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 05 / 02 정태인/새사연 원장

 

지난 4월 11일 19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의회 권력을 수성했다. 이로써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이 목소리 높였던 재벌 개혁 추진이 힘을 받기가 어려워졌다. 설사 대선에서 야권 후보가 승리하더라도, 새로운 정부가 재벌 개혁을 추진할 때 새누리당이 큰 장애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나온 책 두 권이 눈에 띈다.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의 대담을 엮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쾌도난마 한국경제>(부키 펴냄)와 김상조의 <종횡무진 한국 경제>(오마이북 펴냄).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는 지난 2005년 펴낸 <쾌도난마 한국 경제>(부키 펴냄)에서 참여연대의 소액 주주 운동을 정면 비판했다. 이들은 '복지 국가'를 전면에 내세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에서도 "재벌 개혁을 말하며 한국 경제를 주주 자본주의로 재편하려는 '시장 경제론자' 혹은 '경제 민주화론자'"를 겨냥했다.

이들이 이 책에서 비판하는 "시장 경제론자" 혹은 "경제 민주화론자"의 대표 주자가 바로 민주통합당의 재벌 개혁 정책을 만드는데 참여한 유종일, 홍종학 그리고 <종횡무진 한국 경제>의 저자 김상조다. (이 중 홍종학은 민주통합당의 비례 대표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 지점에서 김상조의 <종횡무진 한국 경제>가 눈에 띈다. 김상조는 이 책에서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등이 중심이 되어 추진해온 소액 주주 운동을 비롯한 재벌 개혁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성찰하고, 좀 더 진전된 재벌 개혁 정책을 고민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을 비롯한 야권이 패배한 가장 큰 이유로 시민들의 고달픈 삶을 개선할 비전, 정책의 제시가 없었다는 점이 꼽힌다. 그렇다면 앞으로 여덟 달 후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 개혁 진영이 시민들의 사회 경제적 삶의 개선을 위해 제시할 미래 비전은 무엇일까?

진보 개혁 진영이 그간 제시한 프레임은 복지 국가론과 경제 민주화론이다. 장하준, 정승일, 이종태의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복지 국가론을 대변한다면, 김상조의 <종횡무진 한국경제>는 경제 민주화론을 대변한다. 물론 양자 간의 접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양자 간에는 본질적인 견해 차이도 적지 않다.

앞으로 이 두 접근 간에는 치열한 논쟁이 진행될 것이며, 이 논쟁이 생산적으로 진행될수록 진보 개혁 진영의 미래 비전은 더 명확해지고 더 구체적으로 될 것이다. 따라서 양자 간의 견해 차이를 어설프게 봉합하는 것보다 양자 간의 견해 차이를 드러내고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프레시안>은 본격적인 논쟁을 위해서 새로운 장 '한국경제 성격 논쟁'을 마련한다. 앞으로 이 장을 통해서 한국의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이 한국 경제의 현재 상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더 나아가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치열한 논쟁을 벌이도록 유도할 예정이다.

이미 '프레시안 books' 86호, 87호를 통해서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위한 연구원 원장과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이 논쟁의 물꼬를 텄다. 한차례의 공방에 이어서 정태인 원장이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서 같이 공부했던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에게 공개편지 형식의, 하지만 날선 글을 보냈다. <편집자>

☞관련 기사

정태인 : 4월 11일, 회장님 얼굴에 웃음꽃 핀 까닭은?(링크)
정승일 : 진보의 탈을 쓴 신자유주의자를 고발한다!(링크)

장하준 교수에게

알고 지낸 지 이미 30년이 넘었습니다. 네 살 위라서 계속 반말을 써왔는데, 이렇게 갑자기 높임말을 쓰려니 참 어색하기 이를 데 없군요. 아마 장하준 교수도 그럴 거예요.

사실 경어 체를 쓰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생물학적 나이가 더 많더라도 학문적 나이로 친다면 장 교수가 훨씬 위니까요. 읽기의 양이나 사색의 시간, 학계에서의 성취를 고려하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여 이 말투에는 공개편지에 걸 맞는 형식일뿐만 아니라 존경과 부러움도 함께 깃들어 있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약간의 소란스러움은 내 서평에서 비롯되었지만 언젠가 한 번은 겪어야 할 사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년 전 한 대담에서 "우리는 이론, 정책, 거의 모든 면에서 다 같지만 '재벌 개혁' 문제와 '한국은행' 문제는 다르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 이 문제를 어느 정도 정리할 때가 됐습니다.

그 두 가지가 산업, 금융 정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 상호 간에 일정한 공감이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중앙은행의 독립성", "재벌 개혁의 필요 불가결성", 그리고 이 둘을 포함한 "진보적 경제 개혁의 방향과 경로"에 관해 얘기하려고 합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하여

1996년 내가 영국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국은행 문제에 관한 이견이 있었고, 장하준 교수가 돌아가고 나서, 동석했던 김대환 교수에게 왜 저렇게 강한 반응을 보이는지 물었습니다. 그 때 김 교수는 유럽 논쟁의 시각에서 보기 때문이라고, 즉 한국 상황과는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었지요.

