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 02 / 19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주민들의 건물 공동소유로 높은 임대료 극복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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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연은 2012년 1월부터 '경제를 보는 세계의 시선'이라는 이름으로, 경제에 관해 눈여겨 볼만한 관점이나 주장을 담은 해외 기사, 칼럼, 논문 등을 요약 정리하여 소개했습니다. 2013년부터는 '2013 세계의 시선'이라는 이름으로, 경제 외에 사회 분야까지  확장하여 해외의 좋은 주장과 의견들을 소개합니다.(편집자 주)

  

동네에서 작은 되살림 가게를 하는 청년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되살림 가게란 기증받은 중고물품을 판매하는 곳이다. 우리 동네의 가게는 중고물품 외에도 친환경 제품이나 동네 주민이 직접 만든 제품들을 판매한다. 가게에서 다양한 강좌나 강연도 주최하고, 도움이 필요한 지역 청소년을 후원하기도 한다. 동네의 사랑방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하며 시작했지만 몇 달째 계속 적자를 보고 있다.

가장 큰 부담은 건물 임대료라고 했다. 인건비야 본인이 좀 덜 받으면서라도 줄일 수 있지만 임대료는 그럴 수도 없어서, 한 달 살림을 꾸릴 때 가장 먼저 마련해두어야 할 비용이라고 했다. 이런 사정은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과 같은 사회적 경제 조직뿐만 아니라 시민단체, 소수 정당 등 지역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이다. 높은 집값, 땅값, 전세 값이 젊은 세대들의 결혼과 독립만 늦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씨앗들이 자라나는데도 큰 장벽이 되고 있다.  

좋은 해결책이 없을까? 되살림 가게의 청년은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게나 단체들이 함께 돈을 모아 건물을 사버리는 게 그나마 현실적인 대안 같다고 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분들에게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영국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영국에서는 지방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공간을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구매하여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리즈시의 마을 헤딩리에서는 시의회 소유의 낡은 학교 건물을 지역 주민들이 사들였다. 그리고 주민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지역의 예술가와 기업을 위해 공간을 제공하는 센터로 만들었다. 1000명의 주민들이 각각 5파운드(약 8400원)씩 출자금을 내어 헤딩리개발신탁을 설립한 후, 이를 바탕으로 사업을 추진하였다.  

영국에서는 이를 자산관리 혹은 자산이전이라 부른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또는 민간이 소유한 토지나 건물을 개발신탁에서 싼 가격에 매입하거나 대여해서 수익사업을 포함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토지나 건물을 활용하고 여기서 창출되는 수익을 지역 주민의 공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지난 정권인 노동당 정부가 ‘자산을 일하게 만들기’라는 차원에서 강력하게 지지했던 정책이며. 현 정권인 보수당 정부도 2011년 ‘지역주권법(Localism Act)’을 제정하며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지역주권법은 공공소유의 토지나 건물을 매각할 때 지역공동체가 먼저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하고 있다. 또한 영국 사회적 투자사업 펀드 등은 토지나 건물의 공동구매에 필요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다.  

헤딩리개발신탁의 대표는 주민들의 출자금을 통해 자본 마련을 수월히 할 수 있음은 물론이며, 이 과정을 통해 헤딩리개발신탁은 명실상부한 주민들의 대표조직이 될 수 있었고, 주민들 또한 이렇게 마련된 건물에 더 많은 소속감과 애착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주의할 점도 있는데, 실제로는 주민들을 대표하지 못하는 조직이 이런 제도를 악용하여 건물을 구매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지방정부의 주의가 필요하다. 그 보다 더 근본적인 어려움은 주민들이 스스로를 건물의 주인이라고 느끼고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며, 운영과정에서 주민들 모두에게 책임과 권리가 동등하게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공건물의 공동체 소유
(Community ownership of public buildings)

 

2013년 1월 17일
가디언(Guardian)
앤드류 비비(Andrew Bibby)
 

많은 도시와 마을에서 공공건물의 관리를 협동조합에 위탁하고, 지방 정부는 운영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돕는 형태가 늘어나고 있다. 

지역 의회에서 공동체로의 ‘자산 이전(asset transfer)’은 지난 노동당 정부가 2007년 ‘자산을 일하게 만들기(Making Assets Work)’라는 보고서를 통해 강조했던 정책이며, 현재의 (보수당) 정부로부터도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공동체를 통해 단지 돈을 모으는 것뿐 아니라, 공동체의 의지와 창조력을 통해 공공건물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올 수 있다.  

