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02정태인/새사연 원장

나이가 들다 보니 해가 바뀔 때 뭔가 희망의 메시지를 써야 하는 처지가 됐다. 유장한 시간의 흐름을 툭툭 끊는 것도 마뜩찮은데 그 단절에 의미까지 부여해야 하다니. 요 몇 해동안의 곤혹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된 건 지난 열흘, 8개월간 굶은 술을 한꺼번에 마셨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어이하랴. 세월이 먹여 준 나이를 거부할 방도는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패배했다. 새사연이 지난 2년간 줄기차게 쓴 것처럼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현재진행형이고 앙시앵레짐의 종말을 고했지만 새 시대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하긴 구체제란 그리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1929년 대공황이 발발한 후, 그 원인과 해법을 제시했다고 인정하는 케인즈의 "일반이론"은 1936년에나 출간되었고 역사적 흐름을 추적한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은 1944년에나 세상에 나왔다. 현실에서도 루즈벨트가 '뉴딜'을 내 건 시점은 1933년이었으니 이제 4년이 막 지난 시점의 한국에서 극적인 전기가 열릴 것을 기대한 게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 아무리 현실이 더딜지라도 시간은 흐르고 새 시대는 열린다. 그 방향 역시 분명하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개별 이익이 맞부딪히는 사회적 딜레마를 시장이 아름답게 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은 붕괴했다. 그런 세상은 수학의 가정 속에나 존재하며 인간은 서로 협동할 때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최근 번역된 노박의 "초협력자"는 인간이라는 미미한 생물체를 강력한 종으로 만든 것은 바로 협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지난 30년은 진화의 법칙을 무시한 시대였다. 하이예크의 '치명적 오류'는 오히려 시장만능론에 적용되어야 한다. 아니 백보 양보하더라도 국가사회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누가, 어느 나라가 더 빨리 새 시대를 여느냐에 운명이 갈린다. 아니 '기후온난화'라는 전 인류가 겪고 있는 '공유지의 비극'은 전 세계가 협동할 때만 해결할 수 있다. 내 옆의 '모르는 남'을 믿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새 시대는 열린다. 물론 신뢰는 목숨을 건 도박일지도 모른다. 배반당할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남을 불신하고 오로지 경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더 확실하게 세상은 붕괴한다.

어떻게 해야 서로를 믿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새사연이 앞으로 연구할 주제 중 하나에 틀림없다. 추상적인 방향을 정책과 제도로 만들고 어느 덧 사회규범이 되도록 하는 것이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이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방향이 확실하다면 새로운 사회도 열릴 것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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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25정태인/새사연 원장

 

착한 경제학의 독자들은 기후변화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걸린,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집단행동의 논리’도 강력하게 작동한다. 나 홀로 아무리 애써봐도 아무 소용 없고 우리나라만 이산화탄소를 줄여봐야 중국이 지금처럼 석탄과 석유를 땐다면 비극을 막을 수 없다. 하여 최근 작고한 오스트롬은 자신의 지론인 다중심접근(polycentric approach)이 기후변화 문제에도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개인, 지역공동체, 국가, 국제적 협력이라는 각 차원의 중심이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태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개혁은 시스템 전체를 대상으로 대규모로 일어나야 하며, 1·2차 네트워크혁신(철도와 IT 네트워크)에 버금가는 에너지 네트워크의 혁신이 필요하니 개혁의 심도 역시 깊을 수밖에 없다. 무엇을 해야 할까?
 
첫째, 1차 에너지원의 이산화탄소 함유량에 따라 탄소세를 부과한다. 세율을 매기는 원칙은 우선 배기구혁신(부가혁신)이 아니라 엔진혁신(돌파혁신)이 일어날 정도로 높아야 하고, 동시에 제본스역설(기술혁신에 의해 가격이 낮아져서 오히려 소비가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어야 한다. 또한 ‘녹색역설’(green paradox·미래의 가격 상승을 예상하여 현재의 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점진적 증가가 아니라 단번에 인상해야 한다.

정밀한 계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긴 하지만 평균 석유 1ℓ당 70∼80원의 세금만 추가해도 8조원 정도의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 탄소세 외에도 교통혼잡세, 매립세 등 생태계를 파괴하는 모든 요인에 매기는 세금을 생태세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핵과 화석연료에너지 공급을 줄인다. 현재 수명이 다한 핵발전소는 폐쇄하고 추가 원전 건설은 중지한다. 재생에너지 생산의 확대에 비례해서 핵발전의 비중도 줄이는 속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핵에너지가 청정에너지로 둔갑한 것은 지난 호에 얘기한 것처럼 미래의 위험을 가볍게 여긴 결과로, 다시 말해서 현재의 비용을 미래세대에게 넘긴 결과일 뿐이다.
 