당시에는 그러려니 했던 장하준 교수의 그 반응을 이해하게 된 건, 엉뚱하게도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책임에 관한 스티글리츠의 논문을 읽었을 때였습니다. 거기서 스티글리츠는 클린턴 행정부의 대통령자문회의(CEA) 의장을 맡았을 때의 경험을 털어 놓았죠.

조각조각 남아 있는 기억(우리와 너무나 달라서 강한 인상을 받았으니까요)을 거칠게 말한다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연준)는 도대체 대통령의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조직이라는 것, 대통령자문회의에서 불만이 많았지만 아예 내색도 하지 않았다는 것, 온통 통화주의자로 가득한 그 동네에서 논쟁을 벌이면 오히려 불리해졌을 거라는 애처로운 얘기였습니다. 그런 경험을 토대도 스티글리츠는 왜 선출되지도 않은 몇몇 은행가가 자기들 멋대로 나라를 좌지우지 하느냐, 이들이 사회에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스티글리츠는 은행 출신들이 아니라 금융을 잘 아는 경제학자가 들어가야 하고 실업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도 연준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서 장 교수의 주장이 떠올랐습니다. '아, (유럽도) 이런 상황이라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해서 장 교수가 그토록 거부 반응을 보일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스티글리츠의 글에서 또 하나 명확히 남아 있는 기억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맞느냐, 틀리느냐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독립성인가, 정책의 방향이 무엇인가, 이것이 중요하다"는 언급이었습니다. 만일 한국은행이 미국의 연준처럼 자기만의 논리에 의해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더구나 통화주의로 똘똘 뭉쳐 있는 집단이라면 저도 장 교수처럼 한국은행 독립에 반대하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한국은행은 아무런 권한도 없습니다. 그 많은 우수한 인력을 가지고 탁월한 보고서도 생산하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찌라시 수준의 보고서는 언제나 언론에 노출되고, 한국은행보다 훨씬 더 신자유주의적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보고서도 비중 있게 다뤄지지만 한국은행은 GDP(국내 총생산)이나 경상수지 발표 때만 주목을 받습니다.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전 재정경제부)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시장 만능주의/주주 자본주의에 가까울까요?

기획재정부에는 최중경과 같은 중상주의자가 간혹 섞여 있긴 하지만 이헌재류의 시장 만능론자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한국은행은 힘이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명확하게 시장 만능론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법으로 규정돼 있는 물가 안정조차 줏대 있게 내세우지 못합니다. 한국은행은 오히려 말을 하지 않아서 문제인 조직, 자기 지키기 바쁜 조직입니다. 오죽했으면 내가 "고슴도치 같은 조직"이라고 했겠어요?

물론 앞으로 정말 힘이 생기면 한국은행이 자신의 존재 이유인 "물가 안정"을 내세워 실업과 같은 시민의 삶의 질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목표를 잊어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비서관일 때 한국은행 직원을 꼭 상근으로 불렀고 '개혁'에 중요한 기초 자료는(때론 기본 방침도) 한국은행을 통해서 얻었습니다. 재정경제부 관료나 KDI를 이용할 경우에는 내 의도가 드러나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걱정이 되었거든요.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도 중앙은행에 대해서 장하준 교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케인스나 스티글리츠의 생각도 그랬듯이 중앙은행은 정부와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움직여야 합니다. 한 기관이 하나의 목표만 맡는 게 아니라, 다수의 목표를 놓고 다수의 기관이 서로 협동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지금 그런 이상적 상황을 가로막는 집단은 어디일까요? 난 단호하게 기획재정부(이들은 삼성과 조·중·동과 같은 보수 언론과 함께 움직입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한국의 잡종 신자유주의의 근원이자 재생산지가 바로 거기입니다. 그들은 과장이 되면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단기간에 받고 국장쯤 되면 (장 교수의 주적인)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에 파견 나가 신자유주의 교조의 세례를 받습니다. 얼치기로 알기에 더 과격한 시장 만능론자가 되는 거죠. 장 교수가 1960~70년대의 역사 속에서 관찰한 그 관료들이 아닙니다.

한국은행은 물가 안정이라는 단일 목표가 아니라 자산 가격 안정을 포함한 경제 안정까지 추구해야 합니다(한국은행법 개정 사항이죠!). 물론 기획재정부 등 경제 부처와 협의를 하는 채널을 둬야겠지만 지금은 더 많은 독립성이 필요합니다. 한국은행이 실업 등 중요한 정책 목표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필요한 것은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 기획재정부 차관이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통화위원회의 구성 변화입니다. 지금처럼 각 부처를 대변하는 "민간" 전문가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중소기업 그리고 시민 일반을 대표하는 금통위원이 들어가야겠지요.

