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 01 / 31 여경훈/새사연 연구원

새사연 2013년 회원 캠페인- “새사연과 함께하는 희망 북클럽”을 시작하면서

우려했던 신자유주의 보수정권의 집권 연장이 현실화되면서 우리 사회가 진보적 발전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힘들어 하는 다수 국민이 존재하는 한 변화에 대한 모색은 멈출 수 없으며 우리 사회의 진보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진보가 노력을 기울여온 보편 복지와 경제 민주화, 그리고 일자리를 의제로 하여 치러진 18대 대선임에도 진보가 패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수가 손쉽게 의제를 차용해도 아무런 차별화가 되지 않을 만큼 진보 정책의 폭과 깊이가 짧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진정 현실에서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의 삶과 생각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살아있는 진보 정책’을 모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평범한 생활인들과 손잡고 우리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추구해온 새사연은 진보 학습으로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할 것을 회원들과 시민들에게 제안합니다. 그 첫 출발점으로 새사연 연구원들이 각자 회원님들께 꼭 추천하고 싶은 책 한권씩을 선정하여 소개하고, 진보의 깊이를 위한 물음을 던지겠습니다.

아울러 이후에 회원님들이 추천하는 책, 새사연과 함께하는 독서 토론, 저자와의 대화 등을 다양하게 시도할 생각입니다. 회원님들의 관심과 참여 기대 하겠습니다.

 

<새사연 희망 북클럽 ⑥>『케인스: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가 』

-처음으로 케인즈를 읽다-

 

추천도서 6

케인스: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가

(로버트 스키델스키 지음, 고세훈 옮김

2009, 후마니타스)

지난 달 기대치 않은 실연을 경험한 후 한동안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왔다. 그런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시대적 비극에 굴하지 않고 낙관적 미래를 그리며 최상의 행복과 성공적인 삶을 추구했던 케인즈. 경제학의 근본문제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라고 정의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가장 확신에 찬 어조로 상대를 설득한 사람. 13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처음으로 ‘케인스’를 읽다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1970년 맥밀런 출판사와 계약을 맺은 후, 30여 년에 걸쳐 3부작 ‘케인스’ 전기를 완성하였다. 3부작의 제1권은 <희망의 좌절, 1883-1920>로 1983년에, 제2권은 <구원자로서의 경제학자, 1920-1937>로 1992년에, 그리고 제3권은 <영국을 위한 싸움, 1937-1946>으로 2000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 3부작을 60%로 축약하여 새롭게 출간한 단행본, <케인즈: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인>이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초, 고세훈 교수의 4년여에 걸친 노고로 번역되었다. 축약된 번역본임에도 불구하고, 참고문헌 및 자료를 제외해도 134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러나 천 페이지가 넘는 그 방대한 양에도 불구하고 소설처럼 금방 읽힌다. 역사가로서 저자의 영웅사관에 입각한 대하소설식 전개 방식과 빼어난 문체와 더불어, 원문의 뜻을 정확히 옮기는데 심혈을 기울인 번역자의 깔끔하고 정확한 번역도 적지 않은 몫을 하였다.  

필자는 경제학, 그것도 비주류인 케인스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케인스의 생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동성애, 도박, 발레리나 등 여기저기 들은 풍문을 제외하면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은 대선이 끝나고 정신적 ‘충격’을 받은 후, ‘힐링’의 일환으로 선택되었다. 연애에 상처를 받은 후 가장 흔한 치료법은 무언가 새로운 관심영역으로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지난 달 ‘일종의 실연’을 경험한 후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자연스레 멀리하면서 가장 쉬운 선택은 ‘책’이었다. 어떤 책을 고를 것인가 고민하다, 가급적 시대적 함의를 끌어낼 수 있고 고난의 시기를 헤쳐 나간 ‘인물’을 다룬 책을 고려하다 뜻하지 않게 거대한(?) 책을 읽게 되었다. 

케인즈는 지난 세기 가장 우울한 시대에 비극적으로 끌려 다니기보다는, 가장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며 최상의 행복과 성공적인 삶을 추구했던 사람, 경제학의 근본문제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라고 정의하지만 정작 본인은 가장 확신에 찬 어조로 상대를 설득한 존재였다.  

그는 “모차르트나 비트겐슈타인처럼 ‘신성한 바보’라는 의미의, 즉 한 쪽 면에서는 특출하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 천재”는 아니었다. 그는 수학과 경제학 전공자로서 훌륭한 업적을 세우지 못해 자책하는 삶을 사는 아버지의 학문적 희망 속에서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훈련받은 아들이었다. 흔히 케인스를 ‘팔방미인’에 비유하곤 한다. 주목할 만한 수학자나 통계학자는 아니었고, 변변한 경제학 학위 또한 없었으며, 자기만의 독특한 철학이나 사상을 전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책의 제목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케인스는 경제학 대가이면서 사회개혁 철학자이자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정치가였다.

통상 사람들이 전기를 읽는 목적은 서문에서 저자가 밝힌 것처럼, “무엇이 한 걸출한 인물의 성품과 업적을 형성했는가를 이해”하는 데도 있지만, 유명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세운 공적과 그들이 연루된 사건들에 관해 알고 싶고,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개인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영웅사관에 입각한 역사가이다. 따라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 등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 속에 케인스를 무대의 중심에 올려놓고 그의 일생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옮긴이 고세훈 교수는 역자 서문에서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무릎을 탁 칠 만큼 탁월한 추천사를 적어 놓았다. 

