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 07 / 19 정태인/새사연 원장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19)

보고서 원문을 보시려면 위의 제목을 눌러주시면 됩니다.

 

이 글은 새사연의 정태인 원장이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진행한 ‘정태인의 경제학 과외 2부 : 사회경제, 공공경제, 생태경제’ 강연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거시경제정책 없이 복지국가도 없다.

그러면 복지국가로 가기 위해서 우리나라의 거시경제정책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흔히들 복지국가가 되려면 진보정당과 노조가 강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조건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복지국가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진보정당과 노조가 강력하지 못해도 복지국가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지니계수는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데, 가장 불평등한 상태가 1이고 완벽하게 평등한 상태가 0이다. 우리나라의 지니계수는 1986년경부터 개선되다가 1990년대 중반부터 나빠진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시절에도 지니계수는 계속 악화되었다. 다만 시장소득 지니계수와 가처분소득 지니계수의 차이가 벌어졌다.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시장에서 소득이 배분된 그대로를 의미하며, 가처분소득 지니계수는 세금을 걷고 보조금을 지급해서 어느 정도 재분배가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 시절에는 복지를 통해서 시장소득에 비해 가처분소득이 좀 더 평등한 상태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지니계수 자체는 여전히 상승하였다. 불평등은 계속해서 심화되었다.

복지국가는 결국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장에서의 불평등은 그대로 둔 채, 복지 재정을 투입하는 것만으로는 해결 불가능하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지니계수가 이를 보여준다. 결국 초기의 시장소득 지니계수가 자체가 높지 않아야 한다. 시장에서의 양극화와 불평등이 해소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장에서의 불평등을 줄이는 정책이 바로 거시경제정책이다. 따라서 진정한 복지국가 건설을 꿈꾸는 이라면 거시경제정책에 대한 계획을 함께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복지국가를 말하는 많은 사람들 중 거시경제정책을 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현재 세계 경제는 대침체(Great Recession)에서 장기침체(Long Recession)으로 변화하고 있다. 장기침체란 일본경제와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 세계 경제성장률은 2%대이고, 특히 선진 경제권인 미국, 유럽, 일본 등이 모두 침체 상태이다. 이런 상태가 앞으로 10년 이상은 지속될 것이다. 그간 수출에 의존해서 경제를 이끌어왔던 한국은 세계 경제의 침체에 바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한국도 올해 2%대의 성장을 할 것으로 전망한다.

위의 그래프는 위기가 발발한 후 고용 수준이 위기 발발 전으로 회복되는 시기를 그린 것이다. 1973년 1차 오일쇼크는 회복되는데 18개월 그러니까 1년 반이 걸렸다. 1981년 위기는 2년이 걸렸다. 그런데 2007년 위기는 좀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세계 경제가 장기침체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출 중심에서 내수 중심으로 전환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거시경제정책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현재 우리의 거시경제정책은 수출주도 정책이다. 수출주도 정책은 한 축은 임금을 중심으로, 다른 축은 환율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우선 수출을 할 때 국내 임금은 낮을수록 좋다. 그래야 생산비용이 줄어들면서 수출에서 가격졍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금인 생산측면에서의 비용인 동시에 수요이다.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아서 소비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가 입장에서는 우리 공장 노동자의 임금은 비용이니까 낮추고 싶지만, 남의 공장 노동자의 임금은 수요이니까 높아지기를 바란다.

또한 수출을 할 때 환율은 높을수록 좋다. 환율이 높다는 것은 원화가치가 낮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달러가 1000원일 때보다는 1달러가 2000원 일 때가 원화가치가 낮으며, 같은 상품을 수출해도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 대신에 수입 물가는 높아지게 되면서 일반 소비자들의 생활에는 부담이 된다. 우리나라의 환율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에도 1100원 선을 유지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우리나라에 유입된 돈이 많았다. 국내에 자본이 들어오면 한국 채권이나 주식을 사야 하므로 원화의 수요가 증가하고, 원화가치가 높아지면서 환율은 낮아져야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일정 수준의 환율을 유지했다는 것은 수출에 유리할 수 있도록 정부가 달러를 매입하면서 환율에 개입했다는 뜻이다.

수출대기업에 유리하도록 환율은 높이고 임금은 최대한 낮추는 것, 이게 우리의 거시경제정책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세계 경제의 침체로 수출 자체가 힘들어질 것이다. 전 세계의 제품을 수입해주던 미국마저 수출로 돌아서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환율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상대국가가 환율을 조작한다고 판단될 때 무역 보복을 할 수 있는 법이다. 한마디로 보호무역으로 돌아선 것이다. 특히 이 환율법은 중국을 겨눠 제정했겠지만, 막상 중국을 향해 시행하기에는 부담이 될테니 만만한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가장 먼저 시행될 가능성도 있다.

