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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재구성①] '정치적 냉소주의', 선거민주주의 한계 뛰어넘어야

정치권의 관심‘만’ 4월 29일 보궐선거로 모아지고 있다. 각 당은 접전지역의 선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고, 진보·개혁적 시민사회 역시 이명박 정부의 정책방향을 심판하는 데 힘을 모으고 있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결국 여전히 대중에게 가장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정서는 ‘반MB’도, ‘선진화’도 아닌 ‘정치적 냉소주의’다.

지난해 서울시 교육감 선거와 올해 경기도 교육감 선거가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을 심판하려는 이들과 경제적 비상상황을 이용해 집권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이들 간의 대리전 성격이 강했다면, 이번 보궐선거 양상은 좀 더 복잡하다. 보수세력 내부의 경쟁구도가 성립된 곳도 있고, ‘진보 대 보수’의 대결구도가 명확해진 곳도 있다. 그런가하면 ‘보수-개혁-진보’의 전통적 3자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곳도 있다.

많은 비율의 유권자들이 적극적인 투표참여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번 보궐선거 역시 ‘누가 조직을 많이 동원하는가’에 따라 당락이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번 보궐선거가 내년 지방선거의 전초전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지방선거 또한 이 구도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유권자의 무관심과 냉소를 탓하기에 앞서 뭔가 ‘공허함’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모두들 ‘변화’를 말하고 있지만 그 변화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무관심과 냉소의 자리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분명한 동기를 부여해야 하지만, 모두가 하는 말들은 비슷비슷하다. 강조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정체성’인데, 집권여당의 정체성은 현실에서 보여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분명한 반면, 이에 대한 도전 세력들은 불분명하다.

한미 FTA를 찬성한다는 것인지 반대한다는 것인지(개혁), 새로운 대안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공약(진보), 도대체 기성정치세력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시민. 무소속) ‘관람자’들은 판별하기 어렵다. 결국 남는 것은 이명박 정부편과 반대편을 나누고, 서로 공격하며 자기편이 될 것을 호소하는 ‘적대성의 정치’ 뿐이다. 지난 해 촛불시위에서 표출된 대중의 정서가 ‘변화’였다면, 내년 지방선거가 진정한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변화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이번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재구성’이라는 기획 연재는 바로 이런 모호함을 조금만 더 ‘구체화’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물론 이 기획은 ‘제시’되었다고 해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 제시될 글들은 단지 논의의 출발을 위한 하나의 단초로서 제공되는 것이고, 다양한 생산적 논쟁과 비판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해 나갈 것이다.

연재의 내용 또한 단순한 ‘정치비평’에 머무르지 않는다. 추상적인 수준의 ‘관점 논쟁’일 수도 있고, 구체적인 사례분석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의 기획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주장의 소개나 서평일 수도 있다. 발전적 조언에서부터 비판을 위한 비판까지 다양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면, 이번 기획은 기대한 성과를 내는 것이다. ‘소통’이 부족한 것은 사실 푸른 지붕 아래에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소통’의 성과는 잘 정리된 논리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우여곡절과 ‘오류가능성’에서 살아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글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대안의 가능성’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두 가지 위기

대안적 민주주의, 대안적 지방자치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방자치가 단순히 지역수준의 독립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틀거리라면, 지방자치의 재구성도 전체 민주주의의 문제의식 속에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가 처한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살펴보자. 이명박 정부 하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한국 민주주의는 1987년 6월 항쟁 이래로 점진적인 발전을 경험해 왔지만,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후 그 근본 토대가 하나 둘씩 허물어지고 있다. 역사 속에 남겨졌다고 믿었던 독재, 반독재 투쟁이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했고,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민주주의’가 투쟁의 거리에서 단결의 힘을 보장하는 슬로건으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진단 속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 첫 번째 위기론은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진단하면서, 과거의 어떤 수준의 민주주의로의 복원을 요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복귀해야할 정점은 아마도 거대한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 탄핵을 저지시키고, 가장 진보적인 의회구성까지 이루어낸 2004년의 형태일 것이다. 그러나 2004년 민주주의로의 복귀는 2005년부터 노골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 지점을 돌파할 수 없으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과거의 문제를 되풀이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민주주의는 여전히 ‘누군가’의 민주주일 뿐 다수 대중은 배제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명백한 한계를 가진 민주주의일 뿐이다.

