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사연 미디어센터에서는 최근 이슈의 쟁점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보고서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본 보고서는 슬라이드형태로 상업적인 목적을 제외하고 출처를 표시하시면 자료 활용이 가능합니다. (편집자 주)     

                         


2014년 예산안으로 본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

반듯한 시간제 일자리란? 
박근혜 정부가 고용율 70% 달성을 위해 제시한 새로운 일자리. 새로 증가되어야 할 취업자 238만명 중 93만명을 시간제 일자리를 통해 채용할 예정 (파트타임 식의 일자리)
2014년 예산 중 시간제 일자리 관련 예산 101억원 227억원 일자리 창출 지원 사회보험료 지원 총 328억
    - 반듯한 시간선택제 일자리 창출 지원 월 인건비 60만원에서 80원 인상, 컨설팅 등 지원, 총 227억원 
   - 상용형 시간선택제 일자리 사회보험료 지원 300인 미만 사업장에서 채용시, 국민연금 4.5%, 고용보험 0.9% 지원, 총 101억원

* 무엇이 문제인가 
1. 현실반영이 미비한 정책 
   - 현재 시간제 일자리 노동자들의 현황, 월 평균 65만원 수준
   - 사회보험 지원도 제대로 못 받는 현실 
   - 민간부문에 반영이 어려움 인건비 비중이 큰 중소기업의 경우, 정부의 지원금 없이는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유지 할 수 없음
2. 우선수위가 고려되지 않은 정책 
    - 시간제 노동자의 꾸준한 증가, 문제는 지금의 차별
      어떤 차별? 앞서 언급한 임금, 사회보험 등의 차별과 함께, 고용이 불안정하고 전일제 노동자에 비해 일하는 시간이 적어 승진, 교육훈련이 제한됨. 따라서, 시간제를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이 먼저!
3. 노동의 질을 악화시킬 수 있는 정책 
    - 저소득은 물론, 승진과 교육훈련에 제한이 있는 시간제 일자리가 좋은 양질의 일자리가 될 수 없음. 구체적인 일자리 구성과 지속적인 지원없이는 양적인 시간제 일자리만 생산하는 꼴. 독일의 시간제 일자리인 미니잡의 경우에도 노동의 질을 악화시켰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음.

*해외에서의 시간제 일자리 
정부가 우수하다고 꼽는 네덜란드 
1. 시간제와 상용직 일자리의 임금차이 적음 
2. 사회보험 지원의 차이가 없음 
3. 기타 사회보장시스템 우수

* 정책적 제언 
1. 현 비정규직, 시간제 일자리의 질적 수준 제고
 2. 중소기업 지원 방안 시스템 구축 및 대기업 규제
3. 사회보장시스템 지원 수준 확대
4. 경제의 선순환 구조 재구성 최저임금 및 임금인상 좋지 않은 생산성 향상 비정규직 축소 및 일자리 개선 양질의 일자리 창출


. • 연구 : 김수현 연구원 sida7@saesayon.org 
• 연구 원문 : http://goo.gl/yGjV5x 
• 제작 : 미디어팀 media@saesay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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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 06 / 28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200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오스트롬 추모 : 공유의 비극을 넘어
보고서 원문을 보시려면 위의 제목을 눌러주시면 됩니다.

 

이 글은 2012년 6월부터 27일 열린 새사연 정태인 원장의 강연 <200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오스트롬 추모 : 공유의 비극을 넘어> 에서 배포된 자료입니다.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에 대한 소개와 그의 노벨상 수상 소감을 정리한 글입니다. 사진을 포함한 더 많은 내용은 보고서 원문을 다운 받으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미국의 여성 정치학자이자 경제학자이다. 1933년 8월 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출생하여 2012년 6월 12일 미국 인디애나주 블루밍턴에서 췌장암으로 별세하였다.

