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6김병권/새사연 부원장

대선이 두 달 안쪽으로 진입하면서 주요 후보들의 공약이 조금씩 구체성을 띠고 논쟁이 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미래 성장전략이다. 지금 시점에서 성장전략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5년 전 17대 대선에서 성장 지상주의 구호였던 ‘747 공약’과는 차원이 다른 성장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지 화려한 고속성장 구호가 아니라 당면한 불황의 늪에서 탈출해 심각한 고용문제를 풀어내고,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는 그런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이런 말을 했다. “일부 학자들은 경제위기의 위중함을 '대불황(Great Recession)을 겪고 있는 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위기가 언제 종료될 것인지 아직 막연할 뿐 아니라 위기 종료의 조건도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은행 총재조차도 장기침체를 인정할 만큼 차기 정권은 불황의 터널을 견딜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가장 늦게 성장론을 피력한 박근혜 후보는 ‘창조경제론’, ‘스마트 뉴딜’이라고 작명한 자신의 성장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스마트 뉴딜은 과학기술과 IT라는 비타민을 통해 시들어 가는 여러 산업에 생기를 다시 불어넣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과 인프라를 가지고 있는 정보통신기술을 산업 전반에 적용하고, 융합해서 새로운 성장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정책입니다. 정보통신기술을 농어업에 적용해 고부가가치 농어업을 만들고, 제조업에 활용해 제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서비스업에 적용해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겠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발언은 스마트·정보통신·융합·고부가가치·경쟁력 등의 단어들이 반복되면서 엮어진다. 좋은 말이다. 그리고 첨단 분야에서 기업을 하려면 매일처럼 들어야 하는 단어들이고, 기업경영을 위해 꼭 필요한 개념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국가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기업경영의 시야에서 잡히고 있는 이런 개념들을 ‘산업정책’을 세울 때는 모르겠지만, 국가경영전략을 세울 때도 필요하고 의미 있을까. 최근까지는 대다수가 그렇다고 생각했다. 모든 조직을 기업처럼 운영하라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Great Depression) 이후 자본주의 최대 위기라고 하는 대불황(Great Recession)을 겪고 있는 지금도 그런가.

프랑스 지리학자 질 아르디나는 최근 르몽드에 기고한 글에서 “국가는 기업과 달리 이윤추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국가의 운영은 시장의 순간적인 성과보다는 긴 역사의 흐름에 의존한다. 국가의 영토도 손실이 난다고 다 팔아치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한 번쯤 음미해 볼 대목이다. 덧붙여 그는 세계경제포럼(WEF) 등에서 발표하는 ‘국가경쟁력 지수’ 등이 얼마나 임의적인지도 지적했다. "2007~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까지만 해도 아일랜드·아이슬란드·두바이 등은 경쟁력이 높은 국가로 소개됐지만, 이들의 국가경제는 위기에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 입증됐다."

이처럼 기술경쟁력이나 첨단부문의 부가가치 창출력 등에만 의존해 국민경제 비전을 세우고 성장동력을 짜는 편협함을 버려야 할 때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차기 지도자들은 여전히 여기에 집착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침체로 가는 것은 기술혁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부가가치 창출력이 약해서도 아니다. 상품의 공급이 취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수요가 취약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혁신적인 상품이 발명되고 시판되면 뭐 하나. 살 돈이 없는데. 그래서 경제가 위기의 나락으로 빠지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후보의 기술 지상주의가 심각하긴 하지만 문재인 후보의 ‘공유가치성장론’도 일정하게 기업 경영학의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안철수 후보의 ‘혁신 기반 경제론’도 기술혁신을 축으로 성장전략을 고민한다는 차원에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조금 더 박하게 평가하자면 이런 논리들은 모두 신자유주의와 아무런 불편 없이 잘 어울리던 개념들이었다.

그런데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은 좀 다른 화두를 던졌다. 박 시장은 “사회혁신이야말로 지금의 경제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성장동력이자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자가 될 것”이라며 “사회혁신을 위해서는 국가와 시장·사회의 경계를 넘어선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사회 공동체 역할의 강화, 협동조합의 활성화 등에서 차기 10년의 혁신을 발견하는 것은 어떨까.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김성오 연구위원은 한 기고에서 다음과 같은 기대를 표시했다.

