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경제학'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2.12 착한 경제학의 과거와 미래
  2. 2011.03.28 인간의 본성과 복지 (1)

2013.02.12정태인/새사연 원장

 

이 칼럼이 마지막이라니, 문득 언제 연재를 시작했는지 궁금해졌다. 2011년 9월 20일,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다’는 글로 독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1년 하고도 4개월여 동안 2주에 한 번 썼으니 35번쯤 연재했을까? 

이제는 많이 깎이고 무뎌졌지만, 술 마시면 어른들에게도 막말을 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에게 감히 반기를 들었던 모난 이미지가 ‘착한 경제학자’로 환골탈태했으니 그것만으로도 횡재에 가깝다.

내가 ‘착한 경제학’의 이름으로 현실을 들여다볼 때 내 현미경의 태반은 행동경제학/실험경제학이었다. 행동경제학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주류경제학의 인간관에 반기를 들었다. 거슬러 올러가자면 1975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요, 경제학자이자 인공지능 창시자, 한마디로 현대의 마지막 백과전서파라 할 수 있는 사이먼(Simon)의 ‘제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에 이를 것이다. 주류경제학의 가정과 달리 사람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으며 모든 걸 계산한다기보다 주먹구구(heuristics)로 일을 처리한다는 주장이 제한합리성이다. 그러니 사이먼을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후 200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 카네만을 거쳐 최근에는 가장 인기있는 분과로 떠올랐다. 카네만은 인간의 제한합리성이란 완전한 비합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인 편향을 보인다는 점을 제시했다. 예컨대 그와 티버스키(Tversky)의 전망이론(prospect theory)은 사람이 경제학의 기대효용이론과 완전히 다르게 행동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피자를 시킬 때 토핑을 모두 올려놓은 상태에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빼는 방식과 자신이 원하는 토핑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주문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면 어느 쪽에 더 많은 토핑이 올라갈까? 인간이 합리적이라면 당연히 차이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추가하는 주문방식의 토핑이 2분의 1가량 적었다. 즉 어떤 상태를 사고의 출발점(준거점)으로 삼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다른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원래 있던 데서 줄어드는 것을 더 싫어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100원을 벌 때에 비해 잃었을 때 심리적 상실감이 더 크다. 이를 현상유지 편향, 손실회피 등으로 부른다. 

이렇게 행동경제학은 심리학과 결합하거나 인류학의 결과에 주목해서 사회 현실을 맨눈으로 설명하려 한다. 내가 특히 주목한 분야는 사회적 딜레마의 해법으로서의 협동이었고. ‘인간은 어떤 경우에 협동을 하는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여기서는 진화생물학과 활발한 교류가 벌어졌고 전에 소개한 노박의 ‘인간 진화의 5가지 규칙’은 그 중간 정리였다. 최근에 노박의 책, <초협력자>가 번역 출판되었는데 노박은 인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협동하는 종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해서 생물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특히 나는 노박의 규칙 중에 집단선택에 주목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분석한 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집단 경쟁에 의한 협동과 집단 정체성은 외부에 대한 적대감을 유발하여 사회적 대립상태로 치닫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 대한 탐구는 노동운동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지 모른다. 노동자는 기업이라는 집단에 속해서 다른 기업과 경쟁하는 동시에 노동자 계급에 속해서 자본가와 경쟁(투쟁)하는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보통 여러 집단에 동시에 속해 있으므로 한 개인을 구성하는 정체성은 여럿이게 마련이다. 이럴 경우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인지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또한 집단선택에서는 개인 수준의 선택과 집단 수준의 선택이라는 공진화(coevolution)가 일어나므로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집단에 변화가 올 수도 있고, 되먹임 효과를 통해 집단 전체의 위기가 초래될 수도 있다. 즉 개인과 사회의 관계라는 해묵은 문제를 풀어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다. ‘착한 경제학’은 이런 흥미로운 얘기를 가득 품고 있다. 또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안녕”이라는 인사를 드린다.

* <착한 경제학>은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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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1 / 02 / 15      정태인/새사연 원장

뜨거워지는 복지논쟁

 

설을 맞아 각 언론사가 여론조사를 했다.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복지에 관한 설문도 물론 포함됐다. 어떻게 물었느냐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지만 놀랍게도 국민의 2/3 가량이 “증세를 해서라도 복지를 늘려야 한다”고 대답했다.