이제 환율은 절상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자본시장이 개방된 상태에서 절상하면 환율의 가변성이 너무 커져 불안정하다. 적절히 규제해서 환율이 서서히 절상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본통제가 필수적이다. 자본통제는 국경을 넘는 자본에 대한 규제를 뜻한다. 자본통제에서 중요한 것은 나가는 돈보다 들어오는 돈이다. 이제까지는 해외자본이 국내에 들어오면 투자가 늘었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해외자본이 장기적이고 건설적인 투자를 하기보다는 주식시장과 부동산 시장으로 스며들어 주가와 부동산 가격에 거품을 형성했다. 무리한 거품이 생기지 않도록 토빈세, 외환가변유치제 등의 제도를 통해서 유입되는 자본을 적절히 규제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만 하면 아무 실효성이 없다. 해외 자본 입장에서는 자본통제를 하지 않는 다른 국가로 이동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차원에서 함께 자본통제를 실시하여 안정적인 환율과 거시경제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수출을 안 하면 우리 경제는 뭘 먹고 살아야 할까? 임금을 올리고, 이를 바탕으로 수요를 늘려서 내수 중심으로 변화해야 한다. 임금을 올리면 세계경제에서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 우려하지만, 사실 우리보다는 중국의 임금이 훨씬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력 약화는 심하지 않다. 한국사회에서도 내수가 늘고 임금이 올라가던 시기가 있었는데 바로 80년대 중반이다. 당시에는 재벌이 현재처럼 중소기업을 완벽히 통제하지 못하던 시기였으며, 노동조합 운동이 활성화되었고, 생산성 증가가 임금 증가로 이어져, 소비와 저축이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던 때이다. 다시 이런 모습으로 만들어야 한다.

원하절상과 임금인상이 되면 자연스럽게 산업 구조조정도 이루어진다. 원화절상과 임금인상은 내수 중소기업에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내수 중소기업들이 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앞으로 고민해야 할 산업정책의 내용이 될 것이다. 결국 핵심은 앞서 보았던 에밀리아 로마냐와 같은 산업지구를 10년 안에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중소기업의 생산성을 갉아먹고 있는 하청단가 문제나 높은 부지 비용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산업정책을 계획할 때 고려해야 할 점 몇 가지 꼽자면, 우선 여전히 제조업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금융허브론이나 서비스선진화론 등 다양한 주장이 있었지만 우리 실정에는 맞지 않았다. 우리 경제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동아시아 국제분업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우리는 제조업에서 첨단제품을 시험하는 지역, 중국 수출의 관문과 가튼 역할을 맡아야 한다. 두 번째로 중국과의 기술격차를 유지해야 하며, 동아시아 내에서 기술 선도자로 역할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초과학기술 학문과 인력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자본통제와 자산세를 통한 자산가격 안정화

복지국가 건설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거시경제정책은 자산가격 안정화이다. 현재 한국에서 대표적인 자산은 부동산과 금융이다. 그리고 사실 부동산과 금융은 주택담보대출 등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부동산 시장은 언제 추락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정부의 건설경기부양 정책으로 겨우 현 상황을 유지하고 있다. 자산가격의 거품이 심해지면 자산소득에 따른 양극화가 심해진다. 또한 거품은 언젠가는 꺼지게 마련이라는 점에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안정적인 복지국가 운영을 어렵게 만든다.

이제 한국은행은 핵심 목표를 물가 안정에서 자산가격안정으로 잡아야 한다. 자산가격 안정을 위해서는 앞서 지적했듯이 국내에 과다한 자본이 들어오지 않도록 자본유입통제를 실시해야 한다. 다음으로 부동산 가격을 하향 안정화시키고 부동산과 금융자산을 재분배하기 위해 자산세를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현재 중산층 이하 가정은 부동산 대출 부담과 함께 높은 사교육비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부동산 대출과 함께 사교육비는 가계가 저축을 하거나 넉넉하게 소비하지 못하는 최대 요인이다.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고 평등과 효율을 동시에 달성하는 교육개혁이 필요하다.

사실 부동산, 금융, 교육비는 확장하여 생각하면 토지, 돈, 인간을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들이다. 이는 폴라니가 상품이 되어서는 안되는 세 가지 요소 사람, 자연, 돈이  상품이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던 부분과 상통한다.

내수중심, 임금주도 경제로의 전환과 자산가격 안정화라는 거시경제정책을 토대로 하지 않은 채 복지국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선 시장에서의 양극화를 교정하지 않으면 아무리 돈을 부어도 양극화를 해소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렇게 무한정 돈을 쏟아 부으면 재정적자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경제로는 더 이상 성장이 불가능하다. 앞으로 우리의 경제성장률은 3%대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 다른 경제성장, 경제유지 방식을 찾아야 한다.


보편복지를 가능하게 하는 원칙

흔지 복지논쟁이라 불리는 것의 쟁점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보편복지냐 잔여복지냐의 문제이다. 둘째, 재원조달을 위한 증세가 필요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셋째, 증세를 한다면 부장증세이냐 보편증세이냐의 문제이다.