“이 책은 경제학 비전공자들에게 경제학적 사유에 눈을 뜨게 할 만큼 충분히 경제학적이며, 경제학자들에게 자신들의 학문적 지식·가정·방법론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인생관과 역사를 다시 한 번 성찰할 계기를 줄 정도로 충분히 교양적이다.” 

케인스는 “이성이 죽으면 괴물이 태어나”며,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사악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무지’야말로 “현대의 주된 정치적·사회적 해악”의 뿌리라고 선언하면서 학문의 힘으로서 자신의 철학적 지향인 ‘선한 삶’을 추구하여 인류에게 이익을 안겨다주기 위해 고군분투한 지식인이었다.

20세기 경제학의 가장 위대한 설득가

그러나 케인스의 장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일반이론'이 세상에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용한 경제 이론이자 세상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으로 자리 잡은 것은 그의 대중적 글쓰기 방법과 사람을 끌어들이는 설득 능력이다. 그는 20세기 경제학에서 가장 위대한 설득가였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네 가지 점이 두드러진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공감이 가는 대목이기에 간추려 옮겨 본다. 

첫째, 그에게는 경제학을 상식에 연결시키고자 하는 욕구와 능력이 있었다. “경제 이론에 의한 결론과 상식에 의한 결론 사이”의 균열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실제로 그가 줄기차게 추구해 온 바였다. 고용은 총수요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을 때, 그는 “아무도 차를 사지 않는다면 차를 만드는 의미가 없다”는 자동차 노동자의 직관을 일반화하고 있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일반인과 동떨어진 반직관적 이론들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진술하는 관행에 젖어 있었지만, 그는 일상 언어의 능란한 사용으로 대중에게 다가갔다. ‘저축의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1931년 한 방송의 예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보지요. 우리가 소득을 소비하지 않고, 모두 저축해야 한다면……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굶어 죽을 것입니다.” 

둘째, 그의 글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이를 이리저리 변명하든지 시장에 내버려 두라고 방관하고 있을 때, 그는 언제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구상을 들고 대중에게 다가갔다.

셋째, 그는 도덕적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세상은 “고도의 지성과 과학적 정책으로 무장한 가장 포용력 있고 사심 없는 정신”으로 구성된 정부의 의도적 행위를 통해 더 나아질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다. 진리를 말하기 위해 핵심적인 정부 직위를 포기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의 권위였다.   

경제학의 근본문제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있다 

스키델스키는 '케인스주의 경제학'과는 구별되는 '케인스의 경제학'의 진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케인스가 고전경제학의 비전과 결별한 것은 불확실성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효과를 명확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케인스 혁명’을 위해서 케인스 ‘일반이론’의 요지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제6부, ‘구원자로 나선 경제학자’에 잘 서술되어 있다. 

“단순하면서도 미묘하고, 모호하면서도 심오한” ‘일반이론’에서 케인스는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욕구보다는 내일에 대한 불안감을 감소시키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화폐는 교환의 효율적 매개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치의 저장”을 위해 창안된 노력의 결과로 발생했다. 즉 화폐는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소득을 소비하거나 투자하지 않고 그대로 보유하기 위해 고안해 낸 수단이다.

현금의 보유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노출을 줄이므로 불안감을 덜어준다. 즉 사람들은 언제나 화폐를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소비하거나 아니면 전혀 소비하지 않거나의 합리적 선택에 직면한다. 그러나 ‘돈에 대한 사랑’이라는 개인의 합리적 행위는 경제 전체에 유효수요 부족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불확실성은 기업가의 투자 활동에도 영향을 끼친다. “미래 수익을 추정할 수 있게 만드는 지식 기반이 극단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투자 결정에 있어 관습과 자신들의 '동물적 충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동물적 충동'은 외부 충격에 민감하여 불안정한 성격을 지닌다. 이는 “한 나라의 자본 발전이 카지노 활동의 부산물이 될 때, 그 일은 그르치기 십상”이라는 자본주의 윤리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소비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만 투자의 불안정성과 함께 경제도 불안정한 경기변동의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그는 “현대 세계의 경제적 삶을 괴롭히는 신뢰의 위기에 대한 유일한 급진적 처방”은 개인이 소비와 저축 간에 선택할 수 없게 하는 것”이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논란이 되고 있는 ‘투자의 사회화’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불확실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스키델스키의 지적처럼 경기변동을 ‘미세 조정’이 아니라, “안정화를 위한 제도 구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케인스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 가운데는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결국 위험한 것은 기득권이 아니라 사상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일반이론’ 마지막 문장으로 동시대 주류경제학인 고전학파 경제학을 지칭한다. 이는 잘못된 지식 또한 무지처럼 모든 해악의 근원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금융위기, 긴축재정, 환율전쟁 등 2008년 이후 세계경제는 케인즈가 경고한 그 시대의 실수와 잘못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진정한 케인스 혁명이 현실에서 구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30여년 세계를 괴롭혔던 신자유주의가 금융위기로 휘청거렸지만 여전히 강고한 기득권과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있는 지금, 다시 케인즈를 읽어야 할 이유다.  