(나보다 훨씬 잘 알겠지만 케인스는 상황에 따라 수시로 말을 바꿨습니다(그래서 하이에크가 매번 당했지요). 그런 정책 변화를 일관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는 게 바로 케인스의 천재 증명이었습니다. 예컨대 케인스도 인도라는 상황에서는 중앙은행의 필요성뿐 아니라 독립성도 강조했습니다. 당시 인도에는 (루피와 스털링의 안정적 환율 때문에) 그게 꼭 필요했으니까요.)

재벌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자, 이제 본론 격인 재벌 문제입니다.

1980년대 말 이래 재벌은 옛날의 재벌이 아닙니다. 내 기억으로는 1988년 금리 논쟁 때 처음으로 당시 재정경제부(조순 부총리)에 반기를 든 이래 1990년대 중반부터는 이들이 재벌-재정경제부 연합을 결성했고 이제 한 몸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때부턴 재벌이 우위에 섰습니다. 발전 국가론에서 상정하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과 힘의 우위는 이미 한국에서 현실이 아닌 지 오래 됐습니다.

장하준 교수가 재벌 문제에 관해 본격적인 논문을 쓴 건 본 적이 없지만(장기의 역사 속에서 시장 만능주의를 비판하는 게 장 교수 작업의 본령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쓸 시간이 없다는 건 잘 압니다) 짧은 평론이나 인터뷰에서 받은 느낌은 장 교수가 재벌을 주주 자본주의, 금융 자본주의 논리의 피해자로 묘사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르크스 식으로 주주 자본주의/시장 만능론을 한 시대의 '에테르'(헤겔식으로는 시대정신이겠죠)라고 표현한다면 그 안의 어떤 존재도 그 풍조에 물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존재는 환경에 적응하는 거니까요. 일제 강점기에는 동네의 똘똘하고 진취적인 농부가 일본인 지주의 마름이 되었을 겁니다. 농민을 최대한 수탈하려고 최초로 "근대적 경영"(경영형 지주론)을 도입하기도 했을 겁니다.

당연히 재벌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동원해서 최고의 실적을 올리려 합니다. 단기 시야의 수탈이 벌어지죠. 그런데 어떤 외적인 힘에 의해서 주주 자본주의가 사라지거나 약해진다면(분명 역사는 이 방향으로 가겠죠) 정말 재벌은 장 교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설비 투자와 새로운 산업 진출에 매진하게 될까요? 해방이 되어서 일본인 지주가 사라졌을 때 우리의 마름들은 착한 농업 경영인이 되었나요? 국가가 어떤 외적 충격이 와도 마름의 지위를 유지시켜 준다고 약속하면 이들이 소작인들의 삶의 질도 높이는 착한 존재가 될까요? (비유를 이렇게 했지만 현재의 재벌은 일제 강점기 마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존재입니다.)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이나 한국경제연구원의 얘길 들어서 알겠지만 그들은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면 아무런 이론이나 차용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논리적 일관성 따위는 단물 빠진 껌처럼 언제든 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강한 건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거래 비용 이론이나 대리인 이론으로 재벌 구조를 합리화하는 동시에 전형적인 시장 만능론으로 국가의 규제를 비판하지요. 자유주의자 같지만 기업 내의 전제는 당연하게 여깁니다(사실 이 모순이 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론의 핵심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얘기도 그들에겐 아무런 문제도 안 됩니다. 그게 바로 자본이지요.

결론부터 말한다면 재벌과 주주 자본주의(또는 외국인 주주)를 대립 관계로만 보는 건 단편적인 시각입니다. 그들은 경쟁을 하는 동시에 협력해서 주주 집단 바깥의 이해 당사자들을 최대한 수탈하는 동맹군이지요.

주주 간의 관계(즉, 자본 간의 경쟁)라는 쪽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장 교수는 소액 주주 운동과 실은 똑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소액 주주 운동 역시 지배 주주와 소액 주주(이 중엔 대규모 외국인 주주도 있지요)의 대립에 주목하니까요. 즉, 장 교수나 소액 주주 운동가나 모두 자본 간 경쟁이라는 차원에서 재벌을 보고 있는 겁니다. 장 교수는 재벌을 그 경쟁 속에서 외국인 자본에 시달리는 존재로 보고, 김상조 교수는 재벌을 그 경쟁 속에서 소액 주주를 수탈하는 존재로 본다는 차이만 있는 거지요.

나아가 재벌계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도 두 주주 집단(지배 주주, 소액 주주(외국인 주주 포함))과 협동해서 비정규직과 하청 기업을 수탈하는 데 동참하고 있습니다. 장 교수가 이해 당사자론을 제대로 적용한다면 오히려 이런 중층의 수탈 관계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난 번 서평에서 이 문제는 대부분 다뤘다고 생각합니다. 주주 자본주의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도 지금 해야 할 일이고, 동시에 "재벌 개혁"을 하는 것도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런 중층적 수탈 관계를 이해 당사자론으로 어떻게 이해할 수 있고 또 거기서 도출되는 정책 방향에 관해서는 이미 밝혔습니다.

