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6.16손석춘/새사연 이사장

방귀가 잦으면? 어떻게 될까? 속담 맞추기 놀이판을 펼치자는 뜻이 아니다. 나름 품격을 갖추려는 성의다. 글 들머리부터 구린내를 폴폴 풍기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지금이 과연 예의를 차릴 때인지 하릴없이 회의가 든다. 대한민국 보수를 보라. 역한 구린내가 진동하고 있지 않은가. 과연 저들이 보수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낸 보기가 있다. 무릇 보수 또는 우파의 가치는 제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 있다. 세계사에 나타난 보수들은 예외 없이 제 민족의 우수성을 부르대며 권력을 누렸다. ‘위대한 프랑스’를 내건 드골이 대표적 보기다. 바로 그렇기에 보수의 가치는 국가보다 사회를, 민족보다 계급을 성찰하는 진보의 가치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보수와 진보는 도무지 경계선을 찾기 어렵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찬찬히 짚어보라. 만일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 독립을 위해 몸 던질 섟에 되레 그 제국주의 국가의 장교로 독립군 학살에 앞장섰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 민족의 보수세력은 적국의 장교로 독립운동가들에게 총을 쏜 그의 반민족행위를 준엄하게 추궁해야 자연스럽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선 지금 자칭 보수들이 참으로 생게망게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 백선엽을 영웅화하는 작태가 그것이다. <중앙일보>가 그를 한껏 띄우자 마침내 국가기간방송인 한국방송(KBS)이 독재자 이승만에 이어 백선엽을 미화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겠다고 공언했다.

백선엽이 누구인가.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 때 간도특설대의 장교였다. 부일세력이 대한민국 곳곳에서 방귀 깨나 뀌며 살고 있기에 이제는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도 대다수 사람들의 감성이 무디어졌다. 하지만 간도특설대 장교는 단순 부일세력이 아니다. 5년 전 <세계일보>의 젊은 기자들이 현장에서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그들은 “조선의 건아들”을 “선구자”로 추켜세웠다. 독립운동 선구자가 아니다. 독립운동 벌이던 선구자들을 ‘토벌’하는 “천황의 뜻을 따르는 특설부대”로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 악명 높았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에 따르면 “토벌하다 항일전사 2명을 포로한 놈들(간도특설대원)은 명월구 공동묘지로 그들을 끌고 가서 전체 대원을 집합시킨 다음 군도로 목을 자르고 시체 옆에서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악행의 증언은 곰비임비 이어진다.

1944년 5월에 마을을 습격한 “놈들은 녀자는 만나는 족족 강간하고 좋은 물건은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그래서다. 그 시절 만주에서 애면글면 살아가던 조선인 가운데는 일본이 패망한 뒤에 “남쪽으로 도망간 친일파를 잡기 위해 6·25 때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한 사람이 많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알다시피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활약’했던 백선엽은 그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지금 대한민국의 신문과 방송에 의해 ‘영웅’시 되고 있다.

어떤가. 모든 일에 붉은 색안경을 쓰고 덤비는 보수언론의 고위간부들에게 미리 밝혀두고 싶다. 나는 지금 백선엽이 한국전쟁에서 한 일을 평가하자는 게 아니다. 다만 부일세력이 득세한 해방 뒤의 대한민국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뜻이다. 그 연장선에서 지금 우리가 백선엽을 영웅화해도 좋은지 묻고 싶을 뿐이다.

두루 알다시피 백선엽을 중용한 사람은 이승만이다. 백선엽은 박정희를 중용했다. 박정희가 간도특설대에 참여했는지는 증언이 엇갈린다. 어쨌든 박정희 또한 만주군 장교로 일본 국왕에 자발적으로 충성을 맹세했던 친일파임엔 틀림없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총통’ 권력을 휘두를 때부터 지금까지 그를 노상 찬양해온 ‘지식인’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자칭 ‘주류 언론인’들이다. 이제 그들은 박정희 찬가에 만족하지 않는다. 민중이 피로 몰아낸 이승만을 다시 불러들인다. 마침내 독립군 학살에 앞장섰던 백선엽까지 온 국민에게 수신료를 받는 <한국방송>이 미화하고 나섰다. 자칭 보수를 자부하는 저들에게 차라리 연민을 느낀다. 대한민국 보수 세력은 존경할 한국인이 그렇게도 없는가?

