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 01 / 22 이수민/새사연 연구원

 

새사연 2013년 회원 캠페인- “새사연과 함께하는 희망 북클럽”을 시작하면서


우려했던 신자유주의 보수정권의 집권 연장이 현실화되면서 우리 사회가 진보적 발전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을 힘들어 하는 다수 국민이 존재하는 한 변화에 대한 모색은 멈출 수 없으며 우리 사회의 진보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진보가 노력을 기울여온 보편 복지와 경제 민주화, 그리고 일자리를 의제로 하여 치러진 18대 대선임에도 진보가 패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수가 손쉽게 의제를 차용해도 아무런 차별화가 되지 않을 만큼 진보 정책의 폭과 깊이가 짧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진정 현실에서 살아가는 우리 국민들의 삶과 생각에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살아있는 진보 정책’을 모아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평범한 생활인들과 손잡고 우리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추구해온 새사연은 진보 학습으로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할 것을 회원들과 시민들에게 제안합니다. 그 첫 출발점으로 새사연 연구원들이 각자 회원님들께 꼭 추천하고 싶은 책 한권씩을 선정하여 소개하고, 진보의 깊이를 위한 물음을 던지겠습니다.

아울러 이후에 회원님들이 추천하는 책, 새사연과 함께하는 독서 토론, 저자와의 대화 등을 다양하게 시도할 생각입니다. 회원님들의 관심과 참여 기대 하겠습니다.


 

 <새사연 희망 북클럽 ④>『현시창』

-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

추천도서 4 -현시창

(임지선, 2012, 알마)

청년 담론의 큰 출발이었던 우석훈, 박권일의 88만원 세대, 많은 청년들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냈던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지금까지 나왔던 여타 청년이야기들과는 전혀 다르다. 위로도 격려도 하려하지 않는다. 그저 차분히 한 세대를 들여다본다.

뜨거웠던 청년 담론의 거품도 가라앉고, 청년들의 주먹에도 힘이 빠지기 시작한 듯 보인다. 이 시점에서 현직 기자이자 30대 청년이 쓴 이 책은 청년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제시한다. 요즘 누구를 만나든 무작정 추천하는 책이다.

그 많던 청년들은 다 어디로 갔나

웬일인지 조용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늦둥이 외동아들 마냥 세상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청년 세대’에 대한 목소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호통치고 야단치면 정신 차릴까, 어르고 달래면 일어설까 기대했던 어른들은 이제 시들해졌다. 두 번의 선거를 마치고 그들의 헹가래에 보답하지 못한 청년들은 이제 작은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 대선 이후 찾지 않는 청년. 누군가는 역시 ‘젊은 것’들은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변하지 않는 것은 청년들의 삶, 청년들을 둘러싼 지금의 이 현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청년 담론’을 다시 시작할 새로운 그리고 고마운 책 한권이 우리 앞에 던져졌다. 임지선 저 『현시창』이 바로 그것이다. 제목이 이상하다 싶겠다. 사실 ‘현시창’이란 말은 저자가 처음 꺼낸 말이 아니다. 이는 ‘현실은 시궁창’의 줄임말로, 영화 ‘8마일’에서 가수 에미넴이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노래한 데서 시작되어 인터넷 상에서 널리 퍼진 말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 임지선은 시궁창인 현실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청년 현실의 이면에 숨어 있는, 그러나 너무 단단하게 그들을 옥죄고 있는 ‘보이지 않는 룰’을 꺼내어 친절히 보여준다.

뜨거웠던 이전 세대에게는 불합리한 현실에 눈감는 개xx였던, 하지만 동정심 많은 자선가에 의해 ‘88만 원 세대’이라는 조금은 안쓰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던, 그래서 앞선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짱돌을 들고 거리에 나서기를 강요받았던 청년은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오늘의 대학을 거부하고, 명품빽 마냥 비싸면 좋은 줄로만 알았던 대학 등록금이 반 토막이 되는 것을 상식으로 만들고, 관성화 된 노동운동의 새 비전을 제시했다. 하지만 시청률에 급급해 하는 막장드라마 피디처럼 구는 어른들의 장단까지 맞춰주기에 청년들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고, 학자금 대출 이자 상환일은 참 부지런히도 찾아온다.

