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6.19김병권/새사연 부원장

창조경제가 창조한 것은 ‘창조경제'라는 용어뿐.

 

새 정부가 출범한지 100일이 지나 오랜 준비 끝에(?) 지난 6월 5일, 드디어 정부가 ‘창조경제 청사진'을 공식적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10여 년 전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벤처 활성화 정책과 다를 것이 없을 정도로 전혀 창조적이지 않다는 비판만 되돌아왔다. 민주당 이종걸 의원은 “중소 벤처 육성은 김대중 전 대통령 때 추진한 신지식인 운동과 문구, 단어까지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새누리당 정희수 의원도, “지난 10년 전 정부와 현 창조경제의 차이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고 개탄했다.

 

그렇다. 오랜 공을 들여 정부가 정식화시킨 창조경제의 3대 목표-6대전략-24개 추진과제를 들여다 보면, IT중심의 벤처창업정책 말고는 기존에 있는 여러 가지 산업정책과 기술지원 정책을 짜깁기 한 것일 뿐이다. 과거의 추격형 전략에서 선도형 성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반복하고 있지만, 이는 대기업 단위에서 이미 오래전에 실행하고 있는 구호를 뒤늦게 정부가 반복하고 있는 것일 뿐 큰 의미도 없다.

 

좋은 개념이니 내용을 채워 주자고? 버리는 편이 낫다.

 

일부에서는 창조경제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만든 존 홉킨스 교수의 2001년 저작『The Creative Economy』에서 근거를 찾으려고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이와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인다. 또 일부는 구체적 실체를 찾기 위해 이스라엘의 ‘창업국가' 모델이나, 최근 핀란드에서 노키아 쇠퇴를 대체하는 벤처붐을 들여다보지만, 정부가 뚜렷이 이들 국가를 롤 모델로 했다는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론적 근거도 구체적 사례도 없는 추상적 개념들만 계속 동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민간에서 ‘창조경제 연구회'까지 만들고 있지만, 이 역시 비현실적인 끼워 맞추기식 해석을 할 개연성이 높다. 결국 잘 평가해 본들, 창조경제 정책은 ‘창조경제'라는 용어만 창조한 채 사라질 운명이다.

 

그런데 개인들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창의성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좋은 개념이니, 개념은 살리고 내용을 전진적으로 채워주자는 ‘선의(?)'의 주장도 있다. 그러다 보니 ‘창조 경제는 이런 것'이라는 개념정의가 말하는 사람들만큼 많아지게 되고, 결국 창조경제라는 개념으로는 전혀 국민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가 어렵고 살기가 팍팍한 상황에서, 국민 전체의 지혜를 모아도 모자랄 판에 ‘창조경제'가 국민의 의사소통과 지혜의 수렴을 가로막고 있는 애물단지가 되고 있지 않나? 이론적 근거도 없고, 설득력 있는 유사 사례도 없으며, 지금 경제 환경에도 맞지 않는 국적 불명의 창조경제는 폐기하는 것이 맞다.

 

‘세계 경쟁력'에 집착하기보다 ‘협동경제'로 내부를 다져야.

 

지금 우리 앞의 경제 환경은 글로벌 기술 경쟁력이 뒤처지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하드웨어적 스마트폰 경쟁력은 세계최고이며, 가격대비 자동차 경쟁력도 결코 낮지 않다. 그런데도 경제성장률은 2% 밑을 기고 있지 않나? 우리뿐이 아니다. 미국의 경제 역시 IT분야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세계 최고의 경쟁력과 시장 점유율을 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7% 중반대의 실업률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다. 문제가 다른데 있다는 것이다. 고장난 신자유주의 금융시스템, 극단적으로 악화된 불평등 구조 등이 쉽게 치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지나친 수출의존도를 줄이면서 국내 소득 불평등을 완화하여 내수기반을 키워야 한다. 승자 독식의 경쟁시스템을 완충할 수 있도록 사회 안전망을 확장하는 한편, 공공부문의 역할을 회복하고, 특히 협동조합과 같은 사회적 경제 부분을 키워 신뢰하고 협동하는 사회적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에너지 위기를 맞아 에너지 집중형 산업에서 에너지 저소비형으로의 산업 전환도 시작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위한 투자가 필요하고 일자리도 필요하다. 특히 경제위기에서 함께 어려움을 나누고 사회가 함께 살기위해 필요하다. 이런 것을 굳이 이름 붙이자면 협동 경제라고 할 것이다. 필요한 것은 창조경제가 아니라 협동경제라는 말이다.

