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하루에도 수십 건씩 들어오는 미국발 외신은 한마디로 상상초월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재정 부족으로 학교, 경찰, 소방서 공무원들에게 두 주째 급여를 지불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영화배우로 알려진 주지사 아놀드 슈왈츠네거가 매국 재무부에 70억 달러 자금지원을 긴급히 요청했다. 캘리포니아주를 한 국가로 보면 그 규모는 상위 8번째에 이른다. 한마디로 세계 8위의 국가가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선언한 셈이다.

도대체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다. 채권을 발행하려고 해도 이를 소화해야 하는 자본시장이 빙하기처럼 얼어붙어 있다. 채권을 발행하더라도 엄청난 금리를 보장해야 한다. 기업들의 자금줄이 막혀버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공황’의 문턱을 넘는 것과 다름없다. 금융회사 구제만으로도 정신이 없던 미국 정부가 드디어 일반기업 구제에까지 나섰다. 기업어음(CP)을 직접 매입하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금융회사의 파산만 중요하고 국민의 파산은 괜찮은가

그러나 경제주체들 사이의 철저한 불신을 넘어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확산된 탓에 신용경색은 좀처럼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공조해서 전격적으로 금리 인하를 단행했지만, 단순한 유동성 부족을 넘어 거래와 교환이 막혀버린 난국을 돌파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백약이 무효하고 오직 시간만이 약이라는 소리가 나올법하다. 그렇다면 그 ‘시간’ 동안 미국 생활인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실상 금융위기의 최대 피해자라고 할 미국 국민들에 대한 대책은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있다. 금융회사들의 부실 정도와 생존 가능성 정도를 평가하는 자료들은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실업과 주택 차압에 내몰린 미국 국민들의 처지와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얘기는 거의 없다.

지난 9월 20일, 최초로 7,000억 달러 구제금융법안이 발의되자 미국 국민들은 금융위기의 주범인 금융회사만 구제해주고 정작 피해를 입고 있는 국민들을 위한 구제책이 없다면서 법안 통과를 격렬히 반대했다. 지역구 의원들에게 이메일과 전화로 반대투표를 요구할 정도였다. 말하자면 피해자의 돈을 뺏어 가해자를 구제해주는 셈이니, “월가에서 금융위기를 자초했으니 월가 돈을 모아 구제금융에 쓰라”라는 불평이 나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1200만 가구는 집 팔아도 대출 못 갚아

그 결과 겨우 예금자 보호 한도를 확대하고 주택소유자들에게 1,490억 달러의 세액 공제를 해주는 조항을 법안에 끼워 넣었다. 한편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금융회사는 경영진 스톡옵션과 연봉을 제한하고 부실채권 매입 대신 해당 금융회사 주식 매입권을 확보한다는 ‘상당히 약한’ 제재 조항도 삽입했다. 차압 위기에 몰린 주택소유자들의 주택을 정부가 사들이는 등의 직접적인 조치는 아직 없다.

2006년까지 전 세계 금융자본이 모기지업체를 통해 미국 국민들에게 방출한 대출 금액은 약 11조 달러에 이른다. 특히 모기지업체들은 이자 상환능력도 없는 사람들에게 주택가격의 거의 100퍼센트에 해당하는 대출을 무차별하게 시행한다. 심지어 금융 최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에서, 후진국에서도 일어나지 않을 약식 서류(Low doc) 대출이나 무서류(no doc) 대출이 횡행했다. 더 나아가 위장대출(liar doc)에서 이른바 소득도 수입도 자산도 없는 사람에게 대출해주는 닌자대출(Ninja; no income, no job, no asset)까지 벌어졌을 정도다.

이런 식으로 무분별한 대출이 거침없이 풀려나간 결과, 지난해 말 기준 미국의 가계부채 총액은 13조 8,400억 달러였다. 이는 미국 국내총생산의 100퍼센트에 달하며, 미국 국민 가처분소득의 136퍼센트에 달하는 규모다.

