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 01 / 31 여경훈/새사연 연구원

새사연 2013년 회원 캠페인- “새사연과 함께하는 희망 북클럽”을 시작하면서

우려했던 신자유주의 보수정권의 집권 연장이 현실화되면서 우리 사회가 진보적 발전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힘들어 하는 다수 국민이 존재하는 한 변화에 대한 모색은 멈출 수 없으며 우리 사회의 진보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진보가 노력을 기울여온 보편 복지와 경제 민주화, 그리고 일자리를 의제로 하여 치러진 18대 대선임에도 진보가 패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수가 손쉽게 의제를 차용해도 아무런 차별화가 되지 않을 만큼 진보 정책의 폭과 깊이가 짧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진정 현실에서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의 삶과 생각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살아있는 진보 정책’을 모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평범한 생활인들과 손잡고 우리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추구해온 새사연은 진보 학습으로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할 것을 회원들과 시민들에게 제안합니다. 그 첫 출발점으로 새사연 연구원들이 각자 회원님들께 꼭 추천하고 싶은 책 한권씩을 선정하여 소개하고, 진보의 깊이를 위한 물음을 던지겠습니다.

아울러 이후에 회원님들이 추천하는 책, 새사연과 함께하는 독서 토론, 저자와의 대화 등을 다양하게 시도할 생각입니다. 회원님들의 관심과 참여 기대 하겠습니다.

 

<새사연 희망 북클럽 ⑥>『케인스: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가 』

-처음으로 케인즈를 읽다-

 

추천도서 6

케인스: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가

(로버트 스키델스키 지음, 고세훈 옮김

2009, 후마니타스)

지난 달 기대치 않은 실연을 경험한 후 한동안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왔다. 그런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다. 시대적 비극에 굴하지 않고 낙관적 미래를 그리며 최상의 행복과 성공적인 삶을 추구했던 케인즈. 경제학의 근본문제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라고 정의하였지만 정작 본인은 가장 확신에 찬 어조로 상대를 설득한 사람. 13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처음으로 ‘케인스’를 읽다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1970년 맥밀런 출판사와 계약을 맺은 후, 30여 년에 걸쳐 3부작 ‘케인스’ 전기를 완성하였다. 3부작의 제1권은 <희망의 좌절, 1883-1920>로 1983년에, 제2권은 <구원자로서의 경제학자, 1920-1937>로 1992년에, 그리고 제3권은 <영국을 위한 싸움, 1937-1946>으로 2000년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 3부작을 60%로 축약하여 새롭게 출간한 단행본, <케인즈: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인>이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초, 고세훈 교수의 4년여에 걸친 노고로 번역되었다. 축약된 번역본임에도 불구하고, 참고문헌 및 자료를 제외해도 134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러나 천 페이지가 넘는 그 방대한 양에도 불구하고 소설처럼 금방 읽힌다. 역사가로서 저자의 영웅사관에 입각한 대하소설식 전개 방식과 빼어난 문체와 더불어, 원문의 뜻을 정확히 옮기는데 심혈을 기울인 번역자의 깔끔하고 정확한 번역도 적지 않은 몫을 하였다.  

필자는 경제학, 그것도 비주류인 케인스 경제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케인스의 생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동성애, 도박, 발레리나 등 여기저기 들은 풍문을 제외하면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은 대선이 끝나고 정신적 ‘충격’을 받은 후, ‘힐링’의 일환으로 선택되었다. 연애에 상처를 받은 후 가장 흔한 치료법은 무언가 새로운 관심영역으로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지난 달 ‘일종의 실연’을 경험한 후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자연스레 멀리하면서 가장 쉬운 선택은 ‘책’이었다. 어떤 책을 고를 것인가 고민하다, 가급적 시대적 함의를 끌어낼 수 있고 고난의 시기를 헤쳐 나간 ‘인물’을 다룬 책을 고려하다 뜻하지 않게 거대한(?) 책을 읽게 되었다. 