첫째 쟁점은 무상급식에서 출발했다. 보편복지는 복지의 주체가 국가이며 전 국민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대상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잔여복지는 가정과 시장이 복지의 중심이며, 가정과 시장에서 감당할 수 없는 나머지 부분만을 국가가 제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잔여복지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가정과 시장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 절차가 바로 자산조사이다. 보편복지는 사회권을, 잔여복지는 재산권을 강조한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잔여복지를 선호한다. 가장 복지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집중해서 투자할 수 있기 때문에 효율적이라고 본다. 또한 보편복지의 경우 공유자원이기 때문에 반드시 무임승차자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잔여복지의 문제는 가장 복지가 필요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찾아내기 위한 과정에서 비용이 많이 들고, 사회적 그리고 심리적으로 낙인효과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보편복지라는 것은 무엇일까? 주거를 보편복지화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전 국민에게 똑같은 집 혹은 돈을 주는 것인가? 의료의 보편복지는 무엇일까? 의료수당을 똑같이 주면 되나? 교육의 보편성은 무엇인가? 무상급식을 하는 것일까? 대학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것일까? 사실 보편복지는 간단하지 않다. 하나하나 제공되는 서비스에 따라서 경제학자와 사회복지학자들이 모여 고민해야 한다. 앞서 공공성을 이야기하면서 여러 재화를 하나씩 살펴보았던 것처럼 하나하나 따져보아야 한다.

이기적이고 단기적 인간이라면 만들 수 없는 엄청난 것이 보편적 복지이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보편적 복지를 위해 돈을 낼까? 이 문제는 이전에 살펴보았던 공공재게임과 똑같다. 공공재게임이란 각자 공공계정에 돈을 모았다가, 모인 돈이 일정 수준으로 증가하면 공평하게 돌려받는 게임이었다. 이기적 인간이라면 남들이 공공계정에 돈을 내도록 기다리고, 자신은 한 푼도 내지 않은 채 나중에 불어난 돈을 분배받기만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기적 인간이 한 명이라도 존재하면, 점차 많은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공공계정에 돈을 내는 것을 거부하게 되었다. 결국 기본적으로 조세의 공정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모두가 세금을 공정하게 내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 공짜로 복지를 제공받는다는 사실보다 부자들이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것에 더 많이 분노한다.

세부적으로는 첫째, 복지목적세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내가 열심히 세금을 냈는데 엉뚱한 곳에 돈이 쓰인다면 세금을 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복지목적세를 도입하여 세금을 내면 반드시 복지에 쓰이도록 규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약속이 정권이 바뀌면 바뀔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무상급식을 위한 세금을 만들었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이것이 4대강 세금으로 변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야의 합의가 필요하며, 장기적 정책을 위해서는 내각제 개헌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국민에게 세금은 올바른 곳에 쓰일 것이라는 신뢰를 주어야 한다.

둘째, 공평과세를 실시해야 한다. 무작정 세율을 높이는 것보다 탈세를 막아서 모두가 공평하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셋째, 무임승차자를 방지해야 한다. 이는 사회규범이 어떻게 확립되어 있느냐의 문제이다. 또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펼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무임승차를 줄여가야 한다. 넷째, 복지 전달의 주체로 지자체를 잘 활용해야 한다. 모든 것을 국가가 담당할 필요는 없다. 국민들에게 직접 전해지는 복지의 말단 부분은 지자체가 담당할 수밖에 없다. 지자체 간의 경쟁을 통해 복지 전달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 또한 지자체와 지역의 사회적 경제가 결합하여 좀 더 지역 주민들과 친근한 관계 속에서 복지를 전달할 수도 있다.

* 정리 :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20)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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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8정태인/새사연 원장

 

6월 마지막 주에 통합진보당은 당대표 선거를 치른다. 내 보기에 이번 선거는 이 정당의 ‘마지막 선택’이다.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할 것인지, 아니면 뻔한 죽음의 길을 계속 갈 것인지만 남았다. 지난 3주간 통합진보당 사태를 다룬 ‘착한경제학’의 고통스러운 일탈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우리는 유일한 활로가 현재의 ‘치킨게임’을 ‘사슴사냥게임’으로 바꿔서 협동을 택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것은 곧 현재의 ‘퇴행적 정파주의’를 ‘협동의 정파주의’로 바꾸는 일이다. 영국의 정치학자 부체크(Boucek)는 퇴행적 정파주의 구도에서 각 집단은 당 전체의 가치보다 개별 집단의 이익을 실현하는 데 골몰하므로 당의 공유자원(무엇보다도 진보에 대한 국민의 신뢰)을 파괴하고 결국 당은 분열과 붕괴에 이르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동안 각 정파가 서로 적대하면서 퇴행적 정파주의로 치달았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만일 선거의 승리가 물질적 이익(지대)과 당직 등의 독점으로 이어진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려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점점 심해진 고질적 병폐인 패권주의, 크고 작은 선거부정이 발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그런 전리품으로 인해 특정 정파의 조직이 빠른 속도로 확대된다면 소수정파는 2008년 분당과 같은 초강수도 고려하게 될 것이다.
 
