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새사연 이사


 


지나온 한국의 민주화투쟁 역사를 보면 일정한 법칙이 발견된다. 민주화 투쟁은 매 순간 일정한 한계를 드러냈으나 그 한계를 딛고 다시 한 걸음 전진해 온 역사였던 것이다. 한계야말로 전진의 동력이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4월 혁명은 수많은 인명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승만 장기 독재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요즘 자주 나온 대통령 하야투쟁이 실질적인 성공을 거둔 사례였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박정희가 이끄는 5.16군사쿠데타를 맞이하면서 4월 혁명은 여실히 한계를 드러냈다. 5.16군사쿠데타 당시 그 어떤 저항도 없었다. 4월혁명 이후 거리를 가득 메웠던 시위대는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결정적 요인은 군부의 총칼 앞에 목숨 걸 각오가 되어 않았다는 데 있었다. 조정래 소설 <한강>에는 4월 혁명에 참여했던 학생들의 대화 내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이거 다 된 밥에 재 뿌린 건데, 이렇게 당하고 있어야만 되나? 한 번쯤 밀어붙여 봐야 되는 거 아냐?"

"목숨이 몇 갠데? 극형이라는 말 아직 안 들려?"

"괜히 똥폼 잡지 말어. 군대에서 말하는 시범쪼로 걸렸다간 국물도 없어. 저치들 지금 지네들 위신 세울려고 아무나 하나 걸려들기만 바라고 독이 올라 있는 것 몰라?"


4월 혁명의 한계를 딛고 군부의 총칼 앞에 목숨 걸고 투쟁할 수 있기까지 무려 19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역사를 한 단계 도약시킨 위대한 투쟁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만들어졌다. 1971년 대통령선거부터 본격화된 박정희 정권의 노골적인 호남 차별은 호남인들의 가슴 속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겨 놓았다. 한은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목숨 건 항쟁의지로 폭발했다.


5.18민주화운동에서 시민들의 결사 항전은 세 단계에 걸쳐 비상했다. 첫 번째 단계는 5월 20일부터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이 항쟁에 적극 가세한 것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5월 21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발포에 맞서 시민군을 결성한 것이었다. 세 단계는 5월 27일 계엄군의 최후 진압 작전에 맞서 시민군이 도청을 사수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복잡한 토론 과정 없이 본능적 대응으로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광주 시민은 극한 상황에서도 단 한순간 물러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군부 앞에 타협하고 굴복할 여지를 원천적으로 제거한 것이 바로 5․18광주정신이었다.


1980년 5월 광주는 군부의 총칼 앞에 굴복했던 4월 혁명의 한계를 과감히 뛰어넘었다. 5.18광주는 민주화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광주의 세례를 받은 학생운동을 필두로 민주화투쟁의 파노라마가 장엄하게 펼쳤다. 하지만 5.18광주에서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항쟁에 참여했던 광주 시민 자신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느꼈던 지점이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지역적 고립’이었다. 광주 시민들은 제발 다른 지역에서도 함께 일어나 주기를 갈망했으나 전혀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외로운 도시였다. 이 사실은 이후 무수히 많은 지역들로 하여금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 부채의식을 갚는 것은 군부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투쟁하는 것뿐이었다. 마침내 이를 입증할 기회가 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이 활화산처럼 폭발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군부대를 투입해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조만간 군부대가 투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자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시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먼저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이 남달리 강했던 부산 시민들이 치고 나갔다. 일단의 학생들이 분신을 각오하고 가톨릭회관 옥상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가운데 수십만의 부산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투쟁의 여파는 곧바로 전국 각지로 펴져 나갔다. 상황은 더 이상 군부대 투입으로 제압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민주화투쟁이 승리한 것이다.


6월 민주항쟁은 군부에 맞서 목숨 걸고 투쟁했다는 점에서 5.18광주정신을 계승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지역적 고립이라는 5․18광주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수많은 지역이 투쟁에 동참했다. 천안은 3.1운동 이후 처음 시위를 경험했다. 충주는 단군 이래 처음이었다.


6월 민주항쟁은 민주화를 정착시키는 역사적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민주화투쟁 성과를 제도권에 온전히 안착시키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1987년 12월 직선제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결정적인 순간에 민주화투쟁을 이끌었던 김대중․김영삼 양김씨가 갈라서고 말았다. 결과는 군부 출신인 노태우에게 승리를 헌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태는 1990년 3당합당으로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보수 절대 우위 시대가 열렸다.


