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02정태인/새사연 원장

나이가 들다 보니 해가 바뀔 때 뭔가 희망의 메시지를 써야 하는 처지가 됐다. 유장한 시간의 흐름을 툭툭 끊는 것도 마뜩찮은데 그 단절에 의미까지 부여해야 하다니. 요 몇 해동안의 곤혹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건 지난 열흘, 8개월간 굶은 술을 한꺼번에 마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어이하랴. 세월이 먹여 준 나이를 거부할 방도는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패배했다. 새사연이 지난 2년간 줄기차게 쓴 것처럼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현재진행형이고 앙시앵레짐의 종말을 고했지만 새 시대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하긴 구체제란 그리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1929년 대공황이 발발한 후, 그 원인과 해법을 제시했다고 인정하는 케인즈의 "일반이론"은 1936년에나 출간되었고 역사적 흐름을 추적한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1944년에나 세상에 나왔다. 현실에서도 루즈벨트가 '뉴딜'을 내 건 시점은 1933년이었으니 이제 4년이 막 지난 시점의 한국에서 극적인 전기가 열릴 것을 기대한 게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 아무리 현실이 더딜지라도 시간은 흐르고 새 시대는 열린다. 그 방향 역시 분명하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개별 이익이 맞부딪히는 사회적 딜레마를 시장이 아름답게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은 붕괴했다. 그런 세상은 수학의 가정 속에나 존재하며 인간은 서로 협동할 때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최근 번역된 노박의 "초협력자"는 인간이라는 미미한 생물체를 강력한 종으로 만든 것은 바로 협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지난 30년은 진화의 법칙을 무시한 시대였다. 하이예크의 '치명적 오류'는 오히려 시장만능론에 적용되어야 한다. 아니 백보 양보하더라도 국가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누가, 어느 나라가 더 빨리 새 시대를 여느냐에 운명이 갈린다. 아니 '기후온난화'라는 전 인류가 겪고 있는 '공유지의 비극'은 전 세계가 협동할 때만 해결할 수 있다. 내 옆의 '모르는 남'을 믿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새 시대는 열린다. 물론 신뢰는 목숨을 건 도박일지도 모른다. 배반당할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남을 불신하고 오로지 경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더 확실하게 세상은 붕괴한다.

어떻게 해야 서로를 믿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새사연이 앞으로 연구할 주제 중 하나에 틀림없다. 추상적인 방향을 정책과 제도로 만들고 어느 덧 사회규범이 되도록 하는 것이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방향이 확실하다면 새로운 사회도 열릴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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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11 / 25 김병권/새사연 부원장

 

새사연은 2012년 가장 중요한 화두로 ‘불평등(Inequality)’를 제시하면서 다양한 각도로 이에 대해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세계적인 석학들의 관점과 견해를 다양하게 소개해주기도 했다. 누리엘 루비니 교수, 폴 크루그만과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 그리고 로라 타이슨과 로버트 라이시 교수 등이 소득 불평등 문제를 현재 경제위기의 중심 문제로 지목하면서 각자의 견해를 밝혀왔다. 그 가운데 경제학자 케인스의 전기를 써서 유명해진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교수가 또 다시 불평등이 경제위기 발생의 원인이자 경제가 회복되지 않은 원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글에서 저자는 금융과 소득 불평등 문제를 알기 쉽게 연결하면서 왜 금융 그 자체보다는 그 이면의 소득 불평등이 위기를 발생시키고 회복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소득의 불평등한 분배가 상대적 빈곤에 놓여있는 계층들에게 부채를 끌어 쓰려는 강력한 ‘수요’를 만들어내면서 부채의 급증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득이 오르지 않아 이를 메우기 위한 ‘대출 수요’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자금을 공급해주는 은행들이 예금 규모를 뛰어넘어 무제한으로 대출을 해줄 수 있는 ‘금융시스템의 규제완화’가 시행되지 않았다면 또한 위기가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짧은 글이 마치 금융의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을 충분히 단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칼럼의 핵심은 대출 수요를 만들어낸 소득의 정체를 강조하고 이것이 위기의 원인이자 회복지연의 원인임을 부각시키려는데 있다. 특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앙은행의 양적완화가 아니라 정부의 적절한 재정지출을 강조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우리의 현재 상황은 최후의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중앙은행을 의미-역자)가 아니라 ‘최후의 소비자(spender of last resort; 결국 정부를 의미 -역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정부만이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상위 1%로 소득이 집중되어 가장 불평등 정도가 심각했던 시점이 1928년과 2007년 이었고, 이 때 심각한 경제위기가 시작되었던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불평등이 가장 줄어들었던 1950~60년대에 오히려 자본주의 황금기였음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외부세력이 아니라, 내부의 불평등을 증폭시키는 자기 자신이며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적(selt-destructive)'성격에 있다는 점을 이 칼럼은 환기시켜주고 있다.