두 번째 위기론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민주주의가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낡은 것’이 되어버렸지만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음에서 오는 진공적 위기, 즉, 민주주의의 ‘정체’가 진정한 위기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과거 어떤 순간으로의 회귀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일 수 없으며, 새로운 민주주의 체계를 창조해 내는 것만이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기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함께 갑작스레 나타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1987년 체제 이후의 민주적 체제를 모색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우리가 두 가지 위기론 중 어떤 입장에 서야하는 지는 분명하다. 현재 우리가 처한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지 ‘옛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창조하는 것이어야 하며, 지방자치의 문제도 그 틀 속에 배치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2010년 지방선거는 단순히 ‘득표전략’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망과 전략을 대중적으로 합의하고 실천하여 전환적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우선 지금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부터 출발해보자.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선거’민주주의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현실 정치세력과 주류 학자들은 “선거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현재 주류 민주주의 패러다임인 자유민주주의론은 민주주의를 ‘인민들이 자신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기회를 누리는 것’으로만 본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고, 정치가의 지배와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선거와 일치시키는 이러한 시각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은폐시키고 있다. 사실 민주주의와 선거는 큰 연관이 없으며, 애초에 선거는 민주정보다는 귀족정을 위한 제도였다. 근대적 의미의 대의제가 만들어진 것은 13세기 영국에서 왕의 권력집중에 반대한 귀족들이 봉건적 권리를 요구한 것에서 기인하며, 대의제의 확대와 제도화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의 정치·경제력의 성장과 맥을 같이 한다.

선거가 ‘민주화’한 것은 노동계급의 투쟁에 직면한 자본가 계급이 이를 수용하고 체제내화 함으로써 탄력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이것은 다시 말해, 지배계급으로서의 자본가가 보통선거권을 수용하더라도 지배계급으로서의 지위를 여전히 향유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사회체제의 전복을 꿈꿨던 레닌은 대의제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공화정이 “자본주의에서 가능한 최상의 정치적 외피”일 뿐이라고 비판했고,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정에서 어떠한 개인, 기관 또는 정당이 변하더라도 지배계급의 권력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전망했다. 그가 보기에는 보통선거권 또한 단순한 노동계급 성숙도의 척도이자, 부르주아 지배의 도구일 뿐이었다.

물론 보통선거권과 대의제에 대한 레닌의 시각은 선거를 매개로 정치적 영향력을 폭발시킬 수 있는 기층 민중투쟁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한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세계 정치사에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좌파세력이 무수히 많지만, 성공적으로 체제이행을 이룬 나라는 없다는 점에서 단지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전망을 실현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함이 있다.

선거를 통해 체제이행이 가능하다고 봤던 현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가장 큰 반론은 현실에서 그들이 보여준 한계 그 자체였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근간으로 하는 포드주의의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확대된 국가기구와 관료집단에 의해 대중의 역동성이 사라져간 현실은 인민의 지위를 여전히 ‘통치받는 자’에 머물도록 만들었다. 결국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 즉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를 허용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평등적 가치와 이를 기반으로 한 인민주권사상이 자유민주주의 패러다임을 극복하지 못한 채 포섭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인민주권과 자치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유래하는 말 뜻 그대로 데모스(Demos. 인민)와 크라티아(Kratia. 지배)의 합성어다. 즉 ‘인민의 지배’를 뜻한다. 고대 그리스의 민회를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떠올리는 것은 비록 여자와 노예, 이방인을 제외했지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평범한 대중의 정치참여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도 모든 시민들이 민회에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 4세기에는 총 3만 명 정도의 시민 중 민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6,000명 정도였고, 동일한 시민이 매번 참석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민회가 모든 대중과 동일시되었던 이유는 대중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고, 그 민회에 참여하는 대중이 지속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자유를 제약할 공적인 규제와 중요한 의제를 스스로 결정함해 해결했다.