촛불시민혁명은 보수 세력을 붕괴시켰다. 보수의 정치적 구심인 새누리당도 두 조각내면서 코너로 몰아세웠다. 남은 과제는 성과를 제도권에 안착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다수 시민들이 그에 대한 긴장의 끈을 늦추고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 조만간 치러질 가능성이 큰 대선 결과를 통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존 정치판 흐름에 매몰되지 않고 냉철하게 대선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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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정/ 새사연 연구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언젠가부터 이 속담은 청년들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말로 쓰인다. 청년들이 더 이상 고생을 사서 할 만큼 여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근래 대다수의 청년들은 높은 학비를 감내하면서 ‘일 반, 공부 반’으로 겨우 학교생활을 마친다. 그러나 졸업조차도 취업준비를 위한 휴학과 취업 실패로 유예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은 부모세대보다 늦은 나이까지 부모님의 그늘에 있거나, 청춘을 담보로 받은 대출을 통해 각박한 취업 시장의 경쟁에서 자리를 잡으려 발버둥 친다. 한편으로는 취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청년들이 저임금 인턴이나 비정규직 등의 좋지 않은 일자리를 채우고 있다. 심화되는 청년들의 문제, 특히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고자 지난 정권들 모두 다양한 정책을 선보였다. 하지만 단기적 시각으로 수치적 정책 효과에만 집착한 나머지 불안정한 일자리만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청년에게 필요한 지원이나 미래에 대한 고민에 공감 없이 정치인과 기성세대들의 자위를 위한 정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정책들은 전보다 많은 수의 청년들을 취약계층으로 만드는 데에 일조하였다.


이 시대는 청년들을 ‘포기하는 청년’으로 지칭하지만, 연대를 통해 만나본 청년들은 강했다.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힘든 상황에서도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거나 소박하지만 꿈을 이루고자 다양한 시도를 하는 청년들이 곳곳에 있다. 또한 운동을 통해 청년들에게 필요한 정책과 공간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나아가 열악한 주거,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 등 자신들의 절박한 상황을 그들만의 재치로 사회와 공유하고자 다방면으로 표출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 광화문의 촛불‘시위’ 현장을 촛불 ‘축제’처럼 만든 것도 그들이 아니었던가. 덕분에 더 이상 청년들의 힘든 상황을 ‘젊다면 당연히 겪어야 할’ 통과 의례가 아닌 미래와 직결되는 사회문제 중 하나로 보게 되었다. 청년수당, 청년허브, 청년협동조합주택 등의 수도권을 중심으로 시도되었던 제도들이 전국 지자체 단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할 때 ‘예’라고 하는 사람


모두가 인턴과 해외 취업, 창업으로는 청년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할 때, 소신 있게 이전 불통정권들을 오마주하는 대선주자가 나타났다. 청년들과 김치찌개를 먹으며 “인턴을 늘려야 한다(1월 13일).”고 말하고, ‘청년과 대한민국의 미래’라는 주제로 강연하기 위해 대학교를 찾아가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하는 만큼 해외로 진출하고, 정 일이 없으면 자원봉사라도 했으면 한다(1월 18일).”고 말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하 전 총장)이 그 주인공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모든 부처가 함께 노력해서 우선 7만 개의 청년 인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2009년).”고 한 것과 박근혜 대통령이 “나라가 텅텅 빌 정도로 중동에 가서 노력해보라(2015년)”고 했던 말이 떠오르는 것은 비단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전 총장은 청년들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대장장이라도 될 셈인가.


반기문 전 총장은 지난 18일 조선대학교에서 열린 강연에서 청년들이 ‘글로벌 스탠다드한 시야’를 갖고 ‘스피릿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자원봉사 발언을 하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글로벌 스탠다드는 프레카리아트 증가와 저임금 문제로 우려가 큰 국제사회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유엔 사무총장직을 역임하고 있던 2015년, 유엔 사무국에서 무급인턴으로 근무하던 청년 데이비드 하이드는 사무국이 위치한 제네바의 높은 물가에 집을 얻지 못하고 호숫가에 텐트를 치고 생활하며 인턴직을 수행했다. 데이비드 하이드의 일화를 통해 유엔에서 무급인턴을 선발할 때 실제로 경제적으로 무급인턴 생활이 감당 가능한지를 물어본다는 사실과 이를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인턴들이 매년 다수 있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러자 세계 언론은 유엔의 인턴제도를 비난했고 인턴들도 파업을 감행했다.