일찍이 보수적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 역사는 반드시 보복한다고 경고했다. 말끝마다 진보세력에게 ‘수구좌파’로 언구럭부리는 자칭 보수언론의 고위간부들에게 거듭 진지하게 묻는다. 정말이지 이대로 가다가 대한민국 나라꼴이 어떻게 되겠는가?

정직하게 스스로 답하기 바란다.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학살한 경력이 분명하게 드러난 자까지 영웅화한다면, 대체 당신들의 보수는 무엇인가? 박정희의 딸이 차기 정권의 유력자로 떠오르는 상황이기에 눈이 더 침침해졌는가? 넌지시 다음 물음을 다시 던지는 까닭이다. 어떻게 될까? 방귀가 잦으면?

이 글은 주간 미디어오늘에 연재되는 기명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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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손석춘/새사연 이사장

칼끝의 꿀.

보편적 복지를 요구하는 시민사회를 겨냥해 한나라당 대표가 살천스레 던진 말이다. 여야 대표들이 2011년 새해 기자회견에서 곰비임비 복지를 내세우며 상대의 복지정책은 깎아내릴 때였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 안상수는 한 번 늘린 복지 예산은 줄이기 어렵다며 무책임한 복지 남발은 ‘칼끝에 묻은 꿀’을 핥는 것처럼 위험하다고 날을 세웠다.

물론, 한나라당도 복지를 하지 않겠다고 감히 주장하진 않는다. 이른바 ‘맞춤형 복지’나 ‘70% 복지’를 부르댄다.

문제는 맞춤형 복지와 70% 복지의 현실적 의미다. 대통령까지 ‘복지 포퓰리즘’을 들먹이는 이 땅에서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민중의 현실을 찬찬히 짚어볼 일이다.

한나라당 대표는 ‘칼끝의 꿀’이라는 은유로, 대통령은 포퓰리즘이라는 마녀사냥으로 언죽번죽 보편적 복지를 비난할 때, 서울의 한 지하단칸방에 살고 있던 60대 부부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동반 자살했다. 물론, 하루 평균 40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에서 노부부의 자살은 정책 당국자나 언론사 고위간부들에게 하찮은 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60대 부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따른 수급자였다. 절망 속에 세상과 작별한 부부는 유서에서 수급비로는 생활이 안 돼 죽음을 선택한다고 명시했다. 그 유서를 쓸 때 늙은 부부는 피를 토하는 심경이었을 터다. 부부는 40만원의 수급비를 받았다. 하지만 집 월세가 30만원이었다. 남은 10만원으로 서울 도심에서 부부가 살아가려면 생활고는 물론 우울증이 필연 아니었을까. 더러는 어떻게 해서든 일을 찾아야했다고 한가하게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자살한 부인은 양쪽 무릎관절 수술을 받았다. 병원비가 늘어났고 40만원의 수급비로는 약값을 대기도 벅찼다.

비단 수급비의 비현실성만 문제가 아니다. ‘부양의무자 기준’은 기초생활법의 대표적 독소 조항이다. 수급신청자의 소득과 재산은 기준에 부합하는데 부양의무자가 있어 수급신청에서 탈락한 비율이 절반을 웃돈다. 부양의무자 때문에 수급탈락을 받은 사람 가운데 그 의무자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부모 부양은커녕 연락조차 끊어진 자식들의 이름을 애써 감추려는 모습은 콧잔등을 시큰하게 한다. 대다수 젊은 세대들은 결혼해서 자신이 이룬 가족의 생활이 불안하기에 부모 부양에 무장 인색해가는 게 현실이다. 그뿐이 아니다. 공사현장을 전전했지만 실직의 세월을 보내던 50대 노동자가 자신이 부양능력 있다는 이유로 장애인 아들이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참극도 일어났다. 안타깝게도 기초생활법의 사각지대는 넓다. 빈곤층인 데도 쥐꼬리만 한 ‘기초생활비’조차 받지 못하는 국민이 410만 명에 이른다. 수급자의 2.5배가 넘는 규모다.

여기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의미를 폄훼할 뜻은 전혀 없다. 그나마 김대중 정부의 업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민이라면 누구나 건강하고 문화적인 삶을 누려야 한다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기초생활법의 입법정신은 이미 현실에서 큰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기실 기초생활법 시행 10년의 성과는 초라하다. 최저생계비의 상대적 수준은 시나브로 낮아져왔다. 장애를 지녔다거나, 나이가 들거나, 몸이 아프거나, 일감을 찾기 어려운 이들에게 최저생계비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다. 