노동, 경쟁, 여성, 돈이라는 네 가지 절벽에 가로막힌 세대

이 책은 현직 기자인 저자가 취재를 하던 중 만난 청년들의 이야기다. 기자로서의 궁금증과 개인적 관심으로 다시 취재하여 기사에서는 차갑고 간결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미안함을 자신의 진짜 문체로 풀어냈다. 그 문체가 무척이나 섬세하고 따뜻하고, 때로는 날카로워 문학적으로도 훌륭하다. 단지 이 모든 이야기가 문학이었다면 좋았으련만.

책은 크게 네 파트로 나눠져 있다. 누군가가 사는 세상이 ‘음, 양, 오, 행’의 네 가지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청년들의 세계는 ‘노동, 경쟁, 여성, 돈’의 네 가지 원리로 돌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네 가지 주제에 해당하는 청년들의 ‘진짜’ 이야기가 지면을 채우고 있다. 그런데 첫 장부터 무척 낯익다. 우연인가 했는데 그 다음 장도 낯익다. 우리가 한 번쯤은 들었던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다르다. 신문에서 뉴스에서 보고 들었던 이야기들과는 많이 다르다.

고객님의 쾌적한 쇼핑을 위해 이마트 지하에서 냉방설비를 고치다 유독가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청년. 손님들의 비상식적인 요구에도 배꼽인사를 넙죽넙죽하는 대형마트는 자신의 매장에서 죽은 청년에게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어린 여동생은 오빠가 남긴 학자금 대출금이 걱정이다. 용광로에서 야간작업을 하던 청년이 추락하여 뜨거운 불길에 타 죽어도 회사는 어떠한 안전장치 하나 마련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회사는 매년 흑자를 내지만 죽은 청년에게는 본전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 청년은 다음 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계획이었다. 이제는 너무 유명한 삼성의 반도체 소녀는 다시 들어도 제왕적 대기업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무력함이 동시에 차오른다. 한편 고작 ‘따뜻한 피자’ 때문에 다치고 죽어가는 어린 소년들은 오늘도 미끄러운 길을 질주하고 있고, 이번 주에는 또 눈 소식이 있다. 스물네 살의 어린 나이에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청년은 그 날이 마지막 근무였다고 한다.

이처럼 책의 처음은 가난한 청년들의 노동현실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듣지 못한 이야기가 가슴을 치게 한다. 이 책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은 무기력하거나 혹은 대부분 무척이나 성실하다.

“군 복무 중에도 월급 5만 원을 집으로 부쳤다. 짧은 휴가를 나와서도 인력사무소를 찾아 아르바이트를 했다. 여동생의 공부를 도와주고 빈곤노동에 지친 어머니를 위로했다. 휴가 동안 쓰라며 어머니가 건넨 3만 원을 여동생의 책상 위에 남겨두고 부대에 복귀하는 사람이었다.”(p17, 1-1. 이마트에서 잠들다)

“백혈병으로 죽어간 삼성의 어린 노동자들은 대부분 100~130만 원의 월급을 받았다. 가난해서 그 월급을 포기할 수 없었고, 순진해서 공장과 기숙사만 오가며 하라는 대로 일만 했으며, 너무 착해서 아픈데도 아프다 말하지 못한 채 참고 살다 죽었다.”(p52, 1-2. 소녀와 백혈병, 그리고 삼성)

“ㅎ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평일에는 학교를 다니고 주말이면 피자 배달원이 됐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다니는 일이 위험하다고 걱정하실까봐 부모님께는 피자집 매장에서 서빙을 한다고 말해두었다. 그런 아들이 “오늘까지만 일한다”며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가 혼수상태로 돌아왔다.”

듣고 있으면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마저 나오게 하는 환경에서 일하는 청년들에게 어른들이 주는 것이란 법정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과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는 위험 그리고 ‘네가 못나 이런 일 밖에 못 한다’는 자괴감이다. 식상한 레퍼토리 다시 한 번 읊어 보자.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대학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가겠다고 하면 눈높이가 높다 타박하고, 끝끝내 생사의 기로까지 밀려나 120만 원 받으며 일을 하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과 줄어들 줄 모르는 대출금뿐이다.

