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11고병수/새사연 이사

 

이번 2012년 12월 7일부터 14일까지 7박 8일 동안 스리랑카를 다녀왔다. 스리랑카는 수단, 소말리아와 같은 아프리카 지역처럼 세계적인 내전 지역이었다. 이번에 방문한 곳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이었고, 정부군과 싸우는 타밀반군은 용맹하기로 유명해서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였다.

 
내전은 2009년에 종식되어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타밀 반군의 점령지는 황폐화되어서 복구가 되지 않고 있고, 난민들은 세계 각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스리랑카 영부인이 운영하는 복지재단의 요청으로 긴급 의료지원을 가게 되었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간의 기록을 연재한다.


오늘은 새로운 곳에서 진료를 하게 되었다. 어제까지 진료했던 곳이 군인들에 의해 통제가 심한 곳인데 비해, 오늘 우리가 새로 가는 곳은 얼마 전 민간인 출입이 허용된 곳으로 아직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지역이라고 한다.


새로운 진료지 물라띠부

거리가 멀고 길이 험하다고 하여 아침 일찍부터 준비를 서둘러 킬리노치를 떠나서 목적지인 물라띠브(Mullaitivu)로 향했다. 킬리노치 시내를 벗어나 논밭을 지나니 조금씩 작은 부락들이 나타난다. 내전을 겪은 지역답게 거의 모든 집들의 담벼락마다 총알자국이 있고, 폭탄에 지붕이 날아간 집들도 보인다. 내전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느 부락은 듬성듬성 남은 몇 개의 시멘트 기둥만이 과거 마을이 있었다는 흔적을 보여주고 있을 정도였다. 일부에서는 부서진 집에 대충 거적을 덮어서 사는 사람들도 있는지 군데군데 빨래가 널려 있기도 했다.

 

길거리의 건물들. 하나같이 수 백발의 총알구멍이 나 있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마을 형태가 아예 사라져버린 어느 부락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검문 역시 점점 심해졌다. 밀림 사이로 난 좁은 흙길 곳곳에 검문소가 있고, 거의 2~300m마다 초소가 있어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진료소를 차린 곳은 군부대 안이었다. 전투는 3년 전에 종결됐지만, 어떤 돌발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우리의 안전을 위해 지역 사령관이 결정한 일이라고 했다. 다시 약품을 내려놓고, 의료장비들을 각 방마다 설치하면서 분주하게 진료 준비를 마쳤다.

정착촌(resettled village)은 부대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숲의 나무를 베어 땅을 고르고, 묻혀있는 지뢰들을 일일이 제거한 후 집 잃은 타밀족 사람들이 살게 하기 위해 건설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눈으로 직접 본 상황은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사람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하나같이 나무로 기둥을 만들고 양철을 씌우거나 둘러서 지붕과 벽을 만들어 놓았다. 전기는 물론 상하수도 시설은 없다. 정착촌 입구에 펌프 하나 있는 게 전부로 보였다. 거기에 의료시설이나 학교가 있을 리는 당연히 기대하기 어렵다. 

전투가 종결되면서 정착촌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시설이 고작 이 정도면 앞으로 5년이 더 지나도 별로 달라질 게 없어 보였다. 나중에 관련자 말을 들어보아도 몇몇 시설 빼고는 여기서 크게 발전하기 힘들다고 했다. 내전 당시 피난민이 2~30만 명 정도였고, 일부는 살 던 곳으로 돌아갔지만, 대다수 주민들이 터전을 잃어 정부나 세계기구가 만들어주는 정착촌에 들어가야 했다. 정착촌은 스리랑카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군데로 분산되어 만들어졌고, 한 정착촌마다 100~200세대(400~800여 명 주민)로 구성되어진다.


한 정착촌의 모습(왼쪽)과 사람들이 사는 집(오른쪽)

이 정착촌에는 현재 165세대에 546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데,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거주민들의 의복이나 신발들은 너무 남루했다. 옷에 땟국물이 흐르는 것은 물론 거의 모든 아이들이 맨발로 거친 땅을 밟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슴이 먹먹해져 손에 쥐었던 사진기 마저 미안해 내려놓고 있었는데, 멀리서 5살쯤 된 한 남자 아이가 우리가 주는 빵을 얻어가기 위해 달려오는 모습을 본 순간 하마터면 웃음보를 터뜨릴 뻔했다. 신발은 한 짝만 있고 다른 짝은 어디 갔는지 없었다. 급해서 한 짝만 신고 온 것인지 아니면 원래 한 짝만 신고 다녔던 건지 모르겠지만, 저 멀리서 뛰어와서는 빵과 우유를 들고 다시 어디론가 뛰어간다. 돌아가는 아이의 표정은 세상 무엇보다도 밝았다. 또 한 여자 아이는 자기보다 조금 작은 어린 남동생을 들쳐 업고 뛰어왔다. 우리는 업힌 아이가 다쳐서 그런 줄 알았는데, 돌아갈 때 보니까 내려서 잘 걸어가는 걸 보고 또 웃어야 했다.