오마이뉴스 기사에 따르면, 1996년 131명이었던 무급 인턴이 반기문 총장의 재임 중인 2014년 기준으로 4,018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1) 반기문 전 총장이 무급인턴 제도를 유엔에 도입한 총장은 아니지만, 규모를 키우고 상황을 심화시킨 유엔총장이라는 평가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반기문 전 총장이 말하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유엔 사무총장 재임시절에서 연장된 생각이라면, 이 시대 청년들이 취업시장에서 갖는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또한 젊다는 이유로 불안정한 일자리와 저임금의 청년을 착취하는 구조를 감수하는 것을 당연시 하는 사회분위기를 강화시킬 것이다.


취업 실패 청년은 패자가 아니다


한 번 실패가 영원한 실패가 되어서는 안 되므로 ‘패자부활전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반 전 총장의 발언은 매우 실망스럽다. 실패를 경험 한 사람을 ‘패자’로 보는 시각은 청년과 공감하는 자세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루어낸 성과가 과거 어려운 시절을 이겨낸 개인의 노력의 결과물임을 강조하고, 피난지역의 어려움과 국내 청년들의 상황을 비교하며 한국 청년의 상황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개인의 노력의 결과로 성패가 좌우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짐작된다. 세대가 다르고 목표가 다른 사람에게 동병상련의 자세를 바라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미 국제 조직의 대표 자리에 있었던 인사에게 기대할 수 있는 정도의 자세도 아니다. 우리는 다양한 계층의 어려움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진심이 있는 대표를 원한다.

 

1) 한경돈, 오마이뉴스, <청년실업 해결하겠단 반기문, 근데 왜 그러셨어요>, 2017년 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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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길/ 새사연 연구이사 


보수! 너무나 익숙한 용어이다. 너무나 익숙해서 마치 자연 질서의 한 부분을 표현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던 세력의 호칭이다. 어느 학자는 보수는 인간의 욕망이기 때문에 어느 곳에든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맞다. 이런 식이라면 보수는 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보수가 오랫동안 우리 사회 다수를 차지하면서 큰 소리 쳐 온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데가 있다. 보수의 역사에 아로새겨져 있는 대표적 단어들은 친일, 분단, 독재, 부패 등이다. 모두 부정적 이미지를 가득 담고 있다. 보수의 정당성을 뒷받침 해온 유일한 업적은 산업화 성공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엄밀하게 따지면 상당히 과장된 것이다. 한국의 산업화는 기본적으로 엄청난 교육열, 높은 저축률, 중소기업들의 왕성한 투자 열기 등을 원동력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힘이 없었다면 그 누가 나섰어도 산업화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보수의 위기1. ‘독재세력이라는 낙인


30년 전 보수 세력은 존폐 위기에 내몰린 적이 있었다. 민주화투쟁의 승리 여파로 청산되어야 할 독재 세력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당시 보수 세력은 숨을 죽인 채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보수 세력을 기사회생시킨 일이 벌어졌다. 민주화투쟁을 이끈 김대중․김영삼 양김씨가 갈라선 것이다.


양김씨의 분열은 1987년 대선에서 군부 출신 노태우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보수 세력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반전을 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어서 3당합당을 통한 민주자유당(이후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거쳐 새누리당에 이르렀음)이 출범했다. 보수 세력은 정치 영역에서 민주자유당을, 경제 영역에서 재벌을 구심으로 가까스로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3당합당 과정을 통해 보수는 이질적인 세력의 동맹을 구조화함으로써 그 외연을 크게 넓일 수 있었다. 동맹은 크게 세 가지였다, 먼저 과거 군부독재의 주요 기반이었던 대구경북 (TK)과 민주화투쟁의 기지였던 부산경남(PK)이 같은 ‘영남’이라는 카테고리로 지역동맹을 결성했다. 두 번째로 산업화에 몸 바쳤던 지금의 60대와 어느 정도 민주화투쟁의 세례를 받았던 50대가 나이 들면 보수적인 된다는 단순한 이유를 바탕으로 세대동맹을 결성했다. 마지막으로 박정희식 국가주의와 자유주의적 시장주의라는 이질적인 이념을 지닌 두 세력이 보수라는 끈 하나로 묶어 이념동맹을 형성했다.


