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 02 / 06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새사연 2013년 회원 캠페인- “새사연과 함께하는 희망 북클럽”을 시작하면서

우려했던 신자유주의 보수정권의 집권 연장이 현실화되면서 우리 사회가 진보적 발전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힘들어 하는 다수 국민이 존재하는 한 변화에 대한 모색은 멈출 수 없으며 우리 사회의 진보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진보가 노력을 기울여온 보편 복지와 경제 민주화, 그리고 일자리를 의제로 하여 치러진 18대 대선임에도 진보가 패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수가 손쉽게 의제를 차용해도 아무런 차별화가 되지 않을 만큼 진보 정책의 폭과 깊이가 짧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진정 현실에서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의 삶과 생각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살아있는 진보 정책’을 모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평범한 생활인들과 손잡고 우리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추구해온 새사연은 진보 학습으로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할 것을 회원들과 시민들에게 제안합니다. 그 첫 출발점으로 새사연 연구원들이 각자 회원님들께 꼭 추천하고 싶은 책 한권씩을 선정하여 소개하고, 진보의 깊이를 위한 물음을 던지겠습니다.

아울러 이후에 회원님들이 추천하는 책, 새사연과 함께하는 독서 토론, 저자와의 대화 등을 다양하게 시도할 생각입니다. 회원님들의 관심과 참여 기대 하겠습니다. 

 

 

<새사연 희망 북클럽⑦>『우리는 왜 행복해지지 않는가』

-착한 경제학은 가능한가?-

 

추천도서 7

우리는 왜 행복해지지 않는가

(이정전, 2012, 토네이도)

대한민국 정규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았을 수요와 공급의 X 모양의 그래프. 우리가 공부하는 경제 교과서의 가장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그래프는 더 이상 우리의 삶을 나타내지 못한다. 이제 우리가 따져야 할 좌표는 수요와 공급을 넘어 선 관계와 미래, 그리고 환경과 행복이다.

이런 사실을 경제학의 변방에서 홀로 개혁의 깃발을 흔드는 독립투사가 아닌, 서울대 경제학과의 한 교수가 들려준다는 점에서 이제 대한민국 경제학의 큰 방향이 바뀌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기대 해 보며 우리는 왜 행복해지지 않는가를 추천한다.

 

곧 출간될 정태인 새사연 원장의 신간 <협동의 경제학>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경제학이 싫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경제학자들 역시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나는 젊은 사람들에게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한 이와는 결혼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요즘은 사위나 며느리를 고르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말을 한다. 단 전공 학점이 나쁜 경우는 괜찮을 수도 있으므로 성적증명서를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경제학자들은 어쩌다가 저런 평을 얻게 되었을까? 고등학교 시절 수능 선택과목으로 경제학을 선택했던 인연으로 어찌어찌 지금까지 경제학에 관심을 두고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매우 안타깝다.  

고등학교 때는 수요와 공급이 만나 한 점을 이루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그 사실 그렇게 매력적이었다. 칠판에 그려진 X자 모양의 그래프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되었다. 가격이 오를 때도, 생산량이 줄어들 때도 결국은 한 점으로 설명이 되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와서 몰랐던 진짜 현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니, 그래프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그리고 사실 공부보다는 다른 일들이 더 재미있었다). 그래프를 따르자면 실업이 발생하는 건 순전히 노동자들의 자발적 선택 때문이며, 세금을 부과하는 일은 사회적 손실을 발생시킬 뿐이었다. 또한 이기적 인간과 효율적 시장을 가정하는 탓에, 현실에서는 불법인 성 매매, 장기 매매, 마약 거래 등을 허용하는 것이 경제학적으로 적절하다는 결과에 이르기도 한다.  

물론 학문이란 것이 결국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때, 현실의 많은 부분은 생략되고 단순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오히려 현실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다. 진짜 답답한 것은 이론과 현실의 괴리와 그것을 연결시키는 방식에 관한 논의가 경제학 수업 시간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계적 금융위기 이후 주류경제학의 논리들이 무너지는 한편, 경제학에 철학과 윤리학을 접목시키려는 많은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런 것들은 대학 밖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소모임에서야 접할 수 있다. 강단에서 그래프와 수식을 넘어서, 경제학과 사회의 관계 그리고 경제학이 발전해온 역사나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말해주는 교수님은 안타깝게도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왜 행복해지지 않는가』가 반가웠던 첫 번째 이유는 경제학의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학 교수님이 직접 ‘실은 경제학에 이런 문제가 있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니 뭔지 모르게 위로가 되는 느낌이다. 저자 이정전 교수는 이전에도『시장은 정의로운가』, 『경제학을 리콜하라』 등의 저서를 통해 꾸준히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해왔다. 

