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이슈 2008.07.05 00:23

꼬박 두 달을 채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재협상과 고시철회’ 그리고 ‘이명박 정권 퇴진’이라는 계속된 외침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한다. 이제 촛불을 거둘 때가 되었다고, 촛불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결국 촛불은 훅 불면 꺼지는 잠깐의 환상이었을까?

아니다. 분명 대한민국은 변했다.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여전히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변했다. 바로 2008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생각이란 나약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의 시작이기도 하다. 특히 그것이 한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수의 생각이라면, 그것은 한 사회의 상식이라 부를 수 있다. 상식은 사회구성원이라면 알아야 하는 기본지식이자 가치판단의 최저기준이다. 상식 이하의 행동, 상식적으로 어긋나는 행동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촛불이 꺼지지 않았던 지난 두 달, 대한민국에 새롭게 자리 잡은 상식을 살펴보자.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그래도 여전히 촛불이 이루어놓은 것이 없는지, 과연 촛불을 접어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첫째, 헌법 1조는 지켜져야 하며,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도 리콜해야 한다는 생각

초기 ‘재협상’으로 시작되었던 촛불집회는 시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명박 정권 퇴진’으로 확대되었다. 이전에도 ‘안단테’라는 아이디의 고등학생이 인터넷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 탄핵 요구 1천만 명 서명운동’을 제안하여 주목 받았으며, 국민주권수호연대와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등 다양한 곳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고 있다.

국민이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대한민국의 주인, 주권자로 인식했음을 뜻한다. 그렇기에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값싼 쇠고기를 먹게 해주겠다’는 말로 팔아버리고, 이에 반대하는 촛불을 좌경불순세력으로 몰아대는 대통령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1조의 내용을 담은 노래가 촛불집회의 대표곡이 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은 6월 9일부터 7월 4일까지 인터넷을 통해 ‘촛불혁명과 한국 민주주의’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총 400명이 설문에 참여했다. ‘국민이 스스로 통치한다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비추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그 원리가 구현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45.3%가 ‘그렇지 않다’, 43%가 ‘매우 그렇지 않다’고 응답하여 전체 88.3%가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또한 ‘촛불집회가 향후 우리나라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49%가 ‘정부의 정책에 대한 국민의 감시와 비판이 활발해질 것이다’, 36%가 자연스럽게 제도의 민주적 개선 요구로 모아질 것이다’라고 응답했다.


▲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 진행한 인터넷 설문조사 ‘촛불혁명과 한국민주주의’


이처럼 국민은 스스로를 주권자로 인식함과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건강과 직결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같은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국민이 아니었다. 국민의 뜻과 다른 정치를 하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없다. 촛불집회로 성숙된 국민의 주권 의식은 국민투표, 국민소환, 국민발안 등의 강화된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개선으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 ‘배운여자’와 ‘배운남자’는 더 이상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생각


▲ 인터넷 패션 카페 ‘소울 드레서’ 의 깃발과 회원들 ⓒ 시사인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오랜 기간 무관심과 냉소의 영역이며, 일부 정치인들의 몫이었다. ‘정치적인 것’이란 말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선거에서의 낮은 투표율을 보며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 ‘국민들이 보수화되었다’ 등의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10대 소녀들이 앞장서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 뿐 아니라 대운하, 민영화, 학교자율화를 비롯한 각종 정책에 관해 국민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현장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의 ‘아고라’다. 아고라에는 하루에도 십만 건 가까운 글이 올라온다. 그 중 대부분이 각종 정부 정책과 사회 문제에 관한 글이며, 정부의 논리와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100분 토론’ 역시 국민들의 관심에 부응해 많은 관심을 누리고 있다. 평일 심야에 진행되는 시사토론 프로그램이지만, 방송이 된 다음날이면 100분 토론에 출연했던 패널이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 오를 정도이다. 최근에는 다음의 아고라에서 ‘100분 토론 방영 시간을 앞당겨달라’는 청원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너... 배운여자인가?’ 라는 깃발을 들었던 인터넷 패션 카페 ‘소울 드레서’는 정치 사회 문제에 전혀 관심 없을 것만 같던 20~30대 여성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본디 패션 카페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를 비롯한 정치 사회 이야기가 더 많을 정도라고 한다. 이런 변화 때문에 촛불집회가 정치적이라서 불법이라거나 배후가 있다거나 등의 논리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셋째, 사실을 왜곡 보도하는 조중동, 언론으로서의 권위가 사라졌다는 생각