 

불평등이 자본주의를 죽인다.

(Inequality is Killing Capitalism)

 

2012년 11월 21일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2008~2009년 위기가 발생한 것은 은행의 과잉대출 때문이고, 위기로부터 제대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깨져버린’ 대차대조표로 인해서 은행들이 대출을 하지 않는데 기인하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졌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추종자들과 오스트리아 학파들(신자유주의 경제학파 -역자)이 선호하는 전형적인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위기로 치닫는 기간 동안에, 은행들은 예금 규모를 뛰어넘는 돈을 차입자들에게 대출해주었는데, 이는 특히 미국 연준(Fed) 같은 중앙은행이 공급해주는 엄청나게 싼 이자 덕분이었다는 설명이다. 중앙은행의 돈으로 자금을 두둑이 채운 상업은행들은 비합리적인 수많은 투자 프로젝트에 신용을 제공했고, 이 때 광란의 대출을 가능하게 해준 폭발적인 금융혁신(특히 파생상품)을 동반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채의 역 피라미드는 미국 연준(Fed)이 금리를 올리면서 흥청거리는 소비를 중단시켰을 때 붕괴되었다. (연준은 기준금리를 2004년 1%에서 2006년 5.25%가지 올렸다. 그리고 2007년 8월까지 유지시켰다.) 그 결과, 주택 가격이 붕괴하고, (자산을 훨씬 초과하는 채무를 보유한) 좀비 은행들을 양산시켰고, 채무자들을 파산시켰다. 

현재의 문제는 은행이 자금 대출을 재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출을 꺼리면서 제 기능을 못하는 은행들을 어떻게 하든지 ‘정상적으로’ 되돌려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미국과 유럽에서 엄청난 규모의 은행 구제 금융을 해주고, 뒤이어서 중앙은행이 다양한 비정통적인 경로를 통해 돈을 찍어서 은행시스템으로 돈을 공급해주는, 수차례의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을 한 것이다.(위기가 과잉 신용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는 하이에크 추종자들은 이런 조치에 반대한다.)

동시에, 다시는 은행이 금융시스템을 위태롭게 하지 못하도록 규제체제가 모든 곳에서 더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기존 물가안정 목표를 임무로 했던 것에 더해서, 영란은행은 ‘금융시스템의 안정성(the stability of financial system)’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분석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경제적 건강성에서 본질적인 것은 신용 공급이라는 믿음과 관련이 있다. 돈이 너무 많이 공급되어도, 너무 적게 공급되어도 경제적 건강성을 해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을 택할 수도 있다. 신용에 대한 공급 보다는 ‘신용에 대한 수요’가 결정적인 경제적 동인이라는 관점이 그것이다. 결국, 은행들은 반드시 적절한 담보 아래에서만 대출을 해준다. 그런데 위기를 향해 가는 기간 동안에는 상승하는 주택가격이 담보를 제공해주었다. 바꿔 말하면 신용 공급은 신용 수요의 결과였다.  

이것은 다소 다른 측면에서 위기의 기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경제위기가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 때문이 아니라, 사려 깊지 못하거나 기만적인,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채무자(가계와 기업 - 역자)들 때문이라는 식으로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문이 제기된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차입을 했을까? 왜 소득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경기침체 이전 시기에 전례 없는 수준으로 폭등하게 되었을까? 

사람들이 탐욕스러워서 자신들의 분수보다 늘 더 많은 것을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왜 이러한 ‘탐욕’이 그렇게 미친 듯이 표출되게 되었을까?  

여기에 답을 하기 위하여 우리는 소득분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아야만 한다. 세계는 지속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각 국가 안에서 소득 분배는 지속적으로 더 불균형하게 되어갔다. 지난 30년 동안 국내총생산(GDP)이 성장하는 와중에도 중위 소득자들의 소득은 정체하거나 심지어 하락하기조차 했다. 이것은 부자들이 생산성 향상의 더 많은 몫을 뽑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수준이 향상되어가는 이 세상에서, 상대적 빈곤층들이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한 것일까? 그들은 빈곤층이 늘 했던 것, 부채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는 전당포에서 돈을 빌렸고 지금은 은행이나 신용카드 회사로부터 돈을 빌린다. 그들의 빈곤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었고 (담보로 잡은- 역자) 주택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채권자인 금융회사는 그들을 점점 더 깊은 부채의 늪으로 빠뜨리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일부에서 가계의 저축률이 폭락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걸 문제 삼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마지막 논문들 중 한 곳에서 밀턴 프리드먼은 저축이 지금은 주택의 형태를 띤다고 쓰기도 했다.  