이런 변화는 중앙집중식 에너지체제에서 분산형 에너지체제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발전차액지원제(FIT·재생가능에너지 생산비용이 현재의 전기요금을 상회할 경우 그 차액에 대해 보조금을 지원)와 재생에너지 의무할당제(RPS)를 결합하여 재생가능에너지 비중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분산된 에너지원을 스마트그리드(똘똘한 전력망)로 연결해야 한다. 스마트그리드는 네트워크이므로 공공투자가 집중되어야 하며, 각 기업은 네트워크와의 접속에서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할 수 있다.
 
셋째, 현재 대기업 중심의 혁신 보조금을 중소기업으로 돌린다. 앞으로 예상되는 장기침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민간투자의 확대가 필수적인데, 이미 충분히 현금을 지니고 있는 대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면 이런 투자가 상쇄되는 결과를 낳는다. 탄소세 등에 의한 비용 상승과 혁신에 의한 수요 증가는 그 자체로 충분한 투자유인이 된다. 녹색혁신은 그 자체로 불황타개책이다.
 
넷째, 중국이 대대적인 ‘에너지혁신’을 내건 것도 한국이 더 이상 녹색혁신을 미룰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하지만 경쟁만 할 것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그리고 아세안)에 에너지/환경 협력을 제안해야 한다. 탄소배출 목표와 방법에 관한 합의, 사막화와 황사와 같은 현안 해결, 스마트그리드 표준에 관한 협력 등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정부와 개인은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한편 탄소함유량이 낮은 제품(국가는 모든 상품에 탄소함유량을 표시하는 제도를 도입한다)을 선택함으로써 기업에 압력을 가할 수 있고 지역공동체는 예컨대 태양광협동조합에 의해 재생에너지 생산을 늘리는 식으로 다양한 에너지원을 개발할 수 있다.
 
생태문제는 거대한 사회적 딜레마이고 착한 경제학은 신뢰와 협동을 그 해법으로 내놓았다. 적절한 정책은 이런 협동을 촉진할 것이다. 대처의 용어를 원용하자면 ‘다른 길은 없다’. 이번 대선은 생태문제를 신뢰와 협동으로 풀 지도자가 누구인지 선택하는 일이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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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3정태인/새사연 원장

 

해결 방향은 명확하다. 서로의 생존을 보장하는 해법에 합의하고 보수를 확정해서 사슴사냥 게임으로 바꾸는 것, 그리고 서로를 신뢰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지난번에 현재 통합진보당은 치킨게임이라는 사회적 딜레마에 빠졌다고 말했다. 물론 복잡다단한 현실을 이렇게 간단한 게임으로 파악할 때 언제나 주의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이다. 예컨대 현실에서는 두 당사자(정파)가 마음 속에 서로 다른 보수(報酬)표를 품고 있기 일쑤다. 하지만 양쪽 당사자 모두 ‘지금 밀리면 끝’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뜻을 고집한다는 점, 그리고 지금처럼 나가면 진보 전체가 망할 것이라는 점에서는 치킨게임 상황임에 틀림없다.

<착한 경제학>을 꼼꼼히 읽은 독자라면 이번 사태에서 ‘공유지의 비극’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다. 지금 각 정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진보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주장해도 마찬가지다) 수십년 동안 진보가 목숨을 걸고 쌓아온 대중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그런 신뢰야말로 우리 모두의 공유자원이다. 그렇다면 노박의 ‘인간 협동의 다섯 가지 규칙’이나 오스트롬의 공유지 비극 해결의 7가지 원칙은 이 사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배운 걸 당장 써먹어보자!

노박의 ‘규칙’, 그리고 오스트롬의 ‘공동체적 해법’도 단순화하면 결국 ‘죄수의 딜레마’나 ‘치킨게임’을 ‘사슴사냥 게임(stag hunt game, 또는 assurance game)’으로 바꾸는 방안들이다. 옛날 사람들이나 심지어 동물들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협동했던 사례들을 잘 관찰해보면 나 홀로 살려고 해서는 풀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 가능한 문제로 바꿔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스트롬의 공유자원에 관한 방대한 연구도 결국 사람들이 공유 저수지나 삼림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지혜를 정리한 것인데, 이 역시 게임으로 정리하면 사슴사냥 게임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슴사냥 게임의 보수표는 위와 같다. 이 게임의 균형은 (협동, 협동)=(4, 4), 그리고 (배신, 배신)=(2, 2) 두 개다. 즉 상대가 협동한다면 나도 협동하는 게 낫고 상대가 배신한다면 나도 배신하는 게 답이다. 죄수의 딜레마에서는 상대가 협동할 때 그걸 이용해서 이익을 취하는 게 이익이지만(모두 사교육을 시키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애만 사교육시키면 등수가 왕창 올라갈 것이다), 사슴사냥 게임 상황이라면 나도 협동을 하는 게 더 낫다(우리 모두 사교육을 하지 않으면 돈도 굳고 애들도 행복해지며 그래도 공정한 게임이 가까워질 것이다).

