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 07 / 03 정태인/새사연 원장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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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새사연의 정태인 원장이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진행한 ‘정태인의 경제학 과외 2부 : 사회경제, 공공경제, 생태경제’ 강연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중소기업의 네트워크, 산업지구

학계에서는 에밀리아 로마냐의 성공 요인으로 산업지구(Industrial district)를 설명한다. 산업지구란 1809년 영국의 경제학자 마샬(Marshall)이 최초로 제시한 개념으로, 전문화된 작은 규모의 동일기업들의 다수가 특정한 지리공간 상의 지구에 모여 있는 것이다. 마샬은 분업이 심화되면 대기업에 의한 대량생산방식과 중소기업에 의한 산업지구 방식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보았다. 마샬은 산업지구의 특성으로 산업의 국지화를 통한 외부경제의 확보, 지구 내에서 전문화된 기업들 간의 분업 심화, 지구 내부의 건설적인 협력관계, 기업활동을 고취시키는 지역 사회의 분위기 등을 꼽았다. 그리고 이런 특성 덕분에 지구 내의 기업 간에는 물류비용과 거래비용이 감소하고, 전문 분야의 노동력을 공유할 수 있으며, 불필요한 재고를 늘리지 않아도 되고, 기술의 학습과 전파를 용이하게 하여 잠재적인 혁신 역량을 강화해준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후 세계 경제는 중소기업에 의한 산업지구보다는 초국적 대기업들의 대량생산체제가 지배하게 된다. 포드주의가 대표적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대규모 공장들이 잇따라 문을 닫은데 비해 전문 중소기업들의 산업지구는 경기침체를 극복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탈리아계 산업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제3이탈리아 지방이 떠올랐다.

산업지구론을 연구한 대표적인 이탈리아 학자들이 산업지구에 관해 내린 정의를 몇 가지 살펴보자. 베카티니(Becatini)는 산업지구를 ‘제품생산과정을 여러 단계로 분리하여 생산하는 중소기업들의 영역적 체계’로, 스포르자이(Sforzi)는 ‘특정산업으로 전문화된 소기업들의 집적체’로 정의했다. 사벨(Sabel)은 산업지구를 ‘소규모 기업들로 구성된 마샬의 산업지구’와 ‘대기업들이 조직의 각 부분에 자율성을 부여하는 형태로 재구성된 지역생산 네트워크’로 구분했다. 1990년 포터(Porter)는 관련 기업 간의 연계를 중심으로 대학, 연구개발, 지방정부 등이 복합된 산업클러스터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1991년 이탈리아 법은 ‘전문적 소기업이 고도로 집적되고 기업과 지역 주민 간에 특별히 친밀한 관계가 형성된 곳’이라고 산업지구를 정의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이탈리아의 산업지구는 전통적인 공예기술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 유연적 생산기술과 생산방식을 접합하여 소비자들의 기호변화와 기술혁신에 신속히 대응했다는 점을 추가적인 특징으로 갖고 있다. 또한 기업들의 공동체와 주민들의 공동체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 역시 중요한 특징이다. 이는 공동체 내의 신뢰가 단순히 부수적인 요인이 아니라 필수적 요인이며 주민들의 동의, 다시 말해 민주주의가 동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이탈리아와 산업지구는 우리가 흔히 아는 클러스터와는 조금 다르다.

산업지구가 발전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 지역 주민의 삶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물질적 성장과 함께 그 지역의 가치와 문화 역시 고양되어야 한다. 에밀리아 로마냐에서는 정치와 경제의 분리, 사회와 경제의 분리라는 경제학적 이분법의 세계가 적용되지 않는다. 시장경제가 사회 안에 단단히 뿌리 박혀, 묻어 들어간 상태이다. 상호성의 원리가 경쟁의 원리를 제약하는 상태이다.