나에게 이런 관점은, 중앙은행이 갖은 방법으로 양적완화를 시행함에도 불구하고 왜 은행들이 대출을 재개하지 않고 있고, 왜 경기회복은 다시 흐지부지 되어 가는지에 대해서 정통적인 설명보다도 훨씬 더 잘 설명 해준다. 대출 은행들이 위기 이전에 대중들에게 대출을 강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역시 그들은 부채가 있는 가구들에게 돈을 빌릴 것을 강요할 수 없다. 시장이 위축된 상황에서 설비 확장 자금을 대출 받으라고 기업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약하면, 경기회복은 미국의 연준이나 유럽중앙은행, 영란은행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경기회복을 위해서는 재정정책 결정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은 최후의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중앙은행을 의미-역자)가 아니라 ‘최후의 소비자(spender of last resort; 결국 정부를 의미 -역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정부만이 할 수 있다. 

만약에 정부가 이미 많은 부채를 짊어져서 더 이상 국민들에게 자금을 빌릴 수 없다면, 중앙은행으로부터 빌려서 공공사업이나 인프라 프로젝트에 추가적으로 자금을 지출해야 한다. 이것이 거대 서구 경제권을 다시 움직이게 할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을 뛰어 넘어서, 우리는 국민소득과 자산의 대부분을 소수의 수중에 집중시키도록 하는 시스템을 더 이상 지속시킬 수 없다. 자산과 소득의 결연한 재분배야말로 대부분의 경우 자본주의 장기적 생존의 본질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다시 한 번 이 교훈을 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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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08 / 04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유럽 재정위기를 두고 채무국가의 빚을 과감하게 탕감하는 것이 대책이라고 주장했던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의 글을 소개한다. 그는 워릭대학교의 정치경제학부 명예교수이며 영국 아카데미에서 역사와 경제학을 연구하는 연구원이다. 국내에서도 출판된 1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케인즈 전기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30~4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 특히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어 왔음을 지적한다. 그러한 예로 1970년대 미국 CEO들과 노동자들의 소득 격차가 30배였으나 오늘날에는 263배에 달한다고 지적한다.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이를 옹호하는 논리도 강화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경쟁 시장의 완벽함이며, 임금은 개인의 한계생산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류경제학의 논리이다. 즉, CEO의 한계생산성은 일반 노동자보다 263배나 많기 때문에 그 만큼의 임금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키델스키는 개인의 한계생산성을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현실에서 임금은 비슷한 직종의 임금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결정된다고 반박한다.

그리고 소득 불평등의 심화가 가져오는 문제점을 크게 두 가지로 꼽았다. 우선 도덕적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좋은 삶에 대한 희망을 빼앗기 때문에 문제이며, 현실적으로는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는 토대를 망가뜨리기 때문에 문제라고 보았다.

 

나쁜 사회

(Bad Society)

 

2012년 7월 19일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

 

불평등은 어느 정도나 용인될 수 있을까? 세계 경제위기가 일어나기 전에는 꽤 높은 수준의 불평등이 용인되었다.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는 그랬다. 신노동당의 피터 맨델슨(Peter Mandelson)은 지난 30년 간 “더러운” 부를 모은 사람들에 대해 매우 “관대해졌다”고 느꼈다고 말한다. “신 경제”에서는 부자가 되는 것이 전부였다. 새로운 부자들은 그들이 가진 것을 점점 늘려갔다. 부자들이 더 부유해지도록 세금은 줄었으며, 파이를 더 공정하게 나누기 위한 노력은 사라졌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1970년대 미국 CEO의 세전수익은 당시 노동자들의 평균 수익보다 30배 많았다. 오늘날은 263배 많다. 1970년대 영국 최고 CEO들의 수당을 제외한 기본금은 노동자들보다 47배 많았다. 2010년에는 81배 많다.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상위 20% 부자의 세후소득은 하위 20%보다 5배 빠르게 증가했다. 영국에서는 4배 빠르게 증가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평균 소득과 중위 소득 사이의 차이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영국과 미국에서 평균 소득 이하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 국가도 있겠지만, 전 세계적으로 지난 30~40년 동안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1980년 이후 한 국가 내에서의 불평등은 물론이며 국가 간 불평등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1990년대 후반 들어서는 불평등 정도가 횡보하다가 2000년 이후에는 다시 약화되었다. 개발도상국이 가속화되면서 선진국의 성장을 따라잡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심화는 흔들리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경쟁 시장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최고 CEO들은 그들이 고용한 노동자들보다 미국 경제에 263배 더 많은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도 정부와 노동조합에 의해 인위적으로 경제적 격차가 줄어든 덕분에 예전보다 더 좋아졌다고 주장한다. 더 빠르게 트리클 다운 하는 부를 갖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 한계세율을 깎는 것뿐이다. 아니면 가난한 이들의 인적 자본을 향상시켜서 그들의 고용주에게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 주도록 해야 한다.

