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9.29손석춘/새사연 이사장

선물과 눈물.

취재기자와 편집기자가 작심을 하고 만든 지면의 굵은 활자다. 인천지역 두 기업의 ‘엇갈린 운명’으로 문패를 단 사회면 머리기사는 ‘14년 무파업 선물’이라는 기사와 ‘7년 파업의 눈물’ 기사를 나란히 사진과 함께 올려놓아 지면의 극적 효과를 높였다. 맞물린 사진으로도 강조했듯이 ‘선물’기사는 14년 파업을 하지 않은 동국제강 인천제강소는 초고속 성장으로 성과급 잔치를 벌인 반면에, ‘눈물’ 기사는 ‘전기-통기타 매출 세계 1위’ 기업인 콜트악기가 파업으로 공장 문을 닫는다는 기사다.

‘콜드악기 피멍울’ 3년 만에 정정보도

동아일보가 사회면 머리기사로 돋보이게 편집한 지면의 의도는 또렷하다. 공연히 파업하지 말라는 ‘훈계’와 더불어 노동운동에 대한 살천스런 ‘공격’이다. 이를테면 ‘7년 파업의 눈물’기사를 읽었을 대다수 독자는 울뚝밸이 솟을 수밖에 없다. “노조의 강경 투쟁 때문에 직원 120여명이 평생직장을 잃고 모두 거리로 나앉게 됐다”거나 “노조의 파업으로 생산성이 떨어져 수출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자 해외 바이어들이 고개를 돌렸다”는 대목은 독자들에게 노동조합이 해도 너무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십상이다. 더구나 바로 옆에 소개된 같은 지역의 무파업 회사에서 노사가 축배를 나누는 모습은 노동운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왜곡된 시선을 한층 강화해주었을 터다.

동아일보 2008년 8월2일 11면.

그런데 어떤가. 콜드악기 노동자와 가족들의 가슴을 피멍들게 하고 노동운동에 혐오감을 마냥 부추겼을 그 기사를 내보낸 동아일보는 옹근 3년만인 2011년 9월19일자에 정정보도를 실었다. 물론 지면의 크기는 2면 하단의 1단으로 사회면 머리기사(2008년 8월2일자 11면)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주 작은 정정보도에서 동아일보는 “콜트악기 부평공장의 폐업은 노조의 파업 때문이라기보다는 사용자 측의 생산기지 해외 이전 등의 다른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고, 노조의 파업은 대부분 부분 파업이어서 회사 전체의 매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은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습니다”라고 간결하게 썼다.

이 신문이 정정보도를 낸 이유는 법원 판결 때문이다. 9월9일 서울고등법원은 “회사의 폐업을 노조의 잦은 파업 때문이라고 보도한 것은 허위로 봐야 한다”면서 정정보도와 위자료 500만원을 판결했다.

하지만 동아일보가 다른 도리 없이 낸 짧은 정정에서 나는 그냥 지나칠 수없는 대목을 발견했다.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이를 바로잡습니다”가 그것이다. 곧장 동아일보의 취재기자와 담당 데스크, 편집국장에게 묻고 싶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한때는 그 신문사 앞에 ‘대’자가 붙었던 동아일보가 법원의 판결로 “사실이 밝혀졌다”고 써야 했는가?

괜스레 던지는 시비가 아니다. 보라. 법원은 판결문에서 “기자가 확인할 수 있었던 콜트악기 및 관련 회사들의 자산상황과 매출, 당기순이익 등 경영 상태에 대한 자료들만이라도 객관적으로 인용했더라면 이 기사에 나타난 오류는 쉽게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판결문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다시 정색을 하며 묻는다. 항소심까지 기다려야 했는가? 판결문 앞에서 결국 ‘사실이 밝혀졌다’고 정정보도를 냈어야 옳았는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을 동아일보 기자들은 판결이 있고 나서야 인지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다. 나는 그 짧은 정정보도문에서 어떤 성찰도 읽혀지지 않는다. 사회면 머리기사로 콜트악기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을 보도는 물론, 3년이 더 지나 ‘사실이 밝혀졌다’는 1단 크기 정정에서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자로서 양식의 문제다.