 

가히 경천동지요, 상전벽해라고 할 만하다. 2002년 정초에 탤런트 김정은씨가 “부자 되세요”라고 외친 것이 신호탄이었을까? 우리 대부분은 그동안 투기에 목숨을 걸었다. 주식과 부동산시장에서 나만은 승리해서 떼돈을 벌 것이라고, 우리 아이만은 특목고를 거쳐 일류대에 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어느 재벌의 황당한 선동에 따라 우리 모두 정상을 향해 온갖 경쟁을 다 벌였고, 거기서 복지란 패자의 구질구질한 구걸일 뿐이었다. 2008년 4월의 총선이 최악이었다. 서울과 경기도의 모든 선거구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선거공약은 똑같았다. “뉴타운”, 그리고 “특목고”. 이런 낯 뜨거운 공약을 내걸지 못한 진보-개혁 후보는 하나 같이 “지못미”가 되었다. 드디어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나도 패자가 될 수 있다, 아니 패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일까?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이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40대 남자들은 샌델의 “정의론”을 뒤적이고 장하준의 “23가지”를 들춰 본다.

 

하여 정치권에서 복지 논쟁이 뜨겁다. 야권의 “모두에게 복지를”(보편복지)에 맞서 한나라당은 “필요한 사람에게 복지를”(선별복지)를 내세웠고 민주당 내에서는 “증세없는 복지”와 “증세를 통한 복지”가, 그리고 진보진영에서는 “부자들의 증세”(내라)와 “우리 모두의 증세”(내자)가 맞서고 있다. 복지의 백화제방, 아름다운 풍경이다. 굳이 내 생각을 말하라면 “우리 모두의 증세에 의한 보편 복지”라고 대답하겠지만 지금은 단번에 정답을 내 놓는 경쟁을 할 때는 아닌 듯 하다. 예컨대 OECD 평균에 도달하려면 약 100조원이 필요하므로 증세를 해야 한다는 건 분명 맞는 말이지만 어떤 복지부터 늘려 나가야 하는지, 증세 이전에 국민들의 복지에 대한 믿음을 높일 방법은 없는지도 논의해야 한다. 그런 우선순위나 방식을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행동경제학으로 보는 복지논쟁

 

문제를 들여다 보는 방법은 수없이 많겠지만 여기서는 지난 10년간 빛나는 성과를 거둔 행동/실험경제학, 그리고 진화심리학이라는 안경을 써 보자. 그간의 연재를 통해 “작은책”의 독자들은 이런 논리에 익숙할 것이다. 보편복지 역시 공공재나 공유자원(common pool reource)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딜레마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가장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가 밝혀 냈듯이 이기적 인간이라면 최적의 답을 찾을 수 없다.

 

다행히 이들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관찰하듯, 아니 우리 스스로 그러하듯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한다. 맹자의 ‘측은지심’은 하이예크나 프리드만이 주장하듯 원시적 감정이 아니라 지금도 엄연히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인간 본성 중 하나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은 상호적(reciprocal)으로 행동한다. 칸트가 말한 것처럼 “내가 대접받기 원하는 것처럼 남을 대접”하려고 한다. 나아가서 눈에 띠게 공정함을 벗어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가까운 미래에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지라도 기꺼이 응징을 한다. 이런 속성이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협력이 이뤄져온 이유이며 그렇게 우리는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해 온 것이다. 예컨대 인간이 정말로 이기적이기만 한 존재라면 우리 나라에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없을 것이다.

 