경제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은 소득 피라미드의 상위에 있는 이들에게는 매력적인 계산 방법이다. 하지만 여럿이 협동하는 생산활동 속에서 서로 다른 개인들의 한계 생산을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최고 급여는 그저 유사한 직업의 다른 최고급여와 비교하여 결정될 뿐이다.

과거에는 공정하고 합리적이라고 여겨지는 내용을 바탕으로 임금 격차가 결정되었다. 일에 필요한 지식, 기술, 책임감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더 높은 급여를 받았다.

그리고 최고와 최하 사이의 격차는 일정한 한계 내에서 유지된다. 상위 기업의 월급이 평균 임금보다 20~30배 이상 많은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사이에 임금 격차가 그리 크게 나지 않았다. 의사나 변호사의 소득은 제조업 노동자보다 5배 정도 많았을 뿐이다. 오늘 날처럼 10배 이상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더 넓은 사회적 맥락에서 인간 활동의 가치에 대해 계산하는 상식적이고 비경제적인 방식이 깨지면서, 오늘날과 같이 임금을 계산하는 잘못된 방식이 등장했다.

가격으로부터 가치를 구별하는데 실패하여 만들어진 이상한 결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소득을 올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경제적 성장을 추구하는 것뿐이다. 가난한 국가에서는 이것이 타당할 수 있다. 나눌 만한 충분한 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진국에서 전체의 번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 성장에만 집중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소득을 1% 올려주려면 경제는 3%씩 증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다수 일반 대중의 인적 자본이 막대한 부, 유리한 가족 환경과 인맥 등에 의해 더 많은 교육적 혜택을 얻는 소수보다 빠르게 증가하는 방법은 없다. 이런 환경에서 더 광범위한 소비의 기반을 얻기 위한 안전한 길이 바로 재분배이다. 또한 재분배 자체가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 준다.

소득 재분배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는 부자, 더 부자, 슈퍼 부자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부를 얻는 식으로 진행되는 끝없는 경제적 성장의 반증이다. 이는 도덕적으로도 잘못이며, 실질적으로도 좋지 않다. 도덕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좋은 삶이란 저멀리에 있어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실질적으로는 민주주의가 궁극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사회적 결합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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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07 / 20 정태인/새사연 원장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20)

보고서 원문을 보시려면 위의 제목을 눌러주시면 됩니다.

 

이 글은 새사연의 정태인 원장이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진행한 ‘정태인의 경제학 과외 2부 : 사회경제, 공공경제, 생태경제’ 강연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생태문제는 전형적인 공유자원의 비극을 안고 있다. 또한 집단행동의 딜레마가 작용한다. 이는 집단 공통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를 해결하는데 개인은 나서지 않는 상황을 말한다. 보통 나 혼자 에너지 절약이나 환경 보호에 나서보았자 변하는 것이 많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한다.

 

생태문제를 포용하지 못하는 경제학

우선 기존의 경제학이 생태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마르크스 경제학이다.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라고 하는 사적유물론의 기본이다. 생산력이라는 것은 요새 경제학에서 얘기하듯이 함수로 정확하게 정의되지는 않았지만, 기술적 측면과 물적 측면이 강하다. 생산관계는 사회적 관계이다. 물적 관계인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인 생산관계는 언젠가는 충돌한다. 일본 사람들이 마르크스경제학을 도입하면서 흔히 했던 비유가 사람의 몸과 옷이었다. 몸이 커버리면 옷이 안 맞게 되어 갈아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생산력이 커지면 생산관계가 바뀌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생산이 재생산되면, 그것을 생산할 때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인 생산관계도 재생산되고 그 둘이 부딪히면 혁명이 도래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생산관계가 제약조건이 된다.

그러나 생태문제, 환경문제는 단순히 생산관계의 한계를 넘는 수준이 아니다. 아예 자연의 한계를 넘어서는 문제이다. 생산력의 과도한 발달로 자연자체가 붕괴하는 것이다. 때문에 마르크스의 사고 속에서는 생태문제를 설명할 길이 없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 중에서도 생태문제는 자본의 탐욕 때문에 발생한다는 속류적인 해석을 많이 하기도 하고, 마르크스 자본론의 구절을 이용한 생태마르크스주의가 존재한다. 하지만 마르크스 자체로는 생태문제를 다룰 수 있는 틀은 없다. 사실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는 자연 자체가 문제가 되던 시대는 아니었다.

