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0.25손석춘/새사연 이사장

“몇 해 전 새사연(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손석춘 선생에게서 들은 이야기. 손 선생이 연구소를 구상할 무렵 박원순 선생에게 함께하면 어떨지 의논했던 모양이다. 구상을 들어본 박원순 선생이 그러더란다. ‘손 선생이 하시려는 건 민중 기반의 운동이고 제가 하는 건 시민 기반의 운동이니 따로 하는 게 효율적이지 싶습니다.’ 민중 기반의 운동에 속한 나는 박원순 선생과 견해가 종종 달랐고 두어 번 직접적인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듣고 박 선생이 매우 양식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B급좌파’를 자처함으로써 숱한 ‘윤똑똑이 좌파’들을 민망하게 한 김규항이 올해 초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의 들머리다. 사석에서 나눈 말이 활자화 된 신문을 보며 마음이 불편했지만 굳이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박원순을 ‘친북좌파’로 살천스레 몰아치는 이들에게 사실을 확인해주고 싶어서다. 여기서 딱히 내 성향까지 밝힐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언젠가 <100분토론>에서 말했듯이 나는 ‘친북좌파’가 아니다. 그런데 박원순은 바로 나 같은 사람과도 함께 일하는 데 ‘부담’을 느낄 만큼 신중한 사람이다.

조선일보의 황당한 극우논리

지금 나는 박원순의 그 선택에 전혀 유감이 없다. 그 뒤 희망제작소와 새사연은 각각 고유의 싱크탱크로 자리 잡았다. 의심 많은 이들을 위해 밝혀두거니와 새사연은 아름다운 재단에서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 문제의 핵심은 어느 ‘저명 목사’에 이어 언론인들까지 곰비임비 박원순을 ‘친북좌파’로 저격하는데 있다.

그 가운데 압권은 “우리는 수도 서울을 이렇게 지켰다” 제하에 쓴 <조선일보> 선임기자의 칼럼이다. 그는 한국전쟁의 참극을 길게 늘어놓은 뒤 끝자락에서 자신이 해병대 전 사령관에게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일성 만세’를 부르는 자유가 있어야 된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산당을 허용해야 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넘어갈지도 모를 서울을 왜 그렇게…”라는 질문을 던졌고 “노병은 침묵했다”고 썼다. 어떤가. 김대중과 류근일을 뺨치는 극우 논리다.

저들의 황당함은 ‘친북 좌파’타령에 그치지 않는다. ‘검증’ 명분 아래 한국 사회가 낳은 탁월한 시민운동가를 “병역 기피자”와 “학력 위조범” 더 나아가 “대기업을 겁박한 파렴치범”으로 몰고 있다. 심지어 낡은 구두를 신고 다니며 강남에 사는 위선자로, 마음고생 컸을 박 후보의 아내는 부당한 이익을 추구해 온 사업가로 마구 써댔다. 그들의 주장은 박 후보의 재산이 ‘마이너스’로 나올 때까지, 아니 밝혀진 다음에도 여기저기 퍼져가 적잖은 사람들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덧칠했다.

정치에 입문한지 7년 만에 18억 재산을 40억원으로 불렸으면서도 서민의 눈물을 닦아주는 정치를 해왔노라고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언죽번죽 자부하는 국회의원 나경원과 대기업으로부터 수백 억 원의 기부금을 받아 서민들을 도우면서 자신은 월세로 빚진 채 살고 있는 변호사 박원순을 검증하는 저들의 잣대는 굽을 대로 굽어있다.

물론, 기자도 칼럼을 통해 얼마든지 자신의 주관을 드러낼 수 있다. 더구나 나경원은 ‘사학 재단’의 딸로서 재단만 비호한 게 아니라, 조선·동아·중앙일보에 결국 종합편성 채널을 하나씩 ‘선물’해 준 미디어법 ‘날치기’에도 오지랖 넓게 앞장섰다. 세 신문사로서는 ‘확실한 보답’의 신호를 정치권에 보내고 싶은 마음도 일어날 수 있다.