그 결과 집을 소유하고 있는 7,500만 가구 중에서 무려 5,000만 가구가 모기지 대출로 집을 샀다. 즉, 5,000만 가구가 모기지 부실과 주택가격 폭락에 긴장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 가운데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을 받은 가구가 750만 가구, 그리고 현재 한달 이상 이자가 연체되었거나 차압된 가구가 자그마치 500만 가구를 넘어섰다.

집도 잃고 직장도 잃고

그뿐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주택가격이 폭락하면서 이미 1,200만 주택소유자는 당장 주택을 팔아도 모기지 대출금을 상환할 금액이 나오지 않는다. 실상 구매자가 없어서 집이 팔리지도 않는다. 지난 2년 간 이 비율은 두 배씩 늘어났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주택가격이 최소 10~20퍼센트 이상 더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1,200만을 훨씬 넘는 미국의 가정이 집을 잃어버리게 되는 상황이 이미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난 연말부터 미국경제는 침체상태로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일자리가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다. 실물경기 침체가 발생한 지 1년 만에 실업자가 무려 216만 명이나 늘어나 현재 공식적인 실업자 신세에 빠진 사람만 940만 명이나 되고 한계실업자와 임시취업자를 포함하는 실질실업률은 이미 10퍼센트를 넘어선 상태다.

그러다 보니 2007년 3월까지만 해도 4.4퍼센트였던 실업률이 줄곧 상승해서 9월 기준 6.1퍼센트에 이르렀다. 여기에 소비자 물가까지 상승하기 시작했으니 미국 국민들과 노동자들은 지난 1년 동안 실질소득 정체, 실업률 증가, 물가 상승의 부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금융이 비대해지자 투기-버블-소비의 부실 경제로 변질

차압 당한 집에서 쫓겨날 생각을 하며 한숨짓는 미국 서민들,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모르는 월가의 금융회사 직원들이 매일 흉흉한 소문에 귀 기울이며 일손을 놓고 있는 광경들, 이미 일자리를 잃고 직장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 이것이 우리가 생각했던 '기회의 땅' 미국의 현실이다.

사실 내면적으로 보면 미국사회의 양극화와 서민들의 생활은 전성기였던 90년대에도 그리 화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금융의 발달로 인한 신용적 가수요 때문에 마치 소비여력이 있고 자산이 많은 것 같은 착각에 빠져있었을 뿐이다. 1980년대부터 가속화된 경제의 금융화로 인해 금융비중이 점점 커졌고 금융회사들은 전통적인 예대마진을 벗어나 고수익 투자에 집중한다. 이러다보니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고용을 늘려 다수 국민들의 소득을 향상시키는 방식의 성장은 멈추게 된다. 예금-대출-투자의 선순환 구조가 투기-버블-소비의 취약한 버블경제로 전환된 것이다.

“1980년대 초만 해도 미국 전체 기업의 수익 가운데 10퍼센트에 불과하던 금융부문의 수익은 2000년 기준 40퍼센트로 증가했으며 같은 기간 금융회사의 시가 총액도 6퍼센트에서 19퍼센트로 증가했다. 그러나 고용에서 금융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5퍼센트에 불과하다.” (이코노미스트)

