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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29 ‘슈퍼스타’의 경고는 우연일까
  2. 2014.08.29 교황의 경제학
2014.08.29정태인/새사연 원장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 걸음 뗄 때마다 이 땅 위의 수많은 고통에 눈을 맞췄다. 특히 아직 원인조차 알 수 없어 참척의 아픔을 추스를 수 없는 세월호 유가족에 대해서는 각별했다.

교황은 한국에서도 ‘복음의 기쁨’(2013년 11월, 교황 권고문) 이래 그가 지속적으로 제기했던 사회 비판을 다짐하듯 되풀이했다. 현재의 사회구조는 ‘규제 없는 자본주의, 곧 새로운 독재’다. 한국에서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로, 그리고 다른 강론과 글에서는 ‘무한경쟁과 이기주의의 세계’ ‘배제의 모델’ ‘쓰고 버리는 문화’ ‘죽음의 문화’ 등으로 묘사된 바로 그 사회다. 

이 사회에서 노동자와 가난한 자는 착취와 억압의 대상을 넘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말 그대로 ‘잉여’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결코 경제성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교황은 낙수경제학(trickle-down economics)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시장의 절대적 자율성과 금융 투기를 거부함으로써, 또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한, 이 세계적 문제에 대한 해법은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경제정책은 개인의 존엄성과 공동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히 국가가 정당한 재분배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사유재산은 그것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정당하다.” 이런 주장은 물론 곳곳의 비판을 불러왔다. <폭스 뉴스>나 <월스트리트 저널>은 물론이고 <이코노미스트>마저 그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 다음으로 빈번한 비판은 교황의 얘기를 아르헨티나의 사례로 국한하려는 것이다. 국내의 교황 비판에도 곧잘 인용되는 미국의 가톨릭 신학자 마이클 노백의 논지가 대표적이다. 페론주의와 정실주의 때문에 빈부격차가 더 심해진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와 달리 미국에서는 노백의 할아버지처럼 무일푼 이주민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낙수경제학이나 규제 없는 자본주의에 대한 교황의 비판은 특수한 경험을 일반화한 결과라는 것이다.

확실히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과 유럽의 경험은 노백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쿠즈네츠의 ‘역U자 가설’(자본주의 초기에는 빈부격차가 심해지지만 노동자 계급의 처지가 향상되면서 격차가 완화될 것이라는 가설)이 나온 것 아니겠는가?

규제 없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독재’는 전 세계 일반의 현상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부당한 낙인이 찍힌 또 한 사람,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특수한 경험에 입각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낙수경제학 또는 쿠즈네츠 가설이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 것은 20세기 초 두 차례 전쟁에 의한 대규모 파괴,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한 사회 개혁이라는 예외적 사건들 때문이었고 1970년대 이후 선진국 경제는 줄곧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려왔다는 사실을 장기 통계로 실증했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 즉 새로운 독재’는 이제 전 세계의 일반적 현상인 것이다. 아르헨티나 등이 1970년대 이래 반복되는 위기를 겪은 것은 오히려 한 번도 빈부격차를 극적으로 해소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대로 대지주가 제조업을 소유한 동시에 금융자본가였으며 또한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교황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조건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도 생생히 목격했을 것이다.

마이클 노백이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례로 든 한국도 마찬가지다. 광복 이후의 일본인 재산 몰수, 농지개혁과 6·25전쟁은 한국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은 신분 상승의 통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빈부격차가 심해진 나라이다. 