최소한의 금도는 지켜야 그나마 언론

다만 적어도 언론이라면 최소한의 금도는 지켜야 옳다. 그런데 조선·동아·중앙일보 기사를 톺아보면 ‘찌라시’라는 판단을 지울 수 없다. 서울대 사회계열과 법학과 사이에 무슨 ‘심연’이라도 있는 듯이 보도하는 행태는, 시위로 제적된 당사자가 얼마든지 법대로 복학할 수 있었지만 단국대 졸업에 만족할 만큼 학벌에 개의치 않은 보기 드문 미덕을 원천적으로 가리고 있다.

가만히 따져볼 일이다. 정치 활동 중에 부동산을 사고판 것만으로도 13억의 차익을 챙긴 후보에 견주어 박원순의 경제생활에 도덕성을 들이대는 ‘저격수’는 얼마나 해괴한가. 박원순이 대기업 모금에 나선 걸 비판하려면 마땅히 ‘아름다운 재단’의 설립 자체를 시비 걸어야 옳다.

만일 극좌가 그것을 문제 삼는다면 이해할 수 있어도 재벌과 유착한 정권의 모리배들이 들먹이는 풍경은 국민을 우롱하는 작태다. 13살 소년에게 병역 기피 의혹을 날마다 내뱉는 ‘병역 기피정당’의 얼굴은 또 얼마나 느끼한가.

세 신문에 묻고 싶다. 참으로 박원순이 ‘병역기피자’라고 생각하는가? 학력을 부풀릴 의도로 위조했다고 판단하는가? 박원순은 대기업과 유착했는가? 아니라면 최소한 언론으로서 품격을 지켜가길 권한다. 대체 언제까지 ‘찌라시’로 대한민국을 망칠 셈인가?

말살에 쇠살임에도 왜 저들은 여론몰이에 몰두할까. 이른바 ‘보수 결집’과 더불어 젊은 세대의 정치 혐오와 투표 불참이 목적이다. 유권자들의 슬기가 참 절실한 오늘이다.

이 글은 '미디어 오늘' 에도 실린 글입니다.


신고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1.08.16손석춘/새사연 이사장

민족언론. 어느 새 그 말은 대다수 사람에게 촌스럽게 다가온다.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낡은 시대의 상투어쯤으로 치부된다. ‘21세기 민족언론의 길’이라는 칼럼 제목을 보며 시들방귀로 넘기는 독자들도 적잖을 성싶다.

하지만 나는 오늘 기꺼이 촌스럽고자 한다. 낡은 시대의 상투어에 시퍼렇게 담긴 뜻을 나누고 싶다. 굳이 민족언론을 성찰하는 까닭은 다시 8월15일이 다가와서만은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겨레의 운명이 암담하다 못해 깜깜해서다.

찬찬히 짚어보라. 남쪽의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자화자찬이 넘쳐나지만 바로 그들이 이상으로 좇는 나라, 미국의 유력 일간지에서 ‘정신병동’으로 묘사되고 있다.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곧 이뤄질 듯했던 ‘북미 국교 정상화’가 마냥 늦어지면서 연평도까지 포격하는 군사적 모험주의를 감행하고 있다. 그 남과 그 북 사이에 소통은 꽉 막혀있다.

EBS강사·민족21에 들이댄 ‘색깔 공세’

명토박아둔다. 남과 북은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오늘을 살고 있는 민족 구성원만이 아니라 겨레의 내일을 위해서도 정신병동과 군사적 모험주의는 반드시 넘어서야 옳다. 바로 그래서다. 그 어느 때보다 민족언론의 시대적 요구는 크다.

하지만 어떤가. 들머리에서 강조했듯이 민족언론, 아니 민족이란 말조차 홀대받고 있다. 더 생게망게한 일은 자칭 ‘민족언론’을 부르대던 신문들이다. 그들은 자기 논리에 갇혀 여전히 남북 갈등을 부추기는 데 눈이 빨갛다.

