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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12 공공경제, 공공성과 정의의 경제학
  2. 2012.06.18 부끄러운 세계 1위

2012 / 07 / 06 정태인/새사연 원장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16)
보고서 원문을 보시려면 위의 제목을 눌러 주시면 됩니다.

 

이 글은 새사연의 정태인 원장이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진행한 ‘정태인의 경제학 과외 2부 : 사회경제, 공공경제, 생태경제’ 강연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공공경제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시장경제, 사회경제, 공공경제의 의미를 한 번 정리해보자. 이제까지 우리의 머리속에서 가장 일반적이었던 시장경제는 경쟁을 통해 효율성을 달성하며, 이기적 인간인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economicus)를 전제로 한다. 사회경제는 협동을 통해 연대를 달성하며, 상호적 인간인 호모 리시프로컨(Homo-reciprocan)을 전제로 한다. 공공경제는 국가라는 권력에 의한 재분배를 통해 평등을 달성한다. 여기서는 공공성을 추구하는 호모 퍼블리쿠스(Homo-publicus)를 전제로 한다.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공공성이란 무엇일까? 한국사회에서 공공성은 남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많이 쓰이지만 학계에서 제대로 정의된 바는 없다. 지난 10년간 한국사회에서 공공성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굵직한 의제로는 국민연금개악 저지, 의료 민영화 저지, 신자유주의 교육 반대, 한미FTA 반대 등이다. 각 의제에서 공공성은 모두 시민의 삶의 질이 추락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즉, 시장에 맡기면 삶의 질을 보장받지 못하는 영역, 따라서 시장에 맡기면 안 되고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가 맡아야 하는 영역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전히 애매하다.

영어로도 적절한 단어를 찾기가 쉽지 않다. 굳이 번역하자면 publicness나 publicity가 되겠지만 잘 쓰이지 않는 용어이기도 하며, 무엇인가 부족하다. 서구 문헌에서 우리의 공공성에 해당하는 용어들을 찾아보면 일반이익서비스(services of general interest), 공공의 가치(public value), 공공의 목적(public objectivity), 공익(public interests), 공공규범(public norm), 집단이익(collective interest) 등이 있다. 위의 용어들은 모두 사적인 것에 대립하는 것, 사적인 것을 넘어서 하나의 총체로 집계하거나 대표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면 공(公)과 사(私)의 구분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맹자나 공자 시대의 '공'은 국가, '사'는 주로 개인이나 가족을 의미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공'은 국가를, '사'는 시장을 의미한다. 나아가 자유주의 경제학에서 '사'는 시장에서의 자유, 결국 재산권이 된다. 그리고 '공'인 국가는 ‘사’인 재산권을 침범해서는 안 되며 보호하고 지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 공공성과 관련된 용어들은 매우 폭넓게 선함(goodness)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르겐센(Jorgensen)과 보즈만(Bozeman)이 230개 논문을 조사한 결과 공공성과 관련된 가치들은 크게 인간의 존엄성, 지속가능성, 시민참여, 개방성, 안전성, 타협, 진실, 견고함이 있었다. 이 가치들마다 또 세부적인 가치들이 매우 다양하게 포괄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공성이 추구하는 이런 가치들은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졌다. 예컨대 중세시대에는 주요 도로변의 여인숙은 손님을 거부할 수 없었다. 사적 소유물이지만 공공성을 가졌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결국 사적인 것과 대립되는 공공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는 시대와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 이런 점에서 공적인 영역이란 개방과 소통의 광장이라 표현했던 하버마스(Habermas)의 개념과 시민으로서 개인이 공동의 관심사를 다루는 곳이라 표현했던 아렌트(Arendt)의 개념이 적절하다. 최근에는 롤스(Rawls)와 센(Sen)의 정의론이 더해져서 공공이성(public reason)에 기초한 숙의민주주의에 의해 합의되는 것이 공공성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공공성이란 공동의 가치 혹은 공익이라는 목표가 있고, 공공이성이 공론의 장에서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결국 공공성은 사회적으로 합의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규범적 판단이 개입할 수밖에 없고, 이를 해결하는 훌륭한 이론이 정의론이다. 한 사회가 어떤 정의론을 택하느냐에 따라 공공성의 내용은 달라진다. 공공경제는 시장실패의 상황에 정의론을 결합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정의론은 크게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 자유주의(Liberalism), 공동체적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자유지상주의는 자연권적 자유지상주의(Natural-rights libertarianism)와 경험적 자유지상주의(Empirical libertarianism)으로 구분된다. 노직(Nozick)과 같은 자연권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사적 재산권을 자연권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강탈하지 않았다면 부를 상속받거나 보유하거나 거래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며 정의이다. 단, 부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부는 재분배의 재원으로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국가 개입은 매우 제한된 상황을 제외하고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국가는 거래질서 및 재산권을 보호하고, 기본적인 공공재 공급에만 개입해야 한다.