보수의 위기2. 경제관리의 무능함


3대 동맹을 바탕으로 탄탄대로를 걷는가 싶었던 보수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이했다. 보수가 자랑하던 경제관리 능력에서 치명적 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그 결과 정권을 내주어야 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보수는 야인 생활을 해야 했다. 보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했다. 보수 세력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경제적 무능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문제는 대안이었다. 바로 그 때 이명박이 급속히 부각되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임 시절 추진한 청계천 복원공사와 대중교통 혁신으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보수 세력은 이명박의 두 가지 사업 성공을 통해 과거 박정희 시대를 관통했던 높은 효율성을 발견했다. 보수 세력은 이명박이 바로 그 효율성을 바탕을 한국 경제를 되살릴 것이라고 믿었다. 보수는 이명박을 선택했다. 경제 회생을 바라는 많은 국민들이 여기에 가세했다. 이명박은 2007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이명박은 보수가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잘못 해석했다. 이명박은 청계천 복원공사 성공에 대한 보수의 지지를 과거 1970년대 식 개발주의에 대한 지지로 착각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청계천 공사의 전국판이라고 할 한반도 대운하였다. 이명박은 한반도 대운하가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자 4대강 살리기로 슬쩍 우회했다. 당시 한국 경제는 전면적인 혁신을 통해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할 중대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를 주도해야할 정부는 4대강에서 삽질만 하느라 시간을 다 허비했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 회생에서 완전 실패했다. 보수는 실망하지 않고 히든카드를 꺼내들었다. 박정희 딸 박근혜였다. 보수는 박근혜를 통해 박정희 시대의 정신으로 경제를 되살릴 것이라 기대했다. 박근혜는 경제 회생의 비책으로 창조경제를 앞세웠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조차 창조경제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박근혜 정부가 방향을 못 잡고 헤매는 사이 한국 경제는 하릴 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경제 성적표는 앞선 김대중․노무현에 비해서도 형편없이 저조했다. 장하성 교수가 어느 신문 칼럼에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이명박․박근혜 정부 경제 성적표를 조사 발표한 적이 있는데 대략 이렇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누적 경제 성장률은 60퍼센트 정도 된다. 그에 반해 이명박 박근혜 정부 8년 동안 누적 경제 성장률은 그 절반도 안 되는 28퍼센트 밖에 되지 않는다. 1인당 국민총생산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김영삼 정부가 초래한 외환위기 여파로 1998년 4천 달러 이상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1만 1천 달러 늘어났다. 반면 이명박 박근혜 정부 8년 동안 1인당 국민총생산은 4100달러 증가하는데 그쳤다. 국민의 살림살이는 어떠한가? 가계소득은 김대중 정부 시절 1998년 외환위기로 크게 감소했지만 이후 4년 동안 19퍼센트 늘어났다. 노무현 정부 5년을 거치며 10퍼센트 증가했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8년 동안 가계소득은 누적 경제성장률의 3분의 1 수준인 10퍼센트 증가에 머물렀다.


이번에는 가계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보자. 해당 수치는 김대중 정부 마지막 해에는 97퍼센트,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에는 105퍼센트였다. 그러던 것이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에 125퍼센트로 크게 증가했고 박근혜 정부 4년째인 2016년에는 150퍼센트를 넘어서고 말았다. 액면 그대로 국민부채시대가 열린 것이다. 빡빡해진 것은 가계살림만이 아니었다. 나라살림 사정 또한 다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에 정부 재정은 6.8조 원 흑자였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 8년을 거치며 매년 재정적자를 기록해 누적 재정적자가 무려 166조 원에 이르렀다.