“힘들고 위험한 업무는 자연히 비정규직의 몫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은 라인이 돌아가듯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p36, 1-3. 비정한 세상, 비정규직)

“조합원 대부분이 30대 젊은이들입니다. 다들 불법 파견 노동자로서 6~7년씩 고용 불안과 차별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아왔다는 공감대가 바닥에 깔려 있죠. 현대자동차에서 공정이 없어져 회사에서 쫓겨나는 비정규직이 1년에 300명입니다. 그런 시기가 되면 노동자들은 친한 사람들끼리 말을 안 하고 툭 하면 싸움이 벌어지죠.”(p40, 1-3. 비정한 세상, 비정규직) 

그렇다면 가난이 비껴간 청년들의 삶은 조금 나을까. 페이지를 넘겨보면 차라리 대놓고 탓할 가난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진다. 세상에 냉소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결국에는 스스로를 옭아 메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홀로 우두커니 전쟁터에 서있는 청년들의 발밑에는 ‘경쟁’이라는 뿌리가 너무나도 깊다.

2006년 한국의 천재들만 모인다는 카이스트에 서남표 총장이 신자본주의의 검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100% 영어강의와 차등적 등록금제로 누군가는 꼭 죽어야 하는 그리고 죽여야 하는 새로운 전쟁터를 마련해 주었다. 학생들이 목을 매고, 옥상에서 뛰어 내려도 성장통이라 웃어넘기는 사람도 있다. 서울 소재 대학의 법대 4년 장학생으로 합격한 한 청년은 명문대가 아닌 이상 창피해서 대학을 다닐 수 없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 곳에서의 부적응이 우울증과 대인기피, 그리고 게임중독을 나았고 몇 개월을 방안에서 게임만 하다 결국 어느 날 새벽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가 제일 처음 만나는 사람을 찔렀다. 일명 ‘묻지마 살인’. 알고 보니 피해자는 새벽까지 일을 하고 귀가하던 같은 또래의 청년이었다. 대학에 꼭 진학하고 싶었던 소녀는 이제 자신이 공부를 잘 한 것을 후회한다. 더 이상 가난은 명문대 대학교 졸업장으로 극복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돈을 많이 벌어도 괴롭다. 보험 영업으로 월 천만 원 이상을 버는 청년은 미래를 준비 할수록 미래가 두렵다. 자꾸만 가슴이 답답하고, 밤에 쫓기는 꿈을 꾼다.
 
책 속의 이야기들에서 ‘경쟁’은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보다 훨씬 더 크고 깊게 청년들을 병들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끼리 싸우는 것은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상황을 악화 시킬 뿐이다. 청년들은 서로 연대하여 기득권을 가진 세대와 싸워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식이 입 밖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주입된 경쟁이며, 심지어 타인의 상처를 나의 자양분 삼아 살게 만든다.

각자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동료들은 서로에게도 예민하게 날을 세웠다. 말 한마디 곱게 오가는 일이 없었다. 전화 안내를 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어 ‘홀드’를 걸어놓고 옆자리 동료에게 물어보면 “공지사항 뜬 것도 못 봤어?”라며 타박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새 상담원들은 고객에게 받은 상처를 동료들에게 되갚아주고 있었다.”(p146, 3-2. 그놈 목소리, 콜센터는 우울하다)

삼성 내의 성희롱 문제를 고발하며 홀로 오랜 싸움을 참아왔던 이인의 씨는 골리앗 같은 회사도 미웠지만, 자신을 외면하는 동료들에게서 받은 상처로 몇 번이나 죽음을 생각했다고 한다.

갈수록 바빠졌지만 이 모든 일을 오롯이 혼자 감당해내야 했다. 싸움이 커지자 “문제 제기를 하면 도와주겠다”던 동료들도 증언을 기피했다. 회사에서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그를 보며 “선배를 응원하지만 선배처럼 살 수는 없다”고 말하는 후배도 있었다.”(p138, 3-1. 당신도 여자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삼성맨’이 된 그녀. 그때까지는 경쟁의 먹이사슬에서 위쪽에 차지했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모두에게 가시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모든 싸움을 끝낸 뒤 그녀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런 말을 한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드는 의문 중 하나가 사회생활의 진리인 양 회자되는 텍스트인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었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흔히, ‘여자들 사이에 서열이 더 엄격하다’느니 ‘여자들끼리 견제와 질투가 더 심하다’느니 하는 것들이다. 외형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들 대부분은 그저 개개인의 성격문제나 여성성만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직장 내 여성은 대개 약자이기 마련이다. 이런 구조에서 발생하고 누적되는 억울함과 박탈감은(핵심적인 원인이나 근본적인 해결방향을 찾는 쪽으로 발현되기보다는) 외관상 비슷해서 상대적이니 처우 등 각종 차이가 쉽게 비교되는 동성의 여성들을 향해 발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이인의, 『삼성을 살다』, 사회평론, p50)

경쟁을 기본원리로 하는 사회 구조가 왜 약자들에게 불리하며, 그것을 알면서도 왜 스스로 그 불합리함을 해결할 수 없는지를 경험으로부터 알려준다.

