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이슈 2008.11.11 13:05
대한민국 금융기관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안전지대였나?

미국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하던 2008년 상반기만 해도 우리나라 은행과 금융기관의 부실이나 파산을 걱정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국내 은행들이 미국 모기지 관련 파생상품에 투자했던 수십억 달러 정도의 손실을 우려하는 정도였다. 미국 정부보증 모기지업체인 패니매이와 프레디 맥의 부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던 2008년 7월에도 우리정부가 보유한 이들 채권은 선순위 채권이기 때문에 큰 손실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정부의 말을 믿고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금융기관이 1997년 외환위기로 혹독한 시련을 겪은 후에, 재무건전성이 매우 양호해졌기 때문에 미국 발 금융위기의 충격을 적게 받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각종 파생상품 거래와 헤지펀드 등장이라는 금융혁신이 한국에서는 비교적 덜 발전했기 때문에 그나마 충격을 적게 받는 것이라는 논지를 펴기도 했다.

다만 우리의 관심은 온통 환율에 쏠려 있었다. 외국인 주식 순매도 공세가 점점 더 커지면서 주식시장의 불안정성이 증폭되는 것은 물론이며, 경상수지 적자 행진까지 보태져 환율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 금융기관들은 상대적으로 안전지대에 있는 줄 착각했다.

선진국의 대형 투자은행들과 보험회사, 은행이 줄이어 파산하는 와중에서도, 안전지대에 있다는 착각에서 깨어나지 못했던 국내 금융기관은 글로벌 메가뱅크, 글로벌 투자은행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신기루가 된 글로벌 메가뱅크의 꿈

정부는 지난 6월 산업은행 민영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산업은행 민영화는 ‘경쟁력 있는 투자은행 (CIB : Corporate & Investment Bank) 육성’이라는 국가적 아젠다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이며, “글로벌 플레이어(Global Player)로 도약하기 위해 사업다각화, 대형화 및 해외진출 등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여타 금융회사들에게 새로운 사업모델을 제시하는 벤치마크로 기능”하겠다는 화려한 비전을 제시했다.

국민은행은 지주회사 전환에 성공하여 KB금융지주가 되었으며, 그 여세를 몰아 황영기 회장은 메가뱅크를 위한 금융권 재편에 나서겠다고 호언했다. 2008년 9월 9일 황영기 회장은 KB금융지주, 신한, 우리 금융지주 등 자산규모 200조 원대의 은행들이 대등하게 합병을 추진해서 자산규모 500조 원대의 글로벌 은행을 만들자는 주장을 폈다.

2008년 9월 중순 이후 리먼 브라더스, 메릴린치, AIG보험이 한꺼번에 파산에 몰리고 7,000억 달러 구제금융법안이 준비되고 있을 때에도, 한국의 금융정책 당국자들과 금융회사들은 여전히 2009년 2월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되면 글로벌 투자은행을 키우겠다는 희망을 접지 않았다. 모델로 삼았던 메릴린치 같은 글로벌 투자은행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자, 자신들은 미국식의 전형적인 투자은행 모델이 아니라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이 결합된 CIB모델을 추구한다고 강변했다.

2008년 상반기부터 잇달아 증권사들을 인수하거나 신규로 설립한 국내 재벌들도 투자은행 설립을 꿈꾸며 그간 제조업에서 벌어들인 자금을 금융에 쏟아 부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뿐이 아니다. 각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조차 하지 않는 금산분리 완화 정책을 강행하겠다고 2008년 10월 13일 전격 발표했다. 때는 9,10월 금융위기 확산이 거의 정점에 오르던 시기였다.

미국과 전혀 다르지 않은 한국의 금융기관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극단적인 신용경색과 자금조달 단절이라는 상황까지 전개되자 양상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우선 2005년부터 해외 단기차입을 급격히 늘렸던 은행들이 달러 유동성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세계적 달러 유동성 경색으로 해외은행으로부터 하루짜리 달러차입도 쉽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면서, 이른바 민간 상업은행 발 외환위기가 다시 터질 수 있다는 외신들의 보도가 줄을 이었다. 무디스와 S&P 등 신용평가 기관들은 10월 들어 일제히 한국의 주요 시중은행들에 대한 등급을 ‘안정적(stable)’에서 ‘부정적(negative)’ 관찰대상으로 내렸다. 급기야 정부가 10월 19일 시중은행에 대한 1,000억 달러 정부 지급보증, 300억 달러 자금 직접 조달을 발표하고, 10월 말 미국과 300억 달러 통화스왑까지 체결하는 긴박한 상황까지 이어진다.

