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새사연 이사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탄핵 인용 결정을 내림으로써 촛불시민혁명이 마침내 승리의 마침표를 찍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직감하고 있듯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대변혁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마련된 것이다. 촛불시민혁명의 진정한 위대성은 바로 그 대변혁을 위한 에너지를 풍부하게 충전했다는 점이다.


국회가 박근혜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던 2016년 12월 9일 전후 상황을 비교해 보면 문제의 본질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12월 9일 이전 보수 세력은 박근혜를 탄핵시키더라도 보수 정권 재창출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자신했다. 국민적 지지를 받는 반기문이라는 카드가 있었고 ‘신보수연합’의 무대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제3지대가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조선일보> 등 보수 매체는 마치도 촛불시민혁명을 자신들이 주도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몰고 갔다. 박근혜 지지 세력은 극소수로 내몰린 채 숨을 죽여야 했다. 박근혜 반대 분위기가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박근혜가 자신의 공약대로 국민대통합에 기여했다는 역설적 표현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보수 정권 재창출의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대신 진보로의 정권 교체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반기문은 중도하차했고 제3지대는 신보수연합 무대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극우 보수 세력은 심각한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위기의식은 촛불집회에서 사드 배치 반대 등의 구호가 터져 나오면서 한층 격화되었다. 극우 보수 세력이 대거 태극기 집회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태극기 집회는 한 때 서울 숭례문에서 세종대로까지 가득 메울 정도로 기세를 올렸다.


<조선일보> 등 보수 매체는 국론이 두 동강 났다며 비명을 질렀다.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이 낮에는 반탄(탄핵반대), 밤에는 찬탄(탄핵 찬성)으로 갈라졌다고 묘사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독자층이 두 패로 갈라진 상태에서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근혜 탄핵을 둘러싸고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면 대체로 그 중간에 있던 세력 특히 보수 성향의 사람들은 심하게 동요를 일으키기 쉽다. 그런데 놀라운 현상이 발생했다. 박근혜 탄핵 지지 여론이 75퍼센트에서 80퍼센트 사이에서 큰 흔들림 없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결정이 내려지면서 탄핵 지지 여론은 더욱 높아졌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티에 따르면 86퍼센트가 헌재 결정에 대해 잘했다고 평가했으며, 92퍼센트가 승복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승복할 수 없다는 의견은 6퍼센트에 그쳤다.


어떻게 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두 측면을 동시에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촛불시민혁명은 참가자 수에서도 공전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광범위한 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는데서 특유의 능력을 발휘했다. 공감의 리더십에서 극치를 보여준 것이다.


반면 태극기 집회 측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거꾸로 태극기 집회가 보여준 극단적인 수구 색체는 보수 세력 내부에 심각한 정서적 균열을 일으켰다. 헌재 탄핵 결정 직후 군가 합창을 하고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모습은 그러한 균열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약속을 파기하면서까지 특검 조사를 시종 거부한 채 책임 떠넘기기 발언으로 일관한 박근혜의 모습은 극우 보수 세력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키웠다. 법리 논쟁은 제쳐 둔 채 시간끌기와 트집 잡기로 일관한 대통령 대리인단들의 모습 또한 그러한 반감을 키우는데 톡톡히 한 몫 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박근혜를 중심으로 한 극우 보수 세력은 진보 보수를 떠나 나머지 국민들이 정치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박영수 특검이 거침없는 공격적 수사로 일관하고 헌재가 전원일치로 박근혜 파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도 다분히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다.


보수가 다시 하나로 결집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반면 검증된 대로 박근혜 탄핵으로 뭉쳤던 국민들의 정치적 유대는 진보 보수의 경계선을 넘어 상당히 강력하게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향후 대변혁을 뒷받침할 가장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대변혁을 선도할 강력한 힘이 만들어졌다.


그간 청년세대는 외환위기 이후 실패와 좌절, 패배만을 반복해서 경험했다. 그들에게 승리의 경험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런 청년세대 입장에 입장에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청년세대의 세상을 향한 불신과 냉소를 극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청년세대에게 대한민국은 아무런 희망도 없는 지옥의 땅이었다. 청년세대에게 가장 호소력 있게 다가간 것은 이 나라가 하루 빨리 망하는 것뿐이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청년세대의 40퍼센트 이상이 우리 미래와 관련해 ‘붕괴 후 새로운 시작’을 선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촛불시민혁명은 청년세대의 의식에서 액면 그대로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 청년세대는 촛불시민혁명을 통해 그들의 삶에서 처음이자 역사에 기록될 의미심장한 승리를 경험했다. 이 경험은 매우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의 승리는 자신감을 회복한 노동자 대중의 광범위한 진출을 촉발시켰다. 그 유사한 현상이 청년세대에게 나타날 것으로 확신한다.


