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19정태인/새사연 원장

 

2009년 2월, 유럽의회는 89%의 찬성으로 ‘사회적 경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은 새로운 경제적, 사회적 모델을 요구”하는데 “사회적 경제는 산업민주주의와 경제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실제 성과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협동조합이 곧 경제민주주의라는 얘기다.

한국 대선에서도 ‘경제민주화’는 시대정신이 됐다. 박근혜 후보마저도 경제민주화와 재벌의 지배구조를 문제삼기에 이르렀고, 홍사덕 선대위원장은 엉뚱하게도 장하준 교수와 나를 영입할 생각이 있다고 발표했다. 이어 새누리당 내에선 ‘헌법 119조의 김종인’과 ‘재벌 출신 이한구’의 설전이 벌어졌다. 결국 박 후보가 “김종인과 이한구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최종 심판을 내렸는데도 김종인이 “동의할 수 없다”고 감히 반발하는 등 말 그대로 코미디 시리즈가 연출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시민들의 저력이다. 유권자들의 요구가 바야흐로 재벌-경제관료-보수언론 3자 동맹을 뒤흔들고 있다. 2010년부터 시민들은 보편복지, 경제민주화를 시대정신이라고 차례로 선언했고, 지금 전국 각지에서는 협동조합 열풍이 일고 있다. 일시적 유행이 아니다.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은 세계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급증한 바 있다. 그러면 협동조합은 왜 위기에 강한 것일까? <주간경향>의 독자들은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 사회적 경제라는 범주 자체가 사회적 딜레마 해결의 오랜 지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부족을 보호한다거나 품앗이로 모내기를 한다든가, 스스로 강물이나 공동 숲을 관리하는 규칙을 만들고 지켜온 것이 모두 사회적 경제에 속한다.

자본주의 단계의 사회적 경제인 협동조합은 주기적 경제위기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특히 이 연재에서 여러 번 언급한 몬드라곤(스페인)과 에밀리아 로마냐(이탈리아)는 국가부도의 위기 속에서 과연 온전할까?

양쪽 모두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하기 때문에 휘청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라 안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지극히 평온하다. 이 곳 협동조합 네트워크에는 실업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몬드라곤은 2009년 600명의 노동자를 재배치했고 2000명은 신축 근로에 동의했다. 모든 부문이 똑같은 타격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상대적으로 나은 부문에서 더 어려운 단위 조합의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전직에 필요한 교육훈련도 협동조합 네트워크 내부에서 이뤄진다. 에밀리아 로마냐의 레가(Lega·협동조합 총연합)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데, 이 지역 인구가 440만명인 점을 생각해보면 핀란드나 노르웨이와 같은 나라에서 정부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 실업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전략적 방침도 조합원 총회에서 1인 1표로 결정한다. 바로 신뢰와 협동의 힘이다.

또한 각 지역의 금융기관, 예컨대 몬드라곤의 ‘노동금고(Caja Laboral)’나 에밀리아 로마냐의 ‘조합기금(Coopfond)’ 등은 어려운 조합에 추가 대출을 해준다. 즉 “비 올 때 우산을 빼앗는” 여느 은행과 달리 이들은 인내자본(patient capital)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제 막 ‘협동조합을 꿈꾸는 그대’들에겐 꿈 같은 소리로 들릴 것이다. 협동조합의 광범한 네트워크가 존재하는 곳에서나 가능한 얘기가 아닌가? 하지만 개별 협동조합이라도 노동시간과 임금을 줄여서 고용을 유지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관찰된다. 서로 신뢰하기만 한다면 다 같이 살아갈 방법은 언제나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왜 협동조합은 지배적 범주가 되지 못한 것일까? 지금까지의 역사에서는 상황이 좋아지면 사람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더 많은 단기적 이익을 약속하는 자본주의 기업을 선택해 왔다. 하지만 협동조합에 유리하도록 법적 근거를 만들고 자체의 금융기관이나 교육기관을 갖춘 곳에서는 따뜻한 공동체적 경제가 지배적이다. 각 지역이, 나아가서 한국 전체가 그리 되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는가? 어느 후보가 사회적 경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렇게 저렇게 다 해주겠다’가 아니라 시민 스스로의 힘으로 네트워크를 건설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돕겠다고 하는지 잘 살펴야 한다. 우리의 꿈을 실현하는 데도 중요한 대선이다.

이글은 주간경향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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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7정태인/새사연 원장

 

경제민주주의는 경제영역에서도 이해당사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서 공동의 이익을 달성하는 것이다. 또한 경제민주주의는 시장에서 벌어지는 양극화를 시정해서 우리 국민들이 합의한 보편복지를 지속가능하도록 만든다.

주류경제학은 주주(투자자)를 제외한 다른 이해당사자들이 노력과 보상에 대한 계약을 맺었으므로 잉여(또는 잔여·residual)에 대한 아무런 권한도 없고, 따라서 그들은 투자자(또는 그 대리인인 경영자)의 지휘·통제에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그럴 때만 이윤 극대화라는 기업의 목표가 확실해져서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 주위는 이런 믿음과 실천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착한 경제학’은 시장이론의 차원에서 보자면 계약의 불완전성(모든 상황을 미리 낱낱이 계약서에 반영할 수도 없으며 완벽한 감시와 처벌도 불가능하다) 때문에,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상호성 때문에 기업에서도 이해당사자의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더 높은 효율을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주간경향 968호 참조). 따라서 이해당사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거나(voice), 정 안 되면 회사나 하청관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exit) 힘을 부여하는 것이 경제민주주의의 핵심 과제가 된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적 기업 안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조직이다. 노동조합의 네트워크인 산별노조나 전국노조는 일부 유럽의 경우 노동자 정당으로 발전해서 복지국가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즉 전국적 노조와 정당은 경제민주주의를 달성하는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총의 조직률이 5% 수준에 머물고 그들이 지지하는 진보당이 자중지란에 빠진 현실은 한국 경제민주화의 앞날이 매우 어둡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협동조합은 기업 바깥에서 시작되었으며(소비자 협동조합), 그것이 생산자 조합과 금융부문 조합(협동조합 전문 은행이나 보험 등)으로 발전하여 스페인 몬드라곤이나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 캐나다의 노바 스코티스 등에서는 전국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말하자면 협동조합을 포함한 사회적 경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바깥에 존재하는 경제민주주의의 보루라고 할 수 있다. 협동조합은 1원(1주) 1표가 아닌 1인 1표의 원칙에 의해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에 경제민주주의를 처음부터 내장하고 있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적 경제 역시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다.