하이예크(Hayek)나 프리드먼(Friedman)과 같은 경험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시장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기구라 생각한다. 따라서 시장이 존재하는 한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전체주의를 초래해서 유해하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생존권 보장 차원의 공공재 공급과 빈곤구제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개입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는 우리나라에서는 종종 진보주의로 번역되기도 한다. 자유주의는 공리주의와 롤스의 사상을 토대로 하는데, 자본주의가 효율적인 제도이지만 빈곤과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정부가 이를 개선할 수 있다고 본다. 세부적으로 마샬(Marshall)과 에지워드(Edgeworth)가 발전시킨 평등주의적 공리주의와 롤스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로 나누어서 살펴볼 수 있다.

평등적 공리주의는 사람들 간 소득의 한계효용이 균등하지 않다면 정부가 재분배에 나설 수 있다고 보았다. 모두의 한계효용이 균등할 때 전체의 효용도 최대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개인 간에는 효용의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서수적 효용이론에 의해 폐기되었다.

롤스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는 정의를 찾아내는 일반원칙을 만들어 냈다. 첫 번째는 자유의 원칙으로 각각의 개인들이 타인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적극적 기회의 평등 원칙이다. 같은 능력, 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은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롤스는 이 원칙을 생산수단 소유의 평등으로까지 적용하였다. 세 번째는 차등의 원칙이다. 불평등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가장 어려운 사람에게 혜택이 된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롤스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기본재, 필수재는 공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롤스의 이런 주장은 사실 사회주의보다 급진적이다. 예를 들어 부모를 잘 만나서 사회적 지위가 달라졌다면 이는 롤스의 관점에서는 정의롭지 못하다. 그럼 어떻게 보완해야 하나? 차등의 원칙에 따라 무조건 약한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롤스는 차등의 원칙을 공평하게 적용하기 위해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자신이 어떤 조건에서 태어나질 모르는 상태에서 정의 원칙을 합의하자는 것이다. 이런 가정을 통해 개인적 이해를 떠난 정의를 도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공동체적 자유주의자는 대표적으로 센(Sen)을 꼽을 수 있다. 센은 정의라는 개념은 사회적 맥락을 벗어나서 논의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어느 사회에도 논리적인 상황만을 따져서 정의를 판단하기는 어렵다며 무지의 장막을 동원한 롤스의 정의를 비판했다. 정의란 공동체와 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또한 롤스의 생각처럼 모두에게 다 똑같은 기본재가 지급되는 것이 평등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능력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장애인과 장애인에게 필요한 기본재가 동일한가 혹은 장애인에게 기본재만 지급되면 그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생산수단의 소유가 분배를 결정하는 기본이다. 따라서 평등하기를 원한다면 생산수단을 공유하면 된다. 자본주의에서는 시장의 불확실성과 공황의 필연성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정부는 항상 지배계급을 우대한다고 본다. 복지국가 역시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에 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정 정도 혜택을 분배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본다.

 

경제학의 가치는 오로지 효율

그런데 공공성이나 정의는 둘 다 경제학에서 존재하지 않는 가치이다. 사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수없이 많지만, 경제학에서는 가치를 다루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의 가치가 있다면 효율성이다. 우리사회에서 경제학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무가치는 굉장히 문제가 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경제학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가치가 없기 때문에 중립적이고 자연과학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효율성도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다. 특히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경제학의 효율성은 파레토 효율을 뜻한다. 파레토 효율은 파레토 개선이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파레토 개선은 누구 한 사람의 효용도 떨어지지 않은 채로 다른 한 사람의 효용이라도 올라가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해 아무도 현 상태에서 나빠지지 않으면서 누군가는 더 좋은 상태가 될 수 있다면 파레토 개선이다. 그리고 더 이상 파레토 개선이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최고로 좋은 상태에 있는 것이 파레토 효율이다.