30년 간 하위 20% 소득 1% 증가, 상위 1% 소득 111% 증가

이 결과 미국에서도 양극화는 심화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하위 20퍼센트 계층의 실질소득은 1퍼센트 성장한 데 반해 상위 1퍼센트의 실질소득은 111퍼센트나 늘어났다. 소득과 자산의 양극화가 심화된 결과 미국 중산층은 급격히 붕괴한다. 1970년에 58퍼센트에 달하던 중산층이 2000년에 접어들면서 41퍼센트로 하락한 것이다. 잔인한 것은 이렇게 양극화로 인해 소득이 전혀 늘지 않아 고통스러운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약탈적인 대출행위를 자행하면서 월가의 금융가가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대다수 미국 시민들에게 대출 부담이 씌워질 동안 금융회사들은 전체 기업 이윤의 1/3을 차지할 만큼 성장을 구가했고, 월가의 최고 펀드매니저들은 고급 주택에 요트를 사서 즐기면서 고급 호텔에서 여가를 즐겼다. 2006년 기준 헤지펀드 매니저 상위 25명의 평균 보수는 5억 7,000만 달러였다. 이들 소득을 다 합치면 자그마치 140억 달러에 달한다. 대부분의 미국 국민이 5,000만 원 이하의 연봉을 받는 사이 이들은 웬만한 국내 대기업의 영업이익률을 훨씬 넘는 6,000억 원의 연봉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서브프라임 대출 부실과 금융위기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이들 초고액 연봉자 펀드 매니저가 아니라 바로 미국의 서민들이었다. 주택 거품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연체, 압류, 가계 파산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은 계층이 바로 자산과 소득이 부족했던 서브프라임 대출자들이 아니었던가? 소득과 고용에 기초하지 않은, 부채를 통한 경제성장은 절대 지속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결국 거품이 꺼지면 중하위 소득의 서민이 가장 먼저 피해를 본다는 것을 미국의 현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월가 출신의 경제 관료, 월가의 정부

카지노에도 나름대로 룰이 있고 자연의 정글에도 법칙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놓은 금융자본주의라는 정글은 자연의 정글을 초월하는 자본 특유의 과욕과 잔혹함을 보여주면서 미국 시민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정부의 ‘구제’는 이들 미국 시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월가의 대형은행들을 구제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이다.

어쩌면 이는 너무 당연할 수 있다. 지금 미국 정부의 경제관련 요직은 대부분 월가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월가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무너져가는 것이 안타까울 뿐, 정작 미국 시민의 고통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재무장관 헨리 폴슨도 월가 1위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 출신이고, 앞으로 구제금융을 관리하기 위해 신설된 재무부 산하 금융안정국 책임자인 35살의 닐 캐쉬카리 역시 전 골드만삭스 이사가 아니던가. 이들과 구제금융 투입계획을 세우게 될 자산운영회사들도 온통 월가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미국 정부는 시민의 정부가 아닌 월가의 정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과연 이번 금융 위기의 뇌관이라고 할 파생상품과 헤지펀드, 투자은행에 규제의 족쇄를 채울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오히려 정부 관리와 월가는 부실에 빠진 대형 금융회사들을 먼저 살려야 미국경제를 살릴 수 있다며 ‘대마불사’를 밀어붙일 것이 뻔하다.

국민을 위한 정부는 어디에 있나

이제 월가의 금융 부실은 차고 넘쳐서 실물경제로 흘러들고 있다. 그 속에서 미국 국민들은 생존을 위해 아우성치고 있다. 미국 국민들만 볼모로 잡았으면 그나마 나을지도 모르지만,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가 미국발 태풍에 휩쓸려가기 시작했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국수적 애국주의로 똘똘 뭉쳤던 미국인들, 그래서 결국 2003년 이라크 침공을 단행하는 데 찬동했던 미국인들의 모습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월가와 월가에 유착된 미국 정부에 대해 미국 국민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긴 우리도 월가에 희생되고 있는 미국 시민을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환율 폭등과 주가 폭락, 금리 폭등으로 한국의 개미투자자들도 올해 이미 주식 60조 이상, 펀드 40조 이상을 날렸다. 자영업과 중소기업은 파산의 끝에서 불안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정부 역시 미국 정부와 다름없이 대기업과 강남 부유층 감세에만 관심이 있을 뿐 아닌가. 무너져가는 자영업과 중소기업에 정부가 직접 공적자금을 투입해서라도 살려야 하건만 시중은행들에게 자율적으로 대출을 완화하라는 독촉만 하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업체가 연일 치솟는 환율로 채산성이 맞지 않아 수입을 포기하는 사례가 잇따른다고 한다. 광우병 소고기 수입을 금융 위기와 환율 폭등이 저지해주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해야 할까.

김병권/새사연 연구센터장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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