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29손석춘/새사연 이사장

선물과 눈물.

취재기자와 편집기자가 작심을 하고 만든 지면의 굵은 활자다. 인천지역 두 기업의 ‘엇갈린 운명’으로 문패를 단 사회면 머리기사는 ‘14년 무파업 선물’이라는 기사와 ‘7년 파업의 눈물’ 기사를 나란히 사진과 함께 올려놓아 지면의 극적 효과를 높였다. 맞물린 사진으로도 강조했듯이 ‘선물’기사는 14년 파업을 하지 않은 동국제강 인천제강소는 초고속 성장으로 성과급 잔치를 벌인 반면에, ‘눈물’ 기사는 ‘전기-통기타 매출 세계 1위’ 기업인 콜트악기가 파업으로 공장 문을 닫는다는 기사다.

‘콜드악기 피멍울’ 3년 만에 정정보도

동아일보가 사회면 머리기사로 돋보이게 편집한 지면의 의도는 또렷하다. 공연히 파업하지 말라는 ‘훈계’와 더불어 노동운동에 대한 살천스런 ‘공격’이다. 이를테면 ‘7년 파업의 눈물’기사를 읽었을 대다수 독자는 울뚝밸이 솟을 수밖에 없다. “노조의 강경 투쟁 때문에 직원 120여명이 평생직장을 잃고 모두 거리로 나앉게 됐다”거나 “노조의 파업으로 생산성이 떨어져 수출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자 해외 바이어들이 고개를 돌렸다”는 대목은 독자들에게 노동조합이 해도 너무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십상이다. 더구나 바로 옆에 소개된 같은 지역의 무파업 회사에서 노사가 축배를 나누는 모습은 노동운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왜곡된 시선을 한층 강화해주었을 터다.

동아일보 2008년 8월2일 11면.

그런데 어떤가. 콜드악기 노동자와 가족들의 가슴을 피멍들게 하고 노동운동에 혐오감을 마냥 부추겼을 그 기사를 내보낸 동아일보는 옹근 3년만인 2011년 9월19일자에 정정보도를 실었다. 물론 지면의 크기는 2면 하단의 1단으로 사회면 머리기사(2008년 8월2일자 11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주 작은 정정보도에서 동아일보는 “콜트악기 부평공장의 폐업은 노조의 파업 때문이라기보다는 사용자 측의 생산기지 해외 이전 등의 다른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고, 노조의 파업은 대부분 부분 파업이어서 회사 전체의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습니다”라고 간결하게 썼다.

이 신문이 정정보도를 낸 이유는 법원 판결 때문이다. 9월9일 서울고등법원은 “회사의 폐업을 노조의 잦은 파업 때문이라고 보도한 것은 허위로 봐야 한다”면서 정정보도와 위자료 500만원을 판결했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다른 도리 없이 낸 짧은 정정에서 나는 그냥 지나칠 수없는 대목을 발견했다.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습니다”가 그것이다. 곧장 동아일보의 취재기자와 담당 데스크, 편집국장에게 묻고 싶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한때는 그 신문사 앞에 ‘대’자가 붙었던 동아일보가 법원의 판결로 “사실이 밝혀졌다”고 써야 했는가?

괜스레 던지는 시비가 아니다. 보라. 법원은 판결문에서 “기자가 확인할 수 있었던 콜트악기 및 관련 회사들의 자산상황과 매출, 당기순이익 등 경영 상태에 대한 자료들만이라도 객관적으로 인용했더라면 이 기사에 나타난 오류는 쉽게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판결문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다시 정색을 하며 묻는다. 항소심까지 기다려야 했는가? 판결문 앞에서 결국 ‘사실이 밝혀졌다’고 정정보도를 냈어야 옳았는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을 동아일보 기자들은 판결이 있고 나서야 인지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다. 나는 그 짧은 정정보도문에서 어떤 성찰도 읽혀지지 않는다. 사회면 머리기사로 콜트악기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을 보도는 물론, 3년이 더 지나 ‘사실이 밝혀졌다’는 1단 크기 정정에서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자로서 양식의 문제다.