승자 독식의 현행 제도 아래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까? 우선 두 후보 모두 당 권력의 분점과 투명한 회계제도를 약속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의 세금과 당비가 특정 정파에 귀속되는 것부터 원천적으로 막아야 한다. 둘째는 아예 강령을 개정해서 당의 거버넌스를 비례대표제에 입각한 내각제 형태로 바꾸는 것이 더 근본적인 처방이 될 것이다.
 
두 번째 퇴행적 정파주의의 원인은 진보적 가치의 훼손이다. 예컨대 ‘혁명성’이나 ‘계급성’과 같은 선명한 낱말이 정파의 이익을 은폐하는 외피가 된 것은 비단 통합진보당이나 한국의 대중운동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그런 현상은 각국 진보운동이 사멸하는 징후였다(발리바르). 두 후보는 2012년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자주성’이나 ‘노동중심성’, ‘당내 민주주의’와 같은 진보적 가치들이 어떤 구체적인 내용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밝혀야 한다. 이는 당대표 선거가 단지 정파간의 숫자 싸움으로 전락하지 않고 앞으로 협동의 정파주의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집단간의 퇴행적 경쟁은 협동하지 않으면 달성할 수 없는 더 큰 가치를 추구할 때 비로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셰리던). 이것은 곧 협동의 보수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여기서 정파의 지도자와 이론가들의 역할은 특히 중요하다. 정파간 경쟁이 퇴행적이지 않으려면 당원과 국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시하고 공개적으로 토론해야 한다. 상대에 대한 왜곡된 정보, 억측을 집단 구성원에게 경쟁적으로 유포하는 퇴행에서 이제는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각 정파가 이런 초보적인 민주적 절차에 성실하게 응한다면 그 과정은 곧 정파간의 오해와 반목을 씻는 화해의 과정이 될 것이다.
 
따라서 두 후보는 현재의 당 강령에 비춰 정파의 이념과 정책을 구체적으로 발표하며 소속원을 등록하는 ‘정파 및 정책 등록제’를 공약해야 한다. 이런 제도를 통해서 비로소 정파간 경쟁이 생산적 결과를 낳을 것이고, 당원 전체의 합의와 국민들의 신뢰수준이 높아지는 바로 그만큼 국가보안법의 칼날도 무뎌질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번 선거는 당 내외의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지금 통합진보당은 국민들로부터 능력(competency)은 물론 성실성(integrity) 면에서도 완전히 신뢰를 잃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까지 당은 일반적인 신뢰 회복 절차인 사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프로그램 제시에 모두 실패했다.
 
따라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도 철저히 국민의 신뢰 회복 여부에 맞춰져야 한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번 선거만은 정파라는 낡은 사슬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보의 사활이 그 선택에 달려 있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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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30손석춘/새사연 이사장

권영길의 눈물. 민주노동당의 ‘상징’인 그가 기자간담회에서 끝내 눈물을 흘렸다. 권영길이 회견문을 읽다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컥한 순간은 앞으로 건설될 통합 진보정당에서 어떤 당직과 공직도 맡지 않겠다며 사실상 2012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대목이 아니었다. 서울 “삼선교 쪽방의 국민승리21 시절부터, 2004년 총선승리의 영광, 분당의 상처까지 모든 고난과 영광의 세월동안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은 권영길의 영혼”이었다고 회고할 때였다.

왜 권영길은 그 대목에서 눈시울 적셨을까. 민주노동당과 더불어 걸어온 그 길이 가시밭이었고 외로웠기 때문이 아닐까. 기실 한국의 모든 신문과 방송은 기자 출신의 정치인 권영길은 물론, 진보정당의 정치 활동이나 정책을 보도하는 데 내내 인색했다. 흔히 진보언론으로 꼽히는 신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복지’ 쟁점화, 진보정당 없었다면…

단적인 보기가 최근 퍼져가고 있는 ‘복지’ 의제다. 권영길은 진보통합으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백의종군을 밝힌 간담회에서 현재 “무상급식과 반값 등록금은 한국사회 최대 쟁점”이라고 지적한 뒤 그 쟁점들은 “진보정당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랬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창당 이후 줄기차게 ‘무상 의료’와 ‘무상 등록금’의 단계적 실현을 주창해왔다. 생활 현장에서 무상급식 운동을 애면글면 벌여온 사람들도 대체로 진보정당의 당원들이었다. 하지만 어떤 신문도 방송도 진보정당의 정책이나 활동에 주목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진보정당의 복지정책 공약을 구색맞추기식으로 보도했을 때도 “비현실적”이라는 꼬리표를 살천스레 달았다. 가장 오랫동안 복지정책을 지며리 제기해온 원내 진보정당에 언제나 소홀했던 언론이 2010년 들어 ‘복지’를 의제로 설정하는 모습을 탓하자는 게 전혀 아니다.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고 의미 있는 편집으로 마땅히 평가할 일이다. 다만 뒤늦게 복지를 의제로 부각하면서도 시민사회 중심으로 보도하는 반면, 진보정당의 정책을 보도하는 데 여전히 인색한 풍경은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다.