케인즈는 지난 세기 가장 우울한 시대에 비극적으로 끌려 다니기보다는, 가장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며 최상의 행복과 성공적인 삶을 추구했던 사람, 경제학의 근본문제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라고 정의하지만 정작 본인은 가장 확신에 찬 어조로 상대를 설득한 존재였다.  

그는 “모차르트나 비트겐슈타인처럼 ‘신성한 바보’라는 의미의, 즉 한 쪽 면에서는 특출하지만 다른 모든 면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 천재”는 아니었다. 그는 수학과 경제학 전공자로서 훌륭한 업적을 세우지 못해 자책하는 삶을 사는 아버지의 학문적 희망 속에서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훈련받은 아들이었다. 흔히 케인스를 ‘팔방미인’에 비유하곤 한다. 주목할 만한 수학자나 통계학자는 아니었고, 변변한 경제학 학위 또한 없었으며, 자기만의 독특한 철학이나 사상을 전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책의 제목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케인스는 경제학 대가이면서 사회개혁 철학자이자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정치가였다.

통상 사람들이 전기를 읽는 목적은 서문에서 저자가 밝힌 것처럼, “무엇이 한 걸출한 인물의 성품과 업적을 형성했는가를 이해”하는 데도 있지만, 유명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세운 공적과 그들이 연루된 사건들에 관해 알고 싶고, 듣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개인들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영웅사관에 입각한 역사가이다. 따라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 등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 속에 케인스를 무대의 중심에 올려놓고 그의 일생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옮긴이 고세훈 교수는 역자 서문에서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무릎을 탁 칠 만큼 탁월한 추천사를 적어 놓았다. 

“이 책은 경제학 비전공자들에게 경제학적 사유에 눈을 뜨게 할 만큼 충분히 경제학적이며, 경제학자들에게 자신들의 학문적 지식·가정·방법론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인생관과 역사를 다시 한 번 성찰할 계기를 줄 정도로 충분히 교양적이다.” 

케인스는 “이성이 죽으면 괴물이 태어나”며,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것은 사악함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라고 경고한다. 또한 ‘무지’야말로 “현대의 주된 정치적·사회적 해악”의 뿌리라고 선언하면서 학문의 힘으로서 자신의 철학적 지향인 ‘선한 삶’을 추구하여 인류에게 이익을 안겨다주기 위해 고군분투한 지식인이었다.

20세기 경제학의 가장 위대한 설득가

그러나 케인스의 장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일반이론'이 세상에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용한 경제 이론이자 세상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으로 자리 잡은 것은 그의 대중적 글쓰기 방법과 사람을 끌어들이는 설득 능력이다. 그는 20세기 경제학에서 가장 위대한 설득가였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네 가지 점이 두드러진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공감이 가는 대목이기에 간추려 옮겨 본다. 

첫째, 그에게는 경제학을 상식에 연결시키고자 하는 욕구와 능력이 있었다. “경제 이론에 의한 결론과 상식에 의한 결론 사이”의 균열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실제로 그가 줄기차게 추구해 온 바였다. 고용은 총수요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을 때, 그는 “아무도 차를 사지 않는다면 차를 만드는 의미가 없다”는 자동차 노동자의 직관을 일반화하고 있었을 뿐이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일반인과 동떨어진 반직관적 이론들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진술하는 관행에 젖어 있었지만, 그는 일상 언어의 능란한 사용으로 대중에게 다가갔다. ‘저축의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1931년 한 방송의 예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보지요. 우리가 소득을 소비하지 않고, 모두 저축해야 한다면……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굶어 죽을 것입니다.” 

둘째, 그의 글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이를 이리저리 변명하든지 시장에 내버려 두라고 방관하고 있을 때, 그는 언제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구상을 들고 대중에게 다가갔다.

셋째, 그는 도덕적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세상은 “고도의 지성과 과학적 정책으로 무장한 가장 포용력 있고 사심 없는 정신”으로 구성된 정부의 의도적 행위를 통해 더 나아질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다. 진리를 말하기 위해 핵심적인 정부 직위를 포기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의 권위였다.   