 

기술혁신과 함께 사회혁신이 절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와 혁신이 긴요한 것 아닌가? 긴요하다. 물론 IT분야에서 필요하고 이미 민간에서 기업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정부가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사회혁신'이다. 가난한 서민에게 과감하게 신용대출을 해주었던 그라민 은행과 같은 발상의 혁신, 느리더라도 시민들이 지자체 예산 결정에 참여하는 참여 예산제의 실험, 그리고 무한 경쟁교육에서 협동하는 교육으로의 전범을 이룬 혁신학교 등이 그런 사례다. 아직도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에 고착시킨 정글 자본주의의 폐해를 하나씩 전복해야 한다. 엄청난 창의적 상상력과 국민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경쟁을 위한 창의적 상상력이 아니라 협동을 위한 창의력, 상상력,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정부가 북돋워야 할 대목도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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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0정태인/새사연 원장

 

피에타(자비를 베푸소서)! 미켈란젤로 이후 슈투크, 들라크르와와 모로, 고흐,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끝없이 변주한 피에타. 김기덕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영화의 제목이 바로 피에타다. 조민수의 무릎 위에 축 늘어진 이정진이 뉘어 있는 사진을 보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모티브가 된 것이리라.

냉혹함으로만 가득찬 현실을 눈 똑바로 뜨고 바라봐야 한다고 다그치던 감독, 때로는 그 또한 그저 무심한 자연의 법칙이 아니냐고 뭉뚱그리던(<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감독이 개과천선이라도 한 걸까. 도저히 찾을 수 없는 현실의 구원을 결국 모성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던 걸까?

아닌 게 아니라 지금 한국 사회는 ‘피에타’를 필요로 한다. 정부가 황급히 2조원 규모의 긴급 재정투입을 발표할 정도로 경제가 심각하다. 지난 3월까지 3% 중반대의 성장을 할 거라고 낙관할 정도로 정부, 한국은행 그리고 재계가 무능한 탓에 다음 대통령은 누가 되더라도 임기 초반 위기 수습에 정신이 없을 것이다.

가장 다급한 사람들은 역시 저소득층이다. 하위 소득 1/10에 해당하는 계층의 빚은 이미 자기가 쓸 수 있는 소득(가처분소득)의 두배를 훌쩍 뛰어 넘었다. 이들은 고리채에 의존하고 있다. 영화에서 이정진이 노동자의 손목을 잘라 보험금을 타내는 일은 곧 현실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그의 직업은 전혀 생소하지 않은데 SBS 드라마 <쩐의 전쟁>(2007)에서 박신양이 맡았던 역할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5년간 이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다행히 이 계층이 진 빚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빚 대부분(고리채로 늘어난 부분)을 금융권이 떠안도록 하고, 이들의 삶은 정부가 복지 지출로 해결해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이들의 생명은 안전해질 것이다.

다음은 2006년경의 집 값 급등에 밀려서, 또는 대박의 꿈을 안고 은행 빚으로 집을 산 중산층이다. 앞으로 집값이 떨어지게 되면 이들은 점점 더 많은 원리금 상환의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너도 나도 집을 내 놓는다면 집값은 더 떨어지고 시급히 갚아야 할 돈은 더 늘어나게 된다. 지난 2년간 누누이 말한대로 이 문제는 공적 자금으로 집을 사 주는 것이 가장 쉬운 해결책이다. 원하는 경우 그 집에 싼 값으로 세를 들 수 있게 한다면 정부는 공공임대주택을 늘릴 수 있다.