기실 노박의 ‘규칙’은 혈연관계일 때, 반복해서 만날 때, 서로를 잘 알 때, 그리고 친한 사람끼리 모일 때 서로 협동하는 것이 모두에게 더 이익이 되는 상황, 즉 보수가 바뀌어서 이제 사슴사냥 게임이 된다는 얘기다. 드디어 죄수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상대가 협동하리라 믿지 못하는 경우에는 사슴사냥 게임 상황에서도 (배신, 배신)을 택하게 된다.

통합진보당같이 서로를 극도로 믿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결국 자신의 이익마저 저버리는 (그러므로 균형이 아닌) 비극을 택하게 된다. 해결 방향은 명확하다. 서로의 생존을 보장하는 해법에 합의하고 보수를 확정해서 사슴사냥 게임으로 바꾸는 것, 그리고 서로를 신뢰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한쪽이 상당한 손해를 보는 합의에 이르더라도 둘 다 망하는 (배신, 배신)보다는 낫다. 합의안을 확정하고, 그 합의를 어길 경우 강력하게 응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밀실이 아니라 광장에서에서 합의안을 만들면 대중이 응징하게 될 것이므로 가장 강력하다. 그럼 난마 같은 현재 상황에서 구체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 ‘퇴행적 정파주의에서 협동의 정파주의로’가 내 나름의 답이다. 독자들도 이 글이 제시한 방향에 따라 묘책을 찾아내기 바란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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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02 / 17 정태인/새사연 원장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론' (3)
보고서 원문을 보시려면 위 제목을 눌러 주시면 됩니다.

이 글은 새사연의 정태인 원장이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진행한 ‘정태인의 경제학 과외 2부 : 사회경제, 공공경제, 생태경제’ 강연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 딜레마 속에 살고 있다

시장경제는 인간은 이기적이고, 그 이기심을 따르면 시장에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맞지 않는 시장실패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시장실패는 개인의 이기심이 사회 전체의 효율적 자원배분을 왜곡시켜서 발생한다. 개인의 이익 추구가 전체의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시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국한되었던 시장실패를 사회 전 영역으로 확장시킨 것이 사회적 딜레마이다. 거꾸로 말하면 사회적 딜레마의 일부분이 시장실패이다.

사회적 딜레마란 개인의 합리성에 기초한 행동이 전체의 합리성과 일치하지 않는 상황이다. 즉, 개인이 이기적으로 행동해서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가 바로 사회적 딜레마라고 한다. 그런데 개인과 사회가 충돌하는 일은 인류 역사상 계속해서 발생했던 문제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일상의 대부분이 사회적 딜레마이다. 오히려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이 일치되는 것이 드문 경우이다.

요즘은 사회적 딜레마가 대학 논술문제에도 많이 나온다. 실제 대입 논술에 출제되었던 것으로 중국 고전 ‘여씨춘추’에 나오는 석저의 이야기가 있다. 석저는 형나라 소왕 때 치안관이었다. 어느 날 길에서 살인 사건을 조사하던 중 범인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체포하는 것은 아들로서 할 일이 못되고, 그렇다고 범인을 놓아준다면 치안관의 역할을 못하고 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결국 갈등하던 석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더 일상적이고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학교나 회사에서 이루어지는 팀 작업을 생각하면 된다. 팀 단위로 일을 하고, 성과를 내고, 보수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팀 내에 일을 하지 않고 뺀질거리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모두가 열심히 일해서 좋은 성과를 내면 그 사람은 거저 이익을 얻는 셈이다. 그 사람이 밉다고 모두 똑같이 일을 안 하면 그 팀은 망한다. 이 역시 사회적 딜레마이다.

사회적 딜레마의 사례 1 : 죄수의 딜레마

사회적 딜레마는 경제학뿐 아니라 정치학, 사회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에서 흥미로운 주제로 연구되었다. 사회적 딜레마의 대표적 사례로 죄수의 딜레마, 공유지의 비극, 공공재 게임, 집단행동의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는 가장 유명한 사례이다. 두 명의 범인이 잡혀왔는데 물증이 없다. 범인들이 묵비권을 행사하면 6개월 형을 산다. 검사는 자백을 받기 위해 두 범인을 분리시켜놓고 자백하는 사람은 풀어주겠다고 제안한다. 대신에 자백하지 않은 사람은 10년 형을 산다. 만약 두 범인이 모두 자백하면 각각 5년 형을 산다.