“두레와 계·향약을 통해 전통사회에서 다져진 한국인들의 협동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여기에 한국 사람들의 진취적인 역동성이 더해진다면, 단 10년 만에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 강국으로 우뚝 선 경험이 협동조합에서도 반복될 것이다.” 필자도 그의 기대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글은 매일노동뉴스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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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10 / 19 김병권/새사연 부원장

박근혜 후보의 ‘창조경제’, 90년대 벤처정책 부활? 혹은 ‘삼성 스타일’

보고서 원문을 보시려면 위의 제목을 누르면 됩니다.

 

[목 차]

1. 박근혜 후보만 ‘말하지 않았던’ 성장정책

2. 성장론? 잘해야 10년 전 IT산업 정책

3.‘스마트 뉴딜’은 신종 비정규 양산 정책인가?

4. 박근혜 후보는 박원순 시장에게 배워도 좋을 것.

 

[본 문]

1.박근혜 후보만 ‘말하지 않았던’ 성장정책

기다렸다. 한국의 보수와 박근혜 후보가 어떤 성장론을 들고 나올 것인지. 원래 성장론은 보수의 단골 메뉴 아니던가? 그랬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까지는. 그런데 그들의 성장모델 - 중국이나 독일식으로 국내 저임금과 해외수출로 성장 동력을 삼던 수출 의존형 모델이나, 미국과 남유럽처럼 부진한 소득을 부채로 충당하여 소비하는 부채 의존형 성장 모델은 금융위기로 무너져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정부가 재정자극 정책을 사용하여 경기부양을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랬더니 보수는 성장이 아니라 균형재정과 긴축을 들고 나왔다. 증세 대신에 노동자와 국민들의 내핍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진보 세력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자극정책과 사회안전망 강화로 성장 동력을 유지하고 이를 위해 증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보수는 긴축 협약을 하자고 하고, 진보는 성장협약을 하자는 것이 지금의 유럽이 아닌가. 공화당은 재정삭감을 주장하고 민주당은 버핏세를 주장하는 것이 지금의 미국이다.

한국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경선에 나섰던 손학규 전의원이 ‘진보적 성장론’을 그리고 문재인 대선 후보가 ‘포용적 성장론’을 들고 나오면서 민주 통합당 쪽에서 새로운 성장전략에 불을 지폈다. 새사연도 대선정책을 담은 단행본 『리셋 코리아』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대안적 성장론으로 ‘소득주도 성장전략(income-led growth)'를 강력하게 제시했다. 이는 이미 세계 노동기구(ILO)와 국제연합(UN)의 각종 포럼에서 대안적 성장전략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임금주도 성장(Wage-led growth)'을 한국에 선도적으로 적용한 시도였다.

더구나 하반기로 들어오면서 한국경제의 위축은 더 이상이 가정이 아니라 확정적 현실로 되기 시작했다. 한국은행도 올해 경제 성장률을 2.4%로 대폭 낮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당장의 위기관리 대책과 함께, 침체로부터 어떻게 탈출하고 어떻게 회복 동력을 만들 것인지에 대해 대선후보들은 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침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는 지금까지 시종 성장론에 대해 말문을 닫고 있었다. 오직 내용이 모호한 ‘박근혜 표 경제 민주화’만 반복할 뿐이었다. 성장론이 블랙박스로 남은 가운데 일자리 정책도 덩달아 블랙박스였다. 그래서 기다렸다. ‘창조 경제론’이라 이름붙인 일자리 정책과 성장정책의 내용을 보기 위하여.

성장론? 잘해야 10년 전 IT산업 정책

드디어 10월 18일 박근혜 캠프가 ‘창조경제 스마트 뉴딜’이라는 엄청난 개념 조합으로 작명한 성장정책, 일자리 정책을 발표했다. “상상력과 창의성, 과학기술에 기반한 경제운영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하고, 새로운 시장,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가는 정책”이 창조경제론이라고 박근혜 후보는 정의했다. 그리고 이어 ‘창조경제 구현을 위한 7대 전략’을 제시했다.