구조적 모순을 내제한 사회, 이곳에서 청년이라는 하위 계급에 여성이라는 결함까지 갖추면 그 시궁창의 깊이는 배가 된다. 여성을 단순한 성적 대상으로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일은 이제 너무나 진부해서 거론하기도 피곤하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억지로 주입한 약하고 순종적인 여성성을 쾌락의 대상을 넘어 착취의 대상으로 이용한다. 감정노동. 백화점, 대형마트, 콜센터 등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녀들의 시중으로 품위를 유지하고, 우리는 오늘도 그녀들의 전화를 받을 것이다.

책은 돈에 의해 일어난 반인륜적인 사건들로 마무리 된다. 만삭의 부인을 죽인 것으로 의심되는 의대생, 본사에 ‘상납’해야 하는 리모델링 공사비용 때문에 쥐식빵을 만들어 낸 제빵사, 세 살배기 아이를 죽인 철없는 부모. 모두 ‘신문에나 날’ 이야기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내 이웃의 이야기다. 세상은 점점 화려해 지고 가난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대도시의 반지하와 옥탑 방 구석구석에 알차게 들어 차 있다.

‘청년 담론’ 다시, 그러나 새롭게 이야기 하자

앞에서 언급 했듯이 저자 임지선은 30대의 현직 기자다. 특히 그는 식당 노동자로 위장 취업해 여성 빈곤 노동을 생생하게 그려낸 ‘노동OTL’, 30주 연속으로 인권문제를 써나간 ‘인권OTL’, 영구임대 아파트 121가구를 심도 있게 그려낸 ‘영구빈곤 보고서’ 등과 같은 르포르타주로 꽤나 많은 상을 받았다. 그 와중에 책도 몇 권 썼다. 나이에 비에 화려한 스펙이다. 그런 그가 써 낸 『현시창』이 그저 같은 세대에 대한 동질감이나 기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그가 말하는 ‘현시창’은 ‘현실은 시궁창’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라, 그리고 창을 들어라’이며 또한 ‘지금, 노래 부르며, 창의적으로’ 오늘의 현실을 이겨나가기 위한 시작인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누구도 해결 해 줄 수 없는 답 없는 세상사에 먹먹해 질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책 귀퉁이마다 작은 해답들이 숨어 있다.

로스쿨에 가서 다시 시작한 캠퍼스 생활은 행복하기 그지없다. ‘기숙사 침대에서 아침에 눈을 뜨는데 너무 행복했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아무도 나를 감시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더라.”(p140, 3-1. 당신도 여자라면)

“그래도 미연 씨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서울시 한부모가족센터에서 피부 마사지와 발 마사지 자격증을 따기 위해 수업을 듣고 있다. “아이를 낳고 전 더 건강해 졌어요. 더 이상 남자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고 삶을 개척 해볼 거에요.” 미연 씨처럼 미혼모의 길을 선택하는 이들은 한 해 6,500명을 넘어선다.“(p187, 3-6. 미혼모로 살아간다는 것)

솔직히 말해보자면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은 지금까지 있어 온 적도 없고, 앞으로도 불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행복 대신 ‘평화, 즐거움, 재미, 건강, 안락함, 도전’ 등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고 각자가 원하는 가치는 다양하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일수도 있다.