이런 협력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 즉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하게 말한다면 남의 선의를 이용하려는 내 탐욕(greed)이 그 하나요, 또 하나는 남에게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fear)이다. 복지에 관한 한 후자가 더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세금은 내지 않고 복지의 이익만 누리려 한다면 아무도 기꺼이 세금을 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게임 룰 바깥의 이야기이다. 사회적 딜레마 게임에는 확실한 규칙이 있다. 예컨대 공공재게임에서는 내가 얼마를 기여하면 공유자원이 그 액수의 세배만큼 늘어나므로 모두에게 확실히 이익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세금을 내 봤자 국가가 복지가 아닌 곳에 쓴다면, 예컨대 4대강 사업에 써버린다면 당연히 증세에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정권이 바뀌는 것이 당연한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지금 정권은 믿는다 해도 만일 다음 정권이 복지 예산을 삭감한다면 또 어찌 할 것인가? 따라서 사회복지세와 같이 복지를 용처로 정해 놓은 목적세를 거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또한 정권이 바뀌어도 전혀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모두에게 확실한 이익과 만족을 주는 복지부터 시행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는 복지 수혜자(수급자)의 무임승차이다. 한나라당이 들고 나온 “공짜 점심은 없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요, 1990년대 초 스웨덴 경제위기 때 경제학자들이 맹공한 지점이 기도 하다. 내가 낸 세금으로 누군가 놀고 먹는다면 그런 복지에는 선의를 지닌 사람도 찬성하기 어렵다. 행동경제학/진화심리학이 밝힌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나 노력과 관계없이 가난에 빠진(빠졌다고 판단하는) 사람을 기꺼이 도우려 하며 특히 그가 자립의 의지를 보일 때는 더욱 더 그렇다. 따라서 모든 복지에는 자활 프로그램이 동시에 붙어야 한다. 예컨대 실업급여에는 실효성 있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 필수적이고 충분한 노력이 뒤따르지 않을 때는 급여가 중단되도록 해야 한다. 아동수당과 저축을 결합시킨 아동발달계좌도 그런 유의 정책이다. 이런 복지가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산업정책과 결합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90년대 중반 이후 북유럽 나라들은 경제학자들이 맹공했던 “공짜 점심”이 매우 유익했다는 것을 훌륭하게 실증했다. 실제로 의료와 교육에 대한 공공지출은 장기적으로 가장 수익성이 높은 투자임이 증명되어 있다.

 

이런 무임승차 문제를 복지 수혜자의 자격 제한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잔여복지/선별복지이다. 잔여복지란 시장과 가족이라는 ‘정상적 메커니즘’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에 한해서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시장과 가족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임을 증명해야 한다. 즉 자산조사(means test)가 필수적이다. 불행히도 이런 방식은 균형해가 없는 ‘통제게임(control game)'을 만들어낸다. 정부는 되도록 수급자를 줄이려 하고 국민은 자신의 자산을 줄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은 사회의 불신을 늘리는 역할을 한다. 물론 자산조사가 필수적인 복지도 있다.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는 사회부조가 그러하다. 그러나 보편복지가 충분히 제공된다면 그 대상자는 줄어들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자산조사의 기준도 완화할 수 있다.

 

셋째는 납세자의 무임승차이다. 장관들의 청문회를 보면 이런 의심은 불행하게도 우리의 냉엄한 현실이다. 공공재게임에서 처음에 기꺼이 기여했던(납세) 사람들도 남들이 돈을 덜 낸다는 걸 확인하고 나선 자신도 기여를 줄이다가 결국엔 아무도 한푼도 내놓지 않는 비극적 결과를 맞게 된다. 이 게임에서는 돈을 안 내는 것이 무임승차자에 대한 유일한 응징 수단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게임에 응징을 가능하게 하면 다시 기여가 늘어난다. 예컨대 스스로 100원의 비용을 물고 무임승차자를 지목하면 그 사람의 보수에서 300원을 빼앗는 제도를 도입하면 전체의 기여는 획기적으로 증가한다. 이런 유형의 사람을 상호적 응징자(reciprocal punisher), 또는 이타적 응징자라고 부른다.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세금을 사회 계층 별로, 또는 지역 별로 어떻게 부담할 것인지 합의하고 탈세 등 무임승차자를 엄격하게 응징하면 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응분의 돈을 내면 나도 기꺼이 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상호적 응징자의 역할을 국가 복지의 경우에는 법이 담당하여야 하는 것이다. 즉 문제는 증세 자체가 아니다. 부담을 어떻게 배분하느냐, 또 규칙 위반자를 어떻게 응징할 것인지 합의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복지에 기여를 많이 하는 부자들을 사회적으로 존경받도록 하는 제도를 고안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예컨대 사회복지세 상위 기여자 명단을 발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간접상호성, 즉 평판에 의해 협력을 촉진하는 방식이다.