동생을 업고 뛰어와 빵과 우유를 받는 여자아이

빵과 우유를 받고 돌아가는 모습

정착촌에는 눈에 띄게 남자들이 적었고,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많아 보였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전쟁 통에 남자들이 잡혀가거나 죽임을 당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진료 중에는 아이들만 온 경우가 많았는데,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이들만 사는 경우가 많고, 친척이나 주변 사람들이 도와준다고 했다. 내 고향 제주가 그랬다. 60여 년 전 4?3때. 마을 전체가 몰살당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들의 눈물을 우리의 땀으로 씻어줄 수 있었을까

물라띠부의 군부대 안 진료소에서도 역시 군인들이 버스로 인근 정착촌이나 마을들을 돌며 주민들을 실어왔다. 그런데 반나절이 지나가는 데도 어제 들렸던 정착촌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 우리들은 조금 의아해했다. 군인들이 타밀족 출신들이라고 일부러 차별해서 안 데려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곳 주민들이 어제 정착촌에 갔을 때의 모습과 달리 하나같이 깨끗한 옷으로 단정하게 입고 나와 우리가 몰라봤던 것이다. 실제로 진료하다 보니 어제 그 곳에서 봤던 아이들이나 걸을 수 없어서 휠체어에 타고 있던 할머니도 보였다. 낯선 손님들에게 깨끗한 모습을 보이려는 최대한 깨끗한 옷과 단정한 차림으로 왔던 것이다. 

킬리노치에서는 불구가 된 주민들을 드문드문 볼 수 있었는데, 여기 물라띠부에서는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는 주민들. 그 중에서도 제일 기억이 남는 사람은 내게 진료 받은 어느 소녀와 치과 진료를 받았던 여성이었다.  

오른팔이 없이 헐렁한 옷소매를 길게 늘어뜨리고 찾아온 소녀는 몇 년 전 마을에서 벌어진 전투 중에 포탄이 집에 떨어져 가족은 몰살당하고, 자신은 한쪽 팔을 잃은 채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그다지 부끄러워하지 않는 표정으로 덤덤히 통역을 통해 자기의 피부병에 대해서 말하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치료에 대한 생각 보다는 참담한 마음이 앞섰다. 또 한 사람은 왼쪽 다리를 지뢰에 절단 당하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여인이었다.

지뢰에 왼쪽 발을 잃은 한 여인(왼쪽). 누워서 치과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오른쪽)

스리랑카의 비극

지금은 스리랑카로 불리어지는 실론섬은 기원전부터 인도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원주민으로 살고 있었는데, 홍차로 유명해지면서 인도 타밀족 사람들이 대거 이주해 스리랑카 북쪽과 동부 해안을 따라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힌두교도들이지만, 원래의 토착민들은 불교도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난하기도 했지만 오래도록 차별을 겪게 되자 일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30년 가까이 이어져 온 것이다.

전쟁과 살육은 이유를 불문하고 언제나 불의다. 어느 쪽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마을을 불태워 없애거나 가족들을 처형해버렸던 전쟁, 스리랑카 정부군이나 타밀 반란군들의 주민들 학대는 30년 가까이 지속됐다. 타밀 호랑이라고 불리던 반군(LTTE)은 인도나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타밀족의 지원을 받으면서 한 때는 스리랑카 절반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결국 정부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2009년에 궤멸하게 되었다. 비록 반군 지도부의 와해로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여전히 치안은 불안해서 거의 준 계엄, 혹은 위수령 수준으로 군인들의 통제가 심한 것도 당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통역을 맡은 분들은 그 지역에 사는 타밀족 출신들이다. 나는 진료하다가 잠시 쉬는 틈에 같은 종족들이 많이 죽었는데, 이렇게 정부군 쪽 군인들을 보면 증오심이 생기지 않느냐고 물었다.

 “별로 그렇지 않다. 우리 동네에서도 심한 전투가 있었고,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지만, 그것이 여기 있는 군인들 탓인가? 우리는 반란군들도 믿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고는 몇 마디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전쟁이 끝난 게 가장 좋다. 사람들도 너무 지쳤다.”

“내전 중에 정부군이나 반군 모두 주민들을 많이 죽였다. 대부분의 스리랑카의 타밀족들은 가족들과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 지금의 정부는 그걸 해주리라고 믿는다.”

타밀족 사람들은 반군을 잘 따랐는지도 물었다.

“반군에 가담한 사람들은 아주 일부분이었다. 총을 들기 싫어하면 잡아가서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강제 노역을 하기도 했다. 정부군도 그랬지만, 반군들도 어떤 마을 전체를 불태워 버리기도 했다.”

정부군의 무차별한 살상도 전 세계의 지탄을 받기도 했지만, 반군들의 만행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편들지 않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죽이거나 총알받이로 쓰기도 하고, 심지어는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요즘은 ‘하리잔(harijan)’이란 말로 불린다)의 자녀들을 돈 주고 사와서는 훈련시킨 후 도심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사살된 반군 지도자 Vellupillai Prabhakaran는 자동차 모으는 것을 특별히 좋아해서 비싼 돈을 주고라도 원하는 차를 모았다고 한다. 세계 각지의 차들을 모아서 한 군데 전시한 곳이 있었는데, 마지막 전투 중에 전부 불에 타버려서 우리가 지나가는 중에 보았을 때는 불에 타 녹슨 차들이 수 천 대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불에 타 녹슨 채로 남아 있는 수 천대의 자동차들

지금은 내전이 끝났지만 아직도 스리랑카 북부지역은 준 계엄 상태, 혹은 위수령 수준의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지역의 모든 행정 관련된 일들이 군 사령부의 통제 아래 이루어진다. 그에 비해 비교적 군인들이나 타밀족 주민들은 평화롭게 지내는 것 같다.