1951년 베벌리힐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UCLA에서 1954년 정치학 학사, 1962년 정치학 석사, 1965년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정치과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인디애나 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석좌교수로 재직하였다. 2006년부터는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에서 연구교수를 겸임하였다.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남편 빈센트 오스트롬(Vincent Ostrom)과 함께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2009년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오스트롬을 수상자로 선정하며 "경제 지배구조(Economic governance) 분석을 통해 공공의 자산이 다수의 경제 주체들에 의해 어떻게 성공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그가 주도적으로 설립한 연구소들로 인디애나 대학교의 The Workshop in Political Theory and Policy Analysis 와 애리조나 주립대학교의 Center for the Study of Institutional Diversity 이있다.

 

오스트롬이 직접 소개하는 자신의 삶

저는 1933년 8월 7일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대공황을 겪으며 자랐습니다. 다행히도 당시 우리 집에는 채소와 과일을 기를 수 있는 큰 텃밭이 있었어요. 저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어떻게 야채와 살구, 복숭아가 자라나는지를 배우며 자랐습니다. 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전쟁을 나간 남성들을 위해서 스카프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어린시절 동안은 전통적으로 소녀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겨졌던 일들을 배우며 지냈습니다. 저의 주된 여가활동은 수영이었습니다. 수영팀에도 들어갔고, 수영대회에도 나갔어요. 대학 학비를 모으기 위해 수영 강사도 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우리집은 비버리힐스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저희 어머니는 저를 비버리힐스고등학교에 보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토론반에 들어가게 되었고, 우리 주에서 열리는 토론 대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토론을 배우는 것은 나만의 사고방식을 형성해가는 초기 단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공공정책 문제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배웠고, 그 두 측면을 모두 옹호하고 또 비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수영팀에 참여했던 것과 함께 토론반에 참가했던 것은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비버리힐스고등학교는 부자 학교였는데, 그 곳에서 가난한 학생이었던 나로서는 학교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미래에 대한 다른 전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비버리힐스고등학교의 학생 중 90%는 대학에 갔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 후 대학에 가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가족들과 가까운 친척 중에 대학에 간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대학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지요. 하지만 제 어머니는 저의 대학 진학에 필요한 학비를 지원해주실 생각이 없었어요. 어머니 스스로도 고등학교 때까지만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셨죠. 다행히도 당시 UCLA는 등록금이 매우 낮았어요. 저는 도서관, 서점, 잡화점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어요. 입학 후 사화과학 전반을 배웠는데 여름 계절학기를 여러 과목 듣고, 추가 과정을 듣는 방식을 통해서 빚을 지지 않고 3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에 ‘신입생을 위한 경제학(Freshmen Economics)’ 수업을 들을 수 있었어요.

졸업 후 일자리를 찾으면서 고용주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타이핑을 잘 치는지, 속기 자격증을 갖고 있는지 등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여성을 위한 직업은 비서 또는 초등학교나 고등학교의 선생님 정도였거든요. 저는 통신교육 강좌를 통해 속기를 배웠어요. 회사에서 상사의 말을 받아쓰기 위해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훗날 연구 프로젝트에서 면접 인터뷰를 진행할 때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다행히 커다란 사무회사에서 전문 구매자(Export Clerk)로서 1년 정도 일한 후,  비서 외에는 여성을 고용하지 않는 사업체에서 인사관리 부담당자(Assistant Personnel Manager)로 일을 했어요. 저는 이런 일자리를 통해 이십대 초반에 매우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거절당해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어죠. 이는 나중에 대학원을 가고, 박사학위를 딸 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경제학 박사가 되고 싶어 UCLA 경제학과에서 수업을 들었지만, 저는 매우 위축되고 말았습니다. 우선 저는 이전에 수학을 배우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고등학교 때는 다들 여자 아이가 대수학과 기하학을 넘어서는 수학을 배울 필요는 없다고 말했거든요. 경제학과에서의 수업은 결국 제가 그 바깥에 있는 비주류경제학을 찾아서 박사과정을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럴수록 박사 학위를 따는 것에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그 당시 정치학 또한 박사과정에 여성을 받아들이는 것에 회의적이었어요. 오직 시립 대학에서만 여성을 박사로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 조차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UCLA도 학교의 평판을 위해 저를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40명의 정치학과 대학원생으로 다른 3명의 여성과 함께 입학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여성을 학교에 받아들이고, 조교로서 일하게 한 것에 대해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함께 공부하는 남자 동기들은 친절했고, 우리를 격려해주었지요.

