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 10 / 15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2013년 노벨경제학상이 발표되었다. 수상자는 유진 파마(Eugene Fama), 라스 피터 한센(Lars Peter Hansen), 그리고 로버트 실러(Robert Shiller)로 모두 금융시장에서 자산가격의 결정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모두 미국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노벨상위원회는 “자산시장에서의 흐름 따라잡기”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세 수상자들의 연구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 


자산 가격, 다시 말해 주식이나 채권의 가격을 예측할 수 있을까? 세 수상자의 연구는 이러한 공통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초기 연구자에 해당하는 파마는 자산가격은 예측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왜냐?“만약 시장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가격은 거의 예측할 수 없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투자자가 어떤 주식이 내년에 매우 큰 폭으로 가치가 상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투자자들은 즉시 그 주식을 살 것이고, 주가는 구매하려는 이들이 사라질 때까지 올라 갈 것이다.”즉, 시장은 완벽한 공간이기 때문에 모든 정보가 바로 가격에 반영되고, 따라서 경제 주체가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가격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주식 가격 역시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으며 따라서 미리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된다. 가격에 의해 작동하는 시장의 효율성과 합리적 인간이라는 주류경제학의 논리에 기반한 금융시장 설명이며, 효율시장가설(Efficient Market Hypothesis)라 불리며 파마의 대표적 이론이다. 


  하지만 공동수상자인 실러는 단기적으로는 자산 가격 예측이 불가능할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예측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주가를 관찰해보면 “어느 해에 배당금에 비해 주가가 높았다면, 다음해에는 배당금에 비해 주가가 낮아지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주식 수익률이 장기적으로는 예측 가능한 패턴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또한 이전까지 합리적 인간만을 전제했던 분석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비합리적 태도가 존재하고, 이로 인해 금융시장에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혔다. 이런 논리로 그는 2008년 금융위기의 시작이었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를 예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산 가격 예측 이론의 발전에 힘을 더해준 것은 실증자료로 사용한 계량분석방법의 발전인데, 나머지 한 명의 공동수상자인 한센은 일반적률추정법이라는 통계 분석 방법을 개발하여 자산 가격을 실제로 추정하는 틀을 제공했다. 


노벨상위원회는 자산 가격은 개인의 입장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저축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전체 경제 차원에서는 소비와 투자라는 거시경제의 핵심요소와 직결되어 있기에 중요하며, 수상자들의 연구가 투자자, 전문가, 정책입안가들에게 모두 도움이 되었기에 수상자로 선정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산 가격 예측이라는 공통의 범주 안에서 공동 수상이 이루어졌지만, 파마는 자산 가격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반면 실러와 한센은 예측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모순된 주장을 편 학자들이 동시에 수상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거래되는 주식 가격이나 채권 가격의 변화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애초부터 거의 불가능한 목표이다. 특히 사람들이 주식이나 채권을 구매하고, 저축 상품을 선택할 때 경제이론에서 이야기하듯이 수익률이나 리스크를 명확히 따져서 결정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또한 자산 가격 예측이라는 분야가 일자리, 불평등, 빈곤, 재정위기 등 지금 현실의 경제에 존재하는 많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고리인가 여부도 의문이다. 


금융위기를 제대로 예측하거나 예방하지 못한 이후로, 경제학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가디언은 금융위기를 예측한 실러가 노벨경제학상을 받게 된 것은 5년 전 위기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라 평가하고 있지만, 힉스입자라는 전혀 새로운 존재의 등장으로 기존의 물리학이 강타당한 것과 같이 경제학자들 역시 현실의 복잡한 사건과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더 유심히 관찰하면서 자신들의 이론을 검증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자산시장에서의 흐름 따라잡기

(Trendspotting in asset markets)


2013년 10월 14일

노벨상위원회 

 

향후 며칠 동안 혹은 몇주일 동안 주식이나 채권 가격이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향후 3년에서 5년 사이와 같이 좀 더 장기적인 맥락에서 자산가격이 어떻게 변화할지를 예측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처럼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모순적인 발견을 해낸 이들이 올 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인 유진 파마(Eugene Fama), 라스 피터 한센(Lars Peter Hansen), 그리고 로버트 실러(Robert Shiller)이다. 