주요 내용

1

국민행복 기술을 전 산업에 적용하여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 창출

(스마트 뉴딜 정책 시행)

2

소프트웨어 산업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육성

3

정보의 개방과 공유를 통해 창조 정부 만들기

4

창업국가 코리아를 만들기, 대학을 창업기지로 만들기

5

스펙초월 채용시스템 만들기(정부가 인재양성)

6

청년들의 해외취업기회 확대(K-move 시작)

7

미래 창조 과학부 신설

그런데 뭔가? 어디에 성장전략이 있는가? 어디에 위기 탈출전략이 있는가? 7대 과제 중에 앞의 4가지는 IT산업에 대한 일상적인 정부지원 전략, 즉 IT산업 정책이고, 5,6번 2개는 이명박 정부시기에도 등장했던 청년 취업대책 메뉴들의 일부이다. 마지막 ‘미래 창조 과학부 신설’이야 모든 후보들이 얘기하는 정보통신부 부활과 이름과 다르지 맥락은 같은 얘기니 차별될 것도 없다....

* 보고서 전문을 보시려면 위의 제목을 누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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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4     김우재/미국 UCSF 박사후연구원

정치는 한 국가의 미래가 걸린 일이며, 따라서 정치인들은 자신의 학연, 지연, 혈연과 같은 사리사욕을 초월해 장기적인 비전과 철학을 가지고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은 상식이다. 이러한 상식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야 국민 누구라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이고,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혹은 여당/야당의 아집과 독선 때문에, 혹은 반대를 위한 반대 때문에 저 당연한 상식의 이상(理想)이 추구될 수 없다고 한탄하는 이들도 많다. 그 한탄은 주로 정치인들에게서 나온다.


이러한 문제야 정치개혁으로부터 풀어야 하는 것일 테지만, 여야를 막론하고 한 목소리를 모아 별다른 충돌과 갈등도 없이 척척 동의를 하는 분야가 있으니, 그것이 과학기술정책이다. 충돌과 갈등이 없다는 사실이 첫째, 국가의 장래에 있어 과학기술이 정말 중요하다는 인식의 반영인 것인지, 둘째, 과학기술정책은 별반 새로울 것도 없고, 단기간에 민심을 얻어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에는 그다지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인식의 반영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황우석 교수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갈 무렵, 여야는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야단법석을 떨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부를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원천기술이 확보되는 초유의 사건이라며 언론도 야단법석을 떨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단 한번 과학기술이 전 국민의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던 그 사태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는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노벨상 수상이 다가올 때마다 정치인들과 국민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수상자들의 면면을 주의 깊게 살핀다. 지난해에는 일본에서 노벨상이 또 터져 나와 전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언론과 정치인들은 또다시 같은 레파토리의 기사와 선동을 반복했다. 노벨상 수상이 축구 국가대표 한일전도 아닐 텐데, 온 나라는 마치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일본에게 지기라도 한 듯 침울해졌었다. 또다시 노벨상 수상자들이 국내를 방문하고, 그들의 인터뷰에서는 항상 기초과학을 튼튼히 해야만 노벨상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이 들린다. 외국의 과학자들이 한 말은 언제나 권위가 있어서, 다시금 국내의 언론은 기초과학 육성만이 노벨상을 위한 길이라며 야단이다. 문제는 기초과학 육성을 위한 정책과 비전과 철학일 텐데도, 기초과학을 육성하면 당장이라도 노벨상을 탈 것만 같은 분위기로 여론을 선동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라는 총론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낼 것인지에 대한 각론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조급해하지 않고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조급함에 몸서리치며 근시안적인 정책들만을 남발하다간 한국의 노벨과학상은 다시금 물 건너갈 가능성이 크다.


