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12정태인/새사연 원장

 

이 칼럼이 마지막이라니, 문득 언제 연재를 시작했는지 궁금해졌다. 2011년 9월 20일,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다’는 글로 독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1년 하고도 4개월여 동안 2주에 한 번 썼으니 35번쯤 연재했을까? 

이제는 많이 깎이고 무뎌졌지만, 술 마시면 어른들에게도 막말을 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에게 감히 반기를 들었던 모난 이미지가 ‘착한 경제학자’로 환골탈태했으니 그것만으로도 횡재에 가깝다.

내가 ‘착한 경제학’의 이름으로 현실을 들여다볼 때 내 현미경의 태반은 행동경제학/실험경제학이었다. 행동경제학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주류경제학의 인간관에 반기를 들었다. 거슬러 올러가자면 1975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요, 경제학자이자 인공지능 창시자, 한마디로 현대의 마지막 백과전서파라 할 수 있는 사이먼(Simon)의 ‘제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에 이를 것이다. 주류경제학의 가정과 달리 사람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으며 모든 걸 계산한다기보다 주먹구구(heuristics)로 일을 처리한다는 주장이 제한합리성이다. 그러니 사이먼을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후 200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 카네만을 거쳐 최근에는 가장 인기있는 분과로 떠올랐다. 카네만은 인간의 제한합리성이란 완전한 비합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인 편향을 보인다는 점을 제시했다. 예컨대 그와 티버스키(Tversky)의 전망이론(prospect theory)은 사람이 경제학의 기대효용이론과 완전히 다르게 행동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피자를 시킬 때 토핑을 모두 올려놓은 상태에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빼는 방식과 자신이 원하는 토핑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주문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면 어느 쪽에 더 많은 토핑이 올라갈까? 인간이 합리적이라면 당연히 차이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추가하는 주문방식의 토핑이 2분의 1가량 적었다. 즉 어떤 상태를 사고의 출발점(준거점)으로 삼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다른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원래 있던 데서 줄어드는 것을 더 싫어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100원을 벌 때에 비해 잃었을 때 심리적 상실감이 더 크다. 이를 현상유지 편향, 손실회피 등으로 부른다. 

이렇게 행동경제학은 심리학과 결합하거나 인류학의 결과에 주목해서 사회 현실을 맨눈으로 설명하려 한다. 내가 특히 주목한 분야는 사회적 딜레마의 해법으로서의 협동이었고. ‘인간은 어떤 경우에 협동을 하는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여기서는 진화생물학과 활발한 교류가 벌어졌고 전에 소개한 노박의 ‘인간 진화의 5가지 규칙’은 그 중간 정리였다. 최근에 노박의 책, <초협력자>가 번역 출판되었는데 노박은 인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협동하는 종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해서 생물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특히 나는 노박의 규칙 중에 집단선택에 주목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분석한 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집단 경쟁에 의한 협동과 집단 정체성은 외부에 대한 적대감을 유발하여 사회적 대립상태로 치닫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 대한 탐구는 노동운동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지 모른다. 노동자는 기업이라는 집단에 속해서 다른 기업과 경쟁하는 동시에 노동자 계급에 속해서 자본가와 경쟁(투쟁)하는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보통 여러 집단에 동시에 속해 있으므로 한 개인을 구성하는 정체성은 여럿이게 마련이다. 이럴 경우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인지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또한 집단선택에서는 개인 수준의 선택과 집단 수준의 선택이라는 공진화(coevolution)가 일어나므로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집단에 변화가 올 수도 있고, 되먹임 효과를 통해 집단 전체의 위기가 초래될 수도 있다. 즉 개인과 사회의 관계라는 해묵은 문제를 풀어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다. ‘착한 경제학’은 이런 흥미로운 얘기를 가득 품고 있다. 또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안녕”이라는 인사를 드린다.

* <착한 경제학>은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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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9정태인/새사연 원장

 

2009년 2월, 유럽의회는 89%의 찬성으로 ‘사회적 경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은 새로운 경제적, 사회적 모델을 요구”하는데 “사회적 경제는 산업민주주의와 경제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실제 성과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협동조합이 곧 경제민주주의라는 얘기다.

