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새사연 이사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탄핵 인용 결정을 내림으로써 촛불시민혁명이 마침내 승리의 마침표를 찍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직감하고 있듯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대변혁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마련된 것이다. 촛불시민혁명의 진정한 위대성은 바로 그 대변혁을 위한 에너지를 풍부하게 충전했다는 점이다.


국회가 박근혜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던 2016년 12월 9일 전후 상황을 비교해 보면 문제의 본질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12월 9일 이전 보수 세력은 박근혜를 탄핵시키더라도 보수 정권 재창출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자신했다. 국민적 지지를 받는 반기문이라는 카드가 있었고 ‘신보수연합’의 무대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제3지대가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조선일보> 등 보수 매체는 마치도 촛불시민혁명을 자신들이 주도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몰고 갔다. 박근혜 지지 세력은 극소수로 내몰린 채 숨을 죽여야 했다. 박근혜 반대 분위기가 워낙 압도적이다 보니 박근혜가 자신의 공약대로 국민대통합에 기여했다는 역설적 표현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보수 정권 재창출의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대신 진보로의 정권 교체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반기문은 중도하차했고 제3지대는 신보수연합 무대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극우 보수 세력은 심각한 위기의식에 사로잡혔다. 위기의식은 촛불집회에서 사드 배치 반대 등의 구호가 터져 나오면서 한층 격화되었다. 극우 보수 세력이 대거 태극기 집회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태극기 집회는 한 때 서울 숭례문에서 세종대로까지 가득 메울 정도로 기세를 올렸다.


<조선일보> 등 보수 매체는 국론이 두 동강 났다며 비명을 질렀다.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이 낮에는 반탄(탄핵반대), 밤에는 찬탄(탄핵 찬성)으로 갈라졌다고 묘사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독자층이 두 패로 갈라진 상태에서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박근혜 탄핵을 둘러싸고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라면 대체로 그 중간에 있던 세력 특히 보수 성향의 사람들은 심하게 동요를 일으키기 쉽다. 그런데 놀라운 현상이 발생했다. 박근혜 탄핵 지지 여론이 75퍼센트에서 80퍼센트 사이에서 큰 흔들림 없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결정이 내려지면서 탄핵 지지 여론은 더욱 높아졌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티에 따르면 86퍼센트가 헌재 결정에 대해 잘했다고 평가했으며, 92퍼센트가 승복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승복할 수 없다는 의견은 6퍼센트에 그쳤다.


어떻게 해서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두 측면을 동시에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촛불시민혁명은 참가자 수에서도 공전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광범위한 국민의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는데서 특유의 능력을 발휘했다. 공감의 리더십에서 극치를 보여준 것이다.


반면 태극기 집회 측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거꾸로 태극기 집회가 보여준 극단적인 수구 색체는 보수 세력 내부에 심각한 정서적 균열을 일으켰다. 헌재 탄핵 결정 직후 군가 합창을 하고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모습은 그러한 균열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약속을 파기하면서까지 특검 조사를 시종 거부한 채 책임 떠넘기기 발언으로 일관한 박근혜의 모습은 극우 보수 세력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키웠다. 법리 논쟁은 제쳐 둔 채 시간끌기와 트집 잡기로 일관한 대통령 대리인단들의 모습 또한 그러한 반감을 키우는데 톡톡히 한 몫 했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박근혜를 중심으로 한 극우 보수 세력은 진보 보수를 떠나 나머지 국민들이 정치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박영수 특검이 거침없는 공격적 수사로 일관하고 헌재가 전원일치로 박근혜 파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도 다분히 이러한 배경에서 가능했다.


보수가 다시 하나로 결집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반면 검증된 대로 박근혜 탄핵으로 뭉쳤던 국민들의 정치적 유대는 진보 보수의 경계선을 넘어 상당히 강력하게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향후 대변혁을 뒷받침할 가장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대변혁을 선도할 강력한 힘이 만들어졌다.


그간 청년세대는 외환위기 이후 실패와 좌절, 패배만을 반복해서 경험했다. 그들에게 승리의 경험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런 청년세대 입장에 입장에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청년세대의 세상을 향한 불신과 냉소를 극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청년세대에게 대한민국은 아무런 희망도 없는 지옥의 땅이었다. 청년세대에게 가장 호소력 있게 다가간 것은 이 나라가 하루 빨리 망하는 것뿐이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청년세대의 40퍼센트 이상이 우리 미래와 관련해 ‘붕괴 후 새로운 시작’을 선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촛불시민혁명은 청년세대의 의식에서 액면 그대로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 청년세대는 촛불시민혁명을 통해 그들의 삶에서 처음이자 역사에 기록될 의미심장한 승리를 경험했다. 이 경험은 매우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의 승리는 자신감을 회복한 노동자 대중의 광범위한 진출을 촉발시켰다. 그 유사한 현상이 청년세대에게 나타날 것으로 확신한다.