논란이 남은 사항은 시스템 위기의 가능성에 관한 겁니다. 장 교수도 정승일 박사처럼 재벌이 제약 산업에 뛰어들었다가 망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재벌이 제약 산업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청와대 비서관일 때 제약 산업을 검토했는데 생물학계 제약 같은 것은 가능하지만 신약 개발과 같은 화학계 제약은 영 어렵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물론 학자 출신 풋내기 비서관의 판단일 뿐, 재벌이나 박정희류의 관료는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랬다 망한다 하더라도, 이미 지급 보증이 해소된 상태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삼성제약'을 만들려면 삼성생명이나 삼성전자 등 여러 계열 회사가 출자를 하고 그 '삼성제약'이 발행한 회사채를 계열사가 인수해서 초기 자본을 형성하겠죠. 그 이후에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리고 소액 투자자들을 모집할 겁니다. 만일 이 회사가 부도 위기에 처한다면 단지 지급 보증이 없다고 해서 문제가 안 생길까요? 신약 개발과 같은 분야에는 천문학적 투자가 필요하고 성공 가능성은 지극히 낮습니다. 10년, 20년 계속 투자해야 합니다. 더구나 이런 쪽은 눈덩이 효과(snow ball effect)도 많이 작용할 겁니다. 기존의 지식이 많이 쌓여 있는 곳일수록 유리하겠죠.

만일, 그야말로 만에 하나 산업계와 정부가 이런 산업에 투자해야 한다고 마음먹는다면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매우 많습니다. 우선 교육 투자를 통해서 전문 인력을 충분히 길러야 하고(10년 이상 걸리겠죠?) 관련 산업 간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작업에도 정부가 관여할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 연구개발 투자에 대해서도 마치 미국의 국방부나 보건부가 하듯이 프로젝트를 발주해야겠지요.

제 아무리 삼성이나 현대라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정승일 박사의 가정대로 재벌이 나 홀로 한다면? 당연히 정부는 시스템 위기를 예방하는 최소한의 조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장 교수와 내가 옹호하는 산업 정책이 바로 이런 거겠죠(내 경험에 비춰보면 정 박사가 청와대에서 이런 프로젝트를 제안하면 재벌들은 십중팔구 조·중·동을 동원해서 정부가 시장이 할 일에 개입한다고 비판할 겁니다).

재벌의 경영권을 보호해 주기만 하면 그들이 이런 장기 모험 투자를 할 것이라는 건 실로 안이한 생각입니다. 제로 리스크로 쉽게 돈 벌 수 있는 일이 널려 있는데 왜 하겠어요? 주식이나 땅 투기, 동네 빵집, 심지어 순대국집…. 재벌 규제, 자산 투기 규제와 산업 정책이 같이 갈 때만 실제로 필요한 장기 투자가 가능해질 겁니다.

또 따라잡기(catch up)를 넘어서는 단계에 들어선 나라의 산업 정책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고민해 봐야 합니다. 나는 지역 클러스터와 공동체의 발전 전략을 결합하는 것이 이 단계의 유력한 산업 정책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주제야말로 우리 같은 산업 정책 옹호론자들이 진지하게 붙들어야 할 주제일 겁니다.

마지막으로 재벌의 은행 소유까지도 막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러서는 정말 놀랐습니다. 설마 장하준 교수도 같은 생각은 아니겠지요? 이건 정확히 시스템 위기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예의 제약 회사가 망해가면 재벌계 은행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일반적인 계열 분리명령(또는 청구)의 도입은 더 철저한 논증이 필요하지만 금융 계열 분리 명령은 시스템 위기 가능성만으로도 도입 근거가 충분하지 않을까요?

재벌 개혁 또 경제 민주화 운동이 복지 국가 운동을 가로막는다?

장하준 교수도 아시다시피 나는 노무현 정부에 들어갈 때, 막연하지만 스웨덴 모델을 꿈꿨습니다(조금 더 유연한 이정우 교수는 네덜란드 모델을 상정했죠). 그리고 이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국민들의 복지에 대한 열망으로 우리는 그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섰죠.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스웨덴에서 한 일 하나하나를 그대로 한국에 도입한다고 해서 스웨덴 모델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삼성이 발렌베리처럼 행동한다거나, 민주노총이 스웨덴 노동조합총연맹(LO)처럼 커지고 또 '연대 임금' 같은 획기적인 상상력 넘치는 연대 사업을 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건 환상이겠지요. 또 북유럽 국가들이 주로 소득세로 재원을 조달하니까 우리도 소득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것도 그런 기계적 도입 중 하나일 겁니다(종합부동산세 등 자산세는 불평등 심화를 일단 막아야 하기 때문에 절실합니다).

물론 그런 조건이 없다고 해서 복지 국가로 향한 우리의 발걸음을 멈춰서도 안 됩니다. 우선 다음 그림 두개를 한번 보시죠.