경제학의 근본문제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있다 

스키델스키는 '케인스주의 경제학'과는 구별되는 '케인스의 경제학'의 진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케인스가 고전경제학의 비전과 결별한 것은 불확실성이 인간 행동에 미치는 효과를 명확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케인스 혁명’을 위해서 케인스 ‘일반이론’의 요지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는 제6부, ‘구원자로 나선 경제학자’에 잘 서술되어 있다. 

“단순하면서도 미묘하고, 모호하면서도 심오한” ‘일반이론’에서 케인스는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욕구보다는 내일에 대한 불안감을 감소시키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화폐는 교환의 효율적 매개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치의 저장”을 위해 창안된 노력의 결과로 발생했다. 즉 화폐는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소득을 소비하거나 투자하지 않고 그대로 보유하기 위해 고안해 낸 수단이다.

현금의 보유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노출을 줄이므로 불안감을 덜어준다. 즉 사람들은 언제나 화폐를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소비하거나 아니면 전혀 소비하지 않거나의 합리적 선택에 직면한다. 그러나 ‘돈에 대한 사랑’이라는 개인의 합리적 행위는 경제 전체에 유효수요 부족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불확실성은 기업가의 투자 활동에도 영향을 끼친다. “미래 수익을 추정할 수 있게 만드는 지식 기반이 극단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투자 결정에 있어 관습과 자신들의 '동물적 충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동물적 충동'은 외부 충격에 민감하여 불안정한 성격을 지닌다. 이는 “한 나라의 자본 발전이 카지노 활동의 부산물이 될 때, 그 일은 그르치기 십상”이라는 자본주의 윤리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소비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만 투자의 불안정성과 함께 경제도 불안정한 경기변동의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그는 “현대 세계의 경제적 삶을 괴롭히는 신뢰의 위기에 대한 유일한 급진적 처방”은 개인이 소비와 저축 간에 선택할 수 없게 하는 것”이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논란이 되고 있는 ‘투자의 사회화’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불확실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스키델스키의 지적처럼 경기변동을 ‘미세 조정’이 아니라, “안정화를 위한 제도 구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어야 할 것이다.  

케인스가 남긴 가장 유명한 말 가운데는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결국 위험한 것은 기득권이 아니라 사상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는 ‘일반이론’ 마지막 문장으로 동시대 주류경제학인 고전학파 경제학을 지칭한다. 이는 잘못된 지식 또한 무지처럼 모든 해악의 근원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금융위기, 긴축재정, 환율전쟁 등 2008년 이후 세계경제는 케인즈가 경고한 그 시대의 실수와 잘못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진정한 케인스 혁명이 현실에서 구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30여년 세계를 괴롭혔던 신자유주의가 금융위기로 휘청거렸지만 여전히 강고한 기득권과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있는 지금, 다시 케인즈를 읽어야 할 이유다.  

저자 소개

로버트 스키델스키

1939년 중국 만주에서 출생했다. 옥스퍼드 지저스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부교수, 영국 워릭 대학 국제관계학 교수를 거쳐 경제학과의 정치경제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워릭 대학 정치경제학 명예교수이다. 영국 사민당 창당(1981) 멤버였으며, 사민당이 해체(1992)된 후에는 보수당 상원 의원, 문화위원회, 재정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했다. 1991년에는 상원 의원(종신 귀족)으로 서품되었으며, 1994년에는 영국학술원(British Academy)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코소보 폭격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가 당시 보수당 당수이던 윌리엄 헤이그에 의해 위원장직에서 해임됐고, 2001년에 보수당을 떠나 지금까지 무소속 상원 의원으로 남아 있다. 현재 ‘사회시장재단’(Social Market Foundation) 이사장, ‘세계연구센터’(Centre for Global Studies), ‘맨해튼 연구소’(Manhatten Institute)의 이사로 있다. 1983년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 전기 제1권 『배반된 희망, 1883~1920』을 출간했고, 1992년에 나온 제2권 『구원자로서의 경제학자, 1920~1937』로 울프슨 역사상(Wolfson Prize for History)을, 그리고 2000년에 출판된 제3권 『영국을 위한 투쟁, 1937~1946』으로 더프 쿠퍼상(Duff Cooper Prize), 제임스 테이트 블랙 메모리얼 전기상(James Tait Black Memorial Prize for Biography), 라이어널 겔버 국제관계학상(Lionel Gelber Prize for International Relations), 아서 로스 외교위원회의 국제관계상(Arthur Ross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Prize for International Relations)을 수상했다. 케인스 전기 외에도, <정치인과 불황>, <영국의 진보학파>, <오스월드 모슬리 평전>, <예종으로부터의 길: 공산주의 이후의 세계>를 저술했다. 현재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가디언>, <인디펜던트>, <런던 타임스>, <뉴 스테이츠맨> 등에 케인스주의, 세계화, 러시아 문제, 국제정치 등과 관련해 활발하게 기고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지금은 ‘20세기 영국사’와 ‘세계화와 국제 관계’에 관한 저서를 집필 중이다.