마르크스 이전에 자연문제를 다룬 사람으로는 인구론을 이야기한 맬서스(Malthus)가 있다. 맬서스는 토지는 한계가 있지만 인구는 계속 늘어나기 때문에 위기가 온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전쟁을 하거나 위생상태를 개선하지 않고 열악한 채로 두어서 인구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으로서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당시 지식인들은 이에 환호했다. 하지만 맬서스의 우울한 예언은 붕괴했다. 맬서스의 인구론을 돌파한 것은 기술, 결국 자본이었다. 자본이 맬서스의 우울한 예언을 극복했다는 사실은 경제학자들의 머리속에 깊이 박혀있다. 따라서 경제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자연의 한계를 믿지 않는다. 계속해서 기술적 발전이 진행되면 한계를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두 번째는 케인즈 경제학이다. 케인즈는 <우리 손자들의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소책자를 낸 적이 있는데, 우리 손자 세대는 일주일에 15시간만 일해도 살 수 있을 것이므로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가 중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케인즈가 1946년에 죽었으니, 이미 케인즈의 손자 시대는 도래했지만 지금 우리의 삶과는 매우 다른 상상이었다. 어쨌든 케인즈는 미래에는 생산력이 발전해서 노동시간을 줄어들 것이가고 보았다. 단 하나 총수요 감소가 가장 큰 문제로 남을 것인데 이는 국가가 나서서 거시경제정책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케인즈가 우려했던 총수요의 문제는 지금도 큰 과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그와 함께 환경이라는 새로운 문제도 등장했다.


 

생태문제도 외부성의 하나로 취급

시장만능주의 신자유주의의 해결책은 간단하면서도 최악이다. 시장에 맡기면 된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머리속에 들어 있는 것은 애로우의 일반균형이다. 자연자원이 희소해지면, 가격이 올라가고, 그러면 소비는 줄고 생산은 늘어나서 다시 균형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이 맞을 때도 있다. 실제 70년대 석유파동이 생겼을 때 유가가 상승하자 에너지 절약 기술이 많이 등장했고, 경차가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기술적 발전을 통해 위기가 어느 정도 극복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시장을 통한 해결이다. 더 극단적인 방법은 아예 자연자원을 거래하는 시장을 만드는 것이다. 물과 공기는 공짜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재(free good)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물도 다 판매하고 있다. 공기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 아니, 공기도 판매상품으로 만들어 환경문제를 해결하자고 할지도 모른다. 이 경우 가격을 지불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자연조차 제공되지 않는 심각한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주류경제학에서 환경문제는 외부성의 개념으로 다루어진다. 시장가격에 반영되지 않는 것, 시장 밖에 있는 것이 외부성이다. 외부성을 해결하는 대표적 해법은 피구세이다. 공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만큼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정확한 공해의 양,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공해의 양, 공해로 인한 피해의 정도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환경문제가 가져올 피해와 비용은 측정할 수 없다. 지구온난화가 얼마만큼의 비용을 가져올지 아무도 측정할 수 없다.

경제학에서는 비용편익분석을 자주 사용한다. 어떤 일을 진행할 때 비용과 편익을 계산하여 적절한 실행 수준을 정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잘못된 비용편익분석은 인천공항철도이다. 비용은 건설비가 대부분이니 측정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편익은 예상 승객수이므로 측정이 어렵다. 초기에 승객을 100명이라고 예상하고 건설했다면, 실제로는 9명 밖에 이용하지 않았다. 4대강 건설에 대한 비용편익분석은 어떠할까? 이는 인천공항철도보다 더 어렵다. 측정하기 어려운 환경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시장실패론, 정의론, 엔트로피 이론의 결합

앞서 공공경제는 시장실패론에 정의론이 결합되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생태경제는 역시 시장실패론에 정의론이 결합되는데, 특히 세대간 정의가 추가된다. 환경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세대와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 동시대를 살고 있는 노인과 아동 세대간의 정의라면 민주주의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민주주의 중에서도 단순히 투표라는 절차를 통해서만 해결한다면 투표권을 가지지 못한 아동 세대가 불리하다는 점은 사실이지만, 공동체 내에서 충분한 토론을 진행하는 숙의민주주의를 통한다면 아동세대까지 고려한 적절한 자원의 배분이 가능하다. 그런데 미래세대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익을 대변할 이도 없다. 따라서 투표든 토론이든 진행할 수가 없다. 부모가 제 자식을 사랑하고, 제 손주를 사랑한다 해도 아주 먼 미래의 후손들까지 완벽히 고려할 수는 없다. 어떻게 세대간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 이것이 생태경제를 논할 때 등장하는 큰 문제 중 하나이다.