이제 가장 다루기 어려운 집단이 남았다.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자영업을 시작한 경우이다. 지금도 동네 골목 곳곳의 음식점이나 구멍가게의 주인이 바뀌고 있는데 성장률이 2% 이하로 떨어지면 몇 집을 제외하곤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공식 실업률이 다른 OECD 국가들보다 현저히 낮은 것은 바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위협하는 재벌들의 탐욕을 막고 자영업을 공기업이 돕는다거나(예컨대 자영업의 물류를 우체국이 도와준다) 협동조합으로 바꾸는 것은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 경우에는 구체적인 이행 프로그램이 문제인 것이다.

이번의 위기는 정부의 단발성 긴급대책으로 수습될 수 없다. 지금까지의 ‘밖으로부터, 위로부터’(수출과 낙수효과)의 정책기조를 완전히 바꿔서 ‘안으로부터, 아래로부터’(내수와 차오름효과), 즉 중소기업과 협동조합에 의한 따뜻한 협동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 냉혹한 경제에도 피에타가 가득차야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국민을 무릎에 안을 자애로운 성모의 자리에 누가 어울릴 것인가를 선택하는 일이다. 한번 상상해 보시면 분명 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피에타>를 꼭 개봉관에서 봐야 할 이유 하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이중의 불균형을 안고 있다. 조각의 비레를 맞추기 위해 마리아에 비해 예수의 신체가 비현실적으로 작아졌고 어머니가 아들보다 더 젊어 보인다. 후자는 그렇다 쳐도 180cm가 넘는 이정진이 조민수의 작은 무릎 위에 어떻게 누웠을까. 확인해 봐야 한다.


이글은 PD저널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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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6  정태인/새사연 원장 

경제학이 얘기하지 않은 것

<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 60쪽 가량의 빌 게이츠의 발제를 읽었을 때는 즐거웠다. 그러나 이어서 무려 400쪽에 이르는 경제학자의 논평을 읽으면서 청탁을 선뜻 받아들인 내 경솔함을 후회했다. (사실 <칼라TV>의 '전우'였던 이명선 기자가 <프레시안>에 취직하지 않았으면 이 글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이 게이츠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그의 주장이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그림 1] 수요 공급 법칙과 '시장의 근원적 한계'. ⓒ프레시안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그림이다. 내가 여태 읽은 어느 경제학 책에도 나오지 않지만 굵은 선으로 표시한 ">" 부분만 실제로 시장에서 실현된다. 만일 우리가 수요 공급 곡선을 알 수 있다면 그렇다는 얘기다. (불행하게도 어느 누구도, 어떤 간단한 재화의 수요 공급 곡선도 알지 못한다!) 하여 이 부분에 관해서는 소비자 잉여, 생산자 잉여라는 말도 붙어 있고 특히 소비자 잉여 부분에 관련해서 가격 차별화의 이론도 존재한다.

이 책에도 한 마디 거든 팀 하포드의 <경제학 콘서트>(전2권, 이진원·김명철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의 상쾌한 첫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 특히 균형 가격 아래의 수요 곡선에 관해서 여태까지 경제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비자 잉여나 가격 차별화 이론의 논리 전개 방식을 원용한다면, 균형 가격 아래의 수요 곡선은 정말 그 재화를 싫어하거나(예컨대 사과 시장이라면 사과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의 경우) 돈이 없는 사람들의 '수요(demands)'이다. 문제는 이 시장이 에이즈 약이나 식량과 같은 필수재일 경우이다.

게이츠는 신통하게도 이런 '수요'를 '필요(needs)'라는 개념으로(이 개념은 몇몇 경제학 책에 나온다) 파악하고 수요와 필요는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돈 없는 사람의 '필요'는 시장이 완벽하게 '성공'해도, 심지어 전 세계 수천만 개의 시장이 동시에 '일반 균형'을 이룬다 해도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남아프리카 어린이에게 절실한 에이즈 약의 한계생산비용이 0에 가깝다 해도(일단 개발된 후에는 약을 몇 천만 개 더 생산하는 데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식량이 남아돌아 쓰레기가 된다 해도, 시장은 아프리카나 기아에 시달리는 북한에 약과 식량을 전달하지 않는다.