전혀 내키진 않지만 명토박아둔다. 미디어오늘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에도 정파적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윤똑똑이들을 위해서다. 심지어 한겨레 논설위원으로 사설과 칼럼을 쓸 때도 당시 논설주간은 내게 민주노동당 당원 아니냐고 물었다. 사실 여부를 답하고 싶지 않아 웃어넘겨서일까. 그는 확신을 한 듯이 다른 사설을 썼을 때도 그 말을 불쑥 꺼냈다. 참으로 씁쓸했지만 그가 해직 기자로 걸어온 길에 최소한의 예의를 표하고 싶어 사실이 아니라고 답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미묘한 웃음을 보내며 “그럼 비밀당원이겠지”라고 혼잣말처럼 단정했다.

흘러간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럴 뜻은 전혀 없다. 다만 대한민국 언론계에서 진보적 생각을 표현하는 일조차 쉽지 않고 바로 그만큼 진보정당이 커나가기는 더 어렵다는 진실을 동시대의 언론인들과 나누고 싶어서다.

권영길의 눈물은 민주·민중의 슬픔

물론, 이제 나는 더 이상 직업적 기자가 아니다. 뜻하지 않은 순간에 기자직을 그만둔 뒤 제법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언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언론 보도의 객관성이나 중립성은 실현 불가능한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짚고 싶다. 아울러 자신은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편향의 칼럼을 노상 써가는 현직 언론인들이 국민 대다수인 민중의 편에 서서 시민정치운동이나 주권운동에 참여한 지식인을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현실에 조금이라도 성찰을 권할 따름이다.

권영길은 간담회를 정리하는 발언에서 취재기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간곡히 호소드린다”며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은 진보진영만의 과제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읍소했다.

가만히 묻고 싶다. 진보대통합으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이 한국 정치에 절실하다고 판단하는 언론이 대한민국에 있는가.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자칭 보수든 진보든 한국 언론은 진보정당이 내부 갈등으로 쪼개질 때 비로소 돋보이게 편집했다. 권영길이 아픔을 들먹이며 울먹인 바로 그 시점이다. 진보언론의 지면조차 분당을 부추기는 칼럼들을 곰비임비 편집하지 않았던가.

두루 알다시피 40대 후반 나이에 언론노동운동의 길로 들어선 권영길은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에 이어 민주노동당 창당에 나섰다. 오랜 냉전으로 얼어붙은 박토에 진보정당의 씨앗을 뿌렸다. 그 자신 지역구 당선을 비롯해 진보정당 원내진출의 새싹을 틔우고 작은 나무로 키워왔다. 그의 노고에, 어느새 일흔이 넘은 그의 서러움에 경의와 위로를 보내는 까닭이다.

아울러 현직 언론인들, 특히 진보언론의 현역들에게 쓴다. 권영길의 눈물은 분당 이전 민주노동당의 눈물이다. 동시에 진보대통합의 눈물이다. 그 슬픔은 맞닿아 있다, 더 깊은 민주주의의 눈물, 지금 이 순간도 고통 받고 있는 민중의 눈물과.

이 글은 미디어 오늘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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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4     손석춘/새사연 이사장

씨. 흔히 뿌리는 사람이 거두는 게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지요.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이 다를 때가 더 많아 보입니다. 역사를 톺아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누군가 몸을 던져 씨를 뿌리면, 누군가는 그 열매를 거둬갑니다.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할까는 사람마다 다를 터입니다.


아마 당신도 그 분의 이야기를 들었을 터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10여 년 옥고를 치렀던 분이지요. 한국전쟁이 끝난 지 3년 만에 진보를 내걸고 대통령 후보로 나서 216만 표를 얻었습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100만 표를 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유권자가 지금의 절반이었던 그 시기에 얼마나 많은 표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래서였지요. 이승만은 그를 체포하고 사법부에 개입해 사형으로 몰아갔습니다. 4월 혁명이 일어나기 아홉 달 전에 ‘사법 살인’ 당했지요.


사월혁명 아홉 달 전에 이승만 손에 사형


1959년 7월31일 사형당하기 직전에 그분이 남긴 유언은 심금을 울립니다.
“결국엔 어느 땐가 평화통일을 할 날이 올 것이고 바라고 바라던 밝은 정치와 온 국민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부린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를 뿌려놓고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네.”


죽산 조봉암. 그 분은 그렇게 이 땅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52년이 흐른 2011년 1월20일 대법원은 재심에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사필귀정이지요.


그런데 생게망게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무 ‘죄’도 없는 대선 후보에게 사형을 선고해 집행케 한 세력 가운데 반성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법부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보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렇게 넘어가도 좋을까요? 젊은 당신께 여쭙니다.