노동조합은 시장경제에서, 그리고 협동조합은 사회적 경제에서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할 핵심 주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아직 미약하니 한국에서 경제민주주의는 그저 먼 미래의 꿈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미 수십년간의 피와 땀을 통해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일정하게 달성했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경제민주주의의 토대이다. 이 연재에서 여러 번 강조했듯이 무임승차자에 대한 응징과 구성원 간의 소통이야말로 협동을 이루는 지름길이다. 민주주의가 곧 소통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명박 정부를 통해 절절하게 깨달았다. 또 민주주의사회에서 선거는 아무리 미흡하다 할지라도 강력한 응징 수단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선거를 앞두고 금속노조 등 노동단체,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새사연 등 학술단체가 모여서 가칭 ‘경제민주화를 위한 재벌개혁 시민연대’를 만들고 있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제 본격적으로 전개될 경제민주화 운동은 기존의 노동운동이나 협동조합운동이 한 단계 도약하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시민복지운동, 그리고 경제민주화운동은 우리 아이들을 행복으로 이끄는 두 날개다. 몸통 격인 민주당과 진보당이 정신만 차린다면 시민연대는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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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2.05.04정태인/새사연 원장

역시 ‘다이내믹 한국’인가, 했다.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이 의료민영화나 4대강 등 공공성 의제의 들불로 번져나갔던 것, 2010년 무상급식이 순식간에 보편복지 의제로 자리잡은 것처럼 이번엔 ‘경제민주화’가 그럴지도 모른다, 내 가슴은 노래 가사처럼 두근두근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민주통합당은 패배했고 통합진보당은 여전히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진보신당과 녹색당은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김종인 박사 말마따나 새누리당 당선자 중에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사람은 찾아볼 수 없고 야권연대 쪽을 통틀어 당장 정책과 법안을 만들 정도의 실력을 가진 당선자는 대여섯 명에 불과하다. 더구나 민주통합당에서는 예의 ‘중도론’이 또 스멀스멀 기어나오고 있으니 이대로 간다면 대선에서도 별로 기대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경제민주화란 도대체 무엇일까? 한국에서는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헌법 119조 2항(김종인 조항)이 그 근거다. 즉 헌법은 소득재분배(복지), 그리고 독점규제(재벌개혁)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제헌헌법에는 ‘이익균점권’이 있었으니 우리 헌법은 유구한 ‘경제민주화’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경제민주화란 ‘경제민주주의’를 향하여 간다는 뜻일텐데 경제민주주의라는 목표는 어떤 모습일까? 불행하게도 이 질문에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명확한 답이 없고 그야말로 백화제방의 상태이다. 경제학자들은 시장이 곧 민주주의라는 프리드만(Freedman, M)의 강변 이래 별 관심이 없었고 정치학자들만 띄엄띄엄 의견을 개진했을 뿐이다.
 
경제민주주의 하면 떠오르는 학자는 정치학자 달(Dahl, R)이다. 그는 적어도 선진 사회의 정치에서는 ‘1인 1표’라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규범인데, 경제에서는 왜 ‘기업 괴물(corporate leviathan)’의 전제주의가 규범인지에 의문을 제기했다. 따라서 정치와 경제가 대칭적이기 위해서는 ‘작업장 민주주의(workplace democracy)’가 필수적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1980년대 진보적 경제학자들에게도 나타나는데 보울스(Bowls, S) 등의 ‘민주적 기업’이 그것이고 지난번에 소개한 프리먼(Feeman, R)은 30년 넘게 이 문제에 천착해서 ‘공유자본주의론’을 완성했다.
 
기업 내 민주주의를 넘어 롤스(Rawls, J)는 경제에도 자신의 정의론을 적용한 결과 ‘재산소유 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를 이상적 사회로 내세우기에 이르렀다(또 하나의 대안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놀랍게도 롤스는 스웨덴의 복지국가를 강하게 비판했는데 복지국가가 자산 소유(‘생산 자산’, production assets)의 양극화를 용인해서 정의의 원칙인 ‘기회 평등의 원칙’, ‘차등의 원칙’을 위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자유의 원칙도 위반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결국 롤스는 자산 및 자본재분배까지 주장한 것이다. 

우리 헌법은 사실상 독점의 시정(즉 산업구조 상의 문제)을 중심으로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국가가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달과 프리먼은 기업의 민주화를, 그리고 롤스는 재산소유의 민주화까지 주장한 것이다. 이 모두를 일반화한다면 자신의 삶과 자유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차원의 의사결정에 시민들이 참여해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경제민주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착한 경제학’은 경제민주주의를 어떻게 볼까? 독자들은 지금까지의 정책 처방이 경제민주주의론자들의 주장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데 이 얘기는 다음 번에 계속하기로 하자. 
 

이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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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