저자는 서문에서 “경제학 교수들이 현실에 대해 강의실에서는 말해주지 않는 내용들을” 담았다고 밝히며, 우선 경제학 교과서에서 정의하는 시장과 현실의 시장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본다. 경제학에서 시장은 어떤 재화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도구이다. 이 때 그 사람이 재화를 필요로 하는 정도는 그가 지불하는 금액, 즉 가격으로 표현된다. 결국 시장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만 이야기된다. 돈이 없는 사람들의 수요는 시장에서 아예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은 시장의 근원적 한계이며, 모든 것을 시장의 방식으로 굴러가게 두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저자는 경제학에 대한 이런 비판적 관점을 정부, 부동산, 환경 등으로 확대시키며 현실의 다양한 사례들과 경제학 이론을 접목해서 설명한다. 특히 경제학이 비용편익분석을 통해서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실은 이 분석 방식이 얼마나 주관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새만금 간척사업의 효과를 계산할 때, 간척사업 후 생산되는 쌀의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측정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매우 달라질 수 있다. 쌀을 국제가격으로 계산하느냐, 국내가격으로 계산하느냐에 따라 3배 정도 차이가 나며 쌀을 단순 재화가 아니라 안보재로 상정할 경우 그 가치는 더 높아진다. 따라서 이런 식의 경제학적 손익 계산이 아닌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저자는 정치는 “사람들이 공익을 생각하면서 공적인 마음으로 행동하는 대표적인 영역”이며, “평등의 원칙”을 으뜸으로 삼는 영역으로 시장과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한편 이 책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으로 ‘행복’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에는 생소하지만 외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행복에 관한 경제학 연구들이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연구들에 의하면 행복의 가장 높은 영향을 주는 3가지 요인은 “가정의 화목, 좋은 인간관계, 보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소득 수준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력은 제한적인데, 평균적으로 소득 수준이 연간 1만 5000달러를 넘어가고 나면 소득증가가 행복지수 상승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행복의 역설’이라 한다. 우리나라도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었으니 이런 상태에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 또한 소득이 주는 만족감은 소득의 절대액수보다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점들을 종합하면 우리사회가 구성원의 행복을 위해서 나아가야 할 바는 더 높은 성장률, 더 많은 소득 수준이 아니다. 가정, 인간관계, 일을 통해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각종 자생적 공동체가 활성화되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타인과의 소득 수준 비교가 큰 영향을 미치므로, 사회구성원 사이의 소득 격차를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게는 <국부론>외에 또 다른 저서가 있다. <도덕감정론>이다. 이 책은 인간의 도덕심, 인간의 심리를 주제로 하는 책이다.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자이기 전에 철학자였다. 저자는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이 철저하게 인간의 일상행태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앞으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미래의 경제학의 아담 스미스의 정신을 온전히 살린 경제학이요, 철학이 앞에서 이끌고 심리학이 뒤에서 밀어주는 경제학이다.”고 말한다.  

이기심, 효율성, 경쟁, 성장만을 이야기하는 경제학이 이제는 좀 바뀔 수 있기를 바란다. 행동경제학에서 진행된 여러 실험들에 의하면 경제학 전공자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이기적이라고 한다. 신자유주의가 확산되었던 지난 30여 년 동안은 일반인들도 경제학 전공자만큼이나 경제학적 가치관들을 주입받았다. 이기심, 효율, 경쟁, 성장은 현실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하기에는 좋은 도구일 수 있지만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아니다. 이론과 현실의 괴뢰를 좁히고, 공동체와 미래세대까지 포괄하는 경제학으로 충분히 발전할 수 있다. 그런 문제제기들이 국내에서도 많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저자 이정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아이오와주립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메릴랜드대학 객원교수를 거쳐, 한국자원경제학회장, 한국 환경 경제 학회이사, 서울시 도시계획위원, 경실련환경개발센터 대표, 환경정의시민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장으로 재직했다. 현재 프레시안등에 행복경제학 및 세계 경제 위기, 부동산 정책, 환경정책 등을 망라한 대중적 글쓰기를 통해 활발한 기고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올해 정진기 언론문화상 경제경영 도서 대상을 수상했다.