심지어 언론은 조봉암의 무죄 선고 앞에서 진보세력을 훈계하고 나섰습니다. <중앙일보>의 기자칼럼은 “이번 판결로 진보도 피해 의식을 버리고 책임감을 가질 때가 됐다”고 씁니다(2011년1월22일자). 뜬금없다 못해 적반하장이지요. 조봉암에게 사형을 집행할 때 법무부장관이 바로 삼성 이병철과 함께 <중앙일보>를 창간한 홍진기입니다. 지금 홍석현 회장의 아버지이지요.


그 신문이 조봉암의 사법살인에 대해 보수 세력이 아니라 진보 세력을 언죽번죽 꾸짖는 작태는 가관입니다. 물론, 좋게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칼럼이 진보세력의 분열을 질타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또한 납득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법원이 무죄 선고한 날 진보대통합 첫 회의


대법원이 조봉암의 무죄를 선고한 2011년 1월20일 바로 그날, 진보정치 세력은 진보대통합을 이루기로 합의하고 연석회의의 첫발을 힘차게 내디뎠습니다. 기존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에 더하여 민주노총과 진보통합시민회의(복지국가와진보대통합을 위한시민회의), 진보교수·연구자 모임, 농민단체가 모여 ‘새로운 진보정당’ 창당을 다짐했습니다.


어떤가요? 저는 조봉암이 복권된 날, 진보대통합 연석회의가 열린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커다란 시대적 흐름이 만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정작 그 움직임에 <중앙일보>는 물론 <조선일보><동아일보>는 모르쇠 했습니다. 그래놓고 ‘분열’을 훈계하는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그래서입니다. 당신께 죽산 조봉암이 뿌린 씨가 새싹을 틔웠다는 소식을 새삼 편지로 전하고 싶었습니다. 한국 정치가 절망으로 다가오는 오늘, 저의 편지가 당신의 가슴에 작은 희망의 새싹으로 커가길 감히 기대합니다.(2020gi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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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이슈 /정치2009.05.10 18:28

우리는 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선출과정’의 민주성만을 매우 제한적으로 인정할 뿐, ‘통치과정’의 민주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난 글에서 확인했다. 2008년 촛불 시위에서 분명하게 확인했듯이 국민에게는 대통령을 탄핵할 권한이 없으며, 국가 중대사를 국민투표에 부의할 권한도 없다. 민주주의가 ‘통치주체’의 문제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귀족정일 뿐이다. 현대의 귀족은 ‘정치 엘리트’, ‘의원’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선거를 통해 등장한 선출직 공무원들이 전 국민의 의사를 대신하는 ‘엘리트주의’는 보수세력만의 독점물은 아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대다수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당과 국가, 민의 결합을 제대로 이루어내기 보다 정치적 엘리트를 자임한 당의 정치 독점으로 귀결됐다.

진보정당 - 민주주의 - 리더십

역사책을 뒤적일 것도 없다. 오늘, ‘민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우자던 포부를 내세운 진보정당들은 얼마나 대중과 내부 성원들의 민주적 의사에 근거해 운영되고 있는가? 또한 진보정당이 그리는 대안적 미래상이 얼마나 인민주권적 미래상을 그리는 데 적절한가? 새로운 대안체제를 꿈꾸는 진보정당 역시 자유민주주의와 경직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유산 속에서 허우적대며, 민중이 주체인 민주주의의 참의미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냉철히 평가해볼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보정당의 역할을 대중의 의사에 따라 휘둘리는 수동적 역할에 국한시켜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중성을 강조하며 대중 추수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현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도, 그 과정이 될 수도 없다. 당은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과 이해, 요구를 파악하여 대중 속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집단적 정치 활동체다. 리더십 없는 정치는 민주주의의 질을 떨어뜨리며,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게 만든다.

그렇다면 당의 리더십은 어떻게 발휘되어야 하는가? 폭력적 방식을 동원하기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허용한 ‘선거 경쟁’의 룰을 받아들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정체성과 대중의 요구 사이에 존재하는 딜레마에 부딪혔다. 급진적이지 않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개량’이 요구되었고, 그들의 정책은 보다 건전한 체제를 요구하는 ‘개혁’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정당 내부의 토론과 회의에는 급진적인 언술이 넘쳐나다가도 선거 때만 되면 기성 정당과 별 다르지 않은 ‘건전한’ 구호, 기성 정당의 부패나 무능에 대한 일방적 비판만이 넘쳐났다. 이제까지 선거운동의 경험은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진보정당운동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동시에 정치적 리더십의 공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정치적 리더십은 자신의 ‘정치적’ 성향만을 분명히 한 채 흔들림이 없는 구호를 남발하는 것도 아니고, 정당 내부의 열혈 활동가들의 주장을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들의 유토피아적 구호로 치부하며 대중의 의식이 존재하는 그곳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진보적인 정치적 리더십은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고, 대중 스스로 진보성을 갖도록 만들기 위한 능동적이고 실천적인 동시에 매우 헌신적인 활동을 필요로 한다. 비록 ‘선거’가 아닌 항쟁적 방식의 혁명이라 할지라도, 다수 대중의 공감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억누르고 왜곡하는 억압적 정치권력이 공존할 때에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새로운 민주체제를 만들기 위한 진보정당의 정치적 리더십은 당의 전망을 대중에게 끊임없이 설득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대중의 공감을 얻는다는 것이 대중의 현재 기호에 맞추는 것도 아니고, 대중의 의사와 상관없이 깃발을 앞세우며 강요할 것도 아니다.