저자 소개

로버트 스키델스키

1939년 중국 만주에서 출생했다. 옥스퍼드 지저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부교수, 영국 워릭 대학 국제관계학 교수를 거쳐 경제학과의 정치경제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워릭 대학 정치경제학 명예교수이다. 영국 사민당 창당(1981) 멤버였으며, 사민당이 해체(1992)된 후에는 보수당 상원 의원, 문화위원회, 재정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1991년에는 상원 의원(종신 귀족)으로 서품되었으며, 1994년에는 영국학술원(British Academy)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코소보 폭격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가 당시 보수당 당수이던 윌리엄 헤이그에 의해 위원장직에서 해임됐고, 2001년에 보수당을 떠나 지금까지 무소속 상원 의원으로 남아 있다. 현재 ‘사회시장재단’(Social Market Foundation) 이사장, ‘세계연구센터’(Centre for Global Studies), ‘맨해튼 연구소’(Manhatten Institute)의 이사로 있다. 1983년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전기 제1권 『배반된 희망, 1883~1920』을 출간했고, 1992년에 나온 제2권 『구원자로서의 경제학자, 1920~1937』로 울프슨 역사상(Wolfson Prize for History)을, 그리고 2000년에 출판된 제3권 『영국을 위한 투쟁, 1937~1946』으로 더프 쿠퍼상(Duff Cooper Prize), 제임스 테이트 블랙 메모리얼 전기상(James Tait Black Memorial Prize for Biography), 라이어널 겔버 국제관계학상(Lionel Gelber Prize for International Relations), 아서 로스 외교위원회의 국제관계상(Arthur Ross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Prize for International Relations)을 수상했다. 케인스 전기 외에도, <정치인과 불황>, <영국의 진보학파>, <오스월드 모슬리 평전>, <예종으로부터의 길: 공산주의 이후의 세계>를 저술했다. 현재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가디언>, <인디펜던트>, <런던 타임스>, <뉴 스테이츠맨> 등에 케인스주의, 세계화, 러시아 문제, 국제정치 등과 관련해 활발하게 기고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은 ‘20세기 영국사’와 ‘세계화와 국제 관계’에 관한 저서를 집필 중이다.

* 출처: 알라딘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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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2 / 12 / 21 김병권/새사연 부원장

 

연말, 연초에 접어들면 늘 새해의 경제전망 예측이 화제가 되곤 한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지만, 2008년 말에 이어 유난히 비관적인 전망들이 많다. 예를 들어 내년 한국경제 전망이 삼성증권 2.6%, KDI 3.0%, 한국은행 3.2%(10월에 발표한 수치) 등으로 대단히 낮다. 이들 전망조차도 유럽위기, 미국 재정절벽 우려, 중국경제 경착륙 우려 등의 대외조건이 순조롭게 풀리고 국내적으로 가계부채 위험도 잘 관리된다는 전제 아래에서다.

그래도 2013년 상반기는 잘해야 2% 초반의 저성장에 머물고 하반기에 3% 중반 수준으로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흔히 말하는 상저하고(上底下高)라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경험을 보면 ‘상저’는 대체로 맞았지만, ‘하고’는 언제나 희망사항이었을 뿐 제대로 맞지 않았다. 특히 올해가 그랬다. 올해에도 상저하고를 기대했는데, 오히려 하반기에 더 추락했던 것이다.  

2008년 글로벌 대침체이후 반복되는 경제전망의 실패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케인스 전기를 써서 유명해진, 영국 워릭대학(Warwick University) 정치경제학부 명예교수인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는 매번 전망과 예측을 잘못하는 이유가, 전망의 기초가 되는 경제 모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특히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두 가지 핵심적인 실수가 눈에 띈다. 우선 모든 전망기관들이 사용하는 모델들은 재정 승수(fiscal multiplier)* - 정부지출의 변화가 산출에 미치는 영향 - 을 극적으로 과소 추정한다. 둘째로, 통화당국의 양적완화(QE) 즉 통화팽창이 재정긴축을 어느 정도까지 보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과대 추정한다는 점이다.” 

결국 유럽을 중심으로 각국 정부들이 재정긴축에 경도되면서 이를 통화 팽창정책으로만 보완하려 하기 때문에, 대체로 그들의 예측보다 침체의 골이 깊고 기간도 장기화되고 있다는 지적인 것이다. 재정 자극정책과 통화 완화정책의 역할과 영향, 그리고 그 정책 조합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스키델스키의 비평을 염두해두면서 새해 경제 전망을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모델

(Models Behaving Badly)

 

2012년 12월 18일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

 

"왜 아무도 위기가 오는 걸 예상하지 못했나요?(Why did no one see the crisis coming?)" 2008년 말 무렵 런던정경대학(LSE)을 방문했을 때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경제학자들에게 했던 질문이다. 4년이 지났는데, 경제 전망기관들은 이후 경기침체의 심각성과 기간에 대한 예측에 또 다시 실패했다. 이번에도 “왜 경기회복에 대해 과도하게 낙관했나요?”라는 비슷한 질문을 여왕에게서 받을만하다. 