한국에서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건 1995년경입니다. 이건희가 정부를 "3류"라고 일갈하고 김영삼이 "세계화"를 선언했으며 관료들이 마음 깊이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시점이죠. 그리고 외환 위기는 그런 시장 만능의 기조를 이 땅에 뿌리 내리게 했습니다. 국민들도 이제 믿을 건 나 밖에 없다, 살고 보자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출범했지만, 불행히도 IMF의 지배 하에서, 더구나 관료들이 이 기회를 이용해서 IMF가 요구한 것보다 더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예를 들자면, 노동 시장 유연화)을 추구한 결과 사회의 양극화는 가파르게 진행됐습니다.

 

[그림1] 지니계수 변화 추이

[그림2] 노동생산성과 실질임금 추이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가 그래도 복지에 돈을 투입한 결과(붉은 그래프와 푸른 그래프의 차이)가 가처분 소득 지니계수지만 양극화를 막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 핵심 원인은 두 번째 그림에 나타납니다. 같은 시기에 임금 몫이 줄어들었으니까요.

만일 시장에서 이런 양극화를 방치한다면 제 아무리 복지에 돈을 쏟아 부어도 198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중반의 분배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도 언감생심일 겁니다.

이 모두 세계화와 주주 자본주의의 자장 안에서 일어난 일인 건 확실합니다. 그러나 재벌-관료-조·중·동이라는 삼각 지배 동맹이 앞장서서 실천한 것 또한 명백합니다. 재벌 개혁, 경제 민주화 없이 복지만 내세워서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물론 사회적 합의, 또는 대타협 없는 보편 복지 국가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삼각동맹이 왜 타협을 할까요? 물론 나는 수출 대기업 위주 정책은 이미 한계를 드러냈고 미국이나 유럽, 일본이 동시에 장기 침체의 수렁에서 계속 허우적거리면 곧 파탄이 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위기가 온다면 혹시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세력 관계라면 위기가 닥쳤을 때 오히려 수탈을 더 강화해서 그야말로 파국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혹시 스웨덴의 시장 지니계수는 한국보다 더 나쁜데도 (새로운 사회를 위한 연구원은 한국의 시장 지니계수가 과소 추계됐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소득 재분배에 의해서 세계 최고 수준의 분배를 달성했으니 그리 염려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금을 내도록 하는 힘은 또 어디서 나올까요?

노동자-자본 간의 힘의 균형이 없는 상태에서, 더구나 핵심 세력인 민주노총이 국내외 주주 집단과 함께 비정규직 노동자, 하청 기업의 수탈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내는 길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어떤 정당도 흡수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는 시민들의 힘밖에는 없습니다.

경제 민주화와 복지 국가 운동은 같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삼각 지배 동맹과 힘의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사회적 대타협도 가능해질 겁니다.

내가 장하준 교수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내 짧은 청와대 경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단언합니다. 혹시 우리가 정권을 다시 잡더라도 "경영권 보장해 줄 테니, 세금을 왕창 내서 복지 국가 만드는 걸 도와 달라"는 장 교수의 제안은 일언지하에 거절당할 겁니다. 삼각 지배 동맹이 왜 그러겠어요? 그들은 나름대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시장 만능의 사회가 되면 한국이 잘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데요. 더구나 현재의 제도 하에서도 재벌들은 경영권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한국은 스웨덴처럼 타인에 대한 일반 신뢰,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은 사회가 아닙니다. 재벌이 합리적 계산 하에 먼저 임금의 중앙 교섭을 제안하는 상황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수탈할 수 있는데도 타협하는 자본이란 지구 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극한의 경쟁 속에서도, 나와 내 아이만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헛된 꿈에서 이제 막 깨어난 일반 시민들이 시장 만능주의/주주 자본주의와 재벌의 연관을 직시하게 할 때만 우리가 꿈꾸는 복지 국가도 가능해질 겁니다.

장 교수가 놀랄지 모르겠지만, 이해 당사자론자인 나와 주주 이론을 채택한 김상조 교수 사이에 현재의 운동 방향에 대한 이견은 조금도 없습니다. 경제 민주화 운동과 복지 국가 운동이 같이 가야 한다는 데 한국 대부분의 시민 운동가, 경제학자들은 동의합니다. 추상적인 이론으로 이런 합의를 갈라놓으려 하는 건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마 기업 집단법의 목적에 대한 강조점이나 세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서로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요. 김상조 교수 외의 재벌 개혁론자는 기업 집단법에 대해 더 회의적입니다만 "절대로 안 된다"는 수준의 반대 또한 아닙니다.)

장 교수는 50만이 넘는 독자를 거느린 강력한 지식인입니다. 그러기에 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나라가 역사적 기로에 서 있을 때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내가 보기에 장 교수는 아주 구체적인 상황에 너무 깊이 발을 들여 놨습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뛰어나도 한국과 영국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메울 수는 없습니다.

장 교수 뜻대로 경제 민주화 운동이 뜻을 펴지 못하고 사그라진다면 복지 국가 운동도 같이 힘을 잃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 상황에 대해서 일개 지식인이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겠어요?