평기자비판 삼갔으나 ‘재생산’구조에…

언론인으로 10여년 넘게 칼럼을 써오며 알다시피 나는 평기자들에 대해 비판을 삼가왔다. 이유는 명백했다. 언론사 내부의 구조 때문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내가 실명으로 비판해온 주필과 논설주간들이 곰비임비 재생산되는 풍경을 보며 모든 것을 구조로 이해하고 넘어갔던 과거의 잘못을 새삼 깨달았다. 실제로 노사관계에 대한 일방적 보도는 동아일보만이 아니라 한국의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과연 그 모든 게 구조의 문제일까? 언론사 사주나 고위간부들이 그렇게 보도하라고 ‘지시’라도 했단 말인가?


고등법원이 콜트악기 노동자들이 부당해고됐다는 판결을 내린지 2년이 지나도록 이 회사는 노동자들을 복직시키지 않고 있다. 통상 3개월에서 1년을 넘기지 않는 대법원 판결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명토박아둔다. 항소심 판결 이전에 자신의 기사가 진실이 아니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기자로서 자질의 문제다. 알고도 항소심까지 버텼다면, 그것은 신문사 편집국 전체의 건강 문제다.

터무니없이 적은 위자료와 작은 정정보도 앞에서 나는 굳이 이름을 적시하고 싶지 않은 그 취재기자가 법원의 판결을 자신이 앞으로 걸어갈 ‘기자 인생’에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이길, 자신의 보도에 서러움의 피눈물 쏟았을 사람들 앞에 자성의 눈물 머금길 진심으로 바란다. 세간에서 ‘조중동’으로 비판받는 언론사의 젊은 기자들이 진지하게 한번쯤 자신의 글을 톺아보길 권하는 뜻에서 저 살천스런 지면의 제목을 다시 쓸쓸하게 옮긴다.

선물과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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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6손석춘/새사연 이사장

민족언론. 어느 새 그 말은 대다수 사람에게 촌스럽게 다가온다.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낡은 시대의 상투어쯤으로 치부된다. ‘21세기 민족언론의 길’이라는 칼럼 제목을 보며 시들방귀로 넘기는 독자들도 적잖을 성싶다.

하지만 나는 오늘 기꺼이 촌스럽고자 한다. 낡은 시대의 상투어에 시퍼렇게 담긴 뜻을 나누고 싶다. 굳이 민족언론을 성찰하는 까닭은 다시 8월15일이 다가와서만은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겨레의 운명이 암담하다 못해 깜깜해서다.

찬찬히 짚어보라. 남쪽의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자화자찬이 넘쳐나지만 바로 그들이 이상으로 좇는 나라, 미국의 유력 일간지에서 ‘정신병동’으로 묘사되고 있다.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곧 이뤄질 듯했던 ‘북미 국교 정상화’가 마냥 늦어지면서 연평도까지 포격하는 군사적 모험주의를 감행하고 있다. 그 남과 그 북 사이에 소통은 꽉 막혀있다.

EBS강사·민족21에 들이댄 ‘색깔 공세’

명토박아둔다. 남과 북은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오늘을 살고 있는 민족 구성원만이 아니라 겨레의 내일을 위해서도 정신병동과 군사적 모험주의는 반드시 넘어서야 옳다. 바로 그래서다. 그 어느 때보다 민족언론의 시대적 요구는 크다.

하지만 어떤가. 들머리에서 강조했듯이 민족언론, 아니 민족이란 말조차 홀대받고 있다. 더 생게망게한 일은 자칭 ‘민족언론’을 부르대던 신문들이다. 그들은 자기 논리에 갇혀 여전히 남북 갈등을 부추기는 데 눈이 빨갛다.

교육방송(EBS)에서 수능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근현대사를 강의하고 있는 교사에게 조선일보가 저지른 ‘색깔 공세’를 보라. “관점 있는 역사 수업, 눈물을 쏙 빼게 만드는 가슴 뭉클한 멘트로 학생들을 열정의 도가니에 빠뜨린 열정쌤”으로 조선일보 스스로 추어올린 교사를 갑자기 ‘친북 반미세력’으로 몰아가는 작태는 단순히 ‘제 버릇 개 못 준다’ 차원에 그칠 일이 아니다. 교사가 강의한 내용을 앞뒤 문맥을 자르고 자극적으로 기사화 한 뒤 그것이 ‘사실 보도’라고 강변하는 모습은 과연 저들이 민족언론 이전에 언론인가를 묻게 한다.