해서 나는 이 부분을 "시장의 근원적 한계"라고 이름 붙였다(내 생각에 또 하나의 근원적 한계는 시장의 시행 착오성에서 나온다). 실제로 빌 게이츠가 다보스 연설을 하게 된 동기도 남아프리카나 인도의 현실, 특히 말라리아 등 현대 기술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약이 없어서 덧없이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업의 자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게이츠의 해법은 "기업이 참여하는 자선"이다.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사실은 경제학에서) 기업은 "이윤 극대화"라는 단 하나의 방정식을 푸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거나 또는 방어한다.

경제학의 오랜 문제,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거의 말하지 않거나 또는 모르는 세 차원의 문제가 다시 등장한다. 우선 인간이 이타적일 수 있는가, 더구나 기업이 이타적 행동을 지속적으로, 진심으로 할 수 있는가, 기업의 주인은 주주인데 경영자가 그런 행위를 하면 그건 불법이 아닌가(리처드 포스너), 나아가서 "창조적 자본주의"가 말이 되는가.

경제학자들은 각자 자신의 전공에 따라 온갖 얘기를 때론 정중하게, 때론 건방지게 하는데(미국 경제학자들은 얘기에 약간의 유머를 섞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어느 누구도(에드 글레이저만 예외에 속한다) 각 차원의 오래된, 또는 최신의 논의는 전혀 인용하지 않는다. 이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자기 전공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쪽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예컨대 인간이 이기적 존재만은 아니라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경제학자만 부정한다. 그들은 한 달에 수천 개씩 쏟아지고 있는 실험/행동 경제학 논문을 무시하거나 모르고 있다. 저 유명한 "최후통첩 게임"이나 "독재자 게임"의 결과는 인간이 순수하게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이지 않고 "상호적(reciprocal)"이라는 실제 현실을 반복해서 증명하고 있다.

상호적 인간이라는 게 별 거 아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함무라비 법전,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공자 말씀, 그리고 그 반대편 짝인 "자신이 대접받기 원하는 바를 남에게 하라"는 황금률(그 객관적 버전인 칸트의 '정언 명령') 등 동서고금의 지혜가 파악하는 인간이 바로 그렇다.

자본주의 이후부터 인간은 '이기적이어야 한다'("시장은 완벽하다"는 시장 근본주의, 그리고 그 철학적 버전인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는 사회적 훈련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인간은 이기적일 수만은 없다. 아마도 인간이라는 집단은 [그림 2]와 같은 분포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역사적 단계마다, 또는 사회에 따라 최빈값이 좌우로 이동할 것이며, 현재의 세계, 특히 한국은 극단의 오른쪽으로 치우친 그래프에 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선(맹자의 측은지심)은 언제나 가능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학과 같은 벽을 넘어야 한다. 실험 경제학은 게임의 프레임에 경제 용어를 사용하면(심지어 똑같은 게임을 "시장 게임"이라고 부르기만 해도) 사람들은 더 많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그림 2] 인간의 가상 분포. ⓒ프레시안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에서는 기업이 이윤이라는 경제적 목표 뿐 아니라 사회적 목표도 달성해야 한다. 금세기 들어 강조되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실은 1990년대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의 개념과 외연이 같고 우리나라에서 2007년에 제정된 '사회적 기업법'에 정확하게 들어 있는 문구이기도 한다.