기초과학에 대한 강조의 여론이 대통령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인지, 이명박 대통령은 '2011년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기술인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과학기술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을 있는 한껏 보여주었다. 특히 기초과학을 전공한 학생들이 모두 의대나 법대로 편입하는 사태에 대해 걱정하면서, 대통령은 "기초과학을 해도 존경을 받으면서 또 살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①라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대통령은 기초과학에 대한 홀대가 자신을 포함한 기성세대의 잘못인 것 같다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셨다고 한다. 산타야나의 말처럼, 모든 진보적인 움직임은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대통령의 이러한 반성과 성찰은 고무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총론이 아니라 각론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재래시장에서 자신의 경험을 빗대 과학적 합리성의 중요성을 설파했다고 한다. 재래시장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이야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서민경제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는 판단이 들 때마다 대통령은 재래시장을 찾아 상인들을 위로해왔다. 때로는 그 곳에 서서 '오뎅'을 먹는 서민적인 모습을 연출하며 서민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치열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모습에 감격한 서민들 중 일부는 대통령의 친서민적인 모습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당장의 어려움을 잊어버렸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서민의 경제를 위협하는 구조적인 문제들, 영세상인들을 위협하는 대기업의 횡포와, 뿌리까지 썩어 있는 부동산 문제, 저출산과 관련된 양육비 문제와 학벌사회를 고착화하는 사교육 시장의 문제가 오뎅을 먹는 퍼포먼스로 풀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기초과학 정책도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인들의 신년하례식에 참석해서 그들에게 "하나된 마음으로 과학기술계가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국운 융성을 위해 과학기술인들이 다른 분야 보다 앞장서 달라"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장은 과학기술인들의 마음을 달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정책과 비전, 그리고 철학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오뎅 퍼포먼스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예를 들어, 여전히 대통령의 기초과학에 대한 사고가 "과학기술계도 세계 1등이 나올 수 있고 이제 그렇게 도전해야 한다"라는 자유경쟁시장 논리의 판박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러한 신년하례식 퍼포먼스 이후에 쏟아져 나온 교과부의 정책이라는 것이, '글로벌 박사 펠로십'이라는 명목으로 노벨상 수상을 위해  우수 대학원생 300명에게 2년 동안 6,000만원을 지급하는 수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② 어떻게 한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 그것도 이제 겨우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이 늘어가는 시점에 터져 나온 정책이 노벨상 따위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는가? 노벨상 수상이 국가를 위한 일인가? 이런 방식으로 단지 '노벨상'을 위해 한 국가의 장래를 결정하는 과학기술정책을 입안하는 국가가 대한민국 이외에 어디에 있는가? 다시 한번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총론이 아니라 각론이다. 돈을 무차별적으로 쏟아 붇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쏟아 붇느냐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전문가들과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정책을 짜는, 그런 각론이 중요한 것이다.


이공계 위기가 사회에 등장했을 때에 정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이공계 국가장학생 제도였고, 그 학생들은 지금 대부분 의대나 법대에 진학해 있다. 한 국가의 정책은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선심성 정책이나 퍼포먼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트위터의 한 지인은 저런 정책이라도 제대로 하려면 각각의 숫자에 '0'을 하나씩 더 붙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3000명에게 20년 동안 6억을 지원하는 제도. 노벨상을 목표로 하는 저열한 발상의 정책이라 해도, 이 정도의 장기적인 안목을 반영한 철학을 보여준다면 참 좋겠다.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은 오뎅 퍼포먼스 같은 것으로 쉽게 무마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특히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노벨상에 대한 전국민적인 바람이 들끓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그런 방식으로는 그 노벨상조차 영원히 갖지 못하게 될지 모른다. 노벨과학상이 등장한다 해도 그것은 국내의 지원을 받아 국내의 인력으로 해낸 일이 아니라, 한 과학자가 외국에서 외국의 지원으로 연구했던 일쯤이 될 것이고, 그러한 노벨상은 결코 대한민국의 것이 아니다. 그 과학자가 해당 연구를 수행했던 국가의 것으로 인식되어야 마땅하다.


과학기술인들의 신년하례식에 참가한 대통령에게 비난을 쏟아 부을 생각은 없다. 문제는 그것이 오뎅 퍼포먼스를 넘어서는 장기적인 정책으로 이어지느냐에 있을 테다. 제발, 이제 한국에서 선동과 퍼포먼스만으로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가 사라지길 바란다. 그 선동에 국민들은 농락당해 왔다.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숙고해볼 필요도 있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노벨상을 위한 '총력전'이 아니라 '뿌리깊은 반성'이 필요한 이유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오뎅'이 아니라 '과학'이 필요한 이유다.