청년세대의 의식변화는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치적 관심이 비상하게 높아졌다. <중앙일보> 신년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20대의 92퍼센트가 다가오는 대선에서 투표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는 2016년 4.13총선 대의 투표율 52.7퍼센트에 비해 비겨할 수 없이 높은 수치이다. 열성적 투표 층인 5060세대보다도 10포인트나 높은 것이었다.


촛불시민혁명은 박근혜 탄핵 추진을 통해 정치 지형을 뒤바꾸어 놓았지만 그보다 더 큰 변화를 일으킬 거대한 에너지를 충전했다. 세상을 바꾸는 진검 승부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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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7.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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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길/ 새사연 이사


 


지나온 한국의 민주화투쟁 역사를 보면 일정한 법칙이 발견된다. 민주화 투쟁은 매 순간 일정한 한계를 드러냈으나 그 한계를 딛고 다시 한 걸음 전진해 온 역사였던 것이다. 한계야말로 전진의 동력이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4월 혁명은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승만 장기 독재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요즘 자주 나온 대통령 하야투쟁이 실질적인 성공을 거둔 사례였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박정희가 이끄는 5.16군사쿠데타를 맞이하면서 4월 혁명은 여실히 한계를 드러냈다. 5.16군사쿠데타 당시 그 어떤 저항도 없었다. 4월혁명 이후 거리를 가득 메웠던 시위대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결정적 요인은 군부의 총칼 앞에 목숨 걸 각오가 되어 않았다는 데 있었다. 조정래 소설 <한강>에는 4월 혁명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대화 내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이거 다 된 밥에 재 뿌린 건데, 이렇게 당하고 있어야만 되나? 한 번쯤 밀어붙여 봐야 되는 거 아냐?"

"목숨이 몇 갠데? 극형이라는 말 아직 안 들려?"

"괜히 똥폼 잡지 말어. 군대에서 말하는 시범쪼로 걸렸다간 국물도 없어. 저치들 지금 지네들 위신 세울려고 아무나 하나 걸려들기만 바라고 독이 올라 있는 것 몰라?"


4월 혁명의 한계를 딛고 군부의 총칼 앞에 목숨 걸고 투쟁할 수 있기까지 무려 19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역사를 한 단계 도약시킨 위대한 투쟁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만들어졌다. 1971년 대통령선거부터 본격화된 박정희 정권의 노골적인 호남 차별은 호남인들의 가슴 속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겨 놓았다. 한은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목숨 건 항쟁의지로 폭발했다.


5.18민주화운동에서 시민들의 결사 항전은 세 단계에 걸쳐 비상했다. 첫 번째 단계는 5월 20일부터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항쟁에 적극 가세한 것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5월 21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에 맞서 시민군을 결성한 것이었다. 세 단계는 5월 27일 계엄군의 최후 진압 작전에 맞서 시민군이 도청을 사수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복잡한 토론 과정 없이 본능적 대응으로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광주 시민은 극한 상황에서도 단 한순간 물러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군부 앞에 타협하고 굴복할 여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한 것이 바로 5․18광주정신이었다.


1980년 5월 광주는 군부의 총칼 앞에 굴복했던 4월 혁명의 한계를 과감히 뛰어넘었다. 5.18광주는 민주화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광주의 세례를 받은 학생운동을 필두로 민주화투쟁의 파노라마가 장엄하게 펼쳤다. 하지만 5.18광주에서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항쟁에 참여했던 광주 시민 자신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느꼈던 지점이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지역적 고립’이었다. 광주 시민들은 제발 다른 지역에서도 함께 일어나 주기를 갈망했으나 전혀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외로운 도시였다. 이 사실은 이후 무수히 많은 지역들로 하여금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 부채의식을 갚는 것은 군부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투쟁하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이를 입증할 기회가 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활화산처럼 폭발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부대를 투입해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만간 군부대가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자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시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먼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이 남달리 강했던 부산 시민들이 치고 나갔다. 일단의 학생들이 분신을 각오하고 가톨릭회관 옥상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가운데 수십만의 부산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투쟁의 여파는 곧바로 전국 각지로 펴져 나갔다. 상황은 더 이상 군부대 투입으로 제압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민주화투쟁이 승리한 것이다.