생태문제를 다룰 때는 세대간 정의를 포함한 정의론에 이어 또 한 가지가 추가되는데 바로 엔트로피 이론이다. 생태문제란 자연의 한계에 봉착하여 발생하는 문제라고 했다. 따라서 열역학을 통해 물질의 흐름을 다루는 엔트로피 이론이 추가된다.

이를 경제학의 생산함수에 반영한 이가 제오르제스쿠 로에겐(Georgeseu Rogen)이며 저서로는 <엔트로피 법칙과 경제 과정>이 있다. 경제학의 생산함수는 간단한다. 노동(L)과 자본(K)을 투입해서 무언가를 생산해낸다.  Y=f(K, L)

제오르제스쿠는 여기에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열역학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점을 추가한다.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열은 한 방향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즉, 뜨거운 것은 차가워지지만 차가운 것이 뜨거워지지는 않는다. 투입물로 노동(L), 자본(K)과 함께 자연자원(R)을 집어 넣는다. 산출물로는 생산물(Y)과 함께 쓰레기(W)도 나온다고 보았다. 그래야 에너지는 보존된다는 열역학 법칙을 만족하기 때문이다. Y+W=f(K, L, R)


 

기술과 자본이 자연을 대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경제시스템은 중요한 두 가지 흐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생산과 소비를 통해 가격이 재생산되는 화폐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경제활동자체의 기반으로 생태계에서 경제계로 투입되어 물질이 재생산되는 엔트로피의 흐름이다. 그런데 주류경제학은 전자만 주목하고 후자는 무시하고 있다. 이를 두고 생태학자 댈리는(Daly)는 주류경제학이 생물체의 신진대사과정을 연구한다고 하면서 혈액순환과 같은 순환기관만 연구하고 외부환경과 연결되는 투입과 배설에 해당하는 소화기관에 대한 연구는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들의 대답은 맬서스의 우려를 극복한 기술, 자본으로 돌아간다. 생산요소 간에는 대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자연자원을 자본으로 대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토지는 비옥하지 못해도 농기구나 농약을 통해서 생산력을 높이는 경우이다. 이는 솔로우(Solow)와 스티글리츠(Stiglitz)가 제시한 것으로, 주류경제학의 환경문제 해결방법이다. 생산함수를 Y=f(L, K, R)로 하되 결국에는 최적화된 노동(L), 자본(K), 자연자원(R)의 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L)과 자본(K) 같은 다른 투입요소가 충분히 커지면 자연자원(R)의 최적량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지금까지의 기술진보는 이러한 설명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에 대해서 댈리(Daly)는 다시 비판한다. 첫째, 자연자원은 완벽하게 대체할 수 없다. 기술이나 자본으로 대체할 수 없는 자연자원이 존재한다. 공기와 같은 것이 그렇다. 이렇듯 자원 간의 대체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이 생태경제학(ecological economy)의 특징이다. 이를  강한지속가능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면 주류경제학의 한 분야인 환경경제학(biological economy)은 대체가능성, 약한지속가능성을 추구한다. 환경경제학에서 재생가능한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을 주장한다면, 생태경제학에서는 재생가능한 에너지도 실은 재생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재생가능한 에너지인 풍력 발전을 하기 위해 풍력발전소를 짓는 과정에서 또 많은 재생불가능한 자본과 자원이 투입된다는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의하면 그 어떤 것도 완벽히 재생가능하지 않다.


 

미래세대를 얼마나 아끼는가? 할인율 논쟁

대체가능성 여부와 함께 주류경제학에서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은 할인율이다. 생태경제의 중요 개념 중 하나로 지속가능성이 있다. 이는 UN의 환경과 발전에 관한 세계위원회(WECD: 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에서 1987년 발표한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라는 보고서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보고서는 당시 위원장이었던 노르에이의 여성 수상 브룬트란트(Brundtland)의 이름을 따서 브룬트란트 보고서라 불리기도 한다. 그리고 애로우는 이 보고서에 서술된 지속가능성을 구할 수 있는 수식을 만든다. t 시점에서 현재세대의 효용과 할인율을 적용한 미래세대의 효용을 구하여 그 사회가 누릴 수 있는 총효용을 구하는 수식이다. 효용은 소비함수를 통해서 구했다. 할인율이란 쉽게 말해 미래세대의 효용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느냐이다. 할인율이 작을수록 현재세대의 효용만큼 미래세대의 효용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할인율이 클수록 미래세대의 효용은 중요하지 않다.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의 할인율은 100%이다. 따라서 이 수식을 계산함에 있어서 과연 미래세대를 얼마나 고려해야 할 것인가라는 할인율의 크기가 매우 중요하다.

