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촛불시민혁명’은 ‘시민 주도의 새로운 시대
  • ‘광장’은 새로운 삶의 원천이 될 것이다
  • 시민의 힘으로 좌우 진영 논리를 허물었다.
  • 정치 지형의 거대한 지각변동이 예고된다.

 

2016년 11월 12일 100만명

2016년 11월 27일 190만명, 서울 광화문 광장에만 모인 시민의 수입니다.

하지만, 2016년 11월 29일에 발표한 3차 담화문에서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은 잘못한 것은 없으며, 문제의 해결 및 책임을 국회로 넘기며 자신이 살 궁리만을 모색했습니다.

모였습니다. 보여줬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더 방향을 잡아 나가야 합니다.

새사연 2016년 마지막 확신광장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저자인 새사연 박세길 이사와 함께 2016년 혁명의 과정 ‘촛불시민혁명’의 정체에 대해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미 위대한 시민의 힘은 기존의 좌우 진영 논리를 허물었습니다. 이는 중대한 내년 선거를 앞두고 정치 지형의 거대한 지각 변동이 있을 것임을 예고합니다. 그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한국에서 더 나아가, 미국의 정치혁명 버니샌더스를 통해서 올해의 혁명을 바탕으로 내년 우리가 준비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아봅니다.

모두가 생활 정치인인 지금, 회원님과 생활인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요청드립니다.

 

■ 일시: 2016년 12월 8일 (목) 저녁 7시

■ 장소: 가톨릭청년회관 바실리오홀 (2호선 홍대입구역)

■ 구성 및 강연자

– 순실4년, 대한민국 시민혁명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박세길 이사)

– 미국대선 트럼프, 그리고 정치혁명 버니샌더스 (새사연 버니샌더스 좋아요 소모임)

– 토론 및 질의응답

■ 비용: 무료

■ 신청: https://goo.gl/forms/vZH9GH3SzoDMdrOY2

■ 문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02.322.4692 / edu@saesayon.org

■ 본 강연은 새사연 <청년정치> 소모임, <버니샌더스 좋아요> 소모임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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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칼럼, 보고서2015.10.16 11:41

2015-10-16                                                                                     송민정 / 새사연 연구원

‘올바르다’라는 말은 ‘옳고 바르다’는 뜻을 갖고 있다. 옳고 바른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준을 세워야 하고, 그 기준의 당위성이 다수에게 납득되어야 한다. 지난 12일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역사(중학교), 한국사(고등학교) 교과서를 정부가 직접 개발하여 2017년부터 보급하겠다고 발표 하였다. 이후 관련 이슈는 국정교과서라는 키워드로 포털사이트, SNS 및 언론을 뒤덮었다. 치열한 논쟁의 주인공인 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황우여 교육부장관 겸 부총리는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위한 교과서(이하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지칭하였다. 즉, 현재 중고등학생이 사용하고 있는 역사, 한국사 교과서는 오류투성이의 이념 편향적인 ‘올바르지 않은’ 교과서이며 그것을 종식시킬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담은 것이다.

하지만 ‘올바른 역사’의 기준에 대한 합의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장관의 브리핑 내용과 교육부의 보도자료를 보면 올바른 역사교과서는 과거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들의 혼보다는 놀라운 속도로 산업화를 이루어낸 불도저 같은 기세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기존의 교과서들이 북한이 내세우는 주체사상이나 김일성이 활동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서술을 자세히 다루는 것을 두고 ‘분단국가의 특성을 무시한 처사’라 판단, 기존 교과서들의 편향성을 바로 잡겠다며 호언장담을 하였다.

문제는 기준에 대한 합의 뿐만이 아니다. 공정한 집필진의 구성의 어려움, 균형 서술에 대한 불확실성, 2017년에 사용될 교과서를 만들기엔 부족한 시간 등을 이유로 사회각계에서 반대 의견이 빗발치고 있다. 각 대학의 사학과 교수들과 역사학계에서도 국정교과서 집필에 관해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한 주간의 각계 동향을 살펴보면 다수에게 납득된 기준과 올바른 역사교과서에 중심이 될 기준의 온도 차이가 몹시 큰 것을 체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국정교과서에 대해 첨예한 논쟁이 있는지 교과서의 발행방법과 국제추세를 통해 살펴보자. 교과서의 발행방법은 국정도서, 검정도서, 인정도서 그리고 자유발행제로 나누어진다. 먼저 국정도서는 국가 단위의 통일성이 필요하거나 경제성이 없는 교과서를 국가나 지방정부에서 직접 제작하고 발행하여 의무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발행방법이다. 저작권은 교육부에 귀속된다. 검정도서는 발행수요가 많은 교과서를 민간이 제작하여 국가나 공기관이 마련한 기준에 따라 심사를 받는 제도이다. 즉, 저작권은 발행출판사에 있지만 교육부장관의 검정을 받은 도서이다. 다음으로 인정도서는 국정도서나 검정도서에 없는 교과서나 기존 교과서의 보충 도서를 민간이 제작하여 발행한 도서이다. 국가나 지자체가 교과서로서 인정하게 되면 목록을 만들어 각 학교에 배포된 후 학교별로 채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자유발행제는 앞선 세 종류와 달리 교과서가 마치 일반 출판물처럼 취급되어 정부가 교과서의 제작에서 채택까지 관여하지 않는 방법이다.