무엇보다 압권은 월간지 민족21의 전·현직 편집국장에게 ‘간첩의 색깔’을 짙게 덧칠하는 보도다. “민족21, 천안함 폭침 주도한 북 정찰총국의 지령 받아”라는 큼직한 통단 제목 아래 ‘지령체계’를 갖춘 도표와 함께 편집한 자극적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민족21 전·현직 편집국장이 일본에서 북의 정찰총국 공작원을 ‘접선’해 지령을 받고 남한에서 수집한 정보를 보고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자료들을 상당수 확보했다고 썼다. 기사는 또한 “압수물 분석 등 증거확보 작업을 거쳐 북한 정찰총국 공작원과 접촉한 것으로 드러난 민족21 관계자들을 소환조사할 방침”이라고 보도했다.

어떤가. 올해로 창간 10돌을 맞은 민족21은 남북 언론교류의 새 지평을 연 언론사적 의미를 지닌 월간지다. 만일 민족21이 북의 지령을 받은 ‘간첩’들이 제작한 언론이라면 남과 북의 정보당국자들은 모두 줄줄이 사표를 써야 한다. 남은 10년 동안 민족21의 ‘암약’을 방치해왔다는 점에서, 북은 민족21을 창구로 한 ‘공작’에 무능했다는 점에서 모두 그 자리를 물러나야 옳지 않겠는가.

국가정보원이 민족21을 지난해부터 내사했다는 조선일보 보도는 그 시점에 이명박 정권과 각을 세웠던 발행인 명진 스님이 기자회견에서 밝혔듯이 정치적 탄압의 의혹을 짙게 해준다.

국가정보원의 황당한 수사에 감시를 할 섟에 그들이 흘린 기사에 용춤 추는 조선일보의 모습은 ‘국정원 기관지’라는 명진 스님의 비판이 되레 점잖을 정도다. 교육방송에서 근현대사를 강의한 수능 교사를 ‘친북반미’로 몰아가는 행태와 맞물려 있어 더 그렇다.

남과 북의 소통, 언론인이 가야 할 길은

‘민족의 웅비’를 들먹여오던 언론이 정작 21세기 두 번째 10년대를 맞아서도 국정원과 으밀아밀 정보를 나누며 다른 언론에 ‘간첩’의 색깔을 물들이는 행태는 결코 일회적 사안이 아니다. 그 신문만 보는 영남 독자들에게 민족21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풍부한 자료로 근현대사를 가르치는 교사들은 어떻게 비춰지겠는가.

바로 그렇기에 민족21은 한국 사회의 여론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꼭 살아남아야 할 월간지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혐의로 이를 말살하려는 권력과 그것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받아쓰는 신문을 보면 새삼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나라당 정권이 재생산 가능성이 높고 ‘국정원 기관지’로 비판받은 신문은 종합편성 채널까지 거머쥐고 있기에 더 그렇다.

조선일보의 모든 기자들이 저 천박한 야만에 동의하진 않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더구나 이 땅에는 조선일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진실을 열어가려는 젊은 언론인들이 언론현장 곳곳에서 커나가고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촌스러운 나는 ‘들판’에서 다시 설렘으로 쓴다. 남과 북을 소통하고 그 소통을 남과 북의 겨레들과 나누는 데 앞장서는 길, 21세기 남과 북의 언론인들이 걸어가야 할 그 길을 정성들여 쓴다. 민족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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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이슈 2011.07.13 16:04
2011 / 07 / 13 정태인/새사연 원장

공공재로서의 방송과 민주주의

“조중동매”. 요즘 언론계에 회자되는 이름이다. 종합편성채널을 따낸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를 한꺼번에 부르는 약어다. 재작년 말부터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종편’ 문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정부는 글로벌 미디어 산업의 환상적 그림을 내걸었지만 현재의 광고시장 추세나 앞으로의 경제 상황에 비춰 볼 때 이 중 어느 하나도 살아남는다고 장담할 수 없기에 이들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서 안달이다.

