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24정태인/새사연 원장

 

착한 경제학에서 정치는 매우 중요하다. 다소 뜬금없게 들리겠지만 ‘시장실패’라는 추상적 얘기부터 시작해보자. 1950년대 초에 저 유명한 케네스 애로는 ‘일반균형의 존재’를 증명했다. 즉 이 세상 모든 시장을 동시에 균형상태로 만드는 가격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수학으로 입증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균형이론은 동시에 시장실패론의 출발점이었다. 이 균형의 존재조건인 완전경쟁, 완전정보 등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아름다운 세계도 그저 꿈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새뮤얼슨이나 애로 같은 학자들은 시장에서 아예 공급될 수 없는 공공재 이론이나 시장 메커니즘에 의존할 수는 있지만 수많은 문제를 발생시키는 의료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1950~1960년대 국가 개입의 미시경제학적 근거가 생긴 것이다.
 
그 반대 쪽에서는 시카고학파 중심의 경제학자들이 이런 국가 개입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데 몰두했다. 부캐넌의 ‘정부실패론’은 관료나 정치가 역시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정부에 모든 걸 맡기면 안 된다는 주장이며, ‘코즈 정리’는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도 시장실패(외부성)를 민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에 이용되었다(코즈 본인은 떨떠름해 했지만). 나아가서 이런 주장은 현실에서 실천됐는데 1980년대 이래의 민영화, 규제완화, 개방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착한 경제학은 이런 시장만능론을 근본부터 부정한다. 인간은 경제학이 가정하는 대로 이기적이지 않을 뿐더러 즉각 자신의 물질적 이익을 계산해낼 계산능력도 없으며, 시장 또한 대단히 느리고 곧잘 고장이 나는 기계처럼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나아가서 우리는 시장실패론조차도 인식상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로 시작하고, 경제학에는 ‘태초에 시장이 있었다’가 제일 먼저 나온다. 시장실패론은 우선 시장이 우리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되 그게 실패로 판명나는 경우에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프레임은 대단히 강력해서 민영화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이 틀에서 얘기를 시작해야 했다. 예컨대 왜 의료는 시장에서 실패하는지, 농업을 시장에 맡기면 안 되는지부터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런 논의는 정교해 보이지만 갑갑하기 이를 데 없는 경제논리와 실증 싸움에 빠지기 일쑤다.
 
하지만 장구한 인류 역사에서 시장이 인간관계를 대변한 건 지난 300년뿐이다.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인간이 서로 관계를 맺는 수많은 방법 중 시장이 제일 먼저 나와야 하는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왜 사랑이 먼저 나오면 안 되는가? 물론 시장은 가격이라는 변수만으로 인간관계를 빈약하게 만듦으로써 오히려 원거리의 익명 거래를 할 수 있도록 진화한 신판 교류방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때문에 다른 관계를 무시해도 좋다는 경제학의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경제학이 자랑하는 효율성이라는 가치가 평등이나 우애와 같은 다른 가치보다 중요하다는 근거도 없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건 모두 합의하는 어떤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예컨대 이제 우리는 최소 수준의 의료나 교육, 심지어 식량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시장의 균형가격을 치를 능력이 없는 사람이 치료나 교육을 못받거나 굶는 데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최소한으로 누려야 할 어떤 가치를 우리는 흔히 ‘공공의 가치’(public value), 또는 ‘공공성’(publicity)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공공성의 범위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롤즈가 ‘기본재’라고 부른 것, 그리고 센의 ‘능력’이 그런 기준의 예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정하자면 꽤나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즉 공공성의 범위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우리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공이성(public reason)을 사용해서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 또는 그런 걸 원하면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무엇인지에 합의하는 것이 우선이다. 바로 정치가 하는 중요한 역할이다. 그런 합의 이후에 그걸 공급하는 방법을 논의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다. 즉 태초에 있어야 할 것은 시장이 아니라 정치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가 최우선’이다. 그 다음에 어떻게 그런 가치를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 즉 시장경제, 공공경제, 사회적 경제를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를 다뤄야 한다.
 