파마, 한센, 그리고 실러는 자산 가격을 연구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발전시켰고 이 방법론을 이용하여 주식, 채권, 그리고 기타 자산 가격에 관한 세밀한 자료를 분석하였다. 자산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대한 완전한 이론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지만, 이들의 연구는 자산 가격 결정의 중요한 규칙들을 발견했으며 이는 자산 가격 결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자산 가격의 변화는 전문 투자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어떤 형태로 저축을 할 것인가 - 현금으로 보관할 것인가, 은행에 예금할 것인가, 주식에 투자할 것인가 - 에 대한 결정 역시 다양한 형태의 자산이 가진 위험(risk)과 보상을 따진 뒤에 이루어진다. 자산 가격은 거시경제에서도 중요한 요소인데, 소비와 투자에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자산 가격은 기본 정보를 잘 반영하는 편이지만, 반면 역사를 돌아보면 거품이나 금융 시장 붕괴와 같이 자산 가격이 실제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사례들도 찾을 수 있다. 자산 가격의 오류(mispricing)는 최근의 세계 침체가 보여주듯이 금융위기를 일으키고, 그러한 위기는 전체 경제에 해를 입힐 수 있다. 오늘날 자산평가이론(empirical asset pricing)은 경제학에서 가장 방대하고 활동적인 분야 중 하나이다. 


자산 가격 예측은 시장이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이 때문에 연구자들은 이 지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만약 시장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가격은 거의 예측할 수 없어야 한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투자자가 어떤 주식이 내년에 매우 큰 폭으로 가치가 상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투자자들은 즉시 그 주식을 살 것이고, 주가는 구매하려는 이들이 사라질 때까지 올라 갈 것이다. 결국 예측할 수 없는 가격 변화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시장에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때마다 가격은 무작위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이를 전문용어로 랜덤워크(randomwalk)라 한다. 


하지만 제대로 작동하는 시장에서도 자산가격이 몇가지 예측가능한 패턴을 따르는 데, 여기에는 이유가 존재한다. 핵심 요인은 위험이다. 대체로 위험자산은 상대적으로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높은 수익률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방법으로 위험에 대한 적정한 수익률은 어느 정도인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예측가능성의 문제와 위험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일반적인 수익률 문제는 복잡하게 얽혀있다. 세 명의 수상자들은 이 문제들을 분리해내고, 실증적으로 분석하였다. 


자산 가격을 예측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산 가격이 과거 며칠, 혹은 몇 주동안 어떻게 변했는지를 분석하여 내일의 가격을 예측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는 적절하지 않다. 1960년대 파마가 진행한 방대하고도 섬세한 통계 연구에 의하면, 과거의 가격은 단기 미래의 가치를 예측하는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방법은 자산 가격이 정보에 자산 가격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파마, 피셔(Fisher), 젠슨(Jensen), 롤(Roll)이 함께한 주목할 만한 연구(1969)는 주식 분할(stock splits)에 관한 뉴스가 나온 뒤 주가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폈다. 놀랍게도 시장은 매우 빠른 속도로 새로운 정보를 주가에 반영했다. 만약 주식 가격이 새로운 뉴스에 느리고 완만하게 반응한다면 주식 가격의 패턴은 예측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패턴은 발견하지 못했다. 다른 많은 연구자들은 재빨리 후속연구를 이어갔다. 그 결과는 새로운 뉴스가 시장에 들어왔을 때 주가가 보이는 초기 반응은 확인할 수 있지만, 이후의 주가를 예측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일이나 향후 며칠이나 몇주일 동안 주가의 변동을 예측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면, 더 장기적인 주가의 변동을 예측하는 것은 더 어려워야 하는것 아닐까? 하지만 실러는 이러한 가정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식 가격 변동성가 장기 예측가능성에 대한 그의 연구들은 중요한 통찰을 보여준다. 먼저 실러는 주가의 변동이 배당금의 변동보다 훨씬 더 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1981). 주가는 미래 배당금의 가치와 같다는 것이 기본 이론이었기 때문에, 그가 관찰한 주가의 변동은 과도한 것이었다. 