1961년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해 저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물 산업에 대해 연구하는 팀에 들어갔습니다. 빈센트 오스트롬, 찰스 티보트, 로버트 워런 등이 함께 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지하수를 사용하는 집단들의 정치경제를 분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태평양 해안을 따라 다수의 도시들이 배치되어 있는 서부 지역을 연구했어요. 로스앤젤레스 시티에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상당부분은 저수지역이 중첩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연구하는 것이 공유자원 문제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물 사용자들이 자원을 관리하는데 직면하는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965년 박사논문을 제출했습니다. 당시는 1968년 가렛 하딘(Garrett Hardin)이 사이언스 지에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을 선보이고, 1965년 맨서 올슨(Mancur Olson)의 책 <집단행동의 논리(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가 출판되던 시기였습니다. 1965년 빈센트는 블루밍턴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전임 교수라는 매력적인 자리를 제안 받게 되죠. 하지만 당시에 여성을 교수로 쓰려는 학교를 찾기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저는 항상 빈센트에게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다행히도 나중에 인디애나 대학교의 정치학부에서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아침 7시 30분에 ‘미국 정치 입문(Introduction to American Government)’이라는 강의를 가르칠 사람을 필요로 했고, 저에게 방문 조교수(Visiting Assistant Professor) 자격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신입생들을 가리키며 1년이 지난 후 대학은 대학원생 조언자(Graduate Advisor)를 맡아주면 정규 교수로 채용하겠다고 제안했어요.

인디애나 대학교에서 첫 15년 동안의 연구는 미국 전체의 경찰치안산업(police industry)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분야를 연구했던 많은 학자들이 같은 도시 안에서 다양한 주체들이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황에 대해 혼란스러워했어요. 그들은 이것이 서비스의 무질서한 분배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연구 결과 미국의 거대 도시들에서 다양한 서비스 주체들의 존재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100명이 넘는 인력을 가진 경찰서라고 해서 20~50명을 보유한 중소규모의 경찰서를 능가하는 성과를 내는 것은 아니었어요. 순찰, 교통 통제, 범죄수사, 민의해결 등 모든 면에서 그러했습니다.

이후 저는 공유지 연구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무엇을 연구하는지 확실히 인식하고 있었어요. 국가연구위원회(National Research Council)에서는 1980년대 중반 공유자원에 관한 실증 연구를 검토하는 특별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공유자원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수행되었지만 분야나 부문, 지역에 따라 제각각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해안의 어장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아프리카의 다른 자원에 대한 연구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경제학자들의 연구를 알지 못했고, 경제학자들은 사회학자들의 연구를 알지 못했습니다. 국가연구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이제까지 곳곳에서 수행되었지만 종합되지 못했던 거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는 것은 저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현대 미국 대학교의 조직 체계는 우리의 지식을 쪼개놓는다는 점에서 좋지 않습니다. 학문 분야에 의해서 뿐 아니라 학자들의 연구방식에 의해서도 나뉘어져 있습니다. 통계 자료를 이용하는 경제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현장 연구를 하는 학자들은 통계를 이용하는 학자들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매우 운 좋게도 저와 빈센트 오스트롬은 1970년대 초에 다른 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함께 효율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센터를 세웠습니다. 빈센트는 이 센터에 정치이론과 정책분석 워크샵(Workshop in Political Theory and Policy Analysis)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는 워크샵을 통해 과학을 바라보는 다양한 철학적 관점이 더 가깝게 연결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워크샵은 항상 경제학, 정치학, 그 외 다른 분야에 걸쳐서 다양한 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환경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제도적 조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제도적 조정을 통해 도시의 경찰치안 대행자, 관개시설, 숲 자원의 관리 등을 이룰 수 있는지 깊이 있는 연구를 했어요.