정치적 리더십을 대중으로부터 인정받지 않고서는 선거를 통해서건, 혁명을 통해서건 구현될 새로움이란 아무 것도 없다. 진보적인 대안체제의 창출은 그 방식이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민주주의’를 동반해야 하고, 그 내용과 방향, 폭이 어느 정도로 구현될지는 정치세력의 리더십 역량에 크게 의존한다.

대중을 신뢰할 때 ‘인민주권적 민주주의’ 가능

물론 당의 정치적 리더십이 발휘된다 하더라도 대중의 지지가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대중들도 잘못된 선택을 하기고 하고, 올바른 길을 외면하기도 한다. 가깝게는 지난 대선에서, 멀게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이 권력연장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선거와 국민투표에서 대중은 분명 잘못된 선택을 했다.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스위스에서조차 강력한 이익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주민투표를 추진하는 사례도 있었고, 20세기 초 스위스 모델을 수입했던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거액의 홍보비를 뿌릴 수 있는 쪽이 주민투표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곤 했다.

‘대중에 대한 신뢰’와 ‘민주주의’는 대중의 옳은 판단에 기대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상호간의 의사소통과 정보·지식의 습득을 통해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중들의 의사를 왜곡하는 다양한 외부요인을 차단하도록 노력하며, 우리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이들을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통치주체’의 문제이며 그 주체가 바로 대중이라면, 대중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 자체가 작동할 수 없다. 민중에 대한 신뢰, 이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는 당의 리더십과 대중 간의 지속적인 교감을 통해서만이 ‘인민의 자기통치’라는 이상을 향해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다.

2010년 지방선거가 2008년 촛불로부터 시작된 정권과 진보·개혁적 국민 간 격돌이 될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예상하고 있지만, 진보정당이 먼저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대한 관점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승리를 자신할 수는 없다. 2008년 촛불시위에서 나타난 대중의 저항은 민주주의의 인민주권적 재구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정서가 2008년 촛불 수준에서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어리석다. 보수세력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은 막강하다. 과거 어느 수준으로의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는 정치세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동안 ‘민주대연합’으로 상징되는 반독재 연대가 실제로는 동등한 관계로서의 연대가 아니라 제도권 내 거대 야당의 지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도적 공간에서 진보적 대안을 실현할 방법을 마련해 놓지 못했던 우리, 그리고 진보정당의 한계가 만들어 놓은 결과다.

그렇다면 진보정당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제까지의 관성 속에서 선거 공보물에 얼굴 하나 더 들이미는 것에 만족할 텐가, 아니면 민중이 주체되는 대안적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새 판을 짤 것인가? 2010년 지방선거를 다시금 우리 운동의 목표와 방향을 검토하고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는 전환점으로 삼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지방, 그리고 자치에 대한 인식부터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진보정당에는 집권전략이 아니라 ‘집권 후 전략’이 필요

그동안 진보정당의 전망 속에는 지방자치가 크게 자리 잡혀 있지 않았다. 지방자치는 중앙권력의 하부기관으로만 인식되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중앙권력을 획득하는 것이었다. 중앙권력을 얻을 때만이 현실의 여러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었고, 구체적인 대안은 집권 이후 자연스레 나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동안 진보정당들의 지방자치 대안은 ‘집권’ 그 자체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진보정당에서 제출된 지방자치론은 모든 것이 ‘집권’ 그 자체만을 위한 전략과 전술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류의 관점은 당 내부에서만 겨우 합의 가능한 것으로 대중들의 관심을 모을 수 없었다. 당의 잠재적 지지자들이 당의 집권을 강력하게 소망할 어떤 유인도 제공해 줄 수 없는 것이다.

대안적 전망이 집권 이후에 마련될 수 있다는 안일한 발상은 오히려 집권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다. 현실정치세력에 대한 불만이 그 정치세력과 정반대의 정치노선을 추구하는 이들에 대한 지지로 귀결될 것이라는 기대는 막연한 환상이다. 거대 양당이 존재했을 때, 두 정당의 놀랄만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선호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머무른다. 특히 한국 정치구도는 새로운 대안에 대한 선택을 요구하기보다, ‘가장 나쁜 세력’에 대한 ‘심판’을 강요하는 ‘적대성의 정치’ 상황이기 때문에 이런 경향은 더욱 강화된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전략은 적대성의 정치로 수렴된 대중의 불만을 어떻게 ‘대안 선택의 정치’로 전환시킬 것인가가 주된 과제가 되어야 한다. 현실정치세력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한계를 벗어나 또 다른 분명한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어떤 대안을 선택할 것인가’로 정치구도가 전환되지 않는다면 제도정치공간의 양극화 현상은 계속 심화될 수밖에 없다. 곧 진보적 지방자치 전략은 집권 과정에 이르는 전략을 고민하는 것을 넘어, 집권 후 전략을 마련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합의하는 것 자체가 집권 전략이다.