플룻과 반군 이야기

스리랑카에서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피곤에 지친 채 저녁 어스름에 돌아온 우리들은 식사를 마치고 침실로 들어간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삼삼오오 모여서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로 나눠졌다.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가 등장했고, 마른안주가 차려졌다. 술이 조금씩 들어가자 과거 연예하던 시절 이야기, 한국에서의 병원 이야기 등을 나누고 있었는데, 산부인과 의사 선생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플룻을 들고 나왔다. 악보를 보면서 몇 곡을 뽑고 나서는 즉석에서 신청곡을 받아서 불기도 하였다. 

“반군들이 있으면 밀림에서 플롯 소리를 듣고 총을 내려놓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져왔죠.”

그러면서 이번에는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를 연주한다. 

“양 선생님 플룻 연주에 반군이 아니라 주변 막사를 지키는 정부군 군인들이 총을 내려놓겠어.”

누군가의 우스개에 우리는 박장대소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숲 속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우는 소리와 애절한 플롯 소리가 최고의 화음이 되어 어둠에 둘러싸인 막사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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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7고병수/새사연 이사

 

이번 2012년 12월 7일부터 14일까지 7박 8일 동안 스리랑카를 다녀왔다. 스리랑카는 수단, 소말리아와 같은 아프리카 지역처럼 세계적인 내전 지역이었다. 이번에 방문한 곳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이었고, 정부군과 싸우는 타밀반군은 용맹하기로 유명해서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였다.

내전은 2009년에 종식되어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타밀 반군의 점령지는 황폐화되어서 복구가 되지 않고 있고, 난민들은 세계 각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스리랑카 영부인이 운영하는 복지재단의 요청으로 긴급 의료지원을 가게 되었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간의 기록을 연재한다.


한국에서 스리랑카까지의 이동이 예상보다 길어져 하루의 시간이 날아가 버렸다. 예정대로라면 진료 시작일 보다 하루 먼저 도착해 여유롭게 준비를 하고 진료에 들어가야 했지만,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일찍 부리나케 진료지로 가서 준비를 하게 되었다. 적지 않게 해외 진료를 다녀온 전문가들답게 뚝딱뚝딱하더니 잠시 후 내과, 소아과, 정형외과, 산부인과, 신경과, 치과에 약국까지 갖춰지면서 미니 종합병원을 만들어냈다.

숙소에서 진료할 곳까지 가는 것도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군부대 차량의 호위를 받으며 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근처 초등학교로 우리 같으면 분교 크기인 곳이다. 교실도 몇 개 안 되고, 교장실과 그 옆방을 제외한 온 교실에 전기가 안 들어와 다소 어두운 실내에서 진료를 하게 되었다. 20제곱미터 조금 안 되는 교실마다 진료실을 만들고, 치과 진료실과 약국은 전기가 들어오는 방으로 배정했다.

그런데 우리가 준비를 모두 마칠 때까지도 약속된 통역원들이 오지 않았다. 원래 영어를 할 줄 아는 장교들을 통역원으로 구성했는데, 갑자기 부대 행사가 생겨서 우리 일정에 합류하지 못 한다고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인근 지역에 있는 영어 가능 민간인들을 급히 모은다고 했다. 우리가 있는 북부 지역의 킬리노치(Killinochchi)는 타밀족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영어를 할 줄 알면서 타밀족 언어를 쓰는 사람이어야 했다. 힘들게 왔는데 첫날부터 진료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두 시간 정도 기다렸더니 군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통역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의료 혜택은 절실하지만 부족한 의료 인프라

급조된 통역원들은 대부분 은퇴한 지역 주민들로 나이가 대략 70대 초반이었다. 인도나 스리랑카는 영국 식민지 상태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아직도 흔히 영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이 분들은 그나마 학교 선생님으로 일했거나 다소 교육을 잘 받은 분들이라고 한다.

예정 시간보다 2시간 정도 늦어졌더니 진료실 밖에 만들어진 대기 장소는 주민들로 북적였다. 정신없이 진료를 하면서도 이제는 조금 줄었나싶어 밖을 내다보면, 군인들이 쉬지 않고 버스 한가득 주민들을 실어 오다보니 대기자가 줄어들 생각을 않는다. 점심 먹을 때가 돼서야 겨우 엉덩이를 들고 허리를 한번 쭉 펴고 나서는 물병을 찾았다. 물병 뚜껑이 따져 있지 않은 걸로 봐서 지금까지 물 한 모금도 못 마신 상태였다.

         

대기 중인 주민들

스리랑카는 개발도상국으로 아직 의료시설이나 의사, 간호사들이 절대 부족한 상황이다. OECD 국가들의 평균 활동의사 수가 인구 1,000명당 3.2명이고, 한국이 2명(2011년) 수준으로 적은 편인데, 스리랑카는 0.5명(2006년 수치이지만, 아직도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고 함) 정도밖에 안 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0.1명이었다고 하니 의사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을 것이다. 해외 진료 때마다 그렇듯이 스리랑카에서 진료 활동할 때도 환자들이 끊임없이 오는 것이 이해가 간다.