마침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정당들이 곰비임비 모여 ‘기초생활 권리행동’을 결성하고 6월 임시국회에서 기초생활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국회의원들도 개정안을 발의해 놓았지만 예산날치기 파동으로 아직까지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못했다. 일각에선 총선을 의식한 국회의원들이 변죽만 울린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물론, 부양의무자 조항을 없앨 때 언론이 우려한 ‘황제 수급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수는 없다. 구더기를 침소봉대해 장을 사갈시하기보다는 장의 품질을 높일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책을 촉구하는 게 언론의 본령 아닐까.

앞서 소개한 장애인 아들의 아버지는 빈소주병과 함께 유서를 남겼다. “아들이 나 때문에 못 받는 게 있다. 내가 죽으면 동사무소 분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잘 부탁한다”는 당부와 함께 유서의 마지막을 “아들아 사랑한다”라고 쓴 고인이 목을 맨 곳은 서울 여의도다. 왜 그는 집을 떠나 멀리 여의도까지 왔을까? 바로 국회가 있기 때문이다.

2011년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문제의 핵심은 이명박 정권의 부르대기처럼 무책임한 복지 남발이 아니다. 무책임한 복지 외면이다. 6월 임시국회에서 기초생활법 개정에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하는가를 언론이 면밀히 주시해야 옳다. 그 찬반은 여야 대표들이 저마다 부르대는 복지 정책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터다.

청와대와 한나라당, 그리고 그들의 논리를 확산해온 일부 언론에 간곡히 제안한다. 과잉복지가 아니라 최소복지, 보편복지가 아니라 희소복지, 그것이 지금 이 땅에서 칼끝의 꿀이다.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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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2손석춘/새사연 이사장

마침내 진보대통합연석회의가 긴 산고 끝에 합의를 낳았습니다. 2011년6월1일 새벽 4시를 넘어 합의를 이루기까지 연석회의에 혼신의 힘을 다한 모든 진보 정파에 경의를 표합니다.
개인적으로 진보대통합을 촉구하는 글을 곰비임비 써오면서 <복지국가와진보대통합시민회의>에 상임공동대표의 한 사람으로 동참했던 작은 보람도 느낍니다.
아직 새로운 진보대통합정당이 출범하기까지는 여러 난관이 있겠지만 슬기롭게 이겨가리라 믿습니다. 바라건대 새로운 진보정당이 2012년 4월총선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일궈내고 고통받는 민중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한국 정치를 벅벅이 바꿔가길 기원합니다.

<오마이뉴스> 창간때부터 10년 넘게 칼럼을 기고했습니다. <오마이뉴스>를 좋아하는 분들과 소통하고 싶었습니다만 서툴지 않았나 싶습니다. 기실 그동안 너무 많은 칼럼과 책을 써왔습니다. 마침 출간한 <박근혜의 거울>로 박근혜가 왜 대통령에 적격이 아닌가도 알기쉽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박근혜를 사랑하는 영남지역의 서민들이 많이 읽었으면 합니다만, 현실적으로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당분간 블로그를 쉬면서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상근 연구자들과 더불어 새로운 사회의 대안 연구에 몰입하겠습니다. 옷깃을 여미고 고개숙여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전자우편 주소를 남깁니다(2020gil@hanmail.net).

블로그에 마지막으로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2011년5월24일자)을 올립니다. 연석회의가 합의를 이루기 전에 쓴 글입니다만, 앞으로 진보대통합정당을 국민 대다수인 민중 앞에 선보이기까지 3항18자의 실사구시 철학은 유효한 원칙이 될 수 있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시론 / ‘진보대통합’이 섬길 대상은 민중이다

간단하다. 평생을 진보운동에 바친 진보연대 정광훈 대표가 즐겨 쓴 말이다. 권력이 전교조를 ‘빨갱이’로 살천스레 몰아세울 때다. 전교조가 빨간 수박을 먹고 씨를 뱉으면 ‘참교육’이 열린다고 응수했다. 민중의 삶이 어려운 까닭도 간단했다. 전기가 양에서 음으로 흐르듯이, 권력이 민중에서 나와 정치로 흘러야 하는 데 그게 고장이 났다고 풀이했다.