평기자비판 삼갔으나 ‘재생산’구조에…

언론인으로 10여년 넘게 칼럼을 써오며 알다시피 나는 평기자들에 대해 비판을 삼가왔다. 이유는 명백했다. 언론사 내부의 구조 때문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내가 실명으로 비판해온 주필과 논설주간들이 곰비임비 재생산되는 풍경을 보며 모든 것을 구조로 이해하고 넘어갔던 과거의 잘못을 새삼 깨달았다. 실제로 노사관계에 대한 일방적 보도는 동아일보만이 아니라 한국의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과연 그 모든 게 구조의 문제일까? 언론사 사주나 고위간부들이 그렇게 보도하라고 ‘지시’라도 했단 말인가?


고등법원이 콜트악기 노동자들이 부당해고됐다는 판결을 내린지 2년이 지나도록 이 회사는 노동자들을 복직시키지 않고 있다. 통상 3개월에서 1년을 넘기지 않는 대법원 판결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 역시 알려지지 않았다.


명토박아둔다. 항소심 판결 이전에 자신의 기사가 진실이 아니었음을 간파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기자로서 자질의 문제다. 알고도 항소심까지 버텼다면, 그것은 신문사 편집국 전체의 건강 문제다.

터무니없이 적은 위자료와 작은 정정보도 앞에서 나는 굳이 이름을 적시하고 싶지 않은 그 취재기자가 법원의 판결을 자신이 앞으로 걸어갈 ‘기자 인생’에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이길, 자신의 보도에 서러움의 피눈물 쏟았을 사람들 앞에 자성의 눈물 머금길 진심으로 바란다. 세간에서 ‘조중동’으로 비판받는 언론사의 젊은 기자들이 진지하게 한번쯤 자신의 글을 톺아보길 권하는 뜻에서 저 살천스런 지면의 제목을 다시 쓸쓸하게 옮긴다.

선물과 눈물.


이 글은 '미디어 오늘' 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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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면을 벗을 때가 됐다.”

상대를 이중인격으로 몰아세우는 무례한 언사다. 2011년 3월 <동아일보> 주필은 “입만 열면 인권을 외치는 이 땅의 이른바 진보 민주화세력”을 겨냥해 그렇게 썼다. 그는 무람없이 정죄한다. “당신들은 더 이상 민주화세력도, 진보세력도 아니다.”


그 칼럼을 읽으며 새삼 세월의 변화를 실감했다. 어느새 아득한 추억처럼 빛바랬지만 한 때 그 신문은 한국 언론의 희망이었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 용기 있게 맞섰던 기자들 130여 명이 대량 해직 된 사건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동아일보>는 전두환 정권과 맞서기 시작했다.


신문 지면에 ‘김중배칼럼’이 나오는 요일이면, 독자들은 감동에 젖어 읽었다. 다른 언론사의 젊은 기자들도 그 신문을 찾았다. <동아일보> 내부에서도 해직사태 이후 해마다 들어온 수습기자들 가운데 민주언론의 의지가 또렷한 젊은이도 많았다. 그 시기 <동아일보>는 전두환 정권이 서울대생 박종철을 고문해 죽인 사건을 집요하게 보도해갔다. 김중배 논설위원이 쓴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제하의 칼럼은 민주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들였다.


대북 비판 칼끝 ‘종북 색깔씌우기’로


그런데 어떤가. 작금의 <동아일보>는 전혀 다르다. 언론의 본령이 ‘권력 감시’에 있다는 언론학 원론을 새삼 조곤조곤 들려주고 싶을 정도다. <조선일보>보다 한 술 더 뜬다는 말은 이미 언론계 안팎의 상식이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그 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는 대다수 기자가 1980년대 중반에는 적어도 지금처럼 글을 쓰진 않았다. 


왜 그럴까. 왜 그렇게 변했을까. 언론계의 ‘명가’로 불리던 신문사와 그 속에서 일하는 기자들이 조락한 모습은 언론과 대한민국의 내일을 위해 깊이 성찰해볼 사안이다.