에밀리아 로마냐에는 9개의 현이 있는데 각각에 특화된 산업지구가 존재한다. 카르피는 섬유 및 의류 산업지구, 모데나와 레지오 에밀리아는 세라믹 및 농기계 산업지구, 라베나는 신발 산업지구, 리미니는 목재생산기계 산업지구, 폴리 세세나는 실내장식과 가구 산업지구, 파르마는 식료품 산업지구, 페라라는 바이오메디칼 산업지구, 볼로냐는 포장기계 산업지구로 유명한다. 우리로 치면 도를 이루는 각 시와 군에 각각 서로 다른 산업이 특화되어 있는 것이다. 2001년 조사 결과에 의하면 이탈리아 전체에 156개의 산업지구가 존재한다.

산업지구 내의 중소기업들은 정보, 장비, 사람, 주문을 공유한다. 수많은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시장조사, 기술 훈련, 인력 관리, 연구개발 등과 같은 사업서비스 기업과 금융서비스 기업이 등장했다. 마케팅과 유통을 돕는 기업도 생겨났다. 기업연합회도 조직되어 정보, 훈련, 금융, 마케팅 서비스를 제공한다. 아주 작은 전문화된 소기업들이 지속적이고 효율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협력과 동시에 치열한 경쟁을 한다. 다만 공동체의 삶의 질을 떨어뜨릴 수 있는 가격경쟁보다는 제품차별화 경쟁을 택한다.

예컨대 세라믹 산업으로 유명한 사수올로의 산업지구에서는 에나멜, 페인트, 풀, 포장, 기술상담, 그래픽과 디자인, 보관과 수송, 법률과 보험 등 세라믹 산업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제공하는 소기업들로 우글거린다. 그 결과 세계 최고의 아름답고 내구성 좋은 고품질의 타일이 탄생하고 있다. 물론 대기업의 경우도 이런 기능을 가진 부서를 모두 갖추고 생산할 수 있겠지만, 기업의 위계질서로 인해 각 부서가 최고의 창의성과 다양성을 발휘하지는 못할 가능서이 크다. 사수올로의 여러 소기업들처럼 경쟁하면서 창조하는 관계가 되도록 대기업의 각 부서를 설계하고 운영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풍성한 사회적 자본과 기업가 정신

산업지구라는 네트워크가 발생시키는 외부효과를 좀 더 살펴보자. 각 기업의 기술과 노하우는 산업지구 내에서 자유롭게 공유되면서 지역 공동의 지식과 제도로 존재하게 된다. 또한 장기 반복 거래와 평판 효과로 쌓인 신뢰는 각종 거래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 공식적 계약이나 제도보다는 비공식적 관계가 저비용 고신뢰의 공유자산이 된다. 만일 공동체 내의 규범을 어긴다면 지역사회에 발붙이기는 어렵다. 지역의 고유문화와 역사는 구성원들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는다. 규범과 정체성은 다시 상호성을 강화하여 협력을 촉진한다. 이런 것들이 모두 사회적 자본이 된다.

그 중에서도 사업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소기업이 눈에 띈다. 80년대 이후 에밀리아 로마냐의 고용 증가를 주도한 것은 서비스 산업이다. 이는 또한 중소기업으로 구성된 이 지역이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협동조합들의 협동조합인 레가코프(Legacoop, 협동조합전국연합)와 중소기업중앙회인 CNA는 회계와 금융 등 일반적인 사업서비스를 제공한다. 정부 차원에서는 협동조합과 중소기업들이 변화하는 경제 환경에 대응할 수 있도록 산업진흥공사인 ERVET(Emilia Romagna Valorizzazione Economica del Territorio)를 세웠다. ERVET에서는 각 지역마다 실질서비스센터(Real service center)를 세워 각 지역별로 전문화된 산업에 필요한 구체적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흔히 금융, 마케팅, 기술개발과 같은 사업서비스는 중소기업의 지속적 발전 앞에 놓인 죽음의 계곡으로 불린다. 하지만 에밀리아 로마냐에서는 이러한 사업서비스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자산으로 형성되어 있다.