한국 대선에서도 ‘경제민주화’는 시대정신이 됐다. 박근혜 후보마저도 경제민주화와 재벌의 지배구조를 문제삼기에 이르렀고, 홍사덕 선대위원장은 엉뚱하게도 장하준 교수와 나를 영입할 생각이 있다고 발표했다. 이어 새누리당 내에선 ‘헌법 119조의 김종인’과 ‘재벌 출신 이한구’의 설전이 벌어졌다. 결국 박 후보가 “김종인과 이한구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최종 심판을 내렸는데도 김종인이 “동의할 수 없다”고 감히 반발하는 등 말 그대로 코미디 시리즈가 연출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시민들의 저력이다. 유권자들의 요구가 바야흐로 재벌-경제관료-보수언론 3자 동맹을 뒤흔들고 있다. 2010년부터 시민들은 보편복지, 경제민주화를 시대정신이라고 차례로 선언했고, 지금 전국 각지에서는 협동조합 열풍이 일고 있다. 일시적 유행이 아니다.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은 세계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급증한 바 있다. 그러면 협동조합은 왜 위기에 강한 것일까? <주간경향>의 독자들은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 사회적 경제라는 범주 자체가 사회적 딜레마 해결의 오랜 지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부족을 보호한다거나 품앗이로 모내기를 한다든가, 스스로 강물이나 공동 숲을 관리하는 규칙을 만들고 지켜온 것이 모두 사회적 경제에 속한다.

자본주의 단계의 사회적 경제인 협동조합은 주기적 경제위기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특히 이 연재에서 여러 번 언급한 몬드라곤(스페인)과 에밀리아 로마냐(이탈리아)는 국가부도의 위기 속에서 과연 온전할까?

양쪽 모두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하기 때문에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라 안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지극히 평온하다. 이 곳 협동조합 네트워크에는 실업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몬드라곤은 2009년 600명의 노동자를 재배치했고 2000명은 신축 근로에 동의했다. 모든 부문이 똑같은 타격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상대적으로 나은 부문에서 더 어려운 단위 조합의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전직에 필요한 교육훈련도 협동조합 네트워크 내부에서 이뤄진다. 에밀리아 로마냐의 레가(Lega·협동조합 총연합)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데, 이 지역 인구가 440만명인 점을 생각해보면 핀란드나 노르웨이와 같은 나라에서 정부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 실업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전략적 방침도 조합원 총회에서 1인 1표로 결정한다. 바로 신뢰와 협동의 힘이다.

또한 각 지역의 금융기관, 예컨대 몬드라곤의 ‘노동금고(Caja Laboral)’나 에밀리아 로마냐의 ‘조합기금(Coopfond)’ 등은 어려운 조합에 추가 대출을 해준다. 즉 “비 올 때 우산을 빼앗는” 여느 은행과 달리 이들은 인내자본(patient capital)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제 막 ‘협동조합을 꿈꾸는 그대’들에겐 꿈 같은 소리로 들릴 것이다. 협동조합의 광범한 네트워크가 존재하는 곳에서나 가능한 얘기가 아닌가? 하지만 개별 협동조합이라도 노동시간과 임금을 줄여서 고용을 유지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관찰된다. 서로 신뢰하기만 한다면 다 같이 살아갈 방법은 언제나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왜 협동조합은 지배적 범주가 되지 못한 것일까? 지금까지의 역사에서는 상황이 좋아지면 사람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더 많은 단기적 이익을 약속하는 자본주의 기업을 선택해 왔다. 하지만 협동조합에 유리하도록 법적 근거를 만들고 자체의 금융기관이나 교육기관을 갖춘 곳에서는 따뜻한 공동체적 경제가 지배적이다. 각 지역이, 나아가서 한국 전체가 그리 되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는가? 어느 후보가 사회적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렇게 저렇게 다 해주겠다’가 아니라 시민 스스로의 힘으로 네트워크를 건설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돕겠다고 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우리의 꿈을 실현하는 데도 중요한 대선이다.