국제적으로 교과서를 제작하고 채택하는 데에 한 가지 방법만 고수하는 나라는 드물다. 우리나라 중등과정의 경우 과목에 따라 국정, 검정, 인정도서를 혼합하여 사용하고 있다. 외국의 경우 북한, 필리핀, 핀란드만 현재 교과서를 국정도서로만 사용하고 있고, 중국, 대만, 인도네시아 등은 국정도서와 검정도서를 혼용하고 있다. 유럽은 대부분 자유발행제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교과서에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수록 다양성을 없애는 후진적 움직임이라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특히 역사는 집필자의 역사인식이나 역사관이 강하게 반영되는 분야이므로 국정도서로 지정하게 되면 집필진이나 주도기관의 영향이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는 과목이다.

몇 가지 당시 정부의 영향이 나타난 교과서의 예시를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한국 근현대사 중 5.16에 대한 서술이 시기별로 다르다.  1972년 박정희 정권 시기의 근현대사 교과서는 5.16에 대해 ‘박정희 장군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라 서술하고 있다. 이후 1982년 전두환 정권에서는 ‘장군’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지만 같은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현재 쓰이고 있는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5.16을 ‘군사정변’으로 서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두 번째로 5공화국에 대한 평가이다. 1982년 교과서에서는 5공화국을 두고 ‘정의사회를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정부’라고 표현하고 있다. 반면 현재 근현대사 교과서는 전두환 정권에 저항했던 6월 민주항쟁에 대해 다룸과 동시에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5공화국의 강압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있다.

그림1. 2차·4차 교과과정의 국정 역사 교과서가 다루는 5.16 군사정변
칼럼2출처 :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ory.go.kr)

그림2.  2차·4차 교과과정의 국정 역사 교과서가 다루는 제5공화국
칼럼1출처 : 우리역사넷 ( http://contents.history.go.kr)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 한 가지가 드러난다. 올바른 역사교과서의 편찬위원장인 김정배 위원장이 유신정권과 5공화국에 대해 우호적인 서술을 했던 1982년 국정교과서의 편찬위원 중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새로 만들고자 하는 올바른 교과서가 기준이 정말 ‘올바른 기준’에 의해 집필될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게 하는 부분이다.

저명한 역사학자 E.H.Carr는 그의 대표저서인 “역사는 무엇인가”에서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2014년 1월 교학사의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논란을 기억하는가? ‘친일사관 역사교과서’라고 불리는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사태 직후 여당은 역사교과서를 단일 국정교과서로 돌리는 방안에 대하여 검토해 보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적이 있다. 그리고 외신에서는 일본의 아베총리의 교과서 왜곡과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움직임은 그들의 아버지의 오점을 지우고자 하는 움직임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Politicians and Textbooks”, the New York Times, 2014.2.13.) 현 정부의 역사교과서 제작 움직임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아닌 ‘답정너(답은 정해져있으니 너는 대답만 해의 준말)’식의 단절이다. 우리는 눈부시고 빠른 산업 발전의 결과, 현재의 사회 및 노동의 병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역사는 일기장이 아닌 후손들에게 남겨줄 ‘실수방지 매뉴얼’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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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4                                                                                  강세진 / 새사연 연구이사




세상의 무서움을 모르던 시절 이런 궁금함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필요한 것을 얻는 데에 많은 돈을 쓰지 않아도 된다면 꼭 부자가 될 필요가 있을까?’