이는 누구도 손해 보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얼핏 보기에 매우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파레토는 분배 상태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 사회에 독재자가 1명 있고, 현재 독재자와 일반 국민 사이의 자원의 분배 상태가 9:1이라고 하자. 독재자 한사람이 9를 갖고 나머지 국민이 1을 갖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독재자의 몫만 증가해서 10이 되었다고 하자. 나머지 국민들의 몫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1을 유지했다. 이는 분명 파레토 개선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상태인가?

파레토 효율은 상대성이 없다. 이는 경제학의 특징인데, 경제학에서는 사람들의 효용은 비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독재자가 1을 얻었을 때의 효용과 일반국민에게 1을 돌려주었을 때의 효용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굉장히 엄격하고 과학적인 정의 같지만, 사실은 굉장히 비인간적인 정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에서는 파레토 효율만을 인정하며, 이는 완전경쟁시장에서 달성된다고 본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후생경제학(welfare economics)이다. 후생경제학의 제1명제는 시장경쟁균형은 파레토 효율적이라는 것이며, 제2명제는 어떠한 배분적 효율성도 시장경쟁균형이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론적으로 시장에 맡기면 파레토 효율을 달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파레토 효율은 정당한가?

이를 그림으로 살펴보자. 경제학에서 파레토 효율은 주어진 투입 요소로부터 최대의 생산물을 획득하는 생산의 효율성, 주어진 생산기술과 소비자의 기호를 감안하여 가장 최적의 생산물 조합을 선택하는 생산물 조합의 효율성, 소비자들이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소비의 효율성을 모두 만족한다. 이렇게 세 가지 효율성이 모두 만족되는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에지워드 상자(Edgeworth Box)이다.

위 그림의 에지워드 상자는 승연과 다연 사이에 배분되는 옷과 음식을 나타낸다. 옷의 총생산량은 100이고, 음식의 총생산량은 200이다. 이 상자 안에서 결정되는 모든 점은 생산가능곡선과 무차별곡선이 만나는 점으로서 생산의 효율성과 생산물 조합의 효율성을 동시에 만족한다. 그리고 상자를 가로지르는 굵은 선분 GH에서는 승연과 다연의 옷과 음식에 대한 한계대체율이 같아서 소비의 효율성까지 이루어지게 된다. 즉, 선분 GH 위의 점들은 모두 파레토 효율이다.

A점은 균등 분배점으로 승연과 다연이 각각 옷과 음식을 절반씩 나눠 갖는 경우이다. 하지만 선분 GH 위에 있지 않으므로 A점은 파레토 효율이 아니다. 승연에게 D점은 A점과 동일한 효용 R2를 준다. 하지만 다연에게는 D점의 효용 M4가 A점의 효용 M2보다 우월하다. 따라서 A점에서 D점으로 이동하는 것은 파레토 개선이다. 다연에게 B점은 A점과 동일한 효용 M2를 준다. 하지만 승연에게 B점의 효용 R4는 A점의 효용 R2보다 우월하다. 따라서 A점에서 B점으로 이동하는 것은 파레토 개선이다. 종합하면 회색의 볼록렌즈 모양의 안쪽에 있는 선분 BD위의 점은 A점보다 파레토 우월한 점들의 집합이다.

에지워드 박스를 통해서 정해진 점은 모두 파레토 효율을 만족하므로 경제학에서는 정의로운 점이다. 이렇듯 시장은 언제나 파레토 효율을 만족시킨다. 이것이 앞서 본 후생경제학 제1명제이다. 또한 재분배 정책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옹호하는 근거가 된다. 여기서의 함정은 초기 분배 상태가 공평한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파레토 효율과 정의론

앞서 살펴본 네 가지 정의론을 에지워드 상자를 이용해서 비교해보자. 먼저 자유지상주의 중 노직이 주장한 자연권적 자유주의는 초기 분배점이 어떤 점이든지 상관없이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 다른 점을 이동했다면 정의롭다. 예를 들어 초기 분배점이 C점이라면 선분 BD 중 어느 점으로 이동하더라도 최적의 분배상태가 된다. 정의로운 상태로 재분배는 필요하지 않다. 하이예크와 프리드먼이 주장한 경험적 자유주의의 경우 생존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재분배를 인정하므로, 다연과 승연의 최적 생계수준이 각각 E점과 F점이라면 선분 EF 위의 점은 모두 최적 분배상태이다.