주가의 과도한 변동은 어느 해에 배당금에 비해 주가가 높았다면, 다음해에는 배당금에 비해 주가가 낮아지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주식 수익률이 장기적으로는 예측 가능한 패턴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러 교수와 그의 공동 연구자들은 이러한 예측가능성이 주식 시장 뿐만 아니라 채권 시장, 그리고 다른 종류의 자산 시장에도 존재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자산 수익률의 장기 예측가능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은 투자자들이 미래의 자산 가치를 합리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한 표준 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즉, 자산 가치는 자산이 미래에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되는 지불금(payment stream)을 토대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합리적인 가정은 지불금이 할인(discount)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는 먼 미래에 받을 지불금은 당장 받을 지불금보다 가치가 덜 하다는 것을 뜻한다. 초기 연구에서 실러는 할인 계수(discount factor)가 언제나 동일하다고 가정했고, 그 결과 기존이론과 자산의 과도한 가격 변동이라는 현실을 조화시키기가 어렵다고 결론내렸다. 하지만 할인 계수는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배당금의 패턴은 안정적이더라도 주가의 패턴은 변동폭이 매우 클 수 있다. 하지만 왜 할인 계수는 시간에 따라 달라질까? 왜 할인계수는 이토록 큰 가격변동을 일으킬 만큼 변화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자산 가격과 합리적인 개인들의 저축과 위험감수 결정(risk-taking decision)을 연결하는 이론적 모델이 필요하다. 가장 기본적이고 잘 알려진 모델은 소비자산가격결정 모형(Consumption Capital Asset Pricing Model, CCAPM)으로,  1970년대에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모델은 이론적으로 잘 설계되었지만, 오랫동안 실증 테스트를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982년 한센은 일반적률추정법(Generalized Method of Moments, GMM)이라는 통계 방법을 통해 자산 가격이 보이는 특이한 성향에 대해 연구를 진행했다. 한센은 역사적으로 주가가 CCAPM의 표준 형태와 일치하는지를 GMM을 통해서 테스트했다. 그 결과 그는 자료들이 CCAPM의 설명과 맞지 않으며, 따라서 이 모형은 기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실러의 주장, CCAPM에서 가정하듯이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할인 계수를 도입한다고 해도 자산 가격의 변동 폭이 매우 크게 나타난다는 것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CCAPM의 기본 모형이 실패했음이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서도 계속 확인되었고, 이는 새로운 계량 이론과 연구의 등장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연구 중 일부는 위험과 위험에 대한 태도를 특정하는 방법을 향상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연구들은 투자자들이 얼마나 위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면서, CCAPM의 이론적 확장에 기여했다. 새로운 이론과 GMM에 기반한 계량 연구가 혼합되어 자산 가격 연구 외에도 인간 행동에 관한 광범위한 통찰을 낳았다. 


자산 가격의 장기 예측가능성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합리적 투자자라는 개념을 버리는 것이다. 이 가정을 버리게 되면 “행동 재무학(behavioral finance)”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열리게 된다. 여기서는 잘못된 기대가 핵심 요소이다. 높은 자산 가격은 미래에 받을 지불금을 과대평가한 결과이다. 달리 말하자면, 과도한 낙관주이나 기타 심리적 메커니즘을 통해 자산 가격이 본래의 가치로부터 멀어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행동 모델이 해결해야 할 주된 질문 중 하나는 왜 합리적 투자자들조차 비합리적 투자자들에 비해 자산 가격의 변동폭을 줄이지 못하는가라는 점이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합리적인 투자자들이 다양한 제도적 한계, 예를 들면 신용 제한과 같은 것의 영향을 받아서 결국 시장의 흐름을 거슬르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새로운 합리적 모델은 위험과 위험에 대한 태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새로운 행동 모델은 제도적 한계, 이해관계의 충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각각의 접근법들은 중요한 통찰력을 준다. 두 접근법이 함께하면 자산 시장의 변동성과 장기 예측간으성에 대해 의미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실증 연구는 오랜 기간에 걸쳐 자산의 종류에 따른 수익률의 차이에 대해 조사해왔다. 간단하게 말해, ‘주식 선정은 그만큼의 결과를 가져오는가? 그렇다면 어떤 요인이 투자자들로 하여금 주식을 선정하도록 만드는가?’ 이다. 고전적인 자본자산가격결정 모형(Capital Asset Pricing Model, CAPM)은 다양한 주식 사이의 수익률 차이를 평가하기 위한 틀을 제공한다. CAPM은 전체 시장이 높은 수익률을 보일 때 높은 수익률을 내는 주식은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을 낸다고 예측한다. 또한 전체 시장이 낮은 수익률을 보일 때 높은 수익률을 내는 주식은 평균적으로 보았을 때 상대적으로 낮은 수익률을 가져오게 된다. 이런 주식은 위험을 분산시키는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위험회피 투자자들은 높은 평균 수익을 얻지 못한다 해도 이런 주식을 좋아한다. 