광고시장 자체를 넓히기 위해 이미 간접광고가 나가고 있고, 전문약품과 같은 음의 가치재(남용할 경우 문제를 일으키는 재화)의 광고를 허용한다든가 광고의 배분을 위한 미디어렙에서 종편채널을 제외하려는 시도들이 그것이다. 시청자들은 치열한 경쟁이 자아낼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프로그램을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종편 문제가 제기됐던 재작년말, 작년 초에 방송의 경제학에 관해서 간단하게 소개한 바 있지만 이번에는 광고까지 포함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자. 우선 (공중파) 방송은 전형적인 공공재(public goods)이다. 새뮤얼슨의 고전적 논문 이래로 현재의 표준적 교과서는 공공재를 비경합성(non-rivalry)과 비배제성(non-excludibility)으로 정의한다. 이 중 비경합성이 더 중요한 요소인데 이는 "집합적 소비"(collective consumption)에서 비롯된다.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나는 가수다”를 내가 소비한다(본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소비하는 것을 전혀 방해하지 않는다. 흔히 공공재의 예로 드는 국방과 마찬가지이다. 이름하여 비경합성인데 이는 내가 사과를 사서 먹으면 다른 사람이 동시에 그 사과를 절대로 소비할 수 없는 일반 재화와는 대조적이다. 흔히 이런 재화의 경우에는 공급자가 돈 안 낸 사람을 배제할 수 없다(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 안 낸 사람을 배제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켰는데, 예컨대 수량이 풍부한 마을 공동우물은 공공재지만 계량기가 달린 상수도는 “클럽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공공재의 공급과 소비에는 무임승차(free riding)의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이기적인 소비자(‘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경제학의 기본 가정이다)에게 현재의 방송에 얼마를 낼 용의가 있는지 묻는다면 “나는 백해무익한 TV를 보지 않는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이 낸 돈으로 방송이 나온다면 나는 언제든 공짜로 “나가수”를 즐길 수 있다. 모두 이런 생각을 한다면 아무도 방송사를 경영할 수 없을 것이다. 돈을 벌기는커녕 나가수 제작에 드는 그 엄청난 비용을 어디서 조달할 것인가? 따라서 시장에서는 방송이 공급되지 않는다.

한편 비유하자면 민주주의도 공공재이다. 내가 민주주의를 한껏 누린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민주주의의 덕을 보는 걸 방해하지 않는다. 전두환 같은 희대의 독재자에게만 민주주의가 적용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도 없다. 당연히 민주주의는 시장에서 만들어지지도 않고 돈으로 살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모두 이기적이었다면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목숨까지 거는 비용을 치러 민주주의가 달성된 후 그 과실은 전체가 골고루 누린다면 아무도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인간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동물이 아니라 때론, 또 어떤 사람들은 전체를 위해 희생하고 협력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민주주의는 공공재이고 따라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필요로 한다.

언론과 광고의 경제학

지금 방송은 거의 하루 종일 나가고 있으며 방송3사, 나아가서 유선방송, 인터넷, 신문과 잡지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방송이 공공재라는 것은 방송의 한계비용(한 사람이 더 방송을 보는 데 드는 비용)이 0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일반적인 시장 원리에 따른다면 방송의 시청 가격 역시 0원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럴 경우 사회의 후생이 최대가 된다고, 즉 파레토 효율이 달성된다고 경제학은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슨 돈으로 프로그램을 생산해내는 것일까? KBS1은 시청료로 운영한다. 나머지 방송3사는 광고 수입으로 운영하고 유선방송은 돈 낸 시청자에게만 방송을 내보내고 이와 함께 광고수입도 챙긴다. 한편 신문과 잡지는 구독료와 광고에 의존한다. 한국의 인터넷 언론은 미미한 광고수입과 자발적 기부금으로 수지를 겨우 맞추고 있다.

결국 언론은 자발적, 또는 강제적 요금(시청료나 구독료)과 함께 주로 광고에 의존한다. 상업방송으로 분류되는 SBS은 물론, 공영방송이라는 MBC나 KBS2도 거의 전적으로 광고에 의존한다. 각 방송이 시간대 별로 치열한 시청율 경쟁을 하는 것은 이 지표에 따라 광고의 양과 가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방송사는 시청자와 광고주 양 쪽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양면시장(two-sided market)이라고 부른다. 신용카드회사는 소비자와 가맹점을 매개하면서 수수료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방송사는 시청자와 기업을 매개하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방송사의 비용과 이익을 기업이 광고료로 지불하고 시청자는 공짜로 방송을 보는 것 같은 모습을 띠게 된다.