리즈(Leeds)시의 마을 헤딩리(Headingley)에서 이러한 변화가 뚜렷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곳에서는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리즈 시 의회에서도 방치해두었던 오래된 학교가 변화했다. 허트(Heart)라는 이름으로 공동체를 위한 편의시설과 카페를 갖춘 현대적이고 산뜻한 예술 및 기업 센터로 거듭난 것이다. 최근 로칼리티(Locality, 토지와 건물의 공공소유를 주장하는 런던의 시민단체)가 주최한 공동체 소유의 시민 건물에 관한 토론회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헵덴 브릿지(Hebden Bridge)의 작은 마을 페닌(Pennine)과 리버풀(Liverpool)의 마을 톡스테스(Toxteth)에서도 공동체가 이러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두 마을에서는 버려져있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마을회관을 이제 마을 공동체가 소유하고 관리한다.  

허트의 모기업인 헤딩리개발신탁(Headingley Development Trust)의 회장 레슬리 제프리(Lesley Jeffries)는 낡은 학교의 소유권을 시의회로부터 가져오기까지 힘겨운 5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회고했다. 헤딩리개발신탁은 로칼리티와 코오퍼러티브스 유케이(Cooperatives UK, 영국 최대의 생활협동조합)에 모두 속해 있으며, 활발한 활동을 통해 마을 공동체의 다양한 분야에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는 1000명의 회원이 있으며 각각 5파운드의 회비를 낸다. 이를 통해 마을 사람들이 허트의 존재를 (더 강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제프리는 말한다. “회원 조직이 된다는 것은 강력한 소속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람들은 지방 정부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지는 않는다.” 

또한 그녀는 헤딩리개발신탁이 헤딩리 주민들에게 공동체로서의 자부심을 일깨운다고 말한다. 한 때 헤딩리에서는 다양한 (외부) 사람들이 토지와 건물을 소유했다. 이는 반사회적 행태의 증가로 이어졌다. “헤딩리는 고비를 넘어섰다. 아직 위기를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마을에 기쁨이 다시 찾아오고 있다. 살기 좋은 곳이 되고 있다.” 라고 그녀는 말한다.  

재산세에 부담을 느끼는 일부 지방 의회들에서는 이런 흐름에 우호적이기도 했지만, 대체로성공적인 자산 이전을 가능하게 했던 힘은 공동체 바닥에서부터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자원이 부족하지만 신뢰는 돈독한 공동체의 사람들 스스로가 문제가 되는 건물의 관리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또 있다. 19세기 후반에 발달한 지방 정부는 공공건물의 소유권에 대해 민주주의적인 메커니즘을 제공했다. 헤딩리에서 만들어진 공동체 협동조합을 통한 공동체 소유제도가 (건물에 대한) 민주주의적 책임을 구성원 모두에게 똑같이 적절하게 나눠줄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자산 이전과 관련하여 로칼리티의 수석 관리자인 안네마리 네일러(Annemarie Naylor)는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녀는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을 대표하지 못하는 일부 세력에 의해 공공 건물이 관리될 때 발생하는 문제를 알고 있다. 때문에 그녀는 의회가 시의 자산을 하나의 이익단체나 종교집단과 같은 조직, 다시 말해 개방성이 떨어지는 단체에 넘겨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이 같은 정책적 조건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이미 자산 이전 전략을 실행하고 있는 영국 의회의 소수 의원들을 칭찬했다. 그녀는 성공적인 자산 이전이란 결국 공공 이익을 위해 자산을 관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협동조합 컨설턴트이자 코오퍼러티브스 유케이의 공동체공유사업단(Community Shares Unit)의 고문인 짐 브라운(Jim Brown)은 자산 이전에 참여하고 싶은 조직이라면 자신들이 공동체를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권위의 문제이다. 지방 정부가 당신에게 자산을 이전하도록 설득하려면, 당신은 (주민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회원조직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는 또한 지방 선거에서 투표로 의사를 표명할 수 있을만큼 많은 주민들이 회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이다. 더불어 지방 의원과 관료들은 하루 빨리 이러한 움직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한다.  