* 출처: 알라딘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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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0정태인/새사연 원장

나는 예술가들이 부럽다. 그들은 미래를 온몸으로 느끼고 문학은 문학대로, 미술은 미술대로, 또 음악은 음악대로 각각 표현해낸다. 그들은 타고난 예언자다. 그런 재능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학자들은 미래를 과거와 현재로부터 추론해야 한다. 불행히도 이 또한 쉽지 않은데,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라면 과거와 전혀 다른 이론체계를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아무리 팍팍한 경제학을 한다 하더라도 대가들은 상당한 예술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술가들처럼 미세한 떨림까지 느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미래의 큰 변화를 감지하고 그것을 새로운 이론으로 설명하고 답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그렇고 케인스가 그렇다.
 
느낌까지 갈 것도 없는 뻔한 미래에 대해서도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평범한 학자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생태문제가 그렇고, 또한 교육이 그렇다. 되풀이하고 또 되뇌지만 ‘대한민국’의 교육은 이미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대한민국’ 전체를 잡아먹을 것이다. 생태문제 역시 이젠 발등의 불이며, 한 나라를 넘어 전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그런데 왜 현재의 대선에서 현재의 삶을 위협하고 미래의 삶을 압살할 것이 틀림없는 이 두 문제는 쟁점조차 되지 않는 것일까? 박근혜 후보는 물론이고 문재인, 안철수 후보의 공약에서도 생태와 교육은 뚜렷한 해법을 찾기 어렵다.
 
내 여태까지의 공부로 볼 때 현재의 경제학 수준으론 생태문제의 해법을 제시할 수 없다. 애로와 다스굽타와 같은 당대의 최고 주류경제학자들의 최근 논문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생태문제의 핵심 개념인 ‘지속가능성’을 브룬트란트 리포트(1987)에 따라 “미래 세대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훼손하지 않고 현재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발전”으로 정의한다. 이는 추상적인 차원에서 미래 소비의 현재 가치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100년 후에도 우리 아이들이 지금 우리처럼 소비할 수 있으면 된다는 얘기다.
 
이제 경제학자들에게 생태문제는 미래 세대의 행복의 가치를 얼마나 할인하느냐의 문제와 자연자원과 물적자원의 대체 가능성, 즉 기술적 발전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느냐의 질문으로 좁혀진다. 예컨대 극단적으로 하루살이에게 미래 할인율은 1이 되어 생태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기술의 무한한 발전이라는 가정 하에서는 에너지 가격 급등이 자동적으로 에너지 절약 기술을 출현시킬 것이기에 생태문제란 기우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결국 합리적 미래 할인율과 합리적 대체 가능성의 추정이라는 끝없는 논쟁에 빠져들게 된다(무의미하다는 얘긴 아니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민주주의도 믿음직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만일 민주주의를 다수결로 단순화한다면 생태문제에 관한 투표 결과는 번번이 실망스러울 것이다. 예컨대 할인율을 낮게 잡는다면, 그리고 기술 개발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경우, 100년 뒤의 아이가 우리와 똑같이 에너지를 쓰게 하려면 우린 당장 우리의 에너지 소비를 제로로 줄이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미래의 아이들은 물론 이렇게 현재의 소비를 대폭 줄이는 데 투표할 것이다. 반면 보통의 어른들은 경제학자들의 의견 대립을 이유로 결단을 유보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미래를 살아야 할 현재의 아이들은 물론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아이들에겐 투표권이 없다.
 