이글은 주간경향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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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1정태인/새사연 원장

 

요즘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통합진보당 사태’다. 아마도 야권이 총선에서 승리했다면, 그래서 누가 되든 진보개혁진영의 대선 승리가 눈앞에 보였다면 나는 새사연의 새 책, <리셋 코리아>의 실행계획을 만드느라 연구원들을 다그치고 있었을 것이다. 책에서 난 단순히 정권교체가 아닌 ‘시대교체’를 할 때가 되었다고 썼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바야흐로 ‘진보의 시대’를 열 것이기 때문이다. ‘무상의료, 무상교육’을 민주통합당이나 새누리당도 외치는 건 그 증거이다. 이 위기에서 벗어날 진보적 정책기조를 제시하고 국민으로부터 현실적 정책능력도 인정받을 차례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 ‘진보세력’이 자멸하고 있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 ‘착한 경제학’으로 본 ‘통합진보당 사태’를 연재할 생각이다. 현 사태를 한 방에 시원하게 해결할 방법, 예컨대 분열된 집단을 치유하기 위한 ‘진실과 화해’의 구체적 프로그램, 당내 정파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진보라는 더 큰 가치의 실현방식에 동의하도록 하는 프로그램,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국민이 믿게 하는 ‘재발방지’ 프로그램, 당내 집단간 그리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프로그램들, ‘숙의 민주주의’에 충실한 정당 개혁부터 턱하니 제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하지만 그건 내 능력 밖의 일이거니와, 설령 외국 논문을 뒤져 몇 가지 방안을 내놓고(이런 갈등은 인류 역사에 비일비재했기에 의외로 많은 대안이 존재한다) 이 ‘정답’을 따르라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그야말로 ‘진보시즌2’에 당원과 시민들이 참여하여 하나 하나 합의안을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여 우선 추상적인 차원에서 크게 문제를 들여다봐서 어느 쪽에 해결방향이 있는지부터 짚어보자. 몇몇 언론이나 지식인은 현 사태를 ‘치킨게임’ 상황이라고 규정했다. ‘치킨 게임’은 ‘착한 경제학’의 독자들이라면 익숙할 사회적 딜레마 게임의 하나이다.(사회적 딜레마 게임은 ‘죄수의 딜레마’, ‘사슴사냥 게임’, ‘치킨 게임’ 세 가지가 있다)

치킨게임은 전설적인 배우 제임스 딘이 열연한 영화 <이유없는 반항>에 그대로 나타난다. 1960년대 미국 젊은이들은 주로 여성에게 자신이 마초임을 증명하기 위해 자동차를 마주 달리는 ‘미친 게임’을 했는데, 죽음이 두려워서 핸들을 트는 쪽이 겁쟁이(치킨)가 된다. 치킨의 치욕이 싫어 눈 감고 둘 다 가속기를 밟는다면 여차하면 사망에 이르는 게임이다. 따라서 이 게임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상대가 나를 ‘미친 놈’이라고 보게 만드는 것이다. 즉 ‘미친 놈’이 이기는 게임이다.

이 게임의 보수표는 위와 같은데(관심 있는 독자들은 주간경향 955호에 제시한 ‘죄수의 딜레마’와 비교해 보시라), 합리적인 집단이라면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배신, 협동) = (4, 2), 또는 (협동, 배신) = (2, 4)를 택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통합진보당 내 두 정파는 상대에게 항복만을 요구하며 물러서지 않고 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배신, 배신)의 보수가 (1, 1)이 아니라 (-10, -10), (-100, -100)…으로 마이너스의 기하급수로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 시선은 급속도로 싸늘해지고 있으며 다음 선거에서 이들은 모두 버림받을 것이 틀림없다. 도대체 왜 두 집단은 진보 전체로 볼 때 최악의 결과를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어느 한 집단, 또는 둘 다 ‘여기서 밀리면 우린 죽는다’는 집단생존의 문제로 상황을 보기 때문이다. 냉전시대의 핵개발 경쟁, 그리고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이 대표적 예다(실제 남북관계를 치킨게임의 관점에서 본 분석으로 PD저널 2010년 11월 30일자, ‘미친놈과 바보의 게임’을 보시라). 상황을 이렇게 보는 집단에게 먼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이 순간 살아남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찌 해야 이 바보 같은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다음번의 주제이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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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04 / 04 정태인/새사연 원장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8)
보고서 원문을 보시려면 위 제목을 눌러 주시면 됩니다.

이 글은 새사연의 정태인 원장이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진행한 ‘정태인의 경제학 과외 2부 : 사회경제, 공공경제, 생태경제’ 강연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콜록(Peter Kollock)은 1998년 '사회적 딜레마 : 협동에 관한 분석(Social Dilemmas : The anatomy of cooperation)'에서 기존의 연구들을 정리해서,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동기에 의한 해결(Motivational Solution), 전략에 의한 해결(Strategic Solution),  구조에 의한 해결(Structural Solution)이다. 앞서 살펴본 노박의 논문과 함께 사람들이 왜, 어떻게 협력하게 되는지를 파악하는데 유용한 설명이기에 소개한다.