브라운은 또한 모두에게 열려 있는 회원가입의 개방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국제적으로 합의된 협동조합의 일곱 번째 원칙 중 첫 번째이기도 하다. 물론 자산 이전과 관련된 모든 공동체들이 협동조합 운동의 일환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는 못하겠지만, 코오퍼러티브스 유케이의 보고서에 의하면 자산 이전을 맡은 공동체로 인해 늘어나는 협동조합 조합원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공동체를 통한 자산 관리가 가지는 또 하나 장점은 회원들로부터 자본을 거둘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헤딩리에서는 이렇게 하고 있다. 낡은 학교를 수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돈은 총 100만 파운드였는데, 개발신탁에 참여한 회원들로부터 걷은 자본금이 10만 파운드를 넘었다. 같은 방법으로 리즈 서부의 마을에서는 지역의 수영장 운영을 맡은 브라믈리 배스(Bramley Bath)라는 단체가 시의회로부터 자산 이전을 받았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방식을 통해서 지지자들로부터 돈을 모으는 과정은 조직을 진정한 주민의 대표체로 만들어 줌으로써 신뢰를 높인다. 하지만 앞서 제프리가 명확히 지적한 것처럼, 자산 이전이 공공 건물을 장기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협동조합을 잘 만드는 기술이 확보되어야 한다. 장기적으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관리구조와 책임감이 담보되도록 도입 초기부터 노력해야 한다. 그녀는 허트를 이용하는 사람 중에도 이곳이 공동체의 노력으로 만들어지고 보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제 “우리는 젊은 세대를 위한 일자리를 만들려고 한다.” 고 (다음 목표를) 밝혔다. 

 
▶ 원문 사이트:
http://83.138.163.233/en/articles/social-enterprise-network/2013/jan/17/community-ownership-public-buildings?C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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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주제별 이슈 /정치2009.04.28 13:30

정치권의 관심‘만’ 4월 29일 보궐선거로 모아지고 있다. 각 당은 접전지역의 선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고, 진보·개혁적 시민사회 역시 이명박 정부의 정책방향을 심판하는 데 힘을 모으고 있지만 시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결국 여전히 대중에게 가장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정서는 ‘반MB’도, ‘선진화’도 아닌 ‘정치적 냉소주의’다.

지난해 서울시 교육감 선거와 올해 경기도 교육감 선거가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을 심판하려는 이들과 경제적 비상상황을 이용해 집권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이들 간의 대리전 성격이 강했다면, 이번 보궐선거 양상은 좀 더 복잡하다. 보수세력 내부의 경쟁구도가 성립된 곳도 있고, ‘진보 대 보수’의 대결구도가 명확해진 곳도 있다. 그런가하면 ‘보수-개혁-진보’의 전통적 3자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곳도 있다.

많은 비율의 유권자들이 적극적인 투표참여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번 보궐선거 역시 ‘누가 조직을 많이 동원하는가’에 따라 당락이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번 보궐선거가 내년 지방선거의 전초전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지방선거 또한 이 구도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유권자의 무관심과 냉소를 탓하기에 앞서 뭔가 ‘공허함’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모두들 ‘변화’를 말하고 있지만 그 변화의 실체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무관심과 냉소의 자리에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분명한 동기를 부여해야 하지만, 모두가 하는 말들은 비슷비슷하다. 강조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정체성’인데, 집권여당의 정체성은 현실에서 보여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분명한 반면, 이에 대한 도전 세력들은 불분명하다.

한미 FTA를 찬성한다는 것인지 반대한다는 것인지(개혁), 새로운 대안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공약(진보), 도대체 기성정치세력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시민. 무소속) ‘관람자’들은 판별하기 어렵다. 결국 남는 것은 이명박 정부편과 반대편을 나누고, 서로 공격하며 자기편이 될 것을 호소하는 ‘적대성의 정치’ 뿐이다. 지난 해 촛불시위에서 표출된 대중의 정서가 ‘변화’였다면, 내년 지방선거가 진정한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변화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이번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의 재구성’이라는 기획 연재는 바로 이런 모호함을 조금만 더 ‘구체화’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물론 이 기획은 ‘제시’되었다고 해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부터 제시될 글들은 단지 논의의 출발을 위한 하나의 단초로서 제공되는 것이고, 다양한 생산적 논쟁과 비판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해 나갈 것이다.