보수 세력은 당면한 한국 경제의 위기를 타개할 비책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동안 보수가 축적해온 노하우는 새로운 상황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음이 명확해졌다. 경제는 보수가 유능하다는 신화는 맥없이 깨져 나갔다. 보수 세력 내부에서 심각한 동요와 이탈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수의 위기3. 동맹의 균열


다급해진 박근혜 진영은 4.13총선을 앞두고 전가의 보도였던 좌우 대결 구도를 재현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한국사 교과서의 검인정을 폐지하고 국정교과서로 단일화시키는 역사전쟁 불을 지핀 것이다. 좌우 진영이 한국사 그중에서도 근현대사를 두고 첨예한 입장 대결을 보여 온 점을 주목한 것이다. 역사전쟁을 계기로 우파가 총결집할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이념동맹의 한 축을 형성했던 자유주의 세력이 강하게 반발한 것이다. 이들의 눈에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개인의 선택권을 억압하는 획일화의 극치였던 것이다.


4.13총선은 새누리당이 압승할 것이라는 관측을 뒤엎고 새누리당의 참패로 나타났다. 4.13총선 결과는 세력을 떠받쳤던 각종 동맹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음을 드러냈다. 지역동맹의 한 축인 부산경남 지역과 세대동맹의 한 축인 50대에서도 이탈 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보수의 위기4. 국가의 사유화


심각한 균열로 인해 한없이 위태로워져 있던 보수 세력 위로 이른바 최순실 사태가 덮쳐 왔다.


최순실 사태는 보수 세력을 힘겹게 유지해 주던 정치적 끈을 가차 없이 절단시켜 버렸다. 최순실 사태는 최고 통치자의 무식과 무능, 무책임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의심을 받아 왔던 유능한 보수라는 신화는 완벽하게 깨져 나갔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은 국가라는 공적 기구가 어떻게 사유화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국가관을 중시했던 보수 진영의 가치 체계를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보수가 안겨다줄 수 있는 권위와 안정감마저도 환상에 불과했음에 드러났다.


보수 세력은 일제히 멘붕 상태에 빠졌다. 보수를 보는 사회적 시선도 싸늘해졌다. 스스로 보수라고 말했다가는 일거에 왕따 당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올해 초 한 일간지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유권자가 원하는 대통령 리더십은 진보가 64퍼센트, 보수가 26퍼센트인 것으로 나타났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비슷했던 수치가 확 달라진 것이다. 이 와중에서 추진된 박근혜 탄핵은 보수 세력을 산산 조각냈다. 박근혜 탄핵을 둘러싼 입장 차이로 보수가 사분오열된 것이다.


보수 세력은 붕괴되었다. 물론 일시적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쉽게 끝날 일도 아니다. 보수 세력 붕괴의 파장은 꾀 길게 이어질 것이다. 보수의 붕괴는 한국 정치 나아가 사회 전반을 혁신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기회이다. 과연 그 답은 무엇일까? 정치권부터 먼저 나서서 응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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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진/ 새사연 이사

 


오래전 지중해 동쪽 끝 연안 어딘가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종이 셋 있었는데 그가 보기에 각자 재능이 달랐다. 어느 날 부자는 멀리 떠날 일이 생기자 그 중에 제일 능력 있어 보이는 종에게 다섯 달란트, 다음으로 능력 있어 보이는 종에게 두 달란트, 그리고 나머지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겼다. 주인이 돌아와 종들을 불러 모으니,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열심히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의 이문(利文)을 남겼고, 두 달란트를 받은 종도 열심히 장사를 하여 두 달란트를 이문으로 남겼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들고 왔다.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이자라도 받았으면 조금이라도 이문이 남았을 텐데 그 종은 장사도 두렵고 원금을 떼이는 것도 두려워 그냥 땅에 묻어 두었다는 것이다. 부자는 그 종을 어두운 곳으로 내쫓고, 종에게 맡겼던 한 달란트를 열 달란트를 만든 종에게 주었다.


 

이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목자들은 절대주가 내린 재능을 그 은혜를 갚는 일에 써야 한다는 교훈으로 새겨들으라 해석하지만, 교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직장에서 흔히 보는 사장이나 상사를 보는 듯하여 영 씁쓸하다.


 

달란트는 금과 은의 무게를 재는 단위였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성경의 기록만을 놓고 따져보면 6천 드라크마에 해당한다. 그리스 지역에서 1드라크마는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은의 무게였다. , 1달란트는 6천 일치 품삯에 달하는 매우 큰 양이다.


