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한 무더위도 어느 덧 흔적만 남겨 놓고, 창 밖으론 가을을 채근하는 비도 내리지만 마음은 답답하기 그지 없다. 2008년 금융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고, 우리 사회에서도 불과 2년 전 이 맘 때 여야 후보가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외쳤다. 세월호 참사 역시 이윤을 목표로 전 사회가 움직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하지만 경제민주화는 1년도 채 안 돼 ‘경제혁신’, ‘규제완화’로, 복지는 이제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전 국민이 애닳아 눈물 흘리고 ‘유민이 아빠’는 목숨을 건 단식까지 했지만, 사건의 진상을 찾기 위한 특별법은 우리의 눈 앞에서 침몰하고 있다. 모든 위기는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우자는 뜻) 집단이 만들어 냈는데 오히려 ‘민주화와 복지’ 쪽이 지리멸렬하고 있다. 후안무치, 적반하장 등의 말이 절로 튀어 나오게 하는 대통령과 여당의 인기는 여전히 압도적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지난 30년간 세계를 지배한 집단은 여전히 강력하다. 2009년 G20 등에서 거시건전성 강화를 위한 금융규제 제도가 속출했지만 실제로 손을 댄 건 손가락 개수를 넘지 못하고, 시민들의 세금으로 살아난 금융기관들은 또다시 버블의 달콤함을 한껏 누리고 있다.

그들의 ‘시장만능주의’는 사회 구석구석, 우리의 일상에 똬리를 틀고 여전히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몇십만권 팔렸고, 교황이 세월호 가족을 보듬을 때 우리 모두 열광했지만, 그리고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현실은 요지부동이다.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난 대선 때 경제민주화와 보편복지에 사실상 합의했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 앙등이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최상위 1%에만 적용되는 종부세에 ‘세금폭탄’이라는 딱지를 붙인 바 있다. 아이들이 무자비한 경쟁 속에서 죽어 가는 걸 보면서도 자립형 사립고 개혁이나 대학평준화와 같은 제도 변화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 보편복지에 찬성하다가도 누진적 보편증세라는 말을 들으면 갸웃 고개를 돌린다.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 피케티가 24살이던 1995년에 쓴 논문, <사회적 이동성과 재분배의 정치학>은 수수께끼의 열쇠를 제공한다(불행하게도 온통 수학이다). 왜 하위 집단이 자신에게 유리한 재분배 정책에 반대하는 걸까.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인근의 경험을 통해 사회이동성에 대한 판단을 하기 때문에 똑같은 경제적 지위에 속한 사람도 서로 다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보통 사람도 자신이 상위 집단으로 올라 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현재의 불평등 구조에 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추정을 뒷받침하는 연구가 최근 나왔다. 엥겔하트와 와그너가 쓴 <소득 불평등과 재분배에 대한 편향된 인지>를 보면 한국의 실제 사회이동성은 일본 다음으로 낮은데 자신의 사회이동성에 대한 믿음은 세계 1위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말 그대로 다이내믹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는 매우 사회이동성이 높은 사회였고 교육은 그 통로였다. 우리의 40~50대 이상은 스스로 그런 경험을 했거나 가까운 주변에서 숱하게 보았다. 해서 현실과 인지의 괴리가 세계 어느 곳보다 더 큰 사회가 된 게 아닐까.

현실에선 한국도 상위 10%가 전체 자산의 45%(이 수치마저 세금자료로 다시 계산하면 훨씬 높아질 것이다)를 차지하고 최상위 1%가 소득의 13%를 차지하고 있으며 양극화의 속도도 세계에서 제일 빠른 축에 속한다. 반면 사회 이동성은 급격하게 낮아지고 있다. 이것이 객관적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와 내 가족이 사회적 상승에 성공할 확률은 제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언론은 과연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리고 있을까. 혹시 우리는 1%의 호화판 삶을 친근하게 여길 정도로 대기업 실장, 성형외과 의사나 설계전문가, 그리고 ‘캔디’를 너무 자주 간접경험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언론인들이나 정치인, 전문가들 스스로가 최상위 1%는 아닐지라도 상위 10%에 속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 답답함의 일단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글은 PD저널에 기고되었습니다.