재·보궐 선거 압승으로 자신을 얻은 박근혜 정부는 규제 완화와 민영화로 일로매진하는 군사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9월 초면 피케티도 방한한다. 토마 피케티 역시 민주주의의 질식이야말로 경제적 불평등이 초래하는 가장 큰 해악이라고 주장한다. 세계적 슈퍼스타 두 사람이 똑같은 경고를 하는 것을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본 글은 시사IN Live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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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4.08.18정태인/새사연 원장


미사 마지막 순서에 ‘성찬의 전례’가 있다. 줄 서서 사제가 나눠주는 얇은 밀가루 빵을 받아먹는 순서다. 나는 “그레고리오”라는 세례명을 지닌 엄연한 신자지만 이 의식엔 참여할 수 없다. 고백성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날라리 신자’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그런 자가 경제학을 좀 안다고 해서 감히 “교황의 경제학” 운운하는 것은 불경일 테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교황께서 “유민이 아빠”의 손을 잡았을 때,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새사연은 공식 번역이 나오기 전에 “복음의 기쁨” 2장을 한국어로 가장 먼저 옮긴 바 있고, 더구나 이교도마저 사랑으로 감싸는 교황이 아닌가? 

복음의 기쁨, 그리고 국내외에서 행한 강론들은 일관된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당대의 사회구조에 맞서 형제애의 공동체(즉 연대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번에 복자의 지위에 오른 순교자들은 조선후기의 봉건적 사회구조에 맞서, 사제 없이도 스스로 “연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교황은 그 행동이야말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일치시킨 것이라고 칭송했다. 즉 예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우리 마음속의 “우리”를 되찾는 길이다(칼리에리 강론). 이것이 곧 공공선, 진보, 발전이다.

둘째, 그렇다면 현재의 사회구조는 어떠한가? 바로 “규제 없는 자본주의, 곧 새로운 독재”(복음의 기쁨)다. 이 사회는 여러 강론에서 “비인간적인 경제모델” “무한경쟁과 이기주의의 세계” “배제의 모델” “쓰고 버리는 문화” “죽음의 문화” 등으로 묘사됐다. 여기서부터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생태 파괴가 비롯됐다.

셋째, “자본의 세계화”는 전 지구적인 차원의 사회구조라고 할 수 있다. 교황은 자본의 세계화를 “연대의 세계화”로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연대의 세계화는 모든 인류 가족의 전인적인 발전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넷째, 이런 국내외의 사회구조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가난이 만들어지고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소외되고 있다. “새로운 가난”은 “새로운 독재”에 조응하는 말일 것이다. 생산력은 충분한데도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생긴 사회적 배제를 말한다. 

다섯째, 하여 신자와 사제의 사명은 가난한 자의 편에서 당대의 사회구조와 맞서 싸우는 것이다. 특히 사제들은 거리로 나서야 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착취나 노예, 그리고 다른 사회적 질병에 대해 공모하는 것이다. 침묵을 통해, 행동하지 않는 것을 통해, 무관심을 통해 우리들은 그것들과 공모하는 것”이다.

교황은 지난 5월9일 유엔 사무총장과의 만남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얘기를 했다. 개인과 국가, 국제의 모든 차원에서 우애와 연대의 정신이 과학적인 능력과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우애의 정신에 입각해서 가장 효과적인 제도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국가 수준에서는 “경제적 수익을 국가가 합법적으로 재분배하고, 동시에 사적 부문과 시민사회가 불가결하게 협동”해야 한다. 교황은 정신적, 도덕적 운동과 동시에 국내외의 제도 개선을 촉구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재·보선에서 대승하자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3월 이래 잠시 미뤄뒀던 규제완화, 투자활성화의 칼을 뽑아들었다. 지난 8월12일의 “6차 투자활성화 대책”은 앞으로 “기업 맞춤형”으로 규제완화가 일어날 것임을 보여주었다. 

교황은 연대와 공공선을, 대통령은 경쟁과 성장을 제도 개선의 지침으로 삼았다. 박 대통령에게 “규제는 없애야 할 암덩어리”인데 교황은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독재”라고 정의했다. 교황의 말씀이 맞는다면 박 대통령의 숙원이 이뤄지는 순간 우리는 정치와 더불어 경제에서도 독재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비록 예포와 예도라지만 대포와 칼로 교황을 영접한 것일까?

 


 

*본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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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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