얼치기 경제학자의 결론은 생태정치가 시민들의 예술가적 감성을 자극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원의 대체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으며 앞으로 닥칠 에너지 위기는 70년대의 오일쇼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라는 것을 절감하도록 해야 한다. 핵발전 문제는 아주 좋은 소재다. 그 위협을 실감한 경험이 그리 오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핵발전을 중지시키려면 에너지 소비를 3분의 1 가량 줄여야 한다는 결론도 바로 나온다.

소비절약에 합의하지 않는 한 에너지 절약 기술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제본스 패러독스). 지금 내 책상 옆에 쌓여 있는 논문 더미가 바로 그 증거다. 핵발전의 중지와 에너지 소비를 3분의 1로 줄이기, 그리고 이를 위한 생태세(echo tax)의 부과는 우리의 예술적 감성에 기댄 최소한의 대선 공약일 것이다. 누가 이런 공약을 제시할 것인가? 이번 대선의 내 선택 기준이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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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6정태인/새사연 원장

 

무슨 대단한 지식이나 신통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약간의 경제학 지식과 현실 경제 흐름에 대한 ‘감’, 그리고 시계열 통계만 볼 줄 알아도 금년 성장률이 3% 미만에 머물 것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새사연은 작년 말에 EU가 그럭저럭 위기를 헤쳐나갈 경우 한국 경제는 금년 2% 중반대 성장을 이룰 것이고, 더 나쁘면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고 예측했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행과 정부, 그리고 재벌 연구소들 모두 3% 후반대의 성장을 장담했다. 6개월이 지나자 EU 상황을 핑계로 3% 정도로 성장률을 끌어내리더니 최근엔 재벌 연구소들이 2%도 어렵다고 징징댄다. 문제는 이어지는 얘기다. 그러므로 ‘금산분리’(금융과 산업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상식이다) 등 경제개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박근혜 후보도 숟가락을 내민 ‘경제민주화’를 하면 경제가 더 위험해질 거라는 주장이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다’고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무분별한 자본시장 개방(김영삼의 ‘세계화’)으로 외환위기를 맞자 이들은 오히려 더 많은 개방과 경제자유화를 주장했다. 당시에는 ‘왕초 각설이’ IMF의 요구사항이 그랬으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치자.
 
참여정부 초기 경제성장률이 5%에 머무르자 재벌과 조중동은 ‘단군 이래 최대의 위기’라며 규제완화를 해야 투자를 늘릴 거라고 압박했다. 노 대통령이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고백한 때였다.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전 세계가 그랬고 지금도 각설이 타령은 여전하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일으킨 월스트리트는 여전히 흥청망청이고 오바마는 고전 중이다.
 
굳이 김빠진 옛 드라마의 ‘다시 보기’를 누른 건 앞으로 6개월 동안 일어날 일이 그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민주정부건 이명박 정부건 15년 넘게 양극화가 심해지자 ‘성공신화’에 취했던 국민들이 깨어나 보편복지와 경제민주화를 외쳤고, 민주당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박근혜 후보는 끼어들기에 성공했다. 이제 남은 이슈는 경제위기의 해법인데 여론조사에 따르면 경제위기에 가장 잘 대처할 후보로 박근혜 후보를 꼽았다.
 
아마도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한 최근의 성과에, 어쩌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미지가 겹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는 선거가 아니고 지금은 60∼70년대가 아니다. 단언한다.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면 위의 재벌 연구소의 주장을 따를 것이다. 위기 때문에 보편복지와 경제민주화를 미룰 수밖에 없다고, 나아가 그런 정책은 위기를 심화시킨다고 주장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재벌과 조중동에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기회이며, 보수적 지도자는 자신의 정치적 동맹세력을 결코 배반하지 않는다.
 