신고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4.08.29정태인/새사연 원장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마음을 움직였다.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와서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한 걸음 뗄 때마다 이 땅 위의 수많은 고통에 눈을 맞췄다. 특히 아직 원인조차 알 수 없어 참척의 아픔을 추스를 수 없는 세월호 유가족에 대해서는 각별했다.

교황은 한국에서도 ‘복음의 기쁨’(2013년 11월, 교황 권고문) 이래 그가 지속적으로 제기했던 사회 비판을 다짐하듯 되풀이했다. 현재의 사회구조는 ‘규제 없는 자본주의, 곧 새로운 독재’다. 한국에서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로, 그리고 다른 강론과 글에서는 ‘무한경쟁과 이기주의의 세계’ ‘배제의 모델’ ‘쓰고 버리는 문화’ ‘죽음의 문화’ 등으로 묘사된 바로 그 사회다. 

이 사회에서 노동자와 가난한 자는 착취와 억압의 대상을 넘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말 그대로 ‘잉여’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결코 경제성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교황은 낙수경제학(trickle-down economics)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시장의 절대적 자율성과 금융 투기를 거부함으로써, 또 불평등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한, 이 세계적 문제에 대한 해법은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경제정책은 개인의 존엄성과 공동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특히 국가가 정당한 재분배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사유재산은 그것이 공동선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정당하다.” 이런 주장은 물론 곳곳의 비판을 불러왔다. <폭스 뉴스>나 <월스트리트 저널>은 물론이고 <이코노미스트>마저 그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비난했다. 

그 다음으로 빈번한 비판은 교황의 얘기를 아르헨티나의 사례로 국한하려는 것이다. 국내의 교황 비판에도 곧잘 인용되는 미국의 가톨릭 신학자 마이클 노백의 논지가 대표적이다. 페론주의와 정실주의 때문에 빈부격차가 더 심해진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와 달리 미국에서는 노백의 할아버지처럼 무일푼 이주민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낙수경제학이나 규제 없는 자본주의에 대한 교황의 비판은 특수한 경험을 일반화한 결과라는 것이다.

확실히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과 유럽의 경험은 노백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쿠즈네츠의 ‘역U자 가설’(자본주의 초기에는 빈부격차가 심해지지만 노동자 계급의 처지가 향상되면서 격차가 완화될 것이라는 가설)이 나온 것 아니겠는가?

규제 없는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독재’는 전 세계 일반의 현상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부당한 낙인이 찍힌 또 한 사람,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특수한 경험에 입각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낙수경제학 또는 쿠즈네츠 가설이 성공적인 것처럼 보인 것은 20세기 초 두 차례 전쟁에 의한 대규모 파괴,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한 사회 개혁이라는 예외적 사건들 때문이었고 1970년대 이후 선진국 경제는 줄곧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려왔다는 사실을 장기 통계로 실증했다.

‘규제 없는 자본주의, 즉 새로운 독재’는 이제 전 세계의 일반적 현상인 것이다. 아르헨티나 등이 1970년대 이래 반복되는 위기를 겪은 것은 오히려 한 번도 빈부격차를 극적으로 해소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대로 대지주가 제조업을 소유한 동시에 금융자본가였으며 또한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교황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조건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것도 생생히 목격했을 것이다.

마이클 노백이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례로 든 한국도 마찬가지다. 광복 이후의 일본인 재산 몰수, 농지개혁과 6·25전쟁은 한국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은 신분 상승의 통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빈부격차가 심해진 나라이다. 

재·보궐 선거 압승으로 자신을 얻은 박근혜 정부는 규제 완화와 민영화로 일로매진하는 군사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9월 초면 피케티도 방한한다. 토마 피케티 역시 민주주의의 질식이야말로 경제적 불평등이 초래하는 가장 큰 해악이라고 주장한다. 세계적 슈퍼스타 두 사람이 똑같은 경고를 하는 것을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본 글은 시사IN Live에 기고되었습니다.


신고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4.08.18정태인/새사연 원장


미사 마지막 순서에 ‘성찬의 전례’가 있다. 줄 서서 사제가 나눠주는 얇은 밀가루 빵을 받아먹는 순서다. 나는 “그레고리오”라는 세례명을 지닌 엄연한 신자지만 이 의식엔 참여할 수 없다. 고백성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날라리 신자’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그런 자가 경제학을 좀 안다고 해서 감히 “교황의 경제학” 운운하는 것은 불경일 테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교황께서 “유민이 아빠”의 손을 잡았을 때,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새사연은 공식 번역이 나오기 전에 “복음의 기쁨” 2장을 한국어로 가장 먼저 옮긴 바 있고, 더구나 이교도마저 사랑으로 감싸는 교황이 아닌가? 