청년 세대가 진짜 원하는 것은 더 이상 동정이나 다독임, 치유나 격려 같은 것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존감과 자립이다. 획일화된 일방통행의 사회가 아닌 가치의 다양성,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미약하지만 부모에게 기생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는 환경과 때로는 무모한 도전이 실패했을 때의 죽지 않아도 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 이 정도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청년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저자 소개

70년대도 80년대도 아닌 듯한 1980년에 태어나 90년대도 2000년대도 아닌 듯한 99학번으로 어정쩡하게 살았다. 대학에서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국어국문학을 부전공했다. 2006년 <한겨레>에 입사해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을 기자로 살았다. <한겨레21>에서 30주 연속으로 인권 사각지대를 조명한 ‘인권OTL’ 시리즈, 식당 노동자로 위장 취업해 여성 빈곤노동의 현실을 알린 ‘노동OTL’ 시리즈, 국내 최초로 영구임대아파트 121가구를 심층 조사한 ‘영구빈곤 보고서’ 등을 취재하며 인권 보도에 눈을 떴다. 이 같은 기획으로 국제앰네스티언론상(2008), 한국기자상(2009), 민주언론상(2010)을 수상했다. 또한 삼성 반도체공장 백혈병 산재 의혹과 관련한 보도로 국제앰네스티언론상(2010)을 다시 한 번 수상했다. <한겨레> 사회부에서는 신문기사의 틀을 벗어나 ‘사람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사를 쓰고자 노력했다. ‘낮은 목소리’ 시리즈를 통해 언론인권상(2012)을 수상했다. 《4천원 인생》《왜 우리는 혼자가 되었나》를 공저했다.

* 출처: 알라딘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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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8김병권/새사연 부원장

 

18대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 사이에서 벌이는 가장 뜨거운 경제논쟁은 이론의 여지없이 ‘재벌개혁 경제민주화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독과점으로 인한 자유로운 시장경쟁의 제한’, 즉 시장실패 때문일 것이다. 거대 기업으로 성장해 해당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한 대기업들이 자유경쟁을 제한하고 독과점 가격 등으로 초과이윤을 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시정하고 다시 자유로운 경쟁시장으로 만들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독과점 억제를 목표로 하는 공정거래법을 ‘경쟁촉진법’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과점적 시장을 자유경쟁 시장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라도 기업들의 자발적 협조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의 일정한 시장개입과 규제를 필요로 하게 된다. 한국의 재벌개혁도 이런 측면이 있다. 특히 보수세력은 재벌개혁에서 이 측면만을 강조하고 ‘부의 재분배’ 등은 외면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가 과연 ‘독점적, 비경쟁적 시장’을 다시 ‘비독점적, 경쟁적 시장’으로 되돌려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기업들은 자본과 시장의 집중을 통해 끊임없이 독점을 추구하고, 국가는 지속적으로 특정 기업의 시장지배력을 억제하는 게임을 반복하는 것이 과연 경제민주화란 말인가. 물론 아니다. 이는 철저히 자유주의적인 발상일 뿐이다.

경제적으로 시장이 실패하거나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을 때, 전통적인 의미의 시장적 방법이 아닌 다른 제도와 다른 운영방식을 도입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주 상식적이고 당연한 하나의 대안이 바로 공공경제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다. 사실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폐해는 다양한 인간의 생활방식을 ‘민영화’라는 이름으로 시장 영역에 편입시켜 온 것이다. 수도·전기·가스·철도 등 에너지와 SOC 산업 분야가 대표적이고, 교육과 보건 같은 사회서비스 부문이 또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민영화를 ‘재공공화’시키는 경제개혁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중요한 경제민주화다.

그럼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소리 높여 합창하고 있는 3명의 유력 대선후보들은 민영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우선 박근혜 후보는 이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문제의식이 없다고 판단된다. 박근혜표 경제민주화의 범위가 얼마나 좁은 것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면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는 어떨까. 문 후보는 지난달 24일 국민명령1호 타운홀 미팅에서 “공공연구소 연구원의 60%가 비정규직이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져 왔는지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저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를 지배했는데 이명박 정부에서 공공기관도 경쟁과 효율을 평가지표로 삼아 너무나 잘못된 방향으로 끌어왔다”는 평가를 한 바 있다. 특히 ‘경쟁과 효율’만을 평가지표로 삼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상당히 있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5년 동안 무모하게 추진해 온 민영화 후과를 어떻게 수습하고 ‘공공성’에 기반한 경제민주화를 펼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은 좀 더 기다려 봐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야권의 또 다른 유력 후보인 안철수 후보는 민영화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안 후보는 그의 책 <안철수의 생각>에서 “이제는 더 이상 공기업의 민영화가 만병통치는 아니라는 시각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차이나 텔레콤은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데 민간기업 이상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죠”라고 밝혔다. 또 “모든 공기업의 민영화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기업의 성격에 따라 달리 봐야 하는데, 특히 국민의 생활과 관련해서 공공재로서의 성격이 있는 철도·공항 등은 민영화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라고 강조했다.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부분이다.