더 말할 나위 없이 여기에는 가장 큰 원인이 똬리틀고 있다. 신문사 내부의 봉건적 구조가 그것이다. 뜻있는 언론인들과 민주시민들이 언론개혁운동을 벌여온 이유이기도 하다. 아직 사주의 ‘황제식 경영’은 바뀌지 않았고, 언론개혁은 여러 이유에서 명백히 후퇴하고 있다. 다만 구조적 문제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기사를 쓰는 기자 개개인의 책임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자시절 초기의 글과는 달리 진보·민주세력에게 날 선 칼날을 휘두르는 칼럼을 노상 쓰는 언론인들의 글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진보·민주세력=친북·종북세력’이라는 등식이다. 들머리에 소개한 <동아일보> 주필이 쓰는 칼럼은 거의 모든 주제가 ‘김정일 체제’ 비판이다. 언론인으로서 그의 거주지가 서울이 아니라 평양인가 싶을 정도다. 물론, 그의 대북 비판이 국내 상황과 무관하진 않다. 비판의 칼끝은 진보·민주세력을 겨누고 있다. 그는 2011년 3월 현재 “한국의 민주화세력이 눈을 돌려야 할 곳이 어디인지는 자명하다”며 “북한이다”라고 단언한다. 이어 “그럼에도 남한의 진보라는 사람들은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어떤 행동도 할 생각이 없다”고 개탄하며 공격한다.


<동아일보> 주필은 물론, 진보세력을 ‘훈계’하는 칼럼을 즐겨 쓰는 <조선일보><중앙일보>의 언론인들에게 명토박아 둔다. 대한민국의 모든 진보·민주세력이 ‘김정일 체제’를 찬성한다는 판단은 너무 거칠고 사실도 아니다. 터놓고 말하면, 기자로서 공부를 하지 않는 데서 오는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무릇 무지는 만용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어떤 행동”을 촉구하는 언론인들은 자신들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으면 서슴지 않고 ‘종북세력’으로 몰아친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그런 식의 황당한 딱지붙이기는 신자유주의를 거론하는 어느 언론인의 칼럼에서도 확인된다. 가령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세력을 겨냥해 ‘주체사상이 더 좋은가, 신자유주의가 더 좋은가’라는 황당한 질문을 던진다. 솔직히 궁금하다. 과연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만 보기엔 젊은 시절에 본 그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는다.


새삼 말할 가치도 없지만, 신자유주의와 주체사상 사이에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다. 수많은 대안들이 있다. ‘멸공’ 아니면 ‘종북’이라는 논리도 마찬가지다. 상대에게 색깔을 들씌우는 반민주적 사고의 연장이다.


극우수준 논리의 논객들 자성의 거울 보라


더러는 그 또한 ‘표현의 자유’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넘기기엔 현실이 너무 엄중하고, 언론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 보라. 휴전선 앞에서 김정일 체제를 무너뜨리자고 선동하는 유인물을 대량으로 풍선에 실어 보내고, 대규모 화력을 집중한 한미합동 군사훈련이 곰비임비 이어지면서 북은 ‘불바다’를 위협하고 나섰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 민주화를 위한 어떤 행동’을 마구 선동하는 행태가 과연 성숙한 자세인가?


저마다 언론사를 ‘대표’하는 논객들이 극우단체 수준의 거친 논리를 칼럼으로 써대는 모습을 보며 혹 그들이 ‘알리바이’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삼성 재벌의 비리나 비정규직의 고통,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양극화를 거론하지 못하거나 짚을 생각도 없으면서, 그 이유를 한국 사회에 ‘발호하고 있는 종북 세력’탓으로 돌리려는 ‘합리화 심리’가 읽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지금 여기서 우리 사회가 풀어가야 할 문제를 애면글면 의제로 설정하며 동분서주하는 사람들 앞에 그들이 조금이라도 겸손한 자세를 보이기를 진심으로 당부하고 싶다. 진보·민주세력을 싸잡아 ‘종북주의’ 따위의 색깔을 살천스레 들씌우거나 가면을 벗으라며 부르대는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거울에 비춰보라. 누가 보이는가? 젊은 날의 순수한 영혼은 어디로 갔는가?


그만하면 많이 누렸다. 이제 가면을 벗을 때가 됐다. 


