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이슈 2009.02.18 15:33

한국만큼 정치적으로 역동적인 나라도 없다지만, 베네수엘라의 경우는 한 술 더 뜨는 것 같다. 지난 2007년 12월 대통령 임기조항을 포함한 ‘사회주의 개헌’이 아슬아슬하게 부결된 지 1년이 조금 지난 지금, 차베스는 개헌안을 기어코 통과시켰다.

베네수엘라 국가선거관리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현지시간으로 2월 16일 새벽 4시 18분 현재 99.57퍼센트의 개표가 완료된 가운데, 임기제한 폐지에 동의하는 표가 631만 482표(54.85퍼센트), 반대하는 표가 519만 3,839표(45.14퍼센트)로 집계됐다.

                                  [그림1] 베네수엘라 선거 지지투표율 비교



* 2007년 친/반차베스 득표는 불록 A(차베스안과 국회안 중 차베스안)에 대한 찬반 표
* 2008년 친/반차베스 득표는 친차베스 후보, 반차베스 후보 표의 총합(가늠치)
* 2009년 친/반차베스 득표는 개헌 찬반 표

이번 결과는 차베스에게 선거 첫 패배라는 불명예를 안겨주었던 지난 2007년 개헌 투표 때에 비해 그의 지지율이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06년 대선에서 700만 표가 넘는 지지를 받았던 차베스는 2007년 개헌 투표에서 300만 지지층의 ‘투표 포기’로 패배했으나, 지난 해 지방선거와 이번 개헌 투표에서 지지 세력을 재규합해 유리한 결과를 이끌었다.

반차베스 진영은 비록 이번 투표에서 500만 표 이상의 지지를 받아 차베스 집권 이후 가장 많은 표를 결집했지만, 세력을 확대했다고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친차베스 진영의 인사들 사이에서도 개헌 반대 의사가 표출되어 왔기 때문에 반대표를 모두 ‘반차베스표’로 분류하기는 어렵다. ‘차베스 없는 차베스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건 친차베스 진영의 개헌 반대 움직임은 “영속되어야 할 것은 차베스의 임기인가, 혁명인가?”라는 물음으로 맞서왔다.

2002년 반차베스 진영의 쿠데타 당시 차베스 구출을 담당한 전 국방장관 바두엘이 2007년 개헌 논쟁 와중에 반대 진영으로 옮겨 간 것만 보더라도, 임기 문제가 친혁명 진영 내부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이슈라는 것을 말해준다.

무엇이 민주주의인가? 임기제한 폐지 논란

이번 개헌을 둘러싼 외형적 논란은 ‘무엇이 민주주의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임기제한 폐지를 ‘독재’를 위한 조치로 보는 시각에는 전통적인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가치관이 자리하고 있다. 통상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에 방점이 찍혀 있는 대통령중심제 체제에서는 임기제한이 거의 ‘상식’으로 자리해왔고, 이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장기집권과 독재를 위한 야욕으로 인식해 왔다.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차베스의 강력한 리더십과 군인출신이라는 배경 때문에 흔히 박정희와 비교하기도 한다. 특히 이번 개헌은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외형상으로 유사한 면이 있어 차베스의 혁명 내용에 동의하더라도 정서적인 반감이 클 수밖에 없다.

물론 야당의 참여를 배제하거나 국민투표 직전에야 비상계엄을 해제한 박정희의 경우를 베네수엘라의 국민투표와 비교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박정희의 경우 투표 내용에 관한 국민적 합의나 국민과의 소통을 근본적으로 차단했지만, 베네수엘라에서는 투표 찬반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과 집회, 시위가 보장되었고 또 벌어졌다.