워크샵의 철학은 매우 큰 국제적 프로그램으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는 숲의 환경과 그것을 관리하는 방식에 대해 연구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이 연구가 미국 학자들만으로 진행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다양한 국가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현장을 방문하는 것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숲 자원 관리에 관심이 있는 여러 국가의 학자들과 함께하는 네트워크를 개발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수 년 동안 작업해온 자료를 사용하는데 필요한 매우 수준높은 훈련을 할 수 있었어요. 또한 우리는 계속해서 방법을 찾고 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각 지역의 학자들이 만나는 지역 모임을 장려해 왔습니다. 그리고 2년마다 전체 네트워크가 만나면서 서로 계속해서 배워가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저 자신의 연구 결과를 강변하고 싶다면, 도서관이나 협회에 연구 자료를 배치하면 끝입니다. 굳이 워크샵 내에서의 동등한 교류를 추구할 필요가 없죠. 그러나 현장과 실험실에서 어떤 이론을 이해하고 테스트하고자 한다면, 그래서 세계에 퍼져있는 다양한 제도적 조정을 진실로 깊이 있게 연구하고 싶어 한다면, 다양한 지역과 다양한 지위에 있는 동료들과 함께 연구하는 것이 가장 과학적인 방법입니다. 우리가 연구에 사용했던 이같은 방식은 <함께 일하기 : 집단행동, 공유자원, 다중적 실천(Working Together: Collective Action, the Commons, and Multiple Methods in Practice)>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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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하락으로 중소기업들은 떨고 있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1100원대 초반으로 2008년 9월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전면화 된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수출업체들의 환차손 위험 커지고 있다. 물론 상품의 국제거래에 있어 환율 차이에 의한 환차익/환차손이야 늘 상존하기에 많은 수출업체들은 환차손을 방어하기 위해 환해지를 한다. 대표적인 환해지 방법이 바로 달러 선물환매도 거래이다. 환율이 더 떨어지기(원화 평가절상) 전에 미리 수출대금으로 들어올 달러를 파는 것이다. 아래 그림의 왼쪽은 최근 3년간 원/달러 환율 변동 그래프고 오른쪽은 최근 1년 사이의 그래프이다.

<지난 3년간 원/달러 환율 변동>                     <지난 1년간 원/달러 환율 변동>

원/달러 환율은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시작됨에 따라 급격히 상승하였다. 2007년까지 1000원 위아래로 움직이던 원/달러 환율은 위기가 전 세계로 퍼진 시점에는 1600원까지 위협하였다. 당시 환율의 급격한 상승을 예측하지 못한 많은 중소기업들은 2007년 보다 원/달러 환율이 더 하락할 것이라는 금융기관들의 전망에 따라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환해지 상품에 가입하였다. KIKO와 같은 환해지 파생상품이다. 그러나 미국 발 금융위기로 원/달러 환율은 급격히 상승하였고 KIKO라는 상품의 특성상 Knock In 구간을 초과할 경우 환차손의 2-3배를 은행에 지급하게 되어 천문학적인 환차손을 입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출을 잘 하고도 환해지를 잘 못 하여 파산한 소위 흑자도산 기업이 속출하였다. 대표적인 기업이 태산LCD이다. 태산LCD는 설립한 지 25년 된 중소기업으로 LCD 광원장치인 백라이트유닛(BLU)을 만들어 주로 삼성전자에 납품하는 업체였다. 2009년 상반기에 매출 3441억 원, 영업이익은 전년도인 2007년 상반기에 비해 8배가 넘는 114억 원을 기록하는 등 양호하고 장래가 촉망받는 중소기업이었다. 그럼에도 환차손을 방어하기 위해 KIKO 상품에 가입했다가 엄청난 손실을 보고 결국 2009년 9월 16일 법원에 파산신청을 하였다. 가만히 있었으면 급격히 오른 원/달러 환율에 의해 오히려 환차익을 볼 수 있었음에도 잘못된 환해지도 기업이 무너진 것이다.