자유주의의 경우 기수적 효용이론을 선택해서 두 사람의 효용이 동일할 때 사회 전체의 효용이 최대가 된다고 판단한다면 A점이 바로 최대가 되는 점이다. 선분 BD 중 어느 점으로 이동하더라도 파레토 개선이 일어난다. 서수적 효용이론을 채택하는 경우 사람들 간의 ?은 비교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선분 GH 위의 모든 점이 파레토 효율을 만족한다. 롤스의 정의는 최약자에게 도움이 되는 배분을 추구한다. 예를 들어 초기 분배점이 다연이 불리한 상황일 때 다연의 효용이 증가하는 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정의롭다. 승연의 효용이 줄어들더라도 정의롭다.

사회주의는 자원의 평등한 분배를 주장하기 때문에 A점이 최적 분배상태가 될 것이다. 시장이 존재하는 시장 사회주의라면 A점에서 C점으로 이동하는 것이 효용을 증가시키므로 이는 사회주의에서도 용인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의 재분배는 롤스의 재분배보다 더 급진적일 것이다.

 

* 정리 :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17)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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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2.06.18정태인/새사연 원장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 삼성의 광고 문구다. “부자 되세요!”와 함께 희망차게 맞은 새 밀레니엄의 첫 10년 한국 사회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카피는 없었다. 이들이 부추긴 ‘죽음에 이르는 경쟁’의 결과 한국은 자살률 세계 1위이고, 더구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이 1등을 기록하고 있는 수치는 많다. 특히 성차별을 보여주는 지표들이 그렇다. 남녀 임금격차는 38.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5배이고 여성 임금 근로자 중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42.7%로 역시 1위다. 대체로 가사 및 돌봄노동 시간을 의미하는 무급노동 시간은 여성 135분, 남성 45분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격차가 크다. 여성의 비중이 큰 노인 빈곤율 또한 세계 1위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각종 성평등 지수에서 100위 밖에 머무르는 것은 당연하다. ‘다이내믹 한국’에서 다이내믹하게 자신의 지위, 특히 발언권이 위축되는 걸 체감하는 남성들로선 이 수치 자체를 믿을 수 없다. 단칸방에서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 그것도 몸짓 발짓으로 담배와 재떨이를 갖다 바치게 하는 걸 보며 컸는데 이젠 아파트 단지 외진 구석에서 숨어 피워야 하니 이런 수치를 믿지 못할 수밖에. 등수와 느낌의 차이는 성평등 지수가 남녀 간 상대적 격차를 기초로 해서 산정됐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 여성의 문자해독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남성과 비교한 상대적 해독률은 여전히 낮기 때문에 이 격차를 대상으로 순위를 매기면 이 부문에서도 한국은 100위권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이 수치로 호들갑을 떨지 말자”는 주장은 그래서 더 못나 보인다. 문제는 여성들의 능력은 과거에 비해 훨씬 증가했는데 능력 발휘의 기회는 여전히 적다는 점에 있다. 1990년대 인기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처럼 공부를 훨씬 잘하는 딸이 아들을 위해 대학을 포기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겠지만 대학을 졸업한 딸이 취직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즉 시장은 여전히 고루한 성차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주류경제학의 진단은 아주 명쾌하다. 시장이 알아서 불평등을 없애줄 것이란 얘기다. 그 논리도 아주 쉽다. 만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능력 있는 여성을 채용하지 않는 기업이 있다면 결국 시장에서 퇴출될 것이기 때문에 시장은 능력 순서대로 고용할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최근 최고경영자들에게 그저 이름만 늘어놓고 채용 순위를 정하라는 실험을 한 결과, 이들은 앵글로색슨계 남성 백인의 전형적 이름들을 꼽았다. 냉혹한 시장의 논리와 달리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시장이야말로 정의나 배려, 평등과 같은 다른 가치가 스며들 수 없기 때문이다. 효율성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시장이 실은 비효율의 강고한 토대인 것이다.

고용시장은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 맡기려고 하는 일을 누가 더 잘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관행에 따라 고정관념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보다는 남녀 간, 지역 간, 학력 간 또 다른 어떤 기준에 따른 차별을 없애는 게 더 효율적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해마다 돌아가면서 성평등지수 1, 2, 3위를 차지하는 북유럽 국가들의 높은 성장률은 이런 추론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노르웨이 정부는 남녀의 능력이 동일하다는 단순한 가정하에 공기업 최고경영자 비율을 30% 이상으로 단숨에 끌어올렸고 이를 민간에도 적용할 예정이다. 나아가 성평등은 성차에 따른 다양성을 확보해 주기 때문에 효율성을 더욱 북돋운다. 평등은 여러 경로로 효율을 높일 수 있는데 기회 닿는 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 글은 여성신문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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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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