청년세대의 의식변화는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치적 관심이 비상하게 높아졌다. <중앙일보> 신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의 92퍼센트가 다가오는 대선에서 투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는 2016년 4.13총선 대의 투표율 52.7퍼센트에 비해 비겨할 수 없이 높은 수치이다. 열성적 투표 층인 5060세대보다도 10포인트나 높은 것이었다.


촛불시민혁명은 박근혜 탄핵 추진을 통해 정치 지형을 뒤바꾸어 놓았지만 그보다 더 큰 변화를 일으킬 거대한 에너지를 충전했다. 세상을 바꾸는 진검 승부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원문보기(클릭)


발행일: 2017.03.13

신고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박세길/ 새사연 이사


 


지나온 한국의 민주화투쟁 역사를 보면 일정한 법칙이 발견된다. 민주화 투쟁은 매 순간 일정한 한계를 드러냈으나 그 한계를 딛고 다시 한 걸음 전진해 온 역사였던 것이다. 한계야말로 전진의 동력이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4월 혁명은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승만 장기 독재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요즘 자주 나온 대통령 하야투쟁이 실질적인 성공을 거둔 사례였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박정희가 이끄는 5.16군사쿠데타를 맞이하면서 4월 혁명은 여실히 한계를 드러냈다. 5.16군사쿠데타 당시 그 어떤 저항도 없었다. 4월혁명 이후 거리를 가득 메웠던 시위대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결정적 요인은 군부의 총칼 앞에 목숨 걸 각오가 되어 않았다는 데 있었다. 조정래 소설 <한강>에는 4월 혁명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대화 내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이거 다 된 밥에 재 뿌린 건데, 이렇게 당하고 있어야만 되나? 한 번쯤 밀어붙여 봐야 되는 거 아냐?"

"목숨이 몇 갠데? 극형이라는 말 아직 안 들려?"

"괜히 똥폼 잡지 말어. 군대에서 말하는 시범쪼로 걸렸다간 국물도 없어. 저치들 지금 지네들 위신 세울려고 아무나 하나 걸려들기만 바라고 독이 올라 있는 것 몰라?"


4월 혁명의 한계를 딛고 군부의 총칼 앞에 목숨 걸고 투쟁할 수 있기까지 무려 19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역사를 한 단계 도약시킨 위대한 투쟁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만들어졌다. 1971년 대통령선거부터 본격화된 박정희 정권의 노골적인 호남 차별은 호남인들의 가슴 속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겨 놓았다. 한은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목숨 건 항쟁의지로 폭발했다.


5.18민주화운동에서 시민들의 결사 항전은 세 단계에 걸쳐 비상했다. 첫 번째 단계는 5월 20일부터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항쟁에 적극 가세한 것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5월 21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에 맞서 시민군을 결성한 것이었다. 세 단계는 5월 27일 계엄군의 최후 진압 작전에 맞서 시민군이 도청을 사수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복잡한 토론 과정 없이 본능적 대응으로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광주 시민은 극한 상황에서도 단 한순간 물러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군부 앞에 타협하고 굴복할 여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한 것이 바로 5․18광주정신이었다.


1980년 5월 광주는 군부의 총칼 앞에 굴복했던 4월 혁명의 한계를 과감히 뛰어넘었다. 5.18광주는 민주화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광주의 세례를 받은 학생운동을 필두로 민주화투쟁의 파노라마가 장엄하게 펼쳤다. 하지만 5.18광주에서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항쟁에 참여했던 광주 시민 자신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느꼈던 지점이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지역적 고립’이었다. 광주 시민들은 제발 다른 지역에서도 함께 일어나 주기를 갈망했으나 전혀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외로운 도시였다. 이 사실은 이후 무수히 많은 지역들로 하여금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 부채의식을 갚는 것은 군부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투쟁하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이를 입증할 기회가 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활화산처럼 폭발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부대를 투입해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만간 군부대가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자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시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먼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이 남달리 강했던 부산 시민들이 치고 나갔다. 일단의 학생들이 분신을 각오하고 가톨릭회관 옥상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가운데 수십만의 부산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투쟁의 여파는 곧바로 전국 각지로 펴져 나갔다. 상황은 더 이상 군부대 투입으로 제압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민주화투쟁이 승리한 것이다.


6월 민주항쟁은 군부에 맞서 목숨 걸고 투쟁했다는 점에서 5.18광주정신을 계승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지역적 고립이라는 5․18광주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수많은 지역이 투쟁에 동참했다. 천안은 3.1운동 이후 처음 시위를 경험했다. 충주는 단군 이래 처음이었다.