WHO 자료 인용 (인구 1,000명당 활동 의사 수)

우리가 와 있는 킬리노치에는 종합병원이 하나 있지만, 규모가 작을뿐더러 널리 퍼져있는 밀림이나 드문드문 산재한 마을들에서 찾아오기에는 지역적 접근성이 너무 떨어지는 것도 의료 혜택을 못 받는 큰 이유가 된다. 이런 경우에는 국가에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공공의료시설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개인 병원들은 수지타산이 안 맞으면 작은 마을에는 안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환자 분포

사전에 스리랑카와 같은 열대지역 개발도상국의 보건문제나 질환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준비는 했지만, 진료를 하다 보니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 부딪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피부가 우리보다 훨씬 까매서 익숙하지 않다보니 피부질환을 감별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고, 눈의 흰자위가 노랗게 보이는 경우가 많아서 황달로 보이기 쉬웠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알레르기 비염이나 천식 환자, 그리고 어루러기 환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천식 환자들이 많다는 것은 진료를 하면서 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알레르기 비염과 천식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너무 많았다. 요즘 우스갯소리로 “많아도 너~무 많아.” 그러다보니 진료를 시작한 첫날인데도 기관지 확장제나 관련 약품들이 너무 많이 소모되어 약사님들이 급히 연락을 돌리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원래 이 지역이 선진국처럼 점점 심혈관계 질환들이 많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전염병이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 기생충으로 인한 피부병이나 간염 같은 것들을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왔는데, 전혀 예상치 않은 알레르기 질환이 많을 줄이야...

숙소 근처에서 반딧불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공기가 맑을 텐데 왜 그럴까? 잠시 생각해 보면 이 나라가 밀림이 많고 나무나 풀이 많아서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 아닐까 한다. 돌아가서 관련 자료를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어루러기는 영어 이름으로 ‘Tinea versicolor’라고 하는데, 가슴이나 겨드랑이 주변에 얼룩얼룩 반점들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는 발에 생기는 무좀과 같은 진균들이 원인으로 몸에 땀이 많이 나기 때문인 것 같다.


뜻하지 않은 일들

점심때가 지나서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 무슨 일인가 나가 보았다. 이럴 때마다 한 번씩 사고가 나서 응급 수술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무슨 일일까 신경이 쓰였다.

“수처 세트(suture set)! 빨리!”
“거즈부터 가져와요! 피를 너무 흘려.”

다친 사람은 마을 주민이 아니라 정00 약사였다. 정약사는 약이 떨어질 때마다 급히 진료실을 돌며 처방을 조절하느라고 뛰어다니다가 처마 끝에 달려있던 쇳덩이에 부딪혀서 이마가 찢어진 것이다. 땅바닥에 피를 쏟고 있는 것을 빨리 침대에 눕히고, 지혈을 시키면서 정형외과 선생이 봉합을 했다. 7바늘을 꿰맸으니 많이 찢어진 셈이다.  

오후 진료를 거의 마치고, 약국을 지나면서 창살 사이를 들여다보니 누워 있어야 할 정약사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약 봉투에 약을 담고 있었다.  

“괜찮아요? 어지러울 테니까 좀 누워있어야 해요.”
“어휴, 죄송합니다. 다들 바쁜데, 일을 만들어서....” 

마음씨가 착한 건지, 미련한 건지. 약사의 부상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더니, 잠시 후에는 일부 약이 너무 모자라다고 급한 전갈을 해왔다. 생각지도 못한 질환들이 집중적으로 많다보니 기관지 계통 약들이나 알레르기 관련 약들이 일찍 동이 나기 시작해서 의사들은 관련된 질환의 처방 일수를 줄여야 했다. 심지어 약을 담아 줄 약봉지까지 모자랐다. ‘오늘은 그렇다 치고 내일부터는?’ 약이 없으면 고생 끝에 온 우리의 활동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나는 진료를 마친 후 걱정하고 있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약사 두 분, 봉사팀 스텝, 스리랑카 안내인과 함께 약을 구하러 시내로 나갔다. 시내라고는 해도 우리의 군 단위 정도도 안 되는 작은 곳인데 많은 분량의 약을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거리는 이미 어두워졌는데.  

우리끼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결국 스리랑카 안내인에게 자문을 구했다. 약이 떨어졌다고 말하자니 창피하기도 하고, 우리에게 실망할까봐 얘기를 안 했던 것인데, 그 이야기를 듣고는 현지 안내인 닐 미니(Nil Mini Cabral)씨는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옆에서 들어서는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밝아지는 표정을 보니 뭔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스리랑카 보건복지부에서 약을 구해서 보내주기로 했단다. 늦은 저녁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약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우리가 스리랑카로 오게 된 것과 연관이 있었다. 스리랑카 대통령은 자국의 빈부격차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정책들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부인은 복지와 의료 문제에 관심이 많아 그와 관련한 일들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중에서 특히 신경을 쓰는 일이 있는데, ‘칼튼 수어 우다나(Calton Suwa Udana, Calton Social Health Service)’라는 조직으로 영부인이 직접 운영하는 국민건강 프로그램 운영 조직이다. 

우리가 스리랑카로 오게 된 것도 이 조직과 우리 봉사단체가 연결되어 급히 팀을 꾸려서 오게 됐는데, 영부인이 각별히 신경을 쓰기 때문에 신변 보장에서부터 지금과 같은 비상 상황까지 쉽게 해결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킬리노치의 어두운 거리에서 환호를 질렀고, 밝은 얼굴로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는 약을 구하고 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약이 준비됐다는 기쁨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늦게까지 약봉지를 접었다.
 