연임제한 폐지를 지지했던 이들은 임기제한과 민주주의와의 관계에 대해 입장이 다르다. 이들은 대통령의 임기제한은 어떤 ’외적 규제’가 아니라 국민의 의사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이 임기를 연장하려고 해도 국민들이 허용해야만 하며, 설령 다시 당선되어도 국민에 의해 임기 중에라도 소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민주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영국 마가릿 대처(비록 그녀 개인에게 투표한 것은 아니었지만)는 총선에서 4번 승리해 4번의 임기를 수행했고, 토니 블레어도 잇따른 총선 승리로 3번의 임기를 수행했다는 점을 예로 든다. 내각책임제 국가에서는 동일 지도자가 3번 이상의 임기를 수행하는 예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지만 누구도 ‘반민주적’, ‘독재’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기제한에 대한 문제의식은 베네수엘라만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오바마 미 대통령도 “나는 임기 제한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임기 제한에는 한 가지 형식만 있다고 믿는다. 바로 선거에 의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런 인식을 반영하듯, 이번 투표 결과에 대한 미국의 해석도 180도로 달라졌다. 미국무부 대변인은 17일 최종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이례적으로 논평을 내어, “베네수엘라 국민 다수가 투표라는 민주주의 권리를 행사한 것을 환영한다. 다양한 계층의 베네수엘라 구성원들도 다양성을 지닌 투표라는 권리 행사를 존중했으면 한다. 이것이 다원 민주주의의 강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아직도 권력연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재체제를 강화한 이승만과 박정희의 유산에 허덕이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베네수엘라 개헌에 대한 거부감은 피하기 어렵겠지만, 무엇이 더 민주적인가에 대해서는 분명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다.

무시할 수 없는 차베스의 리더십

그러나 무엇이 더 민주적이냐는 논쟁과 별개로 이번 개헌을 둘러싼 대립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베네수엘라 혁명 과정에서 차베스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다. 얼마 전 차베스 집권기간 동안의 경제성과를 분석해 발표한 워싱턴의 ‘경제정책연구센터’에 따르면, 차베스가 국영석유회사를 완전히 장악한 2003년 1사분기 이후 베네수엘라의 실질GDP는 94.7퍼센트나 상승했다.

석유부문의 수입을 다른 분야의 산업으로 돌린 덕분에 비석유 부문과 사적 분야의 성장이 두드러졌고, 빈곤세대는 2003년 54퍼센트에서 2008년 말 26퍼센트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또한 지니계수도 2003년의 48.1에서 2008년 41로 떨어졌고, 유아 사망률도 1/3로 줄었다. 고등교육을 받는 비율은 2000년에 비해 두 배나 늘었으며, 실업률은 10년 동안 11.3퍼센트에서 7.8퍼센트로 낮아졌다. 최근 31.4퍼센트까지 오른 인플레이션이 우려되고 있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하락하고 있고, 세계적인 디플레이션 압력 때문에 지속적인 하락세가 예측되고 있다.

세계 4위 석유 생산국이었지만, 소수에게 나라의 부가 집중되어 있던 전형적인 친미국가 베네수엘라가 이런 변화를 일궈낸 이유를 말할 때, ‘차베스’라는 변수를 빼고 설명이 가능할까? 이번 선거결과를 통해 드러난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대답은 ‘NO’였다. 차베스 지지자들은 차베스 말고도 다른 지도자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이제까지의 혁명과정에서 충분히 검증된 대통령을 왜 굳이 교체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림2] 베네수엘라 실질 GDP와 정치적 사건

베네수엘라 혁명과정에서 차베스가 차지하는 의미는 비단 경제적 업적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차베스가 등장하기 전에도 베네수엘라 역시 다양한 ‘진보’세력이 서로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었고, 지금도 차베스의 독보적인 리더십 아래 겨우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최근 개헌 논란에서 차베스가 반차베스 진영의 폭력성과 함께 급진 좌파 진영의 폭력 성향에도 우려를 표하고 강력한 법적 대응 입장을 밝힌 것도 이런 맥락이다. 만일 차베스가 없다면 베네수엘라의 정치과정이 지금처럼 흘러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굳이 일 잘하고, 개혁 진영에게 능력을 두루 인정받고 있는 차베스 리더십을 다수 대중이 원하지 않는데도 단지 임기제한 조항 때문에 버려야 하느냐는 친차베스 진영의 한탄은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차베스 또한 이런 문제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지지그룹을 모아 창당한 것이 통합사회주의당(PSUV)이다. 혁명 정당을 통해 자신의 임기가 종료된 이후에도 베네수엘라 신사회주의 혁명의 중심을 잃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렇지만 한 때 포기의사를 밝혔었던 임기제한 철폐 개헌을 밀어붙인 것은 정당을 통한 새로운 리더십 창출이라는 과제가 쉽지 않은 것임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권력 창출보다 더 중요한 권력행사의 민주적 정당성