파마는 이같은 주식과 시장의 상관관계가 미래 수익률을 예측하는데 핵심요소인지를 알기 위한 테스트 방법을 개발했다. 그와 다른 연구자들은 주식과 시장의 상관관계는 미래 수익률 예측에 핵심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대신에 다른 요인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주식의 “크기(size)”기업의 총 시장 가치)와 “시장가 대비 장부가 비율(book-to-market ratio)”이 큰 설명력을 갖음을 알아냈다. 큰 회사, 혹은 낮은 시장가 대비 장부가 비율을 갖는 회사는 대체로 낮은 수익을 얻었다. 이러한 발견은 장기 예측가능성에 대한 실러의 발견과 유사하다. (시장가 대비 장부가가 낮은) 가치 주(value stock)는 시장가 대비 장부가가 높은 주식보다 낮은 수익을 낸다. CAPM의 설명과 달리 왜 이러한 추가 요인들이 주가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까? 이에 관한 설명 중 일부는 합리적 투자자 모델에 기반하여, 다른 일부는 행동 모델에 기반한다. 파마와 연구자들이 이룩한 이 분야에서의 집중적인 연구 덕분에 자산 가격의 횡단면적 특징은 30년전보다 더 이해하기 쉬워졌다. 


수상자들의 연구는 단지 학문적 연구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실제 시장에도 영향을 주었다. 주식 시장은 단기에는 매우 예측하기 힘들고, 주식 선정은 단기와 장기에 모두 매우 어렵다는 사실은 뮤추얼 펀드(mutual fund)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연구에 의하면 위험 수준과 관계없이 뮤추얼 펀드가 수익을 낸다는 주장은 틀렸다. 일단 펀드 수수료가 계산되면 마이너스 수익을 낳기도 한다. 인덱스 펀드(index fund)의 최근 성장은 이러한 통찰을 따른 결과이다. 또한 몇 가지 성공적인 특수 펀드들은 종종 CAPM의 확장된 버전이 포함하는 새로운 요인 - 크기, 시장가 대비 장부가 - 에 의해 움직인다. 


연구는 단지 예측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시장이 주식 시장의 분할, 공개매입과 같은 행동을 평가하는 방법도 제공한다. 이러한 정보들은 기업과 기업의 성과 평가에 도움이 된다. 


행동 모델 역시 현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실러는 일찍이 투자자가 직면하는 중요한 위험은 때때로 측정하기 힘들며, 그것들은 존재하는 시장 기구에 의해 보장되지도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케이스-실러주택가격지수(Case-Shiller Home Price Indices)는 주택 가격의 흐름과 변화를 측정하고, 가격 변동성에 대항하여 준비하는 자산으로 구성된다. 


예측가능성에 대한 발견은 놀라운 일이며, 실증연구와 이론 사이의 상호작용을 거치면서 많은 양의 후속연구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금융과 자산 가격에 대한 이해는 근본적으로 다음의 질문에 의해 발전해왔다.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여주는 신호가 될 수 있는 시장 변동성의 범위는 어느 정도인가? 어떤 정책을 사용해야 시장 변동성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가? 단기에는 자산 가격의 예측이 어렵고, 사건이 발생하면 재빠른 가격의 변화가 있다는 초기의 발견은 시장 효율성을 위한 기본 조건이 적어도 만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후 장기 예측가능성의 발견은 많은 연구자들이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을 변화시켰다. 예측가능성이 자연스러운 변동을 반영하는 것인지, 자산 가격의 오류가 무엇을 반영하는지에 대해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자산 가격의 오류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어떻게 그리고 언제 금융 시장은 효과적으로 제대로 된 정보를 반영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미래 연구가 맡아야 할 가장 중요한 몫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특수한 맥락과 제도적 설계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연구 결과들이 전문가뿐 아니라 정책입안가에게도 매우 중요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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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1.01.14     김우재/미국 UCSF 박사후연구원

정치는 한 국가의 미래가 걸린 일이며, 따라서 정치인들은 자신의 학연, 지연, 혈연과 같은 사리사욕을 초월해 장기적인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은 상식이다. 이러한 상식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야 국민 누구라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이고,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혹은 여당/야당의 아집과 독선 때문에, 혹은 반대를 위한 반대 때문에 저 당연한 상식의 이상(理想)이 추구될 수 없다고 한탄하는 이들도 많다. 그 한탄은 주로 정치인들에게서 나온다.