시청자는 채널을 선택함으로써 특정 프로그램에 투표하고 동시에 광고된 물건을 선택함으로써 특정 상품에 돈으로 투표한다. 만일 기업이 광고료를 물건 값에 전가할 수 있다면 기실 시청자는 소비자로서 프로그램 가격을 지불한 것이 된다. 티비에 광고하는 기업은 대부분 독과점이기 때문에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있으며 실제로 광고료는 기업 회계에서 비용으로 처리된다.

방송사는 시청자의 (한계)짜증비용(nuisance cost, 광고가 너무 많이 나온다면 시청자는 채널을 돌려 버릴 것이다)과 (한계)광고수입을 비교해서 광고의 양과 가격을 결정할 것이다. 다른 한편 광고주는 광고로 인해 상품이 더 팔려서 생기는 한계수입과 광고비용을 비교해서 광고할 프로그램과 가격을 결정할 것이다. 결국 광고의 양과 가격은 두 시장의 균형이 일치하는(또는 적절히 협상되는) 지점에서 결정될 것이다. 이제 방송은 마치 시장에서 거래되는 일반 상품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언론과 광고, 그리고 민주주의

공공재와 관련한 골치아픈 문제가 해결된 것 같지만 정작 중요한 결함은 다른 곳에서 발생한다. 즉 이런 시스템이 언론의 ‘공공성’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공공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학술적으로 정확히 정의되어 있지 않지만(개인 견해로는 각 재화나 서비스의 기술적 특성과 시장구조, 그리고 사회가 합의하는 공공의 가치를 동시에 고려해야 그 재화의 공공성을 정의하는 동시에 가장 적절한 조달 방식을 결정할 수 있다) 언론의 공공성이 민주주의의 유지와 발전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면 언론은 그런 의미에서 체제재(system goods)에 속한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이라는 인식 하에 “거시건전성 규제”가 논의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론도 사회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적 합의에 의한 규제”가 필요하다. 하버마스와 롤즈가 (숙의)민주주의의 실현 조건으로 언론의 공정성, 특히 견해의 다양성(viewpoint diversity)을 들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굳이 시장에 빗대어 말한다면 언론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양면의 시장”을 넘어 “삼면의 시장”(three-side market)의 플랫폼이다.

이런 체제재의 공급 비용을 광고로 충당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방송사의 사활이 결린 시청율 경쟁은 언론의 공공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모델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다양한 결론이 나올 수 있지만 고전적인 주장들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예컨대 스타이너(Steiner)는 이미 1953년에 인기있는 프로그램 유형이 과도하게 복제될 것이라고 예측했고(최근 한국의 각종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라) 노벨상 수상자인 스펜스와 오웬(Spence & Owen, 1977)은 특정 프로그램 유형은 공급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정했다(황금시간 대에 시사 프로그램은 결코 방영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광고로 운영되는 방송사들은 시청료로 유지되는 방송사에 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내 놓지 않는다.

광고주는 잠재고객의 호주머니에 관심이 있으므로 시청자의 연령과 성별, 직업을 고려하게 될 것이고 그런 시선에 부응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게 될 것이다. 예컨대 가전제품은 3-40대 여성이 주로 구매 결정을 한다면 이들을 타겟으로 한 드라마가 방송될 것이다. 광고가 뉴스의 내용마저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은 더 심각하다. 이미 신문에서 드러났듯이 최대의 물주인 특정 재벌에 대한 비판은 아무래도 껄끄러울 것이고 주식시장이나 부동산시장에 관한 뉴스는 분홍빛 전망으로 물들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서 지방방송이나 종교방송 등은 다양한 견해, 특히 소수자의 견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필수적인데 광고는 시청율이 떨어지는 이 방송들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광고시장은 언론의 공공성을 위해서 규제되어야 한다. 과거 한국광고공사, 그리고 현재 논의되고 있는 미디어렙은 견해의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규제 중 하나이다(더 정교한 광고규제와 방송 내용의 규제에 관해서는 다음에 논의하기로 한다).

“조중동매” 등장의 의미

“조중동매”의 등장은 광고주의 협상력이 더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청율 경쟁이 격화되면 어쩔 수 없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게 될 것이다. 이미 “바보상자”로 불리고 있지만 바야흐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음의 가치재”가 될지도 모른다.