기업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자본이 충만하다는 조건은 기업가 정신의 고양으로 이어진다. 지역의 공유자산을 이용하여 언제든지 기업을 창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와 기업가라는 계급적 차이 또한 절대적이지 않다. 사장과 노동자가 공산당(현재 민주당)에 같이 가입해서 활동한다. 이탈리아에서 노동조합이 가장 강한 지역이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은 기업가 정신에도 익숙하여, 노동조합은 기술변화와 구조조정에 아주 유연하게 대응한다. 사실 노동자라고 해서 시장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창조성을 가지면 안 될 이유는 없다. 왜 노동자는 가치 자체를 새롭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가치 중에서 임금의 몫을 늘리는 데에만 온 몸을 받쳐야 하는가? 한국에서라면 반동적일 수 있는 이런 의문이 에밀리아 로마냐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스웨덴이나 네덜란드의 노자간 역사적 대타협과 사회적 합의를 많이 이야기하는데 에밀리아 로마냐에서는 그런 합의가 일상에서 아주 미시적 차원으로 일어나고 있다.


지역 정부의 지원과 법제화

공산당이나 지역정부와 같은 공공부문에서의 뒷받침도 에밀리아 로마냐의 성공 요인 중 하나이다. 50년대 국제공산당인 코민테른에서는 ‘반독점 테제’가 결정되어 각 국가와 지역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에밀리아 로마냐는 독점적인 대기업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이 지역 공산당과 지역 정부는 반독점을 중소기업 육성으로 해석하고 실천에 나섰다. 당시 기술은 있지만 돈이 없는 중소기업들에게 놀고 있는 땅을 개발해서 시장 가격 이하로 제공했다. 산업지구의 인프라 건설과 금융 지원에 나섰다. 이후 70년대에는 ERVET와 실질서비스센터 등을 설립하여 사업서비스 지원에 나섰다. 80년대에는 공동 브랜드를 개발하고, 수출 촉진 정책을 폈다. 90년대에는 혁신지구 프로젝트에 나섰다. 특히 주정부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하여 공동체 내에서 신뢰와 연대를 지키면서, 다양한 구성원들의 요구를 반영하고자 했다.

또한 협동조합과 관련된 법제화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미 1947년 제정된 이탈리아 헌법 제 45조에는 협동조합의 역할에 규정되어 있다. 같은 해 제정된 바세비법(Basevi law)에서는 혀동조합의 비분리자산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서는 법인세를 면제하도록 하였다. 1983년 비센티니법(Visentini law)은 협동조합이 주식회사나 유한회사를 서립하거나 지분을 인수 보유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1992년에는 모든 조합이 이윤의 3%를 각출해서 협동조합 발전기금을 만들 수 있도록 하였다. 이 기금은 새로운 협동조합을 설립하거나 운영이 어려운 협동조합에 자금을 빌려주는데 쓰였다.


네트워크 안팎에서 오는 위기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네트워크의 단점 중 하나는 폐쇄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잠김효과라 불렀다. 잠김효과는 산업기술적 측면에서도 나타나고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나타난다. 기존의 기술체계에 대한 과신이 외부의 커다란 변화를 제 때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든다. 또한 알아차리게 되어도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상호작용하고 있으므로 새로운 기술체계로 전환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구성원 간의 친밀성이나 유대감은 외부 구성원에 대한 배타적 태도로 나타나거나 새로운 구성원을 유입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 산업지구의 성공을 가져왔던 요인들이 역설적으로 위기를 불러오는 것이다.

네트워크 자체가 가진 문제 뿐 아니라 대외 환경의 변화 속에서 과연 에밀리아 모델이 건재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세계화와 정보통신 혁명 속에서,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는 속에서 에밀리아의 중소기업들도 몰락하지는 않을까? 보통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자산특수성과 시장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중소기업들은 수직적으로 통합되거나, 하청기업으로 전락하거나, 해외 이전하는 등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경제학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런 우려들은 아직까지는 현실화되지 않고 있다. 먼저 에밀리아 로마냐가 가진 매우 강한 인문학의 휴머니즘 전통이 사회문화적 잠김효과를 방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구 40만 명의 소도시 볼로냐에서 온갖 인종을 다 만날 수 있으며, 최대 노동조합인 CGIL은 외국인 노동자의 권리 증진에도 힘쓰고 있다.