복음의 기쁨, 그리고 국내외에서 행한 강론들은 일관된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당대의 사회구조에 맞서 형제애의 공동체(즉 연대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번에 복자의 지위에 오른 순교자들은 조선후기의 봉건적 사회구조에 맞서, 사제 없이도 스스로 “연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교황은 그 행동이야말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일치시킨 것이라고 칭송했다. 즉 예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우리 마음속의 “우리”를 되찾는 길이다(칼리에리 강론). 이것이 곧 공공선, 진보, 발전이다.

둘째, 그렇다면 현재의 사회구조는 어떠한가? 바로 “규제 없는 자본주의, 곧 새로운 독재”(복음의 기쁨)다. 이 사회는 여러 강론에서 “비인간적인 경제모델” “무한경쟁과 이기주의의 세계” “배제의 모델” “쓰고 버리는 문화” “죽음의 문화” 등으로 묘사됐다. 여기서부터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생태 파괴가 비롯됐다.

셋째, “자본의 세계화”는 전 지구적인 차원의 사회구조라고 할 수 있다. 교황은 자본의 세계화를 “연대의 세계화”로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연대의 세계화는 모든 인류 가족의 전인적인 발전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넷째, 이런 국내외의 사회구조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가난이 만들어지고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소외되고 있다. “새로운 가난”은 “새로운 독재”에 조응하는 말일 것이다. 생산력은 충분한데도 빈부격차가 극심해지면서 생긴 사회적 배제를 말한다. 

다섯째, 하여 신자와 사제의 사명은 가난한 자의 편에서 당대의 사회구조와 맞서 싸우는 것이다. 특히 사제들은 거리로 나서야 한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은 착취나 노예, 그리고 다른 사회적 질병에 대해 공모하는 것이다. 침묵을 통해, 행동하지 않는 것을 통해, 무관심을 통해 우리들은 그것들과 공모하는 것”이다.

교황은 지난 5월9일 유엔 사무총장과의 만남에서 조금 더 구체적인 얘기를 했다. 개인과 국가, 국제의 모든 차원에서 우애와 연대의 정신이 과학적인 능력과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우애의 정신에 입각해서 가장 효과적인 제도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국가 수준에서는 “경제적 수익을 국가가 합법적으로 재분배하고, 동시에 사적 부문과 시민사회가 불가결하게 협동”해야 한다. 교황은 정신적, 도덕적 운동과 동시에 국내외의 제도 개선을 촉구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재·보선에서 대승하자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3월 이래 잠시 미뤄뒀던 규제완화, 투자활성화의 칼을 뽑아들었다. 지난 8월12일의 “6차 투자활성화 대책”은 앞으로 “기업 맞춤형”으로 규제완화가 일어날 것임을 보여주었다. 

교황은 연대와 공공선을, 대통령은 경쟁과 성장을 제도 개선의 지침으로 삼았다. 박 대통령에게 “규제는 없애야 할 암덩어리”인데 교황은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독재”라고 정의했다. 교황의 말씀이 맞는다면 박 대통령의 숙원이 이뤄지는 순간 우리는 정치와 더불어 경제에서도 독재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비록 예포와 예도라지만 대포와 칼로 교황을 영접한 것일까?

 


 

*본 글은 경향신문에 기고되었습니다.


신고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4.08.14정태인/새사연 원장

 

 

안녕하세요? 경제 흐름을 읽어 드리는 프레시안 도우미 정태인입니다. 지난 7월 24일 최경환 부총리가 새 경제정책팀의 "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거시 정책을 확장적으로 운용하겠다"는 말로 요약되는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했습니다. 

 


'부채 주도 성장 정책'

우선 주택기금이나 신용보증기금 등에서 대출을 일으켜 8.5조 원을 공급하고 산업은행, 기업은행 등의 정책금융을 10조 원 늘리는 등 총 41조 원에 이르는 돈을 동원하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부채로 돈을 공급하겠다는 겁니다. 