이미 신문시장에서 그러했듯이 재벌들이 밀어주는 “조중동매”가 보도 프로그램을 장악할 수 도 있다. 미국 폭스티비의 자극적인 “오라일리팩터”가 보수적인 시각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견해의 획일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이미 국제 보도에서 미국 시각이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국내 보도가 재벌 시각으로 획일화되지 말란 법은 없다.

따라서 나는 KBS의 시청료를 높이는 데 찬성한다. KBS1 뿐 아니라 다른 방송, 나아가서 인터넷언론에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보조금을 줄 필요가 있다. 우선 이들 언론이 공공재라는 기술적 이유때문에 그렇다. 어차피 광고료를 소비자가 부담하는 거라면 차라리 국민의 세금으로 언론을 보조하고 시민이 직접 언론의 생산과 평가에 참여하는 쪽이 올바른 방향이다. 그러나 지금 KBS의 시청료를 높이려는 것은 KBS2로 가는 광고분을 조중동매로 돌리려는 의도가 너무나 빤히 드러난다. 광고 배분의 역할을 하는 미디어렙에서 조중동매를 제외하려는 움직임 역시 이들 방송을 재벌이 직접 밀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청료 인상, 또는 보조금 지급은 광고 및 방송 내용의 시민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과 함께 결정되어야 한다.

모든 공공성 논의가 그렇듯 언론 공공성의 내용도 사회와 역사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특히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를 시민들이 결정해야 한다. 다양한 견해가 언론에 반영되어야 하며 언론은 그 토론의 장(하버마스의 “공론장”)이 되어야 한다. 재벌과 조중동, 그리고 경제관료라는 삼각동맹이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조중동매”는 현재의 심각한 불균형을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높다. “북극의 눈물”과 “삽질경제”, 핵발전의 관계를 재계와 정부는 결코 밝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문화 역시 다양성이 중요하다. 그 누구도 1970년대의 ‘촌스러운’ 드라마나 뉴스를 원하지야 않겠지만 지금처럼 선정성 일변도로 나가는 것(불행히도 ‘막장드라마’의 시청율은 매우 높다) 역시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순간 구질구질한 우리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화면이 사라지고 온통 “까도남”과 “캔디”의 환상적 사랑 이야기 속에서 현실을 잊게 하는 것도 정도가 있을 것이다. 요즘 토요일자 신문에서 가장 먼저 펼쳐보는 서평란이 방송이라고 불가능할까.

광고로 유지되는 언론은 삼각형의 한 꼭지점인 시청자의 목소리를 사실상 빼앗아 갔다. 기업이 돈을 대고 시청자는 공짜로 방송을 본다는 외양이 시민으로서의 의무, 즉 민주주의와 언론 공공성 수호의 의무마저 잊게 만든 것은 아닐까. 물론 세금으로 언론을 보조한다고 해서 정부가 그 역할을 할 수는 없다. 국가권력 역시 언론이 견제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자본과 국가를 동시에 견제해서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라면 시민이 그 주체일 수 밖에 없다. 이강택 언론노조 위원장이 한탄한 것처럼 언론인 스스로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린 ‘언론인 위기의 시대’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단순히 양면시장의 균형을 찾는 경제학을 넘어서 삼면의 균형을 꾀할 방법과 원리를 찾아야 한다. 현재와 같은 역사의 전환기에 언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깨어있는 시민”은 언론의 생산과 평가에 직접 참여하는 힘든 일도 감당해야 한다.

이 글은 '작은 책'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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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1.04.26손석춘/새사연 이사장

삼성, 참 소중한 기업이다. 진정이다. 삼성은 대한민국 경제가 자랑하는 ‘브랜드’ 아닌가. 굳이 삼성을 ‘소중한 기업’이라고 들머리에 못박아두는 이유는 순전히 윤똑똑이들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삼성이나 이건희 회장을 조금이라도 비판할라치면 대뜸 ‘콤플렉스’ 아니냐고 뱁새눈을 건넨다. 더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철없는 짓이라고 도끼눈 부라린다. 어김없이 ‘친북좌파’ 또는 ‘수구좌파’라며 살천스레 딱지를 붙이는 마녀사냥꾼도 활개 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전혀 아니다. 삼성을 비판하는 이유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삼성의 ‘황제’ 이건희를 비판하는 까닭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삼성이어서다. 실제로 한국 경제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국민기업’이라 할 만큼 높다. 삼성 때문에 대한민국이 먹고 산다는 말이 무람없이 나올 정도다. 지나친 과장이지만 삼성의 비중을 과소평가할 이유는 전혀 없다.