2010년 4월 16일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최근 급격한 원/달러 환율의 하락에도 불구하고 수출기업들의 환위험 해지 수요가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 원인으로 2008년 이전 KIKO와 같은 투기성 환해지 상품에 가입했다가 엄청난 손실을 입었던 점이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최근 신용평가회사 무디스의 우리나라 국가 신용등급 상향과 중국 위안화 절상 가능성, 싱가포르 중앙은행의 통화 절상 방침, 외국인의 주식 매수세, 무역수지 흑자 행진 등으로 원화의 수요가 높아지고 강세가 예상됨에 따라 추가적으로 환율이 더욱 떨어진 전망이 우세해 수출업체들의 환차손이 예상되고 있음에도 중소 수출기업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실정이다.

환율이 더 하락하면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겠지만 어느 정도의 환율 수준이 적정한가의 문제는 여전히 논란거리인 만큼 중소기업들의 고민은 커져만 갈 수밖에 없다. 경제위기 시장에 환율은 내맡기는 자유변동환율제도를 채택한 조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외환시장의 안정성을 위해 환율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제기가 많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은 하나의 대안으로 관리형변동환율제도인 바스켓밴드크롤제도를 이야기한 바 있다. 환율 변동의 상한선과 하한선을 지정하고 그 범위를 넘어설 때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여 환율을 안정화시키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시장 참가자들에게 정부 개입의 시점을 예상하게 하고 정부 대응의 신뢰를 높이는 측면이 있어 현재의 자유변동환율제도에 비해 훨씬 안정적인 제도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환율제도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는 정부 부처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세계는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장의 안정성과 부채 줄이기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은 정 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OCED 국가 중 위기 이후 경제회복 속도가 1위라고 하지만 중소기업들은 눈앞에 놓인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너무 빠른 속도는 사고를 불러오기도 한다. 지금은 속도보다 안전한 운전이 더 중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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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시 무디스인가?

출처 http://www.ibtimes.co.kr/article/news/20090209/5693797.htm

지난 14일 무디스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올렸다는 소식에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은 곧바로 반응했다. 코스피지수는 올해 최고치인 1735.33까지 뛰어올랐고, 원화 가치도 2008년 9월 이후 최고로 올랐다. 무디스는 이번 조치에 대해 “한국이 세계 위기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자를 잘 억제하면서도 다른 나라와 차별적인 경제 회복력을 보여준 결과”라고 설명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가 않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무디스를 비롯한 이른바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의 신용과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결국 다시 무디스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때 ‘금융 연금술’이란 말을 낳을 정도로 경이로운 금융 기법으로 평가 받던 ‘증권화(securitization)’(또는 자산유동화)의 과정에서 이들 신용평가사들의 역할은 컸다. 나중에야 밝혀진 일이지만 위험하기 짝이 없는 유동화 증권에 높은 신용 등급을 매겨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가도록 한 것이 바로 이들 신용평가사들이기 때문이다.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중심에는 리먼브라더스, 베어스턴스, JP모건, 골드만삭스 등 몇몇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거대 투자은행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산유동화를 위해 앞다퉈 특수목적회사를 세우고 MBS(주택담보증권), CDO(부채담보증권)라는 이름의 금융 파생상품들을 만들어냈다. 복잡한 수학과 물리학 수식 안에 가려지긴 했지만 이들 증권 안에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라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숨어 있었다. 훗날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금융 빅뱅의 뇌관이었던 셈이다.