6월 민주항쟁은 군부에 맞서 목숨 걸고 투쟁했다는 점에서 5.18광주정신을 계승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지역적 고립이라는 5․18광주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수많은 지역이 투쟁에 동참했다. 천안은 3.1운동 이후 처음 시위를 경험했다. 충주는 단군 이래 처음이었다.


6월 민주항쟁은 민주화를 정착시키는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민주화투쟁 성과를 제도권에 온전히 안착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1987년 12월 직선제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결정적인 순간에 민주화투쟁을 이끌었던 김대중․김영삼 양김씨가 갈라서고 말았다. 결과는 군부 출신인 노태우에게 승리를 헌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태는 1990년 3당합당으로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보수 절대 우위 시대가 열렸다.


촛불시민혁명은 보수 세력을 붕괴시켰다. 보수의 정치적 구심인 새누리당도 두 조각내면서 코너로 몰아세웠다. 남은 과제는 성과를 제도권에 안착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다수 시민들이 그에 대한 긴장의 끈을 늦추고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 조만간 치러질 가능성이 큰 대선 결과를 통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존 정치판 흐름에 매몰되지 않고 냉철하게 대선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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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길/ 새사연 연구이사 


보수! 너무나 익숙한 용어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마치 자연 질서의 한 부분을 표현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던 세력의 호칭이다. 어느 학자는 보수는 인간의 욕망이기 때문에 어느 곳에든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맞다. 이런 식이라면 보수는 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보수가 오랫동안 우리 사회 다수를 차지하면서 큰 소리 쳐 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데가 있다. 보수의 역사에 아로새겨져 있는 대표적 단어들은 친일, 분단, 독재, 부패 등이다. 모두 부정적 이미지를 가득 담고 있다. 보수의 정당성을 뒷받침 해온 유일한 업적은 산업화 성공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엄밀하게 따지면 상당히 과장된 것이다. 한국의 산업화는 기본적으로 엄청난 교육열, 높은 저축률, 중소기업들의 왕성한 투자 열기 등을 원동력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힘이 없었다면 그 누가 나섰어도 산업화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보수의 위기1. ‘독재세력이라는 낙인


30년 전 보수 세력은 존폐 위기에 내몰린 적이 있었다. 민주화투쟁의 승리 여파로 청산되어야 할 독재 세력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당시 보수 세력은 숨을 죽인 채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보수 세력을 기사회생시킨 일이 벌어졌다. 민주화투쟁을 이끈 김대중․김영삼 양김씨가 갈라선 것이다.


양김씨의 분열은 1987년 대선에서 군부 출신 노태우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보수 세력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반전을 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어서 3당합당을 통한 민주자유당(이후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거쳐 새누리당에 이르렀음)이 출범했다. 보수 세력은 정치 영역에서 민주자유당을, 경제 영역에서 재벌을 구심으로 가까스로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3당합당 과정을 통해 보수는 이질적인 세력의 동맹을 구조화함으로써 그 외연을 크게 넓일 수 있었다. 동맹은 크게 세 가지였다, 먼저 과거 군부독재의 주요 기반이었던 대구경북 (TK)과 민주화투쟁의 기지였던 부산경남(PK)이 같은 ‘영남’이라는 카테고리로 지역동맹을 결성했다. 두 번째로 산업화에 몸 바쳤던 지금의 60대와 어느 정도 민주화투쟁의 세례를 받았던 50대가 나이 들면 보수적인 된다는 단순한 이유를 바탕으로 세대동맹을 결성했다. 마지막으로 박정희식 국가주의와 자유주의적 시장주의라는 이질적인 이념을 지닌 두 세력이 보수라는 끈 하나로 묶어 이념동맹을 형성했다.