무엇이든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던 시절이었다. 필요한 것을 얻는 방법을 배우고 익혀 직접 해결하고,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만 시장에서 구입하자는 생각도 했었다. 욕심만 줄인다면 가능할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손’

여기에 복지와 공공재라는 개념을 알게 된 이후에는 스스로 해결하지도 못하고,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사기 어려운 것들을 복지로 해결하면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교과서에는 우리 사회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벌써 20년도 더 된 오래 전 일이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제 구실을 하려면, 부는 단순히 ‘재화의 양만을 의미’해야 한다. 부가 단순히 재화의 양만을 의미해야 된다는 말은, 공정한 경쟁과 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얘기이다. 좀 더 정치적으로는 ‘반칙 없는 사회’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일부 부유층의 반응은, “부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지 말라”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노력의 대가를 빼앗겠다는 것이 아니라, 부유하더라도 공정하고 평등하게 대하겠다는 메시지에 “자유를 주지 않으면 경제를 망가뜨리겠다”고 위협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주장에 지지를 보이는 유권자도 상당한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만족하는 삶을 살겠다는 순진함으로 일관하는 사이,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부자라도 되어버린 것일까? 충격에 멍한 기분이 들면서 어디에선가 읽었던 프랑스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주장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대강 ‘프랑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극빈층을 방치하여 이른바 국가 내 제3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문제제기였다. 이러다가는 51%의 안녕을 위해서 기꺼이 49%의 희생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남의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풍문으로 들었소>는 우리에게 ‘그렇게 나 몰라라 하면 안 된다’고 계속해서 말해줍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의 인터뷰이다. 여기에서 ‘무슨 짓’이 뜻하는 주요 행위는 한 동안 시끌시끌하게 했던 ‘갑질’이다. 그런데 사회문제를 ‘갑질’이라는 식으로 희화하거나 다소 가볍게 표현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이나 심각함을 흐릴 수 있어서 맘에 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민주사회에 살고 있고 따라서 문제의 본질을 풍자가 아니라 직설적으로 인식하고 표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갑질이란 것은 권력을 지닌 자가 그렇지 않은 자에게 부리는 횡포를 뜻한다. 반칙 없는 사회를 위해서 제거하려던 것이 갑질이다. 공정한 경쟁과 거래를 위해서 처벌해야 하는 범법 행위이다. 우리 사회의 수많은 갑들은 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정치활동을 했으며, 승리했다.

돈이 많아봐야 재화밖에 모을 것이 없다면 돈을 벌어 무엇 하겠는가. 사람이 일생토록 쓸 수 있는 재화의 양은 의외로 적다. 돈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지위를 얻고,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돈을 필요 이상으로 모을 이유가 없다. 봉건귀족이 부자로 환생한 것이다. 이보다 더한 퇴행이 있을까.

민주주의 국가에서 ‘갑’이 설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갑질’을 통해 표를 얻는 것밖에 없다. ‘갑질’이 표를 얻는다는 건,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권위주의와 위계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대접을 바랐을 뿐인데… 그 참혹한 결과

‘잘난’ 나와 내 아이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원했는데, 그 결과는 참혹함뿐이다. 당연히 대접받아야 하는 사람은 민주주의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을 흔히 망각하고 살게 되는대표적인 예가 ‘손님은 왕이다’라는 인식일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인식이 민주사회를 위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 사람의 인격체로써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지 돈을 내는 갑이라서 대우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갑질을 하는 대상은 우리와 같은 처지의 점원이지 그를 고용한 자본가가가 아니다. 왜 우리끼리 서로 모멸감을 주고받아야 하는가.

우리 사회는 형대접, 상사대접, 어른대접, 학력대접, 부모대접, 손님대접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요구한다. 문득 ‘박사인 내가 왜 이런 허드렛일을 해야 하지’라는 생각을 하고는 그런 내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버릇처럼 민주주의를 외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의 기반인 ‘평등’을 망각했다. 그러면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대접을 요구하다니 그런 모순이 또 어디 있을까.

가진 것이나 업적·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건 당연한 상식이다. 이 당연함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갑질’은 영원할 것이다. ‘부자에게 자유를 주라’는 구호에서 ‘자유’가 뜻하는 게 과연 무엇이겠는가? 왜 애써 민주와 복지의 길을 버리고 독재와 불평등의 길을 걸으려 하는가.