연재의 내용 또한 단순한 ‘정치비평’에 머무르지 않는다. 추상적인 수준의 ‘관점 논쟁’일 수도 있고, 구체적인 사례분석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의 기획에 기여할 수 있는 좋은 주장의 소개나 서평일 수도 있다. 발전적 조언에서부터 비판을 위한 비판까지 다양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면, 이번 기획은 기대한 성과를 내는 것이다. ‘소통’이 부족한 것은 사실 푸른 지붕 아래에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소통’의 성과는 잘 정리된 논리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우여곡절과 ‘오류가능성’에서 살아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글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대안의 가능성’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두 가지 위기

대안적 민주주의, 대안적 지방자치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국 민주주의의 현재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방자치가 단순히 지역수준의 독립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틀거리라면, 지방자치의 재구성도 전체 민주주의의 문제의식 속에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가 처한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해 살펴보자. 이명박 정부 하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진단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한국 민주주의는 1987년 6월 항쟁 이래로 점진적인 발전을 경험해 왔지만,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후 그 근본 토대가 하나 둘씩 허물어지고 있다. 역사 속에 남겨졌다고 믿었던 독재, 반독재 투쟁이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했고, 냉소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민주주의’가 투쟁의 거리에서 단결의 힘을 보장하는 슬로건으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위기’라는 진단 속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공존하고 있다. 첫 번째 위기론은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진단하면서, 과거의 어떤 수준의 민주주의로의 복원을 요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복귀해야할 정점은 아마도 거대한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 탄핵을 저지시키고, 가장 진보적인 의회구성까지 이루어낸 2004년의 형태일 것이다. 그러나 2004년 민주주의로의 복귀는 2005년부터 노골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 지점을 돌파할 수 없으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과거의 문제를 되풀이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민주주의는 여전히 ‘누군가’의 민주주일 뿐 다수 대중은 배제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명백한 한계를 가진 민주주의일 뿐이다.

두 번째 위기론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민주주의가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낡은 것’이 되어버렸지만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음에서 오는 진공적 위기, 즉, 민주주의의 ‘정체’가 진정한 위기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과거 어떤 순간으로의 회귀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일 수 없으며, 새로운 민주주의 체계를 창조해 내는 것만이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위기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함께 갑작스레 나타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1987년 체제 이후의 민주적 체제를 모색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우리가 두 가지 위기론 중 어떤 입장에 서야하는 지는 분명하다. 현재 우리가 처한 민주주의의 위기는 단지 ‘옛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창조하는 것이어야 하며, 지방자치의 문제도 그 틀 속에 배치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2010년 지방선거는 단순히 ‘득표전략’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망과 전략을 대중적으로 합의하고 실천하여 전환적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민주주의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우선 지금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부터 출발해보자.

지금 우리의 민주주의는 ‘선거’민주주의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현실 정치세력과 주류 학자들은 “선거와 다름없는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현재 주류 민주주의 패러다임인 자유민주주의론은 민주주의를 ‘인민들이 자신의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기회를 누리는 것’으로만 본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경쟁을 보장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고, 정치가의 지배와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선거와 일치시키는 이러한 시각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은폐시키고 있다. 사실 민주주의와 선거는 큰 연관이 없으며, 애초에 선거는 민주정보다는 귀족정을 위한 제도였다. 근대적 의미의 대의제가 만들어진 것은 13세기 영국에서 왕의 권력집중에 반대한 귀족들이 봉건적 권리를 요구한 것에서 기인하며, 대의제의 확대와 제도화는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의 정치·경제력의 성장과 맥을 같이 한다.

선거가 ‘민주화’한 것은 노동계급의 투쟁에 직면한 자본가 계급이 이를 수용하고 체제내화 함으로써 탄력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이것은 다시 말해, 지배계급으로서의 자본가가 보통선거권을 수용하더라도 지배계급으로서의 지위를 여전히 향유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사회체제의 전복을 꿈꿨던 레닌은 대의제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공화정이 “자본주의에서 가능한 최상의 정치적 외피”일 뿐이라고 비판했고,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정에서 어떠한 개인, 기관 또는 정당이 변하더라도 지배계급의 권력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전망했다. 그가 보기에는 보통선거권 또한 단순한 노동계급 성숙도의 척도이자, 부르주아 지배의 도구일 뿐이었다.

물론 보통선거권과 대의제에 대한 레닌의 시각은 선거를 매개로 정치적 영향력을 폭발시킬 수 있는 기층 민중투쟁의 가능성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한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세계 정치사에는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좌파세력이 무수히 많지만, 성공적으로 체제이행을 이룬 나라는 없다는 점에서 단지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전망을 실현하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함이 있다.