촛불집회와 함께 조중동 거부 운동 또한 진행되고 있다. 초기에는 촛불집회 현장에서 조중동 기자들의 취재를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조중동 절독 운동, 조중동 광고주 불매 운동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9일 6.10 국민대행진을 앞두고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조중동 구독거부 서명운동’을 진행했던 언론개혁시민연대는 당시 4000여명의 서명을 받았다. 또한 회원수 4만 8천여 명의 ‘언론소비자주권 국민캠페인’ 인터넷 카페는 조중동 절독과 광고불매, 집단 소송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1월부터 6월까지의 판매부수 현황 ⓒ 데일리 서프라이즈 재인용


한편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상대적으로 이익을 얻고 있다. 특히 5월 독자현황에서 한겨레는 5배, 경향신문은 15배 이상 늘어나는 성장세를 보였다. 언론사 인터넷 페이지뷰 수치에서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높은 상승을 보인 반면, 조중동은 수치가 떨어지거나 제자리 걸음에 머물고 있다.


▲ 다음 디렉토리 검색으로 본 한 주간의 페이지뷰 분석 결과, 경향신문과 한겨레가 약진을 보였다 ⓒ 오마이뉴스 기사 재인용


▲ 다음 디렉토리 검색으로 본 한 주간의 페이지뷰 분석 결과, 조중동은 쇠국기 국면이라는 폭발적 이슈에도 불구하고 수치가 떨어지거나 제자리 걸음을 보였다 ⓒ 오마이뉴스 기사 재인용

조중동의 친일 경력과 진실 왜곡 보도에 대한 비판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는 자신이 실제 겪은 촛불집회의 모습과 조중동에 보도되는 촛불집회의 모습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국민들이 체감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을 활용한 1인 미디어의 활약으로 많은 국민들이 기성언론에서 대안언론으로 관심을 옮기고 있는 것도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조중동이 이전에 누렸던 권위를 되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동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여전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넷째, ‘민영화’와 ‘자율화’는 생각만큼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

촛불집회의 또다른 의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 바로 민영화다. 민영화의 본질이란 결국 영리화임을 알리기 위해 진보진영은 꽤 오랜시간 노력해왔다. 이전까지 대체로 국민들은 공기업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민영화가 필요하며, 민영화를 반대하는 것은 공기업들이 제 밥그릇을 챙기는 것이라는 쌀쌀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요즘은 민영화라는 허울좋은 이름의 기만성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민영화 반대를 외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다.

민영화를 하면 국가가 책임져야 할 최소한의 의무마저 시장에 넘겨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부담해야 할 비용이 높아진다는 것이 가장 큰 반대 이유이다. 특히 의료나 수도, 전기 같이 생활에 꼭 필요한 분야에서의 민영화는 국민들에게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촛불소녀들을 거리로 나오게 만들었던 학교 자율화 조치 역시 교육이라는 기본권의 양극화를 불러온다는 이유에서 많은 반발을 샀다. 국민들이 정부 정책에 관심이 많아지고, 경제상황도 점점 어려워지면서 민영화와 자율화라는 허울좋은 이름에 가려진 본질이 드러나고 있다.

다섯째, 서로가 서로를 믿고 도울 수 있다는 생각

촛불집회에서는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도 일행이 된다. 힘들어하는 서로를 위해 누군가는 김밥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물을 나눠주고, 누군가는 공연을 한다. 환자가 생겼을 때도 의료진을 찾아 부르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한 목소리가 되어 의료진을 불러준다. 다른쪽에서 전경의 진압이 시작되었다거나 밀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도와주러 나선다. 시민들을 보호하겠다며 군복을 입고 나온 예비군들은 이미 촛불집회의 스타가 되었다.

집회 참가자들이 무엇인가 판단해야 할 문제가 생겼을 때 즉석에서 토론을 벌이는 모습 역시 그 누구보다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의 판단과 결정을 믿기 때문이다. 반대로 스스로가 판단력과 결정력을 갖고 있다고 자신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인터넷 공간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혼자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생겼거나 고민이 생겼다면, 아고라에 가서 도움을 청하면 된다. 아고라에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글 외에도 사소한 고민거리들까지 수많은 글이 올라온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들이 제시된다. 전문가가 따로 필요없는 셈이다.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촛불은 한국 사회를 바꿔갈 주체로 자신감 넘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국민들을 등장시켰다. 촛불은 국민들이 분명히 구별해야 할 적을 인식하도록 해주었다. 또한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사회에서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인정하고, 어떻게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촛불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을 새롭게 변화시켰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핵심조건을 마련했다. 한번 일어난 의식의 변화는 되돌리기 어렵다. 한마디로 국민들의 입맛이 높아진 것이고, 눈이 높아진 것이니 기대치를 채울 수 있는 사회적 변화가 반드시 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 국민들은 이미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을 경험해버렸기 때문에 앞으로도 촛불은 쉽게 꺼질 것 같지 않다.