* 스리랑카 의료봉사 체험기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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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8고병수/새사연 이사

 

이번 2012년 12월 7일부터 14일까지 7박 8일 동안 스리랑카를 다녀왔다. 스리랑카는 수단, 소말리아와 같은 아프리카 지역처럼 세계적인 내전 지역이었다. 이번에 방문한 곳은 그 중에서도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이었고, 정부군과 싸우는 타밀반군은 용맹하기로 유명해서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하였다.

내전은 2009년에 종식되어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타밀 반군의 점령지는 황폐화되어서 복구가 되지 않고 있고, 난민들은 세계 각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스리랑카 영부인이 운영하는 복지재단의 요청으로 긴급 의료지원을 가게 되었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간의 기록을 연재한다.
 


“고병수 선생, 일정을 바꿔서 스리랑카로 가야겠어요.”

 어느 날 갑자기 걸려온 봉사단체 단장의 전화였다.

“어, 며칠 후면 필리핀 갈 예정인데요.”
“거기보다 스리랑카 취약지구에서 의료진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와서 급한 대로 팀을 꾸려  가기로 했으니 그 쪽으로 합류하세요.”  

아니, 이게 웬 날벼락인가? 지금 일하고 있는 병원 진료 시간표에서 겨우 날짜 조정을 하고 이미 경비까지 냈는데… 거기에 내심 필리핀의 파란 해변을 머릿속에 그리며 흐뭇해하고 있었는데… 원래 가기로 한 곳은 유명한 관광지 근처여서 일이 끝나면 하루 정도 즐겁게 쉬고 올 생각에 들떠 있었다.


지구 한 바퀴만큼 걸린 스리랑카  

그렇게 우리는 다급히 꾸려진 팀으로 스리랑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직 그곳까지 직행 항공이 없어서 경유를 해야 하는데, 일정을 보니 비행기를 세 번이나 타야했다. 인천에서 출발하여 홍콩, 인도 첸나이를 거쳐 스리랑카의 콜롬보.

인원 점검과 약품 및 의료장비 등을 모두 확인하고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데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전날 서울에 내린 폭설로 인해 서울과 연결된 모든 비행기들이 지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유지마다 3시간에서 10시간씩 공항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대기하다가 결국 예상보다 하루가 늦어져서 스리랑카 콜롬보에 내렸다. 여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8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 스리랑카 북부 지역으로 얼마 전까지 반군의 거점지역이었던 킬리노치(Killinochchi)였다.  

인천공항을 떠나 비행기로 28시간, 버스로 8시간을 달려 왔으니 인천 공항을 떠나 꼬박 36시간 걸린 것이다. 요즘은 지구 한 바퀴를 돌아도 하루가 안 걸릴 텐데.

 
군 막사에서의 첫날밤  

한 밤중 절인 배추처럼 피곤에 지쳐서 도착한 곳은 군부대 입구였다. 정문에서는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고, 그곳을 통과하자 어둠 속 여기저기 막사들이 보인다. 조느라고 잘 보지 못했지만 콜롬보를 벗어나 북부 지역으로 오면서 점점 검문이 많아져 매번 멈춰야했다고 한다. 스리랑카 북부 지역은 아직까지도 치안이 불안하고 곳곳에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스리랑카 북부 지역 중요 도로에는 항상 이러한 검문소들이 있어서
모든 차량들이 멈춰서 검문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묵은 부대 내의 숙소 전경

숙소로 안내받은 곳은 장교들이 묵던 막사 중 한 곳으로 몇 개의 방과 부엌, 간단한 야외 식당까지 갖추고 있었다. 서둘러 가지고 온 약품과 의료장비들을 풀어서 정리하고, 방마다 개인 짐을 풀고 나니 밤 10시가 되었다. 우리는 내일부터 있을 진료를 위해 간단히 회의를 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긴 이동의 피로를 안고 오랜만에 등을 붙이게 되자 모두들 몇 분 지나지 않아 잠에 빠져버렸다.

 
 

침대에 누우니 숙소 천장에 도마뱀 한 마리가 스윽 나타나서는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어둠 속에서 나무에 매달려 깩깩대는 원숭이들, 기다렸다는 듯이 날카로운 키스를 퍼부어대는 모기떼들. 창밖으로는 짙고도 하얀 별빛이 쏟아질 듯 불안하게 하늘에 흩뿌려져있다. 그 별빛들 사이로 곡선을 그리며 날아다니는 것은 별똥별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반딧불이였다. 낯설면서도 아름다운 스리랑카에서의 첫날밤이었다.

 


 스리랑카의 현황 Ⅰ (스리랑카의 역사)

전설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인 기원전 6세기경, 인도의 싱할라족 위자야 왕자가 스리랑카로 넘어와서 용맹스러운 사자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실제 역사 기록에도 기원전 540년경에 아리안족의 한 부류인 싱할라족 700여명이 인도에서 지금의 섬으로 넘어와 위자야를 왕으로 세우고 싱할라 왕국을 건설하였다고 하니 비슷해 보인다. 싱할라 왕국은 약 1,500년 동안 왕조를 이어가면서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고, 건축을 비롯한 여러 문화를 만들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누라다푸라’ 사원이다.

스리랑카의 국기에 오른 발에 칼을 쥐고 있는 사자의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싱할라족의 건국 역사를 상징하는 것이다. 싱할라 왕국은 또한 땅이나 섬을 뜻하는 랑카(Lanka)로 불렸으나,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Taprobane, 이슬람 무역상들은 아랍어로 ‘보석의 나라’라는 뜻의 세렌디브(Serendib)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는 영어권으로 넘어가서 Serendipity의 어원이 되어 ‘우연하고도 기분 좋은 발견’이라는 뜻이 되기도 하였다.