* 출처: 알라딘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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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4정태인/새사연 원장

 

착한 경제학에서 정치는 매우 중요하다. 다소 뜬금없게 들리겠지만 ‘시장실패’라는 추상적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1950년대 초에 저 유명한 케네스 애로는 ‘일반균형의 존재’를 증명했다. 즉 이 세상 모든 시장을 동시에 균형상태로 만드는 가격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수학으로 입증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균형이론은 동시에 시장실패론의 출발점이었다. 이 균형의 존재조건인 완전경쟁, 완전정보 등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아름다운 세계도 그저 꿈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새뮤얼슨이나 애로 같은 학자들은 시장에서 아예 공급될 수 없는 공공재 이론이나 시장 메커니즘에 의존할 수는 있지만 수많은 문제를 발생시키는 의료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1950~1960년대 국가 개입의 미시경제학적 근거가 생긴 것이다.
 
그 반대 쪽에서는 시카고학파 중심의 경제학자들이 이런 국가 개입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데 몰두했다. 부캐넌의 ‘정부실패론’은 관료나 정치가 역시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정부에 모든 걸 맡기면 안 된다는 주장이며, ‘코즈 정리’는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도 시장실패(외부성)를 민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에 이용되었다(코즈 본인은 떨떠름해 했지만). 나아가서 이런 주장은 현실에서 실천됐는데 1980년대 이래의 민영화, 규제완화, 개방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착한 경제학은 이런 시장만능론을 근본부터 부정한다. 인간은 경제학이 가정하는 대로 이기적이지 않을 뿐더러 즉각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계산해낼 계산능력도 없으며, 시장 또한 대단히 느리고 곧잘 고장이 나는 기계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나아가서 우리는 시장실패론조차도 인식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로 시작하고, 경제학에는 ‘태초에 시장이 있었다’가 제일 먼저 나온다. 시장실패론은 우선 시장이 우리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되 그게 실패로 판명나는 경우에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프레임은 대단히 강력해서 민영화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 틀에서 얘기를 시작해야 했다. 예컨대 왜 의료는 시장에서 실패하는지, 농업을 시장에 맡기면 안 되는지부터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런 논의는 정교해 보이지만 갑갑하기 이를 데 없는 경제논리와 실증 싸움에 빠지기 일쑤다.
 
하지만 장구한 인류 역사에서 시장이 인간관계를 대변한 건 지난 300년뿐이다.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는 수많은 방법 중 시장이 제일 먼저 나와야 하는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왜 사랑이 먼저 나오면 안 되는가? 물론 시장은 가격이라는 변수만으로 인간관계를 빈약하게 만듦으로써 오히려 원거리의 익명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진화한 신판 교류방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다른 관계를 무시해도 좋다는 경제학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경제학이 자랑하는 효율성이라는 가치가 평등이나 우애와 같은 다른 가치보다 중요하다는 근거도 없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건 모두 합의하는 어떤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예컨대 이제 우리는 최소 수준의 의료나 교육, 심지어 식량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시장의 균형가격을 치를 능력이 없는 사람이 치료나 교육을 못받거나 굶는 데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최소한으로 누려야 할 어떤 가치를 우리는 흔히 ‘공공의 가치’(public value), 또는 ‘공공성’(publicity)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공공성의 범위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롤즈가 ‘기본재’라고 부른 것, 그리고 센의 ‘능력’이 그런 기준의 예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정하자면 꽤나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즉 공공성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공이성(public reason)을 사용해서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 또는 그런 걸 원하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무엇인지에 합의하는 것이 우선이다. 바로 정치가 하는 중요한 역할이다. 그런 합의 이후에 그걸 공급하는 방법을 논의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즉 태초에 있어야 할 것은 시장이 아니라 정치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가 최우선’이다. 그 다음에 어떻게 그런 가치를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 즉 시장경제, 공공경제, 사회적 경제를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를 다뤄야 한다.
 