6월 민주항쟁은 민주화를 정착시키는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민주화투쟁 성과를 제도권에 온전히 안착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1987년 12월 직선제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결정적인 순간에 민주화투쟁을 이끌었던 김대중․김영삼 양김씨가 갈라서고 말았다. 결과는 군부 출신인 노태우에게 승리를 헌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태는 1990년 3당합당으로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보수 절대 우위 시대가 열렸다.


촛불시민혁명은 보수 세력을 붕괴시켰다. 보수의 정치적 구심인 새누리당도 두 조각내면서 코너로 몰아세웠다. 남은 과제는 성과를 제도권에 안착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다수 시민들이 그에 대한 긴장의 끈을 늦추고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 조만간 치러질 가능성이 큰 대선 결과를 통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존 정치판 흐름에 매몰되지 않고 냉철하게 대선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이다.


... 원문 보러 가기 

신고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박세길/ 새사연 이사


촛불시민혁명! 너도나도 혁명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혹자는 사회구조적 변동을 수반하지 않았다하여 신중한 태도를 보이지만 아직은 초기 단계인 만큼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될 것 같다. 무엇보다도 혁명의 가장 중요한 척도인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주체 세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촛불시민혁명의 주역은 그 어떤 조직 동원과 무관하게 오로지 개인의 결심에 따라 참여한 ‘자발적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참가자의 70~90퍼센트를 치지했으며 촛불시민혁명의 전 과정을 지배했다. 시민들은 특정 리더에 의존하지 않고도 (소설가 이문열이 북한의 아리랑 축전을 보는 것 같다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탄탄한 연대와 통일성을 과시했다. 더불어 비폭력 평화시위를 바탕으로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대의 기구를 자신들의 통제 아래로 끌어들이는 탁월한 전략 능력을 선보였다. 시민 스스로가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다. 이러한 리더십은 특정 개인이나 소수 그룹으로부터 나온다는 종전의 통념을 뒤집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촛불시민혁명은 가슴 벅찬 첫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앞날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탄핵 절차는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고, 정권교체가 온전하게 이루어질 지도 미지수이다. 게다가 야권 혹은 진보세력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상황을 맞이했다. 아직도 그들은 촛불시민혁명을 어떻게 발전시켜 가야 할 지 감을 못 잡고 있다. 그 반대편에서 보수 기득권 세력은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을 가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결국 온갖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은 고스란히 촛불시민혁명 주역들의 몫이 되고 있다. 과연 이들이 최우선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는 무엇일까?


프랑스대혁명으로 읽는 시민운동의 교훈


이 시점에서 근대 혁명의 빅뱅이라 불리는 프랑스대혁명을 되짚어보는 것이 도움 될 것 같다.프랑스대혁명은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이 압제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날부터 1814년 부르봉 왕조가 복귀한 순간까지 장장 25년에 걸쳐 진행된 거대한 드라마였다.


바스티유 감옥 점령과 함께 폭동이 프랑스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구체제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이 이루어졌다. 권력은 왕정과 시민들의 대표기관인 국민의회로 양분되었다. 신흥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던 국민의회를 앞세워 입헌군주제를 골간으로 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했다. 선거권은 400만 명의 부유한 남성에게만 부여되었다. 선거권을 갖지 못한 노동자와 가난한 민중 사이에서는 불만이 쌓였고, 급진적 정치 결사체인 자코뱅 클럽과 하층계급 출신 혁명가 단체인 상퀼로트를 중심으로 민중세력은 급속히 모여들었다.


한편 프랑스 반혁명 인사들의 거점이자 루이16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 손잡고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러자 파리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민중세력은 전면에 나서서 정세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프랑스대혁명은 제2의 혁명을 거치며 빠르게 왼쪽으로 이동해 갔다. 상황은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반혁명 세력을 생물학적으로 제거하려 한 공포정치가 실시되면서 극한으로 치달았다. 1793년 6월 10일부터 7월 27일까지 짧은 기간 동안 1천여 명 이상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공포정치는 시민들을 등 돌리게 했고 민중세력 내부의 분열을 초래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이 고안한 단두대에 의해 처형되는 것으로 공포정치는 막을 내렸다. 이후 프랑스대혁명은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혼미를 거듭했다.


상황을 수습한 인물은 다름 아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 평민 출신인 나폴레옹은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계속되는 혁명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정국의 주역으로 부상해 있었다. 나폴레옹은 일련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손에 넣었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의 통치 아래 정국은 안정되었고 경제는 활력을 되찾았다. 농노제 폐지 등 대혁명이 남긴 과제들은 법제화되었다.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법원, 학교 등에서 근대적 모델이 확립되었다.


군주제는 대혁명의 주요 청산 대상이었다. 기묘하게도 프랑스대혁명은 군주제의 손을 빌려 혁명 과업을 계승하는 모순된 상황을 보였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모순을 혁명전쟁의 지속적 승리를 통해 완화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이 모든 것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결국 나폴레옹은 밀려났고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조의 복귀와 함께 대혁명도 막을 내렸다.