이 경우 A와 B의 형량을 합한 것을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둘 다 자백하지 않는 것이 가장 이득이다. 하지만 A와 B는 둘 다 자백하는 가장 나쁜 결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자백 여부와 상관없이 내가 자백하는 쪽이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게임이론을 이용하여 뒤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사회적 딜레마의 사례 2 : 공유지의 비극

두 번째,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다. 1986년 미국의 생물학자 가렛 하딘(Garret Hardin)이 1968년  <사이언스(Science)>지에 발표한 짧은 논문 때문에 유명해졌다. 누구나 자유롭게 양에게 풀을 먹일 수 있는 공유지가 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최대한 많은 양을 풀어서 풀을 먹여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행동한다면 공유지는 금세 황폐화되고 양들은 굶어 죽는다. 즉, 공동체 모두가 사용하는 공유자원은 소유권이 없어서 과잉소비되고 고갈된다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 중 현재 우리 앞에 닥친 가장 큰 규모의 비극이 기후변화이다. 인간이 이기적으로 자기 이익만 추구하면서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이산화탄소를 마구 배출한다면 어떻게 될까? 환경이라는 공유지는 없어지고 인류는 절멸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만약 공유지의 비극이 실현되었다면 지구는 오래전에 망했어야 한다. 인류는 이미 공유지의 비극을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연구를 해서 2009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이 오스트롬(Elinor Ostrom)이다. 오스트롬은 정치학자인데 시장이나 정부의 개입만이 해결책이 아니라 공동체 내의 자치적 규율을 통해서 공유지가 효율적으로 관리되어 왔음을 보여주었다.

사회적 딜레마의 사례 3 : 공공재 게임

세 번째, 공공재 게임(Public Good Game)은 스위스 경제학자 에른스트 페르(Ernst Fehr)가 1990년대 실시한 재미있는 실험이다. 5명에게 5만원씩 나눠주고 공공계정에 기부하도록 한다. 공공계정에 기부한 돈은 3배로 커져서 다시 5명에게 고르게 분배된다. 누가 얼마를 기부했는지는 알려주지 공개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공공계정에 10만 원이 모였다면 30만원으로 커져서 1인당 6만원씩 돌려받게 된다.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5명 모두 5만 원씩 내서 그 3배에 해당하는 15만 원을 돌려받는 것이다.

이 때 나만 돈을 기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다른 4명이 공공계정에 5만 원씩 기부하면 총 20만 원, 이 돈은 60만 원이 되고 5명에게 각각 12만 원씩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나는 원래 갖고 있던 5만 원을 기부하지 않고 들고 있었으므로 총 17만 원을 얻게 된다. 내 이익을 생각한다면 기부하지 않는 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다들 자기 돈 5만 원만 들고 있을 수밖에 없다. 무임승차의 문제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만약 누가 얼마를 냈는지 공개하면 어떻게 될까? 돈을 적게 낸 사람을 응징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떻게 될까? 행동경제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응징이라는 제도를 도입하자 기부액이 늘어났다. 반대로 돈을 많이 낸 사람에게 보상을 해주는 제도를 도입했을 때도 기부액은 늘어났다.

사회적 딜레마의 사례 4 : 집단행동의 문제

네 번째, 집단행동의 문제는 경제학자 1965년 올손(Mancur Olson)의 <집단행동의 논리(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에서 정립되었다. 올손은 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무임승차의 유인이 증대한다고 보았다. 즉, 많은 사람이 관련되어 있을수록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흔히 드는 사례로 고장 난 공중전화는 굉장히 오랫동안 방치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공중전화를 고치기 위해서는 관리기관에 신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 나의 수고와 비용이 많이 든다. 반면 공중전화가 고쳐진다고 해서 나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크지 않다. 누가 나에게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중전화는 방치된다.

또 하나의 예로 투표장에서의 사표심리를 들 수 있다. 선거에서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면 투표를 하러 가지 않는다. 투표장에 가려면 비용이 들지만 내가 찍은 후보는 당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해봐야 안 될 것이라는 심리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해버리면 그 후보는 진짜로 당선되지 못한다. 그래서 여론조사가 무서운 거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그리고 인류 역사에는 수많은 사회적 딜레마가 존재하고 있다. 과거 중세시대에는 종교 혹은 절대왕정이 지시와 명령을 통해서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변하는 사회정치적 철학과 이념은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이 변화하는 것이기도 했다.이후 근대에 등장한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는 리바이어던(Leviathan)이라 부른 국가를 통해서, 흄(David Hume)과 루소(Jean Jacques Rousseau)는 사회계약을 통해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는 시장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우리는 시장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자본주의 이후를 꿈꿨던 맑스(Karl Marx)는 계급,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통해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해야 할까?

* 정리 :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4)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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