실제 사례를 확인해 보자. 국제통화기금(IMF)은 2011년에 한 전망에서 유럽경제가 2012년에 2.1%까지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올해에 0.2%까지 위축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영국 예산국(OBR)은 2010년에 한 전망에서 영국이 2011년에는 2.6% 성장을 하고 2012년에는 2.8%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2011년에 0.9%성장했고 2012에는 정체를 해버렸다. 가장 최근에 OECD가 내놓은 유로 존 성장 전망치는 2010년에 한 것보다 2.3%나 낮은 것이다.  

비슷하게, IMF도 2015년 유럽 경제 성장 전망을 하면서 2년 전보다 7.8% 더 적게 전망치를 잡았다. 몇몇 전망기관들은 다른 기관(영국 예산국은 특히 낙관적인 편에 속한다)보다 좀 더 비관적이기도 하지만, 그 누구도 충분히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경제 전망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부정확하기는 하다. 전망기관들이 경제의 모든 측면을 생각해보기에는 너무 많은 변수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관적 판단력과 최선의 추측이 ‘과학적’ 경제전망의 불가피한 일부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경제 전망이 어쩔 수 없이 부정확하다는 것은, 유럽 경제의 회복에 대해 시스템적으로 과잉 낙관을 했다는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다. 정말로 전망치들이 반복적으로 수정되고 있고, 그것도 너무 짧은 시기 사이에 바뀌고 있다. 도대체 (전망 예측에 - 역자) 사용하고 있는 경제 모델의 유효성에 대해 강력한 의심이 들 정도다. 이들 모델들과 모델을 사용하는 기관들은 기성 경제이론에 의존하는데, 이 이론은 그들이 어떤 관계를 ‘가정’하도록 해준다. 오류의 근원이 바로 이들 가정 속에 있다.  

두 가지 핵심적인 실수가 눈에 띈다. 우선 모든 전망기관들이 사용하는 모델들은 재정 승수(fiscal multiplier)* - 정부지출의 변화가 산출에 미치는 영향 - 을 극적으로 과소 추정한다. 둘째로, 통화당국의 양적완화(QE) 즉 통화팽창이 재정긴축을 어느 정도까지 보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과대 추정한다는 점이다.  

최근까지 영국 예산국은 IMF와 유사하게 재정 승수를 0.6로 가정했다. 정부지출이 감소되는 매 단위마다 60% 정도의 경기위축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리카도 등가성 원리(Ricardian equivalence)’**를 가정하는 것인데, 부채를 동원한 공공지출이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정부가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세금을 더 걷을 것이라는 -역자) 예상과 확신에 따라 현재의 민간지출을 줄이도록 만든다는 논리다. 만약에 정부가 현재 재정적자를 내서 지출을 하면 그 적자를 가계와 기업이 미래에 세금인상으로 부담할 것이라고 예상되므로, 가계와 기업은 그에 맞춰서 지금의 소비와 투자를 줄이고 저축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반대로 만약 재정긴축이 미래의 가계 세금 증가 부담을 덜어준다고 예상하게 되면, 가계는 지금 소비지출을 늘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완전고용이 작동하고 있는 경제에서, 국가와 시장이 모든 최종 자원에 대해 경쟁관계에 있을 때에만 들어맞을 수 있는 가정이다. 그러나 현실 경제에서 그걸 여지가 없다면, 공공부문의 긴축으로 ‘해방된’ 자원은 그냥 버려지고 말 것이다.  

전망기관들이 재정 승수를 과소추정하고 있다고 마침내 인정하게 되었다. 최근의 실수를 평가하면서 영국 예산국은, “2011~2012년 성장률 수준 약화를 완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2년 동안의 평균 (재정) 승수를 우리가 추정했던 것의 두 배 이상 많은 1.3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던 것이다. IMF 역시 “재정의 승수 효과는 2008년 대침체(Great Recession)이후에는 실제로는 0.9~1.7사이가 되었다”고 시인했다. 재정의 승수효과를 과소 추정한 결과는 ‘재정 건전성’이 경제에 주는 충격에 대해 시스템적으로 잘못 판단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두 번째 실수로 이어진다. 전망기관들은 통화팽창이 재정긴축으로 인한 문제에 유효한 해독제를 제공해줄 것이라고 가정했다. 영국중앙은행(영란은행)은 3750억 파운드(약 6000억 달러)를 새로 찍어내면서, 총 소비가 무려 500억 파운드(GDP의 3%)까지 자극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에서 양적완화가 계속 이어지면서 나타난 증거들은, 양적완화가 채권 수익률을 떨어뜨리면서 추가적인 거대한 규모의 자금이 뱅킹 시스템 내부에 머물고 실제 경제로 투입된 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불황에 빠진 금융시장에서 장, 단기 자금을 빌리려는 기업과 가계에 대한 신용기피로 인해서 수요가 부족하게 되었다는 것이 주요한 문제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 같은 두 가지 오류는 서로 결합되어 있다. 만약 경제 성장에서 재정긴축으로 인한 부정적인 효과가 원래 가정했던 것보다 더 크다면, 양적 완화의 긍정적인 효과는 더 약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모든 유럽 국가들이 선호했던 정책결합(재정긴축 + 양적완화)은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한 재정 자극정책은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통화 자극 정책은 훨씬 더 작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기술적인 것이지만, 국민들의 복지에 엄청난 영향을 주는 문제다. 이들 모델들은 모두 현존하는 정책에 기초하여 나온 결과들을 가정한다. 경제 성장에 미치는 이들 정책적 영향에 대해 그들이 보여주는 일관되게 과도한 낙관주의는 그런 정책 추구를 정당화시킨다. 또한 그들의 정책이 명백히 작동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로 하여금 그들의 대책이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하게 만든다.  