설령 촛불을 꺼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혹은 정부의 강경진압으로 인해 촛불이 꺼지더라도 촛불이 거둔 성과가 없다고 허망해할 필요는 없다. 촛불이 만들어낸 한국사회의 새로운 상식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이 후퇴하지 않도록 지켜간다면, 언젠가는 그날의 촛불 덕분에 우리가 새로운 사회를 열 수 있었다고 말할 날이 올 것이다.

이수연 | 새사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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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이슈 2008.07.04 14:21

이제 막 취임 100일을 넘긴 이명박 정부의 쇠고기 수입 강행 그리고 이에 항의하며 촛불집회를 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민주주의의 문제를 돌아보게 된다. 마침 읽게 된 「주권혁명」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짚어 보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위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 나가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보는 기회를 주었다.

이 책은 민주주의란 ‘어떻게 지배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지배하느냐’의 문제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1원 1표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1인 1표의 원리를 어떻게 실현시켜 나가야하는가라는 구체적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주권 혁명’을 통해 ‘민주 경제론’과 ‘통일 민족 경제’를 이루어나갈 것을 주장한다.

민주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를, 다시 자본주의를 통해 민주주의를

대부분 민주주의를 다룬 책들과 이 책의 가장 큰 차이점은 민주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를 살피고 자본주의를 통해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주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경제 상황을 통하여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우리 사회의 토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정치와 경제가 아니라 정치 경제인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는 경제 생활과 정치 생활이 분리되어 서술되어 있다. 다른 모든 영역에서는 시민들의 합의에 의한 합리적 해결을 강조하면서 유독 경제 영역만 효율성이 합리성이라고 가르친다. 자본의 민주주의 지배 현상이 현실적 문제로 드러나고 있는데도 양자는 별개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실존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신자유주의가 주도하는 세계 질서의 성립, 그리고 그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로 설명할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그 자리를 메운 신자유주의 속에서 민주주의는 부자들만의 부르조아 민주주의인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결국 주권자인 시민의 삶을 왜곡하면서 자본의 이해를 노골적으로 대변한다. ‘자본 독재’의 시대인 것이다. 진정한 주권자로 서기 위해서는 경제 논리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구조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주권 운동’과 ‘선거 혁명’이 필요한 이유다.

역사의 고비마다 우리 시민들은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2002년에는 미선이 효순이를 위한 촛불, 2004년에는 탄핵 반대 촛불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2008년, 다시 쇠고기 수입 반대에 수만 명이 촛불을 들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시민들은 주권 운동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했던 역사에서 이제 평범한 시민들이 자기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면서 더 나은 삶을 창조해 나가는 민주주의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저자가 지적한 바로 ‘슬기’에 바탕한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만약 그런 정치인이 없다면 당신이 출마 하십시오.”

처음 촛불을 밝힌 어린 학생들의 문제 제기 속에서 또한 선거 혁명도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왜 어른들이 무책임하게 대통령 뽑아놓고 모두가 고생하게 만드느냐는 아이들의 지적은 날카로우며 평범한 시민들에게 무한 책임을 통감하게 만든다. 이제 몇 년 후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할 우리 아이들에게는 오늘의 촛불 집회는 소중한 경험의 바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선거 혁명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불편한 진실」이라는 환경 관련 작품 속에서 인상적인 글귀를 보았다. 엔딩 장면에서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열거하면서 ‘환경을 생각하는 정치인에게 선거하기’라는 항목이 있었다. 그리고 뒤 이어 ‘만약 그런 정치인이 없다면 당신이 출마 하십시오’라는 행동 지침이 소개되었다. 아이들과 한참을 웃으며 봤지만 민주주의의 핵심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선거 혁명을 이루어나갈 보다 적극적 세력은 바로 주권자인 모든 시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주장은 단순하고 명확하지만 책을 쉽게 읽어나가기에는 조금 진지하고 철학적인 면도 있다. 하지만 다른 책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실존 사회주의에 대한 평가는 새롭고 흥미롭다. 우리 사회에 남겨진 과제를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민주주의라는 큰 틀에서 분석한 점도 많은 생각꺼리를 남긴다. 이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새롭게 창조해 나가길 바라는 평범한 시민들, 그리고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모든 선생님들이 한번쯤 반드시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최성은 | 대전성모여자고등학교 사회과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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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이슈 2008.07.01 13:02

‘설마’ 했다. 어청수 경찰청장이 80년대식 시위진압 방식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할 때도 그랬다. 80년대 전두환 정권 아래, 그 야만의 시절을 필자는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다. 시위대를 잡으러 강의실에 난입한 경찰에게 항의하다 따귀를 맞던 교수님을 기억한다. 시위 중 연행되면 이른바 닭장차에서 가해지던 집단적인 린치를 기억한다. 그리고 탁자를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던 공안검사의 기자회견에 대한 공포감은 내 세포 깊이 기억돼있다. 그 시절의 공포 정치를 기억하기에, 그 시절 시위진압 방식의 야만성을 기억하기에 어청수가 말해도 ‘설마’ 했다.

