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이슈 2008.06.17 13:07

6월 10일 끝내 100만의 촛불이 바다를 이루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기에 이를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출되고 있다. 보수 신문조차 대의민주주의의 위기가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것을 보면 이는 이념지향을 떠난 공통의 인식인 듯하다. 직접민주제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라는 의견도 있고 새 시대 문화혁명의 시작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해석은 서로 다른 ‘촛불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도 아고라와 광장을 통해 촛불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지식인들의 논쟁 자체를 관념화시키고 있다. 촛불은 현재도 ‘진행형’이기에 단정적인 평가는 성급하다. 미래를 논하기 전에 촛불 정국이 만들고 있는 과거와의 단절점의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한다.

왜 20대도 30대도 아닌 10대였을까

촛불정국을

관통하는 커다란 전환과 단절은 바로 지난 10년간 누적된 진보진영의 패배주의가 극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초기 촛불정국의 주인공인 중고생의 동력이 무엇인가 복기해 보자.

조중동이 말하는 천박한 배후론은 열외로 해도 다양한 의견이 제출되었다. 가장 크게 공감을 얻은 의견은 이명박식 교육개혁에 대한 중고생의 분노가 표출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영어 몰입교육이니 0교시 수업이니 하는 속칭 교육자율화 조치로 인해 쌓인 분노가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터져 나왔다는 주장이다. ‘미친소 미친교육’이라는 구호가 나오는 것을 보면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불만의 크기로야 어디 중고생뿐이랴. 1,000만 원 등록금에 88만 원 세대요, 청년백수 준비생인 대학생들의 고통이 중고생 보다 작지 않을 것이다.

또 일부에서는 세대론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이른바 386세대의 자식들 세대가 바로 현재의 중고생들이며, 386세대의 비판적 사회의식이 자식들의 교육에 투영된 결과 현재의 20대와는 다른 사회비판적 의식의 10대가 형성되었다는 논리다. 이른바 386세대 계승론이다. 386세대가 이전 세대와 구별되는 뚜렷한 세대적 공감과 특성이 존재하기에 일견 설득력 있는 주장이긴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벌이지고 있는 커다란 흐름을 설명하기엔 너무도 단편적 분석이다.

사실 사회현상을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우매한 것이기는 하다. 모든 사회현상은 늘 종합적인 작용에 의해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대론적 측면에서 중고생들이 여타 세대와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현재 중고생들은 정치적 패배와 좌절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라는 점이다.

진보진영의 깊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촛불의 힘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386세대 전반에 개혁진영 패배라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실패는 진보를 바라는 국민들에게 진보정치의 좌절이라는 깊은 트라우마를 만들어냈다. 그 뿐인가. 한총련 운동의 실패는 현재의 20대들과 대학생들에게 진보적 운동 자체에 대한 깊은 불신의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러한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는 한 신자유주의 모순이 아무리 깊어져가도 이들이 행동에 나서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재의 10대들은 이런 좌절과 패배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로지 옳고 그름의 구별이 존재하며 이러한 인식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전환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정치적 경험의 차이가 바로 청소년들을 즉각적 행동전으로 나서게 만든 주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중고생의 진출은 각계각층의 진출로 이어졌다. 20대 대학생들이 동맹휴업을 결의해내며 거리에서 주축을 이루기 시작했고 30~40대 넥타이 부대들이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녀노소 구별 없이 100만의 촛불이 물결을 이루며 지난 10년간 반복된 좌절과 분열, 패배의 상처를 씻어낸 것이다. 결국 중고생들의 진출은 곧 10대의 순수함으로 기성세대의 트라우마를 치유해낸 과정이었다.

촛불을 중심으로 복원돼가는 국민의 연대의식

촛불 정국을 관통하는 또 다른 단절은 고립과 개별화를 넘어서 국민적 연대의식이 복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산 쇠고기 운송을 거부하겠다는 화물연대의 선언에 네티즌들이 환호 했다. 촛불싸움에 가세한 금속노조의 홈페이지에는 지지 방문이 쇄도 했고 총파업을 준비하는 민주노총에도 국민들은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 있다.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국민들에게 지지 받기는 정말 오랜만’이라며 어색하게 웃는 노동운동가들의 얼굴에서 그들이 겪은 ‘고립의 고통’이라는 또 다른 트라우마를 읽을 수 있었다. 농번기라 농민들의 대규모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강기갑 의원에 연호하는 국민들의 지지는 곧 농민에게 보내는 강한 연대의식의 발로로 봐도 무방하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고립화 현상은 정부당국과 보수언론, 자본이 지난 10여 년간 끈질기고도 악의적으로 이들을 계급이기주의로 몰아붙인 결과다. 수입개방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투쟁을 두고 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농민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었다.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노사간의 갈등을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이기적 행동으로 매도하는 조중동을 향해서조차 침묵의 동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제 노동자 농민들의 고립은 끝나가고 있다. 90%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촛불행진을 통해 노동자, 농민은 함께 같은 길을 가는 ‘동료’라는 강한 연대의식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충격 후 스트레스 장애라 불리우는 트라우마는 정신적 장애다. 증세로는 늘 불안해하면서 주위를 살피는 과민반응을 보이며 사건이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 항상 주저하는 등의 비정상적 감정상태와 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지난 10년간 반복된 진보개혁진영의 패배주의 역시 트라우마 증세와 비슷한 양태를 보인다. 교류를 거부하는 고립운동, 과민반응의 일종으로 이해되는 과격한 운동, 비정상적 감정으로 이해되는 낙후한 문화정서 등이 그것이다.

이런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신적 충격을 대체할 수 있는 적절한 감정 재경험을 통해서 치유되는 것이 유력하다고 한다. 촛불의 대행진은 진보진영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감정 재경험의 장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패배와 좌절, 분열과 고립의 상처를 씻어내고 있는 촛불정국은 이제 전혀 다른 진보운동이 출현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내고 있다.

끝으로 안타까운 일은 트라우마의 피해자는 적절한 감정의 재경험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지만 정작 트라우마를 만들어낸 가해자는 감정의 재경험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국민들의 가슴에 정치개혁의 실패라는 깊은 상처를 남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퇴진은 안 된다고 했으니 말이다. 또 대선 패배의 상처를 국민들에게 안긴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는 쇠고기 문제에 어정쩡 끼어들긴 했으나 한미FTA를 빨리 추진해야 한다고 반복 주장하고 있다. 이들 모두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스스로 감동하며 등장한 정치세력이다. 그러나 이제는 감정의 재경험으로는 치료가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촛불이 아무리 늘어도 이들을 치료하기는 어렵다. 차라리 의학의 힘을 빌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하다.

김문주 / 새사연 부원장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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