경제학자들은(특히 밀턴 프리드먼, 로런스 서머스, 윌리엄 이스털리 그리고 법학자인 포스너) 기업이 이윤 극대화가 아닌 여러 목표를 추구할 경우 경제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결국 자본주의의 장점마저 사라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논법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오히려 신기한 것은 바로 이 주제로 벌어진 세계적 논쟁을 아무도 거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의 '협동 조합 논쟁'("왜 협동조합은 희귀한가")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적 목표와 사회적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협동조합이 그렇게 좋은 것이고 또 효율적이기도 하다면 왜 협동조합형 기업이 이리도 희귀한가라는 질문이다. 폴 새뮤얼슨이 "자본이 노동을 고용하는 것과 노동이 자본을 고용하는 것은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에서 연원한 이 논쟁에는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두 한마디 거들었다. 새뮤얼슨의 얘긴 별 거 아니다. Y=f(L, K)라는 생산 함수에 고용의 방향은 들어갈 틈이 없기 때문이다. 이 논쟁의 결론은? 수많은 논점이 제기됐지만 논리적으로 협동조합형 기업(노동이 자본을 고용하는 노동자 관리 기업)의 취약성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조합원)가 스스로 출자하는 협동조합은 자본을 모으는 데 취약할 수밖에 없고, 최고 경영자와 신입 노동자의 임금 격차가 원칙적으로 여섯 배를 넘을 수 없기 때문에 유능한 노동자는 협동조합을 기피할 것이다. 그러나 단지 사회의 거의 모든 제도가 자본주의적 기업에 맞춰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가 불리하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은행은 협동조합의 평가 기준이 없기 때문에 대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스페인의 몬드라곤이나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처럼 사회적 경제가 지배적인 곳의 경제적 효율성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협동조합 네트워크 스스로 금융 기관을 만들고, 단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삶을 중요시하는 유능한 젊은이들이 협동조합을 선택하는 환경이라면 얘기는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자본주의적 기업조차 신뢰와 협동의 네트워크를 자연스레 선택한다. 수많은 중소기업으로 이뤄진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4만 달러에 이르며, 사회적 경제에 의해 복지를 전달하는 것은 게이츠의 주장이 환상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즉,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는 기실 사회적 경제가 커져야 한다는 주장과 동일하다.

게이츠의 주장이 현실이 되려면 게이츠 재단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경제에 대규모 기금을 제공하는 쪽이 훨씬 빠를 것이다.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창조성'은 세계적인 제약 회사나 정보통신 기업의 기술자들이 하루 몇 시간 동안 가난한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데 있다.

분명 훌륭한 성과를 낼 가능성이 있는 아이디어다. 나 역시 그 실현 가능성에 관해서는 이 책의 경제학자들처럼 회의적이지만 게이츠가 착한 천재라는 점은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주주 자본주의와 이해 당사자 자본주의

이스털리, 서머스, 포스너, 스티븐 랜즈버그 (그리고 몇 명을 제외한 모든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프리드먼의 짧은 에세이(이 책의 부록에 실려 있는데, 게이츠의 친구라는 이 책의 편집자, 마이클 킨슬리가 특별히 집어넣었다. 게이츠는 친구를 잘못 사귄 것 같다!)와, 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한 젠슨과 메클링의 "대리인 이론"(그리고 "계약 이론")의 반복이다.

즉, 주주가 회사의 주인이라는 아주 이상한 주장, 즉 "주주 자본주의"론에 입각한 얘기들이다. 실제로는 마음 내킬 때 자기가 '소유한' 회사에 들어갈 권리도, 아무 의자에나 앉을 권리도, 종이 한 장 내다 팔 권리도 없는 주주들이 회사의 주인이라니 현대의 경제학이 대단한 혹세무민의 학문임에는 틀림없다.

심지어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판사인 포스너는 경영자가 게이츠의 주장대로 행동하면 불법이라고 주장하는데 진짜 "법대로"라면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많은 나라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법에 명시하고 있으며 경영자들은 "사회적 목표의 추구가 주주의 장기적 수익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실제로 현실의 기업도 경제학 교과서처럼 행동하지는 않는다. 주주 자본주의보다는 훨씬 당연한 주장으로 보이는 '이익의 추구'가 기업의 유일한 목적이 된 것도 인류 역사상 아주 최근의 기현상일 뿐이다. 예컨대 1639년 보스턴의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고 부유하며, 단 한 명의 자식만 있고 양심을 지키며 복음을 전도하기 위해 살아온 나이 든 신학 교수인" 로버트 키인이 재판을 받았는데 그의 "가증스러운 죄"는 1실링당 6펜스 이상의 엄청난 이익을 올렸다는 것, 즉 6퍼센트의 수익을 올렸다는 것이었다(<세속의 철학자들>(로버트 하일브로너 지음, 장상환 옮김, 이마고 펴냄))

왜 주주가 회사의 주인인지, 오히려 회사에 자신의 거의 모든 삶이 걸려 있는 노동자가 주인이 되면 안 되는지에 관해 한두명을 빼곤 이 책에 등장하는 뛰어난 경제학자들은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게이츠의 주장을 경제 시스템 차원에서 본다면, 월 허튼의 책, <우리가 처한 상황(The State we're in)>으로 유명해진 "이해 당사자 사회(stakeholder society)"에 해당할 것이다. 당시에도 이 책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여러 목표를 가진 기업의 효율성 그리고 복잡한 당사자들의 이해 조정 거버넌스에 비판이 쏠렸다.