브룬트란트 보고서와 함께 생태경제학에서 또 하나 중요한 보고서로 꼽히는 것이 2007년에 나온 스턴보고서(Stern Review)이다. 2006년 영국 정부는 수석 경제학자 스턴에게 지구온난화에 대한 보고서를 부탁했다. 보고서에는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과학적 근거와 함께, 지금 당장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전 세계 국내총생산의 1%에 불과하지만 이를 방치할 경우 그 비용은 5~20%까지 증가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보고서에서도 위의 수식을 계산하는데, 할인율을 1.5%로 잡았다. 이는 매우 낮은 수치로 미래세대를 위해서 우리가 지금 당장 줄여야 할 소비의 양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학자들은 이 할인율을 놓고 논쟁하고 있다. 학자마다 그 수치가 매우 달라서 1.5%에서 90%까지 이른다.

경제학자들이 논하는 효용함수는 너무 매끄럽다. 그 매끄럽게 잘 닦인 세계 속에서 경제학자들은 할인율 구하기에 치중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거의 자연의 한계에 직면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식의 계산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예방우선의 원칙과 다중심적 접근

일단 지금 중요한 것은 예방우선의 원칙이다. 어차피 우리는 환경문제가 가져올 정확한 피해와 비용을 측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선 예방하는 것이 상책이다. 환경문제, 건강문제와 같이 인류의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일수록 이런 원칙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예방우선의 원칙과 반대되는 것이 사전증명의 원칙이다. 어떤 결정을 내렸을 때 문제가 발생할 것임을 증명해야만 그것이 결정과정에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FTA에 적용되고 있는데, 광우병 쇠고기 수입을 했을 때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인지를 증명해야만 그것을 규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다중심적 접근이다. 이는 공유자원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하여 200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오스트롬이 제시한 방법이다. 기후변화 같은 거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 세계가 힘을 모으는 것이다. 도쿄협약과 같은 것을 체결하고 모든 나라가 이를 준수하면 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지난한 토론과 협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전 세계적 협약이 체결될 때까지 두 손 놓고 앉아서 기다린다면 인류는 진짜 망한다. 개인, 가족, 학교, 마을, 도시, 국가, 세계로 이어지는 무수히 많은 층에서 저마다의 실천이 진행되어야 한다. 오히려 작은 단위일수록 실천이 쉽다. 그 실천에 의해서 상위단위가 기존의 정책을 바꿔나갈 수 있다.

* 정리 :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를 이것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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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2 / 01 / 19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세계 석학들의 기고 전문사이트인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에 실린 “긴축이 경제 성장을 촉진시킬까?(Does Austerity Promote Economic Growth?)” 라는 제목의 글을 요약 소개한다. 로버트 쉴러(Robert J. Shiller)는 예일대학교의 경제학 교수이며, 조지 애커로프(George Akerlof)와 함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 을 썼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정부의 재정위기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긴축재정을 펴야 한다는 주장과 경기침체기의 긴축재정은 소비와 투자를 줄여서 오히려 독이 될 뿐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아래 글은 이러한 논쟁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몇몇 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하고 있다. 그 시작은 '꿀벌의 우화'이다. 이 이야기는 사치와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찼지만 일자리가 넘쳐나고 풍요로웠던 가상의 꿀벌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간의 행동을 반성한 꿀벌들이 절약하고 검소하며 도덕적인 생활을 하게 되자 오히려 일자리가 줄어들어 결국 망했다는 내용이다. 유효수요의 창출이 중요하다는 케인즈의 주장과도 유사하다.

최근에는 IMF의 구하르도(Guajardo) 등의 학자들이 지난 30년 간 17개 국가를 관찰한 결과 정부의 긴축정책이 소비를 줄이고 경제를 침체시켰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긴축정쟁이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를 비판하는 주장도 소개된다. 하버드대학교의 알레시나(Alesina) 교수는 정부 적자가 감축된 후에 경제가 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주장한다. 캘리포니아대학교의 라메이(Ramey) 교수 역시 긴축정책이 경기침체를 가져온다는 주장은 잘못된 인과관계에 기반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긴축정책과 경기침체가 시기적으로 상관성이 있어 보이는 이유는 경기침체를 해소하기 위해 긴축정책을 사용하기 때문이지 긴축정책을 해서 경기침체가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은 무엇일까? 긴축정책은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될까, 그렇지 않을까? 쉴러 교수는 과학처럼 실험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완벽한 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유럽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의 긴축정책이 가져온 결과는 실망스러워 보인다고 덧붙였다.


긴축이 경제 성장을 촉진시킬까?(Does Austerity Promote Economic Growth?)