 

달란트는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변형된 발음이며, 고대 그리스식 발음으로는 탈란톤(τάλαντον), 라틴어로는 탈렌툼(talentum)에 가깝다. 미국식 영어로는 탤런트(talent)이다. 익히 알다시피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은의 무게나 화폐의 단위라는 본래의 의미 대신 재능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과거에 은의 무게를 재는 단위가 재능으로 바뀐 것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부의 축적이 개인의 재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는 인식이 굳어진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 못마땅하기도 하다. 목자들의 해석처럼 달란트는 그 달란트를 부여한 절대주를 위해서 써야 되는 것이라면, 각자의 재능은 사익만을 위해서 써서는 안 된다. 재능은 사회적으로 얻어지기도 하므로 사회를 위해서도 써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샌델의 하버드대학 강의를 듣다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노력이라는 재능을 오로지 개인의 것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논박이 오고가는 과정에서 하버드대학에 들어오기까지 스스로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 성과는 개인이 가져가는 것이 맞다는 매혹적인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샌델이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집에서 첫째로 태어난 사람 손 들어 보세요.” 대부분의 학생이 손을 드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어서 첫째로 태어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할 확률이 높다는 통계분석결과를 들려준다. 사회적 구조도 개인의 노력에 영향을 끼친다.


 

신자유주의자 또는 경쟁주의 옹호론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개인의 노력은 오로지 개인의 것이며, 따라서 노력을 통해 얻어진 재능도 오로지 개인의 것이고, 그 재능을 통해 축적한 부도 오로지 개인의 것이라는 달콤한 논리이다. 이 논리체계에서는 세금은 개인의 노력을 강탈하는 도둑질이라는 궤변도 성립한다. 하지만 우리는 개인의 재능이 출발선이나 기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달란트를 재능으로 보는 관점에 동의하고 동양사상에서 비슷한 것을 고르라 한다면, 첫음절의 음가가 으로 서로 비슷한 덕()을 고를 수 있다. 덕에는 크다는 뜻이 있다. 능력 및 작용이라는 뜻도 있으며 베풀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은혜이기도 하며 복()이기도 하다. 본래 덕은 바로 보다()’라는 뜻과 행한다()’라는 의미가 합쳐졌기에 이처럼 다채로운 뜻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 재능이란 바로 보고 행함이다. 당연히 옳은 일을 행하고 베푸는 것이 재능이다.


 

덕과 함께 짝으로 쓰이는 것이 업()이다. 업은 일을 뜻한다. 순서라는 뜻이 있고, 잇는다는 뜻도 있다. 그러다보니 기초라는 뜻도 있고, 공적을 뜻하기도 한다. 일을 조심히 하라는 뜻인지 두려움, 위태로움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일이라는 의미에서 보자면 서구의 달란트와 좀 더 일맥상통하는 면도 있다.


 

불교가 한자문화권으로 넘어오면서 카르마(Karma)가 업으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카르마는 일차적으로 행위를 뜻하는 말이지만 힌두문명권에서는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이 연쇄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악행은 악행을 불러오고 선행은 선행을 불러오는 식으로 무한하게 연결된다는 개념이다. 그래서 덕업을 쌓으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선의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나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선행도 이러한데 하물며 이익을 밝히는 일은 오죽하겠는가. 경쟁에 기대어 경제행위를 하면 손해보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자신이 쌓은 부가 오롯이 자기 노력 때문이라 보기 어려운 이유이다. 또한 일을 함에 있어 나쁜 영향이 있지는 않은지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는 사상의 배경이기도 하다.


 

카르마는 윤회와 결합하면서 힌두문화권 특유의 지독한 사회계급체계를 낳았다. 자신이 천민으로 태어난 이유는 전생의 죄업 때문이라는 지배층의 논리로 쓰인 것이다. 이처럼 아무리 좋은 사상도 욕심 많은 기득권에게 악용되면 사회전체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민중이 끊임없이 주류나 상식이라는 지식체계를 곱씹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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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박세길/ 새사연 이사