교육방송(EBS)에서 수능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근현대사를 강의하고 있는 교사에게 조선일보가 저지른 ‘색깔 공세’를 보라. “관점 있는 역사 수업, 눈물을 쏙 빼게 만드는 가슴 뭉클한 멘트로 학생들을 열정의 도가니에 빠뜨린 열정쌤”으로 조선일보 스스로 추어올린 교사를 갑자기 ‘친북 반미세력’으로 몰아가는 작태는 단순히 ‘제 버릇 개 못 준다’ 차원에 그칠 일이 아니다. 교사가 강의한 내용을 앞뒤 문맥을 자르고 자극적으로 기사화 한 뒤 그것이 ‘사실 보도’라고 강변하는 모습은 과연 저들이 민족언론 이전에 언론인가를 묻게 한다.

무엇보다 압권은 월간지 민족21의 전·현직 편집국장에게 ‘간첩의 색깔’을 짙게 덧칠하는 보도다. “민족21, 천안함 폭침 주도한 북 정찰총국의 지령 받아”라는 큼직한 통단 제목 아래 ‘지령체계’를 갖춘 도표와 함께 편집한 자극적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민족21 전·현직 편집국장이 일본에서 북의 정찰총국 공작원을 ‘접선’해 지령을 받고 남한에서 수집한 정보를 보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자료들을 상당수 확보했다고 썼다. 기사는 또한 “압수물 분석 등 증거확보 작업을 거쳐 북한 정찰총국 공작원과 접촉한 것으로 드러난 민족21 관계자들을 소환조사할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어떤가. 올해로 창간 10돌을 맞은 민족21은 남북 언론교류의 새 지평을 연 언론사적 의미를 지닌 월간지다. 만일 민족21이 북의 지령을 받은 ‘간첩’들이 제작한 언론이라면 남과 북의 정보당국자들은 모두 줄줄이 사표를 써야 한다. 남은 10년 동안 민족21의 ‘암약’을 방치해왔다는 점에서, 북은 민족21을 창구로 한 ‘공작’에 무능했다는 점에서 모두 그 자리를 물러나야 옳지 않겠는가.

국가정보원이 민족21을 지난해부터 내사했다는 조선일보 보도는 그 시점에 이명박 정권과 각을 세웠던 발행인 명진 스님이 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정치적 탄압의 의혹을 짙게 해준다.

국가정보원의 황당한 수사에 감시를 할 섟에 그들이 흘린 기사에 용춤 추는 조선일보의 모습은 ‘국정원 기관지’라는 명진 스님의 비판이 되레 점잖을 정도다. 교육방송에서 근현대사를 강의한 수능 교사를 ‘친북반미’로 몰아가는 행태와 맞물려 있어 더 그렇다.

남과 북의 소통, 언론인이 가야 할 길은

‘민족의 웅비’를 들먹여오던 언론이 정작 21세기 두 번째 10년대를 맞아서도 국정원과 으밀아밀 정보를 나누며 다른 언론에 ‘간첩’의 색깔을 물들이는 행태는 결코 일회적 사안이 아니다. 그 신문만 보는 영남 독자들에게 민족21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풍부한 자료로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은 어떻게 비춰지겠는가.

바로 그렇기에 민족21은 한국 사회의 여론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꼭 살아남아야 할 월간지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혐의로 이를 말살하려는 권력과 그것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받아쓰는 신문을 보면 새삼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나라당 정권이 재생산 가능성이 높고 ‘국정원 기관지’로 비판받은 신문은 종합편성 채널까지 거머쥐고 있기에 더 그렇다.

조선일보의 모든 기자들이 저 천박한 야만에 동의하진 않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더구나 이 땅에는 조선일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진실을 열어가려는 젊은 언론인들이 언론현장 곳곳에서 커나가고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촌스러운 나는 ‘들판’에서 다시 설렘으로 쓴다. 남과 북을 소통하고 그 소통을 남과 북의 겨레들과 나누는 데 앞장서는 길, 21세기 남과 북의 언론인들이 걸어가야 할 그 길을 정성들여 쓴다. 민족언론.

이 글은 미디어 오늘에도 실린 글입니다.


신고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 어느새 잊혀가고 있다. 그래서다. 7월8일 조계사에서 4000여 명의 조계종 스님들이 문수 스님을 추모하고 4대강 사업 중단을 요구한다는 소식이 반갑다.

