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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신드롬' 보수의 낙관과 진보의 나태로 탄생

국민들이 원한 것은 정확한 사실의 전달일 뿐

지난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이 도화선이 되어 글로벌 금융위기가 파국적 국면으로 치닫고 있던 때다. 이른바 ‘인사이트 펀드’로 2007년까지 최고의 유명세를 타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지금의 위기는 심리적 요인 탓에 다소 과장됐고 오히려 지금이 적극적으로 펀드에 가입할 시기”라고 펀드 가입을 부채질했다.

11월 말. 2006년까지 시가총액 2440억 달러로 전세계 1위를 달리던 200여년 역사의 상업은행인 씨티가 부도 위기에 몰린 시점이다. 미국 연방정부는 200억 달러 긴급 자금을 수혈하고 3천억 달러 보증을 선다고 분주했다. 우리나라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 주식을 사면 최소한 1년 내에 부자가 된다”며 주식투자를 독려했다.

세계적 금융위기의 충격파가 국내 금융 시스템을 붕괴 직전 상황까지 몰아가고, 실물 경기가 본격적으로 침체되기 시작할 때, 우리 정부와 금융계의 주류 집단은 전혀 엉뚱한 상황 인식을 보여줬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 첫 달 고환율 정책 드라이브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다.

9개월째 근거 없는 낙관론과 안이한 대처로만 일관하는 정부와 경제관료들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극에 달해가고 있을 때, 다음 아고라에 등장해 거침없는 발언으로 정부의 엉터리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우리 경제의 현실을 파헤치는 ‘미네르바’가 등장했다. 네티즌은 열광적인 호응을 보냈다.

이른바 ‘미네르바 신드롬’이다. 아고라 온라인 토론방은 2008년 상반기에는 광우병 촛불집회로 뜨거운 공론장이 되더니, 하반기에는 경제분석과 경제전망을 논하는 자리로 변신했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

네티즌이 열광하는 이유

지금 우리 국민 눈앞에는 황당한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환란 이후 10여 년 동안 잘 작동돼오고 있다고 생각되던 금융 시스템과 경제 흐름이 모조리 상식을 벗어나서 이상 현상을 보이고 있다. 외환시장과 자본시장은 시장 자체가 성립될 수 없을 정도다.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 현실이고, 누구 말이 맞는지를 알 수 없다. 내일은 또 어떤 예측 불허의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문자 그대로 심리적인 공황 상태를 겪고 있는 것이 올해 우리 국민의 심리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부동산값이 폭락했다. 순식간에 주식과 펀드가 반토막났다. 환율과 금리는 치솟았다. 물가마저 동시다발적으로 뛰고 있다. 가계와 기업 모두 어디서부터 대응을 해야 할지 막막하다. 수출과 소비가 모조리 급락세를 보이고 있다. 기업의 연쇄부도가 가까워지고 고용 대란이 우려되는 상황까지 왔다. 개별적으로는 합리적인 대응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국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절실히 필요로 했던 것은 사실관계를 있는 그대로 알려주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를 떠난, 이전 단계의 사실이다. 바로 미네르바는 이 ‘사실 전달’을 했다.

정부와 보수 세력은 근거도 없는 낙관론으로 상황을 오도시켜왔다. 한 보수 언론은 산업은행의 리먼브러더스 인수 시도를 글로벌 은행으로 도약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주장했다. 대통령은 주식을 사면 부자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십, 수백 명의 경제 관료나 금융 전문가들이 그랬다.

진보 세력은 어땠을까. 구체적인 사실관계 분석을 소홀히 했다. 너무 쉽게 ‘신자유주의 종말’이나 ‘자본주의 위기’를 주장하는 데 치중했다. 당장 폭락하는 펀드와 부동산에 물린 국민들에게 무얼 어떻게 할지에 대해 아무런 해답을 주지 않았다.

마치 1970년대 유신정치 암흑기의 철저히 진실이 가려진 시대가 연상된다. 무대가 경제에서 정치로 바뀌었을 뿐이다. 당시에는 정치적 억압으로 사실관계가 은폐됐다. 허구와 미사여구로 뒤바뀐 진실이 국민에게 전달됐다. 진실을 알려는 국민에게는 리영희 교수와 같은 지식인들이 호응을 받았다. 그들은 비제도권에 있었으며, 베트남 참전으로 포장된 애국이라는 베일을 벗기고, 전쟁의 진실과 사실관계를 파헤쳤다.