그러나 지난 28일로 어청수의 말은 현실로 나타났다. 시위의 불법적 진출을 막는 ‘최소한의 개입’이라는 공권력 행사의 원칙을 넘어섰다. 이른바 공격적인 시위진압과 원천봉쇄식 진압으로의 전환이다. 게다가 이미 폭력 진압이라는 야만성을 띠기 시작했다. 이는 결코 시위대에 의해 유발될 수 있는 수준의 폭력이 아니다. 상부 명령에 따른 작전의 결과인 것이다. 게다가 영장도 제시하지 않은 채 범국민대책위를 수색하는 등 공권력의 행태는 탈법ㆍ불법성을 띠기 시작하였다. 경찰의 물리력에 의해 정국을 유지해가는 이른바 ‘공안통치’가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야만적 ‘공안통치’의 명백한 징후들

이런

사태가 결코 어청수 청장 개인의 선택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너무도 명백하다. 조중동의 입을 맞춘 여론 조작용 기사들, 촛불 시위를 근절하겠다는 검찰총장의 발언, 철회되긴 했지만 예비군복을 입고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불법화하겠다는 국방부 발언, 유연한 대처를 주장하다 강경진압으로 돌아선 한나라당, 그리고 원래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것이라며 생뚱맞은 발언을 하는 라이스 국무장관까지 잘 짜인 각본에 따라 하나의 명령체계에 따라 진행되고 있는 폭압정치인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오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기대하듯 짓밟으면 촛불이 근절 될 것이라는 것은 단연코 오판이다. 봉쇄되고 밟히는 것은 다만 시청이라는 공간과 문화축제라는 시위의 형식뿐이다.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의 마음은 봉쇄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분노로 타오르며 기필코 민주주의를 이루겠다는 역사의식으로 충만해 갈 것이다. 이를 통해 오히려 촛불은 진화를 시작할 것이다. 당장에 게릴라 시위로 진화를 시작하지 않았는가? 게릴라 시위가 발전하면 투쟁하는 민초들은 투쟁의 승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할 것이다. 축제 참여야 개인 자격이면 충분하지만 80년대식 게릴라 투쟁은 조직적으로 연계될 때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촛불시위는 5년간 멈추지 않을 장기전화 되고 적절한 시점에 전면전으로 전환할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공안통치는 순수한 촛불을 더욱 조직적이고 강력한 시위대로 만들어내며 현 정부의 불행한 미래를 더욱 짙어지게 할 뿐이다.

이명박 정부에 ‘국민투표’를 요구하자

지금이라도 사태를 해결 할 방법은 있다. 대통령에게 주어진 고유권한인 헌법 72조에 충실하는 것이다. 헌법 72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외교 국방 통일 기타 국가안위에 관한 중요정책을 국민 투표에 붙일 수 있다.”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외교상 중요한 문제이며 국가 내부적으로는 정상적 통치행위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러 국가안위가 위험에 이른 중대 사안이다. 이런 문제를 대통령과 주변인들의 고집으로 풀 수는 없다. 비록 자신의 신념과 달라도 국민의 절대다수가 원한다면 그 뜻을 존중하는 것이 민주적 통치의 출발이다. 만일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가 자신들의 신념이 옳다고 믿는다면 헌법 72조에 기초하여 광우병 쇠고기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고 민의에 물으면 될 일이다. 이 길만이 번져가는 촛불을 끄고 국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더불어 촛불을 들었던 시위대 역시 냉철해져야 한다. 50여일이 넘도록 지속되었던 촛불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킨 역사적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대의정치의 한계를 국민들의 직접 참여를 통해 극복해가는 사례라는 측면에서 세계사적으로도 선도적이며 모범적인 사례다. 한국에서 발전하는 시민민주주의는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선진적 사례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촛불에 담긴 염원은 결코 꺼져서는 안 되며 목적한 바를 기필코 달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비폭력 평화시위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 이성을 잃은 공안통치에 맞서 자구적 폭력이 나타나는 현상은 십분 이해된다. 그러나 이는 공안통치자들이 의도하는 바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폭력과 불법을 이슈화하는 것은 촛불의 정치적 의도를 희석시키려는 저급한 통치술이며 촛불을 지지하는 민심을 분열시키고자 하는 의도다. 그러므로 경찰의 폭력에 자구적 폭력으로 응수하는 것은 청와대의 저급 통치술에 걸려드는 꼴이다. 공안통치의 의도를 파탄내고 촛불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무리 어려워도 비폭력 시위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또한 평화시위의 원칙은 시민 불복종운동으로 승화되어야한다. 촛불시위 중 등장한 조중동 불매운동, 조중동 광고기업 불매운동 등은 불복종 운동의 좋은 사례다. 이는 지난 87년 6월 항쟁 당시 등장했던 KBS시청료 납부 거부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광장으로 모여드는 촛불시위와 거리시위만으로는 촛불에 공감하는 대다수 국민의 참여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더욱이 공안통치를 일삼는 현실에서야 게릴라 시위로 번지고 있는 촛불집회에 나가기는 두렵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탄압으로 사라진 광장을 물리력으로 되찾으려 하기보다는 전 국민의 생활의 장을 광장으로 전환시키는 불복종운동을 확산시키는 평화시위 원칙을 지켜나가야만 촛불운동에 지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