 

넷째는 나의 이익이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나도 결정적인 혜택을 볼 수 있는 복지라면 더욱 더 기꺼이 세금을 낼 것이다. 어떤 복지냐에 따라 보편주의는 서로 다르게 적용될 수 밖에 없다. 무상급식은 모든 아이에게, 똑같은(학교별로, 지역별로 조금씩 다르겠지만) 점심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없는 사람은 혜택을 보지 못한다. 한편 건강보험은 모든 국민이 대상이 된다. 그러나 모두에게 똑같은 혜택(benefit)을 주는 것은 지극히 비합리적이다. 암의 세계적 권위자도 암에 걸릴 수 있는 것처럼 건강은 지극히 불확실성이 크다. 이런 복지라면 국민 모두 기꺼이 납세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건강보험은 비용 부담의 규칙도 정해져 있는 상태이므로(물론 더 나은 쪽으로 규칙 개정에 합의할 수도 있다) 용이하게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은 늙는다. 따라서 노인복지 역시 모두 혜택을 볼 수 있는 항목이다. 젊은 사람들의 경우 아직 먼 일이라고 생각해서 절박하게 느끼지 않을 뿐이다(인간은 불행하게도 대부분 근시안이다. 담배를 아직도 피는 나도 그렇다).

 

다섯째, 서로 협력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다면 기꺼이 세금을 납부할 것이다(네트워크 상호성, 집단 선택). 진화 게임에서 협력적 인간은 이기적 인간에게 언제나 당한다. 결국 이기적 인간이 아니고선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만다. 그러나 만일 협력적 인간끼리 모여 있는 네트워크나 집단이 있다면 그 단위 전체는 이기적 인간들의 집단보다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 물론 국가 단위로 시행되는 복지라면 나라간 비교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복지를 나라가 운영할 이유는 없다. 예컨대 근거리의 친밀 노동이 중요한 사회서비스는 국가가 자금을 지원하되 지자체가 운영할 수도 있고 나아가서 협동조합과 같은 사회경제가 담당할 수도 있다. 만일 그런 지자체나 사회경제가 더욱 더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면 다른 집단이 모방하게 될 것이다.

 

여섯째, 행동경제학과는 무관하게 우리 나라의 특성에 비춰 볼 때 복지의 공급 측면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아동수당을 획기적으로 늘린다면 보육료가 일시에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터무니 없이 부족한 국공립 보육원의 공급을 늘리는 정책이 동시에 시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은 의료나 노인복지도 마찬가지이다. 복지 전달 시스템을 시장에 맡겨 놓은 채 수당만 늘린다면 오히려 가격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해서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는 점도 잊으면 안 된다.

 

북유럽 나라들이 이런 세세한 제도를 다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많은 부분을 신뢰(trust)로 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규범(social norm)이 상호적 응징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믿는다면 많은 경우 거래비용을 비롯한 각종 비용이 줄어들게 된다. 무임승차자가 사회의 제재를 받게 되고 이런 규범이 내면화한다면 (국가) 제도가 져야 할 부담, 즉 감시비용이나 처벌비용은 훨씬 더 줄어들게 된다. 보편복지의 모범인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등이 사회적 신뢰를 측정하는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에서 항상 최상위를 차지하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복지제도도 잔여복지의 자산조사처럼 상호 불신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신뢰를 쌓는 쪽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어쩌면 위에서 말한 모든 것보다 이 사항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역진불가능한 복지국가를 만들기 위해

 

이런 점들을 다 고려하면 어떤 순서로 복지를 시행하고 어떤 방식으로 재정을 조달하는 것이 좋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진 바 없지만 스웨덴 국민을 상대로 한 20여년에 걸친 반복 조사에서는 일관되게 1위는 의료, 2위는 초중등교육, 3위는 노인복지, 4위는 아동수당, 5위는 고용정책으로 나타났다. 반면 사회부조와 주택수당은 최하위로 나타났다. 물론 이미 기본 복지가 갖춰진 스웨덴과 우리를 바로 비교할 수는 없다. 최소한의 소득보장이라는 기본복지도 갖추지 못한 우리에게는 사회부조가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해야 하고 부동산 가격이 지금처럼 흔들린다면 주택 수당 역시 스웨덴보다는 더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가 예측하는 바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결과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행동경제학/실험경제학이 밝혀낸 인간 본성에 맞춘 복지제도에 관해 아주 거친 그림을 그렸다. 우리는 복지국가를 향한 몇가지 큰 경로를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어느 경로가 완벽하게 우월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다른 경로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제는 체계적인 논리와 수치를 갖춘 구체적인 논쟁이 필요하다. 이 논쟁에 우리 모두 참여해서 합의를 이룰 때 비로소 우리는 역진불가능한 복지국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월간 '작은책'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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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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