촛불시민혁명! 너도나도 혁명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혹자는 사회구조적 변동을 수반하지 않았다하여 신중한 태도를 보이지만 아직은 초기 단계인 만큼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될 것 같다. 무엇보다도 혁명의 가장 중요한 척도인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주체 세력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촛불시민혁명의 주역은 그 어떤 조직 동원과 무관하게 오로지 개인의 결심에 따라 참여한 ‘자발적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참가자의 70~90퍼센트를 치지했으며 촛불시민혁명의 전 과정을 지배했다. 시민들은 특정 리더에 의존하지 않고도 (소설가 이문열이 북한의 아리랑 축전을 보는 것 같다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탄탄한 연대와 통일성을 과시했다. 더불어 비폭력 평화시위를 바탕으로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대의 기구를 자신들의 통제 아래로 끌어들이는 탁월한 전략 능력을 선보였다. 시민 스스로가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다. 이러한 리더십은 특정 개인이나 소수 그룹으로부터 나온다는 종전의 통념을 뒤집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촛불시민혁명은 가슴 벅찬 첫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앞날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탄핵 절차는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고, 정권교체가 온전하게 이루어질 지도 미지수이다. 게다가 야권 혹은 진보세력은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상황을 맞이했다. 아직도 그들은 촛불시민혁명을 어떻게 발전시켜 가야 할 지 감을 못 잡고 있다. 그 반대편에서 보수 기득권 세력은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을 가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결국 온갖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은 고스란히 촛불시민혁명 주역들의 몫이 되고 있다. 과연 이들이 최우선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는 무엇일까?


프랑스대혁명으로 읽는 시민운동의 교훈


이 시점에서 근대 혁명의 빅뱅이라 불리는 프랑스대혁명을 되짚어보는 것이 도움 될 것 같다.프랑스대혁명은 1789년 7월 14일 시민들이 압제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한 날부터 1814년 부르봉 왕조가 복귀한 순간까지 장장 25년에 걸쳐 진행된 거대한 드라마였다.


바스티유 감옥 점령과 함께 폭동이 프랑스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구체제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이 이루어졌다. 권력은 왕정과 시민들의 대표기관인 국민의회로 양분되었다. 신흥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던 국민의회를 앞세워 입헌군주제를 골간으로 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했다. 선거권은 400만 명의 부유한 남성에게만 부여되었다. 선거권을 갖지 못한 노동자와 가난한 민중 사이에서는 불만이 쌓였고, 급진적 정치 결사체인 자코뱅 클럽과 하층계급 출신 혁명가 단체인 상퀼로트를 중심으로 민중세력은 급속히 모여들었다.


한편 프랑스 반혁명 인사들의 거점이자 루이16세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 손잡고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했다. 그러자 파리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민중세력은 전면에 나서서 정세 주도권을 거머쥐었다.


프랑스대혁명은 제2의 혁명을 거치며 빠르게 왼쪽으로 이동해 갔다. 상황은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반혁명 세력을 생물학적으로 제거하려 한 공포정치가 실시되면서 극한으로 치달았다. 1793년 6월 10일부터 7월 27일까지 짧은 기간 동안 1천여 명 이상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공포정치는 시민들을 등 돌리게 했고 민중세력 내부의 분열을 초래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가 자신이 고안한 단두대에 의해 처형되는 것으로 공포정치는 막을 내렸다. 이후 프랑스대혁명은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혼미를 거듭했다.


상황을 수습한 인물은 다름 아닌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 평민 출신인 나폴레옹은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계속되는 혁명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정국의 주역으로 부상해 있었다. 나폴레옹은 일련의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손에 넣었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의 통치 아래 정국은 안정되었고 경제는 활력을 되찾았다. 농노제 폐지 등 대혁명이 남긴 과제들은 법제화되었다. 국가체제가 정비되고 법원, 학교 등에서 근대적 모델이 확립되었다.


군주제는 대혁명의 주요 청산 대상이었다. 기묘하게도 프랑스대혁명은 군주제의 손을 빌려 혁명 과업을 계승하는 모순된 상황을 보였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모순을 혁명전쟁의 지속적 승리를 통해 완화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이 모든 것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결국 나폴레옹은 밀려났고 최종적으로 부르봉 왕조의 복귀와 함께 대혁명도 막을 내렸다.


프랑스대혁명은 극가 극을 오갔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민주공화제를 안착시키는데 이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대혁명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시피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역사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프랑스대혁명의 가중 중요한 장면의 하나가 있다.


잃어버린 좌표를 찾아서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한 직후인 1789년 8월 26일 새로운 질서를 담은 ‘인권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선언)이 발표되었다. 인권선언은 1조에서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명시하는 등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천명함으로써 프랑스대혁명이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창출했다. 인권선언은 대혁명 주체의 뇌리에 아로새겨졌고 대혁명이 움켜쥐고 나아가야할 좌표로 자리 잡았다. 좌표가 뚜렷해짐으로써 대혁명은 일시적 후퇴나 좌초를 겪더라도 항해를 지속할 수가 있었다.