그리고 에밀리아 로마냐의 중소기업들은 서로 연계된 기계제조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외부환경 변화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앞서 사업서비스를 담당하는 중소기업들이 우글대고 있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비중으로 보았을 때 서비스업에만 치중되어 있지 않다. 특화된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기계장비를 해당 지역에서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앞서 보았던 타일을 주로 생산하는 세라믹 산업지구에서는 역시 세계 1,2위를 자랑하는 세라믹 기계산업이 발전되어 있다. 세라믹을 생산하는 전 과정에서 필요한 기계들이 세라믹과 함께 그 지역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농업 산업지구에서 우유를 생산하는 농가가 있다면, 그 주위에는 우유 팩을 생산하는 기업이 있고, 우유 팩 생산에 필요한 기계를 만드는 기업이 함께 존재한다. 세계적인 스포츠카 페라니나 람보르기니, 세계적인 오토바이 두카티도 에밀리아 로마냐에서 생산되는데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종적으로 부품을 조립하여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만드는 중소기업, 그에 필요한 수많은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 또 그 부품을 생산하는 기계를 만드는 중소기업이 함께 존재한다.

또한 변화하는 경쟁 환경에 적응하고자 외부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내부의 기술혁신을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브랜드, 마케팅, R&D 등 전략부문에 집중하면서 산업지구 전체의 기술 및 조직 변화를 주도하는 선도기업과 지구그룹(district group)이 등장하고 있다. 선도기업이란 말 그대로 새로운 기술과 체계를 가장 먼저 도입하여 변화하는 기업이다. 이런 기업이 있으면 서로 긴밀하게 형성하고 있는 네트워크를 통해 혁신과 변화의 성과가 전파될 수 있다. 지구그룹은 몇 개의 중소기업들이 법적 독립성을 유지한 채 주식의 교차소유를 통해 하나의 집단을 이루는 것이다. 쉽게 말해 여러 기업이 뭉쳐서 선도기업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친밀함이나 연대감 등으로 이어진 비공식적 관계가 계약을 통해 공식적인 것으로 변하고 있다. 이들은 소기업이 담당하기 어려운 마케팅, 금융, 신기술개발 등 전략 분야를 담당한다. 고용규모가 클수록, 글로벌 경쟁에 노출되는 기업일수록 그룹화의 경향은 강하다.

그렇다고 이들을 한국의 재벌이나 일본의 게이레츠(系列) 같은 대기업의 폐쇄적 네트워크 로 볼 수는 없다. 제품차별화를 강화하기 위한 수평적 네트워크와 함께 품질 향상을 위해 수직적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의 중소기업 네트워크가 대기업에 흡수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소기업 간의 네트워크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중소기업 간의 인수 역시 합병을 하기 보다는 기존의 브랜드와 시설은 그대로 유지한 채 소유지분을 통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즉, 중소기업 간 네트워크와 유연성 있는 체계라는 산업지구의 특징을 지켜가고 있다.

* 정리 :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16)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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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05 / 11 새사연

지역 클러스터 정책의 복원과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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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신도시 개발에서 지역 전문화로

2. 글로컬 대학의 역할

3. 중소기업 중심의 에밀리아 로마냐형 클러스터

4. 실리콘 밸리형과의 조화

 


[본 문]

편집자 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장기침체 국면으로 이어지면서 30년 동안 세계를 지배했던 신자유주의의 퇴조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경제위기의 여파로 사회 양극화와 불평등이 악화되자 한국사회에서는 전례 없는 보편 복지 요구가 확대되고 있고 경제 민주화의 요구로 발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양대 선거를 맞아 정권교체 요구가 거센 가운데 다양한 사회개혁 의제가 정책 공약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사회가 정말 2013년 체제라고 불릴만한 사회 대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자면, 강력한 경제개혁 전망을 갖고 복지국가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새사연의 문제의식이다.

이 에 새사연은 우리사회에 필요한 시대적 가치와 비전, 새로운 경제모델과 성장모델, 총체적 경제개혁, 보편복지를 망라하는 정책을 모아 2012년 5월 중 단행본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출판될 원고 가운데 일부를 새사연 회원들과 미리 공유하고자 [새로운 사회 2013]이라는 기획을 마련했다. 회원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한다.