*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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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9정태인/새사연 원장

 

‘착한 경제학’의 독자들이 잘 알다시피 사회적 경제는 어느날 갑자기 ‘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흔쾌한 협동에 필수적인 신뢰란 오랫동안 서서히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 ‘새마을운동’처럼, 또 참여정부의 ‘국가균형사업’처럼 중앙에서 하향식으로 만들려다가는 그나마 남아 있는 지역의 역량만 허공에 날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정부가 할 일은 없는 걸까? 문재인 전 후보는 대통령 직속으로 ‘사회적 경제위원회’를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만일 박근혜 당선인이 48%의 문 전 후보 지지자들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자신의 공약과 아무런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공약은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지난해 8월 말 주간경향 990호에 나는 ‘SEQ’(서울-에밀리아로마냐-퀘벡)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시에는 서울을 염두에 두고 썼지만 이제 중앙정부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2004년 캐나다의 폴 마틴 총리는 “사회경제를 캐나다의 사회정책 수단의 핵심 부분으로 삼겠다. 기업가가 강한 경제에 필수적이듯 사회기업가는 강한 공동체에 필수적”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퀘벡의 경험이야말로 연방정부의 정책 수립에 가장 큰 자산이었다.
 
따라서 지금 박근혜 당선인에게 가장 긴요한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1년여 ‘마을 만들기’라든가, ‘중간조직 만들기’를 하면서 부딪힌 여러 장애, 특히 중앙정부 차원의 법과 제도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들을 몸으로 느꼈을테니 말이다. 박 당선인이 서울시장을 만난다면 서울시는 그동안의 경험을 요약해서 중앙정부가 해야 할 일을 제시해야 한다. 만일 새로운 대통령 위원회를 만드는 것이 부담된다면 주무부처를 명확히 지정해야 한다. 현재 협동조합법은 기획재정부, 사회적기업법은 노동부, 생협법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주무부처이고, 마을 만들기와 관련해선 거의 전 부처가 고유의 사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 시장이 제대로 간파했듯이 사회적 경제는 시ㆍ군ㆍ구 단위의 지역공동체가 주도해야 한다. 서울과 같은 광역정부, 나아가서 중앙정부는 이런 실천에 필요한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자금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협동조합은 돈과 사람의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주식회사처럼 돈을 모을 수 없고 조합 내 임금 격차가 보통 6배 이하로 억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특별히 협동조합을 신설하거나 확대할 필요가 있을 때는 외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이제 사회적 경제가 막 움튼 우리나라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일반적으로 협동조합은 출자금과 비분리자산(협동조합의 내부유보로 회사를 청산할 때도 출자자에게 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협동조합 연합조직이 조성한 협동조합 기금(레가의 경우 ‘coopfond’, 모든 단위 조합은 수익의 3%를 연합조직에 낸다), 그리고 협동조합 자체의 금융기관(예컨대 레가가 소유한 보험회사 ‘unipol’)에서 필요한 돈을 조달한다. 하지만 네트워크가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사회적 경제 생태계가 조성되기까지 필요한 것은 ‘공동체 기금’이다. 각 지역에서 먼저 돈을 모으고 중앙정부가 이에 맞춰 출자해서 상당한 규모의 종잣돈을 마련해야 한다. 각 지역의 시민사회단체와 지방정부가 ‘상호성’이라는 사회적 경제의 원리에 따라 엄격하게 운용하면서 필요한 경험과 기술을 쌓아야 할 것이다.
 
중앙정부는 모든 정책에 사회적 경제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적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정부 조달의 일정 비율을 사회적 경제에 배정하거나 가점을 부여할 수 있다. 또한 에너지 효율형 주택개량사업이나 지역별 재생가능에너지 발전사업과 같은 국가 차원의 사업을 지역의 주택협동조합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울스와 긴티스 말대로 “제도설계를 잘 하면 공동체, 시장, 그리고 국가는 서로 대체적인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여기에 성공한다면 자마니 교수의 말대로 사회적 경제는 우리나라에서 ‘제2의 경제기적’을 만들어낼 것이다. 부디 박근혜 당선인이 이 정책을 받아들여서 자마니 교수의 예언이 실현되기 바란다.

*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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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02 / 15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세계 석학들의 기고 전문사이트인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에 실린 케말 데르비스(Kemal Dervis)의 "유럽 위기로 보는 세계화의 미래(The Global Future of Europe's Crisis)"와 대니 로드릭(Dani rodrik)의 "국민국가의 부활(The Nation-State Reborn)"을 요약 소개한다.