 

동기에 의한 해결 - 인간은 다양한 가치를 추구한다

많은 사회적 딜레마 게임에서는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가정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실제로도 그런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 앞에서 살펴본 최후통첩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전부를 가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몫을 고려했다. 동기에 의한 해결은 여기서 출발한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인간은 자신의 몫뿐 아니라 상대방의 몫에 대해서도 고려한다는 것이다. 즉, 동기에 의한 해결은 인간이 반드시 이기적인 것은 아니라고 가정한다. 때문에 이기심이 아닌 다른 동기를 부여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들의 동기가 변화하면, 그에 따라 게임의 구조 자체도 변할 수 있다고 본다.

 

1) 사회적 가치 지향

사람들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는 다양하다. 상대와 나 사이에 이득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이 이기심이나 물질적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특히 많은 실험의 결과 자신이 얻는 결과와 함께 상대방이 얻는 결과에 대한 관심이 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높았다.

몇 가지 대표적인 분류를 보면 자신의 몫과 상관없이 상대방의 몫이 커지는 것을 선호하는 이타적 가치, 나의 몫과 상대방의 몫을 합했을 때의 결과가 최대화되는 경우를 선호하는 협력 지향적 가치, 상대방의 몫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으며 내 몫에 대한 관심만 기울이는 개인주의적 가치, 상대방과의 격차가 커지는 것을 선호하는 경쟁 지향적 가치, 반대로 상대방과의 격차가 최소화되는 것을 지향하는 평등 지향적 가치도 있다. 이 외에도 독특하지만 순교적 가치, 가학적 가치 등도 있을 수 있다.

연구에 의하면 이처럼 서로 다른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같은 목적의 게임에서도 서로 다르게 행동한다. 연구자가 제시한 객관적 보수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실험 참가자에게는 그만큼의 가치보다 덜하거나 더하게 된다. 참가자가 지향하는 가치가 객관적 보수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연구자의 의도와는 달리 실험 참가자들이 주관적 판단 기준에 의해 게임의 구조를 바꿔버리게 된다. 그리고 개인이 갖고 있는 이러한 사회적 가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협력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협력을 추구하는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예를 들어 돈을 많이 버는 삶보다 남에게 도움을 베푸는 삶이 훨씬 좋다는 생각이 매우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가치로 자리잡도록, 사람들의 머릿속을 바꾸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사람들의 머릿속을 바꾸느냐이다. 아쉽게도 이쪽 분야의 연구에서 아직까지 개인의 사회적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이 확실히 밝혀져야만 사회적 딜레마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계속되는 연구를 통해서 조금씩 그 베일이 벗겨지는 중이다.

협력지향적 성향과 경쟁지향적 성향이 어떻게 발달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여러 나라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오랜 기간 조사를 한 연구가 있다. 여기서 밝혀진 사실은 경쟁이 협력보다 확연하게 빨리 습득된다는 것과 경쟁의 정도는 나라마다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고등교육, 그 중에서도 대학에서의 전공이 가치 성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사했다. 여기서 나온 결과 중 재미있는 것은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일수록 무임승차자가 되는 경향이 높았다는 것이다.

 

2) 대화를 통한 정보 교환과 설득

또 다른 접근법은 개인의 성향보다는 구조나 환경적 특징이 개인에게 주는 영향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연구 중 가장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은 대화가 협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광범위한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실험자들에게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자 협력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

그러나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한 학자가 대화가 왜 협력을 증가시키는지에 대한 4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첫째, 대화를 통해서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정보가 많이 제공될수록 협력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협력할 것이라면 나는 그냥 무임승차자가 되는 편이 이익이기 때문이다. 둘째, 대화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 서로 명확한 약속과 협의를 할 수 있게 한다. 셋째, 대화는 도덕적 권고를 통해 옳은 것 또는 적절한 것을 하도록 설득할 수 있다. 특히 도덕은 협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연구 주제로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넷째, 대화는 집단 정체성을 창조하고 강요할 수 있다. 이를 종합하면 결국 대화를 통해서 서로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를 일치시켜가는 것이 협력을 증진시켰다고 볼 수 있다.

 

3) 집단정체성

집단정체성이 협력에 주는 영향은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다. 동기에 의한 해결, 전략에 의한 해결, 구조에 의한 해결에 모두 걸쳐 영향을 주고 있다. 대화가 부재한 곳에서도 집단정체성이 존재하는 경우 협력은 강화된다.