지금 코 앞에 닥친 위기는 구체제의 방식으론 결코 극복할 수 없다. 오히려 상황만 악화시킬 뿐이다. 현재 국민이 요구하는 보편복지와 경제민주화, 그리고 협동조합(사회경제)이야말로 위기 탈출의 묘책이다. 지금 세 정책을 실현하려는 시민 세력이 뭉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희망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민주당의 미적거림에 탄식하고 안철수의 모호함에 불안에 떨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동안 시민운동은 낙선운동, 투표 격려, 그리고 야당과의 야권 단일화를 해 왔다. 이제 사회경제정책 기조에 대한 뚜렷한 요구가 있는 만큼 더 정확한 정책 목록, 정책을 실현한 내각의 구성 원칙, 그 내각과 시민의 통합 가버넌스를 내세워야 한다.
 
2008년에는 정권을 내주고 나서야 석 달 넘게 광장으로 나왔지만 지금 정권을 만들기 위해 나서면 훨씬 우리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이글은 주간경향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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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9정태인/새사연 원장

그래도 인간은 이기적인데…. “인간이 이기적이지 않다”고 주장한 지난번 글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게 사실이다. 또한 생물학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인 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인간은 본성상 이기적일 것 같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당신은 이기적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남들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예”라고 대답한다(스스로에게 질문하시기 바란다). 여기에 중요한 열쇠가 숨어 있다.

앞으로도 자주 등장할 간단한 게임 하나를 소개한다. 다소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조금만 익숙해지면 아주 유용한 게임이니 잠깐만 집중하시기 바란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쉬가 논문을 제출하자 지도교수는 “자네가 지금 뭘 했는지 아는가? 150년 된 경제학을 모조리 부정하고 있다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진짜로 그랬을까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개인은 자신만의 이윤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개인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결국은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 즉 공익의 증진에 기여하게 된다”는 아마도 경제학에서 제일 많이 인용되었을 아담 스미스의 통찰이 부정됐다는 것이다. 바로 ‘죄수의 딜레마’라고 하는 게임이다.

보수를 나타내는 각 칸의 첫 번째 숫자가 경기자 I(나)의 보수이고 두 번째 숫자가 경기자II(상대방)의 보수이며 C는 협력, D는 배반을 나타낸다. 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각 칸의 앞 숫자를 비교해서 더 큰 쪽을 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보수가 (D,C)=4 > (C,C)=3 >(D,D)=2 > (C,D)=1의 순서라면 언제나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 된다. 상대방이 협력(C)를 선택했을 경우 내 보수는 C=3, D=4이므로 D를 선택할 것이고, 또 상대반이 배반(D)를 선택한 경우에도 내 보수는 C=1, D=2이므로 역시 D를 택해야 한다. 즉 상대가 배반을 하든, 또는 협력을 하든 나는 배반을 하는 게 이익이다. 상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우리는 동시에 배반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일부러 꾸며낸 숫자 예처럼 보일 테지만 우리 주위에 이런 상황은 널려 있다. 나의 보수 크기가 협력보다 배반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있다면 그것은 모두 죄수의 딜레마게임이다. 혹시 내가 그 함정에 빠진 게 아닌가 싶을 때, 자문해봐야 할 리트머스 시험지는 이렇다. “남이 다 하면 나도 따라 할 수밖에 없다”(공포), 그리고 “남이 다 안 하는 경우 나만 하면 ‘대박’이다”(탐욕). 이 두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바로 사교육이 그렇다. 그리고 부동산(주식)에 대한 우리 태도도 비슷하다. 남들이 다 과외시키는데 우리 애만 마냥 놔둘 수 없고, 남들이 다 빚내서 집사는데 나만 유유자적, 안빈낙도 하다간 영원히 셋방살이 신세일 거 같다면 우리는 죄수의 딜레마 함정에 빠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글 첫머리에 한 질문의 답이 있다. 남들 대부분이 이기적이라고 대답한 분들은 바로 위 표의 오른쪽 상황을 맞고 있다. 즉 상대방의 배신에 하릴없이 당하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도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모두 그렇게 행동한다면? 각자는 이기적이지 않은데 그런 사람들로 이뤄진 사회는 이기로 가득찬 상황이 오는 것이다.

이 글은 '주간 경향'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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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