선거를 통해 체제이행이 가능하다고 봤던 현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가장 큰 반론은 현실에서 그들이 보여준 한계 그 자체였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근간으로 하는 포드주의의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확대된 국가기구와 관료집단에 의해 대중의 역동성이 사라져간 현실은 인민의 지위를 여전히 ‘통치받는 자’에 머물도록 만들었다. 결국 포스트 포드주의 시대, 즉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를 허용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평등적 가치와 이를 기반으로 한 인민주권사상이 자유민주주의 패러다임을 극복하지 못한 채 포섭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인민주권과 자치

민주주의(Democracy)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유래하는 말 뜻 그대로 데모스(Demos. 인민)와 크라티아(Kratia. 지배)의 합성어다. 즉 ‘인민의 지배’를 뜻한다. 고대 그리스의 민회를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떠올리는 것은 비록 여자와 노예, 이방인을 제외했지만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평범한 대중의 정치참여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도 모든 시민들이 민회에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 4세기에는 총 3만 명 정도의 시민 중 민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6,000명 정도였고, 동일한 시민이 매번 참석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민회가 모든 대중과 동일시되었던 이유는 대중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고, 그 민회에 참여하는 대중이 지속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자유를 제약할 공적인 규제와 중요한 의제를 스스로 결정함해 해결했다.

이것이 인민 주권 사상이다. ‘인민의 자기통치’, 즉 자신의 운명을 소수의 권력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통해 결정을 내려 억압과 자유 간의 아슬아슬한 긴장을 극복하려는 도전이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자신을 지배하는 통치자를 선출하는 투표행위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며, 자기 스스로 피지배자이자 지배자가 되는 ‘지배와 피지배의 동일성 원칙’, 즉 ‘자치’를 핵심으로 한다.

이처럼 민주주의에는 매우 혁명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민주주의의 개념 속에 내재한 혁명성, 즉 인민의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탈각시킨 채, 경제적 지배권력이 정치적 지배권력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정당화하는 통과의례로 남아버렸을 뿐이다.

물론 고대 도시국가의 직접민주주의는 현대 국민국가처럼 큰 규모에서 작동하기 어렵다. 모두가 직접 참여할 수 없어 불가피한 ‘위임’이 필요하다. 그리고 위임받은 대표자는 다수의 견해를 따르는 ‘선거’를 통하는 것이 민주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거’가 다수 견해를 반영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환상일 수 있다.

1차 투표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한 후보만을 당선시키는 우리나라의 ‘단순다수대표제’는 오히려 소수의 지지를 받는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을 높인다. 예를 들어 지난 18대 총선의 전국 투표율은 46.1퍼센트였고, 대부분의 당선자는 40퍼센트 초반의 지지를 얻었다. 이 말은 결국 10명 중 4.6명이 투표에 참가해 그 중 1.84명, 즉 기껏해야 2명의 지지를 받은 사람이 당선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8명이 선택하지 않는 후보, 소수의 지지를 얻은 후보가 당선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단순다수대표제 하의 대의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보통선거권이 확립된 이후에도, 사회적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경제적 지배계급은 정치적 다수자로 거듭나기 위해 선거를 이용했다. 정치적 다수자가 되기 위한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확산시킨 것이 바로 ‘정치적 냉소주의’다.

정치는 더러운 것, 회피해야 하는 것, 정치라는 영역에 개입하는 사람들은 다 똑같다는 양비론적 냉소주의는 대중의 정치에 대한 개입과 관심을 차단시켜 투표율을 낮추고, 튼튼한 자금력으로 조직을 발동시킬 수 있는 지배계급의 당선율을 높여 왔다. 따라서 이들은 정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는 것을 불온시하며, 겉으로는 정치 무관심을 지탄하면서도 속으로는 즐긴다.

물론 이런 행태가 지배적인 경향임은 분명하지만, 선거라는 것이 무조건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가로막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헤게모니가 파탄에 이르렀을 때, 선거는 오히려 새로운 사회진보의 중요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최근 남미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체제이행과정이 전통적인 폭력혁명 방식이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선거’를 통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폭력적 방식이건 아니건, 핵심은 바로 민중적 헤게모니, 즉 정치의 주체인 대중의 동의를 확보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수단일 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할 이유가 없다.

국가수준에서 인민주권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시도가, 선출된 대표자에 대한 대중의 통제, 즉 국민투표나 소환, 발안제로 나타날 수 있는 반면에, 지방자치 수준에서는 ‘상대적으로’ 지역주민의 직접 참여가 가능하다.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 대한 소환제가 없고 국민 스스로 투표를 요구할 수 있는 국민투표제(referendum)나 발안제가 없다. 하지만 지방자치에서는 주민투표와 주민소환, 조례청구제 등이 있는 것은 지역 수준에서 어느 정도 인민주권적 가치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합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역수준에 존재하는 각종 주민참여 제도들이 인민주권적 의미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위로부터 허용된 부분적 제도는 지역 주민이 활용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장벽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목표는 인민주권적 가치에 근거하여 현 지방자치의 비민주성을 파악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 과제는 흔히 ‘진보정당’의 역할로 이해되어 왔다. 그렇다면 과연 진보정당은 민주주의와 지방자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활동해 왔을까? 이 문제는 다음 연재글에서 검토한다.