문제는 지방자치에 대한 진보정당의 ‘집권 후’ 대안이 여전히 모호하다는 점이다. 여전히 진보정당의 전략은 주민자치를 진보적 정치엘리트의 활동의 보조적 수단 정도로만 인식하는 경향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으며, 풀뿌리 운동조직을 지지의 대상으로만 사고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여전히 제도 밖에 머무르며 가장 좋은 정치세력에게 표를 던지는 대상일 뿐, 지역 자치를 구현할 핵심 주체로 사고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글에서 논의한 민주주의에 내재된 ‘민중 스스로의 통치’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지방자치를 사고하는 기본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 국가 수준의 민주주의는 불가피한 위임을 받아들인 가운데, 대중의 ‘필요에 의한 통제’, 즉 국민투표와 소환, 발안제라는 통제기제를 사용해 주권자인 대중의 지위를 보장하는 것이라면, 보다 작은 규모의 지방자치는 인민주권이 실질적으로 구현되는 체제를 모색할 수 있다.

지역은 새로운 민주주의의 근본 토대

소규모 지방, 소규모 공동체 수준에서는 일반적으로 크기가 큰 집단에 비해 집단 효능감(collective efficacy), 협동을 통한 긍정적 결과에 대한 기대, 집단 목표에 대한 몰입 수준이 높다. 통치의 범위가 작을수록 집합행동에 참여하는 개인들에게 돌아가는 집합재(collective goods)의 몫이 커지고, 자발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에 의해 집합재가 공급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에 소규모 집단이 대규모 집단에 비해 성원들이 공동이익을 위해 단합된 행동을 취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방자치는 규모의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데도 불구하고 국가 수준의 정치와 다름없이 엘리트주의화 되어 있다. 또한, 지역 주민이 지역통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제한적 수준에서 보장할 뿐, 실질적으로는 지역사회의 지배계급에 의해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 단위의 민감한 이슈에 비해 지역주민의 관심을 더 받지 못한다.

사상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한 지난 18대 국회의원 선거를 제외하면 지방자치선거 투표율은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 투표율보다 항상 낮았다. 오히려 지역에서의 주민 참여는 비제도적 주민운동의 형태로 이루어져 왔으며, 지방정치에 적극 개입하고자 하는 주민자치운동 또한 스스로 집권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보다 단체 자치의 감사자,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머무르고 있다.

                                 [그림] 대선, 국회의원, 지방선거 투표율



이런 결과의 이면에는 지역 주민의 자발적인 정치개입을 가로막는 구조적 원인이 존재한다. 지역사회의 관변조직이나 토호, 이권 브로커, 개발업자 등 특수한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의 발언권이 과잉 대표되는 상황과 철저히 거주지와 근무지가 분리된 조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장시간 노동시간을 감내해야 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은 지방자치에 대한 ‘참여의 불평등’을 조건 짓는다.

이권이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단체 활동으로도 충분한 생활이 보장되는 보수적 풀뿌리 단체에 비해, 진보적 풀뿌리 조직들은 매우 짧은 여가의 시간을 모두 투자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국제노동기구(ILO)가 2007년 발표한 ’2004~2005년 세계 노동시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장시간 노동 비율은 49.5퍼센트로 페루(50.9퍼센트)에 이어 세계 2위였다. 참여할 시간이 없다면 자치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역정치는 지역에 상주하는 보수적 조직과 자영업자, 부녀회를 중심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으며, 낮은 투표율 속에서 각종 조직 동원이 가능한 금권력을 가진 보수세력은 항상 승률 높은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지역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당은 이런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 과제는 지방자치의 민주주의적 재구성이라는 과제와 국가수준의 새로운 민주화라는 과제를 긴밀하게 연계시킨다. 다시 말해, 국가 수준의 새로운 민주화는 지역주민의 직접적 참여를 지향하는 지방자치를 통해서 가능하며, 지방자치의 재구성은 실질적 자치를 가로막는 국가차원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과 병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진보정당의 지방자치 전략은 지방선거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총선과 대선까지 연계시킬 수 있는 종합적 전략 속에 배치되어야 하고, 이를 현실화할 동력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다양한 대안적 가치와 사회적 힘의 연계, 즉 연대전략의 문제를 제기한다.

* 다음 연재에서는 ‘시민운동과 새로운 민주주의’를 다룰 예정이다.

** 이 글은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와 민주노동당 2010위원회와 공동으로 진행하는 ‘진보적 지방자치론’ 프로젝트의 기초 토론문의 일부로 제출되었다.

손우정/새사연 연구원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재구성①] '정치적 냉소주의', 선거민주주의 한계 뛰어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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