어쨌든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가 변질될지 더 확대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임기제한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보장하거나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럴 가능성에 대한 조치일 뿐이다. 한 예로, 아버지 부시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아들 부시의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더 크게 위축되었다는 것을 볼 때, 형식적인 연임제한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어떻게 통치하고 있는가’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 점은 이명박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게 다가온다. 역대 대선 중 어쩌면 가장 민주적으로 치러졌다고 할 수 있는 2007년 대선에서 당선된 대통령은 ‘정권창출의 정당성’만 볼 때, 흠 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1년 간 느꼈던 불편함은 권력 행사 과정에서 실종된 민주주의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우리가 베네수엘라의 연임제한 폐지에 근본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듯,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권력 창출과정만 고려한 민주주의 사고를 해왔다. 그러나 권력 창출의 정당성은 민주적 권력행사의 전제가 될 뿐, 민주주의 그 자체는 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베네수엘라의 개헌결과를 보고 ‘종신집권’ 가능성만 강조하는 주류 언론의 시각도 협소한 틀 안에 갇힌 제한적인 시각일지도 모른다.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를 평가할 때 더 중요한 문제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 차베스가 어떻게 통치하느냐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아마도 두 가지 측면에서 가능할 것이다. 첫째는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정치이행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민중권력’과 ‘위로부터의 국가권력’이 조응하는 형태가 앞으로도 계속 발전될 수 있는가의 여부다. 베네수엘라 주민자치위원회나 지역 생산공동체까지 포괄하는 코뮨의 ‘자기결정적 형태’를 국가가 지원하는 방식이 계속 유지되고 통치권자에 대한 대중의 통제권, 즉 아래로부터의 국민투표나 소환, 발안제가 유지된다면 권력행사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권력만 강화하고 아래로부터의 권력을 수동화 시킨다면 이번 개헌이 독재를 향한 권력욕의 표출이었다고 평가해도 무방하다.

둘째는 차베스의 존재가 베네수엘라의 현실을 개선하는 데 계속 유의미한가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 전 세계 금융위기에도 베네수엘라의 경제침체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생필품 부족 등 해결해야할 문제는 산적해 있다. 임기제한 폐지 결정이 차베스 리더십이 계속 필요하다고 느낀 베네수엘라 국민들의 선택이었다면, 그는 자신의 필요성을 계속 증명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점은 객관적인 수치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투표결과 발표 이후, 지지자들에게 ’신사회주의로 함께 갈 것’을 요구하고 있는 차베스는 투표결과에 대한 승리감보다 베네수엘라의 미래를 향한 책임감을 더 크게 느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손우정/새사연 연구원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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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가 청춘기에 꽤 오랜동안 머문곳이고 애정이 듬뿍 담긴 곳인데 최근 전해지는 외신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좌파 정권이 도시빈민들을 위한 사업을 많이도 했지만 부존자원인 석유에 의존하고 있고 유가하락과 함께 재원이 흔들린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차베스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유가의 움직임에 따라서 지지도 또한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며 민주정권이 만들어 둔 '자본'의 단맛을 본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암튼 차베스가 요즘 장기집권을 노리는 소식은 매우 위험한 발상인 것 같습니다. 좌파나 우파나 권력의 맛을 본 정치인들의 한결 같은 모습이 씁쓸하기도 하구요.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2009.02.19 11:2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