세상을 바꾼 혁명적 과정 앞에는 늘 좌표가 뚜렷했다. 그것들은 ‘민주화’, ‘자주화’, ‘사회화’ 등으로 집약되어 표현되어 왔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은 뒤이은 양김씨(김대중, 김영삼)의 분열과 군부정권의 연장, 3당 합당 등으로 극도로 뒤틀렸다. 그럼에도 민주화 정착이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되었던 것은 민주화라는 좌표가 뚜렷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촛불시민혁명을 이끌어갈 좌표는 무엇인가? 누구도 분명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보편적 가치를 함축한 좌표가 뚜렷하지 않다! 이는 촛불시민혁명이 지도와 나침반 없이 항해하다 자칫 좌초될 수도 있음을 말해준다. 바로 여기서 촛불시민혁명이 최우선적으로 풀어야할 숙제가 무엇인지가 밝혀진다. 아무리 둘러 봐도 답은 밖에서 찾을 수 없다. 답은 오직 촛불시민혁명 내부에 있다.


전통적 관점에서 볼 때 촛불시민혁명의 주역인 시민들은 제대로 조직돼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조직되지 않은 채 모래알처럼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조직된 것도 아니었고 조직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시민들이 맺은 관계망은 전혀 새로운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을 담을 유일한 개념은 ‘생태계’이다.


생물학의 발전은 자연 생태계에 대한 전통적 관점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해 왔다. 그 결과는 대략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생태계의 주인은 생명체이다.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능동적 주체이다. 단적으로 우리가 늘 들이마시는 산소도 태초의 생명체인 시아노박테리아가 수십억 년에 걸쳐 만들어낸 것이다. 둘째 생명체는 저마다 세계에서 중심적 존재이며 위계질서는 극히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존재한다. 심지어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지구의 진정한 주인공은 식물이며 동물은 그들의 종 번식을 돕는 조연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셋째 공존공생과 연대협력이 생태계를 작동시키는 기본 원리이다. 이를 바탕으로 미생물과 식물, 초식동물 등 ‘약자’들은 개체수와 생존율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수가 있었다.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장면인 세포 출현도 서로 대립하던 호기성 박테리아와 혐기성 박테리아가 미토콘드리아와 세포핵으로 공존공생의 길을 선택함에 따라 이루어졌다.


촛불시민혁명으로 되돌아보자. 촛불시민혁명의 주인은 사회적 생명체인 사람이다. 이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촛불시민혁명에서는 참가자의 재산을 따지지 않았다. 사회적 지위도 묻지 않았다. 나이를 따지는 것조차 금기시 되어 갔다. 오로지 사람이라는 가치 척도 하나로 만났다. 이는 촛불시민혁명이 낡은 질서의 대척점에 있는 해방공간임을 의미한다. 촛불시민혁명 참가자는 그 어떤 위계질서도 용납하지 않았다. 나를 대표하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이었다. 저마다의 세계에서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SNS를 기반으로 강력하고 광범위한 연대협력을 추구했다. 신기하리만치 생태계의 세 가지 특징을 정확히 구현했던 것이다!


시민들은 광장을 ‘점령’(이는 앞으로 매우 고귀한 용어가 될 것이다.)했고 그 과정을 합법화시켰다. 촛불시민혁명이 거둔 첫 번째 승리다. 시민들은 광장을 플랫폼 삼아 강력한 생태계를 형성했다. 시민들은 빠르게 익숙해졌고 나아가 능숙해졌다. 시민들은 바로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세상을 바꾸어 나갈 것이다. 시민들은 정당, 국회, 국가, 재벌 등 기존 영역들을 정치적 법리적으로 점령해 가면서 이들을 플랫폼으로 하는 생태계를 형성해 나갈 것이다. 그럼으로써 낡은 세계를 혁파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생태화’*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생태화! 몹시 낯설다. 하지만 혁명은 언제나 낯선 세계와 대면하기 마련이다. 혁명은 익숙한 세계와의 과감한 결별을 요구한다.


*생태화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과 과정은 『시간의 대화』(근간)으로 발표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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