보수의 위기2. 경제관리의 무능함


3대 동맹을 바탕으로 탄탄대로를 걷는가 싶었던 보수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이했다. 보수가 자랑하던 경제관리 능력에서 치명적 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그 결과 정권을 내주어야 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보수는 야인 생활을 해야 했다. 보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했다. 보수 세력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경제적 무능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문제는 대안이었다. 바로 그 때 이명박이 급속히 부각되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임 시절 추진한 청계천 복원공사와 대중교통 혁신으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보수 세력은 이명박의 두 가지 사업 성공을 통해 과거 박정희 시대를 관통했던 높은 효율성을 발견했다. 보수 세력은 이명박이 바로 그 효율성을 바탕을 한국 경제를 되살릴 것이라고 믿었다. 보수는 이명박을 선택했다. 경제 회생을 바라는 많은 국민들이 여기에 가세했다. 이명박은 2007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이명박은 보수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잘못 해석했다.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공사 성공에 대한 보수의 지지를 과거 1970년대 식 개발주의에 대한 지지로 착각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청계천 공사의 전국판이라고 할 한반도 대운하였다. 이명박은 한반도 대운하가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자 4대강 살리기로 슬쩍 우회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전면적인 혁신을 통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할 중대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를 주도해야할 정부는 4대강에서 삽질만 하느라 시간을 다 허비했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 회생에서 완전 실패했다. 보수는 실망하지 않고 히든카드를 꺼내들었다. 박정희 딸 박근혜였다. 보수는 박근혜를 통해 박정희 시대의 정신으로 경제를 되살릴 것이라 기대했다. 박근혜는 경제 회생의 비책으로 창조경제를 앞세웠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조차 창조경제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박근혜 정부가 방향을 못 잡고 헤매는 사이 한국 경제는 하릴 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경제 성적표는 앞선 김대중․노무현에 비해서도 형편없이 저조했다. 장하성 교수가 어느 신문 칼럼에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이명박․박근혜 정부 경제 성적표를 조사 발표한 적이 있는데 대략 이렇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누적 경제 성장률은 60퍼센트 정도 된다. 그에 반해 이명박 박근혜 정부 8년 동안 누적 경제 성장률은 그 절반도 안 되는 28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 1인당 국민총생산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김영삼 정부가 초래한 외환위기 여파로 1998년 4천 달러 이상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1만 1천 달러 늘어났다. 반면 이명박 박근혜 정부 8년 동안 1인당 국민총생산은 4100달러 증가하는데 그쳤다. 국민의 살림살이는 어떠한가? 가계소득은 김대중 정부 시절 1998년 외환위기로 크게 감소했지만 이후 4년 동안 19퍼센트 늘어났다. 노무현 정부 5년을 거치며 10퍼센트 증가했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8년 동안 가계소득은 누적 경제성장률의 3분의 1 수준인 10퍼센트 증가에 머물렀다.


이번에는 가계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보자. 해당 수치는 김대중 정부 마지막 해에는 97퍼센트,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에는 105퍼센트였다. 그러던 것이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에 125퍼센트로 크게 증가했고 박근혜 정부 4년째인 2016년에는 150퍼센트를 넘어서고 말았다. 액면 그대로 국민부채시대가 열린 것이다. 빡빡해진 것은 가계살림만이 아니었다. 나라살림 사정 또한 다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에 정부 재정은 6.8조 원 흑자였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8년을 거치며 매년 재정적자를 기록해 누적 재정적자가 무려 166조 원에 이르렀다.


보수 세력은 당면한 한국 경제의 위기를 타개할 비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동안 보수가 축적해온 노하우는 새로운 상황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음이 명확해졌다. 경제는 보수가 유능하다는 신화는 맥없이 깨져 나갔다. 보수 세력 내부에서 심각한 동요와 이탈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수의 위기3. 동맹의 균열


다급해진 박근혜 진영은 4.13총선을 앞두고 전가의 보도였던 좌우 대결 구도를 재현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한국사 교과서의 검인정을 폐지하고 국정교과서로 단일화시키는 역사전쟁 불을 지핀 것이다. 좌우 진영이 한국사 그중에서도 근현대사를 두고 첨예한 입장 대결을 보여 온 점을 주목한 것이다. 역사전쟁을 계기로 우파가 총결집할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이념동맹의 한 축을 형성했던 자유주의 세력이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이들의 눈에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개인의 선택권을 억압하는 획일화의 극치였던 것이다.


4.13총선은 새누리당이 압승할 것이라는 관측을 뒤엎고 새누리당의 참패로 나타났다. 4.13총선 결과는 세력을 떠받쳤던 각종 동맹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음을 드러냈다. 지역동맹의 한 축인 부산경남 지역과 세대동맹의 한 축인 50대에서도 이탈 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보수의 위기4. 국가의 사유화


심각한 균열로 인해 한없이 위태로워져 있던 보수 세력 위로 이른바 최순실 사태가 덮쳐 왔다.


