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성'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2.10.23 지금 시대 행복의 조건은 평등
  2. 2012.10.12 경제학자들은 왜 생태문제를 외면할까

2012 / 10 / 23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우리는 언제까지 경제성장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가? 경제성장이 더 나은 삶의 질을 보장해주는가?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교수는 이 같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최근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져들면서 이런 의문이 더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우리는 대체로 1인당 소득이 높아지면 사람들의 만족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구결과에 의하면 아주 기본적인 요구들이 해결되는 수준을 넘어서면 소득과 사람들의 행복은 연관성이 없다고 한다. 또한 사람들의 행복은 소득의 절대값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의 상대적 크기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스키델스키 교수는 이러한 연구결과를 설명하면서 성장이 행복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아니며, 지금과 같은 양극화의 상황에서는 평등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평등은 사회안전망과 건강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기도 하고, 더 많은 여가를 즐기고, 더 많은 시간을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내고, 동료 간에 더 많은 존경을 받으며, 더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래, 이제 좀 다르게 살아야 한다. 국민총소득이 아니라 국민총행복지수가 중요한 시대가 되어야 한다. 국민들이 보편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요구하는데에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2012년 대선에서 대한민국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논의하고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행복은 평등이다
(Happiness Is Equality)

2012년 10월 19일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부탄의 국왕은 우리 모두가 더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는 정부는 국민들의 국민총소득(GNP)이 아니라 국민총행복지수(GNH, Gross National Happiness)를 최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행복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은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유행인걸가?

왜 정부가 경제성장을 덜 강조해야 하는지는 경제성장이 어려울수록 잘 알 수 있다. 올해 유로존은 전혀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영국 경제는 긴축 상태에 들어갔으며, 그리스 경제는 몇년 동안 위축되어 있다. 심지어 중국도 침체에 들어설 전망이다. 성장을 포기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살면 안되는 걸까?

경제성장이 회복된다면 이런 분위기는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강조하는 태도에 대한 진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선진국에서 성장은 덜 중요한 미래 가치가 되고 있다.

성장을 강조하던 태도가 변하게 된 첫번째 요인은 지속가능성에 관한 관심이다. 과연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이전과 같은 속도로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1970년대 사람들은 성장을 계속 하기에는 자연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식량의 고갈이나 재생불가능한 천연 자원이 걱정거리였다. 최근에는 탄소 배출이 주요 문제로 떠올랐다. 2006년 스턴보고서(Stern Review)가 강조했듯이 미래에 뜨거워진 지구에서 튀겨지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는 오늘날의 성장을 어느 정도 희생해야만 한다.

신기하게도 이 토론에서 한가지 금기시되는 내용은 인구에 관한 것이다. 인구수가 적을수록 뜨거워지는 지구 위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될 위험은 줄어든다. 하지만 선진국 정부는 자연스러운 인구의 감소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흡수하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은 더 빨리 성장한다.

최근 들어 성장이 가져오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반드시 더 많은 성장이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계속 성장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시작은 몇십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74년 경제학자 로버트 이스터린(Robert Easterlin)은  "경제 성장은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는가? 몇가지 실증 증거들" 이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다. 많은 국가에서 1인당 소득과 스스로 느끼는 행복의 정도가 관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던 상황에서 그는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낸다.

기본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정도의 최소 소득이 충족된 상황이라면, 행복과 1인당 GNP는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GNP는 삶의 만족도를 측정하기에 매우 부족한 지표라는 뜻이다.이후 대체 지표를 고안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1972년 두 명의 경제학자 윌리암 노드하우스(William Nordhaus)와 제임스 토빈(James Tobin)이 순경제적후생(Net Economic Welfare)이라는 지표를 도입한다. GNP에서 환경오염과 같이 나쁜 생산물을 제외시키고, 여가와 같이 시장 밖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추가한 것이다. 더 많은 여가를 즐기고 더 적은 노동을 하는 사회가 더 많이 일하고 따라서 GNP도 높지만 여가를 덜 즐기는 나라만큼 후생이 높다는 것을 보였다.

최근 들어서는 삶의 질을 측정하는 지수의 범위가 더 넓어지고 있다. 문제는 삶의 양은 측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의 질을 측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양과 질을 어떻게 종합하여 삶의 만족도를 측정하는 지표를 만들어낼 것인가의 문제는 경제학보다는 윤리학의 문제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양을 측정하는 후생 지표에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또 다른 발견이 있다. 한 국가 안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덜 행복하다는 것이다. 즉,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이 확보된 경우 사람들의 행복 수준은 그들의 절대 소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집단과 비교한 상대적 소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다른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우월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열등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결국 후생은 성장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달려 있다.

삶의 만족도는 평균 소득의 성장이 아니라 중위 소득의 증가, 다시말해 일반인들의 소득이 늘어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10명의 사람이 있는데 이 중 1명은 관리자로 1년에 15만 달러를 번다. 다른 9명은 노동자로 1년에 1만 달러를 번다. 이들의 평균 소득은 2만 5천 달러이다. 하지만 90%는 1만 달러를 벌 뿐이다. 이런 식의 소득 배분에서는 성장이 되어도  일반인의 후생이 높아질 리가 없다.

특수한 사례를 든 것이 아니다. 지난 30년간 이어진 부자들의 사회에서 평균 소득은 꾸준히 늘어났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심지어 하락했다. 즉, 미국이나 영국에 거주하는 매우 소수의 사람들이 성장의 과실을 대부분 가져갔다. 이런 경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이 아니라 평등이다.