이처럼 시장 실패를 극복하고 과도한 시장화를 교정하기 위해, 보다 광범위하게 공공경제 영역을 복원하고 확대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경제민주화 과제다.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는 이에 대해 일단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하나 더 있다. 최근 협동조합과 같은 사회적 경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사회적 경제도 시장경제·공공경제와 함께 우리 경제 사회의 한 축을 지탱해 줄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다는 진단들이 많다. 경제위기에 사회적 경제가 강한 특성이 있다는 점도 지적된다.

결국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는 독과점과 시장 실패를 ‘자유경쟁 시장’으로 바꾸는 개혁을 넘어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 시장 단일 경제구조에서 시장경제와 공공경제, 그리고 사회적 경제로 경제의 소유와 운영구조를 다양화시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시장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조금 확대된 경제체제를 지향하는 후보들을 기대해 볼 수 있을까.


이글은 매일노동뉴스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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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3정태인/새사연 원장

 

대통령 후보 경선이 한창이다. 자신이 대통령직에 얼마나 적합한 사람인지 알리려는, 또는 상대방이 얼마나 부적합한지 알리려는 후보들의 경쟁이 뜨겁다. 지난 여름에는 모두 잠자야 할 시간에 전국이 함성과 탄식으로 들썩거렸다. 신문을 펼쳐 보면 각 면의 머리기사 대부분은 경쟁 결과나 그 상황이 채우고 있다. 언론에 나올리 없는 우리의 ‘찌질한’ 일상도 경쟁으로 가득 차 있다. 다윈에 따르면 생물의 삶 자체가 ‘생존경쟁’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인류의 경쟁은, 특히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은 유별나다. 생산에 관한 모든 그래프, 예컨대 인구의 숫자라든가 1인당 섭취하는 칼로리, 에너지 소비량 등은 인류 역사 대부분 기간에 거의 수평선을 그리다가 한결같이 16세기에서 18세기 사이쯤에 수직 상승한다. 이런 경이로운 발전에 관한 극찬을 가장 많이 담은 책 한 권을 고른다면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이 꼽힐 것이다.

경쟁은 인간의 물질적 삶을 풍요로 이끌었다. 그러나 언제나 경쟁이 괜찮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최근 번역된 ‘경쟁의 종말’에서 코넬대의 로버트 프랭크 교수는 사회 전체의 파멸을 불러오는 경쟁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예컨대 화려하고 큰 수컷 공작의 꼬리, 수컷 코끼리물범의 엄청난 체중, 수컷 말코손바닥사슴의 큰 뿔이 그렇다. 이런 육체의 진화는 생산력 높은 암컷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그 진화 경쟁의 결과, 종 전체가 사자와 같은 맹수에게 잡아먹히기 딱 좋아졌다. 경쟁의 결과가 멸종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경쟁이란 아주 거칠게 요약하자면 정해진 끝이 있을 수 없는 상대적 지위 경쟁, 그리고 그 결과(등수)에 따라 보상의 차이가 어마어마한 경쟁이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 치르고 있는 경쟁이 딱 그렇지 않은가. 우리 때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훨씬 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아이들은 옆자리의 아이와 경쟁하고 있다. 그 결과는 아이들의 창의력 고갈, 교육에 의한 세습 귀족의 탄생, 그리고 출산율 저하다. 한국 사회의 퇴보가 불을 보듯 뻔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학벌과 직업에 따라 삶이 천양지차로 갈린다. 사회의 불평등이, 보통 사람은 질 수밖에 없는 경쟁을 아이들에게 강요한다. 그 경쟁의 결과는 절망의 구렁텅이다. 아이들이 맞닥뜨릴 각종 함정 역시 우리 세대의 잘못된 경쟁이 만들어 놓았다. 평생 저금만 해도 살 수 없을 만큼 높아진 집값, 청년들이 한없이 취직 준비만 하도록 만드는 직업의 양극화 역시 바로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죽도록 경쟁한 결과가 아닌가.