손우정/새사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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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주제별 이슈 2008.02.25 08:46
의원님들 배만 불리는 주민 없는 지방자치



작년 말 주민들의 반발을 샀던 지방의회 의정비가 결국 크게 올랐다. 2월 12일 행정자치부가 발표한 “2008년 지방의원 의정비 지급기준 현황” 자료에 따르면 광역 자치단체 의정비는 평균 13%, 기초자치단체는 평균 36% 인상됐다.

지난 해 말 행자부는 의정비 인상율이 지나치게 높은 44개 자치단체에게 인하를 권고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교부세 감액, 자치단체 국고보조사업 공모·평가 시 감점 등 각종 불이익을 주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들 중 9개 자치단체는 보란 듯이 인상을 강행해 지역주민의 피해만 키웠다.


서울 노원, 강북, 금천, 관악, 중랑, 은평의회와 울산 중구, 동구의회는 재정자립도가 2008년 기준 15.1%~41.8%에 불과한데도 모두 53%~75% 의정비를 인상해 5,000만 원 안팎의 연봉을 확정했다. 이들이 자신의 월급을 올린 대신, 지방자치단체 자체는 행자부로부터 불이익을 받아 예산을 깎이게 되었다. 현재 축소될 예상액은 서울지역의 경우 9,954만 원에서 1억4,190만 원에 이르며, 경기도 의회는 5억3,312만 원에 달한다.


주민 없는 지방 자치, 지역 토호들의 장악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정비를 올리는 것이 지금 지방자치의 현주소이다. 통상 규모가 큰 집단보다 규모가 작은 집단에서 사회적 참여와 협동이 잘 이뤄지지만 우리 지방자치의 현실은 전혀 다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그리고 지방선거 중 가장 투표율이 낮은 게 지방선거다. 근본 원인은 지방자치가 주민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우리 헌법 8장에는 국가와 지방 사이에 권한을 배분하는 지방자치제도를 명시하고 있으나, 관련 내용은 모두 지방자치단체의 역할과 조직에 대한 내용뿐이다. 노무현 정권의 분권은 지방정부의 자율성에만 중점을 둔 단체자치에 머물러 지방정부의 정책과정에 주민이 적극 개입하는 ‘주민자치’ 수준은 크게 미비하다. 또한 지방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종친회나 향후회 등과 같은 친목단체와 민주평통자문회의, 새마을운동조직,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자유총연맹 등에 얽히고설켜있는 지역 토호들이 대부분이다.


결국 지방자치가 진정한 지역공동체를 건설하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의정비 인상을 주도한 한나라당을 뽑을 수밖에 없는 현실


주민들을 얕보는 지방의원들의 독선을 차단할 수 있는 대안은 주민들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주민자치’를 만들어내는 길 뿐이다. 주민자치는 제도적 틀과 결합된 주민운동을 통해 시작할 수 있다. 주민운동은 절실한 동기, 분명한 목표, 실현 가능한 방법을 통해 현실화될 수 있다.


지난 해 주목을 받았던 하남시 주민소환운동이나 2003년 부안 핵시설 반대운동 등은 주민자치를 보여준 맹아라 할 만하다. 하남시 주민소환의 경우 비록 투표율이 2.2% 부족해 시장 소환에는 실패했지만 2명의 시의원은 사상 처음으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이를 실패로만 포장한 언론 때문에 전국적인 주민소환 움직임은 한풀 꺾이고 말았다.


18대 총선을 앞둔 지금, 주민을 대변하겠다는 정치세력들은 엉뚱하게 내부 분란에 빠져 의정비 인상에 반발하고 있는 주민들의 분노를 대변하지도, 조직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런 결과로 의정비 인상을 반대해온

주민들이 의정비 인상을 주도한 한나라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상황이 되었다. 이제는 주민과 국민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을 찾아야한다.


손우정 roots96@hanmail.net / 새사연 연구원


이 글은 이스트플랫폼에 실렸으며 새사연 뉴스레터 R통신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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