‘1150만 국민청원운동’은 촛불정국의 유일한 해법

또한 정치공세를 남발하기 보다는 정확하게 쇠고기 문제를 현실적으로 풀어내는 데 힘을 집중해야 한다. 일부에서 터져 나오는 ‘이명박 정부 퇴진’ 구호는 국민 전체의 공감을 얻기는 쉽지 않다. 또한 일부에서 제기되는 이명박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 요구 역시 지난 참여정부 시절 위헌판결을 받은 바 있어 현실성 없는 정치공세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결국 현재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앞서 제기한대로 쇠고기 협상 수용과 전면 재협상이라는 두 가지 선택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길 뿐이다. 이는 촛불시위에 대한 찬반을 떠나 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해결법’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1150만 국민청원운동’을 제안한다. 본디 국민소환제나 국민청원 같은 직접민주제 성격의 발의는 전체 유권자의 4~5%정도의 요구로 실행되는 것이 관례다. 이에 비추어 보면 지난 6월 10일 전국적으로 100만 명 이상이 촛불을 든 것은 이미 국민직접청원의 규모를 보여 준 것이다. 그러나 1150만은 여기에 더해 또 다른 중대한 의미가 있다. 이명박 정부가 지난 대선에서 얻은 득표수가 1140만을 약간 상회하기 때문이다. 이명박을 지지한 득표수를 넘어서는 국민청원서를 제출해야만 이명박 정부에게 국민투표를 강제할 수 있을 것이다. 촛불 민심은 이 거대한 청원운동을 충분히 성공시킬 수 있다. 만일 1150만 청원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가 국민투표를 거부한다면 현 정부는 실질적으로 탄핵된 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

정부도 촛불 민심도 반복되는 충돌을 끝내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국민투표는 현행 헌법을 통해서 촛불정국을 풀어낼 유일한 해법이다.

새사연 김문주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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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주제별 이슈 2008.06.17 13:07

6월 10일 끝내 100만의 촛불이 바다를 이루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기에 이를 해석하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출되고 있다. 보수 신문조차 대의민주주의의 위기가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것을 보면 이는 이념지향을 떠난 공통의 인식인 듯하다. 직접민주제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라는 의견도 있고 새 시대 문화혁명의 시작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해석은 서로 다른 ‘촛불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도 아고라와 광장을 통해 촛불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지식인들의 논쟁 자체를 관념화시키고 있다. 촛불은 현재도 ‘진행형’이기에 단정적인 평가는 성급하다. 미래를 논하기 전에 촛불 정국이 만들고 있는 과거와의 단절점의 성격을 분명히 해야 한다.

왜 20대도 30대도 아닌 10대였을까

촛불정국을

관통하는 커다란 전환과 단절은 바로 지난 10년간 누적된 진보진영의 패배주의가 극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초기 촛불정국의 주인공인 중고생의 동력이 무엇인가 복기해 보자.

조중동이 말하는 천박한 배후론은 열외로 해도 다양한 의견이 제출되었다. 가장 크게 공감을 얻은 의견은 이명박식 교육개혁에 대한 중고생의 분노가 표출 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영어 몰입교육이니 0교시 수업이니 하는 속칭 교육자율화 조치로 인해 쌓인 분노가 미국산 쇠고기 문제로 터져 나왔다는 주장이다. ‘미친소 미친교육’이라는 구호가 나오는 것을 보면 타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불만의 크기로야 어디 중고생뿐이랴. 1,000만 원 등록금에 88만 원 세대요, 청년백수 준비생인 대학생들의 고통이 중고생 보다 작지 않을 것이다.