난 이 논쟁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마치 절대적 대립이라도 있는 양 비춰지고 있는 이 상황(막연하게 같은 편이리라 짐작하고 복지 국가 운동과 재벌 개혁 운동을 모두 지지하던 시민들은 적잖이 당황스러울 겁니다)은 쉽게 극복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엉성한 논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학계 심포지엄 같은 형식으로 치밀하게 따져 볼 수도 있겠죠.

쓰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그럼, 조만간 직접 얼굴 맞대고 이런 얘기를 나눕시다.

2012년 5월 2일

정태인 드림.

* 이 글은 인터넷 일간지 프레시안에 서평 기고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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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8정태인/새사연 원장

고용없는 성장, 불안한 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본이동통제, 자산가격규제, 재벌규제를 먼저 해야 한다. 아래로부터, 안으로부터의 성장을 하기 위해선 임금 상승, 에밀리아형 중소기업 클러스터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여기 또 하나의 성장동력이 있다. 바로 요즘 한창 주가를 높이고 있는 ‘사회경제(social economy·사회적 경제로도 번역한다)’다.
 
경제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시장경제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가정 아래 경쟁을 통해 효율성을 꾀한다. 반면 사회경제는 인간의 상호성(reciprocity)을 근거로 공정성(fairness)의 기준에 의해 연대를 도모한다. ‘착한 경제학’이 누누이 강조한 신뢰와 협동은 사회경제가 사회정의뿐만 아니라 효율성도 달성할 수 있도록 한다.
 
기실 사회경제의 역사는 시장경제보다 오래 되었다. 수렵채취시대에는 어느 종족이나 식량 공유의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 동물을 잡거나 열매를 딸 때도 협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농경시대의 관습으로 아직도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두레나 계 역시 사회경제에 속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협동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윈의 생존경쟁은 동시에 협동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시대에 사회경제는 협동조합으로 재탄생했다.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착취를 막았지만 소비과정에서 또 다시 수탈을 당했던(예컨대 가짜 밀가루를 팔았다)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만든 것이 최초의 협동조합이었다. 협동조합은 조합원의 경제적 이익을 우선 추구하지만 동시에 지역공동체 등의 사회적 목표도 달성하려고 한다.
 
1980년대 이래 서구의 복지국가가 재정위기에 빠지자 사회경제는 다시 각광을 받았다. 역사를 살펴보면 자본주의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사회경제는 대안으로 떠올랐고 부피를 늘려 왔다. 하여 최근에는 국가가 담당했던 복지서비스 중 사회서비스를 사회경제가 떠맡는 경우가 많이 생겨났다. 사회적 협동조합이나 연대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이 바로 새롭게 생겨난 사회경제의 범주들이다. 이탈리이아 볼로냐의 카디아이(CADIAI)라는 사회적 협동조합은 과거 시정부가 하던 복지의 70%를 떠맡았는데 공급가격은 떨어지고 서비스 질은 훨씬 좋아지는 성과를 거뒀다.
 
한국에서도 자활공동체운동, 실업극복 국민운동 등으로 이어지던 사회경제의 흐름이 2007년 사회적 기업법, 그리고 최근의 협동조합 기본법의 제정으로 법제화되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복지사회를 여는 한국에서는 처음부터 사회경제에 연계한 복지를 설계할 수 있다. 예컨대 국가의 건강보험시스템에서 마지막 의료서비스 전달(1차 진료)을 의료생협이 맡는다면 우리는 대통령이나 재벌이나 누리는 주치의제도를 확보하게 된다. 의료생협은 자체로 주치의 역할을 하지만 만일 건강보험에서 일정한 보조금을 준다면 말 그대로 영국식의 주치의가 생겨날 수 있다.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안성 의료생협의 경우 조합원 1인당 연간 1만원에서 2만원 정도의 보조금만 줘도 명실상부한 주치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많은 병을 예방할 수도 있고, 3차 의료기관에 직접 갈 필요도 줄어들 뿐 아니라, 값비싼 검사도 대폭 감소할 것이다. 따뜻한 경제가 동시에 효율성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사회경제는 지역공동체 속에 뿌리박아야 한다. 캐나다의 경우처럼 지역공동체의 사회경제정책을 사회경제부문이 담당할 수도 있다. 로컬푸드운동이나 재생에너지 사업, 제주 올레길이 불을 붙인 트레킹코스 사업, 숲 가꾸기 등이 모두 사회경제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이다. 수많은 사회경제가 네트워크를 이뤄서 신뢰와 협동이 번져나가면 그것이 곧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축적이다. 이미 증명된 것처럼 사회적 자본은 사회혁신을 낳아 따뜻하면서도 효율적인 경제를 이루게 한다.