①이명박 "국운 융성 위해 '과학기술계 총력전' 펼쳐야", 대덕넷, 2011.01.09.
②국고로 ‘노벨상 후보자’ 키운다, 경향신문, 2011.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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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과 경제발전, 그리고 박정희의 유산
과학기술의 자율성을 위한 정책적 선택
2010-04-26 ㅣ 김우재

이때 경제개발은 과학기술 중심지대의 이동을 정당화해주는 핵심 이데올로기로 쓰였다.
-김근배, <과학기술입국의 해부도>중에서

과학의 이중적 의미

현대에 이르러 과학과 기술은 구분하기 어려운 용어가 되었다. 영어로는 'Science and Technology', 접속사로 분명히 구분되어 있는 말이 대한민국에서는 '과학기술'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진다. 과학과 기술, 혹은 과학과 공학은 상호작용 속에서 발전하는 공동운명체다.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문화 속에는 '과학'이라는 단어에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가 공존한다.

먼저 우리는 과학에서 아인슈타인이나 다윈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해마다 노벨상 시상식이 다가오면 국가적 자존심을 걸고 저마다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에겐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가 없다. 하지만 국가의 존망을 걸고 노벨상을 타야만 한다. 이미 노벨상은 국가적 강박관념이다.

황우석 사태를 거치면서 분명해진 사실 중 하나는, 과학에 대한 대중과 언론 그리고 정부의 인식이다. 우리는 과학을 일종의 국가경쟁력으로 사고한다.
원천기술이라는 용어가 일상화 되었고, 새튼 교수는 산업스파이로 몰렸다. 황우석 사건이 터지기 전에 언론은 줄기세포로 엄청난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다는 기사를 연일 터뜨렸고, 친히 대통령과 국무총리,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가 그의 연구실을 방문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논문조작으로 물러나는 황우석 박사의 앞길에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흩뿌렸다. 그는 사기꾼으로 밝혀졌지만, 지지자들의 입장에선 오히려 그가 사기를 당한 셈이었다. 국가경쟁력은 후퇴했다. 21세기 국가발전의 보고, 줄기세포는 황우석 박사의 추락과 함께 태평양 너머로 떠나갔다.

박정희의 유산

박정희의 유산 중 진보세력이 맞닥뜨려야 하는 가장 큰 과제는 '경제개발'에 관한 그의 업적이다.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먹고 사는 것이 당면과제였던 전후의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시대를 거치며 먹고 살만해졌다. 일본과의 비밀협약으로 받은 자금과 미국의 원조라는 변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변수를 고려해서 더 나은 역사가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해도, 상관관계에 불과할 뿐인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일반 대중들에게 여전히 인과관계로 인식될 뿐이다. 무능한 좌파정부라는 말에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가 어려있다. 잃어버린 10년을 말할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박정희 시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의 국교는 불교도, 유교도 기독교도 아닌 자본주의가 되었다. 돈을 버는 것만이 신앙이 되었고, 이는 그 어느 종교도 감히 넘보지 못할 강력한 신념체계로 굳었다. 대한민국에서 자본주의는 종교다.

박정희의 유산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1966년 미국의 원조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립하면서 적극적으로 과학기술을 정치에 동원했다. 그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정책의 기저에는 박정희 시대의 철학이 그대로 배어 있다. 정치적으로 과학기술을 이용했던 박정희는, 국민들에게 "과학기술 발전 없이는 경제성장이나 근대화가 이룩될 수 없다"라는 인식을 심는데 성공했다. 조선 말기의 개화사상이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을 업고 재현된 것이다. 과학기술은 박정희 시대에 자본주의와 한 몸이 된다. 자본이 투입되면 반드시 이윤이 창출되어야 한다. 과학과 기술을 분리해서 생각해보면 완전히 오류인 이런 생각이 여전히 우리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박정희 시대는 한마디로 '정치권력의 전성기'였다. 김근배에 따르면, 박정희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과학기술 제도(과학기술의 내적 측면), 과학기술과 사회의 연결, 대중의 과학기술적 동원(과학기술의 외적 측면) 등의 한가운데 정치권력이 웅크리고 있었"으며, 당시의 정치권력은 "과학기술을 특정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뇌이자 과학기술의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을 독특하게 연결하는 신경망"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과학은 경제적으로 번역되었다.