같은 날, 한국은행은 2분기 실질국내총생산이 1분기에 비해 0.6%(2013년 2/4분기 대비 3.6% 증가) 증가했다고 발표했습니다. 

 

 

 ▲ 2014년 2/4분기 실질국내총생산(속보) ⓒ한국은행

▲ 2014년 2/4분기 실질국내총생산(속보) ⓒ한국은행

 


프레시안 독자들은 분기마다 위 표를 보셔서 이제 익숙하실 겁니다. 1/4분기의 0.9%에 비해 성장률이 둔화된 것은 주로 민간 소비가 0.3% 감소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말씀 드린 대로 정부가 성장률을 전망할 때 소비증가율을 3%로 상정한 건 몇 년간 반복해서 저지른 잘못입니다. 정부는 세월호 참사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2012년부터 민간 소비 항목을 보면 매 분기 1%를 넘은 적이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한은이 지난달 25일 발표한 '소비자동향조사 결과'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7월 소비자심리지수는 105로 전월보다 2포인트 하락했는데, 특히 현재와 비교한 6개월 후의 경기 전망인 향후경기판단 CSI는 92로 지난달의 98과 비교해서 6포인트나 떨어졌습니다. 앞으로도 소비는 늘어나지 않을 전망이라는 거죠. 즉 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건데 가계 부채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편 기업의 지출인 설비 투자가 증가로 돌아서긴 했지만 1.3%로 미약하고 지식재산생산물 투자는 4.2% 감소했습니다. 기업이 미래를 불확실하게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지금 확장 정책을 써야 한다는 점에 저도 동의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돈을 모아 어디에 쓰느냐는 거겠죠. 이번 발표는 기금과 정책금융에서 대출로 돈을 공급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정책을 '부채 주도 성장 정책'이라고 합니다. 

 

 


▲ 박근혜 대통령과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대출로 돈을 공급하는 일명 '부채 주도 성장 정책'을 통한 경제 살리기에 나섰다. ⓒ연합뉴스

▲ 박근혜 대통령과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대출로 돈을 공급하는 일명 '부채 주도 성장 정책'을 통한 경제 살리기에 나섰다. ⓒ연합뉴스

  


지난 30년 동안 세계는 한편에서는 수출 주도 성장 정책을,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부채 주도 성장 정책을 써 왔습니다. 예컨대 동아시아가 수출 주도 성장 정책을 쓰고 미국이 빚으로 그 물건을 사서 성장을 유지한 거죠. 유럽의 경우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들이 수출 주도형이고 지난 2011년 이래 위기 상태에 빠진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이 부채 주도형입니다.  

물론 한국은 대표적인 수출 주도형 국가입니다. 하지만 세계 경제의 회복세가 지지부진하고 원화 절상 압력 때문에 앞으로 수출이 과거처럼 두 자릿수로 증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위 표를 보면 분기별 수출 증가율이 2% 안팎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따라서 내수, 즉 소비와 투자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건 올바른 방향입니다. 문제는 가계 소득을 어떻게 늘릴 것인가인데, 이번 발표는 부채를 통한 내수 진작, 그것도 건설 투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부총리 인사 청문회 때도 말씀드렸듯이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한 토건족이거든요. 

 


기업소득의 가계 환류?

한국의 가계는 빚투성이지만 기업은(사실은 일부 재벌은) 부자입니다. 최경환의 경제학에서 눈길을 끈 것은 '가처분소득의 증대'를 위해 기업의 이익을 가계로 흘려보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 개의 '패키지 정책'이 발표됐는데, 첫째는 근로소득 증대 세제입니다. 최근 3년 평균 임금상승률을 초과해서 임금을 올린 기업에게 초과분의 10%(대기업은 5%)를 세액공제해 주겠다는 겁니다. 기업의 임금 인상분 중 일부를 국민의 세금으로 보조하겠다는 얘기죠. 대체로 노조가 강한 대기업의 노동자가 대상이 될 텐데 그 액수도 기껏 1000억 원에 머무를 것이랍니다. 어쩌면 기업들이 이 보조금 혜택을 받기 위해 앞으로 1,2년 동안은 임금 인상률을 낮추거나 심지어 인하할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는 기업의 이익을 일정 수준 이상 인건비나 투자에 사용하지 않는 경우 기업소득 환류세를 물리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기업들이 반발하죠. 그러자 최 부총리는 새로 부과되는 세금의 총액이 그동안 내려준 법인세 이상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기업이 토지를 구입하는 경우도 투자로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부동산 규제 완화와 더불어 대기업의 비업무용 토지가 확대될 게 뻔합니다. 