수행 중인 한 스님이 스스로 몸을 불살라 어둠을 밝히려 했음에도 대다수 사람에게 시나브로 잊힌 이유는 분명하다. 공론장이 막혀있기 때문이다. 가령 2010년 5월31일, 문수 스님이 정치권력을 질타하며 소신공양을 결행했을 때 한국 사회에서 발행부수가 많은 신문들은 소신공양을 아예 모르쇠 했다. 가령 <조선일보>는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소신공양 사실을 보도할 때 6·2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불리하다는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소신공양은 보도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소신’ 탓일까.

스님의 소신공양 잊혀가는 이유

기실 문수 스님이 낙동강 방죽에서 소신공양을 하기까지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의 책임도 크다. 스님이 수행에 정진해온 정갈한 방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문뭉치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스님이 세속을 바라보는 유일한 창문이었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4대강 삽질’의 문제점을 찾아보기는 어려웠을 터다. 어쩌다 있더라도 ‘구색 갖추기’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가 아닐까. 스님이 소신공양으로 세인들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결심한 까닭은.

하지만 스님이 구독했던 바로 그 신문들은 정작 스님의 소신공양조차 외면했다. 그 뿐이 아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에 충격을 받은 수경 스님이 조계종 승적까지 반납한 사실도 무람없이 비틀어 보도했다. 예컨대 <중앙일보>는 수경 스님의 결단을 다룬 기사를 “환경·NGO 운동했지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었다/ 초심 돌아가 진솔하게 살 것”이라는 3줄 제목으로 돋보이게 편집했다. 사전 정보가 없는 독자들에겐 마치 수경 스님이 그동안 자신이 적극 참여해온 환경운동을 후회하며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조선-동아-중앙일보 노골적 왜곡

하지만 수경 스님의 진실은 우리가 두루 알다시피 명확하다. 수경 스님은 문수 스님 추모제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강의 숨통을 자르고 4대강 전체를 인공 댐으로 만드는 일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승적을 반납한 이유도 조계종단이 문수 스님 추모사업과 ‘4대강 죽이기’ 저지에 더 적극 나서기를 압박하려는 의미가 크다. 결국 <중앙일보> 보도는 수경 스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편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는 모습은 문수 스님의 뜻을 4대강으로만 국한하려는 우리 안에서도 묻어난다. 물론, 당면과제가 4대강 살리기이고 하나부터 집중해서 문제를 풀어가는 게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4대강 살리기운동과 더불어 얼마든지 병행할 수 있는 절실한 과제가 있다.

소신공양을 앞 둔 스님은 “4대강 사업 즉각 중지·폐기”만 강조한 게 아니다. “부정부패 척결”과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호소했다. 유서 맨 마지막에 쓴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요구는 양극화가 무장 커져가는 이 땅에 4대강 못지않게 절박하고 절실한 민생 과제다.

4대강 살리기와 병행해야 할 민생 과제

그럼에도 왜 대다수 사람이 소신공양의 의미를 4대강으로만 좁히는 걸까? 혹 유서의 진실을 마주하기 불편해서는 아닐까.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문수 스님의 호소를 이명박 정권이 모르쇠 할 때, 살아있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옳은가.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과 유서에 명토박은 간절한 염원을 우리가 잊어간다면, 그것은 진실을 직시하는 불편함을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어서가 아닐까. 우리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나는 지금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를.

무엇보다 먼저 나부터 고백하련다. 명색이 진보 싱크탱크에서 일하고 있으면서도 그 물음 앞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그래서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 앞에 더없이 불편하다. 아니, 부끄럽다.

손석춘 2020gil@hanmail.net

*편집자/ 봉은사가 발행하는 월간<판전> 기고문을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신고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대한민국,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조선일보> 강천석 주필의 칼럼 제목이다(2010년 7월2일). 미리 밝혀두거니와 나는 강 주필의 우국충정에 공감한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짧을 것이 분명한 나 같은 세대는 요즘 나라의 장래와 관련한 상서롭지 못한 예감에 몸을 뒤척이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는 강 주필의 토로에선 진정성을, “역사를 돌아봐도, 신문을 펼쳐도 이 어둠침침한 그림자가 뒤에 따라붙는 듯하다”는 대목에선 절박성을 느낀다.