혹자들은 “성공에 대한 대접’이 없으면 누가 열심히 일을 하려 하겠는가”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대접받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이 사회를 봉건시대로 돌려놓을 수도 있는 위험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너무도 사랑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을 모독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대접을 바라지 말자. 사랑과 우정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애써 사랑을 민주주의 이념으로 넣은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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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 05 / 28 여경훈/새사연 연구원

 

새사연은 2012년 1월부터 '경제를 보는 세계의 시선'이라는 이름으로, 경제에 관해 눈여겨 볼만한 관점이나 주장을 담은 해외 기사, 칼럼, 논문 등을 요약 정리하여 소개했습니다. 2013년부터는 '2013 세계의 시선'이라는 이름으로, 경제 외에 사회 분야까지  확장하여 해외의 좋은 주장과 의견들을 소개합니다.(편집자 주)

 

 

지난 4월 IMF는 세계경제전망을 발표하면서, 올해 세계경제의 성장률을 3.3%로 지난 1월 전망치보다 0.2%p 삭감하였다. 특히 영국의 전망치를 발표하면서 1월보다 0.3%p 하락한 0.7% 성장할 것이라 전망하며, 이례적으로 영국의 긴축정책을 강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IMF 수석 경제학자인 블랑샤는 경제 전망을 묻는 SKY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낮은 성장률이 지속되는 환경에서 긴축정책을 수정하지 않는 영국의 경제정책을 “불장난(playing with fire)”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아래는 영국 가디언(Guardian)에 실린 민주주의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두 개의 칼럼을 소개한다. 하나는 캠브리지 대학 장하준 교수의 칼럼으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 얼마나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는지를 비판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한 90세 노병의“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그는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희생하면서 지키고자 했던 복지와 민주주의 가치가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철저히 파괴되는 현실을 통탄하고 있다. 이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매우 훌륭한 칼럼이다. 칼럼의 핵심 내용만을 간략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는 서구 세계를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운동의 자유, 정당한 법의 절차, 그리고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피해를 받는 사람들을 보호할 사회안전망 등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우리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지 않는 비용은 민주주의의 종말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의 종신형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건강보험 제도를 유지하지 못한 대가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계급(two-tier) 사회로의 회귀임도 알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의 비축량이 지구상의 모든 강물을 한데 합한 것만큼 방대한 세계에 살고 있지만, 정치인과 금융 기관, 그리고 대기업들은 더 이상 인권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그들은 건강보험, 연기금, 적정 임금, 노동조합, 그리고 사회안전망과 같은 사치를 누리고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돈이 부족하거나 빚 때문이 아니다. 바로 공동체보다는 장부에 충실한 시티의 은행가나 헤지펀드 관리자가 아니라, 국가의 구성원은 민중이라는 것을 정부가 약속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심하라오스본 총리

(Watch Out, George Osborne: Smith, Marx, and even the IMF are after you)

 

 

2013년 5월 8

장하준

가디언(the Guardian)

 

 

한편 장하준은 최근 영국의 긴축정책에 대한 IMF의 비판을 상기하며, “IMF로부터 긴축정책을 완화하라는 충고를 듣는 것은 스페인 종교 재판관에게서 이단자에게 더욱 관용을 베풀라는 조언을 듣는 것과 동일하다고 비판한다그만큼 IMF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긴축정책의 교리를 설파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그는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한국경제에 대한 IMF의 잘못된 처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는 놀라운 발전이다과거 30년 동안 IMF는 긴축정책을 전파하는 기수(standard-bearer)였다.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IMF는 당시 재정흑자를 유지하면서 GDP 대비 정부부채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였던 한국에까지 정부지출을 삭감하라고 강요하였다그때는 그 나라의 역사에서 이미 가장 심각한 경기침체에 빠져, 5개월 동안 하루에 100개가 넘는 기업이 파산하던 시기였다재정정책이 황당하게도 긴축으로 전환하자재정적자는 더욱 심각해졌다.

사실 IMF는 감사기관인 IEO(Independent Evaluation Office)가 2003년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1997년 IMF의 감독 및 경제정책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IMF의 경제정책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터무니없는 경제 전망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IMF는 1997년에 한국경제의 1998년 성장률이 2.5%에 달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러나 1998년 한국경제의 성장률은 마이너스 6.7%였다. 9%p에 달하는 성장률 전망의 오류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무능력의 결정판이었다.

 

 

* 보고서 전문을 보시려면 PDF 아이콘을 눌러 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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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3김병권/새사연 부원장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이후 우리 사회의 미래 전망에서 가장 애매한 대목은 '경제민주화'의 향방이다. 18대 대선에서 시대정신으로 부상했고 박근혜 당선자도 가장 중요한 국정과제로 제시한 것이 경제민주화였다. 하지만 박근혜 당선자 자신은 물론이고 소속된 정당의 성격이 경제민주화보다는 신자유주의를 뿌리로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진정성 논쟁이 나왔고 집권 후에 과연 약속을 지킬 것인지 의문도 많았다.