초창기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대부분의 과학기술정책은 이승만 정권의 것을 계승한 것이었다. 1965년까지 박정희의 연설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당시 박정희 최대의 관심사는 경제발전이었다. 과학기술에 관한 5개년 계획은 '기술진흥5개년계획'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과학'은 경제적 유용성이 없는 순수학문분야로 여겨졌다. 애초에 박정희의 관심사는 '과학기술'이 아니었다. 경제적 유용성과 맞닿아 있는 '기술개발'이 정부의 최대현안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흐름은 박정희가 1965년 중순 미국을 방문하면서 완전히 뒤바뀐다.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쟁 참전과 한일수교의 대가로 연구소 설립을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박정희는 존슨의 제안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로 작정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연구소 설립에 관한 많은 과학기술자들의 성토가 있었지만 박정희는 무시했었다. 그리고 금속공학자인 최형섭을 주축으로 한 '파이클럽'이 정치권력과 손을 잡는다. 이제 박정희의 과학기술 정책은 '기술'에서 '과학기술'로 탈바꿈한다. 그는 담화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미국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욱 큰 규모의 KIST를 설립한다. 그리고 박정희는 과학기술 대통령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유산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사로잡고 있다.

과학과 기술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계절이 오면, 대한민국은 들썩거린다. 올해는 그 명단에 한국 과학자의 이름이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 아니다. 그냥 때가 되었기 때문에 뭔가 말을 해야 하는 것 뿐이다. 그런 기대를 하기엔 갈 길이 너무나 멀다. '노벨상에 근접한 한국인 과학자'라는 명단도 해마다 빠지지 않는 단골주제다. 하지만 선정기준이 불투명하고 폐쇄적인 노벨상 선정위원회의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과연 대한민국이 노벨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우리는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대한민국의 과학자들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 없이 노벨상은 없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리 노벨상이 기초적인 연구가 실용적인 결과로 연결되었을 때 시상된다고 해도, 기초연구와 실용연구의 상호관계는 그 둘을 고루 발전시킨 국가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엔 그 반쪽만이 존재한다. 반도체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기술계의 발전은 눈부시다.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계열사 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삼성전자의 결산보고서다. 아이폰의 등장으로 이마저도 흔들리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미흡했다는 탓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평가하기엔 구조적 상황이 열악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말하기 전에, 과학계는 과거의 유산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에서 하나라도 배운 것이 있다면, 박정희 시대로부터 정치적 민주화를 쟁취한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은 과학기술행정의 모습을 직시해야만 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기대할 수 없다. 경제개발이라는 이념 속에 과학기술이 갇혀 있는 한, 그 무엇도 변하지 않는다.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 민족은 망한다고 했다. 거창하게 민족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과학기술계는 과거를 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우리의 과학기술은 여전히 박정희 시대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과학기술의 자율성

파이어아벤트는 그의 책 <방법에의 도전>에서 서구사회에서 정교분리가 진행되었던 것처럼 과학도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의 근원에는 그의 아나키즘적 정치철학이 녹아 있다. 비록 과학에 단 하나의 방법론은 없다는 주장을 했던 그였지만, 과학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권력에 맞서는 아나키스트의 입장에서 과학을 정치와 동등한 위치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파이어아벤트의 주장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현실조건 속에서, 나아가 과학기술이 정부의 지원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현대에 이르러 낭만주의적인 견해는 조금 양보해도 좋다. 우리가 박정희 시대를 반성해야 한다는 것은 과학을 정치와 동등한 반열에 올려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다른 선진국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기술자들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유산은 그런 것이다. 과학기술의 목표와 방향은 정부의 의지대로만 발전한다. 과학기술자들의 의견이 발 디딜 곳은 없다.