케말 데르비스는 전 터키 재무장관이자 유엔개발계획(UNDP) 사무총장, 세계은행 부총재로 현재는 브루킹스 연구소 부소장이다. 대니 로드릭은 하버드대학교의 국제정치경제 교수이며, 저서로는 '더 나은 세계화를 말하다'가 있다.

오늘(15일) 그리스 2차 구제금융의 최종 승인을 내리기로 했던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가 취소됐다. 최근 그리스 의회를 통과한 긴축안을 이행하겠다는 그리스 각 정당의 서면확약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근본적으로는 그리스가 긴축안을 이행할 것이라는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 긴축안은 임금삭감, 공무원 감축 등 그리스 국민들의 희생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에 돈을 빌려준 독일과 프랑스 채권은행들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당연히 그리스 국민들의 저항은 거세다. 때문에 지금은 사퇴한 그리스 전 총리 파판두레우는 긴축안을 포함한 구제금융안과 유로존 잔류 여부를 두고 국민투표를 부칠 것을 제안해었다. 하지만 금융자본의 압력에 의해 국민투표는 철회되었고, 결국 사퇴했다. 현재 그리스 총리는 미국계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의 사람으로 불리는 파파데모스다.

그리스의 이같은 상황을 두고 데르비스는 국민국가의 민주적 정치와 세계화가 대립하는 상황이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향후 이 둘 사이의 대립과 긴장이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보았다.

로드릭 역시 한 때 세계화로 인해 국민국가는 쓸모가 없다는 환상이 돌았지만, 금융위기로 인해 국민국가의 역할이 대두되고 있다고 보았다. 위기 이후 구제금융을 실시하고, 경기부양 재정정책을 피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일들은 모두 국민국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상황은 단순히 세계화와 국민국가의 대립이라고 불리기에는 정확하지 않다. 1%만을 위한 세계화, 금융자본만을 위한 세계화와 99%를 위한 민주적 정치의 대립이라고 불러야 정확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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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위기로 보는 세계화의 미래
(The Global Future of Europe's Crisis)

2012년 2월 14일
케말 데르비스(Kemal Dervis)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

유로존 위기는 2012년에도 계속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리스 국가 부채에 대한 그리스와 채권은행 사이의 협상은 결국 결론이 나겠지만 채권은행이 얼마나 협조할지는 의문이다. 한편 국제통화기금(IMF)은 유럽중앙은행(ECB)을 비롯한 공공부문에서의 국채 탕감을 요구하고 있다. IMF의 요구는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일 경우 부채에 허덕이는 다른 유로존 국가들도 똑같이 부채 탕감을 요구하고 나설 수 있다. IMF, 유럽안정화기금(ESF), 유럽안정화기구(ESM)가 약속한 지원은 아직 실시되지 않고 있다.

물론 몇 가지 긍정적인 조치도 있었다. ECB는 3년 동안 1%의 이자로 유럽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여 은행 위기를 막았다. 하지만 이 조치가 채무 국가들이 지고 있는 장기 대출을 줄이지는 못했다. S&P는 1월 중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그 외 7개 유로존 국가의 신용등급을 AAA로 낮췄다.

유로존이 직면한 위기의 핵심은 경제 통합 없이 일어난 통화 통합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런데 유럽 위기는 통화 통합이라는 특수한 문제를 넘어서는 세계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개별 국민국가의 민주적 정치와 세계화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을 지적하고 있다. 무역, 통신, 금융이 서로 연결되면서 금융시장의 요동에 더 취약해졌으며, 각 국민경제 사이의 상호의존성이 높아졌다. 그 결과 모든 곳에서 개별 국민국가의 정치인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에 제약이 따르기 시작했다.

이런 긴장 상태를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건이 그리스 전 총리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가 그리스의 유로존 잔류 여부를 두고 국민투표를 제안한 것이다. 국민투표는 의사결정 수단으로서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시장은 매 시간, 매 분마다 변하지만 국가의 토론은 몇 주씩 걸린다는 사실이다. 결국 금융시장과 그들을 두려워한 유럽 지도자들의 압력에 의해 파판드레우의 제안이 철회되기까지 24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전 세계에 걸쳐 국민소득에 비해 금융자산은 매우 커졌다. 금융시장은 대부분의 국가를 제압할 수 있다. 부채에 많이 의존한 국가일수록 취약하다. 만약 금융시장과 중국중앙은행이 갑자기 미 재무부 채권의 매입을 거절한다면 미국경제는 침체에 빠질 수 있다.  채권국가 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금융위기로 인해 중국의 수출품을 수입하지 않는다면 중국 역시 심각한 경제적 문제에 처할 것이다.