대한민국 대표기업 삼성의 천박성

문제의 핵심은 대한민국 대표기업 삼성이 ‘주머니 속 송곳’처럼 드러내는 천박성이다. 물론, 젊은 세대가 삼성그룹에 들어가려고 줄 서 있는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삼성 임직원의 평균 임금이 높다는 사실도, 세밑이 오면 보란 듯이 파격적으로 성과급을 지급한다는 사실도, 등기이사들이 받는 천문학적 연봉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결코 아니다. 삼성의 피라미드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최근 열흘 사이에 곰비임비 불거졌다. 저마다 한국 언론을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신문들이 모르쇠 했지만 하나하나가 일과성으로 넘겨선 안 될 사건이다.  

먼저 삼성전자 엔지니어가 투신자살 97일 만인 4월17일에 장례를 치른 사건이다. 설렘으로 입사한 스물 네 살의 ‘신입사원’은 1년도 안되어 화학물질로 인한 피부병에 걸리고 긴 시간 노동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우울증으로 병가 끝에 다시 현장에 복귀한 날, 기숙사에서 몸을 던졌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는데도 방치된 사실이 드러났다. 항의하는 유족에게 경비들은 폭력까지 휘둘렀다. 유족과 민주시민들이 끈기 있게 맞서자 삼성은 95일 만에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을 약속했다. 그 과정에서 신문과 방송은 어떤 구실을 했는가. 자문해볼 일이다.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는 ‘반올림’은 4월 7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반올림에 따르면 제보 받은 120명 가운데 백혈병을 비롯해 림프 조혈계 암 환자가 56명에 이른다. 25명은 이미 숨졌다. 뇌종양, 유방암, 피부암도 있다. 삼성전자가 가장 많다. 반올림은 반도체 칩을 만드는 과정에서 유해 가스와 물질에 직접 노출된 탓이라고 분석했다. 기자회견에서 충격적 진실을 밝혔지만 대다수 기자들은 외면했다. 

삼성에스디아이 직원들이 해고노동자를 미행하다 덜미 잡힌 사건까지 일어났다. 4월 13일 깊은 밤중에 일어난 일이다. 미행하다 되레 꼬리가 잡힌 ‘직원’은 항의하는 해고 노동자를 차에 매달고 도주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다행히 이를 목격한 택시노동자가 신고해 끔찍한 일은 막았다. 경찰에 연행된 직원은 ‘신조직문화사업국’ 소속이란다. 해고노동자 사이에서 노조설립을 감시하는 부서로 알려져 있다. 대체 저들은 대한민국을 어떤 나라로 생각하는 걸까, 궁금할 정도다. 더 생게망게한 일이 있다. 그 명백한 불법 행위마저 자칭 ‘정론지’들은 눈감았다. 

그래서다. 묻고 싶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과연 그래도 좋은가. 언론인이라면 객관적으로 짚어보라. 대체 어떤 기업이 삼성처럼 사회적 문제를 곰비임비 일으키는가? 열흘 사이에 일어난 세 사건이 모두 시들방귀로 여길 사안인가? 신문과 방송이 보도하지 않거나 축소했기에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지 못할 뿐이다.

더 늦기 전에 언론은  제구실해야

삼성에서 불거지는 문제 앞에서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며 짐짓 초연할 일이 아니다. 생산 현장에 발암 물질이 나오거나 노동조합 결성을 가로막는 일은 한국 민주주의 수준과 곧장 직결된다. 그 말은 보수언론이나 진보언론의 시각에 따라 달리 볼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윤똑똑이들 선동처럼 수구좌파의 ‘삼성 죽이기’는 더욱 아니다. 정반대다. 더 늦기 전에 삼성을 살리자는 절박한 제안이다. 