만일 직업의 귀천이 없다면, 나아가 자신이 어떻게 태어나든 삶에 별 차이가 없다면 왜 이런 바보 같은 경쟁을 할 것인가?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회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무슨 공부를 하든, 무슨 일을 하든 물질적 보수와 사회적 인정을 합해서 큰 차이가 없는 사회를 만들면 된다. 북유럽 나라들이 그렇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성장률도 더 높다. 이번 대선에서 이런 세상으로 가는 문을 열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아예 없거나, 우리 아이들이 아주 오랜 고통을 겪은 후에야 열릴 것이다. 모든 이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경쟁, 그리고 협동을 내세운 후보는 누구일까.

이글은 여성신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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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2.06.18정태인/새사연 원장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 삼성의 광고 문구다. “부자 되세요!”와 함께 희망차게 맞은 새 밀레니엄의 첫 10년 한국 사회를 이보다 잘 보여주는 카피는 없었다. 이들이 부추긴 ‘죽음에 이르는 경쟁’의 결과 한국은 자살률 세계 1위이고, 더구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증가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한국이 1등을 기록하고 있는 수치는 많다. 특히 성차별을 보여주는 지표들이 그렇다. 남녀 임금격차는 38.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5배이고 여성 임금 근로자 중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42.7%로 역시 1위다. 대체로 가사 및 돌봄노동 시간을 의미하는 무급노동 시간은 여성 135분, 남성 45분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격차가 크다. 여성의 비중이 큰 노인 빈곤율 또한 세계 1위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각종 성평등 지수에서 100위 밖에 머무르는 것은 당연하다. ‘다이내믹 한국’에서 다이내믹하게 자신의 지위, 특히 발언권이 위축되는 걸 체감하는 남성들로선 이 수치 자체를 믿을 수 없다. 단칸방에서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 그것도 몸짓 발짓으로 담배와 재떨이를 갖다 바치게 하는 걸 보며 컸는데 이젠 아파트 단지 외진 구석에서 숨어 피워야 하니 이런 수치를 믿지 못할 수밖에. 등수와 느낌의 차이는 성평등 지수가 남녀 간 상대적 격차를 기초로 해서 산정됐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 여성의 문자해독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남성과 비교한 상대적 해독률은 여전히 낮기 때문에 이 격차를 대상으로 순위를 매기면 이 부문에서도 한국은 100위권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이 수치로 호들갑을 떨지 말자”는 주장은 그래서 더 못나 보인다. 문제는 여성들의 능력은 과거에 비해 훨씬 증가했는데 능력 발휘의 기회는 여전히 적다는 점에 있다. 1990년대 인기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처럼 공부를 훨씬 잘하는 딸이 아들을 위해 대학을 포기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겠지만 대학을 졸업한 딸이 취직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즉 시장은 여전히 고루한 성차별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주류경제학의 진단은 아주 명쾌하다. 시장이 알아서 불평등을 없애줄 것이란 얘기다. 그 논리도 아주 쉽다. 만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능력 있는 여성을 채용하지 않는 기업이 있다면 결국 시장에서 퇴출될 것이기 때문에 시장은 능력 순서대로 고용할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현실의 시장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최근 최고경영자들에게 그저 이름만 늘어놓고 채용 순위를 정하라는 실험을 한 결과, 이들은 앵글로색슨계 남성 백인의 전형적 이름들을 꼽았다. 냉혹한 시장의 논리와 달리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시장이야말로 정의나 배려, 평등과 같은 다른 가치가 스며들 수 없기 때문이다. 효율성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시장이 실은 비효율의 강고한 토대인 것이다.

고용시장은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 맡기려고 하는 일을 누가 더 잘할지 어떻게 알겠는가. 관행에 따라 고정관념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보다는 남녀 간, 지역 간, 학력 간 또 다른 어떤 기준에 따른 차별을 없애는 게 더 효율적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해마다 돌아가면서 성평등지수 1, 2, 3위를 차지하는 북유럽 국가들의 높은 성장률은 이런 추론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노르웨이 정부는 남녀의 능력이 동일하다는 단순한 가정하에 공기업 최고경영자 비율을 30% 이상으로 단숨에 끌어올렸고 이를 민간에도 적용할 예정이다. 나아가 성평등은 성차에 따른 다양성을 확보해 주기 때문에 효율성을 더욱 북돋운다. 평등은 여러 경로로 효율을 높일 수 있는데 기회 닿는 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 글은 여성신문에 기고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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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1.05.02정태인/새사연 원장