이러한 문제야 정치개혁으로부터 풀어야 하는 것일 테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한 목소리를 모아 별다른 충돌과 갈등도 없이 척척 동의를 하는 분야가 있으니, 그것이 과학기술정책이다. 충돌과 갈등이 없다는 사실이 첫째, 국가의 장래에 있어 과학기술이 정말 중요하다는 인식의 반영인 것인지, 둘째, 과학기술정책은 별반 새로울 것도 없고, 단기간에 민심을 얻어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인식의 반영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황우석 교수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갈 무렵, 여야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부를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원천기술이 확보되는 초유의 사건이라며 언론도 야단법석을 떨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단 한번 과학기술이 전 국민의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던 그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노벨상 수상이 다가올 때마다 정치인들과 국민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수상자들의 면면을 주의 깊게 살핀다. 지난해에는 일본에서 노벨상이 또 터져 나와 전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언론과 정치인들은 또다시 같은 레파토리의 기사와 선동을 반복했다. 노벨상 수상이 축구 국가대표 한일전도 아닐 텐데, 온 나라는 마치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일본에게 지기라도 한 듯 침울해졌었다. 또다시 노벨상 수상자들이 국내를 방문하고, 그들의 인터뷰에서는 항상 기초과학을 튼튼히 해야만 노벨상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 들린다. 외국의 과학자들이 한 말은 언제나 권위가 있어서, 다시금 국내의 언론은 기초과학 육성만이 노벨상을 위한 길이라며 야단이다. 문제는 기초과학 육성을 위한 정책과 비전과 철학일 텐데도, 기초과학을 육성하면 당장이라도 노벨상을 탈 것만 같은 분위기로 여론을 선동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라는 총론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낼 것인지에 대한 각론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조급해하지 않고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조급함에 몸서리치며 근시안적인 정책들만을 남발하다간 한국의 노벨과학상은 다시금 물 건너갈 가능성이 크다.


기초과학에 대한 강조의 여론이 대통령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인지,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기술인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과학기술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을 있는 한껏 보여주었다. 특히 기초과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모두 의대나 법대로 편입하는 사태에 대해 걱정하면서, 대통령은 "기초과학을 해도 존경을 받으면서 또 살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①라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대통령은 기초과학에 대한 홀대가 자신을 포함한 기성세대의 잘못인 것 같다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셨다고 한다. 산타야나의 말처럼, 모든 진보적인 움직임은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대통령의 이러한 반성과 성찰은 고무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총론이 아니라 각론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재래시장에서 자신의 경험을 빗대 과학적 합리성의 중요성을 설파했다고 한다. 재래시장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이야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서민경제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는 판단이 들 때마다 대통령은 재래시장을 찾아 상인들을 위로해왔다. 때로는 그 곳에 서서 '오뎅'을 먹는 서민적인 모습을 연출하며 서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치열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모습에 감격한 서민들 중 일부는 대통령의 친서민적인 모습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당장의 어려움을 잊어버렸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서민의 경제를 위협하는 구조적인 문제들, 영세상인들을 위협하는 대기업의 횡포와, 뿌리까지 썩어 있는 부동산 문제, 저출산과 관련된 양육비 문제와 학벌사회를 고착화하는 사교육 시장의 문제가 오뎅을 먹는 퍼포먼스로 풀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기초과학 정책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인들의 신년하례식에 참석해서 그들에게 "하나된 마음으로 과학기술계가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국운 융성을 위해 과학기술인들이 다른 분야 보다 앞장서 달라"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장은 과학기술인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정책과 비전, 그리고 철학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오뎅 퍼포먼스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예를 들어, 여전히 대통령의 기초과학에 대한 사고가 "과학기술계도 세계 1등이 나올 수 있고 이제 그렇게 도전해야 한다"라는 자유경쟁시장 논리의 판박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신년하례식 퍼포먼스 이후에 쏟아져 나온 교과부의 정책이라는 것이, '글로벌 박사 펠로십'이라는 명목으로 노벨상 수상을 위해  우수 대학원생 300명에게 2년 동안 6,000만원을 지급하는 수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② 어떻게 한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 그것도 이제 겨우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이 늘어가는 시점에 터져 나온 정책이 노벨상 따위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는가? 노벨상 수상이 국가를 위한 일인가? 이런 방식으로 단지 '노벨상'을 위해 한 국가의 장래를 결정하는 과학기술정책을 입안하는 국가가 대한민국 이외에 어디에 있는가? 다시 한번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총론이 아니라 각론이다. 돈을 무차별적으로 쏟아 붇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쏟아 붇느냐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전문가들과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정책을 짜는, 그런 각론이 중요한 것이다.