*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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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9정태인/새사연 원장

 

‘착한 경제학’의 독자들이 잘 알다시피 사회적 경제는 어느날 갑자기 ‘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흔쾌한 협동에 필수적인 신뢰란 오랫동안 서서히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 ‘새마을운동’처럼, 또 참여정부의 ‘국가균형사업’처럼 중앙에서 하향식으로 만들려다가는 그나마 남아 있는 지역의 역량만 허공에 날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일은 없는 걸까? 문재인 전 후보는 대통령 직속으로 ‘사회적 경제위원회’를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만일 박근혜 당선인이 48%의 문 전 후보 지지자들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자신의 공약과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공약은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지난해 8월 말 주간경향 990호에 나는 ‘SEQ’(서울-에밀리아로마냐-퀘벡)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에는 서울을 염두에 두고 썼지만 이제 중앙정부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2004년 캐나다의 폴 마틴 총리는 “사회경제를 캐나다의 사회정책 수단의 핵심 부분으로 삼겠다. 기업가가 강한 경제에 필수적이듯 사회기업가는 강한 공동체에 필수적”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퀘벡의 경험이야말로 연방정부의 정책 수립에 가장 큰 자산이었다.
 
따라서 지금 박근혜 당선인에게 가장 긴요한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1년여 ‘마을 만들기’라든가, ‘중간조직 만들기’를 하면서 부딪힌 여러 장애, 특히 중앙정부 차원의 법과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들을 몸으로 느꼈을테니 말이다. 박 당선인이 서울시장을 만난다면 서울시는 그동안의 경험을 요약해서 중앙정부가 해야 할 일을 제시해야 한다. 만일 새로운 대통령 위원회를 만드는 것이 부담된다면 주무부처를 명확히 지정해야 한다. 현재 협동조합법은 기획재정부, 사회적기업법은 노동부, 생협법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주무부처이고, 마을 만들기와 관련해선 거의 전 부처가 고유의 사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 시장이 제대로 간파했듯이 사회적 경제는 시ㆍ군ㆍ구 단위의 지역공동체가 주도해야 한다. 서울과 같은 광역정부, 나아가서 중앙정부는 이런 실천에 필요한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자금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협동조합은 돈과 사람의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주식회사처럼 돈을 모을 수 없고 조합 내 임금 격차가 보통 6배 이하로 억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별히 협동조합을 신설하거나 확대할 필요가 있을 때는 외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이제 사회적 경제가 막 움튼 우리나라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일반적으로 협동조합은 출자금과 비분리자산(협동조합의 내부유보로 회사를 청산할 때도 출자자에게 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협동조합 연합조직이 조성한 협동조합 기금(레가의 경우 ‘coopfond’, 모든 단위 조합은 수익의 3%를 연합조직에 낸다), 그리고 협동조합 자체의 금융기관(예컨대 레가가 소유한 보험회사 ‘unipol’)에서 필요한 돈을 조달한다. 하지만 네트워크가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사회적 경제 생태계가 조성되기까지 필요한 것은 ‘공동체 기금’이다. 각 지역에서 먼저 돈을 모으고 중앙정부가 이에 맞춰 출자해서 상당한 규모의 종잣돈을 마련해야 한다. 각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 지방정부가 ‘상호성’이라는 사회적 경제의 원리에 따라 엄격하게 운용하면서 필요한 경험과 기술을 쌓아야 할 것이다.
 
중앙정부는 모든 정책에 사회적 경제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적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정부 조달의 일정 비율을 사회적 경제에 배정하거나 가점을 부여할 수 있다. 또한 에너지 효율형 주택개량사업이나 지역별 재생가능에너지 발전사업과 같은 국가 차원의 사업을 지역의 주택협동조합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울스와 긴티스 말대로 “제도설계를 잘 하면 공동체, 시장, 그리고 국가는 서로 대체적인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여기에 성공한다면 자마니 교수의 말대로 사회적 경제는 우리나라에서 ‘제2의 경제기적’을 만들어낼 것이다. 부디 박근혜 당선인이 이 정책을 받아들여서 자마니 교수의 예언이 실현되기 바란다.