일단 첫 시작은 희망적이지 못하다. 가장 기초적인 경제민주화의 관문이라 할 대형 할인마트 규제를 크게 후퇴시켰기 때문이다. 연말까지 법안처리를 미뤄 둔 유통산업발전법에서 저녁 10시부터 영업시간을 규제하자는 안도, 월 3회 이상 휴무를 규정하자는 안도 모두 새누리당에 의해 거부됐기 때문이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당선자의 자발적 의지로 실현될 경제민주화는 거의 없을 것임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경제민주화가 그렇게 간단히 집권당에 의해 박물관 속에 다시 봉인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경제민주화는 세계적 차원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극복하는 보편적 과제와 궤를 함께하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는 지난 30년 동안 무차별적인 무역과 금융의 세계화, 지속적인 감세와 규제완화, 공공부문의 약화와 민영화, 그리고 체계적인 노동권 약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구해 왔다. 30년 동안 추구된 신자유주의 결과는 세계적 차원에서의 ‘심각한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였으며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장기침체에 빠진 경기회복을 위해서도 불평등 해소는 점점 긴급한 과제가 되고 있다.

미국을 필두로 ‘99% 운동’이 제기되기 시작하고 불평등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거시경제정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우리 사회의 경제민주화도 바로 이와 같은 세계사적 보편성 차원과 완전히 맥락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결코 한국에 특수한 재벌 문제가 있으니 이를 서구와 같은 기준으로 맞추자는 따위의 97년 버전의 경제민주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신자유주의와 불평등에 저항하는 세계적인 움직임은 박근혜 정권 5년 동안 계속 확대될 것이며 당연히 우리 국민들의 경제민주화 운동도 계속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완전한 시장의 자유경쟁과 시장에 대한 정부 간섭의 최소화를 주장하기 때문에 독점 대기업의 시장 독식과 경쟁 제한에 대해 신자유주의도 반대한다고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는 그들의 주장과 달리 그 어느 때보다 금융과 제조업 모두에서 독점 대기업의 시대였으며, 끊임없는 인수합병을 통해 독점화 수준을 글로벌 차원에서 확대한 시대다.

즉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로운 자본주의 모델이 작동하기 위해 실질적 경쟁과 많은 수의 경쟁이 필요하다던 이전의 입장을 포기하고 대기업 편향 정책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자유로운 경쟁이 ‘소비자의 선택의 자유’를 확대시킨다는 개념 역시 포기했다. 대신 인수합병 등을 통한 거대기업의 출현이 설령 경쟁이 줄어드는 결과가 생기고 소비자 선택을 제한하더라도, 효율성을 증대시키고 경제 전반의 부를 확대시킨다면 소비자의 선택은 줄지 모르지만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색다른 주장을 펴기 시작한다. 한국의 재벌들이 급격히 몸집을 키워 왔던 97년 이후 역시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급격히 확대된 과정이며, 이 두 과정은 아무런 모순 없이 진행됐다. 따라서 재벌개혁과 신자유주의 극복이 하나의 과제로 제기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한국과 같은 신흥국의 독점 대기업은 선진국과는 약간 양상이 좀 다르다는 비판도 있다. 신흥국은 선진국을 추격하고 국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기꺼이 정부가 지원까지 하면서 독점 대기업을 육성하는 것이 용인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로 인해 중소기업이나 노동자 등이 얼마간 희생될 수 있지만 경제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제 삼성과 현대자동차와 같이 글로벌 기업 수준으로 한국 재벌이 성장한 상황이라면 어떤가. 그러면 당연히 국제 경쟁력을 위한 국내 경제주체들의 희생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국내 경제주체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지금의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가 그런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독점 대기업의 권력 확대는 자본주의 시장을 파괴할 뿐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를 위협하기 때문에 또한 용인될 수 없다.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 영국 워릭대 교수는 20세기 전반기에 발전한 미국의 고전적인 반독점법이 기업 권력의 대규모 축적을 깨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독점 대기업의) 권력의 집중이 심해서 효과적인 경쟁이 사라지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 경제민주주의와 정치민주주의 모두에서 필수조건이었다. 보통사람들은 언제나 기업이나 정치인과 어느 정도 대등한 조건에서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기업과 정치인에 의해 지배될 터였다.”(<왜 신자유주의는 죽지 않는가(The Strange Non-Death of Neoliberalism)>, 84쪽)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21세기 초에도 거대 금융권력과 기업권력이 세계 도처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중이다. 그 가운데 한국의 재벌이 선두에 서 있다.

*이 글은 매일노동뉴스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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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