이렇게 전 세계가 연결되어 있는 위협들은 현실로 다가오고 있으며, 더 강력한 세계 경제 정치 협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고 싶고, 정치에 대해 토론하고 싶고, 제안된 협력 조치들에 대해 동의절차를 거치기를 원한다. 초국가적인 형태의 정치는 민주적 절차를 거쳐 시장을 국가 내부에 재배치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다.

다른 어떤 지역보다 초국가적 협력을 추구해온 유럽연합에서조차 경제문제에 대한 정치적 협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지금 위기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그럴 일을 없을 것이며,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세계화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부분적으로 역행하지 않는다면, 지금 유럽이 고심하고 있는 국경을 넘어서는 정치는 전 세계가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21세기 전반기에 펼쳐질 핵심적인 정치적 토론은 세계 시장과 개별 국민국가의 정치 사이의 긴장 해소 방법이 될 것이며, 유럽위기는 이를 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민국가의 부활
(The Nation-State Reborn)

2012년 2월 13일
대니 로드릭(Dani rodrik)
프로젝트 신디케이트(Project Syndicate)

우리 시대의 근원적인 신화 중 하나는 세계화와 개별 국민국가는 어울리지 않다는 것이다. 교통과 통신의 혁명은 국경을 사라지게 하고 세계를 축소시켰다. 국가 규제에서의 협력에서부터 다국적 기구를 조직하는 국제적 시민사회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운영 방식이 등장하여 국민국가의 입법자들을 대신하고 있다. 이제 국내 정치가들은 세계 시장에서 거의 힘이 없다.

하지만 세계 금융 위기는 이런 미신을 산산조각냈다. 은행에 구제금융을 제공하고, 유동성을 공급하고, 재정정책으로 경기를 부양하고, 실업자를 위해 사회안전망을 제공하는 이는 누구인가? 금융 시장의 감시와 규제를 위해 법을 다시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바로 국민국가이다. G20, IMF, 바젤위원회 등은 결국 들러리다.

심지어 지역협력기구가 상대적으로 강력한 유럽에서도 개별 국가의 이익이 우선이다. 독일의 마르켈 총리는 부채국가들의 긴축을 선호하지 않지만, 자국 내 선거를 위해 다르게 행동해야 했다.

지식인들은 두 가지로 국민국가를 공격한다. 첫째, 재화와 자본, 사람이 전세계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돕는 기구로서 정부를 바라보는 경제학자들의 비판이다. 경제학자들은 세계경제가 더 통합되고 효율적이 되면 세계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도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자유방임은 더 많은 금융위기와 정치적 반발을 가져왔다.

둘째, 세계주의자는 국경의 인위성을 비난한다.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에 의하면 통신 혁명은 세계 규범(global ethics)을 창조했다. 노벨 경제학을 수상한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은 우리에게는 국경을 뛰어넘는 "다중 정체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모르겠다. 실증조사에 의하면 여전히 국적은 중요한 정체성으로 존재한다.

몇 년 전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는 지역, 국가, 세계에 대한 소속감을 측정했다. 예상대로 스스로를 세계시민이라 여기는 사람보다 한 국가의 국민이라 여기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미국, 유럽, 인도, 중국 등에서는 국민이라는 정체성보다 지역 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높았다.

50년 전만 해도 지리적 거리는 경제 활동의 강력한 제약조건이었다. 인터넷이 발명된 후에도 국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연구에 의하면 미국인들은 물리적으로 먼 곳에 있는 국가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국가의 웹사이트를 더 많이 방문한다.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국민국가는 사라진다는 미신이 붙잡혀 있다는 점이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변명하고, 지식인들은 비현실적인 세계지배구조를 꿈꾼다. 사회적 약자들은 이민자와 수입품을 탓한다.

우리가 언젠가는 세계시민이 되겠지만, 지금의 위기는 여전히 국민국가의 정부가 해결하고 있다. 국민국가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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