또 일부에서는 세대론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이른바 386세대의 자식들 세대가 바로 현재의 중고생들이며, 386세대의 비판적 사회의식이 자식들의 교육에 투영된 결과 현재의 20대와는 다른 사회비판적 의식의 10대가 형성되었다는 논리다. 이른바 386세대 계승론이다. 386세대가 이전 세대와 구별되는 뚜렷한 세대적 공감과 특성이 존재하기에 일견 설득력 있는 주장이긴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벌이지고 있는 커다란 흐름을 설명하기엔 너무도 단편적 분석이다.

사실 사회현상을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우매한 것이기는 하다. 모든 사회현상은 늘 종합적인 작용에 의해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대론적 측면에서 중고생들이 여타 세대와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현재 중고생들은 정치적 패배와 좌절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라는 점이다.

진보진영의 깊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촛불의 힘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386세대 전반에 개혁진영 패배라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실패는 진보를 바라는 국민들에게 진보정치의 좌절이라는 깊은 트라우마를 만들어냈다. 그 뿐인가. 한총련 운동의 실패는 현재의 20대들과 대학생들에게 진보적 운동 자체에 대한 깊은 불신의 트라우마를 남겼다. 이러한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는 한 신자유주의 모순이 아무리 깊어져가도 이들이 행동에 나서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재의 10대들은 이런 좌절과 패배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로지 옳고 그름의 구별이 존재하며 이러한 인식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전환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정치적 경험의 차이가 바로 청소년들을 즉각적 행동전으로 나서게 만든 주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중고생의 진출은 각계각층의 진출로 이어졌다. 20대 대학생들이 동맹휴업을 결의해내며 거리에서 주축을 이루기 시작했고 30~40대 넥타이 부대들이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녀노소 구별 없이 100만의 촛불이 물결을 이루며 지난 10년간 반복된 좌절과 분열, 패배의 상처를 씻어낸 것이다. 결국 중고생들의 진출은 곧 10대의 순수함으로 기성세대의 트라우마를 치유해낸 과정이었다.

촛불을 중심으로 복원돼가는 국민의 연대의식

촛불 정국을 관통하는 또 다른 단절은 고립과 개별화를 넘어서 국민적 연대의식이 복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산 쇠고기 운송을 거부하겠다는 화물연대의 선언에 네티즌들이 환호 했다. 촛불싸움에 가세한 금속노조의 홈페이지에는 지지 방문이 쇄도 했고 총파업을 준비하는 민주노총에도 국민들은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 있다.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국민들에게 지지 받기는 정말 오랜만’이라며 어색하게 웃는 노동운동가들의 얼굴에서 그들이 겪은 ‘고립의 고통’이라는 또 다른 트라우마를 읽을 수 있었다. 농번기라 농민들의 대규모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강기갑 의원에 연호하는 국민들의 지지는 곧 농민에게 보내는 강한 연대의식의 발로로 봐도 무방하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고립화 현상은 정부당국과 보수언론, 자본이 지난 10여 년간 끈질기고도 악의적으로 이들을 계급이기주의로 몰아붙인 결과다. 수입개방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투쟁을 두고 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농민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었다.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노사간의 갈등을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이기적 행동으로 매도하는 조중동을 향해서조차 침묵의 동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제 노동자 농민들의 고립은 끝나가고 있다. 90%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촛불행진을 통해 노동자, 농민은 함께 같은 길을 가는 ‘동료’라는 강한 연대의식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충격 후 스트레스 장애라 불리우는 트라우마는 정신적 장애다. 증세로는 늘 불안해하면서 주위를 살피는 과민반응을 보이며 사건이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 항상 주저하는 등의 비정상적 감정상태와 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지난 10년간 반복된 진보개혁진영의 패배주의 역시 트라우마 증세와 비슷한 양태를 보인다. 교류를 거부하는 고립운동, 과민반응의 일종으로 이해되는 과격한 운동, 비정상적 감정으로 이해되는 낙후한 문화정서 등이 그것이다.

이런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신적 충격을 대체할 수 있는 적절한 감정 재경험을 통해서 치유되는 것이 유력하다고 한다. 촛불의 대행진은 진보진영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감정 재경험의 장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패배와 좌절, 분열과 고립의 상처를 씻어내고 있는 촛불정국은 이제 전혀 다른 진보운동이 출현할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내고 있다.

끝으로 안타까운 일은 트라우마의 피해자는 적절한 감정의 재경험을 통해서 치유될 수 있지만 정작 트라우마를 만들어낸 가해자는 감정의 재경험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국민들의 가슴에 정치개혁의 실패라는 깊은 상처를 남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퇴진은 안 된다고 했으니 말이다. 또 대선 패배의 상처를 국민들에게 안긴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는 쇠고기 문제에 어정쩡 끼어들긴 했으나 한미FTA를 빨리 추진해야 한다고 반복 주장하고 있다. 이들 모두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스스로 감동하며 등장한 정치세력이다. 그러나 이제는 감정의 재경험으로는 치료가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촛불이 아무리 늘어도 이들을 치료하기는 어렵다. 차라리 의학의 힘을 빌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하다.