현재 2~3%에 불과한 사회경제를 최소한 10% 수준으로 늘린다면 우리 아이들은 훨씬 더 안전하고 따뜻한 사회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마을만들기 등의 사업도 1000만명 대상의 거대한 사회경제 프로젝트이다. 이제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사회경제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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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8  김병권/새사연 부원장
 
2010년부터 무상급식과 무상교육·무상보육 등에서 발화된 보편복지 요구가 주거복지로까지 확산되면서, 이제는 주택 문제가 부동산 시장 살리기 문제가 아니라 국민에게 적정 비용으로 안정된 주거공간을 제공하는 문제로 대전환을 시작하고 있다. ‘주택은 팔리는 상품이나 가치가 불어나는 자산이기 이전에 살아가는 공간’이고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공간’이라는 공감대가 국민들에게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실로 획기적인 인식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변화는 민심에 민감한 선거공약에 그대로 반영된다. 처음부터 주거문제를 복지로 접근했던 통합진보당은 물론이고 민주통합당과 새누리당까지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고 주택 바우처 제도를 도입해 전세자금을 지원하겠다는 공약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전월세 상한제도 원칙적으로 모두 찬성한다. 그러자 ‘복지 포퓰리즘’이라면서 시장의 불만이 거세다. 특히 전월세 상한제에 불만이 집중되고 있는데,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려는 위험한 발상”이라며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장의 불만은 정확히 표현하면 모든 시장 참여자가 아니다. 전월세 임대 공급자와 건설업체·금융회사, 그리고 이들에 동조하고 있는 보수언론을 지칭한다. 시장에서 전월세를 구해야 하는 세입자가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나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이 늘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투기적 성향이 강했던 부동산 시장에서 시장가격이 합리적으로 결정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는 어렵다. 물론 시장이 국민 주거생활 향상에 미친 긍정적 효과도 많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인구당 주택수나 주거면적, 상하수도 환경 등을 기준으로 보면 주거수준이 획기적으로 향상됐다고 한다. 최저주거 기준 미달 가구 비중도 2010년 기준 8%를 넘지 않을 만큼 개선됐다. 상당부분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개선된 것이다.

또한 질적인 개선은 앞으로도 계속돼야겠지만 양적으로는 주택 보급률이 100%를 넘어섰다. 주택 소유를 기준으로 봐도 주택이 없는 가구가 38.7%, 주택 소유 가구는 다주택 보유자를 포함해 61.3%로 올라갔다. 1천조원의 가계부채를 대가로 한 것이지만 선진국 사례에 비춰 볼 때 자가소유 비율이 대체로 올라갈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 역시 시장기제로 만들어진 결과다.

하지만 시장이 가장 잘못한 것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름 아닌 주택가격이다. 교육과 보건·보육 등 대부분 복지를 시장으로 해결하면 늘 고비용 문제를 일으켜왔지만, 주택문제는 그 정도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한마디로 시장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금도 서울지역 아파트 기준으로 가격이 평균 1년 소득의 10배가 넘는다. 만약 자기소득으로 아파트를 샀다면 금리를 5%로 계산해도 매년 소득의 절반을 주거를 위해 지불하는 것과 다름없다. 아파트 가격의 절반을 대출받았다면 계산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매년 소득의 4분의 1 이상을 은행에 이자로 지불해야 하며, 나아가 연소득의 5배가 되는 원금까지 상환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일반적인 개인이 “살아갈 공간을 위해서” 사적으로 감당하기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비용이 아닌가.

주택을 소유하지 않고 전세나 월세로 임대해서 살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서울 기준으로 전세가격이 주택가격의 50%를 넘어서기 시작했으니 전세자금이 연간소득의 5배가 넘게 된다. 이 자금은 말만 금융자산이지 단 한 푼의 이자도 창출하지 않고 유동성도 전혀 없다. 그만큼이 모두 비용이다. 월세도 마찬가지다. 매년 소득의 절반을 주거를 위해 임대료로 지불해야 한다.

어쩌다가 주택가격이 소득의 10배를 넘어가게 됐고 또한 임대비용이 커지게 됐을까. 결과적으로는 모두 시장이 스스로 조정해 도달한 가격이다. 이제는 정부가 임의로 왜곡한 것도 없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재건축 규제완화, 세제 완화, 투기지역 규제완화, 그리고 다주택자 중과세 규제완화 등 거의 모든 규제를 풀어서 오직 ‘시장의 자율적 가격 조정기능’만 남게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주거비용은 아직 국민이 기대하는 합리적인 선으로 오지 않았다. 반대로 2년 연속 소비자 물가 상승률의 4~6배로 전세가격이 폭등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주거비용에 관한한 시장이 가격조정 기능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주택가격을 포함해 전체적인 주거비용을 완화시키기 위한 포괄적인 대책이 필요하겠으나 당장 전월세 상한제를 통해서 ‘시장에 의해 왜곡된’ 주거비용을 바로잡는 것은 주거복지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 글은 매일노동뉴스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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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03 / 26 최정은/새사연 연구원

자료 : OECD

▶ 용어 해설

아동가족복지란?