프랑스대혁명은 극가 극을 오갔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민주공화제를 안착시키는데 이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대혁명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시피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프랑스대혁명의 가중 중요한 장면의 하나가 있다.


잃어버린 좌표를 찾아서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한 직후인 1789년 8월 26일 새로운 질서를 담은 ‘인권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선언)이 발표되었다. 인권선언은 1조에서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명시하는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천명함으로써 프랑스대혁명이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창출했다. 인권선언은 대혁명 주체의 뇌리에 아로새겨졌고 대혁명이 움켜쥐고 나아가야할 좌표로 자리 잡았다. 좌표가 뚜렷해짐으로써 대혁명은 일시적 후퇴나 좌초를 겪더라도 항해를 지속할 수가 있었다.


세상을 바꾼 혁명적 과정 앞에는 늘 좌표가 뚜렷했다. 그것들은 ‘민주화’, ‘자주화’, ‘사회화’ 등으로 집약되어 표현되어 왔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은 뒤이은 양김씨(김대중, 김영삼)의 분열과 군부정권의 연장, 3당 합당 등으로 극도로 뒤틀렸다. 그럼에도 민주화 정착이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되었던 것은 민주화라는 좌표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촛불시민혁명을 이끌어갈 좌표는 무엇인가? 누구도 분명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보편적 가치를 함축한 좌표가 뚜렷하지 않다! 이는 촛불시민혁명이 지도와 나침반 없이 항해하다 자칫 좌초될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바로 여기서 촛불시민혁명이 최우선적으로 풀어야할 숙제가 무엇인지가 밝혀진다. 아무리 둘러 봐도 답은 밖에서 찾을 수 없다. 답은 오직 촛불시민혁명 내부에 있다.


전통적 관점에서 볼 때 촛불시민혁명의 주역인 시민들은 제대로 조직돼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조직되지 않은 채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조직된 것도 아니었고 조직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시민들이 맺은 관계망은 전혀 새로운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을 담을 유일한 개념은 ‘생태계’이다.


생물학의 발전은 자연 생태계에 대한 전통적 관점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해 왔다. 그 결과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생태계의 주인은 생명체이다.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능동적 주체이다. 단적으로 우리가 늘 들이마시는 산소도 태초의 생명체인 시아노박테리아가 수십억 년에 걸쳐 만들어낸 것이다. 둘째 생명체는 저마다 세계에서 중심적 존재이며 위계질서는 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존재한다. 심지어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지구의 진정한 주인공은 식물이며 동물은 그들의 종 번식을 돕는 조연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셋째 공존공생과 연대협력이 생태계를 작동시키는 기본 원리이다. 이를 바탕으로 미생물과 식물, 초식동물 등 ‘약자’들은 개체수와 생존율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가 있었다.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장면인 세포 출현도 서로 대립하던 호기성 박테리아와 혐기성 박테리아가 미토콘드리아와 세포핵으로 공존공생의 길을 선택함에 따라 이루어졌다.


촛불시민혁명으로 되돌아보자. 촛불시민혁명의 주인은 사회적 생명체인 사람이다. 이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촛불시민혁명에서는 참가자의 재산을 따지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도 묻지 않았다. 나이를 따지는 것조차 금기시 되어 갔다. 오로지 사람이라는 가치 척도 하나로 만났다. 이는 촛불시민혁명이 낡은 질서의 대척점에 있는 해방공간임을 의미한다. 촛불시민혁명 참가자는 그 어떤 위계질서도 용납하지 않았다. 나를 대표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이었다. 저마다의 세계에서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SNS를 기반으로 강력하고 광범위한 연대협력을 추구했다. 신기하리만치 생태계의 세 가지 특징을 정확히 구현했던 것이다!


시민들은 광장을 ‘점령’(이는 앞으로 매우 고귀한 용어가 될 것이다.)했고 그 과정을 합법화시켰다. 촛불시민혁명이 거둔 첫 번째 승리다. 시민들은 광장을 플랫폼 삼아 강력한 생태계를 형성했다. 시민들은 빠르게 익숙해졌고 나아가 능숙해졌다. 시민들은 바로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꾸어 나갈 것이다. 시민들은 정당, 국회, 국가, 재벌 등 기존 영역들을 정치적 법리적으로 점령해 가면서 이들을 플랫폼으로 하는 생태계를 형성해 나갈 것이다. 그럼으로써 낡은 세계를 혁파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생태화’*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생태화! 몹시 낯설다. 하지만 혁명은 언제나 낯선 세계와 대면하기 마련이다. 혁명은 익숙한 세계와의 과감한 결별을 요구한다.


*생태화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과 과정은 『시간의 대화』(근간)으로 발표할 예정

신고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