아스팔트 농사에 열정을 쏟은 ‘우리 시대의 농민’ 정광훈은 진보정당 선거운동 자리에서 삶을 마쳤다. 투사다운 최후다. 정광훈은 해남 동향인 ‘전사 시인’ 김남주와 오월의 투사들이 묻힌 빛고을 땅에 몸을 섞었다. 여느 윤똑똑이 먹물보다 간명하게 현실을 꿰뚫었던 ‘늙은 투사’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감히 진보대통합이라고 판단한다. 미더운 농민들 앞에서 진보대통합에 방점을 찍고 연단에서 내려오던 내게 건넨 당신의 다사로운 눈길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다. 다시 향을 피우고 애잔하게 타오르는 향연 아래 이 글을 쓴다. 마침 진보대통합이 익어가고 있어서다. 다만 마지막 고비가 강파르다. 왜 지금 진보대통합인가부터 새삼 짚고 싶은 까닭이다.

고통 커가고 희망 보이질 않아

진보대통합은 특정 정파의 이념을 위해서가 아니다. 특정 정파의 패권을 위해서도 아니다. 진보세력 개개인의 ‘자리’를 위해서는 더욱 아니다. 진보대통합이 절실하고 절박한 이유는 국민 대다수인 민중의 고통이 무장 커져가는 데도 도통 희망이 없어서다.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가 15년째 민중의 삶을 꼭뒤 누르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부자 감세에 더해 남북 갈등의 증폭으로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의 폐해는 더 전면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서자는 데 동의하는 모든 사람이 그 최소강령으로 뭉쳐야 옳다. 문제는 그것을 넘어 특정 정파의 논리를 고집하는 데 있다. 더러는 자본주의 폐절을 선언하지 않는다고 진보대통합 논의를 폄훼하지만, 통합의 참뜻을 놓친 무책임한 선동이다. 더러는 신자유주의를 엘리트적 개념이라며 부르대지만, 대학 진학률이 80%가 넘은 나라에서 국민이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예단이야말로 엘리트적 발상이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또렷하게 선을 긋지 못할 때, 김대중-노무현 정부처럼 비정규직 확산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정당화한다.

더 큰 갈등은 대북문제에서 불거지고 있다. 분단체제를 넘어서자는 최소강령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종북논쟁’으로 당이 쪼개진 경험을 진보세력은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통합의 자리에선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자신이 ‘종북’으로 시험받고 있다거나, 딴 살림 차릴 명분만 찾는 ‘종파’로 경멸받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면 통합은 어렵다. 남과 북의 신자유주의와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한계를 넘어 선 새로운 사회를 당면목표로 삼고 두 체제의 잘잘못을 따져가자는 데까지 합의한 상황에서 대북문제로 진보대통합이 파국을 맞는다면, 우스개가 될 수 있다.

최소 강령으로 대통합 이뤄내야

더구나 남쪽 진보세력에게 선결과제는 민중의 고통이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자는 데 합의한 ‘동지’들이 대북문제로 통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분단체제의 굴레다.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서자는 최소강령, 아니 최적강령으로 진보대통합을 이룬 뒤 어떤 경제정책, 어떤 통일정책을 펼 것인가를 실사구시의 자세로 섬세하게 만들고 국민 앞에 내놓는 게 집권을 꿈꾸는 대안 정당이 걸어갈 길이다.

눈 돌려 브라질 노동당을 보라. 3기째 집권하며 빈부차를 줄여가고 있다. 그 간단한 사실만으로도 한국 진보세력은 고통 받는 민중 앞에 석고대죄해야 옳지 않을까. 진보대통합이 최우선으로 섬길 대상은 민중이다. 민중의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면 통합은 어렵지 않다. 반신자유주의, 분단체제 극복, 국정대안 제시, 3항18자다. 진보대통합의 실사구시 철학, 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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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4손석춘/새사연 이사장

간단하다. 평생을 진보운동에 바친 진보연대 정광훈 대표가 즐겨 쓴 말이다. 권력이 전교조를 ‘빨갱이’로 살천스레 몰아세울 때다. 전교조가 빨간 수박을 먹고 씨를 뱉으면 ‘참교육’이 열린다고 응수했다. 민중의 삶이 어려운 까닭도 간단했다. 전기가 양에서 음으로 흐르듯이, 권력이 민중에서 나와 정치로 흘러야 하는 데 그게 고장이 났다고 풀이했다.