*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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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3정태인/새사연 원장

 

여태까지 ‘착한 경제학’을 읽은 독자라면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낱말인지 잘 알 것이다. 한마디로 신뢰는 협동의 기초다. 신뢰는 양의 상호성(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을 촉발시킨다. 일반 신뢰(generalized trust)란 잘 아는 사람뿐 아니라 모르는 사람도 믿는 것을 말한다. 일반 신뢰의 사회는 협동이 사회규범으로 뿌리 내린 사회다. 신뢰와 협동이 개인에게 내면화한 이런 사회는 경제성장과 사회통합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등이 그 모범 사례이며 그 반대쪽 사례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퍼트넘의 저 유명한 ‘나 홀로 보울링(bowling alone)’은 미국의 경우이다.
 
하지만 남을 믿는다는 건 매우 위험한 행위다. 자신을 무장해제하기 때문이다. 흘러간 사랑을 떠올려 보라. 사랑에 제대로 데었던 사람은 웬만해선 마음을 열지 않는다. 하여 오직 가족과 몇몇 사람만 신뢰하게 될 텐데, 이를 특수 신뢰(particularized trust)라고 부른다. 특수 신뢰는 강력하지만 폐쇄적이기 십상이다.
 
박근혜 후보의 최근 캠페인은 ‘위기-신뢰-통합’이라는 세 낱말로 요약된다. 프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잘 구성된 조합이다. 세계 경제의 침체로 인해 한국 경제가 어렵고, ‘신뢰의 정치인’을 따라 위기를 헤쳐나가야 하며, 그것이 곧 국민통합이라는 메시지다. “경험 없는 선장은 파도를 피해 가지만 경험 많고 유능한 선장은 파도 속으로 들어간다”(박 후보 홍보영상)는 문구는 그의 결기를 잘 보여준다. 노년층은 아마도 아버지 박정희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과연 그는 ‘신뢰의 정치인’일까? 그가 신뢰라는 가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7일자 경향신문에서 찾을 수 있다. “(청와대를 나온 후) 뒤돌아 멀어져가는 사람들을 지켜본 박 후보는 약속과 신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배신에는 질색한다”. 아뿔싸, 그가 말하는 신뢰란 배반에서 비롯된 신뢰, 즉 위에서 언급한 특수 신뢰다. 그것은 폐쇄 집단의 신뢰이다. 따라서 “일단 믿기로 한 사람은 여러 번 기회를 주지만 정말 한 번 안 되겠다 싶으면 가차없이 아웃시키는 특징”(같은 신문)을 지닐 수밖에 없다. 물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의 작용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특징은 선거에서 유별난 힘을 발휘했다. 그의 카리스마는 특정 집단 내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한 종합편성 TV가 개국 기념 인터뷰에서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는 자막으로 내보낸 것도 무리가 아니다(TV 조선, 2011년 12월 1일). 그가 보수집단을 결집시켜서 한나라당을 위기의 수렁에서 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착한 경제학’의 ‘일반 신뢰’는 대화와 소통에 의해 형성되고 쌓인다. 반대로 특수 신뢰는 내부의 암호와, 외부와의 불통에 의해 더욱 견고해진다. 그의 말투, 예컨대 박지만씨에 대한 의혹에 대해 “아니라면 아닌 것”이라고 잘라 말하는 방식, “참 나쁜 대통령”과 같은 단말마 방식은 특수 신뢰의 특징이다.


문제는 그의 ‘특수 신뢰’가 대한민국 전체, 그리고 경제위기에 대해서도 통할 것인가이다. 그의 경제정책 기조인 ‘줄푸세’가 양극화를 심화시켜 한국 경제를 더 깊은 수렁으로 떨어뜨릴 것이라는 얘기는 이미 했다(경제 논리는 경향신문의 7일자 정동칼럼을 보시라).
 
케인즈 경제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돈이 아래로 흘러야 한다고 가르치고 ‘착한 경제학’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1930년대 대공황 때 루스벨트는 노동조합 지도자를 만나 “당신의 말이 옳다. 거리로 나가서 외쳐라. 내가 그 주장을 실현시키겠다”고 말하고, 국민연금법(보편복지의 확대)과 와그너법(노조의 단결권 보장)을 통과시켰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루스벨트와 같은 일반 신뢰요, 개방적 참여민주주의다.
 