왕국에서는 랑카, 외국에서는 주로 세렌디브로 불리던 스리랑카는 1505년에서 1658까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Ceilao라는 이름이 되었고, 1658년에서 1796년까지 네덜란드 식민지였을 때는 Ceylan, 1796년에서 1948년까지 식민 지배를 했던 영국은 Ceylon으로 바꿔 불렀다. 1948년 2월에 독립하였지만, 영연방의 자치국으로 남았고, 1972년 본격적으로 독립국가가 되면서 랑카(Lanka)라는 고대의 이름을 복원하였다. 이때부터 ‘찬란한’ 또는 ‘빛나는’의 뜻을 지니면서 존경의 의미를 나타내는 Sri를 붙여 현재의 스리랑카(Sri Lanka)라는 국명이 되었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싱할라족은 원래 토착세력이었던 반면, 내전의 한 축이었던 타밀족은 과거 영국 지배 시절, 차 농사를 위해 인도에서 유입된 농업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타밀족이었고, 그들은 스리랑카의 북부나 동부 해안을 따라 분포하면서 살게 되었다.

 

* 스리랑카 의료봉사  체험기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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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4고병수/ 새사연 이사

 

오늘은 몽골에서 마지막 진료를 하게 된다. 항상 그렇듯이 떠날 때가 제일 서운한 법이다. 그런 만큼 오늘은 진료실에 앉아서 조금이라도 더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생각하며 주민들을 맞았다.

우리가 진료실 일부를 빌려서 활동하게 된 헨티 아이막(도)의 중심도시인

운드르항에 있는 종합병원 모습. 건물이 낡고 여기저기 파손된 흔적들이 보이지만

재원 부족으로 손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몽골에서 떠올리는 기생충의 추억

이번 몽골진료에서는 다행히 피부연고를 비롯해서 알러지 분야나 위장약 계통은 많이 준비해서 끝까지 모자라지 않았지만, 기생충약은 오전 진료 하자마자부터 5상자에 담아온 것이 바닥을 드러냈다.

진료 첫날부터 주민들에게 요충증의 전형적인 증상인 밤중에 항문이 가려워하는 아이들이 없는지, 혹시 대변을 보면 변에 간혹 회충과 같은 기생충이 보이지 않는지 꼭 물어보았다. 설사 내가 묻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도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러한 것들이 기생충 질환을 의미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먼저 얘기를 해줬다. 가족 중에 아이들이 있으면 예방적으로라도 기생충약을 주고, 기생충 질환이 의심되면 가족 모두가 두 번에 걸쳐 먹어야 한다고 설명하면서 약을 건네다 보니 진료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동이 나 버렸던 것이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 가까이 살던 아이들. 해가 저물어가는 중에도

누나(왼쪽)의 설명을 들으며 공부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문득 어린시절 생각이 난다. 이도 많고, 기생충도 몸 속 가득 가지고 다닌다고 해서 아버지가 내 별명을 ‘동물원’이라고 했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었거나 오염된 식수를 먹다보니 기생충 감염은 일반사였고, 냇물이나 강물에서 놀다보니 전염되기도 쉬웠다. 그 당시 우리가 가졌던 기생충도 대부분 요충과 회충이었다.

그 때를 살던 사람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학교에서 해마다 기생충 검사를 한다며 대변 봉투를 줬던 것을. 나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약을 먹었던 것 같다. 기생충약을 먹는 게 질리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어느 날은 씹던 껌을 집어넣었는데도 유소견자라고 해서 약을 먹어야 했다. 그건 분명 검사하는 사람이 혼나보라고 일부러 양성이라 진단 했을 것이다. 우리가 집에 가져가서는 약을 안 먹을까봐 담임선생님은 주전자와 컵을 교탁에 두시고 본인이 보는 앞에서 일일이 먹는 것을 확인하셨다.

3-40년 전 서양에서는 심근경색, 뇌경색과 같은 질환들이 흔했고, 기생충 질환들은 실제 예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드물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다. 몽골은 아직도 물이 깨끗하지 않은 곳이 많고, 초원에서는 고인 물을 걸러서 먹어야 하기 때문에 기생충 질환에 걸리기 쉽다. 위생 관리뿐만 아니라 식수에 대한 관리가 보건 정책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수줍어하며 구경하던 몽골 의과대학생

진료 첫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내가 사용하는 진료실에서 이것저것 지켜보던 젊은 아가씨가 있었다. 강바트 어융 에르딘(r. Oyun-Erdene)이라는 스물 한 살의 의대생이다. 몽골 국립대학교 의과대학(Health Science University of Mongolia)에 다닌다는 어융 에르딘은 의과대학 3학년(한국에서 의예과 2년을 마치고 본과 1학년인 셈)인데, 지방 병원인 운드르항 종합병원에서 2주일간 실습을 나오게 됐다고 했다.

환자들을 진찰할 때는 아예 내 옆에서 환자의 목구멍까지 같이 들여다보려고 어깨를 부딪히곤 했는데,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녀석이 기특해서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일일이 환자를 볼 때마다 상태를 얘기하고 필요한 진단 내용들을 설명해주었다. 어려운 질환들을 보는 것도 아닌데 몽골말로 공책에 적어가면서 내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예뻤다.