달러 유동성 경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원화 유동성 경색마저 겹치면서 은행들은 급격히 대출을 줄이고 자금조달 숨통을 열고자 급히 예금이자율을 높였다. 그러나 이미 시중에서 은행채 등이 소화되지 않는 국면까지 몰리면서 결국 정부와 국민연금 등이 이를 매입하겠다는 발표를 하는 지경에 이른다.

2008년 11월 접어들면서 원화 유동성 경색은 은행을 넘어 캐피탈, 카드사 등 제 2금융권으로 번져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고객 수신 기반을 갖춘 은행과 달리 카드, 캐피탈 등 여신 전문 금융기관들은 은행채보다도 신용이 낮은 카드채와 같은 여전채나 기업어음(CP) 발행이 더욱 어려워지고, 자신들이 보유한 채권을 담보로 한 자산유동화증권(ABS, Asset backed Securities) 발행이 여의치 않으면서 더욱 궁지로 몰리게 된 것이다.

급기야 여신금융협회장과 주요 캐피탈사 사장들은 11월 11일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에게 도움을 요청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카드업계 한 고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은행채를 매입해준 것처럼 카드채를 매입해 수요를 진작시키는 방안을 건의할 방침” 이라고 말했다.

증권사나 보험사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증권사가 가지고 있는 채권을 담보로 빌린 자금이 이미 대폭 늘어난 상태이고, 보험사도 보유하고 있는 채권과 주식 등의 보유자산가치가 하락하여 지급여력이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은행의 위기가 카드사의 위기, 캐피탈사의 위기, 증권사와 보험사의 위기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금융기관들이 수익이 치솟을 때에는 정부에게 간섭하지 말라고 큰소리치다가, 위기에 몰리니 너도 나도 정부와 중앙은행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아우성쳤던 모습이 태평양 건너 대한민국에서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

과도한 수익추구와 몸집불리기의 결과

그렇다면 미국 모기지 증권 관련 대량 손실이 난 것도 아닌데, 외환위기 이후 자본건전성을 강화하고 관치금융을 없애며 선진 금융시스템을 도입해왔다고 자부했던 국내 은행들과 금융기관들이 어째서 이토록 외부 금융충격에 취약하게 되었을까.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의 한복판에 있던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들은 그동안 ‘금융기관’으로서 고유한 자금중개기능을 수행하기 보다는 ‘금융회사’로 변신하여 철저히 수익을 추구했으며, 이를 위해 규모화와 겸업화를 추구해왔다. 수익 제일주의와 규모화를 위해 무수한 금융상품을 개발하거나 외국에서 들여와 판매하는 데 열을 올렸으며, 무리한 자본조달을 동원하여 대출을 강행했다.

그 결과 외형적으로는 규모가 급격히 팽창하여 우리은행의 경우 2005년 이후 2007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무려 23퍼센트에 달하는 초고속 성장을 이루었다. 당기순이익도 대부분 조 단위를 돌파하여 국민은행의 2007년 당기 순이익은 2조 7,000억 원에 달했으며, 나머지 은행들도 대부분 조 단위의 순이익을 올렸다. 하지만 이는 국제 경쟁력을 갖춘 제품을 개발하여 수출해서 올린 수익이 아니다. 오로지 국내 금융영업으로, 그것도 기업대출이 아니라 대부분 소매영업으로 올린 매출들이다. 그래놓고 이제 다음 목표는 글로벌 메가뱅크라고 큰 소리 치는 것이다.

이들 금융회사의 화려한 성장을 받쳐주기 위해 우리 국민이 치른 대가는 가혹했다. 금융회사가 수익을 올리기 위해 무분별하게 남발한 신용카드로 한국경제는 2003년 엄청난 카드대란에 휩싸이며 경기침체를 겪어야 했고, 당시에 400만 이상의 신용카드 불량자들이 양산되는 초유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신용카드 대란으로 더 이상 수익추구가 어렵게 되자, 이들 금융회사는 회수가 확실하다고 생각한 주택담보대출을 2005년, 2006년에 대거 늘리면서 다시 수익추구에 들어갔다. 가계에는 주택담보대출을 늘리고, 건설회사에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을 늘리면서 금융회사들의 대출 규모는 끝없이 확대되었다. 그 결과는 미국 못지않은 부동산 거품이었다.