이것이 인민 주권 사상이다. ‘인민의 자기통치’, 즉 자신의 운명을 소수의 권력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통해 결정을 내려 억압과 자유 간의 아슬아슬한 긴장을 극복하려는 도전이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자신을 지배하는 통치자를 선출하는 투표행위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며, 자기 스스로 피지배자이자 지배자가 되는 ‘지배와 피지배의 동일성 원칙’, 즉 ‘자치’를 핵심으로 한다.

이처럼 민주주의에는 매우 혁명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민주주의의 개념 속에 내재한 혁명성, 즉 인민의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탈각시킨 채, 경제적 지배권력이 정치적 지배권력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정당화하는 통과의례로 남아버렸을 뿐이다.

물론 고대 도시국가의 직접민주주의는 현대 국민국가처럼 큰 규모에서 작동하기 어렵다. 모두가 직접 참여할 수 없어 불가피한 ‘위임’이 필요하다. 그리고 위임받은 대표자는 다수의 견해를 따르는 ‘선거’를 통하는 것이 민주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거’가 다수 견해를 반영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환상일 수 있다.

1차 투표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한 후보만을 당선시키는 우리나라의 ‘단순다수대표제’는 오히려 소수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을 높인다. 예를 들어 지난 18대 총선의 전국 투표율은 46.1퍼센트였고, 대부분의 당선자는 40퍼센트 초반의 지지를 얻었다. 이 말은 결국 10명 중 4.6명이 투표에 참가해 그 중 1.84명, 즉 기껏해야 2명의 지지를 받은 사람이 당선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8명이 선택하지 않는 후보, 소수의 지지를 얻은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단순다수대표제 하의 대의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보통선거권이 확립된 이후에도, 사회적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경제적 지배계급은 정치적 다수자로 거듭나기 위해 선거를 이용했다. 정치적 다수자가 되기 위한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확산시킨 것이 바로 ‘정치적 냉소주의’다.

정치는 더러운 것, 회피해야 하는 것, 정치라는 영역에 개입하는 사람들은 다 똑같다는 양비론적 냉소주의는 대중의 정치에 대한 개입과 관심을 차단시켜 투표율을 낮추고, 튼튼한 자금력으로 조직을 발동시킬 수 있는 지배계급의 당선율을 높여 왔다. 따라서 이들은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을 불온시하며, 겉으로는 정치 무관심을 지탄하면서도 속으로는 즐긴다.

물론 이런 행태가 지배적인 경향임은 분명하지만, 선거라는 것이 무조건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가로막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헤게모니가 파탄에 이르렀을 때, 선거는 오히려 새로운 사회진보의 중요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최근 남미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체제이행과정이 전통적인 폭력혁명 방식이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선거’를 통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폭력적 방식이건 아니건, 핵심은 바로 민중적 헤게모니, 즉 정치의 주체인 대중의 동의를 확보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수단일 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할 이유가 없다.

국가수준에서 인민주권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시도가, 선출된 대표자에 대한 대중의 통제, 즉 국민투표나 소환, 발안제로 나타날 수 있는 반면에, 지방자치 수준에서는 ‘상대적으로’ 지역주민의 직접 참여가 가능하다.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대한 소환제가 없고 국민 스스로 투표를 요구할 수 있는 국민투표제(referendum)나 발안제가 없다. 하지만 지방자치에서는 주민투표와 주민소환, 조례청구제 등이 있는 것은 지역 수준에서 어느 정도 인민주권적 가치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합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역수준에 존재하는 각종 주민참여 제도들이 인민주권적 의미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위로부터 허용된 부분적 제도는 지역 주민이 활용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장벽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표는 인민주권적 가치에 근거하여 현 지방자치의 비민주성을 파악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 과제는 흔히 ‘진보정당’의 역할로 이해되어 왔다. 그렇다면 과연 진보정당은 민주주의와 지방자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활동해 왔을까? 이 문제는 다음 연재글에서 검토한다.

손우정/새사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