강 주필은 전쟁 시기의 영국과 일본을 비교한다. “50세 이하 영국 귀족의 20%가 1차 대전에서 전사”했고 “귀족과 명문대학 출신의 전사자 비율은 노동자·농민보다 몇 배 높았다”고 쓴다. 반면에 “(2차 대전 당시) 일본 귀족과 제국대학 출신의 전사자 비율은 1·2차 세계대전 때 영국 귀족과 옥스퍼드·케임브리지 출신 전사자 비율과는 비교도 안 되게 낮았다”고 분석한다. 종전 후 이 같은 통계숫자를 확인한 일본 역사가들은 2차 대전이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고 일본은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고 실토했다는 대목에선 사뭇 비장함마저 묻어난다.

강천석 주필의 비장하고 절절한 우국충정

“하류 가 먼저 썩어 오염이 상류로 번져간 사례는 역사에 없다”며 “대한민국을 나라다운 나라로 다시 세우려면 이 나라의 ‘위’와 ‘아래’ 어느 쪽부터 손을 대야 할지는 너무도 자명하다”는 칼럼의 결말은 통렬하다.

그런데 생게망게한 일이다. 그의 칼끝은 이명박 대통령은 물론 국무총리를 비롯해 권력의 핵심에 있는 인사들이 대부분 ‘군 면제’인 현실을 겨누지 않는다. 엉뚱한 곳을 겨눈다. 그는 “천안함 폭침 이후 합동조사단의 발표를 둘러싸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준 미달의 논란”을 개탄한다.
물 론, 칼럼은 “여·야 국회의원들의 군 면제자 비율”이나 “대학교수, 최고경영자, 정상급 연예인”의 비율도 짧게 거론하긴 한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 핵심부와 언론사 사주들 집안의 군 면제자 무리를 언급하지 않는다.

여 야를 함께 뭉뚱그려 비난한 뒤 “민주 투사까지 제 몸에 일부러 상처를 내 병역 의무를 피해갔다”고 강조한다. “민주투사”가운데 과연 얼마나 “일부러 상처를 내” 병역을 기피했을까. 지극히 예외적인 극소수임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민주투사’들을 싸잡아 매도하려는 불순한 깜냥일까.

그래서다. 나는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훨씬 짧을 것이 분명한” 강 주필에게, “나라의 장래와 관련한 상서롭지 못한 예감에 몸을 뒤척이는 일이 부쩍 잦아”고민하는 <조선일보> 주필에게 진정으로 권하고 싶다.

대한민국을 위해 강 주필이 손대야 할 곳

다름 아닌 <조선일보>부터 개혁하라. 보라. 강 주필이 그런 글을 쓴 바로 같은 날 <조선일보>는 “학생인권조례로 ‘촛불홍위병’ 키워 보겠다는 건가” 제하의 사설을 내보낸다.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하려는 시민사회의 움직임을 일러 ‘촛불 홍위병’으로 키우려는 의도라고 살천스레 몰아치는 사설, 바로 그 사설을 책임지는 인물이 주필 강천석 아닌가?

강 주필은 “대한민국을 나라다운 나라로 다시 세우려면 이 나라의 ‘위’와 ‘아래’ 어느 쪽부터 손을 대야 할지는 너무도 자명하다”고 결말을 맺었다. 과연 그러한가. 무엇이 자명한가. 아래로부터 손을 대려고 애면글면 헌신해온 사람들에게 언제나 붉은 색깔을 덧칠해온 신문이 바로 <조선일보> 아니던가.

그렇다. 강 주필이 비장하게 고민을 털어놓을 때가 결코 아니다. ‘우국지사’ 강천석이 지금 대한민국을 위해 할 일이야말로 자명하고 절박하다. 자신이 주필로 앉아있는 <조선일보>부터, 논설위원실부터 손대라.

손석춘 2020gil@hanmail.net
* 이 글은 ’손석춘의 새로운 사회’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블로그 바로가기)


신고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