고통 커가고 희망 보이질 않아

아스팔트 농사에 열정을 쏟은 ‘우리 시대의 농민’ 정광훈은 진보정당 선거운동 자리에서 삶을 마쳤다. 투사다운 최후다. 정광훈은 해남 동향인 ‘전사 시인’ 김남주와 오월의 투사들이 묻힌 빛고을 땅에 몸을 섞었다. 여느 윤똑똑이 먹물보다 간명하게 현실을 꿰뚫었던 ‘늙은 투사’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감히 진보대통합이라고 판단한다. 미더운 농민들 앞에서 진보대통합에 방점을 찍고 연단에서 내려오던 내게 건넨 당신의 다사로운 눈길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다. 다시 향을 피우고 애잔하게 타오르는 향연 아래 이 글을 쓴다. 마침 진보대통합이 익어가고 있어서다. 다만 마지막 고비가 강파르다. 왜 지금 진보대통합인가부터 새삼 짚고 싶은 까닭이다. 진보대통합은 특정 정파의 이념을 위해서가 아니다. 특정 정파의 패권을 위해서도 아니다. 진보세력 개개인의 ‘자리’를 위해서는 더욱 아니다. 진보대통합이 절실하고 절박한 이유는 국민 대다수인 민중의 고통이 무장 커져가는 데도 도통 희망이 없어서다.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가 15년째 민중의 삶을 꼭뒤 누르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부자 감세에 더해 남북 갈등의 증폭으로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의 폐해는 더 전면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서자는 데 동의하는 모든 사람이 그 최소강령으로 뭉쳐야 옳다. 문제는 그것을 넘어 특정 정파의 논리를 고집하는 데 있다. 더러는 자본주의 폐절을 선언하지 않는다고 진보대통합 논의를 폄훼하지만, 통합의 참뜻을 놓친 무책임한 선동이다. 더러는 신자유주의를 엘리트적 개념이라며 부르대지만, 대학 진학률이 80%가 넘은 나라에서 국민이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예단이야말로 엘리트적 발상이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또렷하게 선을 긋지 못할 때, 김대중-노무현 정부처럼 비정규직 확산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정당화한다.

 더 큰 갈등은 대북문제에서 불거지고 있다. 분단체제를 넘어서자는 최소강령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종북논쟁’으로 당이 쪼개진 경험을 진보세력은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통합의 자리에선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자신이 ‘종북’으로 시험받고 있다거나, 딴 살림 차릴 명분만 찾는 ‘종파’로 경멸받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면 통합은 어렵다. 남과 북의 신자유주의와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한계를 넘어 선 새로운 사회를 당면목표로 삼고 두 체제의 잘잘못을 따져가자는 데까지 합의한 상황에서 대북문제로 진보대통합이 파국을 맞는다면, 우스개가 될 수 있다.

최소 강령으로 대통합 이뤄내야

더구나 남쪽 진보세력에게 선결과제는 민중의 고통이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자는 데 합의한 ‘동지’들이 대북문제로 통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분단체제의 굴레다.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서자는 최소강령, 아니 최적강령으로 진보대통합을 이룬 뒤 어떤 경제정책, 어떤 통일정책을 펼 것인가를 실사구시의 자세로 섬세하게 만들고 국민 앞에 내놓는 게 집권을 꿈꾸는 대안 정당이 걸어갈 길이다.

눈 돌려 브라질 노동당을 보라. 3기째 집권하며 빈부차를 줄여가고 있다. 그 간단한 사실만으로도 한국 진보세력은 고통 받는 민중 앞에 석고대죄해야 옳지 않을까. 진보대통합이 최우선으로 섬길 대상은 민중이다. 민중의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면 통합은 어렵지 않다. 반신자유주의, 분단체제 극복, 국정대안 제시, 3항18자다. 진보대통합의 실사구시 철학, 간명하다.

이 글은 경향신문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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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6손석춘/새사연 이사장

삼성, 참 소중한 기업이다. 진정이다. 삼성은 대한민국 경제가 자랑하는 ‘브랜드’ 아닌가. 굳이 삼성을 ‘소중한 기업’이라고 들머리에 못박아두는 이유는 순전히 윤똑똑이들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삼성이나 이건희 회장을 조금이라도 비판할라치면 대뜸 ‘콤플렉스’ 아니냐고 뱁새눈을 건넨다. 더러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철없는 짓이라고 도끼눈 부라린다. 어김없이 ‘친북좌파’ 또는 ‘수구좌파’라며 살천스레 딱지를 붙이는 마녀사냥꾼도 활개 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전혀 아니다. 삼성을 비판하는 이유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삼성의 ‘황제’ 이건희를 비판하는 까닭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삼성이어서다. 실제로 한국 경제에서 삼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국민기업’이라 할 만큼 높다. 삼성 때문에 대한민국이 먹고 산다는 말이 무람없이 나올 정도다. 지나친 과장이지만 삼성의 비중을 과소평가할 이유는 전혀 없다.