*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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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7정태인/새사연 원장

 

착한 경제학에 어울리는 정치체제는 어떤 모습일까? 앞으로 차분하게 쓸 기회가 있겠지만 답부터 말하자면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이다. 착한 경제학의 핵심은 ‘신뢰와 협동’인데 최근 대부분의 연구들은 신뢰와 시민참여, 사회적 자본의 상관관계를 강조한다. 스웨덴의 로스슈타인은 정부에 대한 시민의 신뢰가 보편적 복지국가의 성패를 결정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런 기준에 비춰서 최근 초미의 관심사인 단일화부터 들여다보자.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 쪽은 현재의 단일화 움직임이 세계에 유례가 없는 비정상이요, 야합이며 설령 단일후보가 선거에 이긴다 해도 과거의 DJP연합처럼 배반의 역사가 반복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단일화, 더 일반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정치연합’은 비정상이 아니라 일상적인 현상이다. 다만 내각제에서처럼 선거 후에 득표 결과에 따라 몇몇 정당이 연합해서 내각을 구성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통령제에서는 ‘선거 전 연합’(pre-electoral coalition), 즉 후보 단일화라는 특징을 가질 뿐이다. 이들은 선진국 중 대통령제를 하는 나라는 미국, 한국, 프랑스, 러시아인데 그 중 한국만 단일화를 하니 이런 비정상이 어디 있냐고 주장한다.
 
한 사람이 대통령과 총리를 번갈아 하는 러시아를 정치 선진국이라고 할 수 없으니 일단 제외하고, 프랑스는 이원집정제 하의 결선투표제를 택한 나라다. 우리나라도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면 굳이 선거 전에 단일화라는 정치연합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이제 남은 나라는 미국과 한국 두 나라뿐인데, 미국은 정상이고 한국은 비정상이라는 건 사대주의가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2010년 포츠담대학의 프로이덴라이히는 대통령제 하에서도 절반 정도 이상이 정치연합을 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대부분의 대통령제 하에서 연합은 예외가 아니라 규범이다”.
 
선거 전 단일화의 장점도 있다. 내각제 하의 연합은 선거 결과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뤄지지만 선거 전 연합은 그 대상이 뚜렷하기에 정책기조와 내각을 미리 제시할 수 있다. 특히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해서 선거 때의 공약을 뒤집어 정반대로 나라를 끌고 갈 수도 있는 나라라면 이런 정치연합은 국민들에게 조금 더 확실한 미래를 보장한다.
 
현재 논의되는 단일화는 DJP연합과 확연히 구별된다. 1997년 DJP연합은 정치학 개념으로 말한다면 ‘최소규모연합’(윌리엄 라이커)이다. 즉 승리를 따내기 위해 최소한의 자리를 보장하는 단일화였다. 하여 임동원 장관 해임 사건이라는 정책기조 상의 문제로 쉽게 깨질 수밖에 없었다. 승리에 연연해서 이념과 정책을 저버린 ‘야합’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했던 것이다. 반면 이번의 정치연합은 정책을 중심으로 한 ‘최소연결승리연합’(로버트 악셀로드)을 노리고 있다. 즉 자리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데 필요한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연합을 하는 것이다. 즉 승리를 위한 정책연합, 우리 용어로 ‘가치연합’인데, 이는 지극히 정상적인 정치행위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채택하고 있는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는 양당제로 수렴하는 경향을 갖는데(‘뒤베르제의 법칙’) 그것이 다양한 정책과 이념(예컨대 직접민주주의나 녹색정치)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면, 심지어 거대 양당의 나태와 오만을 조장한다면 다당제 하에서 정치연합으로 대통령을 뽑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물론 현재 문재인 후보가 약속한 것처럼 비례대표가 획기적으로 늘어나고 나아가서 결선투표제를 도입한다면 훨씬 순조롭게 정치연합이 이뤄질 것이고, 안철수 후보가 바라 마지않는 ‘타협의 정치’도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한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단일화가 아니라, 진보진영까지 참여하는 ‘따로 또 같이’이다. 각 정당과 정파가 새로운 시대에 절실한 정책과 실천방안을 제시하여 합의 목록을 만들고, 그 정책을 수행할 내각 풀을 제시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시민정부’를 세울 수 있고 한국 최초의 ‘성공한 대통령’도 가능해진다. 앞으로 다가올 장기침체기에 제대로 된 개혁이라면 지배 삼각동맹의 목숨을 건 저항에 직면할 텐데, 시민들이 ‘우리의 정부’를 지켜줄 때만 그 파도를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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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