그간 세계화와 시장중심경제의 위력 앞에서 각국의 산업정책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시장에 맡기면 가장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산업정책의 필요성을 격하시켰다. 하지만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라는 기치를 높이 들었던 WTO 체제, 그리고 한미 FTA를 비롯한 양자간 FTA 체제는 세계 금융위기 이후 현저히 약화될 것이다. 대신에 각국의 산업정책이 차지하는 공간이 넓어질 것이다.

산업정책이란 정부가 자원배분에 영향을 주는 모든 행위를 뜻한다. 산업정책은 산업의 발전과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것을 추구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경쟁력과 생산력 향상, 산업구조조정, 국내공급능력의 확대 그리고 시장실패의 조정 등을 목표로 한다. 세계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져서 그동안의 수출 주도, 부채 주도의 성장 전략이 먹히지 않는 지금의 상황, 재벌을 필두로 하여 정의롭지 못한 시장경제가 과도하게 팽창하여 경제주체들 사이의 균형이 파괴된 지금의 상황에서 바로 산업정책이 필요하다.

우리가 주목하는 산업정책은 사회적 경제에 기반한 지역클러스터 정책과 협동조합 정책이다. 사회적 경제의 핵심은 신뢰의 네트워크를 통해 축적되는 사회적 자본이다. 신뢰의 네트워크를 통한 기술적, 사회적 혁신의 창출과 학습을 통한 혁신의 파급이 지역클러스터 정책과 협동조합 정책을 미래의 산업정책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클러스터 정책은 이미 참여정부에서 국가균형사업으로 실시된 바 있다. 구상부터 치면 이제 10년 가까이 진행된 이 정책에 대한 평가는 아직 명확히 합의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중앙정부 주도로 똑같은 형태의 지역혁신협의회를 창설하고 비슷비슷한 첨단산업에 집중했던 점을 문제로 지적한다. 또한 기업도시나 혁신도시 등을 외치며 빠른 시간 내에 성과를 거두려는 의욕이 결국 투기화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1. 신도시 개발에서 지역 전문화로

따라서 차기 정부의 클러스터 정책은 기존의 중앙집중형 수직적 운영체계를 분권형 수평적 운형체계로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대표적 중앙집권국가인 프랑스도 광역자치단체인 레지옹(region)의 역할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영국의 지역개발청(RDA, Regional Development Agency), 프랑스의 국토및지역개발기획단(DATAR, Delegation L'Amenagement du Territoire et L' Action Regionale), 이탈리아의 에밀리아로마냐지역개발기구(ERVET, Emilia Romagna Valorizzazione Economica del Territorio)가 대표하는 것처럼 유럽 각국은 지역혁신을 담당하는 기구를 두고 있다. 세계의 연구동향도 산업지구, 클러스터, 혁신환경, 지역혁신체제, 학습지역 등 혁신 주체로서의 지역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제 지역별, 지방별로 자신의 특성에 걸맞은 실행계획을 세우고 지역공동체 단위에서 사회적 경제의 토대 위에서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 주민이 참여하여 계획을 수립하고 공동체의 경제발전계획과 중소기업 클러스터 정책을 연관해서 수행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현재 각 광역단체가 지역혁신체제(RIS, Regional Innovation System) 구축보다 신도시 개발과 기업유치라는 투기적 발전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앙정부의 ‘밖으로부터, 위로부터의 성장전략’이 지역 수준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지역이 ‘명품도시’, ‘기업도시’, ‘혁신도시’ 등 신도시개발을 통한 기업 유치를 지향하고 있다. 허나 부동산투기 등 부작용이 많고 외자유치 등에 특혜만 부여하고 고용 확대와 생산성 향상 등의 실질적 효과는 거의 없는 상태이다. 기존 기업과 대학, 연구소 간의 네트워크화가 지극히 미흡하고, 지역 주민의 고용과 참여를 배제한 채 지도 상에 화려한 그림만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지역 수준에서도 ‘안으로부터, 아래로부터의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각 지역이 모두 IT, BT 등 고기술 첨단산업을 내세우고 있으며 실리콘밸리를 모델로 하는 것도 문제이다. 각 지역 산업에 필요한 지식의 성격은 서로 다르다. 첨단산업에서 필요한 분석적이고 코드화가 가능한 지식은 실리콘밸리형 클러스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세계의 실리콘밸리 모방이 거의 다 실패로 끝났는데 한국에서만 성공하리란 보장은 전혀 없다.