한 연구는 공유지의 비극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을 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식하는 경우 개인적 욕심을 억제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집단 사이에 경쟁이 있을 경우 집단정체성은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상대방이 같은 집단의 구성원일 때 죄수의 딜레마는 사슴사냥 게임으로 변했다. 상대방이 다른 집단의 구성원일 때는 여전히 죄수의 딜레마 형태로 게임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집단 간의 경쟁을 부추겨서 집단 내의 협렵을 촉진하는 방식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집단 사의 충돌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 속에서 집단이 폐쇄적으로 변하면서 다양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퇴행할 수도 있다.

왜 사람들은 같은 집단의 구성원이라고 느낄 때 더 협력할까? 개인보다 공동체를 생각하는 사회적 가치의 추구가 인간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전략적 관점에서 설명할 수도 있다.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잘 되어야 나의 이익과 안전도 보장된다고 판단해서, 전략적으로 집단 내의 구성원들에게 이타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전략에 의한 해결 - 협력이 이익극대화의 전략이 되도록 하라

전략적 해결책은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전략적으로 협력을 택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방법이다. 이는 개인의 능력과 상대방의 행동에 의존하고 있는데, 대체로 반복 죄수의 딜레마의 형태로 수렴한다.

 

1) 상호성

상호성에 기반하여 행동하면 협력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연구는 앞서 소개했던 악셀로드의 토너먼트 실험이다. 그는 죄수의 게임을 반복할 경우 최선의 전략이 무엇인지에 관핸 전 세계의 경제학자와 게임이론가, 컴퓨터과학자 등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여기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매우 단순한 전략인 TFT 전략이었다. 이는 상대방이 협력하면 나도 협력하고, 상대방이 배반하면 나도 배반하는 것이다. TFT 전략은 반복 죄수의 딜레마를 사슴사냥 게임으로 변화시켰다.

악셀로드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1984년 '협력의 진화(The Evolution of Cooperation)'라는 글을 썼다. 여기서 협력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서로의 관계가 지속적이어야 한다. 둘째, 서로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과거에 상대방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 단 한 번 만나고 헤어질 사이이거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방이 알지 못하거나, 과거 내 행동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경우에는 이기적이 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악셀로드는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첫째, 시기하지 말아라. 둘째, 먼저 배반하지 말아라. 셋째, 협력에는 협력으로, 배반에는 배반으로 대하라. 넷째, 너무 영리하게 굴지 말아라.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에게 내가 어떤 전략을 쓰고 있는지 명확히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협력할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 게임을 제로섬 게임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제로섬 게임이란 한 사람의 이익이 정확히 다른 사람의 손실이 되는 경우이다. 상대방을 빼앗으려고 하면 상호 간의 배반만 가져온다.

허나 이는 완전정보를 가정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과거에 협력했는지 아니면 배반했는지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 때문에 실수와 오해가 난무하는 현실 세계에서는 TFT가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보다는 관대한 GTFT가 서로 배반하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게 해준다. 이 역시 앞서 설명한 바 있다.

 

2) 상대방을 선택할 권리

이는 착한 사람하고만 거래하는 전략이다. 앞서 상호성이 상대방이 배반할 경우 나도 배반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아예 포기해버리고 다른 상대방을 찾는 전략이다. 모든 사람들이 협력적인 사람하고만 거래하려고 하고 배반자는 왕따 시킨다면, 당연히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집단 내에서의 평판이 중요한 영향을 한다.

 

3)무자비한 보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은 두 명 사이에 발생할 때보다 여러 명 사이에 발생할 때 더욱 해결이 어렵다. 여러 가지 전략을 쓴다고 해도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여러 사람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 경우 유용한 것인 무자비한 보복 전략이다. 즉, 전체 구성원이 모두 협력하는 조건에서는 나도 협력하겠다는 것이다. 반대로 한 명이라도, 한 번이라도 배반하면 나도 배반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위 말하는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에서 발생하는 무임승차를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인류 역사 속에서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해 온 공동체들을 조사해온 연구에 따르면 이런 식의 강력하고 위험한 전략을 사용한 공동체는 없었다고 한다.