김문주 / 새사연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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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주제별 이슈 2008.06.05 19:20

굴욕적인 쇠고기 수입 협상으로 촉발된 촛불 정국이 한 달여 지속 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의 요구는 쇠고기 재협상에서 국민 주권 전반에 대한 요구로 발전하고 있다. 역사가 보여주는 바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강단이나 국회, 헌법재판소에서 성장하지 않았다. 촛불 정국에서 입증되듯이 국민의 주권의식과 민주주의 역량은 대개 거리에서 발생하고 성장해간다. 그런데 2008년 5, 6월을 관통하는 촛불 정국은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에 대한 국민의 안목을 높이는 계기로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여느 때보다 경제 이슈가 빈번히 등장하고 기지가 반짝인 촛불 정국의 경제학을 살펴보자.


18원의 비용과 유쾌, 상쾌한 효용


먼저 재치와

풍자가 넘치는 ‘18원 후원’하기다. 후원 대상은 한나라당의 심재철 의원. ‘광우병 쇠고기로 스테이크를 해먹어도 안전하다’는 발언이 네티즌의 공분을 자극했다.


항의 및 조롱의 뜻으로 심재철 의원에게 1원 또는 어감이 좋지 않은 18원을 정치자금으로 보내자는 의견이 나오고 네티즌의 반응은 신속했다. 게시판에는 1원이나 18원을 보낸 송금 내역이 갈무리 사진과 함께 연이어 올라왔다. 그런데 아무리 분노를 표시하는 일이라지만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18원도 쌓이다 보면 심 의원에게 경제적 이익이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한쪽에서 제기되었다. 경제적 효과에 갈등이 생기는 순간이다.


그러자 이 문제에 대한 기상천외한 해법이 역시 네티즌 사이에서 속출했다. 18원을 보내고 정치후원금 영수증 교부를 등기속달로 요구하자는 안도 그 가운데 하나다. 영수증 등기속달 발송 비용은 1,750원. 만일 대통령 탄핵에 서명한 130만 명이 모두 18원을 보낸다고 할 때, 의원 통장에 2,340만 원이라는 거액이 쌓이지만 영수증 교부를 위해 심 의원은 22억 7,500만 원을 지출해야 한다. 보내는 사람은 18원의 비용으로 유쾌, 상쾌, 통쾌한 편익을 얻고 심 의원측은 수입의 백곱절 비용을 지출하므로 경제적으로 큰 손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의 실현성 여부를 떠나서 18원 후원을 둘러싼 아기자기한 논쟁은 경제학에서 다루는 ‘효용’ 개념을 설명하는 사례로 교과서에 실려도 손색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사용가치’가 객관적 개념인데 비해 ‘효용가치’는 주관적이다. 평균재산이 35억 5,000만 원인 사상 최대의 부자 내각이나 지난 한 해 동안 부동산에서만 13억 원 이상 재산을 불린 자산가 심재철 의원에게 18원의 사용가치는 미미할 따름이다. 그러나 18원으로 후원자들이 누리는 효용은 결코 적지 않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한 개인의 정신건강을 위해 18원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 상당히 탁월한 경제적 선택이다.


수돗물 괴담과 민영화


다음으로 수돗물값 하루 14만 원론이다. 한 네티즌이 우리가 하루 사용하는 물의 양을 약 258리터로 계산했다. 이를 시중에서 파는 생수값 리터당 5백 원으로 환산하면 약 14만 원이다. 아주 간단한 아이디어지만 그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물론 과장되었다. 그러나 공공재인 수돗물을 이윤 추구가 우선인 사기업에 맡길 경우 벌어질 수도 있는 최악의 사태에 대한 경고라고 읽으면 이걸 괴담이니 뭐니 하면서 호들갑 떨 이유가 없다. 그러나 정부와 언론은 이를 즉각 괴담으로 몰아붙일 뿐 정작 본질인 물 사업 민영화의 위험성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합리적 설명을 좀처럼 내놓지 않는다.


수도 민영화 후 첫 4년 동안 물값이 매년 50%씩 상승한 영국이나 미국 기업 벡텔사가 물 공급권을 넘겨받은 뒤 수도요금이 최고 200%까지 오른 볼리비아, 민영화 이후 2년 만에 요금이 600% 인상되고 1,000만 명에게 수돗물 공급 중단 사태를 가져온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언론에 노출된 해외 사례들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는다.