이공계 위기가 사회에 등장했을 때에 정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이공계 국가장학생 제도였고, 그 학생들은 지금 대부분 의대나 법대에 진학해 있다. 한 국가의 정책은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선심성 정책이나 퍼포먼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트위터의 한 지인은 저런 정책이라도 제대로 하려면 각각의 숫자에 '0'을 하나씩 더 붙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3000명에게 20년 동안 6억을 지원하는 제도. 노벨상을 목표로 하는 저열한 발상의 정책이라 해도, 이 정도의 장기적인 안목을 반영한 철학을 보여준다면 참 좋겠다.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은 오뎅 퍼포먼스 같은 것으로 쉽게 무마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특히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노벨상에 대한 전국민적인 바람이 들끓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방식으로는 그 노벨상조차 영원히 갖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노벨과학상이 등장한다 해도 그것은 국내의 지원을 받아 국내의 인력으로 해낸 일이 아니라, 한 과학자가 외국에서 외국의 지원으로 연구했던 일쯤이 될 것이고, 그러한 노벨상은 결코 대한민국의 것이 아니다. 그 과학자가 해당 연구를 수행했던 국가의 것으로 인식되어야 마땅하다.


과학기술인들의 신년하례식에 참가한 대통령에게 비난을 쏟아 부을 생각은 없다. 문제는 그것이 오뎅 퍼포먼스를 넘어서는 장기적인 정책으로 이어지느냐에 있을 테다. 제발, 이제 한국에서 선동과 퍼포먼스만으로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가 사라지길 바란다. 그 선동에 국민들은 농락당해 왔다.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숙고해볼 필요도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노벨상을 위한 '총력전'이 아니라 '뿌리깊은 반성'이 필요한 이유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오뎅'이 아니라 '과학'이 필요한 이유다.


①이명박 "국운 융성 위해 '과학기술계 총력전' 펼쳐야", 대덕넷, 2011.01.09.
②국고로 ‘노벨상 후보자’ 키운다, 경향신문, 201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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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과 경제발전, 그리고 박정희의 유산
과학기술의 자율성을 위한 정책적 선택
2010-04-26 ㅣ 김우재

이때 경제개발은 과학기술 중심지대의 이동을 정당화해주는 핵심 이데올로기로 쓰였다.
-김근배, <과학기술입국의 해부도>중에서

과학의 이중적 의미

현대에 이르러 과학과 기술은 구분하기 어려운 용어가 되었다. 영어로는 'Science and Technology', 접속사로 분명히 구분되어 있는 말이 대한민국에서는 '과학기술'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진다. 과학과 기술, 혹은 과학과 공학은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하는 공동운명체다.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문화 속에는 '과학'이라는 단어에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가 공존한다.

먼저 우리는 과학에서 아인슈타인이나 다윈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해마다 노벨상 시상식이 다가오면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에겐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가 없다. 하지만 국가의 존망을 걸고 노벨상을 타야만 한다. 이미 노벨상은 국가적 강박관념이다.

황우석 사태를 거치면서 분명해진 사실 중 하나는, 과학에 대한 대중과 언론 그리고 정부의 인식이다. 우리는 과학을 일종의 국가경쟁력으로 사고한다.
원천기술이라는 용어가 일상화 되었고, 새튼 교수는 산업스파이로 몰렸다. 황우석 사건이 터지기 전에 언론은 줄기세포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다는 기사를 연일 터뜨렸고, 친히 대통령과 국무총리,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그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논문조작으로 물러나는 황우석 박사의 앞길에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흩뿌렸다. 그는 사기꾼으로 밝혀졌지만, 지지자들의 입장에선 오히려 그가 사기를 당한 셈이었다. 국가경쟁력은 후퇴했다. 21세기 국가발전의 보고, 줄기세포는 황우석 박사의 추락과 함께 태평양 너머로 떠나갔다.

박정희의 유산

박정희의 유산 중 진보세력이 맞닥뜨려야 하는 가장 큰 과제는 '경제개발'에 관한 그의 업적이다.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먹고 사는 것이 당면과제였던 전후의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시대를 거치며 먹고 살만해졌다. 일본과의 비밀협약으로 받은 자금과 미국의 원조라는 변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변수를 고려해서 더 나은 역사가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해도, 상관관계에 불과할 뿐인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일반 대중들에게 여전히 인과관계로 인식될 뿐이다. 무능한 좌파정부라는 말에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가 어려있다. 잃어버린 10년을 말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박정희 시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의 국교는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아닌 자본주의가 되었다. 돈을 버는 것만이 신앙이 되었고, 이는 그 어느 종교도 감히 넘보지 못할 강력한 신념체계로 굳었다. 대한민국에서 자본주의는 종교다.