통역사(왼쪽), 의과대학생 어융 에르딘(가운데)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

 

어융 에르딘 덕택에 나는 알기 힘든 몽골의 의과대학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몽골에는 10개의 의과대학이 있는데, 2개의 국립대학과 8개의 사립대학이 있다고 한다. 의과대학 과정은 예과 2년과 본과 4년으로 한국과 같은 6년제를 택하고 있으며, 의과대학 등록금은 다른 일반 대학 등록금 보다 비싸서 한 학기에 100만 투그릭이라고 했다. 다행히 각 학기마다 절반은 국가에서 보조해 주기 때문에 실제로 의과대학생들이 부담하는 금액은 50만 투그릭(한국 돈으로 45만 원 정도)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몽골 처자 어융 에르딘이 다니는 몽골 국립대학교 의과대학의 경우에 자기와 같은 3학년의 학생 수가 400명이라고 말해서 나는 깜짝 놀라 여러 번 물어봐야 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서 보니 2009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의사 수가 한의사 포함하여 인구 1,000명당 1.94명이고, 영국이 2.71명으로 통계에 나오는데, 몽골은 훨씬 그 이전인 2003년 통계로 인구 1,000명당 약 2.7명의 의사를 배출하고 있었다. 몽골 전체 인구가 280만 명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많은 의사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어서 의과대학생 수가 많은 것도 이해가 갔다.

문제는 그들이 의사가 되고 나서 취직자리가 없어서 힘들어 한다는 것과 의사들 중 대부분이 수도인 울란바타르에 있다 보니(2003년 기준으로 인구 1,000명당 울란바타르 4.4명, 아이막 1.7명 분포) 의사의 지역적 불균형 분포가 또 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2005년 자료에는 323개의 솜(한국의 ‘군’에 해당)지역에 우리의 보건소와 같은 병원들이 있고, 다행히 의사들이 어느 정도 근무하고 있지만, 15개 솜에는 의사가 없이 간호사들이 지역의료를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지방에는 의사들의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지역적 의사 수 불균형 분포를 해결하고자 몽골에서는 2006년 이후로 의과대학 졸업을 앞둔 2년 동안 지방 병원에서 전문 의사의 지도 아래 근무하게 하는 정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의사들의 보편적인 수입은 30만 투그릭 정도로 보통 직장인보다 조금 많은 수준으로 한국의 의사들에 비해 적은 편이고, 경력 많은 의사는 60만 투그릭(한국 돈으로 50만 원 안팎)을 버는데 몽골에서 의사들은 그다지 인기 있는 직업은 아니라고 한다. 그나마 수련을 마친 의사들도 직장에 자리를 잡기가 쉽지 않은 것은 마치 1950-70년대 당시, 한국의 의사들이 병원 취직이 어려워서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갔던 것과 지역마다 의료시설 부족을 겪었던 것 등 비슷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몽골을 떠나면서...

서둘러 출발을 해야 겨우 한밤중이라도 울란바타르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전 진료만 하고 일정을 마치기로 했다. 이미 마을 전체에 공지를 한 영향인지 주민들도 오전이 지나자 더 오지를 않았다.

진료실의 짐을 정리하면서 어융 에르딘 학생과는 통역사를 통해서 인사를 나눴다. 열심히 배워서 몽골의 훌륭한 의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아쉬워서 한국에서부터 사용하던 청진기와 몇 가지 기구들을 선물로 주었다. 진료실에 함께 있으면서 눈여겨보니까 그 친구의 실습 가운에는 청진기나 펜 라이트 등 지금쯤이면 필요할 실습 도구들이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나서 기념으로 주었던 것이다.

몽골 사람들은 손님이 올 때 마을 어귀에서 맞이하고, 갈 때는 다시 마을 어귀에 먼저 기다리면서 배웅을 하는 풍습이 있다. 우리 일행들도 아쉬움을 마지막으로 전하며 주민들과 인사를 나눈 후 버스를 타고 다시 오던 길을 돌아가게 되었다.

6박 7일 중 오가는 시간을 빼면 며칠 안 되는 진료였지만, 올해와 같은 경우에는 몽골의 의료 현황에 대해서 진지하게 알고 싶었는데, 여러 가지로 자세히 파악할 수 있어서 보람이 더 컸다. 내년에는 아이들의 A형간염 예방접종에 대한 고민을 미리 해보려고 한다. 필요한 약품들을 더 챙겨서 오는 것도 잊지 말자.

이것저것 1년 후의 계획을 하면서 차창 밖을 보니 돌아가는 길의 절반도 안 왔는데, 해가 지고 억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몽고에서 비는 좋은 징조로 여기지만, 빗물에 길이 여기저기 파손되어 또 가는 여정이 평탄치 않겠구나 하는 걱정에 졸음이 싹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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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고병수/ 새사연 이사

 

몽골의 넓은 국토는 대부분이 초원이고 40% 정도가 사막이다. 아시아 대륙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고, 일 년 내내 건조한 대륙성 기후를 띄고 있어서 늘 맑은 하늘을 보게 된다. 1년 중 260일 가량 구름이 없다고 하니 우리가 보는 몽골의 하늘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늘 그런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날씨도 8월인 요즘은 낮에는 24도 안팎, 밤에는 18도 정도이니 한국의 가을 날씨 같다. 지금쯤 서울이나 제주는 푹푹 찌는 폭염 소식을 연일 뉴스가 전하고 있을 거다.

몽골의 초원과 끝없는 지평선으로부터 퍼져가는 구름들.