정부가 정책이 아닌 셈법 차원으로 이 문제를 취급한다면, 좋다. 산수를 해보자. 정부의 ‘물산업 육성 5개년 세부 추진 계획’에 따르면 “현재 11조 원 정도인 국내 물산업 규모를 오는 2015년까지 20조 원 이상으로 키우고, 세계 10위권에 드는 기업을 2개 이상 육성한다”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보자. 지금 정부든 민간이든 물 아껴쓰기 캠페인이 한창이다. 물을 ‘물 쓰듯’하던 시대는 지났고 일인당 물 소비량은 점차 감소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인당 물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데 우리나라 인구가 불과 7년 사이에 갑자기 배로 늘어날 것도 아닌 이상 물 산업 규모를 두 배로 키우는 방법이 무엇일까? 지름길은 물값 인상밖에 없지 않은가. 괴담의 근원은 결국 정부가 아닌가?


국민은 경제정책을 논했는데 정부는 산수가 틀렸다며 괴담이라는 말만 한다. 쇠고기 사태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국민이 생명권과 검역주권, 경제주권을 이야기하는데 정부는 ‘광우병에 걸릴 확률은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좋다고 밖에 나갔다가 벼락을 맞을 확률보다 적다’고 과학적이지도 않은 통계나 읊어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참으로 두루 소통부재의 정부다.


대통령이 궁금해 한 촛불값


“1만 명의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고, 누가 주도했는지 보고하라"며 화를 냈다는 대통령의 귀국 일성은 국민들을 여러 가지로 허탈하게 했다. 그토록 촛불을 들어도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닫힌 대통령에 대한 좌절이 가장 먼저다. 부수적으로는 그래도 대기업 CEO를 지내 통이라도 클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니라는 실망감도 안겨주었다.


경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또 산수 차원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 ‘경제 대통령’이 자꾸 그렇게 만든다. 가게에서 한 개 1,000원 하는 초로 계산을 해보자. 촛불문화제가 시작된 5월 2일부터 대통령이 중국에서 돌아온 5월 31일까지 모두 30번의 집회가 있었다. 집회 참가자 수에 대해 주최측과 경찰의 추산이 매번 다르지만 정부가 산수만큼은 자신있어 하는 것 같으므로 경찰 집계를 기준 삼으면, 집회 참가자는 항상 1만 명 이하다. 그럼 최대 1만 명의 시민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촛불을 들었다고 해도 30회 X 1만 명 X 1,000원 = 3억 원이다. 이 3억 원의 출처가 그렇게도 궁금했을까.


아무리 경기가 어렵다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는 세계 13위 경제대국 아닌가. 평범한 서민들일지라도 자신의 의사 표현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지갑에서 1,000원 한 장 꺼내들 용의는 있다. 나도 함께 간 내 딸도 청계광장의 모금함에 촛불값을 냈다. 어떤 거대한 배후로부터 1,000원짜리 초를 받은 게 결코 아니다.


CEO출신 대통령과 장관의 경로 의존성


구태와 시대착오적인 시스템이 고쳐지지 않고 관성적으로 진행되는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이라고 한다. 이미 한번 익숙해진 시스템에 안주하기 때문에 잘못이 드러나도 개선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으며 똑같은 과오가 되풀이된다. 이번 사태를 두고 정운천 장관이나 이명박 대통령이나 똑같이 “국민 눈높이가 그렇게 높은 줄 미처 몰랐다”는 말을 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정 책임자가 국민 눈높이를 모른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이 바로 대통령과 현 정부의 경로 의존성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건설사와 정체가 아리송한 금융회사 사장 출신이고 정 장관은 농업 기업가로 이름을 알린 사람이다. CEO 시절에 가장 중요한 것은 수치로 환산되는 거래 이익이다. 이를 위한 약간의 편법과 위험 감수는 기업가적 모험심이라고 칭송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형성된 시스템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서도 경로 의존성에 의해 동일하게 국정에 적용된다는 게 문제다. 광우병은 ‘약간의 위험’일 뿐이고 정 불안하면 안 사먹으면 그만 아니냐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래서 국민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운하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도 수돗물 민영화도 산업은행 민영화도 다 추진되는 것이다.


앞으로 다른 문제가 또 터지면 돌아올 대답은 뻔하다. “국민이 그렇게 눈높이가 높았어?” 경로 의존성이니까.


촛불 정국에서 귀먹은 정부에 국민은 기어코 ‘대통령 하야, 탄핵’ 구호를 꺼내들었다.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이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을 그토록 가벼이 여긴다면 대한민국의 권력이 누구로부터 나오는지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제의 앞날을 이야기하자는데 자꾸 조그만 거래 이익과 셈법에 집착하는 경로 의존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이 또한 국민들이 직접 나서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촛불 정국은 그렇게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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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