박정희의 유산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1966년 미국의 원조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립하면서 적극적으로 과학기술을 정치에 동원했다. 그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정책의 기저에는 박정희 시대의 철학이 그대로 배어 있다. 정치적으로 과학기술을 이용했던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과학기술 발전 없이는 경제성장이나 근대화가 이룩될 수 없다"라는 인식을 심는데 성공했다.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이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을 업고 재현된 것이다. 과학기술은 박정희 시대에 자본주의와 한 몸이 된다. 자본이 투입되면 반드시 이윤이 창출되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을 분리해서 생각해보면 완전히 오류인 이런 생각이 여전히 우리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박정희 시대는 한마디로 '정치권력의 전성기'였다. 김근배에 따르면, 박정희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과학기술 제도(과학기술의 내적 측면), 과학기술과 사회의 연결, 대중의 과학기술적 동원(과학기술의 외적 측면) 등의 한가운데 정치권력이 웅크리고 있었"으며, 당시의 정치권력은 "과학기술을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뇌이자 과학기술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독특하게 연결하는 신경망"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과학은 경제적으로 번역되었다.

초창기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대부분의 과학기술정책은 이승만 정권의 것을 계승한 것이었다. 1965년까지 박정희의 연설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당시 박정희 최대의 관심사는 경제발전이었다. 과학기술에 관한 5개년 계획은 '기술진흥5개년계획'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과학'은 경제적 유용성이 없는 순수학문분야로 여겨졌다. 애초에 박정희의 관심사는 '과학기술'이 아니었다. 경제적 유용성과 맞닿아 있는 '기술개발'이 정부의 최대현안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흐름은 박정희가 1965년 중순 미국을 방문하면서 완전히 뒤바뀐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쟁 참전과 한일수교의 대가로 연구소 설립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박정희는 존슨의 제안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로 작정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연구소 설립에 관한 많은 과학기술자들의 성토가 있었지만 박정희는 무시했었다. 그리고 금속공학자인 최형섭을 주축으로 한 '파이클럽'이 정치권력과 손을 잡는다. 이제 박정희의 과학기술 정책은 '기술'에서 '과학기술'로 탈바꿈한다. 그는 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미국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욱 큰 규모의 KIST를 설립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과학기술 대통령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유산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사로잡고 있다.

과학과 기술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계절이 오면, 대한민국은 들썩거린다. 올해는 그 명단에 한국 과학자의 이름이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다. 그냥 때가 되었기 때문에 뭔가 말을 해야 하는 것 뿐이다. 그런 기대를 하기엔 갈 길이 너무나 멀다. '노벨상에 근접한 한국인 과학자'라는 명단도 해마다 빠지지 않는 단골주제다. 하지만 선정기준이 불투명하고 폐쇄적인 노벨상 선정위원회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과연 대한민국이 노벨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우리는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대한민국의 과학자들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 없이 노벨상은 없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리 노벨상이 기초적인 연구가 실용적인 결과로 연결되었을 때 시상된다고 해도, 기초연구와 실용연구의 상호관계는 그 둘을 고루 발전시킨 국가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엔 그 반쪽만이 존재한다. 반도체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기술계의 발전은 눈부시다.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계열사 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삼성전자의 결산보고서다. 아이폰의 등장으로 이마저도 흔들리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미흡했다는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평가하기엔 구조적 상황이 열악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말하기 전에, 과학계는 과거의 유산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에서 하나라도 배운 것이 있다면, 박정희 시대로부터 정치적 민주화를 쟁취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과학기술행정의 모습을 직시해야만 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기대할 수 없다. 경제개발이라는 이념 속에 과학기술이 갇혀 있는 한,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 민족은 망한다고 했다. 거창하게 민족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과학기술계는 과거를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우리의 과학기술은 여전히 박정희 시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과학기술의 자율성

파이어아벤트는 그의 책 <방법에의 도전>에서 서구사회에서 정교분리가 진행되었던 것처럼 과학도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의 근원에는 그의 아나키즘적 정치철학이 녹아 있다. 비록 과학에 단 하나의 방법론은 없다는 주장을 했던 그였지만, 과학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권력에 맞서는 아나키스트의 입장에서 과학을 정치와 동등한 위치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이어아벤트의 주장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현실조건 속에서, 나아가 과학기술이 정부의 지원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현대에 이르러 낭만주의적인 견해는 조금 양보해도 좋다. 우리가 박정희 시대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은 과학을 정치와 동등한 반열에 올려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다른 선진국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기술자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유산은 그런 것이다. 과학기술의 목표와 방향은 정부의 의지대로만 발전한다. 과학기술자들의 의견이 발 디딜 곳은 없다.