이것은 심각한 기만이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들의 모델을 뒷받침해주는 경제이론이 올바른 것인지를 스스로 자문해봐야 한다.

 * 재정승수 (fiscal multiplier)

 정부의 재정수입확대(증세)는 국민의 가처분소득을 감소시키므로 민간 소비가 줄어들고, 그 결과 민간부문에서 발생하는 유효수요가 감소한다. 반대로 정부 재정지출 확대는 민간 경제에게서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유효수요를 증대시킨다.

여기서 조세의 증가분ΔT가 얼마만큼의 국민소득 감소분 ΔY를 가져오는가의 비율 ΔY/ΔT를 재정수입승수라고 하고, 또 재정지출의 증가분 ΔG가 얼마만큼의 국민소득을 증가시키는가의 비율 ΔY/ΔG를 재정지출승수라고 하며 양자를 합쳐 재정승수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재정지출승수는 재정수입승수보다 크기 때문에 균형재정이라 할지라도 재정규모를 확대하면 국민소득의 증대를 가져오고, 또 축소하면 국민소득의 감소를 초래하게 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 리카도 등가성(Ricardian equivalence)

경기침체에 대응하고자 정부의 지출을 확대할 경우, 조세를 갑자기 늘릴 수가 없어서 재정적자가 발생하면 정부는 국채를 발행함으로써 적자를 메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재정적자로 인한 국채발행이 늘어나면 이후 이를 상환하기 위해 증세를 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같은 상황을 기업과 가계에서는 정확하게 파악한다고 가정한다. 즉, 현재 정부가 적자재정으로 재정지출을 늘리면, 앞으로 조세가 많아진다는 것을 예상한 가계는 미리 현재의 소비지출을 줄이고 저축을 늘리려 한다. 이것이 1800년 대 초의 리카도주장을 1990년대에 배로(Barro)가 재생시킨 재정적자에 대한 리카도식 접근방법이다.

현재의 재정적자와 미래의 조세를 같은 것으로 파악한다는 의미에서 이를 리카도 동등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적자의 해소방식이 조세증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출을 감소시킬 수도 있다는 점과, 조세를 증대시킨다 해도 그 시기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저축에의 영향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비판이 많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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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11 / 25 김병권/새사연 부원장

 

새사연은 2012년 가장 중요한 화두로 ‘불평등(Inequality)’를 제시하면서 다양한 각도로 이에 대해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세계적인 석학들의 관점과 견해를 다양하게 소개해주기도 했다. 누리엘 루비니 교수, 폴 크루그만과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 그리고 로라 타이슨과 로버트 라이시 교수 등이 소득 불평등 문제를 현재 경제위기의 중심 문제로 지목하면서 각자의 견해를 밝혀왔다. 그 가운데 경제학자 케인스의 전기를 써서 유명해진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교수가 또 다시 불평등이 경제위기 발생의 원인이자 경제가 회복되지 않은 원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글에서 저자는 금융과 소득 불평등 문제를 알기 쉽게 연결하면서 왜 금융 그 자체보다는 그 이면의 소득 불평등이 위기를 발생시키고 회복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소득의 불평등한 분배가 상대적 빈곤에 놓여있는 계층들에게 부채를 끌어 쓰려는 강력한 ‘수요’를 만들어내면서 부채의 급증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득이 오르지 않아 이를 메우기 위한 ‘대출 수요’가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자금을 공급해주는 은행들이 예금 규모를 뛰어넘어 무제한으로 대출을 해줄 수 있는 ‘금융시스템의 규제완화’가 시행되지 않았다면 또한 위기가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짧은 글이 마치 금융의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을 충분히 단죄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칼럼의 핵심은 대출 수요를 만들어낸 소득의 정체를 강조하고 이것이 위기의 원인이자 회복지연의 원인임을 부각시키려는데 있다. 특히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중앙은행의 양적완화가 아니라 정부의 적절한 재정지출을 강조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우리의 현재 상황은 최후의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중앙은행을 의미-역자)가 아니라 ‘최후의 소비자(spender of last resort; 결국 정부를 의미 -역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정부만이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상위 1%로 소득이 집중되어 가장 불평등 정도가 심각했던 시점이 1928년과 2007년 이었고, 이 때 심각한 경제위기가 시작되었던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동시에 불평등이 가장 줄어들었던 1950~60년대에 오히려 자본주의 황금기였음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것은 외부세력이 아니라, 내부의 불평등을 증폭시키는 자기 자신이며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적(selt-destructive)'성격에 있다는 점을 이 칼럼은 환기시켜주고 있다.


 

불평등이 자본주의를 죽인다.