스태그플레이션에서 디플레로

복잡한 금융 사슬에 의해 은폐되고, 정부 관리들에 의해 왜곡된 우리 경제의 메커니즘을 미네르바는 어떻게 소상히 알 수 있었을까. 미네르바의 글을 보면 금융을 중심으로 한 외환시장, 채권시장, 주식시장 등의 메커니즘과 이를 매개로 한 기업의 경영구조와 수출, 무역시장의 관계를 실물적으로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금융을 축으로, 금융의 사슬 구조 안에 거의 모든 산업, 무역 등이 들어와 있다. 금융현장에 갇히지 않고 그 자리에서 좀 넓게 볼 수만 있다면 웬만한 사실관계는 상당히 보이는 게 아닐까. 주식시장을 통해 실물 기업들의 자금 사정이나 업황 전망 등이 보이고, 외환시장을 통해 무역이나 자본수출 시장이 보이는 식이다.

아고라 스타들은 금융과 자본시장의 흐름에 밝다. 일반인들이 금융을 어려워하는 것과 정반대다. 금융이 산업 전반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에서 이는 대단한 장점이 된다. 경제 맥락을 꿰뚫을 수 있는 안목을 가져다준다. 증권사의 애널리스트들도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직장에 매이다 보니 자유롭지가 못하다.

미네르바의 예측과 전망이 모두 맞다고 할 수는 없다. 미네르바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 스태그플레이션이 진행된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새사연)도 그것을 인정했다. 단, 새사연은 금융위기가 확산되기 시작한 9월부터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걱정을 접었다. 전세계의 분위기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 공포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에서 10월 물가 상승률이 1%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확연해지고 있다. 한국은 환율 때문에 이를 실감하지 못할 뿐이지만 경향적으로는 디플레이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상황이 나아진게 아니라 더 심각한 국면으로 가고 있다.

하지만 미네르바가 모든 예측을 정확히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 세계 경제 변동의 향방을 제대로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심각하고 복잡하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마저 지난 10월 골드만삭스와 제너럴일렉트릭(GE)에 자신 있게 투자했다가 낭패를 보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누구도 경제의 앞날을 정확히 예측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예측능력을 가지고 문제삼는 것은 옳지 않다.

시스템 대안 찾기는 미네르바 몫 아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사실관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미네르바의 충고처럼) 현금 챙겨두고, 대출 털어버리고, 생필품 확보하는 것이 답은 아니다. 현재의 경제 시스템 틀 안에서 문제 해결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아고라 논객들도 인정하는 것처럼, 지금 대한민국 외환시장과 자본시장은 시장 기능이 정지된 상태나 다름없다. 기능이 정지된 현 경제 시스템 내부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이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식의 금리 논쟁이다. 지금은 금리 조작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미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경제 시스템이 변형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시스템 틀 자체를 바꾸는 방향으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사실관계의 해명을 떠나 본격적으로 가치관의 문제가 제기된다. 시스템의 대안을 찾기 위해서는 보수나 진보와 같은 가치적 기준이 필요하다. 이것은 미네르바의 몫이 아니다. 이 사회의 책임있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특히 이미 신자유주의 사조가 세계적으로 퇴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 보다는 진보가 명확한 자신들의 입각점을 가지고 불황의 늪을 탈출할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책무가 커지고 있다.

한국사회의 변화를 위해 이명박 정부와 맞서는 최전선에 2008년 상반기에는 여고생들이 섰고, 하반기에는 미네르바가 서있다는 사실에 진보세력은 심각하게 자성할 필요가 있다.

계속해서 정부와 보수세력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지 않고 허위와 임기응변으로 국민을 실망시킨다면, 진보세력이 구체적 사실 속에서 대안을 만들지 못하고 당위를 반복한다면 미네르바와 같은 아고라의 논객들이 네티즌의 우상이 될 수밖에 없다.


* 이 글은 ‘한겨레 21’ 738호(2008.12.5)에도 압축되어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