대한민국 대표기업 삼성의 천박성

문제의 핵심은 대한민국 대표기업 삼성이 ‘주머니 속 송곳’처럼 드러내는 천박성이다. 물론, 젊은 세대가 삼성그룹에 들어가려고 줄 서 있는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삼성 임직원의 평균 임금이 높다는 사실도, 세밑이 오면 보란 듯이 파격적으로 성과급을 지급한다는 사실도, 등기이사들이 받는 천문학적 연봉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결코 아니다. 삼성의 피라미드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최근 열흘 사이에 곰비임비 불거졌다. 저마다 한국 언론을 대표한다고 ‘자부’하는 신문들이 모르쇠 했지만 하나하나가 일과성으로 넘겨선 안 될 사건이다.  

먼저 삼성전자 엔지니어가 투신자살 97일 만인 4월17일에 장례를 치른 사건이다. 설렘으로 입사한 스물 네 살의 ‘신입사원’은 1년도 안되어 화학물질로 인한 피부병에 걸리고 긴 시간 노동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우울증으로 병가 끝에 다시 현장에 복귀한 날, 기숙사에서 몸을 던졌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는데도 방치된 사실이 드러났다. 항의하는 유족에게 경비들은 폭력까지 휘둘렀다. 유족과 민주시민들이 끈기 있게 맞서자 삼성은 95일 만에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을 약속했다. 그 과정에서 신문과 방송은 어떤 구실을 했는가. 자문해볼 일이다.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을 지키는 ‘반올림’은 4월 7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반올림에 따르면 제보 받은 120명 가운데 백혈병을 비롯해 림프 조혈계 암 환자가 56명에 이른다. 25명은 이미 숨졌다. 뇌종양, 유방암, 피부암도 있다. 삼성전자가 가장 많다. 반올림은 반도체 칩을 만드는 과정에서 유해 가스와 물질에 직접 노출된 탓이라고 분석했다. 기자회견에서 충격적 진실을 밝혔지만 대다수 기자들은 외면했다. 

삼성에스디아이 직원들이 해고노동자를 미행하다 덜미 잡힌 사건까지 일어났다. 4월 13일 깊은 밤중에 일어난 일이다. 미행하다 되레 꼬리가 잡힌 ‘직원’은 항의하는 해고 노동자를 차에 매달고 도주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다행히 이를 목격한 택시노동자가 신고해 끔찍한 일은 막았다. 경찰에 연행된 직원은 ‘신조직문화사업국’ 소속이란다. 해고노동자 사이에서 노조설립을 감시하는 부서로 알려져 있다. 대체 저들은 대한민국을 어떤 나라로 생각하는 걸까, 궁금할 정도다. 더 생게망게한 일이 있다. 그 명백한 불법 행위마저 자칭 ‘정론지’들은 눈감았다. 

그래서다. 묻고 싶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업이 과연 그래도 좋은가. 언론인이라면 객관적으로 짚어보라. 대체 어떤 기업이 삼성처럼 사회적 문제를 곰비임비 일으키는가? 열흘 사이에 일어난 세 사건이 모두 시들방귀로 여길 사안인가? 신문과 방송이 보도하지 않거나 축소했기에 쟁점으로 부각되고 있지 못할 뿐이다.

더 늦기 전에 언론은  제구실해야

삼성에서 불거지는 문제 앞에서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며 짐짓 초연할 일이 아니다. 생산 현장에 발암 물질이 나오거나 노동조합 결성을 가로막는 일은 한국 민주주의 수준과 곧장 직결된다. 그 말은 보수언론이나 진보언론의 시각에 따라 달리 볼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윤똑똑이들 선동처럼 수구좌파의 ‘삼성 죽이기’는 더욱 아니다. 정반대다. 더 늦기 전에 삼성을 살리자는 절박한 제안이다. 

무릇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게 마련이다. 긴 인류의 역사가 ‘재스민 혁명’에 이르기까지 생생하게 입증해주지 않았던가. 대한민국에서 무장 커져가는 삼성의 권력, 삼성 내부에서 황제 이건희가 만끽하고 있는 권력은 절대적이다.

그래서다. 전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대로 간다면, 언론이 저 섬뜩한 천박성을 내내 모르쇠 한다면, 삼성과 황제 이건희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하다. 언제나 삼성을 두남두는 언론에 진정으로 호소한다. 더 늦기 전에 삼성을 살려야 한다. 삼성, 참 소중한 기업 아닌가.

이 글은 '미디어 오늘'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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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