 

4) 사회적 학습

이 전략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개인들이 정밀한 이해타산에 의해 행동하지 않는다고 본다. 다만 이기적 인간이기 때문에 보상을 해주는 것은 좋아하고, 손해를 입는 것은 싫어한다. 이를 이용해서 협력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고, 배반하면 손해를 본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학습시키면 사회적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5) 집단상호성

다시 집단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왔다. 전략적 해결에서도 집단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협력을 증진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단순하게 집단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집단 내부에서의 이타성을 높이는데는 효과적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타성은 집단의 구분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집단 내의 구성원들은 상호의존적이라는 믿음과 상호적이라는 기대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상호의존적이라는 믿음과 상호성에 대한 기대를 배제시키면 같은 집단으로 묶여 있어도 서로 간에 호의가 발생하지 않았다. 미래에 이 사람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이 배반하려는 욕심을 억누르고 협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 정리 :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9)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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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1.12.12정태인/새사연 원장

교육에서 평등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독자들께서는 대부분 ‘고교 평준화’를 떠올렸을 것이고, 곧 이어서 ‘주입식, 암기식 획일교육’까지 연상하셨을 것이다. 이주호 교과부 장관이 ‘고교 다양화’를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극단의 경쟁을 도입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연상에 근거한다.

과연 그럴까? 답은 단연코 “아니오”이다. 평등교육으로 유명한 핀란드 교육이 주입식, 암기식인가? 정반대다. 교육에서 평등이란 말 그대로 등(等)수가 없다(平)는 것을 의미한다. 재작년 핀란드에서 나는 에리키 아호를 만났다.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핀란드의 교육개혁 40년 역사 중 처음 20년 동안의 국가교육청장이었다.

은발의 이 노신사는 매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등수라니요? 이 아이는 달리기를 잘 하고, 얘는 수학을 잘 하고, 이 친구는 음악에 발군인데 아이들의 순서를 어떻게 정한다는 얘기죠?”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는 환하게 밝아졌다. 평등이란 등수를 매길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여 핀란드 선생님들의 역할은 아이가 어떤 분야를 좋아하는지 파악해서,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

등수를 매기려면 아이들의 학력을 하나의 숫자(scalar)로 환산해야 한다. 그러려면 수학이나 영어에는 가중치 100이나 90을 주고, 체육이나 음악에는 10 또는 5를 부여해야 한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하는 짓이다. 전국이 단일한 시험을 보고 그 점수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니, 모두 똑같은 내용을 배워야 하고 ‘찍기’에 의해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전국 등수와 일제고사. 이것이 획일식, 암기식 교육의 근원이다. 아이들이 자살하고 심지어 어머니를 살해하는 끔찍한 사태의 원인도 이것이다.

평등은 다양성을 낳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더 잘 하면 된다. 바로 이 다양성이 효율성을 낳는다. 3년에 한 번 15살 정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PISA라는 국제학력평가를 치르는데 핀란드는 10년 동안 3연속 종합 1위를 차지했다.

우리 아이들도 발군의 성적을 올리고 있다. 대체로 핀란드 바로 뒤의 자리를 유지해 왔다. 학력에 관한 한 어깨를 나란히하는 두 나라 아이들이 정반대의 응답을 하는 질문은 “얼마나 좋아서 공부하는가?”이다. 상상하시는 대로 핀란드 1위, 우리는 일본과 함께 꼴찌다. 우리 아이들이 핀란드에 비해서 거의 두 배의 공부를 한다는 것도 여기에 추가해야 한다.

아이들뿐 아니다. 어른들도 두 배로 일한다. 그런데 1인당 GDP는 핀란드가 두 배다. 우리들이 핀란드 사람보다 4배나 못났을까? 그럴 리 없다. 만일 어떤 직업을 택한다 하더라도 월급도 별 차이가 없고 사회적으로 비슷하게 인정받는다면 당신은 어떤 직업을 택할 것인가? 자기가 잘 하고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일을 택할 것이다. 핀란드의 수도배관공과 교수는 비슷한 월급을 받는다. 더구나 이 나라의 보편복지는 어떤 직업을 택해도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준다. 시장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선택의 자유’를 어느 쪽이 더 확실히 보장하는 것일까?

북유럽 국가의 일반적 신뢰(generalized trust·‘다른 사람을 얼마나 믿는가?’)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최근의 연구들은 소득불평등도가 신뢰도를 결정하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하다는 데 거의 100% 합의했다. 신뢰는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해서 효율성을 높인다. 다음 번에 이야기할 주제이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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