아동이 있는 가족을 위해 국가가 현금급여나 현물서비스에 재정을 지출하는 것으로, 총 지출액을 각 나라의 GDP 대비한 환산 비율로 평가한다. 아동가족복지는 아동수당, 부모휴가급여, 보육서비스지원 등을 포괄하고 있다.

▶ 문제 현상

한국의 아동가족복지 지출 비중, OECD 꼴찌

한국의 아동가족복지 지출은 GDP 대비 0.5%로 OECD 국가들 중 꼴찌다. 우리는 OECD 국가 평균(2%)의 1/4 수준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무상보육이 확대되면서 정부 지출이 늘었지만, 아동가족복지의 지출 범위가 크게 나아지지는 못했다. 복지 전반이 탄탄한 스웨덴은 아동가족 부문에 GDP 대비 3.35%를 지출해 OECD 국가들 중 가장 높다. 우리와는 6배 이상 차이가 난다.

출산과 육아환경이 좋지 못하다면, 여성의 사회참여가 지속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출산과 육아기 젊은 여성들이 일과 자녀양육을 병행하지 못해 일을 포기하는 비율이 높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은 54.8%로 OECD 국가들 중 최하위권이다. 반면, 스웨덴은 여성의 경제활동을 중심에 두고 공보육과 부모휴가 등을 아낌없이 지원하면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 문제 진단과 해법

복지에 대한 요구가 확대됨에 따라 앞으로 복지예산을 더 늘려 나갈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제대로 된 효과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아동가족 복지 향상을 위한 종합적인 이해 속에서 정책방향과 예산이 책정되어야만 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아동가족 복지예산의 대부분은 보육에만 치중되어 있다. 아동가족 복지에 대한 범위를 확장하여 출산-아동-여성일자리 문제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고 아동가족 복지의 핵심인 여성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위한 고용환경 개선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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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08  정태인/새사연 원장 

지난 호에 “복지사회 제1의 적은 시장에서의 분배 악화”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분배를 악화시키는 기존의 “바깥으로부터, 위로부터의 성장”을 “안으로부터, 아래로부터의 성장”으로 바꿔야 한다.
 
바깥으로부터의 성장이란 수출대기업을 위한 거시정책을 말한다. 이명박정부는 2009년부터 세계금융위기 상황에서 한국으로 몰려 드는 달러를 1100원 수준에서 무제한 사들이는 환율정책으로 일관했다. 위로부터의 성장이란 수출이 성장률을 높이면 고용과 세수가 늘어나서 복지도 가능하다는 ‘적하효과’(trickle down effect)를 말한다. 하지만 1980년대 이래로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이 주장은 거짓임이 판명되었다. 지속적으로 심화되는 양극화 현상을 지난 호에 지니계수로 확인하지 않았는가?

이제 완전히 거시정책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미국, 유럽, 일본이 모두 0~2%의 성장에 허덕이는 현실은 수출에 목을 매다는 경제가 더 이상 지속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미국이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우리의 오랜 구호를 실천하는 상황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동안 동아시아 수출을 두 배로 늘릴 것이라고 호언하고 있으며 의회는 ‘환율법’(상대 국가가 환율을 조작한다고 판단할 경우 무역보복을 할 수 있다)이라는 말도 안되는 보호무역 입법을 했다. 환율법은 우선 중국을 노리고 있지만 현재 양국의 세력관계 상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며, 또 2007년 이래 중국의 위안화는 절도있게 절상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동안 1100원 선에 머무르고 있는 원화가 첫 번째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래저래 원화 가치는 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장에 맡겨서 널뛰는 환율은 경제를 휘청이게 만들 것이다. 자본통제가 그 답이다. 앞으로 국제표준도 일정하게 자본의 흐름을 규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토빈세나 외환가변유치제와 같이 국내로 유입되는 달러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홀로 하기에 부담스럽다면 동일한 고민에 빠져 있는 한·중·일, 아세안과 함께 시행하고 나아가서 5조 달러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외환보유고를 공동관리하면 막대한 액수의 개발자금도, 예컨대 북한의 인프라 개선에 활용할 수 있다.
 
임금도 마찬가지이다. 수출경제라면 임금은 비용으로만 인식되겠지만 내수경제라면 임금은 곧 수요이다. 다행히 중국의 임금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임금을 올릴 여유를 가지고 있다. 불행히도 현재 한국의 노동운동 상황으로는 중소기업과 비정규직의 임금을 올리기 어렵다. 일례로 최저임금 결정방식을 바꿀 수 있다. 최저임금을 중위 임금(임금을 낮은 순서부터 일렬로 세웠을 때 중앙에 위치한 노동자의 임금)의 1/3로 정하면 자동적으로 매년 임금의 격차가 줄어들 것이다. 물론 2분의 1인지, 3분의 1이 옳은지 그 비율은 사회적 합의로 정해야 한다. 현재 계속 낮아지고 있는 노동분배율(임금 몫)을 끌어 올리는 정책을 입체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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