그러나 인간은 신뢰에 의한 협력을 곧잘 하고 있으며 현실의 자본주의는 다양하다. 예컨대 독일이나 일본의 기업 간 관계, 그리고 북유럽의 사회 경제 체제,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사회적 경제는 이해 당사자 사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미약하나마) 증명하고 있다.

시장, 국가 그리고 사회적 경제

경제학자들의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게이츠는 자신의 희망이 가능하다는 증거를 "인정(recognition)"에서 찾는다. 어떤 사상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이 또한 탁월한 견해다.

헤겔 이래 꾸준히 발전해 온 인정 이론은 최근 아주 중요한 사회 철학, 정의론의 근거가 되었다. 특히 낸시 프레이저와 악셀 호네트의 이론은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redistribution or recognition"). 철저히 실천적인 프레이저는 최근 '대표(representation)'까지 덧붙여서 세 차원의 정의론(재분배, 인정, 대표)을 전개하고. 호네트는 인정에 의해 일원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프레이저를 존경하지만 개인적으론 호네트의 이론이 더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즉, 인간은 다양한 측면에서 사회의 인정을 받으려 노력하는 존재이고 자본주의 사회의 비극은 돈에 의한 인정만 추구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게이츠는 기업이 사회적 인정을 또 하나의 목표로 추구할 때 창조적 자본주의가 실현될 수 있으며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는 기업이 더 수익이 높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분명 현재의 상황에서는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며 인간의 본성에도 부합하는 주장이다. 물론 경제학자들의 형편없는 상상력으론 그저 허황된 꿈에 불과할 것이다. 단, 한명의 경제학자도 게이츠의 주장에서 폴라니의 "위대한 전환"을 떠올리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단 한 차원의 사회적 인정만 존재하는 사회는 파멸로 향할 수밖에 없다.

게이츠에 대한 진지한 반론은 좌파 쪽(로버트 라이시, 존 로머)에서 나왔다. 게이츠가 추구하는 바는 국가가 할 일이며 세금을 더 걷는 쪽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흥미롭게도 우파 경제학자들 역시 똑같은 주장을 한다. 단, 우파는 증세에 반대한다. 그들에 따르면 게이츠의 목표는 시장도, 국가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그런 로런스 서머스를 경제자문회의 의장으로 앉힌 오바마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게이츠의 주장은 주로 국제적 차원에 맞춰져 있어서 어떤 한 나라가 이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 게이츠가 안타까워하는 아프리카의 어린 생명은 가장 중요한 공공성이다. 아마르티아 센과 함께 능력 이론(capability theory, 정의란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펼칠 자유를 부여하는 데 있다)을 펼쳐온 마사 누스바움이 10개의 핵심 능력 중 첫 번째로 생명을 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국가가 전적으로 담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를 수많은 위기로부터 구한 지혜인 협동을 리바이어던이 모두 이룬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시장의 경쟁이 가져오는 혁신 능력을 부정하지 않지만(마르크스가 <자본>에서 가장 많이 반복한 주장은 자본주의의 생산력 향상 능력이다), 전 사회를 시장 원리로 조직하면 파멸에 이를 것이라는 폴라니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현재의 세계 경제 위기가 바로 그 증거이다. 인류는 시장 경제, 국가(공공 경제) 그리고 사회적 경제라는 세 부문의 조합에 의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박하지만 열정적인 게이츠의 착한 천재(시장에서 가능한 해법을 제시했다)에 갈채를 보내고 저명한 경제학자들의 무지에 탄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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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