세 번째는 기업의 배당을 촉진하기 위한 배당소득 증대 세제입니다. 이 돈은 물론 금융 자산가들에게 돌아가는 몫이죠. 특히 배당소득을 금융종합과세에서 분리하겠다니 대자산가들은 많게는 수십억, 수백억의 혜택을 볼 수 있을 겁니다. 

한편, 진정한 가계소득 증대 정책이라고 볼 수 있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한 지원 등 비정규직 관련 대책은 10월로 미뤘습니다. 현재의 침체에서 벗어날 길은 하층의 소득이 늘어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최 부총리가 발표한 '기업소득의 가계 환류'는 기업의 현금 유보를 부자들에게 이전해서 소비를 늘리도록 하는 정책입니다. 특히 땅이나 주택을 구입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죠. 

 


결론은 부동산 투기 

저처럼 오래 정책을 들여다본 사람은 어떤 정책이 곧바로 시행될 정책이고 어떤 게 그저 구색을 갖춘 것인지 직감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번 발표의 핵심은 주택담보대출비율(LTV)와 부채상환비율(DTI)의 완화, 그리고 주택공급 규칙의 전면 재검토, 재건축·재개발 규제 개선 등입니다. 한마디로 가계 대출을 늘려서 주택의 수요를 증가시키는 동시에, 규제 완화로 공급도 늘리겠다는 겁니다. 주택 투기 수요에 의해 건설 붐을 일으키겠다는 거죠. 

이 면에서 그의 정책은 수미일관합니다.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이 곧 규제 완화라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최경환 부총리는 그런 규제 완화의 시범을 주택 부문에서 먼저 보이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여기에 5조 7000억 원에 이르는 평택-부여고속도로, 수도권 광역급행철도 건설도 덧붙었습니다. 

즉, 그의 내수 확대란 주택과 공공에서 대규모 건설 붐을 일으키겠다는 것이고 가계소득의 증대는 주로 상층의 호주머니로 향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기업이건 가계건 빚이 늘어날 겁니다. 지금도 가계 부채에 허덕이는 중산층 이하의 서민들이 이런 투기 붐에 동승할지는 미지수입니다만 소득이 늘어난 상층의 주택 구입이 증가할 것은 거의 분명합니다. 중하층은 대출 규제 완화에 힘입어 전세금 인상분을 충당할 텐데, 이 돈 또한 부자들에게 들어가는 거죠. 

최경환 부총리가 인사 청문회 때 정책 기조의 변화라고 말한 건, 실은 과거의 수출 주도 성장 정책에 부채 주도를 덧붙인 것뿐입니다. 금리 인하에 의해 돈을 풀고 각종 규제 완화에 의해 투기를 부추기면 단기적으로 경제가 성장할 겁니다. 하지만 이미 한계에 이르러 소비를 줄이고 있는 중하층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미국처럼 경제는 성장하는데 국민소득 증가분은 거의 모두 상위 1%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업의 부채가 증가하면 갑작스러운 쇼크로 수출이 감소할 때(예컨대 미국의 현재 거품이 꺼지거나 중국의 성장률이 더 낮아지면) 대기업들도 휘청거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침체가 위기로 바뀌게 되겠죠. 이미 무능함을 증명한 박근혜 정부는 말기에 대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욱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는 건, 경제 정책에서 새누리당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새정치민주연합의 무능과 무기력입니다.  

 

 

 


*본 글은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의 칼럼지인 <프레시안 뷰>에 기고되었습니다.



신고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2014.08.12정태인/새사연 원장


원래는 교황의 방한에 맞춰 ‘교황의 경제학’에 관해 쓰려고 했다. 몽골 출장 길, 비행기 안에서 읽은 자료도 그랬다. 작년 11월 ‘복음의 기쁨’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낙수경제학(부자들의 돈이 넘치면 가난한 이들도 잘 살게 된다)은 엉터리”라고 선언한 이래 경제학자나 저널리스트들이 뭐라고 언급했는지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온갖 험담이 쌓여 있다.