최순실 사태는 보수 세력을 힘겹게 유지해 주던 정치적 끈을 가차 없이 절단시켜 버렸다. 최순실 사태는 최고 통치자의 무식과 무능, 무책임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의심을 받아 왔던 유능한 보수라는 신화는 완벽하게 깨져 나갔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은 국가라는 공적 기구가 어떻게 사유화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국가관을 중시했던 보수 진영의 가치 체계를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보수가 안겨다줄 수 있는 권위와 안정감마저도 환상에 불과했음에 드러났다.


보수 세력은 일제히 멘붕 상태에 빠졌다. 보수를 보는 사회적 시선도 싸늘해졌다. 스스로 보수라고 말했다가는 일거에 왕따 당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올해 초 한 일간지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유권자가 원하는 대통령 리더십은 진보가 64퍼센트, 보수가 26퍼센트인 것으로 나타났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비슷했던 수치가 확 달라진 것이다. 이 와중에서 추진된 박근혜 탄핵은 보수 세력을 산산 조각냈다. 박근혜 탄핵을 둘러싼 입장 차이로 보수가 사분오열된 것이다.


보수 세력은 붕괴되었다. 물론 일시적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쉽게 끝날 일도 아니다. 보수 세력 붕괴의 파장은 꾀 길게 이어질 것이다. 보수의 붕괴는 한국 정치 나아가 사회 전반을 혁신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기회이다. 과연 그 답은 무엇일까? 정치권부터 먼저 나서서 응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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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촛불시민혁명’은 ‘시민 주도의 새로운 시대
  • ‘광장’은 새로운 삶의 원천이 될 것이다
  • 시민의 힘으로 좌우 진영 논리를 허물었다.
  • 정치 지형의 거대한 지각변동이 예고된다.

 

2016년 11월 12일 100만명

2016년 11월 27일 190만명, 서울 광화문 광장에만 모인 시민의 수입니다.

하지만, 2016년 11월 29일에 발표한 3차 담화문에서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은 잘못한 것은 없으며, 문제의 해결 및 책임을 국회로 넘기며 자신이 살 궁리만을 모색했습니다.

모였습니다. 보여줬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더 방향을 잡아 나가야 합니다.

새사연 2016년 마지막 확신광장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저자인 새사연 박세길 이사와 함께 2016년 혁명의 과정 ‘촛불시민혁명’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미 위대한 시민의 힘은 기존의 좌우 진영 논리를 허물었습니다. 이는 중대한 내년 선거를 앞두고 정치 지형의 거대한 지각 변동이 있을 것임을 예고합니다. 그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한국에서 더 나아가, 미국의 정치혁명 버니샌더스를 통해서 올해의 혁명을 바탕으로 내년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아봅니다.

모두가 생활 정치인인 지금, 회원님과 생활인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요청드립니다.

 

■ 일시: 2016년 12월 8일 (목) 저녁 7시

■ 장소: 가톨릭청년회관 바실리오홀 (2호선 홍대입구역)

■ 구성 및 강연자

– 순실4년, 대한민국 시민혁명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박세길 이사)

– 미국대선 트럼프, 그리고 정치혁명 버니샌더스 (새사연 버니샌더스 좋아요 소모임)

– 토론 및 질의응답

■ 비용: 무료

■ 신청: https://goo.gl/forms/vZH9GH3SzoDMdrOY2

■ 문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02.322.4692 / edu@saesayon.org

■ 본 강연은 새사연 <청년정치> 소모임, <버니샌더스 좋아요> 소모임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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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10 / 24 김병권/새사연 부원장

대선 후보들은 과감히 ‘민영화를 전복’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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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 새사연은 9월에 일차로 대선후보들의 주요 정책을 비교 분석해 보았다. 물론 이들 후보들의 정책 평가 기준은 대선후보 16대 정책과제를 실은 책 『리셋 코리아』에 있다. 주요 7대 정책 평가를 한 내용은 테마북으로 엮었으니 참조 바란다. (http://bit.ly/UXuL8X )

새사연이 준비한 두 번째 대선정책 시리즈는 <대선 후보들이 '말하지 않는' 중요 정책>이다. 박근혜 후보, 문재인, 안철수 후보 등 유력 대선 후보들이 10월에 접어들면서 정책 공약들을 쏟아내고 있다. 올해 대선은 특히 중복되는 공약이 유독 많은 상황이어서 유사한 정책들이 반복적으로 되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가 되었던지, 후보들이나 캠프에서 거의 다루지 않거나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 정책들도 적지 않다. 새사연은 이런 '외면받는', 그러나 '중요한' 정책들을 발굴하여 다시 국민과 후보들에게 환기시킴으로써 해당 정책이 조명받도록 할 목적으로 두 번째 시리지를 기획하게 되었다. 새사연 회원들과 독자들의 성원을 바란다.