특히나 우리나라 기업의 99%는 중소기업이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에게 필요한 지식은 종합적이고, 코드화가 불가능한 암묵적 지식이다. 기계산업, 부품산업이 이런 지식유형에 속한다. 이런 지식에 필요한 클러스터는 실리콘밸리형이 아니라 에밀리아로마냐형이다. 즉, 지역마다 특정산업을 중심으로 전문화를 꾀하면서, 관련된 기술과 지식이 다양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 우리에게 필요한 클러스터 전략이다. 그렇다면 지역혁신체제도 조금 더 구체적이고 암묵적인 지식을 산업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를 ‘연관된 다양성 속의 지역적 전문화(regional specialization in related variety)’라 부를 수 있다. 이것이 현재 한국 클러스터 정책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 이탈리아의 산업지구를 대상으로 실증분석을 한 결과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지구에는 연관된 다양성으로 이루어진 지역적 전문화가 더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대기업 쪽에서도 기술이나 시장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지역의 다양한 혁신역량을 활용할 필요가 커지는데 이것은 수평적, 협력적 지역혁신체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현재 한국 대기업의 수직적, 폐쇄적 네트워크는 기술의 잠금효과(lock-in effect)를 초래하여 지속적인 혁신을 방해할 수 있다. 잠금효과에 의한 대기업의 몰락은 미국의 자동차산업벨트의 경우처럼 지역 전체의 몰락을 초래할 수도 있다. 반면 독일 슈투트가르트나 이탈리아 토리노 지역은 벤츠(Benz)와 피아트(Fiat)의 위기를 수평적, 협력적 네트워크에 의해 극복하여 산업구조 고도화와 다양화를 달성했다.

 

2. 글로컬 대학의 역할

한 산업의 경쟁력은 지역에 구체적으로 뿌리내리고 있을 때 나타난다. 이를 잘 표현해주는 말이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 = Globalization + Localization)이다. 대학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적 수준의 대학은 지역 산업에 뿌리박아야 비로소 출현할 수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지방 대학에 가상 학부 혹은 프로젝트형 학부를 만들어 지역화하는 사업을 대폭 지원해야 한다. 예컨대 대구경북 모바일 클러스터에서 경북대학교가 하는 역할을 복제할 수 있다. 가령 제1호 국가산업단지가 있는 안산의 경우라면 안산에 캠퍼스가 있는 한양대에 안산학부(경영학과, 기계공학과, 디자인학과 등등이 참여하는 가상학부)를 만들어 시화반월 국가산업단지 전체의 리모델링 작업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해당 지역의 중소기업 생산성이 30% 향상된다면 임금과 고용이 동시에 증가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각 도내 시군이 최소 한 개 이상의 대학-전문대학-실업고로 연결되는 글로컬 연구교육 시스템을 정착시켜 각 지역별 혁신 클러스터를 형성해야 한다. 글로컬 연구교육 시스템은 각 지역의 혁신 관련 센터(테크노파크나 중소기업 지원센터, 그 외 각 정부 부처가 만든 혁신센터 등)와 함께 공동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글로컬 대학은 혁신센터와 함께 역내 기업들의 실질 수요에 부응하여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거나 기업의 투자 또는 장학금을 받아 자체적으로 생존 가능할 수 있다. 지방정부는 자립 때까지만 재정을 지원하면 된다. 현재의 대학생 정원 수급상황을 볼 때 지방대학의 생존은 글로컬라이제이션에 성공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글로컬대학과 클러스터의 성과에 더불어 중소기업 노동자에 대한 사회 보험료 지원 등 노동 복지도 동시에 시행해야 한다. 생산성 향상에 성공한 중소기업 네트워크는 지속적 발전을 위해 학생들의 장학금과 취업을 보장하고 자체의 자금으로 4대 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대학-중소기업-고용-복지의 지역 내 선순환 시스템을 갖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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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2.04.05정태인/새사연 원장