박정희와 철학을 공유하던 최형섭에 의해 과학기술정책이 짜여지던 1960년대 중반 이전에 이미 그런 목소리가 있었다. 적어도 과학이라는 학문 안에서 진지하게 자신의 위치를 고민해본 학자라면, 과학이 정치에 이끌려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직감적으로 알 수 있게 된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해 이미 과학자들 사이에는 과학과 정치에 관한 심각한 고민이 공유되고 있었다. 나아가 과학자들은 천성적으로 반항적이다. 예를 들어 서울대학교의 권영대 교수나, 동물학자 강영선을 비롯한 일본유학파 과학자들은 경제개발의 이념으로부터 독립적인 학문적 분위기의 '종합과학연구소'의 설립을 주장했었다. KIST가 설립된 이후에도 많은 이공계 대학 교수들은 대학과의 긴밀한 교류 및 기초과학 연구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었다. 그런 목소리들은 박정희의 비호 속에 모조리 묻혀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대학과 연구소의 학자들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외치고 있고, 경제논리에서 조금 자유로운 자율적 연구를 지원하라고 호소한다. 중장기적 안목을 가진 프로젝트를 더 늘리고, 쓸데 없는 분기별 연구보고서로 연구자들을 혹사시키지 말라는 말은 이제 연구자들 사이에선 일종의 농담이 되어버렸다. 현장의 연구자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노벨상을 위해서 국가의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모르는 것은 과학기술정책을 여전히 박정희 시대의 정신 속에서 기획하고 있는 정부관계자들 뿐이다.

노벨상인가 경제발전인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는 단기간에 실용적인 연구로 이어지지 않는다. 기초과학이 발전해야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이 발전한다는 단선적 논리는 신화에 불과하다. 산업혁명이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것이라는 착각은 2차 산업혁명, 그것도 일부에 국한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기술의 발전은 자체동력을 지니고 있다. 조지 바살라는 <기술의 진화>에서 이러한 기술과 과학의 상호작용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초대형가속기 프로젝트가 실패한 것은 현재에도 이러한 분석이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로 박정희 시대에도 과학기술은 경제개발에 실질적으로 크게 기여하지 않았다. 그 효과는 몇 십 년 후에나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근배의 말처럼 오히려 "경제개발이 과학기술을 특정 방향으로 관심 기울이고 진흥시키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따라서 만약 아이폰과 같은 돈벌이를 원하는 것이라면 국가는 기초과학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 대한민국의 공학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다. 청년실업에도 불구하고 공학계열 졸업생의 진로는 순탄한 편이다. 물론 보수도 의학계열을 제외하곤 상위에 속한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견인차는 공학기술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네이쳐와 사이언스에 한국과학자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실제로 그런 논문이 산업과 연계되는 경우는 드물다. 연계가 된다고 해도 아마 수십 년이 지난 후에나 가능할 일이다. 어쩌면 과학자들은 공학자들에게 기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과학기술에 대한 정책을 입안하는 정부는 결정해야 한다. 노벨상인가 아니면 경제발전인가. 박정희 시대의 유산을 정리하는 철학적 성찰은 기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자들은 그러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되었다. 만약 경제발전을 원한다면 아이폰의 성공을 배우면 될 일이다. 아이폰은 엄청난 과학적 성과물이라기 보다는 나와 있는 기술들에 철학과 아이디어를 접목한 상품이다.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내고 싶은 정부는 아이폰을 과학으로 포장하며 투자를 결정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노벨상을 원하는 정부라면 문제는 조금 복잡해진다. 우선 대통령은 자신의 집권 기간 내에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구조를 뜯어고치고 장기적인 투자를 집행하는 작업이 성과를 맺는 데에만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그리고 집권 기간 내에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정부가 이런 투자를 하겠는가. 노벨상은 과감히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과학이 없어도 대한민국은 그럭저럭 잘 먹고 잘살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 김우재 박사는 현재 UCSF 박사후 과정에 있으며, 인터넷과학신문 <사이언스타임즈>에 '미르(miR)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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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