 

하지만 불과 3박 4일 만에 돌아온 이 땅에서 경제 얘긴 그저 한담에 불과했다. 세월호 특별법 여야 합의,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의 인터뷰, 그리고 이른바 ‘486 정치가들의 조선일보 인터뷰(8월 9일자)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절망스러웠다.

 

이들은 ‘중도’에서 회생의 길을 찾았다. 선거에서 중도를 취하는 건 분명한 이론적 근거를 가진다. 4㎞ 쯤 되는 골목에 살림살이가 고만고만한 집들이 100m에 하나씩 있다고 하자. 여기에 어슷비슷한 두 개의 상점이 동시에 들어선다면 어디에 가게를 세울까?

 

답은 골목의 정중앙, 즉 2㎞ 지점에 나란히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물건의 종류와 질이 비슷하다면 가까운 가게에 들를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호텔링의 주장이다. 정치학자 다운스는 중위투표이론에 연결시켰다. 선거도 마찬가지여서 좌우의 정당들은 가운데 쯤 위치하는 유권자를 유혹하기 위해 중도의 정책을 내 놓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 <조선일보> 8월 9일자 8면 기사. 

▲ <조선일보> 8월 9일자 8면 기사.

 

 

그래서 그런 것일까. 임종석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야당은 노선이나 정책이 상당히 치우쳐 있다”며 “과도하게 사회·정치적 문제에 집착하고 국가 운영과 관련된 의제에는 소홀하다”고 말했다. 투쟁현장에 신출귀몰해서 홍길동으로 불렸던 전대협 의장, 34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이미 재선 국회의원을 한 바로 그 사람 얘기다. <조선일보> 기자가 “중도를 지향해야 한다는 뜻이냐”고 확인하자 그는 “선명성을 강화해야 한다는 진단 자체가 작위적이고 엉터리”라고까지 했다.

 

과연 그가 몸을 담았던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통합민주당’, 그리고 ‘새정치민주연합’이 ‘중도’가 아니라서 그 동안 연전연패했다는 말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그리고 안타까운 죽음에 의한 승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486자신들이 톡톡히 덕을 본 그 승리가 중도 때문이었다는 말인가.

 

정치와 정책에는 뚜렷한 방향이 있기 마련이다. 만일 정당들의 방향이 일치한다면 호텔링과 다운스의 모델이 설득력이 있겠지만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리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의 희망을 북돋았기 때문에, 비스듬한 운동장에서도 이길 수 있었다.

 

 

 ▲ 세월호 가족대책위가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정치민주연합 당사에서 새누리당과 합의한 세월호 특별법 철회를 요구하며 점거농성을 하고 있다. ⓒ노컷뉴스 

▲ 세월호 가족대책위가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정치민주연합 당사에서 새누리당과 합의한 세월호 특별법 철회를 요구하며 점거농성을 하고 있다. ⓒ노컷뉴스

 

 

임 부시장은 “민생만 얘기하고 성장을 말하지 않는다”, “안보에도 관심이 없다”고 탓한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성장과 안보 면에서 더 나았다. 노 대통령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등으로 더 오른쪽으로 가서 재신임을 못 받았을 뿐이다.

 

나아가서 현재와 같은 장기 위기 때는 민생을 살리는 길이 곧 경제를 살리는 길(소득주도성장)이요, ‘햇별정책’, ‘동북아 구상’이 곧 우리의 안보를 지키는 길이다. 아서라, 말아라, 이런 커다란 정책기조를 구상할만한 능력은 없다고 치자.

 

그렇다면 세월호 협상에서 중도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적어도 세월호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는 알아야 대책을 세우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유가족들이 이 정도면 우리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알 수 있겠다고 믿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13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을 가지고도 역부족을 탓하면서 유가족과 상의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땅따먹기 조금 하면 ‘공감의 정치’가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게 중도인가.

 

참다못해 새정치연합 당사로 들어간 유가족들은 이렇게 울부짖는다. “우리 아이들의 죽음이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는 길은,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법은 우리 모두의 법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저희에게 남긴 숙제입니다.”

 

 

 

 

 * 본 글은 PD저널에 기고되었습니다.



신고
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