박정희와 철학을 공유하던 최형섭에 의해 과학기술정책이 짜여지던 1960년대 중반 이전에 이미 그런 목소리가 있었다. 적어도 과학이라는 학문 안에서 진지하게 자신의 위치를 고민해본 학자라면, 과학이 정치에 이끌려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해 이미 과학자들 사이에는 과학과 정치에 관한 심각한 고민이 공유되고 있었다. 나아가 과학자들은 천성적으로 반항적이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의 권영대 교수나, 동물학자 강영선을 비롯한 일본유학파 과학자들은 경제개발의 이념으로부터 독립적인 학문적 분위기의 '종합과학연구소'의 설립을 주장했었다. KIST가 설립된 이후에도 많은 이공계 대학 교수들은 대학과의 긴밀한 교류 및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었다. 그런 목소리들은 박정희의 비호 속에 모조리 묻혀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대학과 연구소의 학자들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외치고 있고, 경제논리에서 조금 자유로운 자율적 연구를 지원하라고 호소한다. 중장기적 안목을 가진 프로젝트를 더 늘리고, 쓸데 없는 분기별 연구보고서로 연구자들을 혹사시키지 말라는 말은 이제 연구자들 사이에선 일종의 농담이 되어버렸다. 현장의 연구자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노벨상을 위해서 국가의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모르는 것은 과학기술정책을 여전히 박정희 시대의 정신 속에서 기획하고 있는 정부관계자들 뿐이다.

노벨상인가 경제발전인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단기간에 실용적인 연구로 이어지지 않는다. 기초과학이 발전해야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이 발전한다는 단선적 논리는 신화에 불과하다. 산업혁명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것이라는 착각은 2차 산업혁명, 그것도 일부에 국한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기술의 발전은 자체동력을 지니고 있다. 조지 바살라는 <기술의 진화>에서 이러한 기술과 과학의 상호작용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초대형가속기 프로젝트가 실패한 것은 현재에도 이러한 분석이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로 박정희 시대에도 과학기술은 경제개발에 실질적으로 크게 기여하지 않았다. 그 효과는 몇 십 년 후에나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근배의 말처럼 오히려 "경제개발이 과학기술을 특정 방향으로 관심 기울이고 진흥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따라서 만약 아이폰과 같은 돈벌이를 원하는 것이라면 국가는 기초과학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의 공학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다. 청년실업에도 불구하고 공학계열 졸업생의 진로는 순탄한 편이다. 물론 보수도 의학계열을 제외하곤 상위에 속한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견인차는 공학기술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이쳐와 사이언스에 한국과학자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실제로 그런 논문이 산업과 연계되는 경우는 드물다. 연계가 된다고 해도 아마 수십 년이 지난 후에나 가능할 일이다. 어쩌면 과학자들은 공학자들에게 기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과학기술에 대한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는 결정해야 한다. 노벨상인가 아니면 경제발전인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을 정리하는 철학적 성찰은 기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자들은 그러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되었다. 만약 경제발전을 원한다면 아이폰의 성공을 배우면 될 일이다. 아이폰은 엄청난 과학적 성과물이라기 보다는 나와 있는 기술들에 철학과 아이디어를 접목한 상품이다.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내고 싶은 정부는 아이폰을 과학으로 포장하며 투자를 결정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노벨상을 원하는 정부라면 문제는 조금 복잡해진다. 우선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 기간 내에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구조를 뜯어고치고 장기적인 투자를 집행하는 작업이 성과를 맺는 데에만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집권 기간 내에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정부가 이런 투자를 하겠는가. 노벨상은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과학이 없어도 대한민국은 그럭저럭 잘 먹고 잘살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 김우재 박사는 현재 UCSF 박사후 과정에 있으며, 인터넷과학신문 <사이언스타임즈>에 '미르(miR)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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