무릇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게 마련이다. 긴 인류의 역사가 ‘재스민 혁명’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입증해주지 않았던가. 대한민국에서 무장 커져가는 삼성의 권력, 삼성 내부에서 황제 이건희가 만끽하고 있는 권력은 절대적이다.

그래서다.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대로 간다면, 언론이 저 섬뜩한 천박성을 내내 모르쇠 한다면, 삼성과 황제 이건희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하다. 언제나 삼성을 두남두는 언론에 진정으로 호소한다. 더 늦기 전에 삼성을 살려야 한다. 삼성, 참 소중한 기업 아닌가.

이 글은 '미디어 오늘'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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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1.04.26손석춘/새사연 이사장

이 글을 이건희 회장에게 건넬 용기 있는 인재가 과연 삼성에 있을까? 칼럼을 쓰며 슬그머니 묻고 싶다. 삼성과 이건희를 시나브로 망치는 사람들에 대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가령 삼성과 직접적 연관성을 맺고 있는 <중앙일보>를 보라. 초과이익공유제 소동 때와 똑같이 다시 이건희 회장의 발언을 사설 제목으로 삼았다. “못이 튀어나오면 때리려는 원리”라는 사설 제목(2011년 4월23일자)이 그렇다. 이건희 회장이 보기엔 <중앙일보> 논설 책임자가 일을 참 잘한다며 흐뭇했을 성 싶다.

하지만 과연 저널리즘으로 보아도 그럴까. 아니다. 비단 <중앙일보>만이 아니다. 어떤 언론인은 애플의 소송제기에 대해 이건희 회장이 던진 “못이 나오면 때리려는 원리”라는 발언을 두고 “짧으면서 핵심을 찌르는 이건희 식 화법은 마치 화두를 던지듯 빠르고 날카롭다”고 썼다. 민망하다.

“못이 튀어나오면 때리려는 원리” 이건희 발언 찬양

어떤가. “못이 나오면 때리려는 원리”라는 발언이 정말 탁월한 화법일까? 심지어 <중앙일보>가 사설 제목으로 올릴 정도일까?
상식으로 짚어보자. 그 말은 날카로운 화법이긴커녕 대단히 잘못된 비유다. 스스로 삐죽 나온 못을 자임하고 있지 않은가. 굳이 냉철까지 요구하지 않는다. 못이 나오면 때려야 한다. 그래야 모두 안전하다. 나온 못은 잘못 아닌가.
물론, 나는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의 화법을 두고 시비를 걸 생각은 전혀 없다. 이건희는 화법 강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참모들과 들꾀는 언론인들이다. <중앙일보> 사설은 이건희의 잘못된 비유를 사설 제목으로 삼아 짐짓 위엄을 떤다.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업의 활약이 돋보이자 사방에서 때리기가 시작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에 대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못이 튀어나오면 때리려는 원리’라며 ‘전 세계에서 우리에 대한 견제가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앞으로 한국 기업이 잘하면 잘할수록 시샘과 견제는 더욱 심해질 게 분명하다.”

사설 논리 전개로 보아도 ‘튀어나온 못’의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튀어나온 못을 때리는 것은 시샘이나 견제가 아니다. 응당 해야 할 옳은 일이다. 회장 이건희에게 아첨을 늘어놓다 보니 그 잘못된 비유가, 그 품격없는 화법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특별히 할 일 없어서 집무실에 처음 나온 그룹 총수

더 큰 문제는 단순한 화법에 그치지 않는다. 삼성전자 집무실에서 처음 나온 그에게 기자들이 출근한 이유를 묻자 “특별히 할 일이 없어서 왔다”고 답했단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할 일이 없어 집무실에 나왔다? 묻고 싶다. 그 말살에 쇠살을 비판하는 언론은 왜 없는가? 삼성전자의 가장 기본이 되는 부품을 생산하는 현장에서 애먼 젊은이들이 곰비임비 숨져 원혼이 되어가는 데도 그 ‘총수’는 “할 일이 없어” 집무실에 처음 나왔단다.

그럼에도 한국 언론은 그의 화법을 찬양한다. 사설 제목으로 삼는다. 그들은 누구인가? 명토박아둔다. 삼성을, 이건희를 망치는 사람들이다.
새삼 궁금하지 않은가. 이 글을 이건희 회장에게 건넬 용기 있는 인재가 과연 삼성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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