가운데 점점이 보이는 것은 이동하는 수 백 마리 말들이다.

 

돌 하나씩은 지니고 다니는 몽골 주민들

각자 흩어져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아침 진료가 시작되는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몽골 주민들은 거의 자기의 진단명을 붙이고 얘기가 시작한다. 어디가 불편하냐고 물으면 배가 아프다고 하지 않고 ‘쓸개에 돌이 있어요.’라고 하든지, 허리가 아프다가 아니라 ‘신장에 돌이 있어요.’라고 얘기한다. 한두 명도 아니고 거의 다가 돌 하나씩은 몸속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몇 년 전 처음 몽골에 왔을 때는 너무 황당하고 놀라서 문진도 자세히 하고, 우리가 가져온 이동식 초음파로 검사도 해봤지만 간이나 신장, 쓸개에 돌이 있다고 얘기하더라도 실제는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더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들은 물이 귀해서 잘 걸러지지 않은 물이나 지하수를 먹기 때문에 석회수가 섞여서 몸속에 돌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콩팥에 만들어지는 신장결석이든 쓸개에 생기는 담석이든 석회수에 많이 섞인 칼슘 침착이 이유가 되며, 그들의 섭식 습관 중 육류 섭취에 의한 콜레스테롤 증가도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은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문제는 허리가 아프면 당연히 콩팥이 나쁜 거고, 그 원인은 주로 신장결석 때문이다 라든가 배가 아프면 담석이 있어서라는 생각을 쉽게 해버린다는 점이다. 그런 것은 주민들뿐만 아니라 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임시로 사용하고 있는 종합병원에 초음파 기계가 한 대뿐인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을 일일이 초음파나 요로검사를 통해 결석이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없다보니 의사들마저 ‘돌이 있어서 아픈 거예요’라고 여겨버리는 것 같다. 일종의 관성적 진료이다.

진료중인 필자

 

알러지가 많은 주민들

또 몽골 주민들에게는 특징적인 질환군이 있다. 바로 알러지로 인한 비염과 피부염들이다. 그것들은 검사보다도 증상과 간단한 진찰만으로도 진단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금새 알 수가 있다.

“알러지 비염이 있어요.”, “피부가 늘 간지러워요.” 찾아오는 많은 주민들이 이런 호소를 한다. 알러지(Allergy)란 말 자체가 과민반응을 뜻하므로 코가 민감하게 반응해서 재채기, 콧물 등의 증상을 나타내면 알러지 비염인 것이고, 피부가 어떤 자극에 자주 가려움증을 나타내면 알러지 피부염인 것이다. 몽골은 공기가 맑고 오염되지 않아서 우리와 같은 도시의 오염 때문에 생기는 자극은 적어도 초원의 풀에서 만들어지는 꽃가루나 관련된 물질들이 알러지 증상을 일으키는 주범이 된다.

알러지 비염의 경우 증상을 물어보지 않아도 주민들마다 코 안을 들여다보면 알러지 비염 환자 특유의 점막 부종 현상을 심심치 않게 확인 할 수 있다. 피부는 햇볕에 타서 거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피부 가려움증을 가지고 있다. 항상 예상을 하고 충분히 가지고 온 항히스타민제나 스테로이드 연고류는 진료가 끝나기 전에 동이 나 버릴 정도다.

내가 제주도로 이사 와서 진료를 하다가 놀랐던 것 중 하나도 바로 서울보다 제주에서 알러지 비염이 더 많다는 것이다. 알러지 비염이 공기의 오염보다는 알러지 유발 물질(‘알러젠’이라고 한다)이 더 중요한 영향을 받는다는 증거다. 풀과 나무가 많아 여러 종류의 식물성 알러지 유발 물질에 노출될 영향이 크고, 특히 제주 산간 도로를 운치 있게 에워싸거나 감귤나무를 보호하려고 둘러친 방풍림인 삼나무들이 문제였다. 지금부터라도 방풍림으로 삼나무 대신 편백나무로 바꾸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제주와는 달리 몽골의 그 많은 초원을 다 바꿀 수도 없고…

밤이 되어 간단한 평가가 끝나고 숙소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대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입을 벌리고 힘들게 숨을 쉬고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봐도 어딘가 상당히 불편한 표정이었다.

“어디가 아파요? 또 귀에 벌레가 들어갔나?”
“아니요. 원래 알러지가 있는데, 너무 코가 막혀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참아보려고 버티다가 어젯밤에는 한숨도 못 잤어요.”

이런 녀석을 미련 곰탱이라고 했던가? 간단히 약을 먹어서 증상을 줄여주면 될 것을 며칠 동안이나 참다니… 서울에 있을 때는 그래도 여름이라서 괜찮았는데, 몽골에 오면서부터 눈이 가렵고 코가 막혀 힘들었다고 했다.

남들은 차타고 오면서 몽골 초원의 푸른 기운을 예찬할 때 이 친구는 남몰래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불쌍하기도 하고, 진작 챙기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급한 대로 주사를 주고, 며칠 먹을 약을 싸주었다.

그 친구가 돌아가고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워 책을 펼쳤다. 멀리 개 짖는 소리, 잠 안자고 두런대는 자원봉사자 학생들 목소리도 조금씩 줄어들고… 시간이 잠시 흘러 풀벌레 우는 소리가 짙어질 때쯤, 내일은 마지막 진료를 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아쉬움을 밤하늘에 전하며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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