(Inequality is Killing Capitalism)

 

2012년 11월 21일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2008~2009년 위기가 발생한 것은 은행의 과잉대출 때문이고, 위기로부터 제대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깨져버린’ 대차대조표로 인해서 은행들이 대출을 하지 않는데 기인하고 있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졌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추종자들과 오스트리아 학파들(신자유주의 경제학파 -역자)이 선호하는 전형적인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위기로 치닫는 기간 동안에, 은행들은 예금 규모를 뛰어넘는 돈을 차입자들에게 대출해주었는데, 이는 특히 미국 연준(Fed) 같은 중앙은행이 공급해주는 엄청나게 싼 이자 덕분이었다는 설명이다. 중앙은행의 돈으로 자금을 두둑이 채운 상업은행들은 비합리적인 수많은 투자 프로젝트에 신용을 제공했고, 이 때 광란의 대출을 가능하게 해준 폭발적인 금융혁신(특히 파생상품)을 동반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채의 역 피라미드는 미국 연준(Fed)이 금리를 올리면서 흥청거리는 소비를 중단시켰을 때 붕괴되었다. (연준은 기준금리를 2004년 1%에서 2006년 5.25%가지 올렸다. 그리고 2007년 8월까지 유지시켰다.) 그 결과, 주택 가격이 붕괴하고, (자산을 훨씬 초과하는 채무를 보유한) 좀비 은행들을 양산시켰고, 채무자들을 파산시켰다. 

현재의 문제는 은행이 자금 대출을 재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출을 꺼리면서 제 기능을 못하는 은행들을 어떻게 하든지 ‘정상적으로’ 되돌려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미국과 유럽에서 엄청난 규모의 은행 구제 금융을 해주고, 뒤이어서 중앙은행이 다양한 비정통적인 경로를 통해 돈을 찍어서 은행시스템으로 돈을 공급해주는, 수차례의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을 한 것이다.(위기가 과잉 신용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는 하이에크 추종자들은 이런 조치에 반대한다.)

동시에, 다시는 은행이 금융시스템을 위태롭게 하지 못하도록 규제체제가 모든 곳에서 더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기존 물가안정 목표를 임무로 했던 것에 더해서, 영란은행은 ‘금융시스템의 안정성(the stability of financial system)’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분석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경제적 건강성에서 본질적인 것은 신용 공급이라는 믿음과 관련이 있다. 돈이 너무 많이 공급되어도, 너무 적게 공급되어도 경제적 건강성을 해칠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그러나 다른 관점을 택할 수도 있다. 신용에 대한 공급 보다는 ‘신용에 대한 수요’가 결정적인 경제적 동인이라는 관점이 그것이다. 결국, 은행들은 반드시 적절한 담보 아래에서만 대출을 해준다. 그런데 위기를 향해 가는 기간 동안에는 상승하는 주택가격이 담보를 제공해주었다. 바꿔 말하면 신용 공급은 신용 수요의 결과였다.  

이것은 다소 다른 측면에서 위기의 기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경제위기가 약탈적 대출(predatory lending) 때문이 아니라, 사려 깊지 못하거나 기만적인,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채무자(가계와 기업 - 역자)들 때문이라는 식으로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문이 제기된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차입을 했을까? 왜 소득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경기침체 이전 시기에 전례 없는 수준으로 폭등하게 되었을까? 

사람들이 탐욕스러워서 자신들의 분수보다 늘 더 많은 것을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왜 이러한 ‘탐욕’이 그렇게 미친 듯이 표출되게 되었을까?  

여기에 답을 하기 위하여 우리는 소득분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아야만 한다. 세계는 지속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각 국가 안에서 소득 분배는 지속적으로 더 불균형하게 되어갔다. 지난 30년 동안 국내총생산(GDP)이 성장하는 와중에도 중위 소득자들의 소득은 정체하거나 심지어 하락하기조차 했다. 이것은 부자들이 생산성 향상의 더 많은 몫을 뽑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수준이 향상되어가는 이 세상에서, 상대적 빈곤층들이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한 것일까? 그들은 빈곤층이 늘 했던 것, 부채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는 전당포에서 돈을 빌렸고 지금은 은행이나 신용카드 회사로부터 돈을 빌린다. 그들의 빈곤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었고 (담보로 잡은- 역자) 주택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채권자인 금융회사는 그들을 점점 더 깊은 부채의 늪으로 빠뜨리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일부에서 가계의 저축률이 폭락하는 것에 대해 걱정하기도 했지만, 그걸 문제 삼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마지막 논문들 중 한 곳에서 밀턴 프리드먼은 저축이 지금은 주택의 형태를 띤다고 쓰기도 했다.  

나에게 이런 관점은, 중앙은행이 갖은 방법으로 양적완화를 시행함에도 불구하고 왜 은행들이 대출을 재개하지 않고 있고, 왜 경기회복은 다시 흐지부지 되어 가는지에 대해서 정통적인 설명보다도 훨씬 더 잘 설명 해준다. 대출 은행들이 위기 이전에 대중들에게 대출을 강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역시 그들은 부채가 있는 가구들에게 돈을 빌릴 것을 강요할 수 없다. 시장이 위축된 상황에서 설비 확장 자금을 대출 받으라고 기업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약하면, 경기회복은 미국의 연준이나 유럽중앙은행, 영란은행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경기회복을 위해서는 재정정책 결정자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현재 상황은 최후의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 중앙은행을 의미-역자)가 아니라 ‘최후의 소비자(spender of last resort; 결국 정부를 의미 -역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정부만이 할 수 있다. 