지난 번에 쓴 것처럼 강력한 재벌규제를 이야기하면 많은 분들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럼 우리 경제는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이다. 단순한 기우는 아닌 것이 재벌들은 이런 정책에 강하게 저항하거나 아예 국민경제를 볼모로 파업을 할 수 있다. 참여정부 때 강철규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이 재벌 총수들에게 하도급 단가 인하를 자제하라고 부탁하자 모 회장은 회사로 돌아가자마자 10% 단가 인하를 지시했다. 나는 정권이 싫다고 정말 수익성 있는 투자를 포기하는(파업하는) 재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투자를 미뤄 대통령의 항복을 받아내는 일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다면 재벌규제를 하면서도 투자를 늘리고 고용을 확대하는 방법이 있을까? 역시 답은 “안으로부터, 그리고 아래로부터”이다. 자주 듣는 말, ‘9988’이란 우리나라 사업체 수의 99%가 중소기업이고, 이들이 고용의 88%를 담당한다는 말이다. 이들이 매년 투자를 10% 늘리고 한 사람씩 더 고용할 수 있다면 문제는 해결된다.
 
답은 나왔는데 방법은 뭘까? 우리나라만큼 중소기업 지원정책이 많은 나라도 없다. 그러나 그 효과는 별로 신통하지 않고, 중소기업 사장들은 언제나 불만이다. 과연 중소기업의 생산성이 단기간에 획기적으로 높아지는 방법이 있을까? 불행히도 그런 묘수는 없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이탈리아에 에밀리아 로마냐라는 동네가 있다. 인구 400만에 기업이 40만개가 넘으니 거의 전부가 다 중소기업, 아니 영세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농촌지역답게 와인 같은 농가공품, 가죽신발과 같은 ‘메이드인 이탈리아’, 가구, 자동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이런 제품들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기계를 만드는 공장들이 즐비하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이탈리아에서 가장 못사는 곳 중 하나였던 이 동네는 지금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잘 산다.
 
어떻게 그게 가능해졌을까? 답은 중소기업 산업지구(요즘 말로 클러스터)다. 이들 중소기업은 네트워크를 이뤄서 기술변화나 국제경쟁에 대응한다. 서로 협동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물건 하나를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식과 위험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생산 노하우가 공공재인 셈이라서 누구나 기업을 만들 수 있다. 심지어 자동차도 이런 수많은 중소기업이 협력해서 만들어낸다. 설마 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세계 최고의 명품 자동차 페라리와 람보르기니, 그리고 오토바이 두카티가 여기에서 생산된다.
 
중소기업들의 모임인 CNA, 그리고 협동조합의 연합체인 레가는 오래 전부터 이들에게 회계, 법률, 로비, 컨설팅 등 온갖 사업서비스를 제공했다. 지금은 공동브랜드와 품질관리, 해외마케팅에 힘을 쏟는다. 지방정부는 70년대에 산업별로 리얼서비스센터라는 기술컨설팅 서비스를 지원했고, 최근에는 대학과 연구소를 연결해서 바이오메디컬과 같은 첨단산업도 발전시켰다.


이곳엔 하청단가 인하라는 발상이 존재할 수 없다. 수평적 네트워크라 그렇고, 만일 최종 조립하는 기업이 그런 짓을 했다가는 이 사회에서 매장될 테니 그렇다. 물론 장기에 걸쳐 형성된 이런 협동의 네트워크를 당장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방향은 이 쪽이다. 지금 각 지역에 존재하는 유사 중소기업 간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사업을 벌이는 것, 거기에 정부가 사업서비스, 특히 경영과 기술컨설팅을 제공하는 것, 지방대학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모두 괜찮은 직업을 가지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이다. 요즘 뜨는 드라마 ‘패션왕’의 동대문이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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