체적인 대안은 집권 이후 자연스레 나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동안 진보정당들의 지방자치 대안은 ‘집권’ 그 자체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진보정당에서 제출된 지방자치론은 모든 것이 ‘집권’ 그 자체만을 위한 전략과 전술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류의 관점은 당 내부에서만 겨우 합의 가능한 것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모을 수 없었다. 당의 잠재적 지지자들이 당의 집권을 강력하게 소망할 어떤 유인도 제공해 줄 수 없는 것이다.
대안적 전망이 집권 이후에 마련될 수 있다는 안일한 발상은 오히려 집권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현실정치세력에 대한 불만이 그 정치세력과 정반대의 정치노선을 추구하는 이들에 대한 지지로 귀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막연한 환상이다. 거대 양당이 존재했을 때, 두 정당의 놀랄만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선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머무른다. 특히 한국 정치구도는 새로운 대안에 대한 선택을 요구하기보다, ‘가장 나쁜 세력’에 대한 ‘심판’을 강요하는 ‘적대성의 정치’ 상황이기 때문에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전략은 적대성의 정치로 수렴된 대중의 불만을 어떻게 ‘대안 선택의 정치’로 전환시킬 것인가가 주된 과제가 되어야 한다. 현실정치세력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한계를 벗어나 또 다른 분명한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어떤 대안을 선택할 것인가’로 정치구도가 전환되지 않는다면 제도정치공간의 양극화 현상은 계속 심화될 수밖에 없다. 곧 진보적 지방자치 전략은 집권 과정에 이르는 전략을 고민하는 것을 넘어, 집권 후 전략을 마련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합의하는 것 자체가 집권 전략이다.
문제는 지방자치에 대한 진보정당의 ‘집권 후’ 대안이 여전히 모호하다는 점이다. 여전히 진보정당의 전략은 주민자치를 진보적 정치엘리트의 활동의 보조적 수단 정도로만 인식하는 경향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으며, 풀뿌리 운동조직을 지지의 대상으로만 사고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여전히 제도 밖에 머무르며 가장 좋은 정치세력에게 표를 던지는 대상일 뿐, 지역 자치를 구현할 핵심 주체로 사고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글에서 논의한 민주주의에 내재된 ‘민중 스스로의 통치’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지방자치를 사고하는 기본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 국가 수준의 민주주의는 불가피한 위임을 받아들인 가운데, 대중의 ‘필요에 의한 통제’, 즉 국민투표와 소환, 발안제라는 통제기제를 사용해 주권자인 대중의 지위를 보장하는 것이라면, 보다 작은 규모의 지방자치는 인민주권이 실질적으로 구현되는 체제를 모색할 수 있다.
지역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근본 토대
소규모 지방, 소규모 공동체 수준에서는 일반적으로 크기가 큰 집단에 비해 집단 효능감(collective efficacy), 협동을 통한 긍정적 결과에 대한 기대, 집단 목표에 대한 몰입 수준이 높다. 통치의 범위가 작을수록 집합행동에 참여하는 개인들에게 돌아가는 집합재(collective goods)의 몫이 커지고, 자발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에 의해 집합재가 공급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소규모 집단이 대규모 집단에 비해 성원들이 공동이익을 위해 단합된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방자치는 규모의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데도 불구하고 국가 수준의 정치와 다름없이 엘리트주의화 되어 있다. 또한, 지역 주민이 지역통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제한적 수준에서 보장할 뿐, 실질적으로는 지역사회의 지배계급에 의해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 단위의 민감한 이슈에 비해 지역주민의 관심을 더 받지 못한다.
사상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한 지난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제외하면 지방자치선거 투표율은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 투표율보다 항상 낮았다. 오히려 지역에서의 주민 참여는 비제도적 주민운동의 형태로 이루어져 왔으며, 지방정치에 적극 개입하고자 하는 주민자치운동 또한 스스로 집권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보다 단체 자치의 감사자,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머무르고 있다.
[그림] 대선, 국회의원, 지방선거 투표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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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결과의 이면에는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정치개입을 가로막는 구조적 원인이 존재한다. 지역사회의 관변조직이나 토호, 이권 브로커, 개발업자 등 특수한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의 발언권이 과잉 대표되는 상황과 철저히 거주지와 근무지가 분리된 조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장시간 노동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은 지방자치에 대한 ‘참여의 불평등’을 조건 짓는다.
이권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단체 활동으로도 충분한 생활이 보장되는 보수적 풀뿌리 단체에 비해, 진보적 풀뿌리 조직들은 매우 짧은 여가의 시간을 모두 투자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국제노동기구(ILO)가 2007년 발표한 ’2004~2005년 세계 노동시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장시간 노동 비율은 49.5퍼센트로 페루(50.9퍼센트)에 이어 세계 2위였다. 참여할 시간이 없다면 자치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정치는 지역에 상주하는 보수적 조직과 자영업자, 부녀회를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으며, 낮은 투표율 속에서 각종 조직 동원이 가능한 금권력을 가진 보수세력은 항상 승률 높은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지역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당은 이런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 과제는 지방자치의 민주주의적 재구성이라는 과제와 국가수준의 새로운 민주화라는 과제를 긴밀하게 연계시킨다. 다시 말해, 국가 수준의 새로운 민주화는 지역주민의 직접적 참여를 지향하는 지방자치를 통해서 가능하며, 지방자치의 재구성은 실질적 자치를 가로막는 국가차원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과 병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진보정당의 지방자치 전략은 지방선거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총선과 대선까지 연계시킬 수 있는 종합적 전략 속에 배치되어야 하고, 이를 현실화할 동력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다양한 대안적 가치와 사회적 힘의 연계, 즉 연대전략의 문제를 제기한다.
* 다음 연재에서는 ‘시민운동과 새로운 민주주의’를 다룰 예정이다.
** 이 글은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와 민주노동당 2010위원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진보적 지방자치론’ 프로젝트의 기초 토론문의 일부로 제출되었다.
손우정/새사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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