만약에 정부가 이미 많은 부채를 짊어져서 더 이상 국민들에게 자금을 빌릴 수 없다면, 중앙은행으로부터 빌려서 공공사업이나 인프라 프로젝트에 추가적으로 자금을 지출해야 한다. 이것이 거대 서구 경제권을 다시 움직이게 할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을 뛰어 넘어서, 우리는 국민소득과 자산의 대부분을 소수의 수중에 집중시키도록 하는 시스템을 더 이상 지속시킬 수 없다. 자산과 소득의 결연한 재분배야말로 대부분의 경우 자본주의 장기적 생존의 본질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다시 한 번 이 교훈을 새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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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사연의 [잇:북]2012.10.31 17:36

2012 / 10 / 30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테마북] 경제를 보는 세계의 시선-불평등편
보고서 원문을 보시려면 위의 제목을 누르시면 됩니다.

 

[여는 글]

* 새사연은 올해 1월부터 눈여겨 볼만한 관점이나 주장을 담은 해외 기사, 칼럼, 논문 등을 번역하고 요약하여 소개하는 ‘경제를 보는 세계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그 중에서 불평등에 대해 다룬 10편의 글을 모아 테마북으로 엮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알려져 있는 조지프 스티글리츠, 클린턴 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터키의 재무장관이자 세계은행 부총재를 지냈던 케말 데르비스, 영국 아카데미의 로버트 스키델스키 등의 세계적 석학들이 불평등에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글을 발표했다. 그만큼 불평등이 지금 세계 경제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적 석학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침체에 빠진 세계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것은 바로 불평등이라고. 국내적으로는 소득 불평등이, 세계적으로는 글로벌 불균형이 세계경제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불평등과 불균형은 많이 가진 사람이 계속해서 많이 갖게 되고, 적게 가진 사람은 계속해서 적게 갖게 되는 양극화의 상태를 뜻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자원배분이 비효율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공급과 수요가 균형을 이루어 경제가 선순환하여야 하는데, 점점 더 가난해지는 99%가 늘어나면서 수요가 줄어들고 있다. 국내적으로, 세계적으로도 물건을 구매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가 다시 활기를 띄고 성장하기를 바라기는 어렵다. 양극화는 결국 모두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런 문제는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를 약화시키고 불공정에 대한 불만을 가속화하며,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으로 이어지면서 민주주의를 위험에 빠뜨린다. 이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최근 전세계에서 나타났던 99%의 점령운동이다. 스티글리츠는 마침내 세계가 들고 일어나 돈이 아닌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며 99%운동을 지지했다.

이제 불평등은 개인의 능력차이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더 많은 성장을 하기 위해서라는 주장에 묻혀 살짝 눈감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경제학은 물론이며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가장 중심에 놓고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시대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원하고 있다. 경쟁과 효율만을 강조하던 방식에서 평등과 연대, 공공성을 앞세운 지속가능한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2012년 10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수연

 

[목 차]

◆ 여는 글

◆ 나쁜 사회, 꿈을 빼앗는 불평등

  (나쁜 사회 / 로버트 스키델스키)

◆ 99%는 무엇에 분노했는가?

  (99%가 깨어나고 있다 / 조지프 스티글리츠)

◆ 세계 경제 회복을 잡는 글로벌 불균형과 소득 불평

  (글로벌 불균형과 국내 불평등 / 케말 데르비스)

◆ 소비자와 투자자 vs 노동자와 시민, 당신은 누구 편?

 (쇼핑하다가 망할 운명 / 로버트 라이시)

◆ 99%가 가난해지면 경제는 돌아가지 않는다

   (불평등의 덫 / 케말 데르비스)

◆ 불평등은 인적 자산의 낭비

   (불평등의 대가 / 조지프 스티글리츠)

◆ 세계의 방향을 바꾸는 중산층

   (세계 중산층의 진출 / 요하네스 저팅)

◆ 중산층 구매력 강화만이 경기회복 시킬 것

  (경기회복 여부는 중산층의 구매력에 달렸다 / 로버트 라이시)

◆ 경제 민주화가 되어야 성장을 할 수 있다

  (유럽에서의 불평등, 성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 카를로 밀라니)

◆ 지금 시대 행복의 조건은 평등

  (행복은 평등이다 / 로버트 스키델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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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10 / 23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우리는 언제까지 경제성장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가? 경제성장이 더 나은 삶의 질을 보장해주는가?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교수는 이 같은 의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최근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져들면서 이런 의문이 더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우리는 대체로 1인당 소득이 높아지면 사람들의 만족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구결과에 의하면 아주 기본적인 요구들이 해결되는 수준을 넘어서면 소득과 사람들의 행복은 연관성이 없다고 한다. 또한 사람들의 행복은 소득의 절대값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의 상대적 크기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스키델스키 교수는 이러한 연구결과를 설명하면서 성장이 행복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아니며, 지금과 같은 양극화의 상황에서는 평등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평등은 사회안전망과 건강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기도 하고, 더 많은 여가를 즐기고, 더 많은 시간을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내고, 동료 간에 더 많은 존경을 받으며, 더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래, 이제 좀 다르게 살아야 한다. 국민총소득이 아니라 국민총행복지수가 중요한 시대가 되어야 한다. 국민들이 보편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요구하는데에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갈망이 숨어 있다. 2012년 대선에서 대한민국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논의하고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행복은 평등이다
(Happiness Is Equality)

2012년 10월 19일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

부탄의 국왕은 우리 모두가 더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는 정부는 국민들의 국민총소득(GNP)이 아니라 국민총행복지수(GNH, Gross National Happiness)를 최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행복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은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유행인걸가?