손석춘 2020gil@hanmail.net

*이 글은 미디어오늘(http://www.mediatoday.co.k)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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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 스님의 소신공양. 어느새 잊혀가고 있다. 그래서다. 7월8일 조계사에서 4000여 명의 조계종 스님들이 문수 스님을 추모하고 4대강 사업 중단을 요구한다는 소식이 반갑다.

수행 중인 한 스님이 스스로 몸을 불살라 어둠을 밝히려 했음에도 대다수 사람에게 시나브로 잊힌 이유는 분명하다. 공론장이 막혀있기 때문이다. 가령 2010년 5월31일, 문수 스님이 정치권력을 질타하며 소신공양을 결행했을 때 한국 사회에서 발행부수가 많은 신문들은 소신공양을 아예 모르쇠 했다. 가령 <조선일보>는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소신공양 사실을 보도할 때 6·2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에 불리하다는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소신공양은 보도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소신’ 탓일까.

스님의 소신공양 잊혀가는 이유

기실 문수 스님이 낙동강 방죽에서 소신공양을 하기까지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의 책임도 크다. 스님이 수행에 정진해온 정갈한 방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문뭉치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스님이 세속을 바라보는 유일한 창문이었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4대강 삽질’의 문제점을 찾아보기는 어려웠을 터다. 어쩌다 있더라도 ‘구색 갖추기’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가 아닐까. 스님이 소신공양으로 세인들에게 진실을 알리려고 결심한 까닭은.

하지만 스님이 구독했던 바로 그 신문들은 정작 스님의 소신공양조차 외면했다. 그 뿐이 아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에 충격을 받은 수경 스님이 조계종 승적까지 반납한 사실도 무람없이 비틀어 보도했다. 예컨대 <중앙일보>는 수경 스님의 결단을 다룬 기사를 “환경·NGO 운동했지만/ 그것도 하나의 권력이었다/ 초심 돌아가 진솔하게 살 것”이라는 3줄 제목으로 돋보이게 편집했다. 사전 정보가 없는 독자들에겐 마치 수경 스님이 그동안 자신이 적극 참여해온 환경운동을 후회하며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조선-동아-중앙일보 노골적 왜곡

하지만 수경 스님의 진실은 우리가 두루 알다시피 명확하다. 수경 스님은 문수 스님 추모제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강의 숨통을 자르고 4대강 전체를 인공 댐으로 만드는 일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승적을 반납한 이유도 조계종단이 문수 스님 추모사업과 ‘4대강 죽이기’ 저지에 더 적극 나서기를 압박하려는 의미가 크다. 결국 <중앙일보> 보도는 수경 스님의 뜻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편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는 모습은 문수 스님의 뜻을 4대강으로만 국한하려는 우리 안에서도 묻어난다. 물론, 당면과제가 4대강 살리기이고 하나부터 집중해서 문제를 풀어가는 게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4대강 살리기운동과 더불어 얼마든지 병행할 수 있는 절실한 과제가 있다.

소신공양을 앞 둔 스님은 “4대강 사업 즉각 중지·폐기”만 강조한 게 아니다. “부정부패 척결”과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호소했다. 유서 맨 마지막에 쓴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요구는 양극화가 무장 커져가는 이 땅에 4대강 못지않게 절박하고 절실한 민생 과제다.

4대강 살리기와 병행해야 할 민생 과제

그럼에도 왜 대다수 사람이 소신공양의 의미를 4대강으로만 좁히는 걸까? 혹 유서의 진실을 마주하기 불편해서는 아닐까.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문수 스님의 호소를 이명박 정권이 모르쇠 할 때, 살아있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옳은가.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과 유서에 명토박은 간절한 염원을 우리가 잊어간다면, 그것은 진실을 직시하는 불편함을 스스로 감당하기 힘들어서가 아닐까. 우리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나는 지금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를.

무엇보다 먼저 나부터 고백하련다. 명색이 진보 싱크탱크에서 일하고 있으면서도 그 물음 앞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그래서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 앞에 더없이 불편하다. 아니, 부끄럽다.

손석춘 2020gil@hanmail.net

*편집자/ 봉은사가 발행하는 월간<판전> 기고문을 일부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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