더 많은 평등은 사회안전망과 건강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기도 하고, 더 많은 여가를 즐기고, 더 많은 시간을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내고, 동료 간에 더 많은 존경을 받으며, 더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끊임없이 자극당하면서 더 많은 상품을 구매하도록 강요당할 것이다. 우리는 터보엔진을 단 아빠와 호랑이 같은 엄마가 아이들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빡빡한 사회에 살고 있다.

오히려 19세기에 살았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더 훌륭한 시민의 소양을 보여준다.

"나는 다른 이를 짓밟고 밀어제끼며, 다른 이와 충돌하고 싸우는 방식을 통해 유지되는 삶을 바라지 않는다. 사회적 삶으로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좋은 상태는 아무도 가난하지 않고 아무도 더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앞으로 나가기를 강요당하며 뒤처질까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다."

부탄의 왕을 비롯하여 수량화할 수 있는 부의 한계를 깨달은 많은 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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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2.10.10정태인/새사연 원장

나는 예술가들이 부럽다. 그들은 미래를 온몸으로 느끼고 문학은 문학대로, 미술은 미술대로, 또 음악은 음악대로 각각 표현해낸다. 그들은 타고난 예언자다. 그런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학자들은 미래를 과거와 현재로부터 추론해야 한다. 불행히도 이 또한 쉽지 않은데,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라면 과거와 전혀 다른 이론체계를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아무리 팍팍한 경제학을 한다 하더라도 대가들은 상당한 예술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술가들처럼 미세한 떨림까지 느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미래의 큰 변화를 감지하고 그것을 새로운 이론으로 설명하고 답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그렇고 케인스가 그렇다.
 
느낌까지 갈 것도 없는 뻔한 미래에 대해서도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평범한 학자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생태문제가 그렇고, 또한 교육이 그렇다. 되풀이하고 또 되뇌지만 ‘대한민국’의 교육은 이미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대한민국’ 전체를 잡아먹을 것이다. 생태문제 역시 이젠 발등의 불이며, 한 나라를 넘어 전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왜 현재의 대선에서 현재의 삶을 위협하고 미래의 삶을 압살할 것이 틀림없는 이 두 문제는 쟁점조차 되지 않는 것일까? 박근혜 후보는 물론이고 문재인, 안철수 후보의 공약에서도 생태와 교육은 뚜렷한 해법을 찾기 어렵다.
 
내 여태까지의 공부로 볼 때 현재의 경제학 수준으론 생태문제의 해법을 제시할 수 없다. 애로와 다스굽타와 같은 당대의 최고 주류경제학자들의 최근 논문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생태문제의 핵심 개념인 ‘지속가능성’을 브룬트란트 리포트(1987)에 따라 “미래 세대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훼손하지 않고 현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으로 정의한다. 이는 추상적인 차원에서 미래 소비의 현재 가치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100년 후에도 우리 아이들이 지금 우리처럼 소비할 수 있으면 된다는 얘기다.
 
이제 경제학자들에게 생태문제는 미래 세대의 행복의 가치를 얼마나 할인하느냐의 문제와 자연자원과 물적자원의 대체 가능성, 즉 기술적 발전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느냐의 질문으로 좁혀진다. 예컨대 극단적으로 하루살이에게 미래 할인율은 1이 되어 생태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기술의 무한한 발전이라는 가정 하에서는 에너지 가격 급등이 자동적으로 에너지 절약 기술을 출현시킬 것이기에 생태문제란 기우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결국 합리적 미래 할인율과 합리적 대체 가능성의 추정이라는 끝없는 논쟁에 빠져들게 된다(무의미하다는 얘긴 아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민주주의도 믿음직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만일 민주주의를 다수결로 단순화한다면 생태문제에 관한 투표 결과는 번번이 실망스러울 것이다. 예컨대 할인율을 낮게 잡는다면, 그리고 기술 개발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경우, 100년 뒤의 아이가 우리와 똑같이 에너지를 쓰게 하려면 우린 당장 우리의 에너지 소비를 제로로 줄이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미래의 아이들은 물론 이렇게 현재의 소비를 대폭 줄이는 데 투표할 것이다. 반면 보통의 어른들은 경제학자들의 의견 대립을 이유로 결단을 유보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미래를 살아야 할 현재의 아이들은 물론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아이들에겐 투표권이 없다.
 
얼치기 경제학자의 결론은 생태정치가 시민들의 예술가적 감성을 자극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원의 대체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으며 앞으로 닥칠 에너지 위기는 70년대의 오일쇼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라는 것을 절감하도록 해야 한다. 핵발전 문제는 아주 좋은 소재다. 그 위협을 실감한 경험이 그리 오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핵발전을 중지시키려면 에너지 소비를 3분의 1 가량 줄여야 한다는 결론도 바로 나온다.

소비절약에 합의하지 않는 한 에너지 절약 기술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제본스 패러독스). 지금 내 책상 옆에 쌓여 있는 논문 더미가 바로 그 증거다. 핵발전의 중지와 에너지 소비를 3분의 1로 줄이기, 그리고 이를 위한 생태세(echo tax)의 부과는 우리의 예술적 감성에 기댄 최소한의 대선 공약일 것이다. 누가 이런 공약을 제시할 것인가? 이번 대선의 내 선택 기준이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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