왜 정부가 경제성장을 덜 강조해야 하는지는 경제성장이 어려울수록 잘 알 수 있다. 올해 유로존은 전혀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영국 경제는 긴축 상태에 들어갔으며, 그리스 경제는 몇년 동안 위축되어 있다. 심지어 중국도 침체에 들어설 전망이다. 성장을 포기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면서 살면 안되는 걸까?

경제성장이 회복된다면 이런 분위기는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강조하는 태도에 대한 진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특히 선진국에서 성장은 덜 중요한 미래 가치가 되고 있다.

성장을 강조하던 태도가 변하게 된 첫번째 요인은 지속가능성에 관한 관심이다. 과연 우리의 미래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이전과 같은 속도로 계속 성장할 수 있을까? 1970년대 사람들은 성장을 계속 하기에는 자연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식량의 고갈이나 재생불가능한 천연 자원이 걱정거리였다. 최근에는 탄소 배출이 주요 문제로 떠올랐다. 2006년 스턴보고서(Stern Review)가 강조했듯이 미래에 뜨거워진 지구에서 튀겨지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는 오늘날의 성장을 어느 정도 희생해야만 한다.

신기하게도 이 토론에서 한가지 금기시되는 내용은 인구에 관한 것이다. 인구수가 적을수록 뜨거워지는 지구 위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될 위험은 줄어든다. 하지만 선진국 정부는 자연스러운 인구의 감소를 받아들이지 않고, 임금을 낮게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흡수하고 있다. 그래서 선진국은 더 빨리 성장한다.

최근 들어 성장이 가져오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반드시 더 많은 성장이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계속 성장해야 하는가?

이 질문의 시작은 몇십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74년 경제학자 로버트 이스터린(Robert Easterlin)은  "경제 성장은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는가? 몇가지 실증 증거들" 이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다. 많은 국가에서 1인당 소득과 스스로 느끼는 행복의 정도가 관련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던 상황에서 그는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낸다.

기본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정도의 최소 소득이 충족된 상황이라면, 행복과 1인당 GNP는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GNP는 삶의 만족도를 측정하기에 매우 부족한 지표라는 뜻이다.이후 대체 지표를 고안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1972년 두 명의 경제학자 윌리암 노드하우스(William Nordhaus)와 제임스 토빈(James Tobin)이 순경제적후생(Net Economic Welfare)이라는 지표를 도입한다. GNP에서 환경오염과 같이 나쁜 생산물을 제외시키고, 여가와 같이 시장 밖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추가한 것이다. 더 많은 여가를 즐기고 더 적은 노동을 하는 사회가 더 많이 일하고 따라서 GNP도 높지만 여가를 덜 즐기는 나라만큼 후생이 높다는 것을 보였다.

최근 들어서는 삶의 질을 측정하는 지수의 범위가 더 넓어지고 있다. 문제는 삶의 양은 측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의 질을 측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양과 질을 어떻게 종합하여 삶의 만족도를 측정하는 지표를 만들어낼 것인가의 문제는 경제학보다는 윤리학의 문제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양을 측정하는 후생 지표에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또 다른 발견이 있다. 한 국가 안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덜 행복하다는 것이다. 즉,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이 확보된 경우 사람들의 행복 수준은 그들의 절대 소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집단과 비교한 상대적 소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다른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우월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열등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결국 후생은 성장의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달려 있다.

삶의 만족도는 평균 소득의 성장이 아니라 중위 소득의 증가, 다시말해 일반인들의 소득이 늘어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10명의 사람이 있는데 이 중 1명은 관리자로 1년에 15만 달러를 번다. 다른 9명은 노동자로 1년에 1만 달러를 번다. 이들의 평균 소득은 2만 5천 달러이다. 하지만 90%는 1만 달러를 벌 뿐이다. 이런 식의 소득 배분에서는 성장이 되어도  일반인의 후생이 높아질 리가 없다.

특수한 사례를 든 것이 아니다. 지난 30년간 이어진 부자들의 사회에서 평균 소득은 꾸준히 늘어났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소득은 정체되거나 심지어 하락했다. 즉, 미국이나 영국에 거주하는 매우 소수의 사람들이 성장의 과실을 대부분 가져갔다. 이런 경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장이 아니라 평등이다.

더 많은 평등은 사회안전망과 건강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기도 하고, 더 많은 여가를 즐기고, 더 많은 시간을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내고, 동료 간에 더 많은 존경을 받으며, 더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끊임없이 자극당하면서 더 많은 상품을 구매하도록 강요당할 것이다. 우리는 터보엔진을 단 아빠와 호랑이 같은 엄마가 아이들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라고 끊임없이 외치는 빡빡한 사회에 살고 있다.

오히려 19세기에 살았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더 훌륭한 시민의 소양을 보여준다.

"나는 다른 이를 짓밟고 밀어제끼며, 다른 이와 충돌하고 싸우는 방식을 통해 유지되는 삶을 바라지 않는다. 사회적 삶으로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좋은 상태는 아무도 가난하지 않고 아무도 더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앞으로 나가기를 강요당하며 뒤처질까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다."

부탄의 왕을 비롯하여 수량화할 수 있는 부의 한계를 깨달은 많은 이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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