무디스를 비롯한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이러한 파생상품에 높은 신용등급을 부여했고 그 덕에 높은 수익률에 눈이 먼 헤지펀드들은 전 세계에서 엄청난 자금을 끌어들여와 기꺼이 투자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한때 무디스 이사를 지냈던 제롬 폰스는 지난해 3월 <뉴욕타임즈>에 기고한 글에서 이들 신용평가사들의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신용평가사들은 금융위기가 이미 정점을 넘어선 시점에서도 서브프라임 관련 증권에 대해 최고 등급인 AA 등급을 유지했으며, 2008년 리먼브라더스가 도산하기 불과 1개월 전에도 A등급을 유지했다. 대규모 손실로 공적자금을 지원받아야 했던 AIG에게는 이보다 높은 AA등급이 주어지기도 했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무디스는 2001년 회계 부정으로 파산을 맞은 세계 최대 에너지 기업 엔론사에 대해 나흘 전까지도 ‘투자적격’ 등급을 부여해 투자자들에게 엄청난 손실을 끼친 일이 있었다. 당시 무디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지만 이들은 바로 이듬해에 역시 회계 부정으로 파산을 맞은 월드컴사를 상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똑같은 행태를 되풀이했다.

결국 지난해 9월 미국 의회에 이들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규제 법안이 제출되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신용평가사들의 평가 방법과 절차에 대한 규약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과 더불어 신용평가 대상 기업으로부터는 어떠한 서비스 비용도 받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비슷한 시기 G20 정상회의에서도 추상적이나마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규제와 관리 감독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평가 대상 기업들에게 컨설팅 서비스 등을 제공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고, 평가의 방법과 근거도 불투명할 뿐이다.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무디스의 이번 조치로 한국의 신용등급은 33개월 만에 외환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그렇다면 과연 33개월 전 한국의 신용등급을 무려 10등급까지 끌어내린 신용평가사들의 조치는 정당했을까.

1997년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직전 한국의 신용등급은 무디스 A1, S&P AA-, 피치 AA-로 선진국과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외환위기가 일어난 지 두 달 사이에 무디스는 신용등급을 6등급 아래로, S&P는 10등급 아래로 끌어내렸다. 한국의 국채가 두 달 만에 ‘정크 본드(jung bond, 투자 가치가 없는 쓰레기 채권)’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외국 자본은 순식간에 빠져나갔고, 외환보유고가 바닥난 우리 앞에는 엄청난 빚 독촉장이 쌓여있었다. 결국 그해 12월 3일 한국은 IMF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 경제와 우리의 삶으로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파도가 밀려드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한 나라의 신용등급이 이렇듯 짧은 시간에 내려앉는 일은 적어도 당시까지만 해도 유례가 없었을 뿐 아니라, 같은 시기에 외환위기를 겪은 태국과 인도네시아와 비교해도 지나치게 가혹한 조치였다는 사실이다. 이들 신용평가사들이 내리는 신용평가의 공정성, 나아가 정치적 의도까지도 의심할 수밖에 없게 하는 대목이다.

이들 신용평가사들이 수많은 기업들에 컨설팅 서비스 등을 제공하며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국가 기관이 아니라 영리를 추구하는 민간 기업들일 뿐이다. 30여 년 전인 1975년 미국증권거래소가 무디스, S&P, 피치 등 3개 신용평가사를 공식 평가사로 지정한 것이 이들이 성장할 수 있던 배경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이들의 역할과 권한은 어디까지나 미국 안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금융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전 세계의 기업으로, 또 국가들로 평가의 대상을 늘려갔고 그에 따라 이들의 힘도 자연스럽게 커져갔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엄청난 힘에 걸맞는 책임은 뒤따르지 않고 있다.

먼 곳에서 우리 살림살이가 나아졌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 정작 나라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가계빚이 1년 사이 32조 8000억 원이나 늘었다며 불안감을 드러냈다(국회 정무위 보고). 이번 조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그밖에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의문이 그들이 내뱉는 ‘신용 평가’ 안에 머물러야 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힘겹게 지나온 오늘, 우리는 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지난 30여 년 간 확장돼온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 패러다임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더불어 신용평가사들에 대한 실효성있는 공공의 감독과 규제, 과점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경쟁 구도의 보장, 나아가 공공 신용평가기관의 설립 등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필요하다. 그것이 글로벌 금융위기가 남긴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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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새사연 미디어센터