2003년부터 펀드 판매가 허용되자 금융회사들은 펀드 수수료 수익으로 눈을 돌렸다. 은행을 필두로 대부분 금융기관들이 펀드 판매 수수료 수익으로 올인했고 그 결과, 미국 금융위기가 시작되었던 2007년 펀드 판매는 최고조에 달했다. 펀드 종류가 1만 개에 달했으며 펀드 계좌수는 1,000만 개를 지나 2,000만 개를 넘어섰고 설정 잔액은 수백 조 원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2008년부터 주가가 폭락하고 금융위기가 확산되면서 펀드가치는 최소 20퍼센트에서 최대 50퍼센트까지 떨어지고 저축해둔 돈, 대출받은 돈으로 펀드에 투자한 수많은 국민들은 다시 좌절과 고통으로 나날을 지새우고 있는 중이다.

한국 금융시스템이 되찾아야 할 가치들

신용카드 대란, 과잉 주택담보대출과 PF대출, 그리고 펀드 판매 남발을 과연 금융기관의 정상적인 영업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 최근 KIKO 사태에 이어 펀드 불완전 판매 소송이 번지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의 수익추구와 규모화에 대한 브레이크 없는 질주는 자신의 능력 범위, 즉 보유 자금 범위를 뛰어넘어 버렸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은행의 경우 예금과 적금 같은 저축성 수신을 뛰어넘는 대출이 대거 풀려나갔고, 이런 상황에서 대출 행진을 계속하기 위해 조달 비용이 높은 양도성예금증서(CD)나 은행채 같은 시장성 수신을 대폭 늘렸다. 그 결과 예금 수신 금액을 뛰어 넘는 대출이 폭증하여 CD를 뺀 예금 대비 대출비율(예대율)이 2008년 8월 말잔 기준으로 149.2퍼센트에 이르렀고, CD를 포함해도 적정 수준인 80퍼센트를 초과한 1백퍼센트 이상인 상황이 되었다.

이 상황에서 금융위기로 CD와 은행채 금리가 치솟고 그나마 은행채가 소화되지 않자, 곧바로 자금난에 몰리게 된 것이며 결국 정부에 손을 벌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금융으로 대박을 이루겠다던 금융기업들, 금융을 미래 핵심 성장엔진으로 삼겠다던 우리 정부가 추진했던 ‘금융화’의 실체다. 다수 국민을 부채의 나락으로 몰면서 수익 행진과 규모화 행진을 벌인 국내 금융회사들은 미국 금융회사들에 비해 기법만 다소 후진적이었을 뿐 그 행태는 사실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이들이 정부에게 손을 벌린다면 이들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놓아야 한다. 스스로 자본확충을 먼저 해야 한다. 그럴 능력이 없다면 정부의 지원만큼 지분을 내놓아야 한다. 수익추구에 결정적인 제동이 걸리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동시에 이들의 과잉 질주로 인해 그 동안 우리 금융시스템에서 잃어버렸던 가치들을 되찾아야 한다. 철저히 수익 제일주의 금융회사로 탈바꿈하면서 버렸던 ‘자금중개기관’이라는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투자만 있고 저축은 없었던, 아니 오직 금융투자만 있고 설비투자마저 없게 만들었던 금융환경을 바꿔서 ‘저축’과 ‘설비투자’의 정당한 가치를 회복시켜야 한다.

오직 ‘글로벌 경제’만 주장하면서 이들이 무시했던 ‘국민경제’의 가치를 살려내야 한다. 그동안 고용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마치 고용 없는 성장이 가능한 것처럼 주장했던 한국의 금융기관들이, 사실은 고용과 소득 대신에 부채로 가수요를 창출해서 일시적인 성장을 추구했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부채와 가수요에 의한 성장이 아니라 진정 ‘완전고용’에 의한 성장의 가치를 온전히 되살려야 한다.

바야흐로 세계 국가들은 신자유주의 퇴조기를 뒤로하고 신자유주의 이후의 경제시스템 모색을 위해 막 발걸음을 떼려 하고 있다. 누구보다 먼저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면서 동시에 세계 앞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줄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김병권/새사연 연구센터장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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