2012년 1월 18일
로버트 쉴러(Robert J. Shiller)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

네덜란드 출생의 영국 철학자이자 풍자 작가인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은 ‘꿀벌의 우화(Fable of the Bees)’ 라고도 불리는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Private Vices, Publick Benefits)’이라는 책에서, 번영하던 꿀벌 사회가 갑자기 모든 과잉 지출과 과잉 소비를 멈추고 절약의 미덕을 실천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리고 있다.

땅값과 집값이 떨어지고

눈부신 저택들은 그 담을
테베에서처럼 놀면서 쌓은 것인데
이제는 셋집으로 내놓게 생겼다.
...
집 짓는 일거리가 다 사라지고
기술자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
남아있는 놈들은 검소해져서
어떻게 쓰느냐보다는 어떻게 사느냐와 씨름한다.

이런 상황은 금융위기 이후 긴축정책을 도입한 많은 선진국들의 상황과 매우 비슷해보인다. 유럽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정부의 긴축정책과 개인의 소비 감소는 세계 경제의 침체를 심화시키는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긴축정책에 관해서 맨더빌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그의 글 만으로는 부족하다.

최근 하버드대학교의 경제학자 알베르토 알레시나(lberto Alesina)는 정부의 적자 감축 노력(지출 축소와 세금 인상)이 항상 부정적 효과를 가져오는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들을 정리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고 말했다. 정부의 적자가 급격히 감소한 후에 경제가 크게 성장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으며, 아마도 긴축정책은 경기 회복의 도화선이 되어 경제의 확실성을 높여주었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맨더빌이 제기했던 주장이 실제로 통계적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정부 적자 감축으로 인한 결과는 절대로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긴축정책이 경제 성장을 회복시킬 수 있는지 물어볼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인과관계가 뒤바뀌는 경우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앞으로의 경제 전망에서 경기가 과열되고 물가가 상승할 것이 우려되는 상황이라면, 세금 인상과 정부 지출 축소는 과열된 수요를 식히는 방안이 된다. 만약 정부가 부분적으로 경기 과열 현상을 막을 수 있다면, 긴축정책이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정부의 적자는 긴축정책이 아니라 경제 성장에 대한 주식 시장의 기대가 높아지면서 자본소득세 수입이 늘어나서 해결될 수도 있다. 정부 적자를 바라보는 방식이나 긴축정책이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 봐야 한다. 

최근 IMF의 자이메 구하르도(Jaime Guajardo), 다니엘 리(Daniel Leigh), 안드레아 페스카토리(Andrea Pescatori)는 지난 30년 간 17개 정부의 긴축정책을 연구했다. 그들의 접근법은 이전의 연구자들과 다른데, 공공부채에 주목하기보다는 정부의 의도나 관료들의 실제 발언에 주목했다. 그들은 예산 결정 연설문을 읽어보고, 경기 안정화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심지어 정부 당국자의 뉴스 인터뷰도 보았다. 그들은 정부가 세금 인상과 지출 감축을 시도한 경우만을 긴축정책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경기과열과 같이 단기적인 경제 상황에 대한 대책이 아니라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거시건전성 정책을 긴축정책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긴축정책이 소비를 줄이고 경제를 약화시킨다는 확실한 경향을 찾아냈다. 이 결과가 맞다면 오늘날의 정치가들에게는 확실한 경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대학교의 발레리 라메이(Valerie Ramey)는 이를 비판한다. 라메이의 주장에 의하면 구하르도 등의 주장은 인과관계가 뒤바뀐 것일 수 있다. 즉, 경제가 이미 부채로 인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부채를 줄이기 위해 긴축정책을 썼다는 것이다.

경제 상황이 안 좋을 때, 정부가 긴축 정책을 강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라메이의 비판에 대해 구하르도 등은 긴축정책을 시행할 당시에 시장이 인식하고 있는 정부 부채의 심각성을 고려하려고 시도했고, 역시 비슷한 결과를 얻었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라메이가 옳을 수도 있다. 정부의 지출 감축이나 세금 인상은 경제 상황이 악화된 후에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긴축정책을 판단하는 문제에 있어서 경제학자들은 완벽히 통제된 실험을 할 수 없다. 우울증 환자의 항우울제 복용에 관한 실험의 경우 비교대상이 되는 통제그룹과 실험그룹으로 나누어 여러차례 실험을 반복한다. 하지만 국가부채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하나도 없지는 않다. 사람들이 긴축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할 수 있는 이론은 존재하지 않으니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구하르도 등의 분석 결과에 의하면 정부가 긴축정책을 선택하는 경우는 대체로 이미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경제학자들이 완벽하게 해명할 수 있는 답을 얻으려면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정치가들은 이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우리가 내릴 수 있는 판단은 유럽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의 긴축정책이 실망스러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 글 앞부분에 삽입된 시 '투덜대는 꿀벌'의 번역은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꿀벌의 우화'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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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