뱅뱅 머릿 속을 맴돌 뿐, 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 예컨대 “그/그녀가 왜 나를 떠났을까”같은 종류다. 아무리 골몰해 봐야 답이 없을 것이라거나, 기껏 답이라고 내봐야 틀릴 수 밖에 없는 문제들을 나이가 들만큼 들어서야 분간하게 됐지만, 우석훈 박사가 영웅처럼 제기하고 돈키호테처럼 답(짱돌을 들으라니^^) 을 낸 ‘88만원 세대’가 그런 요령부득의 화두다.

요즘 내 결론은 ‘세대간 착취’이다. 내 자식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게 결국 다음 세대 대부분을 착취하는 걸로 귀결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난 자본가가 노동자를 괴롭히려고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이윤극대화 방정식을 풀다 보니 그게 결국 착취에 이르른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기성 세대가 최선을 다한 결과가 결국 아이들 세대 전체를 착취하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깨달음이다.

우리가 결코 빠져 나갈 수 없는 미로에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 있다. 혹시 내가 그 함정에 빠진 게 아닌가 싶을 때, 자문해봐야 할 리트머스 시험지는 이렇다. “남이 다 하면 나도 따라 할 수 밖에 없다”(공포), 그리고 “남이 다 안 하는 경우 나만 하면 ‘대박’이다”(탐욕). 이 두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바로 사교육이 그렇다. 그리고 부동산(주식)에 대한 우리 태도도 비슷하다. 남들이 다 과외시키는데 우리 애만 마냥 놔둘 수 없고, 남들이 다 빚내서 집사는데 나만 유유자적, 안빈낙도 하다간 영원히 셋방살이 신세일 거 같고, 반대로 남들이 다 안 하는 경우 어디 값싸고 좋은 과외 선생이나 잘 나갈 땅이 없나, 기웃거리는 우리는 바로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죄수의 딜레마는 ‘김승옥의 염소’보다 더 힘이 세다.

두 게임의 결과로 사교육과 부동산 가격이 올라간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 게임은 아주 희귀한 예외를 빼곤 백이면 백 부자들이 이긴다. 때론 지배계급이 처음부터 그런 게임을 설계할 수 있고 어쩌다 보니 그런 상황이 된 경우 부자들은 그야말로 횡재한 것이다. 졸릭(Zollick)의 ‘경쟁적 자유화’는 죄수의 딜레마를 응용한 것이고 김현종은 부처님 손바닥안의 손오공처럼 한미 FTA를 추진했다(앞에서 말한 리트머스 시험지를 적용해 보라).

집값과 땅값이 하늘로 치솟고 과외비에 허리가 휜다. 보릿고개가 사라진지 이미 오랜데, 우리 아이들이 더 절망적인 건 대부분 아무도 이길 수 없는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내 아이만은 그런 함정을 신묘하게 비켜 나갈 것이고 그러면 ‘대박’이라는 황당무계한 낙관이, 아무리 밤을 새 일해도 집을 살 수 없고 ‘신의 직장’에만 목을 매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래서 분명히 ‘세대간 착취’다. 우리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까지 누려야 할 자연을 파괴하는 4대강 사업만 미래를 착취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근시안적 경쟁 탓에 이미 올라버릴대로 오른 집값을 아이들이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단 1점에 목을 매게 하는 입시는 또 어떤가.

우리 모두 매일 한 삽씩 절망의 늪을 파면서 내 아이만은 늪 밖에, 아름다운 고층 빌딩에 살 수 있을거라는 터무니없는 낙관이 우리 아이들을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게임이론으로 말하자면 ‘죄수의 딜레마’를 ‘사슴사냥게임’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고 현실로 말하자면 지금의 무한경쟁에서 다 같이 빠져 나오자고 합의하면 된다.  

‘사교육 금지’, ‘부동산 투기 금지’에 마음을 모을 때만 비로소 이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 홀로 그럴 수 없다는 이유로 지는 게임을 계속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말 그대로 ‘88만원 세대’일 수 밖에 없다. 투기의 미몽에서 얼마간 벗어난 지난 지방선거와 재보선은 우리에게 비춘 한줄기 빛이다.

이 글은 'PD저널'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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