 

[본 문 ]

임기응변적 민영화 반대만 있을 뿐 전략이 없다.

우리 국민은 기억하고 있다. 5년 전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주고 나서 6개월도 안 되어, 이명박 대통령의 쇠고기 수입개방에 반대하는 촛불을 들어야 했던 기억을 하고 있다. 당시에 쇠고기 수입개방 반대와 함께 촛불시위 공간에서 가장 큰 공감이 있었던 의제는 수도, 전기, 가스 등 에너지나 국민 필수재 영역에 대한 민영화 반대였다. 촛불시위 이후 이명박 정부는 대대적인 민영화를 적어도 공공연하게 추진할 수는 없게 되었다. 물론 산업은행 민영화, 인천국제공항 민영화, 공적자금 투입 기업들 민영화 등 사실상 민영화는 계속 추진되었지만.

사실 지금 모든 대선 후보들이 반신자유주의자가 되어 ‘신자유주의 시장 만능사고와 시장의 실패’를 비판하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박근혜 후보조차도 대선후보 출마 선언문에서 “‘원칙을 잃은 자본주의’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면서 지금의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지 않는가? 박근혜 후보는 지금의 자본주의가 어떤 원칙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효율성과 수익성’의 이름으로 공공의 영역을 무리하게 시장으로 끌어들인 지점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근본적인 변화’(박근혜)를 추구하고, ‘시대의 교체’(문재인)를 해야 하며, ‘낡은 체제를 청산하고 미래 가치’(안철수)를 열기 위해서라도 신자유주의 핵심 정책인 ‘민영화 정책’에 대한 포괄적인 대안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세 후보들의 민영화에 대한 대안전략은 무엇인가? 불행한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국민들은 그 해답을 후보들에게서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사안 사안마다 민영화를 거부하는 발언들은 제법 있다. 박근혜 후보는 지난 봄에 KTX민영화 문제가 불거지자 그 결정을 차기 정부로 이월해야 한다고 살짝 책임을 피해간 적이 있다. 문재인 후보는 한국항공주산업(KAI)의 민영화 시도를 반대한다면서, 이 영역은 국가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장기적인 투자를 해야 할 사업이라고 적시하기도 했다. 의사출신인 안철수 후보는 영리 병원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개별적 사안의 민영화에 대한 호 불호는 있는데, 총체적인 전략과 기조가 잘 보이지를 않는다. 이 문제는 국지적 사안에 대한 임기응변적 대처로 끝날 문제가 결코 아니다. 본원적으로는 우리의 미래 사회경제 시스템이 과연 ‘시장의 틀 안에서 사적 기업들의 이윤경쟁 형태를 통해서만’ 작동하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시장의 문턱을 넘어 공공영역과 사회적 경제 영역까지를 포괄하는 다양한 소유와 경영, 서비스 형태를 추구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시장의 문턱을 넘어 ‘다양한 소유와 경영형태를 장려’하라.

새사연은 경제가 시장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점으로 인한 시장 실패를 바로 잡아 ‘공정한 시장’을 만드는 것으로 경제 민주화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진보는 시장의 제한을 넘어 보다 다양한 소유와 경영 방식으로 경제를 작동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며 특히, 고용 없는 성장 시대, 경제 위기의 시대에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정의로운 시장경제, 숙의 민주주의에 기초한 공공경제, 지역 공동체에 뿌리박은 사회적 경제가 함께 우리 국민경제 안에 어울릴 때 경제 민주주의에 가장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새사연(2012), 『리셋코리아』, 93~96쪽)

이를 위해서는 우선 공공재와 공공서비스, 사회서비스는 사적 이윤추구 기업이 아니라 공적인 기업이 책임을 지고 이윤의 원리 보다는 공적 서비스의 원리에 의해 운영해야 한다. 은행이 그렇다. 통신 산업과 석유 등 에너지 산업이 그렇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추진해온 광범한 민영화 사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함은 물론이다. 또한 협동조합과 같은 사회적 경제가 체계적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국가가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은 경제 민주화의 내용을 심화시키고 불황의 위기를 돌파하는데 상당히 의미 있는 전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전망과 비전을 가지고 과거의 민영화 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려는 의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특히 박근혜 후보의 모든 연설문과 정책 발표에는 민영화라는 단어 자체를 찾기가 쉽지 않다. 다만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는 최소한의 문제의식의 기초는 있어서 그나마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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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